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31

시간의 건축적 경험







(아래 글은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인문예술잡지 F>  창간호(2011.9.1)와 제2호(2011.11.15)에 두 차례에 걸쳐 연재되었던 글이다. "뤼미에르 은하의 가장자리에서"라는 제목 하에 총 5부로 구상된 글의 1부로,  <인문예술잡지 F> 제7호(2012.10.31)와 제11호(2013.10.31)에 2부('고유명으로서의 이미지와 아트갤러리로서의 영화관')의 상편과 중편이 실렸다. (하편은 현재 집필 중이다.) 현재 <인문예술잡지 F> 창간호부터 제5호까지, 그리고 제8호는 품절된 상태인데, 간혹 이 글을 찾는 분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몇 차례 전해 들어 이곳에 옮겨 둔다.  



뤼미에르 은하의 가장자리에서 PART.1


시간의 건축적 경험




서사라는 미로


올해(2011년) 베니스비엔날레가 크리스찬 마클레이의 <시계 The Clock>(2010)에 황금사자상을 수여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마르셀 뒤샹의 작업에서 공격적인 방식으로 제시되었던 아방가르드적 잠재력은 이어받지 못한 채 그 개념적 특성만을 이어받아 한 세기 가까이 연명해온 현대미술이 바야흐로 영화라는 대중예술에 굴복했음을 선언한 것일까? 하지만 지난 1월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시계>를 관람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마클레이가 대중적 기억의 아카이브로서의 영화를 유희적으로 ‘샘플링’하는 작업 - 그는 디제이(DJ)로도 활동해 왔다 - 에 의해,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설치미술이라는 굴절된 흐름을 통해 암시되었던 ‘건축적’인 경험이 시간적인 차원과 결부되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강화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화 Telephones>(1995)나 <비디오 사중주 Video Quartet>(2002)처럼 재기 넘치긴 해도 그다지 특별하달 것도 없는 마클레이의 이전 작품들엔 그와 같은 인상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 차이는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가? 세 편의 작품 모두, 숱한 영화들에서 발췌한 영상들을 나름의 원칙에 따라 편집, 배열한 작품들이란 점에선 차이가 없다. 여러 영화 속의 전화통화 장면들을 이어 붙여 대화를 주고받는 것 같은 상황을 구성하거나, 악기연주 혹은 노래하는 장면들로 구성된 4편의 영상물을 나란히 병치해 시청각적 사중주를 만들어 내거나, 시계가 직접 보이는 혹은 시간이 암시되는 영화장면들을 골라 편집하되 작품에 나타난 시간과 현실의 시간을 동조화(synchronization) - 예컨대 한 관람객이 12시 40분에 <시계>를 보러 상영관에 들어갔다면 작품 속에 나타난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도 정확히 12시 40분일 것이다 - 하는 식이다. <시계>라는 작품이 앞선 두 편의 작품과 뚜렷이 달리하는 것이 있다면 24시간에 달하는 그 어마어마한 상영시간이다. (참고로, <전화>는 7분 30초, <비디오 사중주>는 14분짜리다.) 

영화가 탄생한 이후, 가공할 만한 상영시간을 지닌 작품들이 이미 꽤 일찍부터 만들어져 왔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시계>가 그다지 이례적인 작품이라곤 말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오리지널 편집본의 길이가 9시간에 달했다고 하는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의 무성영화 <탐욕 Greed>(1924), 한스-위르겐 지버베르크의 <히틀러 : 한 편의 독일영화 Hitler : A Film from Germany>(1977, 7시간 22분), 벨라 타르의 <사탄탱고 Satantango>(1994, 7시간 30분), 보다 최근의 예로 라브 디아즈의 <필리핀 가족의 진화 Evolution of a Filipino Family>(2004, 10시간 43분) 등[1]이 우선 머리에 떠오른다. 흥미로운 건, 방금 언급한 감독들이 매우 독특한 나름의 ‘영화적’ 미학을 개척한 이들이면서 동시에 위대한 서사 예술의 전통에 견줄 만한 영화적 내러티브를 견인하는 일에도 각별한 관심을 둔 이들이라는 것이다. 즉 19세기 리얼리즘 문학과 이후의 모더니즘에 이르는 문학적 전통이나(슈트로하임, 타르, 디아즈) 바그너적 오페라(지버베르크)와의 관련 하에 이야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상의 작품들은 어떤 식으로건 여전히 ‘서사적’ 영상예술인 셈이다. 내가 여기서 ‘서사적’이라 말할 때, 그것은 아무리 길고 어렵더라도 여하간 그 노정을 완주해 길을 찾은 자에게만 논평의 자격을 부여하는 ‘미로적’ 형식을 염두에 둔 것이다. (미로가 꼭 복잡한 것일 필요는 없다. 입구와 출구를 곧바로 연결하는 단 하나의 경로만 있어도 미로는 성립한다. 사실 흔히 미로라 불리는 것은 그처럼 단순한 경로에 다수의 주름을 만들어 복잡화하는 위상학적 테크닉의 결과물일 뿐이다.) 이른바 하이퍼텍스트적, 상호작용적 구성을 도입한 문학이나 영상물, 심지어 게임 역시 예외는 아니다. 경우의 수가 아무리 다양할지라도 어떤 경우를 선택하건 궁극적으로 하나의 지리적 노정이 그려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시간의 건축


<시계>의 가공할 상영시간이 뜻하는 바에 관해 생각해 보고자 할 때 앞서 언급한 작품들보다 더 적절한 참조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이미 여러 사람들이 언급했듯 앤디 워홀의 <엠파이어 Empire>(1964, 8시간 5분)나 더글러스 고든의 <24시간 사이코 24 Hour Psycho>(1993) 같은 작품들일 것이다. 이 두 편의 작품이 관람자들에게 불러일으키는 의혹은 다음과 같은 것일 텐데, 과연 이러한 영상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한가, 라는 것이다. (워홀 자신이라면 ‘그렇다’라고 답변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특히 문학작품의 감상 및 비평에서 전형적인) 강박적 독해의 형식으로서의 ‘통독’(read-through)의 의무 같은 것을 우리에게 부과하지 않는 작품들로서, 반드시 노정을 완주하지 않더라도, 아니 오히려 노정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탓에, 그저 작품이 영사되고 있는 영화관이나 블랙박스 안에 어느 때고 간단히 입장해 일정 시간 감상한 것만으로도 논평의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게끔 하는 ‘건축적’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시계>와 <24시간 사이코>의 경우, 관람객은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미술관의 규정 관람시간(예컨대 오전 10시에서 오후 6시 사이)에만 작품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설령 관람시간 이후에 작품이 블랙박스 내에서 조용히 홀로 영사되는 중이라 하더라도, 전체로서의 작품 자체는 관람객에게 보이지 않음에도 존재하는, 문자 그대로 ‘기념비적’인 것으로 남게 된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시계>의 DVD를 구해 작품 전체를 분석하려는 비평가가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식의 비평은 <시계>라는 작품이 지향하고 있는 ‘건축적’ 존재양식에 대한 거부의 제스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건축’의 은유가 종종 총체성이나 구조의 관념과 결부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가령 가라타니 고진이 비판적으로 ‘건축에의 의지’(will to architecture)[2]라고 부른 것과 말이다. 이와 같은 ‘은유로서의 건축’은, 엄밀히 말하자면, 건축물에 대한 감상은 일단 별개의 문제로 두고 설계자의 구상(이데아) 내지는 그에 따른 설계도면 만이 은유로서 차용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며, 따라서 ‘건축에의 의지’란 모종의 구상과 설계에 따라 이론적 구성물을 만들려 하는 순전히 제작과 관련된 의지만을 제한적으로 뜻하는 것이다. 한편, 내가 이 글에서 ‘건축적’인 것에 대해 말할 때, 이는 설계자의 구상과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현실의 건축물을 대할 때 갖게 되는 경험과 관련된 감상의 차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설계자의 의도가 어떠하건, 건축물이 크건 작건, 건축물 자체가 어떤 통일적인 구상에 따라 지어진 것이건 아니건 간에, 건축물에는 언제나 우리의 즉각적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 분명 존재하지만 비가시적인 부분들 - 은폐된 것은 아니기에 방문객의 이동경로에 따라 서서히 모습을 달리하며 드러나는 부분들과 그렇지 않은 부분들 모두 - 이 있다. 하지만 비가시적인 부분들 전체를 샅샅이 탐색하는 공을 들이지 않고 건축물의 전체적 인상만을 살핀 후에 마음 가는 대로 특정 부분들만을 답사했다 해서 그러한 경험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미로적’ 형식에서라면 이런 식의 부분적 경험은 그저 길을 잃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뿐인데 이 점에서 미로는 건축의 가장 반(反)건축적 형식이라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특성이야말로 건축의 진정한 건축성이라고 본다. 그처럼 즉각적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공간 속에 형상화하는 작업이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건축술이라면, <시계>와 <24시간 사이코>처럼 (일종의 모델하우스라고도 할 수 있을) 임시적 전시 공간 내에서 관람객의 물리적 경험의 범위를 넘어, 그의 존재를 아랑곳하지 않고 종일토록 지속되는 이미지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시간의 건축술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말하자면 대안적인 건축적 공간경험을 이끌어내는 것 - 때로는 아예 ‘건축에의 의지’를 와해시켜 버릴 정도로 - 이 설치미술 작업의 주된 관심사라고 한다면, 고든과 마클레이의 작품은 그러한 관심을 시간의 차원으로 확장시켰던 워홀의 작업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 가운데 고든의 작품은 다른 두 작가의 작품에 비해 개념미술적 성격, 특히 장소특정성(site-specificity)이 훨씬 강하다는 점만은 지적해 두어야겠다.) 매우 뒤샹적이라 할 만한 방식으로, 하나의 레디메이드 오브제(고층빌딩)를 전시공간이 아닌 시간(영화적 지속) 안에 둠으로써 제도화된 시간성(미로적 형식으로서의 서사)을 벗어나는 한 방법을 예시한 워홀의 <엠파이어>는, 시간의 건축술을 도입한 최초의 작품일 뿐 아니라 그것이 가장 과격한 방식으로 구사된 작품이기도 했다.    

