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0

희망


"희망 없이 말하는 것보다는 침묵하는 편이 낫다. 희망 없이 수다를 떠는 데서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냉소주의자의 태도다. 다만 희망을 낙관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낙관이란 지금 처해있는 상황을 둘러싼 요인들로 미루어 볼 때 얼마간 바람직한 미래가 가능하다고 진단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주식시장이 낙관적이라거나 부동산시장이 안정화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경제전문가의 발언 같은 것을 떠올려 보라. 희망은 여건에 비추어 미래를 낙관하는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가능성의 조건 자체를 응시하는 일이다. 희망은 낙관이라고 하는 타협을 용인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긍정하는 것이다. 주식시장이나 부동산시장에 대한 전망을 내놓기보다는 그것들을 없애버리자고 요구하는 것이 희망이다."

이것은 올해 단행본으로 출간할 요량으로 지난 여름부터 쓰고 있던, 이번 겨울에는 꼭 마무리하려 하는 글의 첫 문단이다. 집필이 지연되는 바람에 결국 출간은 늦어지게 되었다. 사전 광고라도 하듯 온전히 마무리하지 못한 원고의 일부를 온라인에 토막토막 공개하는 일은 삼가야 하겠지만, 2019년이 가기 전에 (지난 10년 간의 영화 베스트 목록 같은 것을 꼽기보다는) 일단 이 부분만은 어떤 식으로건 미리 꺼내놓고 싶었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요즘 들어 영화나 영상작품에 대한 비평을 읽다가 피로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가 처음으로 공식적인 지면에 영화평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1년(21세기의 첫 해)인데,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작품에 대한 경험과 풍부한 문헌 지식으로 무장한 글들이 도처에서 쏟아져나오고 있다. 이는 그 자체로 환영할 만한 일이며, 개인적으로는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가능한 이런저런 글들을 찾아 읽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데 정작 글들을 읽다 보면 전망과 조망과 관망 사이 어디선가 진동할 뿐 어떤 희망의 이념도 감지할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희망의 이념 바깥에서 움직이는 비평이란 있을 수 없고, 어떤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긍정은 물론이고 비판조차도 희망이라는 준거를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는 법인데도 말이다.




지난 달, 부산 영화의 전당이 기획한 시네마테크 총서의 일환으로 더들리 앤드류의 『앙드레 바쟁』(임재철 옮김, 이모션북스)이 발간되었다. 1978년에 출간(2013년에 개정판이 출간)되어 이제는 고전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에 대해 무성의하게 짧은 찬사를 늘어놓는 것은 무례한 일이겠다. 이 전기의 주인공인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여기서 더들리 앤드류가 인용하고 있는 세르주 다네의 말은 여러모로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다네는 주장하기를, "나쁜 영화작가는 아무런 아이디어가 없으며, 좋은 영화작가는 너무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위대한 영화작가는 단 하나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 단 하나의 아이디어를 갖는다는 것, "이것은 그로 하여금 항상 변화무쌍하고 흥미로운 풍경을 지날 때 제대로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준다." 다네는 이러한 진술이 비평가에게도 마찬가지로 타당하며, 앙드레 바쟁은 (1943년에서 1958년 사이에) 예외적으로 그러한 인물이었다고 지적한다. 나는 여기서 다네가 말하고 있는, 영화작가나 비평가의 길을 인도하는 '단 하나의 아이디어'을 '희망'으로 바꿔 이해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앙드레 바쟁은 희망의 대가라 할 만한 인물이다. 『앙드레 바쟁』을 읽는 누구라도 이 책의 도처에서 이 사실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작년 이맘때(정확히는 2018년 12월 22일), 나는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앙드레 바쟁 탄생 100주년 기념 포럼에 참석해 일본 학자 호리 준지 씨의 발표 이후 이어진 대담에 함께 한 적이 있다. 이튿날에는 영화의 전당 시네마테크관에서 '앙드레 바쟁이 사랑한 영화들' 프로그램 가운데 한 편인 앙드레 말로의 <희망 L'espoir>(1945)을 (영화관에서는 처음으로) 보았다. 이것은 (현재 집필 중인 단행본의 작은 토픽들 가운데 하나인) '무(無)에 대한 헌신'을 영화라는 불투명한 매체의 이념(희망)으로 삼고 있는 바쟁의 태도에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그제(12월 18일) 종로3가의 인디스페이스에서 경순 감독의 신작 다큐멘터리 <애국자 게임 2: 지록위마>를 보았다.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그리고 상영 후 이어진 대담 자리에서 "점점 희망이라는 말을 덜 쓰게 된다"는 경순 감독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저 미완의 원고의 첫 문단을 서둘러 꺼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작품이 이석기 내란 선동 사건 및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의 진실을 다룬, 혹은 은폐된 진실을 파고드는 다큐멘터리로 알려진 것은 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한국사회 전반에, 심지어 이른바 '진보진영' 내부에까지 파고들어버린 하나의 태도, 즉 이념(희망)을 상상하는 데도 한계와 룰과 테두리가 있어야 함을 당연시하는 이상한 태도 - 이를테면 <지록위마>에서도 비판적으로 언급되고 있듯, "국민은 헌법 밖의 진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심상정의 말 같은 것 - 에 대해 (비록 도중에 종종 멈칫하기는 해도 여하간) 문제제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주위에 희망의 결계(結界)가 둘러쳐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석기 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은 그 결계의 존재를 드러내보인 것일 뿐 결계의 원인은 아닐 것이다. 

2020년을 맞이하기 전에,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단순하게 희망을 말하는 법부터 익힐 것을 다짐하고 또 요청해본다.





2019-12-12

예술을 둘러싼 불안


(※ 2019년 12월 20일부터 31일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제20회 졸업전시가 열린다. 지난 가을에 졸업전시회 준비팀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졸업생들이 장차 활동하게 될 '필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또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솔직한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전문사 과정에서 공부하기는 했지만 졸업논문 과정을 마치지 못해 퇴학당한 처지이고, 미술계의 일에 (특히 영상과 관련해서는) 관심을 갖고 있지만 사정에 아주 밝지는 못한 터라 잠깐 망설이기는 했지만, 여하간 솔직한 글은 쓸 수 있겠다 싶어 수락했다. 마침 졸업전시 관련해 학생들이 정성껏 제작한 도록이 집에 도착했다. 아래는 도록에 실린 내 글의 전문이다.)




“선수(選手)끼리니까 굳이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죠?”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지 일 년 남짓 되었을 무렵에 들은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던 가운데 누구에게 들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일인 것 같다. 나는 사실 그 모든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만 애써 떠올리려 하지 않으면서 이 말이 나의 마음에 남긴 얼룩만을 간직하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여하간 이 말을 듣는 순간 한없이 부끄러워졌던 것만은 사실이다. 게다가 이 부끄러움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만 순간 대책 없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어느덧 내가 당당히 그들의 일원이 되었음을 무심한 척 승인하고 있는 이 말에는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축축한 구석이 있었다. 거기에 자리한 것은 대략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특정한 영역의 제도나 관습을 숙지하고 있는 이가 휘장처럼 두르고 있는 실은 별것도 아닌 우월감이나, 그러한 제도나 관습의 빈틈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법을 알고 있는 자들끼리의 공모의식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선수끼리니까 굳이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죠?”라는 말을 듣는 순간, 대단치는 않지만 그렇다고 사소하지도 않은 무언가를 믿고 맡기는 가운데 슬며시 이루어지는 시험 내지는 입교(入敎)의식에 강제로 불려 나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호출에 분명하게 거부 의사를 표하지 않은 것에 대해 두고두고 후회하곤 했다.

요즘에도 ‘선수’라는 표현을 계속 쓰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표현이 사라진다 해서 그것이 가리키던 역장(力場)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동안 교류해왔거나 잠시나마 발을 담글 일이 있었던 각종 예술계(영화계・미술계・문학계・공연계 등등)의 ‘거주민’들 사이에서 이 표현이 다양하게 변형되고 변주되어 반복되는 것을 보아 왔다. 부정적인 것의 부정성을 확인하기 위해 굳이 부정적인 것을 한자리에 불러모을 필요는 없으므로 구태여 여기서 그 변형과 변주의 사례들을 나열하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은 누구나 쉬이 짐작 가능한 것들이리라. 

하지만 오해는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다. 나는 예술계를 좀먹는 노회(老獪)함이나 공모의식에 토대를 둔 공동체(패거리)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선수끼리니까 굳이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죠?”라는 꺼림칙한 얼룩의 말을 이 자리에서 굳이 떠올려본 것은 이 말에 모종의 방법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법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예술과 관련된 모든 일(창작・비평・기획・운영・아카이빙)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시대 예술이란 것을 정의하는 방식은 여럿일 수 있겠지만 내가 동시대 예술이란 것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방법의 무근거성(groundlessness)에 대한 자각과 이러한 자각이 초래하는 불안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동시대 예술 및 그와 결부된 활동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따금 미술이나 문학과 관련해서 쓰기도 하지만, 주로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평론가로서의 나의 경험을 두고 말하자면, 나는 ‘빼어난 촬영’이란 어떤 것인지, ‘탁월한 연기 연출’이란 어떤 것인지, ‘리드미컬한 편집’이란 어떤 것인지를 여전히 정확히 (실은 전혀) 알지 못한다. 물론 기술적으로 어떻게 처리했을 경우에 ‘선수들 사이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지는 얼마간 알고 있다. 

사실 동시대 비평의 문제는 가치판단과 관련된 어떤 유의미한 범주도 더 이상 지니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게다가 미학은 당대적 비평의 근거를 탐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문헌학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비평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식은 방법에 대한 판단의 문제를 기술에 대한 평가로 대체하거나, 경향에 대한 진단으로 대체하거나, 이런저런 동시대 이론과 작품 사이의 상동성에 대한 확인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방법은 거짓 근거들 위에 다시 자리 잡게 되며 예술적 활동을 둘러싼 동시대적 불안은 슬며시 감추어진다. 이와 더불어, 불안한 가운데 내기를 거는 심정으로 작품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유랑하는 평론가 대신 작품들을 관망하는 연구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부상하게 된다.

내가 보기에 오늘날의 미술계는 이러한 상태에 있는 비평과 가장 문제적인 방식으로 관계 맺고 있는 영역이다. 이를테면 창작자와 (유사)연구자의 ‘협업’은 흔한 일이고 더러 바람직한 사례도 있다고 보지만 ‘멘토링’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이상한 관행에 대해서는 나는 여전히 의구심을 품고 있다. ‘전시연계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꾸려지는 각종 (유사)학술행사가 이따금 전시 자체를 압도하곤 하는 현상도 신기하게 보인다. 동시대 예술인들의 임무가 서둘러 방법을 다시 세우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거짓 근거에 기대어 방법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들에 맞서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미술은 그 어떤 영역보다도 빨리 현대예술에 있어서 방법의 무근거성을 자각하고 이로 인한 불안에 정직하게 맞서 왔다. 이는 현대 및 동시대의 미술이 극도로 비평적이고 담론적인 형식을 띠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그 때문에 미술은 여타의 영역들이 동시대적 무근거성을 끊임없이 자각하게끔 하는 강력한 지표도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미술계는 연구라는 이름으로 편리하게 이루어지는 비평의 외주화(outsourcing)를 통해 자신이 짊어져 온 짐을 덜어내는 일에만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우리 눈에 비치는 것은 어느새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닮아버린 창작과 비평이, 어디선가 빌려 온 침대 위에서 서로를 ‘연구’하는 근친상간의 풍경이다.

2019-11-15

<서울 7000>(1976)과 <국풍>(1981)


(※ 2019년 11월 28일부터 12월 6일까지 열리는 서울독립영화제 기간에 서울대학교 영화동아리 얄라셩의 초기 활동을 엿볼 수 있는 8mm 단편 2편이 디지털화되어 공개된다. 1979년 공과대학 재학생들 중심으로 결성된 이 동아리는 1980년에 본부동아리로 등록한 이래 다수의 단편영화를 제작하였고, 특히 이 동아리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서울영화집단(1982~1986)은 1980년대 영화운동의 초기 역사를 기술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곤 한다. 김홍준과 황주호가 공동연출한 <서울 7000>(1976)은 얄라셩 결성 이전 이들이 개인적으로 만든 작품이지만, 얄라셩의 첫 공식상영회(첫 번째 영화마당, 1980.11.7~8)에서 얄라셩의 첫 공동연출작인 <여럿 그리고 하나>(1980)와 함께 상영되기도 했던 작품이다. 전두환 정권이 기획한 관제행사인 '국풍 81'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국풍>(1981)은 서울영화집단의 창립작품인 <판놀이 아리랑>(1982)을 예견케 하는 인터뷰의 이접적 활용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아래는 서울독립영화제 아카이브 특별전에 맞춰 기획된 책자 수록용으로 쓴 리뷰들이다.)


서울 7000 (김홍준 & 황주호, 1976)



<서울 7000>의 엔딩 크레딧에 기재된 정보를 따르자면 이 영화는 코다크롬 40(Kodachrome 40) 필름을 써서 엘모 108(Elmo 108) 8mm 카메라로 1976년 11월에 서울에서 촬영되었다. “한 프레임씩 촬영되었으며 촬영 속도는 shot마다 다르게 조절”되었고, “이 영화의 제목에 붙은 숫자 7000은 타이틀을 제외한 모든 부분의 총 프레임 수”를 나타낸다는 점도 명기되어 있다. <서울 7000>은 1976년 당시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홍준과 황주호가 공동으로 연출한 작품(김홍준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독립영화라기보다는 ‘개인영화’)으로, 제3회 한국청소년영화제(1977년 6월 10일 하루 동안 영화진흥공사 시사실에서 개최)에서 기획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른바 ‘콤마 촬영’ 방식(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프레임 단위로 촬영하는 방식)으로 서울 이곳저곳의 풍경을 기록한 이 작품은, 밴드 시카고(Chicago)의 음악 <The Approaching Storm>이 배경으로 깔리는 가운데, 새벽이 지나 해가 떠오르고 다시 해가 진 뒤 밤이 되기까지의 시간적 추이를 따라 서울의 하루를 재구성한 ‘도시 교향악(city symphony)’의 형식을 띠고 있다. 1980년대 영화운동의 모태가 된 서울대학교 영화동아리 얄라셩의 초기 멤버들이 이 동아리가 결성(1979년)되기 전에 개인적으로 만든 작품이지만, 1980년 11월 7일과 8일 양일간 진행된 얄라셩의 첫 공식 상영회(‘첫 번째 영화마당’)에서 동아리의 첫 공동작품인 <여럿 그리고 하나>(1980)와 함께 상영되기도 했다. 그런데 급속도로 근대화된 서울이라는 도시의 리듬을 포착하는 데 주력하고 있는 <서울 7000>은 얄라셩과 이 동아리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서울영화집단(1982~1986)에서 제작된 작품들보다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에 걸쳐 제작된 몇몇 개인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에 보다 가까이 있는 영화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라 할 수 있는 김구림의 <24분의 1초의 의미>(1969)나 이화여대 출신의 여성 영화인들이 결성한 실험영화 제작집단인 카이두 클럽(Kaidu Club)을 이끌었던 한옥희의 <구멍>(1974) 같은 작품을 감싸고 있는 도회적 감수성은 <서울 7000>에서도 분명히 감지된다. 차이가 있다면 도시의 리듬을 수용하는 한편 굴절시키는 매개자로서의 주체, 즉 권태에 빠져 있거나 소외된 도회적 주체의 형상 ― 유현목의 <오발탄>(1961) 이래 한국영화에 깊숙이 스며든 ― 이 <서울 7000>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이 작품이 1970년대 중반 서울의 풍경을 담은 생생한 스케치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1990년대에 두 편의 장편극영화를 만들었던 김홍준은 21세기 들어 <나의 한국영화> 연작(2002~2006) 및 <가루지기 리덕스>(2008) 등의 개인적인 작품들을 내놓은 바 있는데, <서울 7000>은 이러한 작품들에서 뚜렷이 엿보이는 에세이적 성향이 그에게 새삼스러운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국풍 (얄라셩영화연구회, 1981)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나서 1년 후,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는 ‘전국대학생민속국학큰잔치’라는 주제를 내걸고 대학생과 일반인을 대거 동원한 관제행사인 ‘국풍 81’을 개최한다.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한국방송공사가 주관하며 고려대학교 부설 민족문화연구소가 후원한 이 행사는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여의도광장에서 진행되었다. 이는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저항적 대항문화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활동들을 체제 내에 포섭하고자 하는 기획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비판적 관점에서 이 행사를 기록, 재구성한 다큐멘터리 <국풍>은 1979년에 창립되어 올해로 40주년을 맞는 서울대학교 영화동아리 얄라셩의 초기 활동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생들(홍기선, 김동빈, 황주호 등)에 의해 창립되어 1980년에 정식으로 동아리로 등록해 활동하기 시작한 얄라셩은, 이 동아리 출신 위주로 구성된 서울영화집단(1982~1986)과 더불어 1980년대 독립영화운동에 모델을 제시한 그룹으로 간주되곤 한다. <칠수와 만수>(1988)의 박광수, <장미빛 인생>(1994)의 김홍준, <넘버 3>(1997)의 송능한 등 1980~90년대에 새로운 감수성의 한국영화를 내놓으며 충무로에서 데뷔한 감독들이 얄라셩과 서울영화집단에서 활동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국풍>은 여의도광장에서 5일간 열린 행사의 이모저모를 8mm 카메라로 기록한 영상들을 편집해 만든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의의는 그간의 공식적인 기록물들과는 상당히 다른 시각으로 ‘국풍 81’을 담아낸 희귀한 영상자료라는 데만 있지 않다. <국풍>은 얄라셩과 서울영화집단에서 제작된 영화들의 방법론적 연관을 가늠케 한다는 점에서도 비평가들과 연구자들의 주목을 끌 만하다. <국풍>의 사운드트랙은 행사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을 인터뷰해 녹음한 자료 및 당대에 인기를 끈 음악들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영화집단의 창립작품에 해당하는 다큐멘터리 <판놀이 아리랑>(1982)은 공연의 준비 및 실행 과정을 담은 영상과 얼마간 거리를 두고 있는 사운드트랙(관객들의 소감 및 제작진의 토론)의 활용이 흥미로운 작품으로, <국풍>은 이러한 방법론이 이미 얄라셩 시기부터 실험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제작 여건상 적절한 동시녹음 장비나 녹음실을 활용할 수 없었다는 점이 오히려 창조적으로 대안적 방법론을 모색하게 한 사례라고 할 만하다. (<국풍> 제작 당시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한 인터뷰의 질이 너무 나빠 인터뷰 녹취본을 토대로 얄라셩 회원들의 목소리로 다시 녹음한 것을 활용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윤리적으로 타당한가의 여부를 두고 내부 논쟁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송골매의 <세상만사>, 김태곤의 <뱃노래>, 그리고 (<국풍>이 제작된 해인) 1981년에 잠시 국제적인 인기를 누렸던 프로젝트 메들리 그룹 스타스온45의 <Stars on 45>에서 발췌한 음악(이 음악은 서울영화집단의 워크숍 작품 가운데 하나인 문원립의 <대결>(1982)에서도 사용되었다)은 당대의 문화적 풍경을 가늠케 하는 지표로 기능하면서 부분적으로는 내레이션을 대신해 <국풍>에 논평적 기능을 더하고 있기도 하다.



