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부터 <씨네 21> '시네마나우' 코너에 격주로 글을 쓰기로 했다. 최근 세계영화계에서 벌어지는 주요 사건과 흐름들을 소개할 목적으로 마련된 코너로 알고 있다. 아래 옮겨 놓은 것은 그 첫 번째 글로 최근 조금씩 주목받고 있는 베를린파 영화감독들에 관한 것이다. <씨네 21> 807호(2011.6.7~14)와 809호(2011.6.21~28)에 2회에 걸쳐 게재되었다.)
바이마르공화국 시기(1919~1933)에 일찌감치 황금기를 맞이했던 독일영화는, 이후 뉴 저먼 시네마의 도래와 더불어 짧은 부흥기를 맛본 이후론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국제적으로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사정이 좀 달라진 건 세기가 바뀌고 나서부터다. <굿바이 레닌>(2003)이나 <타인의 삶>(2006) 같은 ‘히트작’들이 나온 덕택이기도 하겠지만, 세계 평단이 다시 독일영화에 눈을 돌리게 된 건 아무래도 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 중인 일군의 독특한 영화감독들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독일 평론가들에 의해 명명된 바 ‘베를린파’(Berliner Schule)에 속하는 감독들로는, 독일영화텔레비전아카데미(dffb) 출신인 1세대, 즉 앙겔라 샤넬렉, 크리스티안 펫졸트, 토마스 아슬란을 비롯해 그들의 뒤를 이어 2세대라 불리는 울리히 쾰러, 발레스카 그리제바흐, 마렌 아데, 베냐민 하이젠베르크, 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 등이 있다. 나치, 비밀경찰, 통일, 이민자 문제 등 ‘큰 주제’를 다루어 최근 세계영화시장에서 제법 성공을 거둔 주류 독일영화들과 달리 이들 베를린파 영화들은 오늘날 독일인들의 일상적 삶의 미시적 관찰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다. 감독들 상호간의 의견교류와 팀워크에도 상당한 비중을 부여하는 그들의 미학적 프로그램은 주로 잡지 <리볼버 Revolver>(1998년 창간)[1]를 중심으로 표명되어 왔다.
바이마르공화국 시기(1919~1933)에 일찌감치 황금기를 맞이했던 독일영화는, 이후 뉴 저먼 시네마의 도래와 더불어 짧은 부흥기를 맛본 이후론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국제적으로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사정이 좀 달라진 건 세기가 바뀌고 나서부터다. <굿바이 레닌>(2003)이나 <타인의 삶>(2006) 같은 ‘히트작’들이 나온 덕택이기도 하겠지만, 세계 평단이 다시 독일영화에 눈을 돌리게 된 건 아무래도 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 중인 일군의 독특한 영화감독들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독일 평론가들에 의해 명명된 바 ‘베를린파’(Berliner Schule)에 속하는 감독들로는, 독일영화텔레비전아카데미(dffb) 출신인 1세대, 즉 앙겔라 샤넬렉, 크리스티안 펫졸트, 토마스 아슬란을 비롯해 그들의 뒤를 이어 2세대라 불리는 울리히 쾰러, 발레스카 그리제바흐, 마렌 아데, 베냐민 하이젠베르크, 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 등이 있다. 나치, 비밀경찰, 통일, 이민자 문제 등 ‘큰 주제’를 다루어 최근 세계영화시장에서 제법 성공을 거둔 주류 독일영화들과 달리 이들 베를린파 영화들은 오늘날 독일인들의 일상적 삶의 미시적 관찰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다. 감독들 상호간의 의견교류와 팀워크에도 상당한 비중을 부여하는 그들의 미학적 프로그램은 주로 잡지 <리볼버 Revolver>(1998년 창간)[1]를 중심으로 표명되어 왔다.
<에브리원 엘스 Everyone Else> (Maren Ade, 2009)
지난 10년 동안 (‘독일 누벨바그’란 표현을 쓴 프랑스 평단을 시작으로) 독일 바깥에서 서서히 인지되기 시작한 베를린파 영화들이, 통일 이후 독일사회에 대한 미시적 분석으로서 바이마르 영화나 뉴 저먼 시네마에 필적할 만큼의 중요성을 띠고 영화사에 등재될 것인가는 시간을 두고 좀 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2~3년 동안 이들의 작업이 바야흐로 원숙기에 이르렀음을 추측케 하는 작품들이 나오고 있는데, 예컨대 마렌 아데의 <에브리원 엘스 Everyone Else>(2009), 베냐민 하이젠베르크의 <강도 The Robber>(2010), 토마스 아슬란의 <그림자 속에서 In the Shadow>(2010) 그리고 “이른바 베를린파 가운데서도 가장 퍼스널한 필름메이커”(마크 페란슨)로 꼽히는 울리히 쾰러의 세 번째 장편 <수면병 Sleeping Sickness>(2011) 등이 그것이다. (이미 그의 데뷔작 <방갈로 Bungalow>(2002)로 “베를린파 영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 가운데 하나”란 평을 끌어낸 바 있는 쾰러의 신작 <수면병>은 올해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서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과 더불어 최고 수준의 작품이라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 유일한 영화였다.) 피상적으로만 보면 <수면병>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정글)과 클레르 드니(의 아프리카)를 뒤섞고 조셉 콘래드 풍의 내러티브를 덧입힌 것 같은 영화지만, 자연의 숭고미라든가 정치적 함의가 개입될 여지를 용의주도하게 피해나가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이미 그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작품이다.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지배적 시점이 없이 복수화된 시점들이 교차되며, 밀도 높은 각각의 순간들이 고유의 비극적(undramatic) 긴장을 만들어 내는 쾰러의 영화는, 아데의 <에브리원 엘스>와 더불어 베를린파의 미학이 지금껏 가장 섬세하게 구현된 작품이라 하겠다.