이렇게만 말해버리고 나면 어쩐지 ‘건축적’이라 지칭한 것이 여전히 (동시대 미술계에서 양산되는 숱한 영상설치작품들이 지루하고 시시한 것 이상이 되지 못하는 주된 이유라 할) 개념적이고 담론적인 것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위험을 무릅쓰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건축의 은유로 돌아가는 대신 다른 방법을 찾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른다.[3] 하지만 굳이 이런 은유를 택한 이유는, 고든의 <24시간 사이코>와 마클레이의 <시계> 같은 작품이 붙들고 있는 비가시성의 스케일, 구성적인 힘과 형식의 중요성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 작품은 설치미술의 공간성으로부터 해방된 건축성을 영화의 존재조건이라 할 시간성과 융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서사영화의 ‘미로’를 해체하려 한 몇몇 아방가르드 영화작가들의 역사적 시도들을 건축적 요소로서 활용하고 있기까지 하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겠다.) 이들 작품을 묘사하기 위해 조각 대신 건축의 은유를 택한 것은, 일반적으로 조각 작품이 보여주는 비가시성의 스케일이 건축의 그것에 필적할 바가 못 되기 때문이다. 한편 나무, 돌, 혹은 산처럼 ‘무심히 거기 있는’ 대상들이란 점에서 이들 작품을 ‘자연적’ 혹은 ‘환경적’이라 부르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24시간 사이코>와 <시계>라는 작품은 우연적 생장과 변화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는 ‘자연적’ 대상들이 결코 아니며 어디까지나 매우 형식적이고 불변적인 인공물 - 다만 전체적인 관람을 강요하지 않을 뿐인 - 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환경’이란 단어는 ‘매체환경’이라는 식으로 쓰일 때 정도를 제외하면 이미 환경론자들의 운동적 구호에 지나치게 물들어 있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 이들 작품이 허용하는 우연성과 가변성은 그저 관람객이 작품 감상에 쏟는 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정도로만 국한되며, 관람객과의 상호작용으로부터 피드백을 받아 작품 자체의 구조와 형식을 달리하는 그런 식은 결코 아니다.  
      
나는 적지 않은 설치미술가들이나 퍼포먼스 아티스트들이 흔히 빠져들곤 하는 낭만적인 환상, 즉 관람객을 구속하지 않고 그들이 능동적이고 자유롭게 작품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예술을 보다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믿지 않는다. 할 포스터의 지적처럼 “대개 이런 전시에서는 사진과 텍스트, 이미지와 오브제, 비디오와 스크린 영사물들이 어수선하게 뒤섞여 놓이기 때문에 종종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혼란스럽다. 이런 작업들에서 예술로서의 가독성은 어떻게도 읽히지 못한 채 희생돼 버린다. 그렇다고 다른 것으로 읽힐 가능성도 없다.”[4] 최선의 경우라 해도, 그런 환상에서 비롯된 시도는 디자인이나 실내장식, 유희적 퍼포먼스의 영역에 흡수되는 것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반면 해석을 전적으로 수용자에게 내맡기기보단 작품의 가독성에 주의를 기울이는 시간의 건축술은 조용한 방식으로 여러 영역에 걸쳐 관객성의 변화를 요청한다. 그것은 (문학적/문자적 관습에 익숙한 이들에겐) 통독의 의무보다는 죄책감 없는 난독(random reading)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열어 놓고, (영화 관객으로서 온 이들에겐) 시네필적인 접근은 기꺼이 허용하면서도 마니아적 집착은 버릴 것을 요구하며, (미술관의 관람객으로서 온 이들에겐) 오늘날의 전시란 비단 공간적으로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뻗어 있는 것이라는 점을 - 전시공간은 일종의 통합체이고 매 작품은 계열체이며 따라서 전시경험의 함수란 f(s)가 아니라 f(s,t)로 표현되어야 함을 - 그 건축적 시간성을 통해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보여 준다. 처음부터 끝까지, 구석구석 남김없이 답파해야 비로소 마음을 놓는 강박적이고 편집증적인 수용자의 태도는, 전체에 대한 이해 없이는 어떤 부분도 온전히 이해되지 못할 것이란 전체론(holism)적 가정에서 비롯된 것일 텐데, 시간의 건축은 그러한 전체론적 가정을 배반하는 - 그렇다고 해서 원자론(atomism)적인 가정으로 향하지도 않는 - 것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작품과 단지 부분적인 접촉만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를 배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간의 건축에서 부분은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언제나 전체의 이미지를 게슈탈트적으로 한꺼번에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관람자가 보다 폭넓게, 보다 오랫동안 작품과 접촉하도록 유인하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건축적 시간의 구성 (1) : 형식적 서스펜스


그것은 시간의 건축술을 활용한 작품들이 매 순간을 일종의 반복의 지속으로서 제시하는 한편 - 거의 변화하지 않는 대상들 혹은 상황들(워홀의 영화), 일상의 경험을 거슬러 극단적으로 느리게 재생되는 영화이미지(<24시간 사이코>), 매 분마다 몇 차례씩 화면에 출현하는 시계들(<시계>) - 특별한 방식으로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키는 작업에 의해 가능해진다. 통상적인 서사영화의 그것과는 좀 다른 방식이라 해도 분명 서스펜스는 시간의 건축을 지탱하는 구성적 요소로 활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서스펜스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간을 조각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혹은 서스펜스란 영상작품을 진정 음악적으로 축조하는 기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워홀의 <잠 Sleep>(1963)을 처음 보았을 때의 경험을 상세하게 기록한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감독 톰 앤더슨의 글을 살펴보자. 


내가 처음으로 본 워홀의 영화는 <잠>이었다. 1964년 6월, 로스앤젤레스 웨스턴 애비뉴에 자리한, ‘심야영화' 문화가 탄생한 극장에서였다. <잠>의 상영은 한밤중이 아니라 오후 6시 45분경에 시작되었다. 그건 정말 긴 영화였고, 내가 기억하기론 자정이 넘어 12시 30분경에 끝났다. 영화가 시작될 땐 극장 안에 대략 500명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끝나고 나니 열 명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영화 전체를 다 본 건 아니었지만 나도 남아 있기는 했다. 네 시간 남짓 지났을 때 나는 뭔가를 좀 먹기 위해 빠져 나와 길모퉁이의 커피숍으로 향했던 것이다. […] 영화의 첫 30분 동안 대부분의 관객이 자리를 떴다는 걸 알았는데, 조용한 상영관 밖 로비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래서 확인해 보기 위해 나가보았다. 로비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들 대부분이 마이크 게츠[영화관 매니저이자 프로그래머]에게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환불을 원했고 게츠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 이 영화가 어떤 것인지 대략 짐작하고 있었던 나는 환불을 요구하진 않았다. 자료에 따르면 잠자고 있는 사람을 찍은 단 한 개의 숏을 아무런 사운드도 없이 8시간 동안 보여주는 영화라는 것이었다. 분명 컨셉은 그러했다. 그런데 무성이긴 했지만, 8시간짜리는 아니었고(초당 16프레임의 속도로 영사되었을 때 공식적 상영시간은 5시간 21분이다), 다른 각도에서 촬영된 여러 숏들이 있었다. 나는 그 숏들을 기억하진 못해도, [숏과 숏 사이에 이루어진] 컷들 내지는 적어도 그 컷들에 의해 유발된 효과들만은 기억한다. 처음 눈에 띄었던 컷은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이었지만, 그 이후론 그걸 기대하게 되어 서스펜스를 느껴가며 영화를 보았다. 다음 컷은 언제 이루어질까? […] 서스펜스라는 개념은 종종 오해되고 있는데 관습적 극영화에 적용될 때나 보다 비관습적인 영화에 적용될 때나 마찬가지다. 나는 서스펜스란 ’소외효과(alienation effect)의 일종일 뿐‘이라고 간주해왔고 이를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해 왔다. 말하자면 서스펜스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이다. 서스펜스를 창출한다는 건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고 이상한 것으로 만들어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고양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시나리오 작법에 관한 고전적 안내서에서 유진 베일이 지적한 바에 따르면, 서스펜스는 2차적 효과(secondary effect)다. 서스펜스가 가능하기 위해선 기대감이 요구되고, 기대감이 있기 위해선 의도가 요구되는 것이다. [5]


앤더슨이 워홀의 <잠>을 관람한 방식은, 내가 앞에서 강조한 편집증적이지 않은 관객의 태도를 예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오늘날 흔히 그러하듯 <잠>이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전시되었더라면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소동(환불요구)이 있었지만 앤더슨 자신은 거기 동참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그때 이미 영화관을 (비록 잠정적이나마) 전시실과 비슷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영화관과 전시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앤더슨이 워홀의 영화에서 발견한 서스펜스의 형식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어지는 글에서 앤더슨이 전개한 논의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서스펜스란 기본적으로 의도(intention)와 반-의도(counter-intention)의 대립에서 비롯된 기대감에 의존하는 영화적 장치다. (가장 쉬운 예로,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주인공과 그것을 방해하는 이와의 대립을 지켜볼 때 느끼는 긴장감(“과연 누가 이길까?”)) 통상 서사영화에서는 서스펜스의 창출을 위해 주인공과의 동일시를 끌어들이긴 하지만 그게 꼭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즉 형식적 서스펜스(formal suspense)의 일종이라 할 워홀 영화의 서스펜스는, 음악에서의 소나타 형식을 지탱하는 서스펜스에 상응하는 것으로 극중 인물의 존재나 그와의 동일시 없이도 가능한 것이다. 워홀의 영화에서 극중 인물의 의도는 필름메이커(워홀 자신)의 의도로 대체되며 그에 대한 장애물 즉 반-의도의 역할을 하는 것은 [영화적] 질료의 저항(resistance of the material) - 필름 롤의 길이, 배우의 캐릭터, 재생산 장치의 한계들 - 이다. [6] 앤더슨은 다음과 같은 예들을 든다. 


