2011-05-15

호세 루이스 게린과의 인터뷰


진행자 게이브 클링거(Gabe Klinger)

1975년에서 1982년 까지 11편의 단편과 중편 그리고 장편 영화를 8mm와 16mm로 제작하셨습니다. 지금의 영화와 관련해 이러한 초기 작품들의 스타일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게 있어 영화는 어떻게 입문하고 배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춘기 땐 영화가 거의 종교나 다름없었죠. 영화는 세상 및 주변 사람들과 교감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저의 첫 단편들은 – 사실 볼품없는 영화들이지만 – 세상과 문화에 대한 탐색에서 나온 결과물입니다. 프랑코 체제 하에 있을 때였고 당시 스페인은 문화의 불모지였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합니다. 미국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절대로 볼 수 없던 때였죠. 모조리 상영 금지였거든요. 저와 어울렸던 아이들은 보진 못하고 그저 꿈꾸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영화와 그 감독들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그 영화들 중 몇 편을 보게 됐을 땐 약간 실망했어요. 상상하던 것과 실제 영화 사이에는 언제나 차이가 있는 법이니까요.

필립 가렐, 노엘 버치, 라울 루이즈 같은 이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드실 거라고 하던데요.

그분들과의 대화를 녹화해 둔 것이 있습니다. 완성을 못했지만 언젠가는 영화로 만들고 싶어요. 저는 어렸고, 제가 존경하는 이들이 생각하는 영화의 개념을 알고 싶었습니다. 가령 로베르 브레송을 찾아갔지만 촬영을 거부해서 찍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를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것이 약간의 위기를 초래하긴 했지만 자크 로지에, 장 미트리, 장 비고 감독의 딸 루스 비고 등 다른 분들과는 인터뷰를 할 수 있었죠. 메모도 있고 이런저런 생각을 적어둔 것도 있지만 정리가 되진 않았습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특별전에는 포함되지 않은 첫 장편 영화 <베르타의 동기>에 대해 얘기해 보죠. 젊었을 때(당시 22세) 이 영화를 만드셨는데 당시엔 법적 문제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보여지지 못했습니다. “저주받은 영화”라는 타이틀을 얻기도 했죠.

“저주받은” 영화란 꼬리표가 붙은 게 대중들로부터 거부당해서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법적 문제 때문이었죠. 그 영화는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에서 상영되었는데 반응도 좋았고 상도 몇 개 받았어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를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었죠.

<베르타의 동기>는 여러 면에서 파격적인 스타일을 지닌 영화로 보이는데요.

그렇습니다. <베르타의 동기>는 모든 게 사전에 쓰여지고 구상된 영화입니다. 저는 그것이 정상적인 단계라고 생각하는데 첫 영화를 만들 때는 스스로를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뭔가 확실한 부분을 찾기 시작한 이후에는 구상과 계획을 치밀하게 하지 않아도 되죠. 언제나 모든 프레임을 미리 구상해서 찍는 히치콕 같은 감독들도 있습니다. 그게 영화의 전통이죠. 매 프레임을 다루는 데 있어서 상황을 우위에 놓기보다는 자신의 스타일상의 원칙들을 내세우는 겁니다. 하지만 감독의 성향이 어떻든 간에 영화를 처음 시작할 때는 치밀한 구상을 통해 부담감을 덜려고 노력합니다. <베르타의 동기>에서 촬영지를 선택하는 건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 영화는 촬영할 만한 요소가 별로 없는 황량한 카스티야 지방에서 찍었기 때문에 그런 환경을 양식화 해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황량하고 텅 빈 곳일수록 화면에 잡히는 모든 것이 굉장히 중요하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이런 이미지들 – 굽은 길, 홀로 서 있는 작은 나무 등 – 의 힘은 모든 쇼트에 의미심장한 가치를 부여합니다. 또한 이 영화는 흑백영화기도 한데, 따라서 그런 이미지 구성이 제대로 느껴지길 바랐습니다. 흑백은 윤곽을 부각시키는 반면 컬러는 각 이미지의 구성을 흐릿하게 하는 얼룩 같다고 생각해요. 이 영화에서 저는 당시 22세의 초보감독으로서 불안감을 감당해 내기 위해 많은 요소들을 덜어냈습니다. 모든 것이 세심하게 통제되었죠. 그랬기 때문에 매우 정신적이고 주관적인 풍경을 만들 수 있었던 거죠. 영화를 거듭 만들면서 알게 된 것은 현실이 내게 줄 수 있는 것과 나만의 담론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그 현실과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가에 대해 점점 더 자신감이 생겼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영화 <이니스프리>는 촬영지와 배경이 아일랜드였는데, 외국에서 작업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나요?