2019-11-03

영원한 불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 아래 글은 대한항공 기내지 《비욘드》 2019년 4월호에 기고한 것이다. 지난 4월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탄생한 지 꼭 80주년이 되는 때였다.) 


<영원한 젊음 Youth Without Youth>(2007)


1970년대 ‘새로운 할리우드’의 핵심적 인물이었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어느 때부터인가 ‘실패한 신동’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비평적 반전을 거쳐 그에게 덧씌워진 한때의 거물이라는 이미지는 바야흐로 80세를 맞은 지금까지도 가시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마음의 저편>(1982)부터 <트윅스트>(2011)에 이르는, 대체로 미적지근한 평가를 받거나 때로 혹평을 받았던 1980년대 이후 코폴라의 영화들을 재평가하고자 하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재평가는 종종, 그 호의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코폴라 작품들이 <대부> 1부(1972)와 2부(1974), <도청>(1974), 그리고 <지옥의 묵시록>(1979) 같은 1970년대의 걸작들에는 못 미치지만 예사로운 영화들보다는 수준 높은 작품들이라는 식의 논지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바꿔 말하자면, 코폴라가 1970년대에 너무 뛰어난 영화들을 내놓은 나머지 이들 영화의 그늘에 가려 그 이후의 영화들이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식이다.


<트윅스트 Twixt>(2011)


<레인메이커>(1997) 이후 한동안 연출에서 손을 뗀 것처럼 보였던 코폴라가 21세기 들어 <영원한 젊음>(2007)으로 돌아왔을 때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우아한 걸작은 종종 예상치 못한 샛길로 빠져드는 요령부득의 내러티브를 지닌 범작으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코폴라가 2년 후 내놓은 <테트로>(2009)와 더불어, 1970년대의 공인된 걸작들에 필적하는 말년의 양식의 빼어난 예인 동시에 코폴라 영화들을 가로지르는 모티브와 강박관념 일체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며 여행하기를 거듭하다 마침내 그 핵심에 놓인 ‘불화’를 용감하게 응시하는 영웅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인 1960년대 후반에, 영화평론가 앤드류 새리스는 아직 <대부>를 연출한 거물이 되기 전이었던 코폴라의 초기작만을 본 상태에서 놀랄 만한 혜안으로 이 젊은 감독의 특징을 간파해냈다. 그는 코폴라의 UCLA 졸업작품으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너는 이제 다 컸어>(1966)와 마이크 니콜스의 <졸업>(1967)을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졸업>에서의 니콜스의 연출이 <너는 이제 다 컸어>에서의 코폴라의 연출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니콜스는 좋은 영화들만을 참조하는 반면 코폴라는 이따금 나쁜 영화들을 참조한다는 것이다.” 다분히 양가적인 뜻이 있는 문장이지만, 여하간 여기서 새리스는 코폴라 영화의 핵심을 짚고 있다. 

<대부>가 1970년대 새로운 할리우드가 낳은 ‘고급’ 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론 B급 영화적인 폭력 장면과 선정영화(exploitation movie)에나 어울릴 법한 누드 장면들이 적잖이 삽입되어 있음도 사실이다. 다만 세례식과 일련의 살인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는 후반부의 유명한 시퀀스에서처럼 솜씨 좋게 주류영화의 분위기 속에 녹아들어 있을 뿐이다. 코폴라가 B급 영화의 산실인 로저 코먼의 제작사 AIP(American International Pictures)에서 영화 경험을 쌓았다는 것은 ‘나쁜 영화들’에 대한 코폴라의 집착에 부분적인 설명밖에는 제공해주지 못한다. 그는 할리우드 고전기 영화는 물론이고 유럽 예술영화에서도 자양을 취하는 한편, 공식적 영화사(史)에는 등재되지 못한, 아니 심지어 등재될 가망이 없는 영화들(이를테면 포르노그래피)까지 넘나들면서 영화라는 우주의 불균질성 자체를 자신의 영화 속에 껴안으려 한 드문 미국 감독이다. 이는 코폴라와 마찬가지로 코먼의 밑에서 영화 경험을 쌓은 마틴 스콜세지나 피터 보그다노비치와 같은 이들에게선 거의 감지되지 않는 특징이다. 


<디멘시아 13 Dementia 13>(1963)


로저 코먼이 제작비를 댄 저예산 공포영화 <디멘시아 13>(1963)으로 데뷔한 코폴라는 할리우드의 거물이 된 이후에도 자신의 천출(賤出)을 굳이 부정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디즈니가 제작하고 마이클 잭슨이 주연을 맡은 테마파크용 3D 뮤직비디오 <캡틴 이오>(1986)는 그 제작비와 일급의 제작진 구성을 고려하면 기이하다 할 만큼 B급 SF영화의 감성으로 넘쳐난다. 짐짓 우아한 시대극 멜로드라마의 외양을 취한 <드라큘라>(1992)에는 주로 1970년대에 양산된 ‘유로트래쉬(Eurotrash)’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섹슈얼한 이미지와 수간을 연상케 하는 장면까지 등장하고 있다.


<캡틴 이오 Captain EO>(1986)


확실히 코폴라의 영화는 종종 쉬이 통합되지 않는 불균질한 요소들과 스타일들이 뒤섞여 있는 불화의 영화라고 할 만하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대부> 1부와 2부 또한 예외가 아니다. 여기서 뉴욕에서 촬영된 장면들과 시칠리아에서 촬영된 장면들은 그 시각적 설계에 있어 매우 다르다. <대부> 2부의 경우, 마피아 두 세대의 삶은 별다른 서사적 동기화 없이 과감하게 교차되고 있다. 코폴라가 여행 혹은 여정의 플롯을 선호한다는 것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인데, 이는 상이한 장소 혹은 시간 사이를 오가면서 그때마다 스타일 상의 변이를 꾀하기 위한 좋은 구실이 된다. 이의 가장 잘 알려진 예는 물론 <도청>에 이어 두 번째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지옥의 묵시록>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임신 사실을 알고 가출해 여행길에 오른 주부의 이야기인 <레인 피플>(1969)과 이혼을 앞둔 중년 주부가 돌연 시간을 거슬러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는 <페기 수 결혼하다>(1986)처럼 유사한 모티브를 각각 공간적 혹은 시간적 여정으로 변주해낸 사례도 있다.


<레인 피플 Rain People>(1969)


코폴라적인 불화가 가장 두드러지게 각인된 곳은 다름 아닌 그의 인물들의 몸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의 인물들은 종종 아직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몸과 마음의 불화에 시달리곤 한다. 코폴라적 인물이란 죽은 여동생의 망령에 사로잡힌 청년이거나(<디멘시아 13>),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소년이거나(<너는 이제 다 컸어>), 임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젊은 주부이거나(<레인 피플>), 형의 죽음과 아버지의 부상으로 예기치 않게 마피아 가족과 조직 전체를 떠맡게 된 샌님이거나(<대부>), 어쩐지 사십 대처럼 보인다는 말을 듣는 이십 대거나(<럼블 피쉬>(1983)) 십 대의 몸으로 돌아가 고교 시절을 다시 겪게 되는 중년 주부이거나(<페기 수 결혼하다>), 죽지 않는 몸으로 수백 년을 살아온 흡혈귀이거나(<드라큘라>), 조로증에 걸려 성인의 몸을 하고 살아가는 소년(<잭>(1996))이다.

공간적으로는 루마니아, 스위스, 인도, 그리고 몰타를, 시간적으로는 고대에서 2차 대전 전후의 시기를 넘나드는 <영원한 젊음>에서, 번개를 맞고 돌연 청년의 몸을 갖게 된 언어학자는 과거에 죽은 연인과 꼭 닮은 여인을 만나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이 여인은 고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생의 존재들에 종종 사로잡히는가 하면, 그로부터 사랑의 속삭임을 들을 때마다 점점 더 먼 고대의 존재에 사로잡히고 점점 더 빠르게 나이 든 모습이 되어 간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원작 소설에서 코폴라는 자신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가로지르기 위한 여정의 실마리를 찾은 것 같다. 그가 그 여정의 끝에서 마주치게 되는 진실은 자신의 몸과 불화하는 두 존재 간의 영원한 불화이다.

2019-06-12

반딧불의 시간
: 제2기 인디포럼, 그리고 한국 독립영화에 대한 관견(管見)


(※ 아래 글은 문학실험실에서 발간하는 문예지 『쓺』 제6호(2018년 상권)에 발표했던 것이다. 2019년 3월, 인디포럼작가회의는 올해엔 영화제를 개최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인디포럼 작가회의의 입장문: http://www.indieforum.org/xe/517621) 아래 글은 작년 인디포럼에서 성추행 파문이 있기 전에 집필해 발표했던 것이지만, 해당 사건 소식을 접하고 난 이후에는 이 글을 온라인에 올리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동안 이 글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지난 일요일(2019년 6월 9일), 종로의 인디스페이스에서 "느리게 배우는 사람의 교훈: 행동에서 담론으로"라는 제목으로 <수리세>(홍기선, 1984)와 <명성, 그 6일의 기록>(김동원, 1997) 상영 후 두 시간 정도 강연을 했다. 그리고 나서 문득 이 글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는데, 지금쯤이라면 오해 없이 읽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글 후반부에서 언급하고 있는 장산곶매의 <파업전야>(1990)가 최근 정식 극장개봉하게 된 것도 온라인 게시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2017년 11월 30일부터 12월 8일까지 열린 서울독립영화제의 경쟁부문 심사위원을 맡아 한 해의 주요 독립영화들을 한 자리에서 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영화제의 원래 취지대로라면 이 행사는 공식적 영화산업의 주변 혹은 바깥에서 제작된 영화들을 모아 ‘대안적’ 공간에서 상영하는 자리가 되어야 마땅하겠지만 그렇게만 운영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까 독립영화에 대한 ‘순수주의’—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를 결연히 마음에 품은 누군가가 이런 뜻 깊은 행사가 왜 CGV 영화관 체인의 아트하우스를 주요 상영관으로 삼아 열려야 하는가라는 식의 의문을 제기한다면 이는 사정을 모르고 내뱉는 극히 비현실적인 투정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서울독립영화제와 더불어 중요한 독립영화 축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인디포럼 20주년을 맞아 2015년에 『씨네21』(1005호)이 마련한 좌담에서 “독립영화의 축제인 영화제들을 독립영화전용관에서 하는 게 맞는데 안타깝게도 극장 환경이 안 따라준다”고 토로한 이송희일 감독의 말은 결코 엄살이 아니다. 인디포럼이 20주년을 맞은 당시, 영화제는 종로의 롯데시네마 피카디리에서 열렸다. 2017년 서울독립영화제의 상영관 가운데는 종로의 서울극장 내에 함께 자리하고 있는 서울아트시네마와 인디스페이스 같은 대안적 공간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2017년 인디포럼 또한 서울아트시네마와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렸다. 그런데 개봉이라는 과정에서 배제된 고전영화와 예술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서울아트시네마의 경우 문제가 덜하지만, 독립영화전용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인디스페이스를 영화제 상영관으로 사용하다 보면 그 기간 동안 개봉 중인 독립영화 몇 편의 상영이 부득이 축소되거나 중단될 수밖에 없다. 같은 좌담에서 독립영화 배급사 시네마달의 김일권 프로듀서는 이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독립영화]전용관에서 영화제를 열면 그 기간에 개봉하는 다른 독립영화들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영화제는 개봉 전 독립영화가 관객과 미리 만나는 자리이고 향후 개봉했을 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시너지 효과가 생길 수 있어야 한다. 근데 그게 전혀 안 되는 구조다. 소규모 영화들은 ‘왜 우리가 영화제 기간에 개봉을 했지’ 이렇게 한탄하게 돼버리니까.” 

독립영화의 ‘경계’에 대한 질문은 21세기로 접어든 직후에 독립영화계 내부에서 첨예하게 제기된 바 있다. 한국에서 독립영화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의 양상을 간략하게만 소묘하려 해도 별도의 지면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는 위에 언급한 좌담에 참여한 이들(김일권ㆍ부지영ㆍ이송희일ㆍ조영각)이 인디포럼의 역사를 회고하는 가운데 은연중 언급을 피하거나 부정적으로만 언급하는 시기가 있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그 시기란 2002년에서 2006년에 이르는 5년간이다. 인디포럼 “1기[의 운영주체]가 감독 중심이었다면 2기는 폭을 좀더 넓혀보자는 뜻에서 평론가나 PD까지도 합세”하게 되었다는 김일권의 말에, 조영각 전(前)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은 “그 분류가 좀 애매한 것 같다. 초창기부터 내가 [인디포럼 프로그래머로] 있던 2001년까지가 1기였고 그 다음 5년이 2기, 그리고 지금까지가 3기”라고 수정을 제안한다. 인디포럼의 역사에 기여한 여러 이름들이 호명되곤 하는 이 대담에서, 조영각이 2기라 부른 시기를 이끌었던 이들의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물론 좌담을 지면에 옮기는 과정에서 삭제된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이건 이 누락은 의미심장하다. 조영각의 분류를 따르자면 1기의 마지막 해에 해당하는 2001년에 ‘영토확장’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독립영화의 대중화를 꾀했던 인디포럼은 이듬해 ‘꽃순이 칼을 들다’라는 정반대의 슬로건을 내세우며 독립영화의 경계를 재설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향 전환에 대한 조영각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그때[2001년 인디포럼] 흥행 성적이 좋아서 2천만원 정도 흑자가 났다. 우리는 입이 찢어졌다. 그 후 곧바로 인디포럼 2002[년]의 슬로건이 ‘꽃순이 칼을 들다’였다. 독립영화가 진정 추구해야 할 새로움과 지향이 무엇인가를 놓고 독립영화 내부로 칼을 겨눠 성찰을 해나갔다. 일종의 영화미학을 놓고 논쟁하기 시작하면서 영화의 서사는 홀대받았고 관객과는 점점 멀어지고 영화제는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이송희일 또한 “그때는 정말 인디포럼이 게토화되는 수준이었다”고 증언한다. 이른바 ‘2기 인디포럼’ 시기에 객원 프로그래머로 참여하기도 했던 이상용은 2005년 인디포럼이 끝난 직후 『참세상』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인디포럼은 최근 독립영화 진영의 뜨거운 감자였다. 2002년 ‘꽃순이 칼을 들다’라는 슬로건은 인디포럼의 변화를 선포하는 몸부림이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작품의 선정과 프로그래머의 자질을 둘러싸고 게시판은 조용해 질 줄을 몰랐다.” 