우리는 <가련한 부자 소녀 Poor Little Rich Girl>(1965)를 볼 때, 영화제작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을 낭독하는 화면 밖 인물이 과연 필름이 다 돌아가기 전에 그 이름들을 다 말할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해 하게 된다. 그는 그러지 못한다. 영화는 그가 “촬영은 앤디…”라고 말할 때 끝나 버린다. 그 반대로, <비닐 Vinyl>(1965)에서는 로널드 태블이 쓴 다이얼로그가 필름이 다 돌아가기도 전에 바닥나 버린다. 배우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영화의 캐릭터인 채로 머무를 수도 없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은 그들은 [예정에도 없던] 파티를 벌이기 시작한다…[7] 
   

앤더슨 자신의 언급에는 빠져 있지만, 우리는 그러한 ‘형식적 서스펜스’가 <엠파이어>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고 할 수 있다. 일찌감치 워홀의 영화작업에 대한 책을 낸 바 있는 스티븐 콕 같은 이는 <엠파이어>를 두고 “영화적 시선의 뒤샹적 탈인간화(dehumanization)를 완성한 작품”이라고 적절히 평가하면서 “논의될 수는 있되 볼 수는 없게끔 구상된 영화”[8]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엠파이어>가 서스펜스의 순간을 완전히 배제한 영화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일몰 직후, 은은한 안개로 감싸인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점점 어둠에 덮여 가는 시간적 흐름이 담겨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지가 정적인 채로 머무는 것을 방해하는 컷, 광반(光斑) 등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형식적 서스펜스는 필름메이커의 의도와 질료의 저항이라는 반-의도 사이의 대립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필름의) 물성 간의, 혹은 지속과 변화 간의 충돌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고도로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야말로, 워홀의 숱한 영화 가운데서도 특별히 <엠파이어>가 시간의 건축술을 처음으로 예시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엠파이어>같은 영화가 영화관을 떠나 미술관으로 향할 때, 그 서스펜스의 순간들은 관람객의 우연한 발걸음과 그가 머무는 시간에 온전히 내맡겨진다. 

서스펜스는 중첩화될 수도 있다. 고든의 <24시간 사이코>는 서스펜스 자체를 하나의 (반-)의도로 삼아 형식적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것도 가능함을 보여준다. 즉, 히치콕의 오리지널 작품이 견인하는 서스펜스가 고든의 의도(느린 재생)와 충돌하는 데서 서스펜스가 발생하는 것이다. 한편 고든은 2008년에 <앞뒤로 이리저리 가는 24시간 사이코 24 Hour Psycho Back and Forth and To and Fro>라는 전시작품을 새로 내놓았는데, 이는 원래의 <24시간 사이코>를 순방향/역방향으로 재생해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스크린에 영사한 것이다. 이건 그야말로 의도와 반-의도를 철저히 비인격적(impersonal)이고 완벽하게 형식적인 차원에서 시각화한 것 - 이때 1993년 판 <24시간 사이코>의 서스펜스는 여기선 일종의 하위-서스펜스(sub-suspense)가 된다 - 이라 할 수 있는데, 서로 역행하는 이미지들은 서서히 하나의 같은 숏을 향해 나아가다가 딱 한 순간 동일한 프레임을 보여주며 서로 만나게 된다. 시간의 건축이 빚어낸 일출 혹은 일몰의 순간. (전시실에서 운 좋게 그 광경과 마주친 한 우연한 방문객의 환희를 상상해 보라.)   

시간의 건축에서 형식적 서스펜스가 구성적으로 활용되는 방식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몇몇 아방가르드 영화작가들이 서사의 미로를 해체하기 위한 전략으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다. 동시대 필름메이커들 가운데 가장 워홀적이라 할 인물일 제임스 베닝은 <엠파이어>에서 예시된 바와 같은 고도로 추상적인 형식적 서스펜스를 통해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연히) 발견된 서사”(found narrative) - ‘발견된 서스펜스’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이지만 - 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줄곧 16mm로 작업해 오던 그가 HD 카메라(소니 EX-3)로 촬영한 첫 영화인 <루르 Ruhr>(2009)는 불과 7개의 롱테이크 숏들만으로 이루어진 120분짜리 장편영화다. 자동차 터널, 철강공장, 뒤셀도르프 공항 근처의 숲, 이슬람 사원, 조각상의 낙서를 지우는 인부, 노동계급 거주지를 차례로 보여주는 1부, 그리고 코크스 제조공장의 거대한 타워를 보여주는 1시간짜리 고정숏 뿐인 (워홀의 <엠파이어>에 대한 오마주임이 분명한) 2부로 크게 나뉜다. 이 영화는 진정한 의미에서 순수한 ‘서스펜스(로 가득한) 영화’라 불려야 마땅할 것인데 바로 정적인 상태의 과도한 지속을 통해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 결과 화면상의 사소한 변화나 디테일조차도 눈여겨봐야 할 ‘사건’(반-의도)으로 여겨지게 되며, 때로 그보다 의미심장한 사건 - 그렇다고 해도 자동차가 지나간다거나, 비행기가 일으킨 바람에 나뭇잎이 격렬하게 흔들린다거나, 코크스 타워 곳곳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온다거나 하는 정도이지만 - 이 일어나고 또 그것이 반복될 때면, 그것은 가히 폭풍 같은 위세로 보는 이를 흔들어 놓고야 만다.

베닝의 서스펜스가 지속/변화의 쌍에 의해 지탱된다면, 켄 제이콥스, 피터 체르카스키, 마르틴 아르놀트 같은 영화작가들의 작품에서의 서스펜스는 이미지/물성의 쌍에 의해 지탱된다. 이들은 모두 (조셉 코넬의 <로즈 호바트 Rose Hobart>(1936)와 브루스 코너의 <영화 A Movie>(1958), 그리고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시적 에세이 <분노 La Rabbia>(1963/2008) 등 선구적인 작업들이 존재하지만) 1980년대 이후 1990년대를 거치면서 포스트-아방가르드 영화 뿐 아니라 미술 전시에서도 보편적인 기법이 된 기존의 영상물 - 필름의 경우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라 불리는 - 을 활용하는 작업에 관심을 기울여 왔는데, 원래 이는 (우연히) 발견된 오브제 혹은 레디메이드 오브제라고 하는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미술이 제시한 개념을 영화로 끌어 온 것이다. 여기서 기존의 영상물(영화, 뉴스릴, 사적인 홈무비, 사용되지 않은 아웃테이크 등등)들은 모두 오브제로서 간주된다. 그런데 전시 작품들에 이러한 기법이 활용될 경우 “경직되고 소외된 것에 대한 미메시스”[9]라고 하는 아도르노적 개념이 두드러져 보이는 반면, 보다 ‘영화적’인 작품들에선 (코너나 아르놀트의 작업은 오히려 예외적인 것으로 여겨질 만큼) 그런 경향이 좀 덜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10]


[간주곡] 시간의 건축과 관객성 : 정신분산 속의 수용


크리스찬 마클레이의 <시계>에서 작동하고 있는 형식적 서스펜스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지속/변화의 쌍이라 할 수 있다. 숱한 영화들에서 특정한 시간에 대한 직간접적 지시를 담고 있는 부분들을 발췌해 이를 레디메이드 오브제로서 활용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각각의 클립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의미화되기 전에 재빨리 다른 클립으로 전환되어 버린다. 즉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클립이 대체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또 그 뒤에 이어질 클립은 이것과 특정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일지 아닐지 - <시계>에서는 앞선 클립보다 단지 시간이 경과했다는 걸 알려주는 것 이외에 아무런 의미론적 연관도 없는 클립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며 불현듯 의외의 의미론적 연관이 생겨나기도 한다. - 알 수 없다는 데서 형식적 서스펜스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특징으로 인해 <시계>는 일견 “구성에 대한 감각이 거의 없이 각각의 단편들만 끝없이 이어붙인” 작품처럼, “편집의 윤리라고는 없는” 작품처럼, 심지어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서도 만들어질 수 있을” 작품처럼 비칠 수도 있다.[11]  나는 여기서 <시계>가 그처럼 편집의 윤리라고는 없는, 구성에 대한 감각이 결여된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작품이 관람자에게 그러한 인상을 준다는 사실 자체에 꽤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시계>는 관람자와 작품 사이의 접촉이 (전시실 방문시간이나 방문회수에 따라) 매우 가변적일 수밖에 없는 시간의 건축의 관람경험에 매우 적합한 구성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때 현대의 대중들이 예술을 수용하는 방식에 관한 발터 벤야민의 논의를 참조해 볼 필요가 있다. 