어떤 독특한 현실을 포착하기 위해 저는 항상 영화(카메라)를 이용해 왔습니다. 제게 있어 영화와 여행은 언제나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이미지를 찾아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도 마다하지 않던 뤼미에르의  촬영기사들, 그들과 같은 개척자들의 선례를 따르고 싶습니다. 그들은 최고의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 뤼미에르는 이를 “영화를 위한 사냥”이라 불렀죠 – 목숨을 걸고 최고봉에 오르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이들이었습니다. 뿌리를 깊은 곳에 두고 살아갈 필요가 있는 영화들이 나타난 건 그 이후죠. 예를 들어 미국의 존 포드, 프랑스의 장 르누아르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포드는 자신의 기원을 찾아 아일랜드로, 르누아르는 스튜디오 영화를 만들기 위해 미국으로 갔던 것이죠. 따라서 영화는 여행자들의 것입니다. 저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집을 나서서 사무실로 가는 일과 닮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만드는 건 누군가의 삶에서 특별한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한 공간 안에서 일군의 사람들 사이에 아주 강렬한 연결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저는 여행자가 일상의 삶 속에선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사물을 더 예민하게 본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 여행의 장점은 당신이 길거리에서 볼 수도 있었지만 방법을 몰라 보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게끔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을 놀라게 만드는 힘이 있죠.
예컨대 저는 <공사 중>을 촬영할 때 그러한 여행자의 시선으로 한 동네를 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가끔 가방을 싸서 그 지역에 있는 호스텔에 묵기도 했죠. 처음에 저의 관심을 끌었던 것 중 하나는 이 동네가 이곳 저곳에서 온 수많은 이민자들로 가득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화를 만들려면 타자들의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이 동네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 시대에 대한 보다 정확한 기록이 가능하죠. 텔레비전 방송국의 흥미를 끌 법한 “지역”의 연대기나 보고서, 그런 영화가 되는 건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흥미를 느낄 법한 영화, 보편적인 것을 탐구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 동네의 한 작은 부분 속에서 그런 작업을 추구하는 일이야말로 저를 흥분시키는 것입니다. 귀 기울여 들어 보면 세상을 움직이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는 곳이죠.

감독님의 작품들 중 <그림자 열차>는 거울처럼 작용하고, <공사 중>은 창문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자가 보다 이론적이고 미개척의 상태에 있는 영역에 존재하는 반면, 후자는 다큐멘터리 장르 내에서 몇몇 실천적인 도전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수 입장에서 이론과 실천 중 어느 쪽을 더 강조하는 편인가요?

사실 저 스스로는 교수인지 감독인지를 판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제가 감독으로서 걱정하는 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학생들도 똑같은 감독으로서 대하려고 노력합니다. 영화는 개념을 움직이게 하는 수단이고 거기서 이론이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보죠. <공사 중>에는 카메라 움직임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걸 도그마로서 강요하진 않았습니다. 저는 단지 대화들을, 그것도 아주 미묘한 대화들을 관찰하는 방법을 봤던 겁니다. 그러한 제약을 두고 촬영하지 않았다면 잡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을 만큼 미묘한 대화들이죠. 아버지와 아들이 측정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아들이 “2센티미터 더요.”라고 하자 아버지는 “내 연필은 그 정도로 뾰족하지 않아.”라고 대답합니다. 이 부분을 만약 인물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카메라가 움직여 따라가는 식의 관습적인 방식으로 촬영했다면 대화의 뉘앙스가 흐트러졌을 것 입니다.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로 있었기 때문에 이 부분이 관객에게 중요하게 느껴질 수 있었던 것이죠. 정확한 스타일에 따라 접근하면 비로소 영화작업에 임하는 손과 실제 작업 사이의 관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실제 작업을 통해 알게 되는 것도 바로 그러한 관계입니다. 영화 전체에서 유일하게 카메라 움직임이 활용된 <공사 중>의 마지막 쇼트는 바로 그런 생각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람들이 이사해 오는 것을 본 이후에, 저는 마침내 제 인물들과 함께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건 도덕적 선택이었죠.

고다르가 말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렇습니다. 자문해 봐야 하는 거죠. 그들이 걸어갈 때 가만히 있으면서 건물 벽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지, 아니면 그들을 따라 갈 것인지.

<그림자 열차>에 대해 얘기해 보죠. 제작 과정이 어땠나요?

영화를 만들 때마다 저는 제작 과정을 그 한계까지 밀어붙이려 노력해 왔습니다. <그림자 열차> – 매우 래디컬한 영화죠 – 의 경우,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제작자가 제게 전적인 자유를 주었을 뿐 아니라 그 자유를 활용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제게 돈을 주었고 어떻든 뒤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 영화를 만든 것뿐입니다. <공사 중>을 찍을 때 자문해본 적이 있어요. “전문 제작진들로부터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이 학생들에게서 얻을 수 있을까?” 우선 그들은 제게 자신들의 열정을 선사했습니다. 전문 제작진들은 이 영화 저 영화 옮겨 다니며 작업하는 이들이라 그들에게 영화란 보다 일상적인 노동 같은 것이죠. 무엇보다 <공사 중>과 관련해 가장 특별한 점은 학생들의 경우 충분한 시간 동안 저와 함께 작업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전문 제작진들과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작업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죠. 돈이 엄청나게 들 테니까요. 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 학생들이 제게 제공한 시간 덕택입니다.

