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29



1. <벨라 타르, 시네아스트를 넘어서>(2011)


2012년 2월 29일


4월 말에 열릴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밍을 마무리하느라 경황이 없는 가운데, 오늘 저녁에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있을  <토리노의 말> 시네토크 준비를 하느라 밤을 새고 말았다. 이런저런 자료들을 살펴보던 중, 문득 4년 전(2009년) 2월 초 부다페스트에서 만났던 프랑스 청년이 떠올랐다. 벨라 타르 감독의 <사탄탱고>(1994) 15주년 기념행사에 초청받아 갔었는데, 7시간이 넘는 영화상영이 끝나고 나서 감독 및 배우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장-마르크 라무르(Jean-Marc Lamoure)라는 이름의 청년과 오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옆에선 타르 감독이 헝가리 전통주인 팔린카(palinka) - <토리노의 말>에서 주인공 농부가 마셔대는 그 술 - 예찬론을 1시간이 넘게 펼치고 있는 중이었다. 라무르는 타르 감독의 영화에 홀려 헝가리로 와, 당시 막 촬영이 시작되었던 <토리노의 말>의 연출부로 일하면서 타르 감독과 이 영화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 중이라 했다. 문득 그 다큐멘터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궁금해 인터넷을 뒤져보니, 두 달 전 프랑스에서 열린 벨라 타르 회고전에서 미완성 상태로 특별상영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래는 이 다큐멘터리에 대한 정보다.



Tarr Béla, cinéaste et au-delà 
(dir. Jean-Marc Lamoure)


On the occasion of the shooting of his new and final movie, TheTurin Horse, this documentary proposes a portrait of Hungary through the eyes of Béla Tarr, one of the greatest filmmakers of our times. Over the last thirty years, Hungarian filmmaker Béla Tarr has gathered around him an adopted family comprised of a renowned sculptor, a cashier, a former world canoeing champion, film technicians, actors, a writer and other individuals; a family of cinema where no hierarchy exists. Together they constitute and share a social and poetic vision of the human condition. We will meet them. In this documentary, we will also travel to the Hungarian flatlands and into the lives of the peasants and factory workers who were actors in his film, Sátántangó. Through these multiple encounters and across Béla Tarr’s films, we will discover the political and social reality of Hungary, visiting the last 30 years of its history, from the Communist era to the present day.


2. 마틴 스콜세지의 <휴고 Hugo>


2012년 3월 4일


마틴 스콜세지의 <휴고>가 조르주 멜리에스의 영화와 생애에 경의를 표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한편으론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6)을 바로크적 돌출효과에 입각한 영화적 경이의 기원으로 언급하면서 - 기차역이 영화의 주무대가 되고 있기도 하다 - 이를 스콜세지 자신이 3D 테크놀러지를 받아들인 데 대한 '변명'처럼 활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멜리에스가 영화적 판타지의 선구자라면 뤼미에르(와 그의 카메라맨들)은 카메라의 위치와 앵글 및 그 움직임이 주는 효과를 다양하게 실험했는데 - 가령 라즐로 모호이-너지가 베를린 라디오 송신탑에서 찍은 사진(1928)을 떠올리게 하는 극단적인 부감쇼트를 실험한 단편이라든지, 트래킹이나 핸드헬드 촬영의 실험 등등 - 거의 완전히 중력의 구속에서 해방된 듯한 <휴고>의 (CG로 보완된) 카메라워크는 그 자체로 뤼미에르적 호기심의 연장이라 할 만하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 망각의 영화사를 복구/복원하는 작업이 시계공의 그것에 비견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달세계 여행> 컬러버전 프린트 복원 전 사진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멜리에스의 생애나 <달세계 여행>(1902)의 오리지널 컬러버전 발굴에 얽힌 일화를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휴고>보다 세르주 브롱베르와 에릭 랑주의 다큐멘터리 <기이한 여행 The Extraordinary Voyage>(2011) 쪽이 더 적절할 것이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시네마페스트" 부문에서 <달세계 여행> 복원버전과 함께 상영예정이다.) 