그의 논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종종 진부한 방식으로만 인용되거나 또 오해되기도 하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2]에서 벤야민은 예술의 현대적 수용양상을 논하기 위해 건축의 은유를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 ‘시간의 건축적 경험’이라는 본고의 주제 역시 벤야민의 논의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 끌어오고 있다. 벤야민은 건축물의 수용을 정신분산 속의 수용, 혹은 촉각적 수용이라는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바라본다.


예술은 정신집중을 요구하는 데 반해 대중은 정신분산을 원한다는 오래된 개탄 [...] 그것은 상투적인 얘기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상투적인 얘기가 영화를 연구하기 위한 하나의 입지점을 제공해주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는 보다 자세히 살펴봐야 할 문제이다. 정신분산(distraction)과 정신집중(concentration)은 서로 상반된 개념이다. 우리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작품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집중하는 사람은 그 작품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 이에 반해 정신이 산만한 대중은 예술작품이 자신들 속으로 빠져 들어오게 한다. 이러한 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건축물이다. 예로부터 건축은 정신분산 속에서, 그리고 집단적 방식으로 수용이 이루어지는 예술작품의 원형이었다. 건축의 수용이 이루어지는 법칙들을 보면 우리는 이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 건축물의 수용은 두 가지 측면, 즉 사용과 지각, 더 정확히 말하면 촉각과 시각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러한 수용방식은 우리가 이를테면 관광객들이 어떤 유명한 건물 앞에서 주의력을 집중하여 그 건물을 수용하는 식으로 상상하면 전혀 파악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각적인 면이 갖는 관조에 해당하는 것이 촉각적인 면에는 없기 때문이다. 촉각적인 수용은 주의력의 집중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습관(Gewohnheit)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건축에서는 심지어 습관이 시각적 수용을 규정하기도 한다. 시각적 수용 역시 긴장된 관찰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무심코 주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처럼 건축물을 통해 형성되는 수용방법은 특정한 상황에서는 규범적 가치를 갖게 되는데, 그 이유는 역사의 전환기에 인간의 지각기관에 부여된 과제는 단순히 시각, 다시 말해 관조를 통해서는 전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제는 촉각적 수용의 주도하에, 즉 습관을 통해 점차적으로 극복된다.[13]


건축을 그 구상(설계)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감상(경험)의 관점에서 봄으로써 벤야민은 매우 동시대적인 관객성에 잠재된 혁명적 가능성을 읽어낼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주류 영화비평이 전제하는 영화적 관객성은 벤야민의 바람대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시네필리아(cinephilia)적 영화문화는 벤야민이 말한바 “아우라의 위축에 대항”[14]하기 위해 영화적 경험의 일회성과 고유성을 강조하는 -  언제 어디에서 어떠한 이들과 한 편의 영화를 함께 보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식의, 초기 기독교적 예배의 형식을 모델로 삼은 듯한 유사-종교적이고 사이비적인 공동체주의. 이런 태도를 고수하는 이들의 진술 가운데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오래되고 낡고 불편한 옛 영화관들이나 가설(假設) 영화상영 공간들에 대한 낭만적 향수이다. - 다분히 반동적인 특권의식을 산출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시네필리아가 정신집중을 요구하는 강박적 보기와만 결부 - 사실 이건 앞에서 언급한바 시네필적이라기보다는 마니아적 관객성이다 - 되어 있을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위대한 시네필들은 정신분산 속에서 유희하되 특정한 영화적 사물이나 영화적 순간과의 빈번한 마주침에 의의를 부여하는 촉각적 수용 혹은 습관에 의거한 수용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특권적 순간’(privileged moment) 개념이나 하스미 시게히코의 ‘주제론’적 비평 - 둘 모두 영화의 제 요소에 대한 지속적 집중보다 특이한(singular) 것에 대한 국지적 몰두를 강조하는 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국지적 몰두를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전작(全作)관람이나 반복관람을 통한 습관에 의거한 수용이다. - 등은 그 좋은 예다. 시네필들은 산만할 수도 있고(자크 리베트의 경우), 영화를 파편적으로 보고(고다르나 영화평론가 마니 파버[15]의 경우), 심지어 종종 졸기도 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특정한 영화적 사물과 순간이 등장할 때면 그 누구보다 강렬하게 매혹되어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16] 

그러나 우리는 영화가 여전히 종종 “긴장된 관찰”을 요구하는 매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건 바로 서사라는 미로의 매혹적 힘 때문이다. 벤야민이 그의 논문에서 영화를 “정신분산 속의 수용”을 훈련시키는 특권적 매체로 간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보았던 당대의 영화들이 (그가 깊은 관심을 보인 채플린의 초기영화들처럼) 단단하게 서사적이라기보다는 상황의 연쇄적 제시(presentation)에 몰두하면서, 영화학자 톰 거닝이 명명한바 영화사 초기의 “어트랙션 시네마”(cinema of attractions)의 흔적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던 것들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이후의 영화는 벤야민의 바람처럼 전통적 예술수용의 기준에 도전을 제기하는 촉각적 수용 혹은 건축적 수용의 매체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다만 영화의 대안적 수용 가능성을 답사하는 일부의 시네아스트들(창작의 측면)과 시네필들(수용의 측면)이 있었을 뿐이다. 상황이 좀 달라진 것은 시간이 지나 영화이미지의 상상적 아카이브가 축적되고 또 그 아카이브의 영상물들이 일종의 레디메이드 오브제로 간주되기 시작하면서 - 이는 몇몇 아방가르드 영화와 <시계> 같은 영상설치작품 뿐 아니라 오늘날 유튜브로 대표되는 인터넷 유희-공간(Spiel-Raum)[17]의 영상물들을 지배하는 원리기도 하다 - 그리고 영화(적) 작품이 전시공간으로 진입하면서부터다. 전시공간의 유사-건축적 특성은 그곳에 전시되는 영화(적) 작품의 미로적 서사를 와해시켰으며, 또한 관람객과의 우연적이고 부분적 접촉에 최적화된 현행성(actuality) 강한 작품 - 이러한 현행성을 미니멀리즘적으로 강화한 것이 바로 네오-뤼미에르주의(neo-Lumierism)로 영화감독들의 작업 가운데서는 제임스 베닝이나 어니 기어의 최근작들이 이에 속한다 - 으로의 변모를 촉진시켰다. <시계>의 독특한 점은 1) 레디메이드 오브제로서의 영상물의 활용에 있어 (앞서 인용한 싱클레어의 말처럼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서도 만들어질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안티-휴머니즘적 자동주의(automatism: 자동기술법)의 개념을 도입했다는 점, 2) 그리고 관람자의 사적 시간과 작품의 시간을 동조화시키는 방식으로 실현한 현행성, 3) 24시간에 달하는 상영시간 때문에 단숨에 작품 전체를 관람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부분적인 관람과 그 반복을 통해 작품의 전체적인 인상을 파악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건축적 형식, 이 세 가지를 종합한 사실에 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마클레이에 의해 처음 시도된 것은 없다.) 그럼으로써 <시계>는 구성적 긴장을 잃지 않으면서도 강박적 보기를 요청하지는 않는 시간의 건축의 이상적인 모델이 될 수 있었다. 워홀의 <잠>이 상영되는 극장을 뛰쳐나와 환불을 요구하던 관객들은 이제 마클레이의 작품을 보다 잠시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부담 없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관람객으로 전환될 수 있다. 

마클레이의 <시계>가 영사되고 있는 전시공간을 벗어나 어슬렁거리는 관람객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몽상적 혁명가들(뤼미에르, 초현실주의자들, 벤야민)이 자신들의 시대에 속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하지만 실은 그들의 당대엔 아직 도래하지 않았던 것의 입구를 서성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사태를 좀 더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 “정신분산 속의 수용은 영화에서 그 고유한 연습수단을 갖고 있다”[18]는 벤야민의 말은 그가 그 문장을 쓰던 당시에는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 예언이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고쳐 써야 한다. 정신분산 속의 수용은 시간의 건축에서 그 고유한 연습수단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신분산 속의 수용이 한때 영화적 모더니스트들을 사로잡았던 브레히트적 도그마에 대한 대안인 것은 분명하지만, 시간의 건축 앞을 서성이는 부주의한 관람객들은 건축적이고 촉각적인 수용, 즉 습관을 통해 예술적 과제의 해결에 도달하기보다는 그저 부주의한 채로만 남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시간의 건축이라는 연습수단과 더불어 이미지/사운드의 새로운 해방적 교육학(pedagogy)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본고의 2장과 3장에서 블랙큐브(black cube)로서의 영화관과 포스트-프로덕션으로서의 영화비평이라는 개념을 통해 동시대 영화의 변모양상을 고찰하면서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건축적 시간의 구성 (2) : 샘플링과 자동주의


“그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들의 얼굴 표정을, 매분 60초 동안 째깍거리는 자명종의 숫자판과 맞바꾸며 짓고 있다.” (발터 벤야민, 「초현실주의」) 


싱클레어의 말대로 <시계>는 편집의 윤리라고는 없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서도 만들어질 수 있을 작품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한편으론 그 어떤 갤러리 인스톨레이션 작품보다 편집이 큰 역할을 하는 작품인 것도 사실이다. (이 작품을 보는 동안 우리는 하나의 클립 다음에 언제 어떤 것이 이어질 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는데 이 점에서 <시계>는 편집의 이상을 완벽하게 구현한 작품이자 형식적 서스펜스가 매 순간마다 작동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편집의 윤리는 없을지 모르지만 분명 엄수해야 할 조건은 있는데 매 순간 화면에 나타나는 시간과 관람객의 시간을 동조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클립의 선택과 배열에서 최우선적으로 고려되는 것은 언제나 시간의 지표들이고 이미지의 그래픽적인 조화, 액션의 연결, 리듬의 창조, 의미론적 연관 등 편집의 일반적 고려사항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하나의 물리적 요소(시간)가 절대적으로 강제되고 클립의 선택과 배열은 다분히 우연적 발견에 내맡겨짐으로써 <시계>에는 안티-휴머니즘적 자동주의의 개념이 스며들게 된다.