작게는 인디포럼이라는 영화제, 조금 크게는 독립영화계에서 벌어진 하나의 분쟁 혹은 불화의 현장을 그로부터 10년이 넘게 흐른 지금 복기해 보려는 것은, 새삼 독립영화의 정체성이라는 문제를 다시 따져 보기 위함이 아니다. 그보다는 음지에 유폐된 영화를 발견하고, 도래할 영화의 배아를 위한 배양액을 마련하고, 무엇보다 서로 떨어져 제각기 빛을 발하는 영화들을 일시적으로나마 연결하며 성좌(constellation)를 만드는 영화제의 비평적 기능을 재고해 보기 위해서다. 비평과 그 대상이 되는 작품 모두가 언어라는 장소를 공유하는 문학의 경우 이러한 비평적 기능은 무엇보다 문예지를 통해 수행되는 것이었다면, 영화의 경우 그러한 기능은 시네클럽, 시네마테크, 그리고 영화제처럼 개봉이라는 산업적ㆍ상업적 절차에 아나크로니즘을 도입하는 대안적 제도를 반드시 필요로 했던 것이다. 새로운 작품을 소개하는 일과 비평적 진단이 공통의 장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문예지와 같은 포맷을 영화제도에 도입하는 일은 디지털 기술에 힘입어 온라인 기반의 무빙 이미지 플랫폼이 자리 잡고 나서 비교적 최근에야 시도되고 있는 중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스타에 대한 가십이나 개봉작 소개에 치중하기보다는 비평적 측면을 강화한 영화잡지의 발흥은 대안적 상영 제도의 존재를 반드시 필요로 했으며 그 역 또한 마찬가지다. 내 생각에 영화제의 비평적 기능이라는 문제를 두고 씨름했던 2기 인디포럼의 고민은 앞서 소개한 『씨네21』 좌담 참여자들의 회고에만 의존해 폄훼되어도 좋을 만큼 사소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영화가 미학적으로 거의 파국에 다다른 것은 아닌가하는 어쩌면 조금 이른 근심을 하게 만들었던 2017년의 마지막 달, 도래할 영화의 배아가 아닌 정체된 영화의 클론에 불과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영화들이 서울독립영화제 경쟁부문을 채우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떠올린 것은 바로 그 시기 인디포럼에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다행히도, 출처가 불분명한 풍문이나 부정확할 수도 있는 나의 개인적인 기억 말고 당시 인디포럼을 둘러싼 정황들을 추측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들이 존재한다. 우선 2006년 9월에 발간된 『독립영화』(28ㆍ29 합본호)에 실린 ‘이슈—11회를 맞은 인디포럼’ 특집의 글들이 있다. 잡지 편집진은 “철저한 기획이 부족하여 일관성 없는 글들이 모이게 되었지만” “언젠가는 이 원고들이 누군가에 의해 유용한 것으로 쓰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이 원고들을 모두 싣기로 결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참여한 필자들은 두 명의 인디포럼 프로그래머(이상용ㆍ이선화), 인디포럼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두 명의 독립영화 감독(윤성호ㆍ이송희일), 그리고 한 명의 관객(김유리)이다. 여기서 이들의 글을 일일이 검토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송희일의 기고문 「인디포럼은 죽었다」를 살펴보자면, 2002년 이후 그때까지의 2기 인디포럼에 대해 “나는 독립영화, 너는 물 탄 독립영화, 너는 상업영화에 한 발 담근 독립영화 등등의 구별짓기는 결국 많은 사람들을 떠나게 했고, 결국 인디포럼의 단말마를 목도하기 직전에까지 오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패인”이라고 지적하면서 “꽃순이가 칼을 든 이후” “인디포럼은 죽었다”고 단언하는 그의 입장은 9년 후 인디포럼 20주년 좌담에서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실제로 2006년의 인디포럼은 ‘기획’과 ‘포럼’ 부문으로 이분화된 프로그램 하에 29편의 상영작(장편 3편ㆍ단편 26편)만으로 단출하게 치러졌고, 영화제 기간은 나흘로 축소되었으며, 상영작 가운데 2005~2006년에 제작된 신작은 많지 않았다. 이 점에서 “인디포럼이 그간 주력해왔던 ‘현장성’, 즉 한 해 동안 제작되었던 독립영화들을 응모하고 그것들의 경향을 살펴보려는 노력 자체가 빠져” 있었다는 이송희일의 지적은 틀리지 않다. 

그런데 2006년 인디포럼의 포맷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웹상에 올라와 있던 영화제 게시물을 보아서는 얼른 드러나지 않지만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면 포맷이 한눈에 보일 것이다. 포맷에 집중해 볼 수 있도록 감독 이름과 작품 제목만을 표기하고 제작연도와 상영시간 등은 표기하지 않았다. 포럼 부문 프로그램의 경우, 토론 주제와 관련된 1990년대의 단편영화 9편과 이하 감독의 영화 3편이 매 토론에 앞서 상영되었는데 아래 따로 표기하지는 않았다.  


기획: 독립영화—디지털 프롤로그

[시간성] ※ 디지털의 기동성과 시간적 연속성을 활용한 다큐멘터리 작품들 
김경만 <골리앗의 구조>
김경만 <하지 말아야 될 것들>
김동원 <송환>
김영석 <대우자동차투쟁속보>
태준식 <우리 모두가 구본주다>

[직접성] ※ 필름보다 직접적인 디지털의 호흡과 리듬을 살린 작품들
김곡ㆍ김선 <정당정치의 원리>
김곡ㆍ김선 <정당정치의 역습>
윤성호 <이렇게는 계속 할 수 없어요>
이정수 <자급자족하는 비디오>

[대체성] ※ 필름을 대체하는 디지털의 경제적ㆍ기술적 편의성을 살린 작품들
김은희 <세 개의 멜로>
신연식 <좋은 배우>
이지선 <yellow3>
채  기 <목록 1: 묻어있는>
채  기 <목록 2: 너의 눈 속에 나의 신념이 남아있다>
채  기 <목록 4: 홍학 사이버네틱스>
허기정 <Taipei-Durée>
허기정 <첫 번째 외출을 다루는 두 번째 장>

포럼 1: 독립영화, 이중성의 모험—90년대 말을 중심으로
(토론자: 이상용ㆍ유운성ㆍ조영각)

포럼 2: 영화문화와 비평—이하의 영화를 중심으로
(토론자: 이상용ㆍ이선화ㆍ김영진)


이렇게 보면 2006년 인디포럼의 포맷이 무엇을 모델로 삼고 있는지가 바로 보인다. 바로 작품과 비평이 공존하는 잡지이다. 의도된 것이었건 아니었건 간에 이 해 인디포럼은 기계적이라 여겨질 만큼 비평적 잡지의 포맷을 그대로 영화제로 옮겨온 것처럼 보인다. 혹은 작은 규모의 영상작품 전시에 어울릴 구성을 영화제에 곧바로 이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현장성’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프로그래밍한 기획 부문의 상영작 선정이 적절했는가, 그리고 포럼 부문에서 내건 주제에 대한 토론이 제대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답하기 어렵다. 내가 토론자로 참석했던 첫 번째 포럼에서는 독립영화의 정체성과 여타 영화제들과의 경쟁 속에서 인디포럼을 운영하는 일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산만하게 뻗어 나갔다. 두 번째 포럼의 경우에도 ‘이하의 영화를 중심으로’ 영화문화와 비평의 역할에 대해 논의한다는 기획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해서 이선화 프로그래머 스스로 “텍스트에 대한 한층 정교한 논의가 수반되었다면 (……) 현재의 영화 지형에 있어 그와 같은 영화가 점하는 포지션에 대해 전체를 조망하는 시각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이번 포럼의 문제제기가 더욱 설득력 있게 전달될 수 있었을 (……) 가능성이 적지 않을 것 같다”고 인정한 바 있다(「초조함 혹은 구기방심(求其放心)의 마음」). 

그렇다면 이토록 과격하게 영화제의 규모를 축소해 가면서까지 무리하게 비평적 잡지의 포맷을 도입하려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것을 그저 ‘칼을 들고 설친’ 결과라는 식으로 냉소적으로 호도해서는 안 된다. 인디포럼 2기가 시작되던 무렵은 한국 최초의 연례 독립영화제로서의 인디포럼—연례적으로 열린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 최초의 독립영화제는 1984년 7월 7일과 8일 이틀간 국립극장 실험무대에서 열린 ‘작은 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행사였다—의 위상과 기능이 바야흐로 위협받기 시작한 때였다. 영화진흥위원회 주최로 열리던 한국독립단편영화제는 2001년에 사단법인 한국독립영화협회와 공동주최로 열린 이후 2002년에는 서울독립영화제로 개칭하며 현재의 꼴을 갖추기 시작했고, 2001년에는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주최하는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제인 인디다큐페스티발이 출범했다. 무엇보다 화장품 기업 태평양 미쟝센(현재는 아모레퍼시픽 미쟝센)의 후원을 받아 충무로 영화감독들이 나서 장르영화 중심의 영화제를 표방한 미쟝센단편영화제를 출범시킨 것이 바로 2002년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앞에 두고 인디포럼 프로그래머들은 영화제의 역할과 기능을 재고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디포럼 10주년 직후 2005년 8월에 발간된 『독립영화』(25호)에 기고한 「인디포럼의 10주년 기획전, 또는 영화제의 (불)가능한 역할들」에서, 김노경ㆍ이선화 두 프로그래머는 2002년 인디포럼이 “충무로를 바라보는 포트폴리오적 성격의 단편영화들”을 배제하면서 “방향의 급선회로 당시 많은 논란(주로 부정적인)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한편 “비평적 담론 생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장”으로서의 영화제로의 방향 전환을 재차 강조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비평적 잡지의 포맷을 영화제에 거칠게 적용한 그들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음은 상기한 바대로다. 2기 프로그래머들이 물러난 이후 조직을 재정비한 인디포럼은 2007년에 ‘그렇다면 심기일전’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통상적인 영화제 포맷으로 귀환한다. 2017년 미쟝센단편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김현정의 <나만 없는 집> 같은 영화는, 2기 인디포럼 기획자들이라면 포트폴리오적 단편영화의 전형으로 꼽으며 배제했을 것이 분명하지만, 이제는 서울독립영화제는 물론이고 인디포럼에서도 얼마든지 자리를 찾을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이제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2기 인디포럼을 비평적 진단과 작품이 공존하는 잡지와 같은 장소로서 영화제를 다시 정의하려 했던 실험적 시도로 다시 생각해 보고 싶다. 물론 인디포럼의 방향성을 두고 다투었던 독립영화계 내부의 관계자들이라면 사정도 모르면서 과장하는 일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기껏해야 추정에 그칠 수밖에 없는 ‘내부 사정’에 대한 기술을 배제하고 가능한 이 글에서는 공식적으로 발표ㆍ공개된 기록물에 표명된 입장에만 집중해 보려 했다. 이렇게 보면 한때 독립영화계 내부에서 벌어졌던 독립영화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은 사실 영화제의 역할과 기능을 놓고 벌인 논쟁에 다름 아니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나는 “비평적 담론 생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장”으로서의 영화제라는 김노경ㆍ이선화의 주장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 쪽이다. 다만 나는 2기 인디포럼 기획자들이 영화제를 운영하는 가운데 노골적으로나 암암리에 드러내 보인 비평적 실천의 개념에는 동의할 수 없는데, 비평이란 지도그리기와 관련될 수는 있지만 울타리를 세우는 일과는 거의 무관하기 때문이다. 비평은 제도가 아니라 사유다. 혹은 제도 안에서조차 기어이 사유하는 일을, 게다가 오직 그것만을 저항으로 삼는 실천이다. 그런데 2기 인디포럼은 비평적 의식이 사유하는 상상적 성좌를 영화제라는 제도의 경계를 다시 획정하는 작업을 통해 현실화ㆍ영토화하려 했던 것이다. 사실 이 시기 인디포럼은 보리스 그로이스가 지난 세기 초엽의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재고하면서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실현하기 위해 세계를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을 필요로”(『아방가르드와 현대성』)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현실에 있어선 오히려 거꾸로 되어 2006년 인디포럼 기획 부문을 주로 정치적 다큐멘터리와 실험영화 들로 채우는 수세적ㆍ방어적인 프로그래밍으로 나타났지만 말이다. 

2기 인디포럼의 실험들은 이제 대부분 폐기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인디포럼이 여전히 운영하고 있는 ‘월례비행’처럼 일부 잔존하고 있는 것도 있다. 영화제 기간 이외에도 독립영화 한 편 씩을 영화관에서 매달 상영하고 토론과 비평 작업을 병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사실 2기 인디포럼 기획자들이 영화제의 이벤트적인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2003년 2월부터 시작해 2004년 3월까지 지속했던 ‘월례포럼’을 이어받아 변형한 것이다. 또한 신작 중심의 프로그래밍에만 집착하지 않고 특정한 주제 하에 상영과 포럼이 결합된 프로그램을 마련한 2006년 인디포럼의 포맷은 현재의 인디포럼 뿐 아니라 인디다큐페스티발 같은 다른 독립영화제에도 흔적—의미심장하게도 양쪽 모두 ‘포럼기획’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는 부문에—을 남기고 있다. 2기 인디포럼이 파국을 맞고 나서 꼬박 10년이 지난 2016년, 이 해 인디포럼 포럼기획전의 주제는 ‘디지털, 눈을 뜨다’였는데 이것이 2006년 기획 부문 주제였던 ‘독립영화—디지털 프롤로그’의 변주임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게다가 ‘디지털, 눈을 뜨다’ 포럼기획전 부문의 주인공 가운데 하나로는 2기 인디포럼 첫 해에 <반변증법>(2001)과 <시간의식>(2002)이 초청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29편의 극소수 영화만이 ‘간택’되었던 2006년에도 두 편이나 초청을 받은 ‘비타협영화집단’ 곡사(김곡ㆍ김선)가 올라 있다. 그런가 하면 2016년 인디포럼 카탈로그에는 “독립 장편 극영화가 상업영화로 가는 징검다리가 아니라 주류영화의 문법을 거부하는 새로운 대안이 될 때에만 한국영화의 미래는 더욱 비옥해질 것”이라는, 흡사 2기 인디포럼 기획자들의 다짐을 떠올리게 하는 문구가 실려 있기도 하다. 이 해에 인디포럼은 의장과 사무국장을 교체하며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이전 시기의 성과를 이어받고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시기(4기?)로 자리매김 될 지는 지켜볼 일이다.  

내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2017년 서울독립영화제에 대한 잠시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경쟁부문 초청작들 대부분이 실망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시 칼을 계속 들었어야 했어’ 따위의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갓 21세기를 맞이했을 때 한국의 독립영화계가 외연의 확장이나 경계의 획정을 두고 다투는 일 대신 영화적 방법의 문제라는 것을 탐문하고 토론하고 실천하는 일에 전념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예술에 있어서 방법이란 형식(form)ㆍ양식(mode)ㆍ스타일과는 다른 것이다. 영화를 하나의 ‘예술’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저항감을 느끼는 이들이 영화계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겸손인지, 허세인지, 그도 아니면 비하로 위장된 자부심(“예술입네 하지만 우리한텐 영화는 그냥 일이지”)인지는 분명치 않다. 여하간 영화에 있어서도 방법의 문제는 중요하며 그것이 형식ㆍ양식ㆍ스타일과는 다른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예술에 있어서 형식ㆍ양식ㆍ스타일은 감각이나 감수성과 관련된 것이고 따라서 비평의 문제가 될 수 있다. 반면에 방법은 예술을 통해 보고 또 드러내고자 하는 대상의 특성에 대한 예측에 따라 구성되는 인식론적 틀과 관련되며 따라서 이론의 문제가 된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방법이 비가시적 알고리즘이라면 형식ㆍ양식ㆍ스타일은 가시적 디스플레이라 생각해도 좋다. 무엇보다 주의해야 할 것은 방법이 형식ㆍ양식ㆍ스타일을 규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어느 쪽이건 종종 명칭에 있어 ‘~주의(~ism)’의 형태를 띤다는 데 현혹되어 방법을 형식ㆍ양식ㆍ스타일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를 무시하고 특정한 방법을 특정한 형식ㆍ양식ㆍ스타일과 결부시키려 들 때 결과적으로 방법은 관습 내지는 상투구의 집적으로 전락—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물론이고, 애초에 방법으로 출발했으나 형식ㆍ양식ㆍ스타일로 귀착되어버린 모더니즘, 음렬주의, 시네마베리테 등등—하고 만다. ‘방법을 산출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을 초현실주의의 경우를 떠올려 보면, 자동기술법이나 우아한 시체 놀이나 데페이즈망은 특별히 초현실주의적 형식ㆍ양식ㆍ스타일—사실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과 결부된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식ㆍ양식ㆍ스타일과도 결합할 수 있는 방법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초현실주의가 상업적 광고의 전략과 결합되곤 하는 것도 이상하기보다는 당연한 일이다. 광고의 목표는 그것이 드러내고자 하는 대상(상품)과 그것의 인식 주체(소비자)가 맺는 우연적 관계를 필수불가결한 관계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있고, 이때 우연과 깊숙이 연관된 초현실주의의 방법들이 유용하게 활용된다. 거칠게 말하자면 오늘날의 광고 PD들은 마그리트의 후예이고 광고 카피라이터들은 한도 끝도 없이 『자기장(Les Champs magnétiques)』(1920)을 계속 쓰고 있는 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방법과 형식ㆍ양식ㆍ스타일의 불편한 만남을 다루기 위해 비평적 사유가 요청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방법이 꺼림칙한 형식ㆍ양식ㆍ스타일과 결합되었다 해서 방법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의 독립영화는 바로 한국영화에 방법의 문제를 제기하는 일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는 독립영화가 ‘주류영화의 문법’을 거부하는 데서 출발했다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일단 언어의 문법에 상응하는 문법이 영화에도 있으리라는 가정은 지탱되기 힘들다는 것은 이론적으론 상식에 속하기도 하고, 그보다 ‘주류영화의 문법’이라 할 때 여기서의 문법이란 형식ㆍ양식ㆍ스타일을 가리키는 부주의한 용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법이라는 용어 때문에 오도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주류영화란 방법을 공유하는 영화들이 아니라 특정한 시기 및 장소에서 유용한 일련의 형식ㆍ양식ㆍ스타일을 취한 영화들의 집합을 가리키는 것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 말에 담긴 함의는 다음과 같다. 독립영화의 임무란 영화에 있어서 방법의 필요성ㆍ유효성이란 문제를 제기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해서 주류영화의 ‘문법’(형식ㆍ양식ㆍ스타일)을 거부할 것을 요청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문법’은 독립영화가 제안한 방법과 결합될 수 있다. 그런데 그 방법이란 과연 무엇일까.