3. 보지 못한/않은 영화들


2012년 3월 4일


작년 개봉작/미개봉작 베스트리스트를 꼽아 보면서 몇몇 영화잡지들에 의해 이미 발표된 리스트들을 살펴 보았음은 물론이다. 나의 리스트와 대조해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난 한 해 내가 놓친/피한 영화들은 무엇이었나 살펴보기 위해서. 가령 여러 잡지에서 베스트 10 가운데 하나로 꼽은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 누리 빌제 세일란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나톨리아> 그리고 얼마 전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미셸 아자나비시우스의 <아티스트>는 일부러 보지 않은, 혹은 여러 번 볼 기회가 있었음에도 일부러 피한 영화들에 속한다. 그리고 당분간은 굳이 찾아 볼 계획이 없다. 꼭 보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운이 맞지 않았던 영화는 자파르 파나히의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를 꼽을 수 있겠다. (지난 한 해 출장으로 방문했던 거의 모든 영화제에서 상영되었지만 갑자기 약속이 잡힌다거나 매진이 된다거나 하는 이유로 매번 볼 기회를 놓쳤다.) 그리고 크리스티안 펫졸트, 도미닉 그라프, 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 세 감독이 만든 <드라이레벤> 연작은 DVD로 보고 나서 꼭 영화관에서 다시 보고 싶었지만 이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가 거의 없었다. (이 작품을 작년 베스트리스트에 넣지 못한 건 바로 그 때문이다.) 


4. <디지털 삼인삼색 2012 Jeonju Digital Project 2012> 참여감독들의 비디오 메시지


라야 마틴 (필리핀)


비묵티 자야순다라 (스리랑카)


잉량 (중국)


* <디지털 삼인삼색>을 위해 감독들이 준비 중인 작품 소개 및 인터뷰는 아래 링크

2012-02-26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2011)

베를린영화제 출장을 다녀와서 개봉관에서 본 첫 영화가 토마스 알프레드손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다. (로테르담 출장과 베를린 출장 사이 잠깐 한국에 돌아와서 윤종빈의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를 보았는데 연출의 측면에서 거의 재앙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이 영화를 상찬하는 평론가들이 적잖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한편 여기서의 최민식은 그 자신을 연기하는 것도 아니고 극중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그저 자신의 이전 필모그래피를 채웠던 캐릭터들을 과장을 섞어 지루하게 복습하고 있을 뿐이었다.) 영화는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그 자신 (각본가이자) 영화감독이기도 한 폴 마주르스키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리뷰 첫 머리에 쓴 다음의 말은, 아마도 존 르카레의 팬이라면 영화를 보기 전 누구나 떠올렸을 법한 의혹을 반영하고 있다. "존 르카레의 원작은 스파이소설의 걸작으로 간주되었다. 1979년 BBC는 알렉 기네스가 조지 스마일리 역을 맡은 빼어난 TV 미니시리즈를 내놓았다. 그래서 포커스영화사가 제법 솜씨있는 스웨덴 감독을 데리고 이걸 리메이크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들이 돌았다고 생각했다. 이건 <모나리자>를 다시 그리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물론 마주르스키의 말엔 과장이 없지 않다. 1979년에 방영된 BBC 미니시리즈 판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정말 근사하긴 하지만 사실 감독 존 어빈(John Irvin)의 연출은 평범한 수준을 넘지 못한다. 오히려 이 미니시리즈의 매력은 완벽하게 구식 영국인다운 뉘앙스로 - 이 느낌이 이방인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나 여하간 이 점은 원작자인 존 르카레조차도 인정한 바이니까 - 조지 스마일리 역을 소화해낸 알렉 기네스의 연기, 독창적인 해석을 곁들이기 보다는 (인물의 사소한 제스처 하나까지도) 철저하게 원작에 충실한 데 만족한 존 어빈의 경탄할 만큼 상상력 없는 겸손한 - 절대 비아냥의 뜻으로 쓴 표현이 아니다 - 연출, 당대 유럽 도시(런던, 리스본,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풍경과 그 무드를 고스란히 담아낸 사실적 촬영 등이 만나 빚어진 것이라고 봐야 한다. (덧붙이자면, 알렉 기네스의 조지 스마일리는 외양만 놓고 보자면 존 르카레가 자신의 소설에서 묘사한 바와는 꽤 거리가 있는데, 마틴 리트의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1965)에서 조지 스마일리 역을 맡은 루퍼트 데이비스 쪽이 생김새로는 존 르카레의 묘사에 더 충실한 편이다.) 내 식으로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BBC 미니시리즈 판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존 르카레의 원작을 TV용으로 영화화했다면 이런 식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작품이다.