컴퓨터 프로그램의 예술적, 창조적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작업은 꽤 일찍 대대적으로 수행된 바 있다. 야샤 레이하르트의 기획 하에 런던 현대미술연구소(ICA: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에서 1968년에 열린 ‘사이버네틱 세렌디피디’(Cybernetic Serendipity) 전시회[19]가 그것이다. 이 전시에서는 컴퓨터의 창조성과 인간의 창조성 사이의 가능한 연결을 탐색하기 위한 시도가 음악, 무용, 건축, 문학, 회화, 영화 등의 영역과 관련해 다각도로 행해졌으나 전시된 영화 관련 프로젝트의 경우 존 H. 휘트니의 <순열 Permutations>처럼 아방가르드 계열의 추상적 구조영화와 유사한 것이거나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실험에 국한되어 있어 본고의 논지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 마클레이의 <시계>와 관련해 보다 흥미롭게 보이는 쪽은 언어적 텍스트의 통사론적 구조를 컴퓨터로 프로그래밍한 뒤 인간 오퍼레이터와의 적절한 상호작용에 따라 시나 산문 등의 텍스트가 산출되게끔 하는 프로젝트다. 

그 가운데 가장 단순한 하이쿠 작성 프로그램은 오퍼레이터가 그 안에 단어를 입력할 수 있는 9개의 ‘슬롯’(slot)을 지닌 프레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의미론적 도식을 묘사하자면 <그림 1>과 같다. (잘 살펴보면, 이 프레임은 영문 하이쿠를 산출하기 위한 것이긴 하지만 일본 하이쿠의 5-7-5 총 17자의 음절에 상응하는 총 17개의 영단어로 구성되게끔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1> 컴퓨터 프로그램화된 하이쿠의 의미론적 도식 

오퍼레이터의 선택은 전적으로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1) 각각의 슬롯에 해당되는 시소러스(thesaurus)의 리스트[20]  내에서만 단어 선택이 가능하며 2) 또한 그림의 화살표가 나타내는바 각 슬롯에서의 단어 선택은 다른 슬롯에서의 단어 선택에 의해 제한적으로 구속되고 3) 2번과 6번 슬롯, 5번과 8번 슬롯처럼 상호구속적인 경우 어느 쪽이건 화살표의 한 방향만을 취해 단어 선택에 구속을 가해야 한다. (이는 시스템의 연산처리가 가능하게끔 하기 위해서다.) 그림에서 화살표의 배치를 잘 살펴보면 이 하이쿠 프로그램의 의미론적 중심은 (안으로 들어오는 다섯 개의 화살표와 밖으로 향하는 한 개의 화살표가 있는) 5번 슬롯에 할당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구속조건들이 존재하는 것은 이 하이쿠 프로그램이 전적으로 무작위적인 선택에 의해 무의미(nonsense)한 텍스트를 산출해내지 못하게끔 하기 위해서다.[21]  

여기서 굳이 하이쿠 프로그램에 대해 언급한 것은 마클레이의 <시계>가 사뭇 형식주의적 혹은 구조주의적인 개념에 기반하고 있는 작품이라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둘의 차이를 보기 위해서다. <시계>가 관람객의 현실의 시간과 동조된 24시간 각각의 순간들을 일종의 ‘슬롯’으로서 지정하고 있으며 영화사(史)의 숱한 영화들에서 발췌한 시간과 관련된 장면들의 가능한 목록을 각 슬롯의 ‘시소러스’처럼 활용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의미론적 중심이라 할 시계 이미지는 하이쿠 프로그램처럼 단 하나의 슬롯에 할당되기보다는 아예 작품 전체 거의 모든 슬롯에 산재해 있고, 오직 하나의 단어만이 입력될 수 있는 하이쿠 프로그램의 슬롯에 비해 <시계>의 슬롯의 볼륨은 훨씬 가변적(사실상 예측불가능)이다. 구속조건은 하이쿠 프로그램보다 훨씬 간단해서 작품의 전체 길이가 정확히 24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작품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이 동조화되어야 한다는 것 이외엔 없다. (즉 편집의 윤리를 떠나 아예 영상편집의 관습적 원칙들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다. 거듭 말하건대, 바로 이점이 <시계>의 형식적 서스펜스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시계>는 시계(시간)에 대한 작품인 동시에 그 자체가 하나의 시계(기계)로서 기능한다. 마클레이는 예술가라기보다는 디지털 시대 소프트웨어의 힘을 빌려 과거의 아카이브에서 찾은 소재들을 (현실의 시간과 동조되게끔) 정밀하게 배열하는 근면한 시계공에 가깝다. 바꿔 말하면 그는 창작자(creator)라기보다는 조립공(assembler)이다. 그에게 정밀한 조작을 가능케 한 것은 어느 때고 영상의 각 부분을 정확히 시간적으로 체크할 수 있게끔 하는 디지털 비선형(non-linear) 편집프로그램이었음은 분명하다. 또한 기존 영화에서 발췌한 클립들의 더미를 마클레이가 일종의 시소러스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100년이 넘는 영화사를 통해 충분한 이미지의 아카이브가 축적되었기 때문이며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 그 영상들이 디지털동영상이나 DVD처럼 디지털 편집에 용이한 형태로 변환되었기 때문이다.[22] 가령 일일이 각 영화의 판권보유자에게 연락을 취해 허락을 받고, 해당 클립의 필름프린트를 구하거나 새로 제작하고, 이 프린트들을 가지고 고전적 무비올라(Moviola) 편집기에서 <시계> 같은 작품을 완성해낸다는 건 거의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마지막으로 <시계>의 시간적 정밀함을 가능케 한 또 하나의 기술적 요소는 필름프린트나 자기테이프 대신 하드드라이브를 활용하는 영사시스템이라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만일 <시계>가 필름프린트나 자기테이프에 기록된 작품이었다면 릴 혹은 테이프 교체시마다 작품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이 조금씩 어긋날 수밖에 없다.)[23] 

하이쿠 프로그램이 컴퓨터가 보다 엔트로피가 높은 복잡한 텍스트를 산출해낼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형식주의적 야심에 근간한 것이라면 마클레이의 <시계>는 그러한 야심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시계>는 하이쿠 프로그램과 같은 컴퓨터 텍스트 프로그램으로부터 형식적 개념(슬롯과 시소러스)은 빌려오되 그 의미론적 구조에는 거의 눈을 돌리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무의미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렇다고 해서 <시계>가 전적으로 장면들의 무의미한 연쇄로만 이루어진 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시계>의 제작에서 각각의 시간슬롯에 시소러스의 영상자료들을 할당하는 작업은 다른 슬롯과의 연관이 반드시 고려될 필요는 없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 의지적인 선택 - 가령 오후 5시, 업무를 마치는 이들의 모습이 담긴 여러 쇼트들을 편집해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시계>는 사운드 편집의 묘미가 십분 발휘된 작품이기도 하다. - 과 비의지적인 선택 사이를 오갔을 것이다. 또한 시간의 동조화라는 구속조건을 엄수해야 한다는 것은 클립의 선택이 전적으로 마클레이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정한 시간대에는 가용한 클립들이 매우 제한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24] 그런가 하면 우리는 그가 시계가 보이거나 시간이 암시되는 장면들을 찾기 위해 기존 영화의 DVD를 잔뜩 쌓아두고 고속재생으로 필요한 부분을 탐색하는 광경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건 퍼포먼스에 사용할 적절한 음원들을 찾기 위해 숱한 레코드와 디스크의 이곳저곳을 돌려보고 분류하는 디제이(DJ)의 작업에 가까운 것이다.[25] 
    
레디메이드 오브제로서의 과거의 영화들을 흡사 음원처럼 샘플링하고, 기본적인 구속조건(24시간이라는 러닝타임과 시간의 동조화)을 엄수하면서 그것들을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의 상호작용 하에 선택하고 배열하는 작업 속에서, 마클레이는 기묘하게도 자동주의(자동기술법) 혹은 “신문의 표제나 이 표제의 단편을 한 부분 잘라내서 그것들을 되도록 아무렇게나 (만약 필요하다면 문장의 구성에는 유의하되) 주워 모아서” 시를 창작할 수 있다고 주장한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적 작법[26]에 가까이 다가간다. 이러한 특성은 <시계>를 (극의 진행 시간과 상영 시간을 거의 일치시키려 시도한 이른바 ‘리얼-타임’ 작품들인) <하이 눈 High Noon>(프레드 진네만, 1952),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Cleo from 5 to 7>(아녜스 바르다, 1961) 그리고 최근의 <24>(2001~2010) 같은 TV시리즈와 확연히 다른 것으로 만든다. 사운드아티스트로서의 마클레이가 예전에 선보였던, 망가지고 쪼개진 레코드판들을 다시 조립(assemblage)하여 여러 대의 턴테이블에서 즉흥적으로 디제잉하는 퍼포먼스 역시 앞서 서술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그가 여러 개의 레코드판을 이용해 만든, 회화와 조각 사이 어딘가에 자리할 수도 있을 법한 <재활용 레코드 Recycled Records>(1987)를 보라. (<사진 1> 참조) 