한국의 독립영화가 한국영화에 방법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출현했다고 할 때 그 방법이란 주지하다시피 바로 액티비즘이었다. 한국에서 ‘독립영화’란 주류영화와는 다른 제작양식을 취하는 영화들—바꿔 말하면 ‘틈새시장’을 겨냥한 영화들—을 가리키는 산업적 용어가 아니라 방법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이론적 용어라는 특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서울올림픽을 맞아 이루어진 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강제 철거된 상계동 지역 주민들의 삶과 투쟁을 기록한 김동원의 <상계동 올림픽>(1988)은 액티비즘 독립 다큐멘터리의 효시로 꼽힌다. 액티비즘이란 작품의 경계를 그것이 제작되고 상영되는 상황—당연히 가변적이고 유동적일 수밖에 없는—으로까지 넓히면서 작품과 상황 간의 상호적인 피드백을 최대화하려는 방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김동원이 <상계동 올림픽>에서 취하고 있는 양식이 주류 다큐멘터리의 그것과 차별화된 대안적 양식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과장일 수밖에 없다. 상계동 주민들이라는 집단을 ‘우리’라는 1인칭 대명사로 대변하며 설명적 내레이션으로 이끌고 가는 <상계동 올림픽>의 양식은 이 영화가 제작되던 시기까지 한국의 개봉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관제 ‘문화영화’의 그것과 거의 차별화되지 않는다.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기원’에 놓인 이 불편함이 그동안 적지 않은 평자들을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상계동 올림픽>에서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의 양식이지 액티비즘이라는 방법 자체가 아니라는 데는 누구라도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상계동 올림픽>에 앞서 제작된 작품 하나를 망각에서 끄집어 낼 필요가 있다. 1983년에 전남 구례군 광의면에서 있었던 수세(농지개량조합비) 현물납부 투쟁을 다룬 서울영화집단의 8mm 영화 <수리세>(1984)가 그것이다. 김동원은 본격적으로 다큐멘터리 운동에 뛰어들기 전 서울영화집단의 다큐멘터리들을 인상 깊게 보았다고 술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판놀이 아리랑>과 <수리세>가 영화적으로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형식적으로 봐서 선전선동 면에서 영화적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었거든. 그러한 전통이 이어지지는 않았거든.”(『매혹의 기억, 독립영화』) 서울대학교 영화동아리 얄라셩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서울영화집단이 표방한 소형영화 운동의 방법론을 구체화한 최초의 작품”(『변방에서 중심으로: 한국 독립영화의 역사』)이라 알려져 왔던 <수리세>는 2017년에 디지털 복원되어 고(故) 홍기선 감독 추모전의 일환으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상황이 진행되는 동안 촬영된 <상계동 올림픽>의 경우와 달리 <수리세>를 제작할 당시 수세 현물납부 투쟁은 이미 종료된 상태였다. 연출을 맡았던 홍기선은 “싸울 때 내려가지 못하고 다 끝난 다음에 재현다큐멘터리를 한” 것이라 “현장에 없어서 작품이 좀 그렇지”라고 아쉬움을 토로한 바 있지만(『매혹의 기억, 독립영화』), 오히려 그런 사정 때문에 이 영화는 김동원의 <명성, 그 6일의 기록>(1997)—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명동성당 농성투쟁에 관한 다큐멘터리—을 통해 구현될 양식을 선취하게 되었다. 서울영화집단 제작진은 투쟁에 참여했던 농민들의 인터뷰, 신문 보도 기사, 투쟁 현장 사진, 결의문 및 그것을 읽는 농민의 모습 등을 마을에서 열린 대보름놀이 광경을 기록한 영상과 결합해 투쟁이라는 사건을 사후적으로 재구성하는 양식을 고안했던 것이다. 이로써 마을 주민들이 대보름놀이를 준비하고 수행하는 광경은 직접 카메라에 담지 못했던 수세 현물납부 투쟁의 상징적 재연처럼 비치게 된다. 역시 설명적 내레이션이 활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내레이터나 인터뷰이의 목소리를 그가 진술하는 내용과 은유적으로 관련된 영상과 독특하게 병치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예컨대 수세를 현물로 납부하기로 결정한 사연을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달집태우기를 준비하며 짚단을 쌓아올리는 아이들과 청년들이고, 농민들이 공무원 및 경찰과 대치했던 일을 내레이터가 이야기하는 동안 보게 되는 것은 대보름을 맞아 주민들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광경이다. <수리세>는 <상계동 올림픽>과 액티비즘이라는 방법을 공유하되 그것과는 다른 양식을 지닌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또 다른 기원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의 한국 독립영화는 과연 어떤 식으로 방법의 문제를 제기해 왔는가. 다큐멘터리의 경우 액티비즘은 형식ㆍ양식ㆍ스타일에 있어서 분기를 거듭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주된 방법이라 할 만하다. 2017년 인디다큐페스티발 포럼기획전의 주제는 ‘액티비즘, 나우(Activism, Now!)’였다. 또한 주류영화의 형식ㆍ양식ㆍ스타일을 방법론적 액티비즘에 수용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어서, 예컨대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가 제작한 용산참사 다큐멘터리 연작—<두 개의 문>(2011)과 <공동정범>(2016)—처럼 액티비즘이라는 방법적 기반 위에 스릴러장르의 ‘문법’을 오늘날의 다큐멘터리와 인터미디어 영상작품들에서 엿보이는 미학적 형식ㆍ양식ㆍ스타일과 맵시 있게 결합한 사례도 있다. 2기 인디포럼, 특히 다큐멘터리와 실험영화에 집중한 2006년 인디포럼의 포맷에는 확실히 징후적인 구석이 있다. 방법의 문제를 형식ㆍ양식ㆍ스타일의 문제로 오인한 나머지 수세적ㆍ방어적인 프로그래밍으로 귀결된 것은 분명하지만, 한편으론 한국 독립영화가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 돌파하지 못하고 있는 ‘픽션의 방법’이란 문제와 관련된 고민이 고스란히 배어 있기 때문이다. 2016년 인디포럼 카탈로그에도 드러나 있는 것처럼 독립 장편 극영화가 여전히 주류영화의 ‘문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의혹은 사실 장산곶매의 <파업전야>(1990) 이후부터 줄곧 제기되어 온 것이나, 진정한 문제는 ‘문법’이라는 부주의한 용어가 가리키는 형식ㆍ양식ㆍ스타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방법의 부재에 있다는 점은 재차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방법이 명확하다면 주류영화의 ‘문법’을 수용하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 삼을 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앞에서 밝힌 대로다. 한국 다큐멘터리의 역사에서 폭넓게 적용되고 실험되어 온 액티비즘이라는 방법은 극영화에서는 그리 성공적으로 수용되지 못했다. 시작부터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양쪽에 관심을 기울였던 서울영화집단도, 빈궁한 농촌의 현실을 다룬 단편 극영화 <파랑새>(홍기선ㆍ이효인ㆍ이정하, 1986)를 보면 알 수 있듯 액티비즘을 극영화로 수용하는 데 있어서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사실 실패했다고 말해도 좋다. 그럼 극영화와 관련해 한국의 독립영화는 방법이라는 문제를 이대로 방기해도 좋은 것인가. 달리 말하자면 한국의 독립영화제는 극영화와 관련해서는 방법의 문제를 방기한 채로 영화산업의 틈새시장을 겨냥하는 저예산영화들을 쇼케이스하는 데 만족해도 좋은 것인가. 이를테면 <족구왕>(2013)과 <범죄의 여왕>(2015)으로 주목을 모은 독립영화집단 광화문시네마의 신작으로 웹드라마 양식을 삽화적 구성을 통해 집적했다고 해도 좋을 <소공녀>(2017) 같은 영화 말이다. 이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이어 서울독립영화제 경쟁부문에도 초청되었는데, 디지털 시대에 문화적 인터페이스들이 넘나드는 현상을 지칭하는 레프 마노비치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트랜스코딩(transcoding)’이야말로 마침내 한국 독립영화(제)가 극영화와 관련해 유의미하게 제기한 방법임을 수긍해야 하는 것일까? 참고로 덧붙이자면 2017년 서울독립영화제 특별전은 ‘홍기선: 새로운 영화운동의 시작’, ‘박종필: 카메라를 든 현장의 활동가’, 그리고 ‘신작 웹드라마 쇼케이스’로 꾸려졌다. 한국 독립영화의 기원, 액티비즘의 다큐멘터리, 그리고 트랜스코딩의 극영화? 

2006년 인디포럼이 끝나고 나서, “여전히 누군가는 좋은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지금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낫다”고 말하며 “비평이 아젠다를 설정할 권리는 있지만 작품의 존재에 앞서 반드시 그래야할 의무는 없다”고 주장한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충고에 대해, 당시 프로그래머 가운데 한 명이었던 이선화는 “다른 이들에게 초조함으로 비칠 수 있을지언정” “비평이 아젠다를 설정하는 것은 권리라기보다는 의무”라고 반박한 바 있다(「초조함 혹은 구기방심의 마음」. 이를 영화제가 아젠다를 설정하는 것은 권리라기보다는 의무라고 고쳐 읽어도 좋을 것이다. 2기 인디포럼을 잠시 망각에서 꺼내어 본 것도 그 때문이다. 다툼 속에 불꽃이, 빛이 있었던 시간이지만, 그 이후가 소멸의 시간인지 잔존의 시간인지는 여전히 분명치 않다.  
      
   

2019-05-27

안젤라 리치 루키와 예르반트 지아니키안의 영화



※2019년 인디다큐페스티발(www.sidof.org)은 2018년 2월 타계한 안젤라 리치 루키(1942~2018)를 추모하는 특별한 자리를 마련했다. 그녀는 동반자인 예르반트 지아니키안과 함께 1970년대부터 꾸준히 일련의 실험적인 파운드푸티지 작품들을 발표해 왔다. 아래는 2019년 3월 24일 일요일 <야만의 땅> 상영 후 진행된 강연을 기록한 것이다. 현장 강연 청취와 텍스트를 통한 읽기의 차이를 고려하여 녹취본에서 구성을 일부 수정하고 몇 가지 자료와 정보, 미처 강연에 담지 못했던 강연 원고의 내용 일부를 보완해 게재함을 밝혀 둔다. 이 강연 기록은 인디다큐페스티발 홈페이지 뉴스레터 코너를 통해 공개된 바 있다. 


안젤라 리치 루키와 예르반트 지아니키안


오늘날에 영화제나 미술관에서 기존의 영상 클립들을 활용해 만든 파운드푸티지(found footage) 영상작업을 접하는 일은 드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안젤라 리치 루키와 예르반트 지아니키안만큼이나 포괄적이고 집요하게 장편 길이의 작품들을 꾸준히 만들어 온 경우는 드뭅니다. 이들의 영화가 그동안 한국에서 폭넓게 소개됐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동시대 파운드푸티지 영상작업의 계보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들의 작품은 영화제에서조차 거의 상영되지 않았습니다. 2004년에 광주국제영화제에서 <오! 인간 Oh! Uomo>(2004)이 상영된 적이 있고, 2014년에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과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야만의 땅 Pays Barbare>(2013)이 상영된 것 정도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영화계에 각인시킨 초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극지에서 적도까지 Dal polo all’Equatore>(1986)는 아직까지도 상영된 바가 없지요. [이 작품은 온라인 우부웹에서 볼 수 있다: www.ubu.com/film/gianikian.html] 그리고 2013년에 광화문의 일민미술관에서 안젤름 프랑케가 기획한 전시 <애니미즘>이 열렸을 때 단편 <다이아나의 거울 Lo specchio di Diana>(1996)이 여러 초청 작품 가운데 하나로 전시된 적이 있습니다. <정상에선 모든 것이 조용하다 Su tutte le vette è pace>(1998)와 <동양 이미지: 반달 투어리즘 Images d’Orient: Tourisme Vandale>(2001)은 이번에 인디다큐페스티발을 통해 한국에서 처음 상영되는 작품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번 특별전은, 영화제 여건상 많은 작품을 상영하지는 못하지만, 매우 뜻 깊은 기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강연에서는 <야만의 땅> 이전에 만들어진 작품들 중 주요작들의 일부 클립을 보여드리며 이 두 감독들이 어떤 작업을 해왔었는지 전체적으로 소개하려 합니다.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은 40년이 넘게 함께 작업해 왔습니다. 둘은 모두 1942년생으로 동갑이고, 리치 루키는 작년 2월 28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먼저 영상을 하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약 2분 정도 영상 클립을 보여줌]


지금 보여드린 영상은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의 작품은 아닙니다. 아마 작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보신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보여드린 것은 아직 개봉되지는 않았지만 한국에 수입되어 개봉 예정인 장-뤽 고다르의 신작 <이미지 북 Le livre d’image>(2018)의 도입부입니다. 여기서 굉장히 낡은 부식된 필름을 서서히 풀어내는 광경이 보이는 클립은, 고다르가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의 7분짜리 단편 <투명필름 Trasparenze>(1998)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클립은 <이미지 북>의 영문 예고편 영상에서도 볼 수 있다. “A New Film by Jean-Luc Godard”라는 텍스트가 뜰 때 보이는 영상이 바로 그것이다.] <투명필름>은 부식되기도 쉽고 취약한 속성을 가진 어떤 물질, 즉 필름이라는 물질을 다루는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의 작업에 대해 안내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여드린 클립에 보이는 필름은 그냥 단순히 낡은 필름인 것만은 아닙니다. 여기서 풀려나오고 있는 필름은 그 자체로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의 작업 경력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띠는 역사적 자료인데요.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투명필름>(1998)


고다르가 <이미지 북>에서 동시대와 관련해 이미지의 아카이브, 혹은 이미지의 카탈로그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는 방식과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의 방법론 사이에는 분명 상응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이 영화가 개봉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이런 말씀은 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미지 북>의 도입부에서 고다르는 이런저런 손의 이미지들을 보여주면서 드니 드 루즈몽(Denis de Rougemont)의 저서에서 따 온 것으로 알려진 “손으로 생각하기”라는 말을 읊조리는데요. 손으로 작업하고 생각한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의 작업에서 핵심이 되는 것인데 기묘하게도 고다르가 자신의 작품에서 그들의 영화에서 따온 클립을 인용하기 직전에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미지 북>에서 <투명필름> 영상 클립이 나올 때는 여성의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말이 들려옵니다. “오르페우스는 지하에서 돌아왔다. 긴 여행 중에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이 사람은 누구인가?”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의 작업과 관련해 종종 언급되는 글 가운데 하나는 이들이 직접 쓴 ⌜우리의 분석적 카메라 Our Analytical Camera⌟인데요. 원래 이 글은 영화평론가 세르주 다네가 창간한 잡지 『트라픽 Trafic』에 ‘Notre caméra analytique’라는 제목으로 1995년에 실렸던 것입니다. 2017년에는 『파운드 푸티지 매거진 Found Footage Magazine』에 2000년의 영문본이 재수록되기도 했고요. 이 글을 읽어 보면 <투명필름> 클립에서 보았던 부식된 필름을 찾게 된 경위를 알 수 있습니다. 한편으론 이 글이 처음 발표되고 나서 얼마 후에 완성된 <다이아나의 거울>의 구상이 적혀 있기도 합니다.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이 처음 만난 것은 1974년이고 이듬해인 1975년에 이들이 공동으로 연출한 첫 영화인 10분짜리 단편 <해체의 카탈로그 Catalogo della scomposizione>가 나옵니다. 이번에 상영되고 있는 세 작품처럼 발굴된 영상을 재료로 만든 첫 작품이 나오는 것은 그보다 6년 뒤로 <카라괴즈 카탈로그 Karagöez - Catalago 9,5>(1981)가 그것입니다.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은 1975년에 밀라노로 와서 살게 되는데, 그러던 중 1982년 봄(혹은 1981년 겨울)에 밀라노의 한 필름 랩에서 이탈리아 다큐멘터리 영화의 개척자인 루카 코메리오(Luca Comerio)의 필름 뭉치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랩의 소유주이자 운영자가 1차 세계대전 당시 코메리오의 수석 카메라맨으로 일했던 파올로 그라나타의 조카였다고 해요. 이 필름 뭉치들을 찾을 당시만 해도 코메리오는 사람들한테서 완전히 잊힌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 랩도 거의 문 닫기 직전이었고요. 문제는 코메리오의 필름이 질산염 필름인데다 부패 정도가 심했기에 그 자체로는 프린트를 뜰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걸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이냐? 

지금이야 공식 아카이브에서 보관, 보존되고 디지털 변환까지 된 영상물을 가지고 작업하는 작가들도 많이 있지만 당시 이들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는 거죠. 자신들이 발견한 필름을 살펴봤을 때 뭔가 흥미로운 자료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것을 가지고 곧바로 작업을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확대경으로 프레임마다 살펴보는 식으로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이들 스스로 ‘분석적 카메라(analytical camera)’라고 부르는 장치를 만듭니다. 구조를 세세히 설명하기는 좀 복잡하지만 35mm 카메라의 부속품을 활용하고 밀착 프린터(contact printer)를 변형해 만든 일종의 옵티컬 프린터(optical printer)죠. 본인들은 이것이 필름을 세부적으로 관찰하는 일종의 현미경에 가까운 것이라고도 해요. 손으로 크랭크를 돌리는 방식으로 필름을 프레임 단위로 볼 수도 있고, 느리게 재생을 하거나, 혹은 색이 들어간 필터 같은 걸 씌워 원본 필름을 재촬영하는 방식으로도 작업할 수 있게끔 고안한 장치입니다.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16mm 필름 위에 프레임 단위로 다시 재촬영을 해서 코메리오의 원본 필름으로부터 최소 347,000 프레임을 (혹은 50만 프레임 가까이를) 땄다고 합니다. 거의 애니메이션 작업하듯이 말이죠. 그렇게 코메리오의 필름 뭉치를 바탕으로 5년간 작업을 해서 1986년에 <극지에서 적도까지>라는 장편 파운드푸티지 작품을 내놓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이 이후에 만든 작품들에 원형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이분들의 경력이나 영화세계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이야기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편집자−이때 객석에 있던 신은실 프로그래머가 <극지에서 적도까지>를 프로그램에 포함시키지 못한 이유를 밝혔다. 현재 이 작품은 디지털 프린트가 없이 16mm 판본만 존재하는데 인디다큐페스티발이 열리는 롯데시네마에서는 16mm 영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은 코메리오의 원본 필름을 프레임 단위로 조사하고 속도를 조정하고 색깔을 입히기도 해서 그것을 재촬영했습니다. 때로는 음화(negative)로 반전을 시키기도 하고 원래 프레임의 특정 부분만을 확대해서 보여 주기도 하고요. 이렇게 전체적으로 재구성을 한 결과물이 <극지에서 적도까지>라고 하는 이 작품인 것이죠. 