BBC 미니시리즈판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1979)의 알렉 기네스(조지 스마일리 역)


르카레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영화화하기 용이한 스파이소설은 아니다. 이건 플롯이 복잡하다거나 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거의 실내극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스마일리의 서류조사와 몇몇 주요인물들과의 대화(가 이끄는 플래시백)로 작품 전체가 짜여져 있기 때문에 통상의 스파이영화에 요구되는 시각적 활극의 쾌감을 끌어내기가 매우 곤란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르카레 원작의 구성을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오히려 (충분한 러닝타임이 보장되고 숏/역숏 구조의 단순한 대화장면 연출에도 큰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는) TV 미니시리즈 쪽이 극장용 영화보다 더 수월할 것처럼 여겨진다. 2011년 판의 연출을 맡은 알프레드손이 이를 몰랐을 리 없다. (아마도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일) 알프레드손의 각색의 방향은, 원작의 플롯 전체를 2시간 남짓한 분량에 한꺼번에 압축하려 드는 대신, 르카레의 원작에서 핵심적이라 생각되는 부분들을 우선적으로 발췌해내고, 그 발췌한 부분을 다시 무대와 상황을 약간 달리하는 식으로 변형하고 압축한 다음, 각각의 부분들에 일관된 무드를 부여해 차례로 배열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 것 같다. (영화 초반부 컨트롤과 짐 프리도의 대화나 이어지는 헝가리에서의 '검증'(testify) 작전이 묘사된 방식을 원작소설이나 BBC 미니시리즈 판과 비교해 보라.) 흥미로운 것은 감독 알프레드손이 각각의 부분들의 연쇄를 통해 사태의 추이를 관객에게 논리적으로 전달하는 데는 거의 신경쓰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각각의 등장인물에 대한 묘사나 설명이 크게 생략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 르카레의 원작과 BBC판 초반부에 삽입된, 스마일리가 과거 동료를 만나 그로부터 최근 서커스(영국정보부)의 동향에 대해 긴 이야기를 듣는 장면이 통째로 생략된 것은 핵심적이다 - 르카레 특유의 스파이 은어들에 대한 설명도 일체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영화 오프닝크레딧 시퀀스에서 간이승강기에 실려 이동하는 서류철의 경로를 보여줄 때처럼 영화를 보는 동안 당장에는 그 의미를 간파할 수 없는 비인칭적 시점의 숏이나 장면을 삽입해 독해의 곤란을 증폭시키기까지 하고 있다. 알프레드손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보고 나온 관객들 - 특히 르카레의 원작이나 BBC판을 본 적이 없는 - 이 종종 토로하는 영화의 난해함이나 불친절함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벤 휘틀리의 <킬 리스트 Kill List>(2011)


알프레드손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두 번 보고 나서 내린 결론은, 이건 엄밀히 말해 르카레 원작의 각색이라기보다는 르카레 소설의 독서가 불러일으키는 인상들 - 원작에서 "우린 이미 미국의 매춘부(streetwalker)였어"라는 자조적 대사가 불러일으키는, 미국-소련간 첩보전에서 들러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던 영국정보부 마냥 당시 이미 제국의 지위를 상실한 영국이라는 국가의 멜랑콜리, 그리고 그 멜랑콜리로 채색된 실패한 (이성애적/동성애적) 로맨스의 추억 등등 - 에 대한 그 나름의 독후감을 (자료실에 보관된 문서파일들에 특정 사건의 흔적들이  담겨 있듯 르카레 원작의 특정 부분들을 환기시키는) 몇 개의 블록들로 정리해 모아 놓은 것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이건 스트라우브-위예의 몇몇 영화 - 얼마 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된 <화해불가>를 비롯한 - 에서의 축자적(literal)이면서도 극도로 생략적인 발췌의 그것만큼 과격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대중영화의 관객성에 도전을 가할 만큼은 과감했다고 보여진다. 알프레드손은 르카레의 원작과 경쟁하려 들지도 않았고, 전설적인 BBC 미니시리즈판과도 경쟁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지만, 기존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스파이영화를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만은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충분히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로 나타났다. 비록 마주르스키의 단언처럼 "또 한 편의 걸작"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을 지 몰라도 말이다.  <렛미인>이라는 독특한 뱀파이어물을 연출한 스웨덴 감독으로 처음 알려졌던 토마스 알프레드손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통해 대중적 장르영화를 진정 현대적인 방식으로 다룰 줄 아는 동시대의 가장 전도유망한 감독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건 벤 휘틀리의 호러영화 <킬 리스트 Kill List>(작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와 더불어 작년 영국영화계에서 나온 가장 흥미로운 실험적 장르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