<사진 1> 크리스찬 마클레이, <재활용 레코드>(일부)

나는 여기서 마클레이가 벤야민이 초현실주의의 가장 고유한 과제라고 불렀던 “혁명을 위한 도취의 힘들을 얻기”[27] 위해 전념하는 예술가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초현실주의가 꿈, 몽상, 광기, 우연 등에 몰두했음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종종 간과되어온 그 아방가르드적 작법의 탈개인주의적, 비인칭적 성격 - 이를 간과하고 비이성적 소재들에만 집착하면 초현실주의는 낭만주의와 별다를 바 없거나 적어도 그 계보 하에서 이해 가능한 예술운동으로 격하되고 만다 - 을 마클레이가 복원하고 있음을 주목할 뿐이다. 초현실주의가 꿈, 몽상, 광기, 우연 등의 비이성적 혹은 무의식적 영역에 관심을 기울였음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경험을 넘어선 비인칭적 무의식 - 개체적 수준이 아니라 종적 수준에서 작동하는 무의식 - 에 대한 관심, (칸트의 용어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무의식의 초월론적(transcendental) 조건에 대한 관심이었음을 유념해야 한다. 앙드레 브르통이 자동기술법이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시를 써도 된다는 식으로 이해되는 것을 그토록 혐오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초현실주의의 창작기법들은 무의식의 초월론적 조건이 의식의 도구나 산물(언어와 오브제)과 충분히 무매개적으로 상호작용하게끔 하기 위해 개인적이고 의지적인 것의 흔적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가능한 지우는 ‘실험’의 기술로서 고안된 것이다.[28] 브르통에 따르면 초현실주의는 “마음의 순수한 자연현상으로서, [...] 이성에 의한 어떠한 감독도 받지 않고 심미적인, 또는 윤리적인 관심을 완전히 떠나서 행해지는 사고의 구술”[29]이어야 했다. 이는 낭만주의적 상상력의 분출이나 욕망의 폭거 따위와는 하등 관련도 없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의 입장에서, 결국 훌륭한 작가란 다만 정밀한 지진계로서의 역할을 떠맡는 자다. 각각의 개인이 “자아를 느슨하게” 하면서 이 실험에 충실하게 참여할 때, 비로소 만남의 장소가 열리는 것이다. 초현실주의 운동 참여자들 간의 분열이 극에 달했던 1929년, 브르통은 그 운동의 기관지 『초현실주의 혁명 Révolution Surréaliste』 최종호에 운동의 배신자들에 대한 단죄와 동시에 비타협적 다짐으로 넘쳐나는 초현실주의의 제2차 선언을 발표했는데, 그 선언문의 한 주석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언급이 적혀 있다. 이는 ‘초현실적인 유희’가 단지 정신의 어지러운 난교가 아니라 자동성의 힘을 빌려 개인적인 것을 넘어선 공통의 그 무엇을 발견하기 위한 실험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각종의 실험을 통해서 사고의 흥미 있는 가능성, 말하자면 사고의 공통성도 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을 부각시켰다고 생각하는 바다. 이러한 방법에 의해서 언제나 중요한 관계가 성립되며, 주목할 만한 유사성이 나타나며, 부정하기 어려운 설명 불능의 인자가 극히 자주 개입하며, 그리하여 결국은 아주 이상한 만남의 장소가 거기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30] 


한편 벤야민은 초현실주의자들이 특유의 창작기법을 통해 접근하려 시도했던 경험에 “범속한 각성”이라는 근사한 명칭을 부여하기도 했다. 


삶은 깨어남과 잠 사이의 문지방이 마치 이리저리 넘쳐흐르는 수많은 이미지들의 자국들로 밟히듯이 모든 이의 삶 속에서 밟혔을 때에만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듯이 보였다. 언어는, 소리와 이미지가, 그리고 이미지와 소리가, ‘의미’라는 동전이 들어설 틈이 더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자동기계적인 정확성을 갖고 서로 행복하게 맞아떨어질 때에만 언어 자체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지와 언어가 가장 먼저 입장할 권리를 갖는다. 생 폴 루는 아침녘에 잠자러 가면서 그의 방문에 “시인은 작업 중”이라는 팻말을 붙였다. 브르통은 이렇게 적었다. “조용. 나는 아직 아무도 통과하지 않은 곳을 통과하려고 합니다. 조용! 먼저 들어가시죠, 사랑스런 언어여.” 언어가 먼저 들어갈 권리를 갖는다. 의미보다 먼저인 것만이 아니다. 자아보다 먼저이기도 하다. 세계의 조직 속에서 꿈은 개성을 벌레 먹은 치아처럼 느슨하게 한다. 이처럼 도취를 통해 자아를 느슨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이 사람들을 도취의 마력에서 탈출시킨 생산적이고 생생한 경험이다. [...] ‘초현실주의적 경험들’에 관해 우리가 종교적 엑스터시나 환각제의 엑스터시만을 알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이다. [...] 종교적 각성을 참되고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결코 환각제를 통해서가 아니다. 그 극복은 범속한 각성, 유물론적이고 인간학적인 영감 속에서 이루어진다.[31]  


이러한 초현실주의의 유산을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 <시계>는 하나의 비인칭적 무의식, 기계의 무의식, 말하자면 영화적 무의식이라 불릴 만한 것의 존재를 훌륭하게 드러낸다. 이제 영화의 역사란 영화의 비인칭적 무의식을 탐사하기 위한 재료들의 보고, 시소러스로 간주될 수 있다. (한편, 누벨바그의 일원 가운데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애티튜드를 견지해 온 인물인 고다르[32]에게 있어선 영화의 역사란 오욕의 아카이브로 간주된다는 점도 상기해 두자.) 하지만 그것은 오직 멀리 떨어져 있던 이미지들이 한꺼번에 서로 만나는 순간에만 잠깐씩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시계>는 무수한 이미지들의 집적을 통해, 픽션영화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자고, 어떻게 일어나며, 어떻게 거리를 걷는 지 등등, 싱클레어가 간파한 대로 “연극적 제스처의 식별”[33]이 가능하게끔 우리를 훈련시키는 이미지의 교육학을 제공하는 작품이다. 덕분에 우리는 각각의 클립들이 원래의 맥락에 놓여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을, 집요한 반복 속에서, 벤야민적인 촉각적 수용을 통해 발견해낼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시계>는 모든 픽션영화란 결국 카메라 앞에 선 배우들의 연기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착시효과에 입각해 집적한 것에 불과하다는 자명한 사실[34]을 강력하게 폭로하는 작품이 된다. “인간이 기계장치를 통해 재현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자기소외가 지극히 생산적으로 활용되게 되었다”는 벤야민의 과격한 주장은, 자동주의의 개념을 끌어온 시간의 건축에서 비로소 그 온전한 의미를 얻는다. <시계>는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평생의 축도로서의) 24시간 동안 펼쳐지는 온갖 연극적 제스처들에 관한, 차례도 색인도 없는 백과사전이다. (Part.1 끝) 



[1] 나는 여기서 다큐멘터리나 에세이영화들은 제외했으며 또한 애초부터 에피소드 단위로 나뉘어 상영(혹은 방영)될 것을 감안해 제작된 작품들도 고려하지 않았다. 예컨대 무성영화시기에 만들어진 시리즈물들(루이 푀이야드)이나, TV에서 방송될 것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자크 리베트의 <아웃 원 Out 1 : noli me tangere>(1971, 12시간),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Berlin Alexanderplatz>(1980, 총 15시간 30분), 에드가 라이츠의 <고향 Heimat> 3부작(각각 1984년, 1993년, 2004년에 방송됨, 총 52시간 25분) 등등. 물론 오늘날 <아웃 원>이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이 예술영화관 및 영화제 등에서 전체가 한꺼번에 상영되곤 - 대개 이틀에 걸쳐 -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들 작품의 구성방식은 본문에 언급된 영화들처럼 반드시 전편이 (15분 내외의 휴식시간이 몇 차례 주어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중단 없이 감상될 것을 요하는 작품들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가령, 벨라 타르의 <사탄탱고>가 며칠 혹은 몇 주에 걸쳐 에피소드별로 나뉘어 상영(혹은 방영)된다면, 『팔월의 빛』이나 『압살롬, 압살롬』을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의 포크너적 측면은 관객들에게 거의 감지되지 못하거나 불충분하게만 전달될 것이다.

