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05

<마스터>(2012)에 관한 노트


(내가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마스터 The Master>를 보고 놀랐던 것은, 감독이 편의에 따라 간헐적으로 서사를 '방기'하고 있는 것을 - 실은 그도 해법을 찾지 못해 잔꾀를 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인데도 - 적잖은 비평가들이 저항 없이 수긍한다는 점이었다. 야심만만한 작품임은 분명하지만, <마스터>는 구축, 해체, 대안 사이에서 망설이다 결국 눈속임을 택한 영화다. 이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Once Upon A Time In America> - <마스터>를 보는 내내 머리에 떠오른 영화 가운데 하나 - 의 마지막 쇼트만큼이나 기만적으로 느껴졌다.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의문들을 틈나는 대로 여기 정리해 보려 한다.)


1

내가 <마스터>를 처음 본 것은 지난 8월 3일 광화문 씨네큐브에서다. 65mm 필름으로 촬영되어 굉장한 시각적 경험을 안겨주는 작품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씨네큐브 상영관(2관)의 영사장비와 스크린은 그런 경험을 선사하기엔 역부족이었다. 


2

나는 <마스터>가 폴 토마스 앤더슨의 야심과 재능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덴 이견이 없지만, 이 영화에 대한 많은 평자들의 열광에 대해서는 조금 미심쩍게 생각하는 편이다. 시각적인 것이 서사적 논리에 앞서고 대담하게 생략적이며 ‘의도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게 설계된 이 영화에 대해 말할 때 감각이나 불가해함 등의 용어가 등장하는 건 아마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마스터>는 감각으로 서사를 해체하면서 불가사의로 ‘향하는’ 영화가 아니라 - 이건 루이스 부뉴엘의 <안달루시아의 개>(1929)와 <황금시대>(1930), 알랭 레네의 <지난 해 마리앵바드에서>(1961) 혹은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와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영화다. -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1941)처럼 서사의 직조에 불가결한 여러 조작들(발췌, 축소, 압축, 생략, 전위 등)을 아예 전면화함으로써 불가사의에 ‘통로를 열어주는’ 영화라는 점이다. 전자의 영화에선 무엇보다 감각이 문제인 반면, 후자의 영화에선 서사적 ‘조작들을 (재)조작’하는 방식이 문제다. 그런데 <마스터>의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응당 (재)조작이 수행되어야 할 곳에서조차 감각을 내세우려 든다. 


3

조너선 로젠봄의 <마스터>에 대한 비판은 짧긴 하지만 매우 신중하게 읽어야 하는데, 몇몇 이들이 오해하고 있듯 로젠봄은 단순히 이 영화의 “일관성” 부재를 꼬집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마스터>의 폴 토마스 앤더슨과 <리바이어던 Leviathan>(2012)의 루시언 캐스텡-테일러와 베레나 파라벨에 대해, “그들이 제공하는 경험에 걸맞은 일관된 스토리를 들려주고 일관된 맥락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의 여부는, 내가 보기엔 확실치 않아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리바이어던>에 대해서는 로젠봄과 생각을 좀 달리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또 다른 글에서 밝히는 것이 좋겠다.) 즉, 그저 “일관된 스토리”(coherent story) 혹은 “일관된 맥락”(coherent context)이 아니라 이 감독들이 제공하는 “경험에 걸맞은”(for the experiences) 일관된 스토리와 맥락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관성이 반드시 고전적 서사와만 결부될 필요는 없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는 <시민 케인>이 (이제는 ‘고전적’으로 비칠 만큼) 일관된 스토리와 맥락을 갖고 있는 만큼이나 부뉴엘, 레네, 린치의 아방가드르적 작품들에도 그들이 제공하는 영화적 경험에 걸맞은 일관된 스토리와 맥락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일관성을 지닌 어떠한 통일된 형식보다 감각을 우선시하는 것처럼 보이는”(로젠봄) <마스터>는 정작 그러한 감각(적 경험)에 걸맞은 스토리나 맥락을 (실험적인 수준에서도) 구성해 내지 못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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