이 강의가 있기 직전에 상영된 <야만의 땅> 같은 경우에는 영상에 대해 어느 정도 코멘트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노래 가사나 말이 수반되어 있지만 <극지에서 적도까지>는 코메리오에 대해 안내하는 도입부의 자막을 제외하면 전적으로 이미지가 주가 되는 작품이죠. 여기서 우리는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이 파운드푸티지 영화작가로서 지니는 특이성 가운데 하나를 포착하게 됩니다. 이들의 작업을 파운드푸티지 영화실천의 계보나 맥락 안에서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고 틀린 일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들의 작업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필름이라는 것을 모종의 형상을 담고 있는 ‘그림’이면서 그 자체로 손상되기 쉽고 소멸될 수도 있는 몸을 지닌 ‘물질’로서 동시에 제시/현재화(presentation)하는 것이라는 것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 둘 가운데 어느 한쪽이 두드러지거나 약화되어도 안 되는 겁니다. 어떤 필름을 발견했는데 이것을 다시 프린트해서 내가 작업에 사용한다, 혹은 이런 디지털 자료가 있는데 내가 하려는 작업에 부합하니 사용한다, 나는 필름의 물성(materiality)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오래된 필름을 발굴해 사용한다, 이런 식이 아니라 발견된 필름 그 자체가, 그것의 총체성이야말로 자신들의 카메라 앞에 놓이는 리얼리티요, 이 리얼리티를 어떻게 담아낼 것이냐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단지 필름에 담긴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필름이라고 하는 물질적 더미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그림’과 ‘물질’ 가운데 어느 한쪽이 주가 된 상태에서 다른 것이 부가적인 의미를 더하는 것도 아닌, 그 이중성을 동시에 포착하는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가 문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은 이 용어의 최상의 의미에서 충실하게 ‘다큐멘터리스트’라고 할 수 있는 작가들입니다.

예컨대 최근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 하룬 파로키가 만든 몇몇 파운드푸티지 작업들을 보면 거기서 ‘물질’이라는 측면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거나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에요. 그림에 담긴 정보나 형상을 분석하는 데 보다 치중하는 편이라 할 수 있죠. 한편 피터 체르카스키 같은 작가의 파운드푸티지 작업에서는 아무래도 물질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집니다. 켄 제이콥스의 경우 그림과 물질이라는 측면 양쪽에 관심이 있는 작가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떤 작품은 그림이라는 측면이 두드러지고 어떤 작품은 물질이라는 측면이 보다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는 편이에요. 반면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그림이자 물질로서의 필름이라는 대상의 리얼리티 자체를 동시에 포착하는 일이 관건이에요. 때로 코멘트에 상응하는 텍스트에 곡을 입혀 사용하거나, 원본 필름을 반전시키거나, 색을 입히거나, 속도를 조절하는 등의 조작은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본 필름을 완전히 추상적으로 변형을 시킨다거나 하는 조작은 없어요. 잠시 <극지에서 적도까지>에서 발췌한 영상을 보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약 5분 정도 영상 클립을 보여줌]


보신 바와 같이 <극지에서 적도까지> 도입부에는 어떤 산악지대의 풍경이 보입니다. 기차에서 보이는 풍경은 이탈리아 최북단,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티롤 지방의 풍경입니다. 지아니키안은 바로 이 지역 출신인데요.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관련을 직접 언급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 자신의 출신과 관련되어 있는 장소로 시작함을 밝히는 것이 영화에 흥미를 부여하는 방법 혹은 전략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터인데 말이죠. 앞서 말씀드린 ⌜우리의 분석적 카메라⌟라는 글에는 총 10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극지에서 적도까지>의 각 섹션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요. 이를테면 방금 보여드린 클립에서 작품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첫 번째 섹션에 대한 설명은 이렇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의 시기에 기차에서 본 티롤 지방의 풍경. 이 영상의 원래 길이는 5,044 프레임, 즉 97m였다. 여기서는 세 배로 느리게 보여준다. 기차가 달리는 철로처럼 생긴 필름의 구멍들(sprocket holes)은 한쪽이 모두 손상되어 없어진 상태여서 하나씩 다 만들었다. 필름 위에 보이는 철로가 가로지르는 대지를 뒤덮고 있는 화학적 안개, 즉 곰팡이는 필름 위에 실현된 망각이다. (…) 기차 터널은 페이드인과 페이드아웃 효과를 만들어낸다. 터널이란 곧 전쟁에 참전하게 될 병사들이, 비록 땅굴 같은 것이긴 해도, 수 년을 보내게 될 주요 장소이다.”

영화의 도입부에 이 텍스트가 내레이션의 형태로 들어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럼 <극지에서 적도까지>는 필름이라는 물질의 특성을 역사와 관련된 기억(망각)의 은유로 삼는, 말 그대로 ‘분석적’인 영화처럼 비칠 겁니다. 하지만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의 분석은 그런 방식으로 수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보이는 대로의 <극지에서 적도까지>라는 영화를, 그 자체를 보는 경험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람들이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의 영화에 대해서 종종 범하는 실수는 바로 이 부분에서입니다. 이분들이 인터뷰나 글을 통해 한 코멘트와 실제로 본 영화의 경험 자체를 섞어 버리는 것이요. 정작 영화는 그런 코멘트를 통해서 서술되었던 컨텍스트가 주어지지 않은 채로 보이는 데도 말이죠. 이들의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이조차도 아예 주어지지 않을 때도 많지만, 연도와 장소를 알려주는 아주 사소한 몇 개의 단서를 제외하고는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 기록된 것인지를 알지 못한 채로 일련의 푸티지들을 보게 됩니다. 원본 필름에 있던 스크래치나 곰팡이 등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채로 말이죠. 물질로서의 필름의 상태를 더 낫게 ‘복원’하는 일 자체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아키비스트라 불릴 수 있다면 최악의 아키비스트란 뜻에서 그럴 겁니다. 

이들에게 있어 필름이란 태어나고 살고 노화하고 죽어 사라지는 구체적인 몸(corpus)이거든요. 다시 말하자면 이들 영화의 분석이 겨냥하는 것은 필름이라는 리얼리티를 그림이자 물질로 동시에 담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바꿔 말하자면,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그림)과 몸(물질)의 상보성을 인식하는 것이라는 거죠. 몸이 없는 역사란 추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역사 없는 몸이란 자연으로 환원되겠죠. 물론 이들의 영화는 필름이라는 물질이 그렇게 자연으로 환원되는 것에 대한 저항의 실천입니다. <투명필름>에서 보이는, 고다르가 <이미지 북> 도입부에서 인용한 그 클립에 나오는 오래된 필름과 관련해서,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이 “시네마의 마지막 상태, 그것은 기억에 불을 붙이는 폭탄이 되는 것”이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겠죠. 말이 나온 김에 잠깐 <투명필름>에서 나온 오래된 필름의 정체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극지에서 적도까지> 뒷부분에 가면 1차 대전 시기에 루카 코메리오가 이탈리아 병사들을 찍은 필름의 영상들이 나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오전에 상영되었던 <정상에선 모든 것이 조용하다>에서 활용된 것도 코메리오가 1차 대전 당시에 찍은 필름이에요. 이 영화는 <전쟁포로 Prigionieri della Guerra>(1995), 그리고 <오! 인간>과 함께 1차 대전을 다룬 전쟁 삼부작으로 간주됩니다. 그리고 <투명필름>에서 보이는 그 오래되어 부식된 필름 또한 다름 아닌 1차 대전 당시 코메리오가 찍은 전쟁 당시 영상이에요. 마운트 아다멜로(Mount Adamello) 부근에서 1916년에 촬영된 것이라고 합니다. 1981년 겨울, 혹은 1982년 봄의 밀라노 랩에서의 ‘발견’이 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인지를 이제 짐작하셨을 겁니다. 잠시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의 전쟁 삼부작 각각에서 발췌한 클립들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세 편을 나란히 옆으로 붙여 보았는데, 맨 왼쪽이 <정상에선 모든 것이 조용하다>, 가운데가 <전쟁포로>, 맨 마지막이 <오! 인간>이라고 하는 작품입니다. 


[약 2분 정도 영상 클립들을 보여줌] 

왼쪽부터 <정상에선 모든 것이 조용하다>, <전쟁포로>, <오! 인간>


이렇게 해서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은 자신들이 찾은 푸티지를 가지고 작업하는 일을 계속해 왔는데, 오늘 <야만의 땅> 바로 앞에 상영되었던 <동양 이미지: 반달 투어리즘>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 예입니다. 이 영화의 원본 필름을 프레임 단위로 살펴보고 각각의 프레임에 담긴 인물의 얼굴과 몸짓의 유형들을 면밀히 살펴보다가 이들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얼굴 생김새가 무솔리니를 떠올리게 하는 여자가 계속 나오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실제로 무솔리니 딸인 에다 무솔리니(1910~1995)였던 거죠. 원본 필름 자체가 무솔리니의 딸과 다른 여러 사람들이 인도로 여행을 갔을 때 따라간 카메라맨에 의해서 촬영된 일종의 여행기(travelogue)였던 것입니다. 1926년에 촬영된 것이라고 해요.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은 에다의 얼굴 부분을 확대하고 느리게 재생해서, 그녀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는 모습을 꽤 오랫동안 집중해서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탈리아의 아프리카 점령기, 1926년에 베니토 무솔리니가 리비아를 찾은 모습이 담긴 <야만의 땅>과 짝을 이루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동양 이미지: 반달 투어리즘>의 에다 무솔리니


이제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이 원본 필름에 대해 행하는 작지만 의미심장한 ‘조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이들의 ‘분석적 카메라’는 온전히 카메라라기보다는 일종의 옵티컬 프린터에 가까운 것이라는 말씀은 이미 드렸습니다. 이 장치 앞에 놓이는 낡은 필름은 카메라 앞에 놓인 대상으로 그것의 물질적 상태와 거기 담긴 이미지와 형상을 동시에 보여줘야 합니다. 필름의 음화(negative)를 양화(positive)로 뜨는 작업과는 조금 다르게, ‘필름을 필름으로 찍는’ 일종의 재촬영(re-fliming) 작업을 통해, 프레임 단위로 50만 장에 가까운 프레임을 따는 식으로 거의 애니메이션 작업에 가까운 수고를 거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대단한 특수효과는 아니지만 사소한 조작들이 있어요. 원래의 필름을 세 배, 혹은 네 배 정도 느린 속도로 보여준다거나, 때로는 원본을 반전시켜 음화로 보여주기도 하고, 원본에 없는 색을 입히기도 하는 겁니다. 

우리는 왜 이런 조작이 필요할까, 라는 물음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작이 없이 그저 원본 필름을 영사해 보는 경우를 상상해 봅시다. 우리는 영화를 볼 때, 낡은 필름이라면 그것에 기입된 시간의 흔적을 물론 지각하기는 하지만, 필름에 담긴 사건 자체에 집중해 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예전에는 저런 일도 있었군!’이라든지 ‘저런 데까지 가서 저러고들 놀았군!’이라는 식으로 생각해 버린다는 거죠. 필름의 이미지에 담긴 내용에 집중하는 파운드푸티지 영화작가라면 여기서부터 출발해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그런 효과가 아니라는 거죠. 당신들은 이 필름이라는 몸의 존재를 한시도 망각하지 않고 끊임없이 지각하면서 거기 담긴 사건과 형상들을 보게 된다, 이 점을 상기시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들이 원본 필름에 가하는 조작의 의미는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조작이 없었다면 특히 <오! 인간> 같은 영화는 뭔가 기이하고 엽기적인 필름을 본다는 느낌이 강해졌을 수도 있어요.


<야만의 땅>


그렇다면 <야만의 땅> 같은 경우,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부분이 하나 있어요. 영화 후반부에 보면 “동아프리카 전쟁 앨범: 1935~1937”이라고 부제가 붙은 파트에서 당시 촬영된 스틸 사진들을 하나하나 꺼내 들고 카메라 앞에 놓고 보여주면서 이따금 내레이션을 들려주는 부분이 있어요. 이 부분에서는 유독 사진을 들고 있는 손(가락)의 존재가 두드러져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은 음화로 된 사진을 들고 있는 손을 찍은 다음에 그것을 반전시킨 거라서, 사진 자체는 이처럼 통상적인 흑백 양화의 이미지로 나타나는데 손은 음화로 반전되어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사진 4] 참조.) 왜 굳이 이렇게 찍어야 했을까요? <야만의 땅>에서 이 파트 이전에서는 이러한 손의 존재를 직접 볼 수 없었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아주 직접적으로 손이라고 하는 것이 화면에 쑥 들어와 있죠.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영화의 경우, 프레임 단위로 느리게 재생하는 것 자체가 필름이라는 몸의 존재를 시시각각 상기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는 반면, 그저 한 장의 이미지로 된 사진의 경우에는 그런 수단을 쓸 수가 없어요. 영화처럼 프레임 단위로 조작을 가한다는 게 있을 수 없잖아요. 만일 손이라는 것의 흔적 없이 사진 한 장을 영화 스크린을 꽉 채워 보여준다고 하면 우리는 사진 필름의 물질성은 지각하지 못한 채로 그냥 거기 담긴 형상들만을 보게 될 겁니다. 

이게 <야만의 땅> 후반부에서 사진을 보여줄 때 손을 프레임 안에 포착하고 굳이 음화로 반전시키면서까지 보여줘야 했던 이유가 아닐까요? 단지 시각적인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그리한 것은 아니라는 거죠. 사진이건 영화이건, 자신들이 만드는 ‘다큐멘터리’라고 하는 것의 대상이자 리얼리티인 필름을 대하는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의 입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다큐멘터리의 대상으로서의 필름’이라고 하는 입장을 거의 40여 년간 이 정도로까지 집요하게 견지해 온 사람들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한 뤼미에르주의자에요. 뤼미에르 시네마토그래프 앞에는 당대의 풍경, 공장, 사람 이런 것들이 있었다면 이들의 ‘분석적 카메라’ 앞에는 뤼미에르 같은 이들이 만든 필름 자체가 놓이는 것이죠.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이 자신들의 영화에서 필름이라고 하는 물질을 만지는 손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하는 것은 2000년대 후반부터에요. 이들의 작업에서 (드니 드 루즈몽의 표현을 빌린) 고다르 식으로 말하자면 “손으로 생각하기”라고 하는 것의 중요성은 정말이지 큰 것이지만, 사실 1990년대까지 만든 작업들에서 필름을 만지는 작업자의 손이라고 하는 것은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야만의 땅> 같은 영화에는 방금 보신 것처럼 후반부에 아주 적극적으로 드러나요. 자신들이 하고 있는 작업은 무엇보다 손을 통한 작업이고 자신들의 영화는 이 손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셈인데요. 생각해보면, 가장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2000년대 후반이라고 했으니까 통상 이런 파운드푸티지 작업을 비롯해서 영화계에서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작업들이 디지털 작업으로 전환되던 무렵이죠. 그때부터 이들의 작업에 이런 식으로 손이 튀어나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자부심의 표현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고요. 이런 게 전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이전의 작업에서도 화면에 보이지는 않지만 작업자의 손 자체는 언제나 인지되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비록 간접적이라 할지라도 말이에요.

올해 2월에 한 인터뷰를 보면, 리치 루키 감독이 세상을 떠난 후 지아니키안 감독은 2차 대전 중 비시 정권 시기의 프랑스, 그리고 유대인들을 태우고 아우슈비츠로 향했던 기차에 관한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2차 대전 시기로 온 것이네요.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 둘 모두 1942년생이니까 2차 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태어난 것이고, 지금껏 이들은 그런 시기에 태어난 자기들이 살아온 이 미친 세상을 있게 한 이전의 세계를 이해하는 수단으로서 영화를 택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시대에 대한 언급을 아주 직접적으로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는데 <야만의 땅> 같은 경우는 보면서 이분들이 동시대에 굉장한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다른 감독이었다면 이 정도는 아주 우회적인 발언이라고 했겠지만 이들의 이전 영화들을 고려해 볼 때 이 정도면 정말이지 분노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어요. 유럽 등지에서 벌어졌던 내전이나, 한편으로는 이주민들이나 불법이민자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 취하는 오늘날의 제노포비아 현상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했다고도 하죠. 지금까지는 이들의 작업을 보고 있을 때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역사적 정보들에 대해서는 가급적 언급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맥락적인 부분들도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예르반트 지아니키안은 아르메니아계인데요. 그의 아버지는 아르메니아 출신이고 1차 대전이 한창이던 무렵에 벌어진 터키(오스만 제국)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추방과 집단 학살의 생존자이기도 해요. 그가 리치 루키와 작업한 영화들 상당수가 1차 대전 직전(<극지에서 적도까지>)부터 1차 대전 시기(<전쟁포로>, <정상에선 모든 것이 조용하다>, <오! 인간>) 및 1차 대전 이후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이전 시기(<동양 이미지>와 <야만의 땅>)에 집중하고 있는데요. 이분들의 작업이 필모그래피 전체가 역사적 시기를 연대기적으로 따라오는 방식은 아니더라도 전체적으로는 그런 경향이 좀 있습니다. 여하간 여기에 가족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가족사가 이런 영화들의 여백에서 그것들을 감싸고 있는 것도 분명 사실이겠지요. 물론 <극지에서 적도까지>가 완성된 1986년에 만들어진 개인적인 영화 <코도르시우로의 귀환: 아르메니아 일기 Ritorno a Khodorciur: Diario Armeno> 같은 작업이 따로 있기는 해요. 예르반트의 아버지인 라파엘 지아니키안의 기억이 담긴 영화입니다. 리치 루키와 지아니키안은 1980년대 후반에 집단학살의 증거가 될 아카이브 자료를 찾아 아르메니아로 여행을 가기도 했고 이와 관련된 영화도 있고요. 하지만 아르메니아와 관련된 이들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후일 이들의 영화가 보다 더 포괄적으로 소개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2019-01-19

전용의 계보: 당수태권도는 변증법의 정도(正道)일 수 있는가?