<공사 중> 이후 <실비아의 도시에서 찍은 사진들>과 <실비아의 도시에서>로 다시 개인적인 형식으로 복귀하시는 걸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예전에 한 감독이 제 필모그래피에서 홀수 번째 작품은 보다 개인적이고 조용한 반면 짝수 번째 작품은 보다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말이 많은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홀수 번째와 짝수 번째 작품들 사이에는 항상 이런 강한 변증법이 존재했던 것이죠. 실제로 전 그 두 가지 모두를 필요로 합니다. 동시에 새로운 디지털 기술 덕택에, 제가 항상 바라왔던 것, 즉 저의 독백을 영화로 담아 내는 것, 고독 속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사람들과 일하는 것도 좋지만 혼자 틀어박혀 있고 싶을 때도 있거든요. 요즘엔 점점 영화가 점점 글쓰기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한 장면을 작업하고 나서, 자신이 쓴 몇몇 페이지를 잠시 보관해 두는 작가처럼 그걸 폴더 안에 넣어 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일에 착수해서 다른 이미지들을 붙여 넣는 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신세지지 않고 일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식으로 작업하지 않았죠. 이런 방식은 <실비아의 도시에서 찍은 사진들>에서 시작해서 최근 조나스 메카스와 작업한 영화-편지 작업(<서신들 Correspondences>)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사실 홀수/짝수 번째 영화들 간의 변증법은 어떤 정도까지만 작용한 것 같습니다. <실비아의 도시에서>와 <서신들> 둘 모두 사교적인 영화거든요. (비록 대부분의 편지가 매우 고독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서신들>은 대화에 기반을 둔 작업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매우 흥미로운 것인데 왜냐하면 오늘날 영화감독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고독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고독은 정말이지 이례적인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쿨레쇼프의 공장, 서로 대화를 주고받던 그 모든 위대한 소비에트 감독들의 이미지에 매혹되어 있었습니다. 감독들이 모여 함께 잡지를 만들고 여타 다른 프로젝트들도 진행했던 1960년대의 누벨바그도 마찬가지고요. 요즘 우리에겐 토론이란 게 거의 없죠. 제가 조나스 메카스에게서 깊이 감탄하게 된 것 중 하나가 그가 매우 사교적이란 겁니다. 뉴욕에서 둘이 함께 길을 걷고 있으면 항상 여러 감독들과 만나게 됩니다. 제가 보기에 조나스는 감독이기 이전에 – 물론 감독이기도 하죠 – 일을 벌이고 추진하는 데 탁월한 사람입니다.

<게스트>에서 뉴욕을 그린 부분은 매우 감동적이고, 또한 몽환적이며, 영화적 현실이라는 개념과 부합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영화 속 다른 어떤 부분과도 달랐던 것 같습니다.

맞아요. 영화 속에서 저는 이유, 인물, 상황을 찾아 그 모든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하지만 뉴욕에서는 문제가 있었죠. 영화가 현실과 부딪히거든요. 뉴욕에선 그 도시를 무대로 한 다른 영화들을 떠올리지 않으면서 어떤 장면을 만드는 게 불가능하죠. <게스트>는 어떤 장소에서 특정한 사람들과 장기간 함께 있으면서 만든 <공사 중>과는 매우 다른 영화입니다. <게스트>는 어딘가에서 사나흘 밤을 머무르며 흔적을 남기려고 하는 몸짓을 스케치한 것 같죠.

젊은 영화광들에게 하고 싶은 충고가 있다면요?

제가 처음 영화에 흥미를 느꼈을 땐 영화학교라는 게 없었어요. 저는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배웠습니다. 당시 시네마테크는 정말 근사했죠. 어떤 날 오후에는 영화를 4편씩 보여주고, 고전 영화를 많이 상영해서 덕분에 영화의 역사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훌륭한 시네마테크야말로 최고의 영화학교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바르셀로나에 살 때 시네마테크에서 여러 번 감독님을 본 기억이 납니다.

어떤 영화들을 보러 가셨죠?

가령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이 열렸었죠.

오즈의 작품은 저도 전부 봤어요! 그때 전 <공사 중>을 촬영하는 중이었는데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 유일하게 했던 일이 바로 오즈의 영화를 보러 가는 거였죠. 영화를 구성하는 그의 방식은 제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통상 한 인물에 주된 초점을 맞추는데 그러다 서서히 집단에게로 우리 관심을 향하게 하는 걸 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기 짝이 없죠. 그는 모든 이들의 관점을 모두 취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1959)에서는 작은 동네에 갑자기 텔레비전이 들어오고, 서서히 아이들, 부모들, 아저씨들, 이웃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여 주죠. 오즈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이런 발상은 제가 영화작업을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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