[2] 가라타니 고진, 『은유로서의 건축 : 언어, 수, 화폐』, 김재희 옮김, 한나래, 1998

[3] 관객에게 몰입 혹은 강박적인 관람을 요구하지 않는 앤디 워홀의 영화를 묘사하기 위해 사람들은 종종 이런저런 비유들을 가져다 쓰곤 했다. 예컨대, 톰 앤더슨은 <잠>에 대해 “나무, 돌 혹은 건물처럼 자기충족적(self-sufficient)인 영화”라고 주장했는가 하면, 장-뤽 고다르는 <첼시 걸즈 The Chelsea Girls>(1996)에 대한 감상을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하기도 했다. “매우 흥미로웠다. 뉴욕필름페스티벌에서 그 영화를 보았는데 로비에 있는 루프머신으로 상영되고 있었다. 무척 마음에 드는 아이디어였다. 원하는 만큼 보다가, 다른 곳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 좀 더 볼 수 있었다. 아주 좋다고 생각한다.” 이어서 상영시간이 이례적으로 긴 워홀의 영화에 대해 “그것은 살아 있는 조각 같다”고 말한다. (데이비드 스테릿 엮음, 『고다르 X 고다르』, 박시찬 옮김, 이모션 북스, 2010, p.31-2.) 좀 과격한 주장이 되겠지만, 나는 고다르의 영화에는 그가 워홀 영화(및 그것이 ‘전시’되는 방식)의 매력이라고 느낀 것과 유사한 것들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 그는 다른 방식의 시간의 건축술을 실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다만 나는 고다르의 <영화사(들)> 같은 작품이 반드시 ‘통독’의 형식으로 감상될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컨대 작년(2010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이 작품이 ‘전시’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한편 고다르는 이 작품이 네 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이유에 대해 “집에는 네 개의 벽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Jean-Luc Godard & Youssef Ishaghpour, Cinema: The Archaeology of Flm and the Memory of a Century (Oxford: Berg, 2005), p.5)

[4] 할 포스터, 로잘린드 크라우스, 이브-알랭 브아, 벤자민 H.D. 부클로, 『1900년 이후의 미술사』, 배수희, 신정훈 외 옮김, 세미콜론, 2007, p.667 

[5] Thom Andersen, “Andy Warhol,” in Astrid Johanna Ofner (ed.) Andy Warhol Filmmaker (Wien: Viennale, 2005), p.8-9

[6]  Thom Andersen, 앞의 글, p.9 

[7] Thom Andersen, 앞의 글, p.9

[8] Stephen Koch, The Life, World & Films of Andy Warhol, (New York-London: Marion Boyars, 1973/1991), p.59-62

[9] T.W. 아도르노, 『미학이론』, 홍승용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84/1997, p.44 “절대적인 예술작품은 절대적인 상품과 접하는 것”으로 “예술은 자신에 대해 타율적인 시장의 이미지를 자신의 자율성 속에 이끌어 들임으로써만 그러한 타율적 시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 아도르노의 논쟁적인 주장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페터 뷔르거에 의해 다음과 같이 비판받기도 했다. 뷔르거에 따르면 아도르노는 “새로운 것의 카테고리를 엄밀하게 역사화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의 카테고리를 직접 상품사회로부터 이끌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뷔르거는 아도르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그가 “경직되고 소외된 것에 대한 미메시스”라 부른 것은 사실상 앤디 워홀의 (캠벨수프 깡통 작품처럼) 공허한 기획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롱조로 덧붙인다. (페터 뷔르거, 『아방가르드의 이론』, 최성만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09, p.120-121)

[10] 오스트리아 영화비평가 알렉산더 호바트는 피터 체르카스키의 파운드 푸티지 영화들과 더글러스 고든의 영상 설치작품들 사이의 차이는 비평적 차원의 유무에 있다는 (호바트 스스로도 인정하듯) 논쟁적인 견해를 내놓은 바 있다. 호바트에 따르면 파운드 푸티지에 근거한 체르카스키의 “실천적인 영화비평”은 모든 재료들을 “면밀히 숙고하고, 분석하고, 밝혀냄”으로써 “심오함의 차원”에 맞닿지만, 고든의 작품에서 활용된 <사이코>, <수색자들>, <택시 드라이버> 같은 영화들은 “인위적인 방식에 의해 하나의 농담거리로 축소”될 뿐이다. (알렉산더 호바트, 「빗 속에서 노래를 : 피터 체르카스키의 슈퍼시네마토그래피」, 2006년 전주국제영화제 회고전 카탈로그. 원문은 www.sensesofcinema.com/2003/28/tscherkassky) 다만 호바트가 파운드 푸티지 전시작품들에 모종의 적대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한데, 예컨대 그는 스탠 더글러스의 유명한 작품 <서곡 Overture>(1986)에는 상당한 호의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더글러스의 <서곡>은 고든의 <24시간 사이코> 같은 작품에 비해 훨씬 짧고(7분), 전시작품으로선 영화관용 영화에 매우 가까우며(16mm 프린트 한 벌), 무엇보다 더 “비평적”(호바트의 말대로, 에디슨과 프루스트의 만남)이다. 내가 보기에, 호바트가 고든의 작업에 보인 적대감은, 대부분의 영화비평가들이 시간의 건축을 대할 때 보이는 전형적 태도의 반영일 뿐이다.  

[11] 영화감독 크리스 페티와 작가 이앤 싱클레어는 마클레이의 <시계>를 시간을 두고 관람하면서 그때그때 떠올린 생각들을 이메일을 통해 서로 교환했는데 2010년 10월 15일부터 11월 25일까지 둘 사이에 오간 이메일들은 미국영화잡지 『필름 코멘트 Film Comment』를 통해 소개된 바 있다. 본문에서 인용한 언급들은 싱클레어가 페티에게 보낸 10월 15일자 이메일에서 따온 것이다. Chris Petit & Iain Sinclair, “Time Pieces,” in Film Comment (May-June 2011)     

[12] 벤야민의 이 유명한 논문은 사실 벤야민 자신이 ‘원판’이라 부른 2판(1936)과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로부터 수정요구를 받은 뒤에 쓴 3판을 비교함으로써 2판에는 있으나 3판에는 빠져 있는 경우 혹은 그 반대의 경우를 면밀히 살펴 볼 때 굉장히 흥미로운 시사점들을 얻게 된다. 우리는 벤야민의 단언들 뿐 아니라 그의 망설임의 흔적으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2판에는 있으나 3판에선 삭제된 부분들만을 살펴보자. “혁명이란 집단적 신경감응(collective innervation)”이라는 주장은 그의 다른 논문 「초현실주의」(1929)와의 관련 하에서 더욱 큰 의미를 얻게 되며, “인간이 기계장치를 통해 재현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자기소외가 지극히 생산적으로 활용되게 되었다”는 과격한 발상은 「사진의 작은 역사」(1931)에서의 “초현실주의적 사진이 세계와 인간 사이의 유익한 소외를 준비하고 있다”는 견해를 보다 확대한 것이다. 물론 “영화는 사디즘적 또는 마조히즘적 망상들이 과장되게 발전한 모습들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에서 그러한 에너지들이 자연스럽고 위험한 방식으로 성숙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고 말하며 영화의 “정신적 예방접종” 기능을 역설하는 식의 문제적 주장도 있다. 이는 영화이미지의 기호적인 동시에 현실적인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단순한 주장이다.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2판과 3판은 다음의 책에 모두 번역, 수록되어 있다. 『발터 벤야민 선집 2』,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07 

[13]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3판)」, 앞의 책, p.144-6

[14] 벤야민은 아우라의 위축에 대항하기 위해 영화산업이 기획한 시도로 스타숭배를 예로 들고 있다. “영화는 아우라의 위축에 대항하기 위해 스튜디오의 밖에서 ”유명인물“이라는 인위적 스타를 만들어낸다.” 이 문장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2판에는 없고 3판에 새로 삽입된 것이다. 발터 벤야민, 앞의 글, p.128 

[15] 조너선 로젠봄은 선배 영화평론가 마니 파버의 독특한 영화감상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은 바 있다. “띄엄띄엄 영화를 보는 것(discontinuous viewing)은 그가 선호하는 관람방식이었는데, 이는 그가 고다르와 공유하는 바이기도 했다. <오데트>처럼 그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가 대학캠퍼스 내 상영관에서 일주일에 걸쳐 여러 차례 상영될 때면, 그는 매번 한두 개의 릴을 보기 위해 - 혹은 화면에 뭐가 상영되고 있었건 같은 릴을 또 보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로젠봄은 파버의 영화강좌 역시 어떤 준비된 노트도 없이 수행되는 재즈 솔로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참고로 보여주는 영화들도 두서없이 선택된 것처럼 보인 탓에 한 학생으로부터 불평을 듣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에 대한 파버의 답변은 “이건 운동경기장에서 친구를 찾으려 노력하는 일과 같다네”라는 것이었다. Jonathan Rosenbaum, “They Drive By Night : The Criticism of Manny Farber,” in Placing Movies : The Practice of Film Criticism, (Berkeley-Los Angeles-Lond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5), p.64

[16] 말하자면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태도로 경건하게 영화 관람에 임하는 것 - 예컨대 한국의 국제영화제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콜라와 팝콘 따위를 들고 영화를 보러 오다니!” 혹은 “영화가 이미 시작했는데 이제야 들어오다니!”하며 무지한(?) 관객들에게 불쾌감을 표하는 과도하게 진지한 관객들 - 은 본디 시네필적인 것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 종교적, 제의적 태도를 거부한다 해서 그들의 영화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시네필은 영화의 신도, 수도사나 사제로서가 아니라 영화와의 절대적 평등과 우애의 관념에 입각한 애티튜드를 지니고 영화와 만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정신집중(concentration)에의 과도한 요구는 궁극적으로 관객을 수용소(concentration camp)의 경험으로 몰아넣게 될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이다. 게다가 자신이 영화를 열렬히 사랑한다고만 거듭 고백해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 그 반대로 자신이 과연 영화에게 사랑받고 있는지 자문해보거나 세르주 다네처럼 “이(영화)들이 너를 지켜보는가?”라고 물을 줄도 알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다네는 (‘영화광’이라는 뜻의) 시네필(ciné-phile)이라는 단어에 ‘영화의 아이’(ciné-fils)라는 의미를 덧붙였던 것이다. “나는 내가 왜 영화를 입양했는지를 안다. 그것은 영화가 그 보답으로 나를 입양해 주기를 바라서였다.” 세르주 다네, 「<카포>의 트래블링」, 『사유 속의 영화』, 이윤영 편역, 문학과 지성사, 2011