※ 2017년 10월 8일, 나는 이 블로그에 르네 비에네(René Viénet)의 유명한 상황주의 영화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La dialectique peut-elle casser des briques?)>와 이 영화의 원전이라 알려진 홍콩영화 <당수태권도(唐手跆拳道)>, 그리고 이들 영화의 진짜 원전으로 추정되는 한국영화 <정도(正道)>에 대해 짧은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최근 연세대학교의 서현석 교수님으로부터 다음 호 《옵.신》에 이 블로그 글을 게재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이 글을 쓸 때 모아 두고도 활용하지 못한 자료, 그리고 자료를 검토하고 보완해야 할 부분 등이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이 기회에 전체적으로 관련 자료들을 재검토하고 글을 써 보기로 마음먹었다. 글을 쓰는 동안 조르주 페렉의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Un Cabinet d'Amateur)』을 종종 떠올렸는데, 건조한 보고서처럼 쓰여진 추리소설을 쓰는 기분으로 며칠 간 집과 영상자료원 및 도서관을 오가며 즐겁게 지냈다. (한 줄을 쓰기 위해 고심하고 또 고심하며 전전긍긍하곤 하는 비평문을 쓸 때와는 좀 다른 기분이었다.) 그 어떤 목적도 없는 순수한 즐거움을 위한 글쓰기. 2017년 당시에는 좀 불분명했던 몇 가지 점들도 어느 정도 정리된 것 같다. 나로 하여금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에 활용된 영상의 출처에 관심을 갖게 한 남선우 씨, 그리고 전체적으로 글을 다시 정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서현석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조사한 내용들을 아래 정리해 보았다.




1973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La dialectique peut-elle casser des briques?)>는 가장 널리 알려진 상황주의 영화 가운데 하나다. 이 영화를 만든 이는 당시 스물아홉 살의 젊은 중국학 연구자이자 문화혁명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지닌 반(反)마오주의자였던 르네 비에네(René Viénet)였다. 그는 프랑스 회사 텔레몽디알(Télémondial)을 통해 홍콩에서 수입된 액션영화 한 편의 사운드트랙을 프랑스어로 더빙하여 원작과는 전연 다른 내용의 정치적 영화로 탈바꿈시켰는데, 이로 인해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는 전용(détournement)의 방법론이 적용된 영화적 사례를 들 때마다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작품이 되었다. 

2017년 8월 17일, 나는 당시 일민미술관에서 근무하고 있던 남선우 씨에게서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의 저작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봐 줄 수 있겠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준비 중인 전시 연계 행사로 이 작품을 상영하고자 하는데 저작권자가 누구인지를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다지 까다롭지는 않은 일이라 생각해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보고 검색을 하던 중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비에네가 전용한 홍콩영화는 두광치(屠光啟: 한국식 발음으로는 ‘도광계’)라는 감독이 연출한 것으로 알려진 <당수태권도(唐手跆拳道: 영어 제목은 ‘Crush’)>이다. 홍콩영화아카이브(www.filmarchive.gov.hk)에서 제공하고 있는 감독 정보에 따르면, 두광치(1914.8.26.~1980.5.30)는 중국 본토에서 태어났고 상하이에서 영화를 만들다가 1949년에 홍콩으로 건너갔으며, 1950년대 초반 쇼브라더스 ― 당시 회사의 명칭은 소씨부자유한공사(邵氏父子有限公司)였다 ― 의 중요한 감독 가운데 한 명으로 활약했다. <당수태권도>는 그의 마지막 연출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어권 영화의 박스오피스 집계를 제공하는 중국표방(中国票房: www.boxofficecn.com)에 따르면, 이 영화는 1972년 6월 20일 홍콩에서 개봉되어 9일 동안 상영되었다. 이 영화가 한국에서 촬영된 것이고 출연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한국인이라는 점은 영화를 보면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따라서 이 영화가 1970년대에 횡행한 이른바 ‘한홍 합작영화’ 가운데 하나라고 추정해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제작사에 대해 알아보다 보니 의외의 정보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영문 위키피디아 등에는 <당수태권도>의 제작사가 ‘Yangtze Productions’라고 되어 있다. 원어로 된 제 작사 이름에 양쯔강(揚子江), 혹은 장강(長江)이 들어간다는 것 정도는 추정할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정확한 제작사명을 가늠하기 어려워서 영화 제목과 감독 이름으로 중국어 바이두백과(baike.baidu.com)를 검색해 보았다. 곧바로 이 영화의 제작사는 ‘장강전영유한공사(長江电影有限公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홍콩영화데이터베이스(www.hkmdb.com)를 통해 회사의 정식 영문명이 실제로 ‘Yangtze Productions Ltd.’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수태권도>가 한국과 홍콩 제작사의 합작으로 ― 그 ‘합작’의 성격이 어떤 것이건 ― 만들어진 것이라면 혹시 한국영상자료원 데이터베이스에서도 무언가 자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검색해 보았지만 이런 제목의 영화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역시 이 영화는 호금전의 <산중전기(山中傳奇)>(1979)가 그러했듯 합작영화가 아니라 한국에 와서 이곳을 무대로 삼아 촬영한 외국영화였을 뿐인가?[1] 문득, 이 영화의 중국어 제목과 한국어 제목이 다를 수도 있고, 한국어로 된 자료에는 제작사가 ‘장강전영유한공사’라는 정식 명칭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설령 <당수태권도>가 합작영화라 해도 그것의 한국어 제목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제작사만을 단서로 삼아 ‘장강영화사’, ‘장강전영’, ‘장강전영공사’ 등으로 온라인 검색을 계속하다 보니 1973년 4월 5일 자 《중앙일보》에 실렸던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찾게 되었다.

제작사 한진흥업을 고발
문공부는 우리나라를 무대로 우리나라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당수태권도>라는 영화가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용공 단체의 선전영화로 둔갑, 상영되고 있다는 보도(3월 31일 자 본지 4면 게재· 《중앙일보》 파리 주재 주섭일 특파원 보도)에 대해 진상조사에 나서 이 영화가 합작영화가 아닌 순수한 우리나라 영화(제목은 <정도>)임을 밝혀내고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고 이 영화를 작년 말 홍콩 장강전영공사에 수출한 제작사 한진흥업(대표 한갑진)을 검찰에 고발했다. 한진은 제작에 앞서 장강과 7천 달러에 수출하기로 계약, 동남아지역 상영권만 양도하기로 했는데 수출신고 절차를 밟기 전에 한진이 장강에 필름을 반출, 장강은 다시 토키를 중국어로 바꿔 임의로 프랑스 좌파 단체인 계급투쟁촉진회에 이중 수출했다는 것이다.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의 원전인 <당수태권도>가 홍콩영화도 합작영화도 아니고 한국영화라고? 우선 확인할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이때 1973년에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가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상영되었을 당시 관객들에게 배포된 전단(아래)이 도움이 되었다.[2] 




이 전단에 따르면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는 1973년 3월 8일부터 파리의 그랑조귀스탱 극장(Salle des Grands-Augustins)에서 하루 6회씩 상영되었고, ‘계급투쟁의 촉진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확산을 위한 협의회(l'association pour le développement des luttes de classes et la propagation du matérialisme dialectique)’가 제작한 프랑스어 자막이 입혀진 판본으로 상영되었다. (즉,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는 첫 공개 당시 오늘날 흔히 접하게 되는 프랑스어 더빙판[3]이 아니라 중국어 사운드트랙은 그대로 둔 채 ‘엉뚱한’ 프랑스어 자막을 입힌 판본으로 상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일보》 파리 특파원이었던 주섭일이 이 영화를 보고 쓴 기사가 발표된 날짜가 1973년 3월 31일이니 시기나 정황은 꽤 그럴듯하게 들어맞는다. 또한 위 기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계급투쟁촉진회’란 바로 ‘계급투쟁의 촉진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확산을 위한 협의회’를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당시 주섭일 특파원이 영화를 보고 나서 《중앙일보》에 게재한 글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에 대해 한국어로 쓰여진 첫 비평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프랑스서 공산주의 선전영화로 둔갑한 합작 무협영화
한국에서 로케 촬영한 <당수태권도>란 영화가 <변증법은 벽돌장을 깨뜨릴 수 있는가?>라는 선전 문귀와 함께, 완전한 공산주의 계급투쟁을 위한 영화로 둔갑, 파리에서 상영되고 있어 자유민주주의 한국이라는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있다. 아마도 한·중 합작이거나 아니면 한·향항[홍콩] 합작영화로 보이는 이 영화는 장강영화공사 제작으로 되어있는데 태릉·북악산의 장면이 허다하게 나오고 여자는 치마와 저고리, 남자도 저고리와 바지에 대님 그리고 갓을 쓴 한국인들이 연기의 주된 그룹을 이루어 토키와 수명의 주인공만 중국어, 중국인일 뿐 거의 한국영화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데도 이 프랑스어 선전 문귀가 보여주듯 계급투쟁을 묘사한 공산주의적 작품으로 상영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이른바 계급투쟁촉진회에서 수입 그랑·오귀스텡 영화관에서 상영 중인 이 영화는 “공산주의의 유물변증법은 벽돌장까지 깨뜨릴 수 있으며 태권도의 주먹이 피압박 계급으로 상징되어 칼 등 무기를 가진 지배 계급과 대항, 지배 계급이 결국 패퇴하고 만다”는 것이 주제로 되고 있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중세기이며 일본인 복장을 하고 칼 찬 집단이 지배 계급인 관료로, 짚신에 한복을 입고 상투를 튼 태권도를 잘하는 집단이 국민으로 묘사돼 있다. 지배 계급의 관료 집단은 갓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국민들을 짓밟고 탄압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며 특히 태릉을 비롯, 한국의 고궁에서 결투하는 장면도 허다하다. 이 영화는 “이 같은 두 계급 간의 투쟁 속에서 다행히도 한 불굴의 태권도 도인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주인공이다. 비록 이 주인공의 철학이 미심쩍은 주관주의에 빠졌다고 하더라도 역시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계급투쟁의 전위이다”라는 유력지 《르·몽드》의 평까지 받았다. 이처럼 공산주의 선전에 이용당한 영화 <당수태권도>의 토키가 중국어이기 때문에 원래의 내용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제작 의도와는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으며 프랑스의 많은 관람객들은 원 내용은 짐작도 않고 무조건 공산주의 선전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이 영화는 중공산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서부 활극일까?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은 비공산주의계인 Ngay-Hong[4]에 의해서 제작된 영화이다. 문제의 묘는 상황의식을 가한 자막의 번역이 이 비공산주의 영화에 색채를 바꾸게 한 데 있다. 즉 완전히 자막 번역을 임의로 해 관중을 오도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또한 한국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자막을 달아 이곳에서 상영 중인 이 영화가 한국에서 촬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국인들이 등장하고 특히 우리의 자랑인 태권도를 주제로 삼고 있다는데 더 큰 문젯점이 있다. 이 같은 한·중 합작영화가 수출될 경우 우리나라는 아무런 권한도 행사할 수 없는 것인지, 또 어떤 경위로 프랑스 좌파단체인 계급투쟁촉진회로 넘어간 것인지에 대한 진상조사가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으며 최근 붐을 일으키고 있는 한·중, 한·향항 합작에 대한 재검토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무국적(?)인 듯한 이 영화는 한국의 주기인 태권도가 제목이며 한국 로케에, 한국복장에, 한국인이 등장하고 있는 만큼 이같이 오도되고 있는 자막 번역과 프랑스식 제목이 시급히 시정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이 영화를 본 한 교포는 “아무런 정치성이 없는 스포츠(태권도)영화를 외국의 용공단체가 임의로 자막을 조작하여 전혀 엉뚱한 계급투쟁의 영화로 둔갑시켜 놓은 사실은 용납할 수 없는 일로 제작 의도가 정확히 관중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시정조치가 필요하다”면서 격분을 금치 못했다.

<당수태권도>의 한국어 제목이 <정도>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곧바로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www.kmdb.or.kr)에서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아쉬운 일이지만 이 영화의 35mm 프린트는 영상자료원에 보관되어 있지 않았다.[5] <낙조>(1968)와 <그림자 없는 여자>(1970)를 연출한 경력이 있는 강유신이 감독으로, 설태호 감독과 콤비를 이루어 ‘용팔이’ 시리즈 ― <역전출신 용팔이>(1970), <남대문출신 용팔이>(1970), <신입사원 용팔이>(1970), <위기일발 용팔이>(1971), <운전수 용팔이>(1971) ― 의 각본을 쓴 유일수가 각본가로 기록되어 있었고, 영화는 홍콩에서 개봉된 지 거의 일 년이 지난 후인 1973년 5월 12일에 개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개봉영화에 대한 광고가 종종 일간지에 실렸음을 고려해 개봉일 즈음의 일간지들을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정도>의 세로 광고 몇 개가 실려 있었다. 이 광고를 통해 <정도>가 1973년 5월 12일 스카라극장에서 개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6] 


<정도>의 일간지 광고

<정도>의 개봉 포스터

<정도>의 제작사는 《중앙일보》 1973년 4월 5일 자 기사에 언급된 대로 한진흥업이다. 한진은 위에 언급한 ‘용팔이’ 시리즈 이외에도 서울 관객 37만 명을 동원, 1960년대 대표적인 흥행영화로 꼽히는 <미워도 다시 한 번>(1968)을 제작한 대양영화사가 전신으로, 1970년대 초반에 한진흥업주식회사로 영화사 등록 및 허가를 받은 곳이다. 궁금하기 짝이 없지만,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고” 외국에 영화를 수출한 혐의로 제작사 대표 한갑진이 문공부의 조사를 받고 검찰에 고발당한 지 불과 한 달여 만에 <정도>가 극장에서 개봉된 경위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게다가 신문 광고 상단에 있는 “프랑스 파리에서 상영된 화제의 영화!”라는 문구가 보여주는 것처럼, 프랑스 상황주의자들에 의해 전용되어 상영된 사실을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기까지 하다. 여하간 <정도>라는 영화와 관련된 심의자료들(한국영상자료원 내 영상도서관에 방문 열람 가능)을 검토해 보면, 이 영화의 제작 관련 신고 내용 대부분이 허위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1972년 8월 5일에 시나리오 사전 심의 접수 신청을 한 이후 1972년 12월 23일에 영화 본편이 검열에 통과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1973년 5월 12일에 스카라 극장에서 개봉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시기는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 있던 한국사회가 유신체제로 전환된, 한국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다. (그래서인지 감독의 이름이 ‘유신’이라는 사실이 쓸데없는 연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정도>의 심의자료들을 토대로 <정도>의 제작 심의 및 개봉과 관련된 일정을 당시의 다른 주요한 일들과 함께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70.03.17. 한진흥업주식회사 설립
1971.12.06. 국가비상사태 선포
1972.06.20. <당수태권도> 홍콩에서 개봉
1972.07.04.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1972.08.05.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에 <정도> 시나리오 심의 접수
1972.08.14. 시나리오 심의 결과 보고 ※ “문제점 없음”으로 판정받음
1972.10.06. 문화공보부에 영화제작 신고서 제출 ※ 10월 11일에 제작 신고 수리 통보를 받음
1972.10.17. 대통령특별선언(10월 유신) 발표
1972.10.18. <정도>에 외국 배우 출연 승인 신청[7] 
1972.12.20. 문화공보부에 <정도> 본편 및 예고편 검열 신청서 접수
1972.12.23. <정도> 검열 통과[8] 
1972.12.27. 유신헌법 통과 ※ 대통령 직선제 폐지
1972.12.28. <정도> 예고편 검열 통과[9] 
1973.02.16. 제4차 영화법 개정(일명 ‘유신영화법’) ※ 영화사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전환
1973.03.08.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파리에서 개봉
1973.03.31. 한진흥업주식회사가 문공부에서 영화제작사로 신규 허가를 받음
                   《중앙일보》 파리 특파원 주섭일의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관련 보도
1973.05.12. <정도> 스카라극장에서 개봉


영화 <정도>의 중국어 판본인 <당수태권도>가 홍콩에서 개봉된 것은 1972년 6월 20일이다. 그렇다면 1972년 8월 5일부터 12월 28일까지 이루어졌던 <정도>의 심의 과정은 편집까지 이미 완료된 ― 물론 중국어 더빙판이 아닌 한국어 더빙판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을 수 있다 ― 영화를 두고 흡사 제작 예정인 영화인 것처럼 서류를 꾸며 진행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서는 우선 한진흥업과 장강전영유한공사 사이에 이루어진 매도 계약서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1972년 10월 18일 한진흥업이 외국 배우들의 출연 승인을 받기 위해 공보부에 제출한 신청서류에 첨부된 이 매도 계약서는 현재 국문본과 영문본이 모두 남아 있다.[10] 


한진흥업과 장강전영유한공사가 맺은 <당수태권도> 매도 계약서 영문본


국문본에 따르면 계약 체결일은 1972년 2월 27일이나, 영문본에는 “1972년 2월의 이 날(this day of February, 1972)”이라고만 되어있다. (국문본에 ‘27’이라는 숫자가 수기(手記)로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영문본 계약서에서는 수기를 누락한 것으로 보인다.) 국문본에는 영화 제목이 ‘정도’라 되어 있지만, 영문본에는 ‘Tekondo’라는 제목과 함께 ‘正道’라는 한자가 수기로 함께 적혀 있다. 그리고 영화에 출연하게 될 중국계 홍콩영화 배우 세 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계약서에 표기된 바를 따르자면 ‘진홍렬(Chan Hong Ret)’, ‘백표(Bae Pyo)’ 그리고 ‘진호(Chan Ho)’이다.[11] 장강전영 측은 미화 7,000달러를 한진흥업에 지불하는 조건으로 향후 5년 동안 동남아지역 판권을 소유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이는 1973년 4월 5일 자 《중앙일보》 기사의 내용과 일치한다. 이 계약서가 위조된 것이 아니고 1972년 2월 말에 계약을 체결한 것이 사실이라면, 당시 한국영화계의 제작 관행을 고려할 때 홍콩 개봉일인 6월 20일까지 넉 달 정도의 기간에 영화를 제작해 납품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 현존하는 <당수태권도>(혹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의 영상을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서울에서 겨울에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최후의 결투의 배경이 되고 있는 종묘(!), 그리고 야외 장면에서 종종 보이는 쌓인 눈과 배우들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을 확인해 보라.) <정도>/<당수태권도>가 촬영된 것은 12월 4일에 서울에 첫눈이 내렸던 1971년 말부터 1972년 2월 사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싶다. 그렇다면 <정도>가 <당수태권도>보다 뒤늦게 개봉된 이유와 관련해 두 가지 가능성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먼저, 중국어 더빙이 되지 않은 편집본을 우선 홍콩 개봉일(1972년 6월 20일) 전에 홍콩에 보내고 한국어 판본은 추후 작업하기로 한 뒤, 문공부에는 수출계약을 맺고 제작 준비 중인 영화인 것처럼 꾸며 심의서류를 제출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당수태권도>는 한진이 수출한 <정도>의 중국어판이라고 보는 가정에 무게가 실린다.) 둘째로, 홍콩에서 편집본이 도착하기를 기다린 후에야 문공부의 심의 절차를 준비한 것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정도>의 수출계약은 허위라는 것이 된다.)