[17] “가상(Schein)의 위축, 아우라의 붕괴와 함께 일어난 일은 유희-공간의 엄청난 확장이라는 점이다. 가장 넓은 유희공간은 영화에서 열렸다. 영화에서 가상의 요소는 유희의 요소를 위하여 전적으로 밀려났다.”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2판)」, 앞의 책, p.72. 크리스 페티는 싱클레어에게 보낸 11월 4일자 이메일에서 <시계>를 “갤러리 공간을 위한 유튜브라 할 수 있을 것”이라 쓴다. Chris Petit & Iain Sinclair, 앞의 글, p.51

[18] 발터 벤야민, 앞의 글, p.146

[19] 본 원고를 준비하는 동안 ‘사이버네틱 세렌디피디’ 전시회에 대해 알려주시고 1968년 당시 간행된 전시회 카탈로그 복사본까지 전해주신 주일우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이하 본문에서 언급된 ‘사이버네틱 세렌디피티’ 전시구성과 작품에 대한 서술은 다음의 카탈로그를 참조한 것임을 밝혀 둔다. Jasia Reichardt (ed.), Cybernetic Serendipity : The Computer and the Arts, (London: Studio International, 1968)

[20] 예컨대 1번 슬롯의 시소러스는 white, blue, red, black, grey, green, brown, bright, pure, curved, crowned, starred 등의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21] 본 프로그램에 의해 산출된 영문 하이쿠의 실례는 다음과 같다. Jasia Reichardt (ed.), 앞의 책, p.54

All white in the buds
I flash snow peaks in the spring 
bang the sun has fogged

[22] 사진과 영화가 예술작품의 제의가치를 밀어내고 전시가치가 전면화 되게끔 했다는 벤야민의 지적은 너무 성급한 것이었다. 다시 한 번, 그의 말은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 예언으로서 읽혀야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필름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사진과 영화는 제의가치를 밀어내는 기술복제시대의 매체가 아니라 미술에서의 판화나 (대리석 ‘원본’을 고스란히 본뜬) 청동상에 해당하는 만큼의 제의가치 정도는 지니는 매체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벤야민은 초기사진에서 제의가치가 저항을 시도한 최후의 보루가 인간의 얼굴이었으며 으젠느 아제의 무인풍경의 사진을 통해 비로소 사진에서 전시가치가 전면화되기 시작했다고 적절히 언급했지만, 사진원판이나 필름프린트 자체가 (수집가나 영화마니아들에게) 하나의 물신숭배의 대상으로서 제의가치를 복원하는 사물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발터 벤야민, 앞의 글, p.116-8. 원본 네거티브, 상영용 포지티브, (지금은 거의 활용되지 않지만) 학술용 혹은 TV방영용 16mm 프린트, 비디오테이프나 DVD같은 보급용 매체 등등, 복제들 사이에도 그 희소성과 질에 따라 위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날 몇몇 필름아카이브들 사이에서 희귀 프린트의 사본이 거래되기도 한다는 건 상식에 속하며 온라인에는 오래된 16mm나 35mm 프린트를 개인들 간에 사고파는 커뮤니티 또한 존재한다. 따라서 제의가치를 밀어내기 시작한 기술복제시대의 매체는 디지베타나 HD테이프, DCP 영사를 위해 하드드라이브에 저장된 디지털파일 - 폭넓은 사적 소장이 용이한 형태로는 디지털동영상과 DVD 및 블루레이 - 등 비교적 최근에야 비로소 등장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23] 편집프로그램과 저장매체 그리고 영사장비의 역할에 관한 이상의 언급은 <시계>보다 상대적으로 단순한 공정을 통해 제작되었을 시간의 건축물인 <24시간 사이코>같은 작품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24] 이와 관련해 크리스 페티는 흥미로운 지적을 하고 있다. 그는 오후 10시 45분에서 오전 1시 45분까지 <시계>를 보고 난 후 싱클레어에게 보낸 11월 3일자 이메일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자정이 지나자 시간을 확인시켜 주는 회수가 줄어든다. 마클레이는 시간을 채워 넣기 위해 애를 쓰는데(실제 영화에서 발췌한 것인지 진위가 의심스러운 클립들도 있다), 그 허둥대는 모습과 보다 꿈같은 광경이 흥미를 준다.” Chris Petit & Iain Sinclair, 앞의 글, p.55 <시계>가 한국에서 전시될 당시 관람시간은 (한 차례 24시간 상영된 것을 제외하고는) 오전 10시 반부터 오후 6시까지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페티가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직접 확인할 기회는 갖지 못했음을 밝혀 둔다.

[25] 프랑스의 미술비평가 니콜라 부리오는 디제잉을 아예 동시대 예술과 문화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한 보편적 개념으로서 논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생산과 소비를 분리하는 간극은 날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우리는 음악을 전혀 연주하지 못할지라도 기존의 레코드판들을 활용해 음악작품을 생산할 수 있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소비자는 그 혹은 그녀의 개성이나 필요에 따라 구매한 산물들을 각자에게 맞춰 바꾼다. 리모콘을 조작하는 것 역시 일종의 생산이다. [...] 디제이 문화(DJ culture)는 현대예술에 관한 숱한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는 발신자(transmitter)의 제안과 수신자(receiver)의 참여라고 하는 이항대립을 거부한다.” Nicholas Bourriaud, Postproduction : Culture as Screenplay : How Art Reprograms the World, (New York: Lukas & Sternberg, 2002), p.39-40

[26] 앙드레 브르통, 「쉬르레알리슴 선언(1차 선언)」, 『다다/쉬르레알리슴 선언』, 송재영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87, p.149

[27] 발터 벤야민, 「초현실주의」 『발터 벤야민 선집 5』,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08, p.162

[28] “언어란 초현실적으로 사용되기 위해 인간에게 주어졌다”고 브르통은 주장한다. 앙드레 브르통, 앞의 글, p.140. 그가 제시한 초현실주의적 작문의 “비법”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되도록 정신을 집중시키기에 적합한 장소에 위치를 정한 다음 필기하는 데 필요한 것을 갖고 오도록 하라. 되도록 가장 수동적이며 자극적인 상태에 자신을 위치시켜라. 자기의 천분이나 재능 또는 타인의 천분이나 재능마저도 배제하라. 문학은 모든 것에 통하는 가장 서글픈 길 중의 하나임을 잘 명심하라. 주제를 미리 생각하지 말고 빨리 쓰도록 하라. 기억에 남지 않도록 또는 다시 읽고 싶은 충동이 나지 않도록 빨리 써라. 첫 구절은 저절로 씌어질 것이다.” 등등. 같은 글, p.137

[29] 앙드레 브르통, 앞의 글, p.133

[30] 앙드레 브르통, 「쉬르레알리슴 선언(2차 선언)」, 앞의 책, p.213. 브르통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실험 가운데는 여러 사람이 작업한 결과물들을 그 부분적인 공통요소에 의거해 취합하는 ‘우아한 시체’(exquisite corpse) 기법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 기법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정오의 낯선 물체 Mysterious Object at Noon>(2000)에서 새로운 영화적 플롯을 구성하는 수단으로 차용되기도 했다. 한편 홍상수의 영화들에서 인물들 간에 오가는 대화는 “두 사람의 대화자를 예의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대화를 그 절대적인 진리 안에서 재건”(브르통)하는 초현실주의적 대화와 유사한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초현실주의적 대화는 경청을 통한 이해, 상호 의견 교환을 통한 어떤 주장의 발전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화하는 기술이다.

[31] 발터 벤야민, 앞의 글, p.145-7

[32] <비브르 사 비 Vivre sa vie>(1962)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고다르의 진술을 음미해 보라. “하나의 쇼트를 얻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말하곤 했다. ‘모든 건 저기에 있다. 바꿀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얻어진 것, 첫 번째 시도로 얻어진 것에 실수가 없어야 했다. 나는 우아한 효과들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특별한 효과를 찾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운에 맡겨야 했다. [...] 이런 식으로 쇼트를 취한다는 건 편집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내가 할 일은 각각의 쇼트들을 이어붙이는 것으로 족했다. 작업한 스태프들이 러시필름에서 본 것은 관객들이 [완성된 영화에서] 본 것과 거의 같다. 게다가 나는 장면들을 순서대로 찍었다. 믹싱도 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일련의 블록(block)으로 이루어졌다. 그것들을 얻어내서 차례로 배치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첫 시도에서 정확한 것을 얻어내는 것이다. 이상적으로, 나는 재촬영 없이 단번에 필요한 것을 얻어내길 원했다. 재촬영이 필요하다면 그건 쓸모없는 것이다. 즉흥적(impromptu)이란 건 우연을 뜻한다. 그것은 또한 최종적/결정적(definitive)인 것이기도 하다. 내가 바란 건 우연에 의해 최종적/결정적이 되는 것이었다.” Tom Milne (trans. & ed.) Godard on Godard (New York-London: Da Capo Press, 1972/1986), p.185  

[33] Chris Petit & Iain Sinclair, 앞의 글, p.54

[34] 이 때문에 진정 ‘영화적’인 연기란 연기를 하지 않는 연기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라 할 로베르 브레송의 자동주의적 연기론(모델론)은 인간의 육체가 각종 영화적 기제(카메라, 조명, 세트, 시나리오에 적힌 대사 등등)와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드러내기 위해 배우로부터 의지적인 것의 흔적을 지우는 - 하지만 개인적인 것은 배우의 얼굴에 남을 것이다 - 테크닉으로 고안된 것이라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적 자동주의와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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