어떤 영화가 여러 개의 판본으로 존재할 때 어느 것이 원본에 가까운 것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각각의 판본을 대조해 보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정도>의 35mm 프린트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되어 있는 <정도>의 심의대본(영상자료원 관리번호 CKD016002. 방문 열람 및 출력 가능)을 참조해 이를 중국어로 된 <당수태권도> 영상[12]과 비교해 볼 수 있다. 


한국의 온라인 중고서적 사이트에서 거래되었던 <정도>의 검열대본 표지[13] 


이 둘을 비교해 보면, 한국어판 <정도>와 중국어판 <당수태권도>는 ‘거의’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도>의 심의대본에는 인물들의 대사 뿐 아니라 영화의 데쿠파주와 각각의 쇼트에 담긴 상황을 묘사한 지문이 꽤 상세하게 적혀 있다. 대사의 경우 어느 수준인가 하면 <정도> 심의대본과 <당수태권도> 영상을 토대로 더빙(혹은 자막) 작업에 임하면 한국어(자막)판을 만들 수 있을 정도다. 특히 태권도장 사범 역을 맡은 방수일과 꼬마 임연 역을 맡은 조덕명의 경우, 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그들의 입 모양과 심의대본에 적힌 대사가 일치한다. (한편, 중국 배우들의 경우 더빙 상태가 조악하기는 하지만 입 모양과 사운드트랙 상의 발음이 거의 일치한다.) 심의대본에는 묘사되어 있지 않은 행위나 액션이 영상에 보이는 부분은 있지만 심의대본에 없는 대사 부분이 영상에 있는 경우는 없다. 다음은 <정도>의 심의 대본에 묘사된 쇼트 구성과 <당수태권도>의 영상에서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쇼트 구성이 유사함을 보여주는 한 예다. (영상은 00:24:17~00:24:53 부분이며, 사진 아래의 캡션은 심의대본에 있는 지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고시다 칼을 휘두르면 공중으로 뛰는 황도 (스로모션)

땅바닥에 구르는 고시다 다시 일어난다 (스로모션)

황도의 하반신 (스로모션)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황도 양발차기 한다 (스로모션)

황도의 발에 얻어맞고 떨어지는 고시다 (스로모션)

황도 뛰어내리며 고시다의 칼을 뺏는다 (스로모션)


씬의 전개방식을 놓고 보면, ⓵ 심의대본 상의 12~13씬 부분(영상 00:25:42~00:28:44)과 14~17씬 부분(영상 00:18:51~00:25:42)이 <당수태권도>에서는 서로 순서가 바뀌어 있고, ⓶ 34씬의 뒷부분이 따로 잘려 나와 35씬 사이에 삽입(영상에서 00:53:07~00:54:41과 00:55:38~00:56:00 부분은 심의대본에서는 이어져 있는 하나의 씬이다)되어 있기도 하다. 이 두 부분을 제외하면 <정도>와 <당수태권도>의 씬의 전개는 완전히 동일하다. 내 생각에, 영화 전체의 흐름을 놓고 보면 <당수태권도>의 편집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두 경우 모두 <정도>의 심의대본에 묘사된 것과 전개를 달리함으로써 교차편집의 효과 ― ①의 경우 이어지는 18씬 및 19씬과의 관계 하에서, ②의 경우 34씬의 후반부가 35씬 내에 삽입됨으로 해서 ―를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정도>의 심의대본에 부합하는 판본의 (현존하지 않는) 영화가 <당수태권도>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정도>/<당수태권도>가 한진흥업에서 홍콩 배우들을 데려와 제작하고 수출한 한국영화인지, 아니면 홍콩 감독이 한국에 와서 연출한 것을 위장 수출한 영화인지 단정 내릴 수는 없다. 한진흥업은 <정도>의 편집본을 장강전영유한공사에 보내고 또 그 편집본을 토대로 심의대본을 작성했지만 장강 측이 홍콩 개봉시 편집을 일부 수정했을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장강이 <당수태권도>의 편집본을 한국에 보내고 추후 편집을 일부 수정해 홍콩에서 개봉했지만 한진은 애초의 편집본을 토대로 <정도>의 심의대본을 작성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앞서 인용한 《중앙일보》 1973년 4월 5일 자 기사는 한진이 1972년 말에 무단으로 홍콩에 필름을 반출했음을 문공부가 밝혀냈다고 전하고 있다. 이 기사대로라면 1972년 6월 20일에 홍콩에서 <당수태권도>가 개봉되었다는 정보는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1972년 말에야 홍콩으로 필름이 건너간 것이 사실이라면 ― <정도>의 심의서류 상에 기재된 일정대로 영화 제작이 진행되었고 11월 23일에 첫눈이 내린 1972년 말부터 촬영이 이루어졌다고 가정한다면 ― 불과 2개월, 길어야 3개월 사이에 한국에서 홍콩으로, 다시 홍콩에서 프랑스로 필름이 수출되고 ‘계급투쟁의 촉진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확산을 위한 협의회’가 제작한 상황주의적 내용으로 자막 처리까지 되어 1973년 3월 8일 파리에서 공개되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게다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는 <당수태권도>에 그저 새로운 자막 혹은 더빙을 입힌 영화인 것만은 아니다.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와 <당수태권도>의 구성은 매우 상이하다. <정도>와 <당수태권도>의 구성이 대동소이함은 앞서 밝힌 대로다. 그런데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의 경우 (<정도> 심의대본에 있는 씬 번호를 기준으로) 11씬까지는 <당수태권도>와 동일하지만, 이후 돌연 23씬으로 넘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원본 영화의 구성을 완전히 바꿔놓고 있다. 이는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가 <당수태권도>의 사운드트랙 부분만을 바꿔놓은 영화라고 하는 널리 퍼진 견해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즉 르네 비에네는 프롤레타리아와 관료주의자의 대결이라고 하는 플롯을 전개하기에 걸맞은 방식으로 <당수태권도>의 구성을 재조정하고 거기에 프랑스어 자막(추후에는 더빙)을 입힌 것이다. 


<정도>의 오리지널 대본 표지


그렇다면 유일수가 썼다고 하는 오리지널 대본과 <정도>의 심의대본 및 <당수태권도>를 비교해 보면 어떨까? 이 오리지널 대본 또한 한국영상자료원(관리번호 CKO015790)에 보관되어 있다. 심의대본 표지에는 강유신 감독이 같이 쓰여 있는 반면, 오리지널 대본에는 각본가 유일수의 이름만이 쓰여 있다. 영화 제작에 합류할 스탭들을 적게 되어 있는 내지에도 제작자 한갑진과 각본가 유일수의 이름만이 기재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공란으로 남겨져 있다. 오리지널 대본과 심의대본 모두 도입부에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이 쓰여 있다.

천구백십이년 한일합병 직후 일본 침략자들은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말살시킬 계책으로 민족 고유성이 있는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중의 하나가 태권도였다. 고구려 시대부터 전해온 한국 고유의 태권도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고 박치기로 벽돌을 박살냈다. 이러한 사실이 일제침략자들에겐 실로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 관헌들은 소위 그들 특유의 무리배들을 끌어들여 태권도 말살책을 시도했다. 이 영화는 침략자 일본의 태권도 말살정책에 항거했던 한국 태권도들의 우국 투쟁기록이다.

실제로는 한국 태권도장 사람들을 도와 일본 낭인 패거리에 대적하는 방랑객(오리지널 대본에서는 한국인이지만 심의대본에서는 중국인으로 바뀌어 있음)이 주인공인 활극에 가깝지만 대체로 내용에 부합하는 내레이션이다. 재미있는 것은 1972년 8월 14일 자 시나리오 심의 결과 보고서에는 꽤 다른 내용의 줄거리가 적혀 있다는 점이다. 다음과 같다.

한일합병의 전후하여 일인들의 행패가 날로 심하여 갔다. 그중에도 낭인들의 천인공로할만함은 날이 갈수록 극심하여졌다. 당시 한국의 기생은 정조와 시에나 또는 무술에도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다. 여기 소개되는 기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인들의 갖은 탄압을 받아오던 태권도를 몸소 배우면서 일인들과 맞섰다. 때로는 미소로 유혹도 해보고 때로는 실력으로 대결도 해보았다. 그러나 제아무리 뛰어난 솜씨가 있다 해도 결국은 여자였다. 그는 어느 날 일인들과 맞서서 싸우다가 죽게 됐다. 이를 본 태권도 도장생들이 일인과 싸워서 오만한 그들에게 옳은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얘기다.

여기서 주역으로 기술되어 있는 기생은 오리지널 대본에는 ‘여옥’, 심의대본에는 ‘김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조역 가운데 한 명이다. 이처럼 오리지널 대본과 심의대본에서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장효진/황도, 이께다/고시다, 다나까/아끼야마, 강성현/송정현, 명희/봉아, 동구/임연 등)[14] 성격이나 역할은 거의 동일하며 극의 전체적인 플롯 또한 유사하다. 주인공의 국적이 한국에서 중국으로 바뀌어 있고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는 서로 간에 조금씩 다르지만 (이미 살펴보았듯 영화 <당수태권도>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 편집본의 대사와 부합하는 <정도> 심의대본의 대사는) 현장에서 실제로 영화를 연출하는 동안 있을 수 있는 변경의 수준에서 머문다. 예컨대 ‘정도(正道)’라는 제목을 쓴 뜻을 가늠케 하는 대사가 등장하는 다음 부분(00:17:53~00:18)을 보자.


[오리지널 대본]

강성현: 여옥이, 말해봐라!
여  옥: 참는 것, 마지막 순간까지 참는 것이 태권도의 길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강성현: 그렇지. 마지막 순간, 최후의 순간까지 참는 거야. 그게 태권도의 정도이다.

[심의대본]

송정현: 김려, 말해봐라!
김  려: 예! 참는 것! 마지막 순간까지 참고 또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송정현: 옳지! 마지막 순간까지 참고 또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이지!


꽤 표면적이기는 하지만 일제 시기 태권도장 사람들의 항일정신을 담은 <정도> 오리지널 대본의 내용, 유일수의 액션영화 각본가로서의 이력, 그리고 이상의 검토 내용 등을 종합해 보면 <정도>/<당수태권도>의 원작자는 <당수태권도>의 크레딧에 표기된 ‘예광(倪匡)/Ngai Hong’이 아니라 유일수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정도>의 심의대본과 <당수태권도>는 유일수의 오리지널 대본에 따라 촬영한 (현존하지 않는) 영화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결과물일 가능성이 크다. 

1973년 4월 5일 자 《중앙일보》에는 앞서 인용한 기사 이외에 주섭일 파리 특파원이 쓴 다음과 같은 기사가 함께 실려 있다.

불서 상영된 한국영화 <정도> 내용 왜곡 경위 진상을 조사 : 주불 한국대사관, 불 정부에 요청
주불한국대사관은 이곳에서 상영되고 있는 한국영화 <당수태권도>(원제 <정도>)가 프랑스어 자막이 엉뚱하게 표현됨으로써 본래의 내용을 왜곡시키고 있는 데 대해 진상을 조사 중이다. 주불한국대사관은 프랑스 문무성 관계당국에 우선 이 영화가 수입된 경위 및 프랑스 수입상사인 텔레몬달과의 계약 내용, 그리고 전혀 다른 자막을 붙이게 된 경위를 조사해 주도록 요청했다. 3일 대사관 공보당국자는 “본래의 내용과 전혀 상이한 자막을 단다는 것도 영화 윤리상 있을 수 없는데 더욱 계급투쟁을 고취하는 내용으로 둔갑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말하고 “조사가 끝나는 대로 본국 정부에 보고하겠다”고 밝혔다.

그 조사결과는 어떠했을까? 무엇보다, <정도>/<당수태권도>의 감독은 과연 누구일까? 지금까지 검토한 자료들만으로는 확언하기 어렵지만, 중국어 판본에서는 각본가의 이름이 유일수가 아닌 (홍콩 관객들에게 알려져 있는 작가인) 예광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감독 또한 두광치가 허위로 등재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 강유신이 <정도>/<당수태권도>의 진짜 감독일까? 하지만 나는 강유신은 대명(代名) 감독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한진흥업의 위장 합작영화들로 추정되는 <혈보산천(血保山川)>(1972)의 설태호나 <사문(沙門)의 승객(僧客)>(1979)의 한국 측 감독으로 기록된 이영우처럼 말이다.[15] 내가 강유신이 <정도>의 감독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음의 자료 때문이다. 1975년에 영화진흥공사에서 펴낸 『영화백과: 제1집(映畫百科: 第1輯)』(영화백과편찬위원회 편집)을 보면 한진흥업주식회사를 소개하는 면이 있다. 한진이 제출한 자료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목록에는 1972년부터 1974년까지 한진이 제작한 작품의 감독과 주연배우가 빼곡히 기재되어 있다. 감독도, 주연배우의 이름도 표시되지 않은 영화는 단 두 편, <정도>와 <혈보산천>뿐이다. 다만 <혈보산천>의 경우, 제작영화 목록 바로 옆의 수출영화 목록(사진의 왼쪽을 볼 것)에도 올라 있다. 그럼 <정도>는 왜 수출영화 목록에 올라 있지 않을까? 1973년 초에 프랑스에서 <변증법이 벽돌을 깰 수 있는가?>가 상영되고 이 사실이 《중앙일보》 보도로 알려지는 바람에 ‘불법’적으로 해외에 반출한 영화임이 드러나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감독도 주연배우의 이름도 없이 달랑 ‘정도’라는 영화 제목만 표시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로서는 그저 추측만 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영화백과: 제1집』의 한진흥업주식회사 소개면에 실린 제작영화 목록


몇 년 전, 두광치의 이름이 한국영화 연구자들 사이에서 다시 거론되게끔 한 사건이 있었다. 다만 한국식 발음으로 읽은 ‘도광계’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2013년 한국영상자료원은 최초의 합작영화(한국-홍콩)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컬러 한국영화인 <이국정원(異國情鴛)>(1957)을 발굴해 그 복원판을 공개했는데, 두광치는 한국의 전창근, 일본의 와카스기 미츠오와 더불어 이 영화를 공동 연출했다. 이 영화는 이승만 정권 시절 정치깡패로 유명했고 ‘반공예술단’의 단장을 맡는 등 한국영화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임화수의 한국연예주식회사와 쇼브라더스(합작 당시에는 소씨부자유한공사)가 실제로 합작해 내놓은 결과물이었다. 결국 두광치는 실제 합작영화 한 편(<이국정원>)과 프랑스 상황주의자들에 의해 전용된 미심쩍은 합작영화 한 편(<당수태권도>)으로 기억되는 인물이 되었으니, 그와 한국의 인연은 참으로 기이하고 또 뒤틀린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국정원>의 포스터


<정도> 혹은 <당수태권도>는 원래 컬러영화다. 1973년에 프랑스에서 상영된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는 <당수태권도>의 중국어판 프린트를 활용해, 중국어 사운드트랙은 그대로 둔 채 원래 영화와 무관한 프랑스어 자막을 입힌 것이었다. 하지만 이 프린트는 현존하지 않는다. 이 다음에 만들어진 것이 프랑스어로 더빙된 판본이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도 이것이다. 온라인에는 프랑스어 더빙판에 영문으로 자막 처리된 영상이 여기저기 올라와 있는데 흑백인 데다 레터박스 처리가 되어 있다. 이유인즉, 이 프랑스어 더빙/영어자막/흑백화면 판본은 르네 비에네가 <당수태권도>를 ‘전용한 것을 다시 전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1990년대에 비디오아티스트이자 영화작가인 키스 샌본(Keith Sanborn)이 만든 것이다. 자신의 비디오 작업 <노벰버(Novemeber)>(2004)에서 ‘전용한 것을 다시 전용’한 이 영상을 또 전용한 바 있는 히토 슈타이얼은 「순응주의로서의 에세이?」에서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작품의 작가는 누구인가? 영상트랙을 만든 중국인 감독들인가, 음성트랙을 만든 프랑스 감독인가, 아니면 필름을 흑백 비디오로 옮긴 익명의 인물인가?[16] 이 작품은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 떠돌아다니는 협객을 보여주는 (…) 이미지는 그 자체로 소유권, 계보 및 기원뿐 아니라 작가성의 전통적 개념들에 반항하고 또 그에 도전하며 떠도는 반항아가 되었다.

Ⓒ 유운성, 2019


변증법적 후기

한진흥업의 한갑진 회장은 1998년 『우리 어머니처럼 살면 무엇이 두려우랴』라는 자전 에세이를 출판했다. 우리는 이 책에서 한진흥업이 영화사로 등록되기 직전 ‘대양영화사’로 있던 시기의 사정을 일부 가늠해 볼 수 있다. 한갑진의 회고에 따르면 <정도>의 각본가로 등재되어 있는 유일수는 “김일성대학에서 공부를 한 작가로 코미디물에 소질이 있”어 “대양영화사 전속작가로 채용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당시 서울 마포에 갓 마련했던 집에 “유일수 씨, 설태호 감독과 함께 기거하면서 새 작품을 구상했다”고도 한다. 그 새 작품이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용팔이’ 시리즈이다. 

그렇다면 <정도>는? 이 책의 232~236페이지에는, 한갑진이 <아빠하고 나하고>(이원세 감독, 1974)를 들고 1975년 가을 이란의 테헤란에서 열린 국제 아동영화제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파리에 들러 겪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거기서 우리는 <정도>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질 수 있을까? 지금까지 우리는 이미 <정도>와 관련된 기록 자료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이 영화와 관련된 한갑진의 회고는 왜곡된 기억, 그리고 약간의 과장과 거짓으로 얼룩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 사이사이에 진실을 담고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직접 읽고 판단해 보라.

내가 파리로 가는 목적은 프랑스 영화 시장을 직접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몇 년 전 우리 회사에서 제작한 <정도>(正道=일명 ‘일격필살’)라는 영화를 프랑스에 수출했다가 수난을 겪은 일이 있었는데 그 수입회사인 드몽영화사[텔레몽디알(Télémondial)을 뜻하는 것으로 보임]를 찾아보려는 목적도 있었다. (…)
우리 회사 작품인 <일격필살>을 수입해 손해는 보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손을 저으면서 흥행 성적이 좋았다고 한다. 또 어떻게 프랑스 말로 더빙을 했느냐고 했더니 한국에서 보낸 영어 대본을 근거로 프랑스 정서에 맞게 조금 고쳤다고 했다. 그랬더니 관객의 반응이 좋아 흥행에 성공했노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흥행 성적이 좋다는 정보를 홍콩 오퍼상으로부터 듣고 수입했다는 말도 했다. 나는 한국에서 보낸 영어 대본에는 이마로 벽돌을 깨는 장면에 대사가 없었는데 어찌해서 ”공산주의 정신이란 이마로 벽돌도 깨는 것“이라는 대사를 집어넣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파리에는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젊은이가 많아서 그들의 입맛에 맞을 대사를 구사한 것이라고 답했다. 어이가 없었다.
프랑스에서 상영된 <일격필살>은 동양영화로는 크게 성공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파리에서 상영 중인 영화를 감상한 J일보 파리 특파원이 기사를 쓰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가 ”프랑스에서 히트한 한국영화 <일격필살>을 보니까 한국의 젊은이들은 공산주의로 무장돼 있기 때문에 이마로 벽돌을 깬다는 대목이 나온다“는 기사를 쓴 것이다.
그 보도가 나간 다음 날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경찰서 등 한국의 모든 수사기관에서 한진흥업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 대상자는 나 한 사람인데 조사하겠다는 곳은 세 군데나 됐다. 문공부에서도 덩달아 조사를 하겠다고 했다. 나는 몹시 당황했다. (…)
나는 [중앙정보부의] 어느 조사관실에 안내됐다. 조사관이 문공부에서 허가한 제목을 <정도(正道)>인데 수출 작품의 제목은 왜 <일격필살>이며 공산주의 운운은 어째서 튀어나오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영화 수출 경위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당초 영화 제목은 <일격필살>이었는데 문공부에서 제목을 바꾸라고 지시해 <정도>로 변경했고, 검열 대본에도 <정도(일격필살)>로 돼 있었다는 것과 프랑스에서 자국어로 더빙할 때 마음대로 공산주의 운운하는 대목을 첨가했다는 점 등을 말했다. 그리고 이 작품을 파리에서 한국 특파원이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한국영화가 해외에 알려졌고 해외 개척 가능성을 보인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내 얘기를 들은 조사관은 자리를 떴다가 한참 만에야 돌아왔다. (…) 그런데 조사관은 뜻밖에도 나더러 돌아가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언제 또 와야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연락이 없으면 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내가 다시 치안본부와 경찰서에서도 출두명령이 왔는데 거기도 출두해야 되느냐고 묻자 그는 중정에서 모두 연락해줄 것이니 좋은 영화나 열심히 만들라고 했다.



[1] <산중전기>는 한국의 세경흥업이 이 영화의 수입을 위해 위장합작 형식으로 서류를 꾸며 개봉한 영화로 알려져 있다. 세경흥업이 문화공보부에 <산중전기>의 합작영화 제작허가 신청서를 접수한 것은 1977년 8월 11일이다. 호금전의 원판은 191분에 달하지만 국내에서는 상영시간이 반으로 축소되어 한국어 더빙판으로 개봉되었다. 한국어판에는 다수의 공포영화를 연출했던 박윤교 감독이 공동감독으로 올라 있지만 사실상 이름만 빌려준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어판의 35mm 프린트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산중전기> 복원판은 2016년 베니스영화제를 통해 공개되었다.

[2] 2014년에 출간된 라울 바네겜과 제라르 베레비의 책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시작이다(Rien n’est fini, tout commence)』에 수록된 이 전단의 영문 번역은 www.notbored.org/BreakBricks.pdf 

[3] 더빙판의 오프닝크레딧 부분에는 여성 내레이터의 목소리로 프랑스어 더빙판은 ‘계급투쟁의 촉진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확산을 위한 협의회’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4] 1973년 3월 9일 자 《르몽드》 지에는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의 원전과 관련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촬영된 리얼리즘적 서부극일까? 천만의 말씀, 비공산주의자 중국인인 Ngay-Hong에 의해 극동에서 연출된 상업적 서부극(Western réaliste tourné en Chine populaire? Pas du tout, western industriel réalisé en Extrême-Orient par un chinois non-communiste Ngay-Hong)”이라는 표현이 있다. 전거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주섭일은 바로 이 기사의 해당 부분을 거의 고스란히 옮겨 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Ngay Hong’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해 로마자로 표기한 것 같다. 그렇다면 대체 ‘Ngay-Hong’은 누구인가? <당수태권도>의 오프닝크레딧에는 편극(編劇: 각본)을 담당한 이가 한자로는 ‘倪匡(예광)’, 영어로는 ‘Ngai Hong’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예광은 김용과 더불어 홍콩의 대표적인 무협소설가로 꼽히는 작가이면서,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獨臂刀)>(1967)와 <13인의 무사(十三太保)>(1970) 등 장철과 긴밀하게 협력한 각본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Ngai Hong’은 통상 ‘Ni Kuang’이라 표기하는 그의 이름의 여러 로마자 표기 가운데 하나다.

[5] 2012년 12월 7일 자 《동대신문》을 보면 한진흥업의 한갑진 회장이 “소장하고 있던 한국영화 필름 127편 및 해당 작품들의 지적 재산권, 대본, 스틸사진, 영화 기자재, 비디오테이프, 영화 서적 등 관련 저작물 일체”를 동국대학교에 기증했다는 기사가 있다. 현재 이 자료들은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한진컬렉션(lib.dongguk.edu/local/html/3171)’이란 이름으로 보관되어 있는데, 웹사이트 안내에 따르면 한진흥업은 2012년 10월 15일 116건의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을 동국대학교에 양도했다. 그리고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은 이 가운데 84편의 영화를 대상으로 한국영상자료원과 저작권 대리중계 계약을 체결했다. 이 84편의 영화목록은 해당 웹사이트에서 PDF 파일로 다운받아 볼 수 있다. 이 목록에서 <정도>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한진컬렉션 소장자료들을 검색해 보면 <정도>의 비디오 녹화자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언어가 중국어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홍콩판의 비디오 녹화자료인 것으로 추정된다. 웹사이트에는 강유신과 더불어 도광패가 공동감독으로 올라 있는데 이는 한국식 발음으로는 ‘도광계’라 읽어야 할 ‘屠光啟’를 잘못 읽은 데서 초래된 오기로 보인다. 외부인은 열람이 제한된 자료로 분류되어있어 아직 확인하지 못했음을 밝혀둔다.

[6] 1977년에 영화진흥공사에서 펴낸 『한국영화자료편람: 초창기~1976년(韓國映畵資料便覽: 草創期~1976年)』에는 이 영화가 13일 동안 상영되어 28,258명의 관객이 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7] 흥미롭게도, 한진흥업은 1972년 10월 28일에 외국 배우 출연승인서 반환요청을 하고, 실제로 10월 31일에 공보부는 취하 처리를 한다. 반환요청 서류를 살펴보면 그저 “폐사[한진흥업]의 사정에 의하여”라고만 되어 있다. 그리고 12월 5일에 다시 출연승인서를 접수하고 12월 13일에 최종적으로 승인을 얻었다. 한진이 <정도> 본편 및 예고편의 검열 신청서를 접수한 것이 12월 20일임을 고려하면 매우 부조리한 일이다. 서류만 놓고 보면 외국 배우들의 영화 출연을 승인받고 나서 불과 일주일 만에 영화를 완성해 검열까지 통과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도> 본편의 검열 합격을 통보하는 기안문을 살펴보면 영화의 규격 및 수량은 35mm 프린트 9권이라고 명기되어 있고, “팔 잘리는 것”과 “입에서 피 흘리는 장면”을 삭제하고 “고시다 목욕하는 장면[은] 지나친 부분”이니 화면을 단축하라는 지시까지 적혀 있다. 10월 18일에 접수된 외국 배우 출연승인서와 12월 5일에 재접수된 출연승인서의 내용은 완전히 동일한데, 전자의 경우 한국 배우들(김석훈, 방수일)의 이름이 중국 배우들(진홍렬, 백표, 진호)보다 먼저 나오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중국 배우들의 이름이 먼저 기재되어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조건은 “연기자의 출연료는 양체회사[장강전영유한공사]에서 지불하고 촬영 중 제비용만 폐사[한진흥업]에서 지불”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8] 검열 통과 서류에는 검열 통과일이 12월 23일로 된 검열통제관 직인이 찍혀 있지만, 한진 측이 받은 영화검열합격증에는 12월 22일로 되어 있다.

[9] 검열 통과 서류에는 검열 통과일이 12월 28일로 된 검열통제관 직인이 찍혀 있지만, 한진 측이 받은 영화예고편검열합격증에는 12월 26일로 되어 있다.

[10] 장강전영유한공사는 국문본에는 ‘양채영화제작회사’로, 영문본에는 ‘Yangtze Productions Ltd.’로 표기되어 있다.

[11] 진홍렬(陳鴻烈, Chen Hung-Lieh)은 호금전의 <방랑의 결투(大醉俠)>(1966)에 출연하기도 했던 악역 전문 배우로 <정도>에서는 낭인 패거리의 우두머리 역할을 맡았다. <정도>의 주연을 맡은 백표(白彪, Jason Pai Piao)는 홍콩의 가예TV(佳藝電視)의 인기 드라마 <사조영웅전>(1976)의 주연을 맡아 이름을 알리는 한편 여러 무협영화에 출연했던 이로 <정도>의 개봉 포스터에는 ‘백호’라고 잘못 표기되어 있다. 진호(陳浩, Chen Hao)는 진홍렬의 형으로 <정도>에서는 낭인 패거리의 2인자 역을 맡았다. 사실 이 계약서 및 출연승인서에 기재된 중국 배우 목록은 허위라 할 수 있는데 <정도>에 출연하고 있는 중국 배우는 상기한 세 명 이외에도, 호인인(胡茵茵, Hu Yin-Yin), 노준곡(魯俊谷, Liu Chun-Ku), 리봉란(李鳳蘭, Lee Fung-Lan) 등 더 많기 때문이다. 극중에서 태권도 사범 송정현 역을 맡은 방수일 정도를 제외하고는 <정도>/<당수태권도>의 주역 및 비중 있는 조역들은 대부분 중국 배우들이 맡았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1972년 9월 6일부터 홍콩에서 일주일 동안 개봉된 <맹권(盲拳: 영어제목은 ‘Blind Boxer’)>은 한국의 합동영화가 합작 형식으로 제작했다고 하는 (한국판 포스터 정보대로라면) 장진원(한국)과 장삼(張森: 홍콩) 공동연출의<권왕의 복수>이다. 『한국영화자료편람』에는 <권왕의 복수>가 1972년 9월 1일에 검열에 통과한 것으로 나오지만 국내 개봉 기록은 없다. 한국에서 촬영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는 야외 장면들이 있는 이 영화에는 <정도>에 출연한 중국 배우들 가운데 백표가 주연으로, 그리고 호인인과 노준곡도 출연하고 있다. 홍콩판의 오프닝크레딧을 보면 제작사가 <당수태권도>의 ‘장강전영유한공사’(!)로 되어 있다. 각본 또한 <당수태권도>와 마찬가지로 ‘예광(倪匡)/Ngai Hong’이 올라 있다. 1972년 5월 12일에 서울의 스카라극장에서 개봉된 <혈보산천(血保山川)>은 신상옥의 안양영화가 제작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한진흥업의 위장 합작영화 가운데 하나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한국 개봉 당시 신문광고에는 설태호가 감독으로 올라 있다. 이 영화는 홍콩에서는 <용형호제(龍兄虎弟: 영어 제목은 ‘The Invasion’)>로 1972년 9월 8일에 개봉되었는데, 홍콩판 포스터에는 감독이 손가문(孫家雯)이라 되어 있다. 이 영화에는 <당수태권도>에 출연한 중국 배우들 가운데 백표, 진호, 노준곡, 호인인, 리봉란이 출연하고 있다. 제작사는 ‘장강전영유한공사’(또!)이고 각본가로는 예광이 올라 있다. 1972년, 장강전영유한공사, 출연진이 겹치는 세 편(혹은 그 이상의) 한국에서 촬영된 이른바 합작영화들. 여러모로 수상쩍은 구석이 있지만, 이들 영화와 <정도>/<당수태권도>의 관계에 대한 더 이상의 추정은 여기서는 삼가기로 한다.

[12] 유튜브(www.youtube.com/watch?v=ZmM2-SZV3Rs)에서 볼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의 편의를 위해 이 글에서 영상의 타임라인을 언급할 때는 이 영상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 영상의 오프닝크레딧에는 ‘무적의 황(Huang der Unschlagbare)’이라는 독일어 제목이 붙어 있다. 

[13] 표지 중앙 오른쪽에 붉은색 펜으로 ‘72, 12/23’ 그리고 ‘72, 12/26’이라 쓴 것이 눈에 띈다. 본문과 주8 및 주9에서 밝혔듯 1972년 12월 23일은 <정도> 본편이 검열 통과된 날짜(검열 통과 서류 기준)이며, 12월 26일은 예고편이 검열 통과된 날짜(검열합격증 기준)이다.

[14] 한진흥업이 1972년 10월 18일에 문공부에 접수한 외국 배우 출연 승인 신청서 및 이를 취하하고 1972년 12월 5일에 다시 접수한 신청서에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오리지널 대본대로 기재되어 있으나, 영화예고편 검열 신청서(1972년 12월 20일)에는 심의대본대로 기재되어 있다. 

[15] 이 영화는 다름 아닌 호금전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공산영우(空山靈雨)>의 한국어판이다. <공산영우>는 <산중전기>와 더불어 호금전이 한국에서 촬영한 작품이다. <사문의 승객>은 주4에서 언급한 ‘한진컬렉션’ 가운데 하나다. 한국어판의 오리지널 네거티브는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저작권은 한진흥업으로부터 저작권을 양도받은 동국대학교에 있다.

[16] 히토 슈타이얼은 글에서 <당수태권도>의 감독을 ‘Doo Kwang Gee’와 ‘Lam Nin Tung’이라 적고 있다. 후자에 해당하는 임연동(林年同)은 <당수태권도>의 오프닝크레딧에는 한자로는 ‘製片’, 영어로는 ‘Production Supervisor’를 담당한 것으로 올라 있다. 한편, 온라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흑백 영어자막 판본의 맨 끝에는 ‘Subtitles Ⓒ Keith Sanborn―1990’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슈타이얼의 실수일 수도 있지만, 이런 오류 자체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를 둘러싼 전용의 혼란스러운 계보를 패러디한 것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