<수면명 Sleeping Sickness> (Ulrich Koehler, 2011)
어떤 면에서 베를린파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한때 이론적으로 논구되어왔던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기획을 모던한 내러티브영화에 탈정치적으로 재도입하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쾰러는 다분히 아도르노적인 어조로 “예술이 정치적인 것이라면, 일상의 정치사회적 관심들과 맞아떨어지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러하다. 예술의 힘은 그 자율성에 놓여 있다.”고 쓴 적이 있다.) 영화계에서는 매우 이례적이라 할 만큼 비평과 창작행위가 종종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매우 특수한 ‘독일적’ 상황에서 나온, 내러티브영화의 쇄신을 위한 기획이랄까.
베를린파의 영화적 실험이 주류 독일영화에 대한 반발에서 기인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내러티브영화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져 왔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즉 그들의 작업은 (베를린파 1세대의 산실인 독일영화텔레비전아카데미(dffb) 교수들인) 하룬 파로키나 하르트무트 비톰스키의 아방가르드적 실천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베를린파 영화는 최소한의 플롯을 구실로 삼아 인간과 환경(milieu)이 상호작용하는 비가시적 장(場)의 역학을 탐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적잖은 수의 베를린파 영화에서 외국의 도시나 휴양지, 국경지대 등이 무대로 제시되고 집을 떠나 있거나 새로운 장소에 막 도착한 인물이 등장하곤 하는 것도 그러한 비가시적 장의 떨림을 가장 용이하게 감지할 수 있는 상황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분히 안토니오니적인 방식으로 ‘일상을 모험화’하는 방법론이 가장 잘 드러난 영화로는, 마르세이유와 베를린을 오가는 과정에서 실존적 궁지에 빠지게 된 한 여류사진작가가 등장하는 앙겔라 샤넬렉의 <마르세이유 Marseille>(2004)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크리스티안 펫졸트의 <열망 Jerichow>(2008), 아슬란의 <그림자 속에서>, 하이젠베르크의 <강도>처럼 (주로 범죄와 관련된) 장르영화의 쇄신에 관심을 기울인 최근 작업들은 오히려 ‘모험을 일상화’하는 쪽에 가깝다.
<드라이레벤 Dreileben>(2011) 연작을 연출한 세 감독들
(왼쪽부터 크리스티안 펫졸트, 도미닉 그라프, 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
(왼쪽부터 크리스티안 펫졸트, 도미닉 그라프, 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
올해 베를린영화제에서 공개되어 평단의 절찬을 받은 <드라이레벤 Dreileben>(2011)은 이같은 장르영화 쇄신의 정점에 자리한 작품이자 베를린파의 변모를 예감케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상이한 세대에 속한 세 명의 감독 - 도미닉 그라프(1952년생), 크리스티안 펫졸트(1960년생), 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1972년생) - 이 각각 연출한 90분 분량의 장편 세 편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동일한 장소와 시기를 배경으로 두고 범죄사건을 매개로 삼아 세 개의 (독립적인 동시에 느슨히 연관된) 삶의 양상들을 차례로 다룬 일종의 TV용 ‘미니시리즈’다. 이 작품의 기원은 2006년 여름, 세 명의 감독이 이메일 교환을 통해 진행한 토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를린파 영화가 내러티브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일을 점점 경시하고 있음을 비판하는 한편 장르영화의 부재에 아쉬움을 토로한 그라프의 이메일[2]로 촉발된 이 토론은 결국 이론적 논의를 넘어 함께 영화를 만드는 작업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드라이레벤>이라는 걸출한 작품이 나오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이 작품은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카를로스>(2010), 라울 루이즈의 <리스본의 미스터리>(2010), 그리고 (나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토드 헤인즈의 <밀드레드 피어스>(2011) 등과 더불어 21세기 영화에서 내러티브/장르/텔레비전과 결부된 작가주의의 미래와 가능성에 관한 비평적 고찰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논하는 일은 별도의 지면을 요한다.)
사실 베를린파 영화들이 미니멀리즘적이고 무기력하며 (특히 잡지 <리볼버>를 중심으로) 게토화된 미학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비판은 끊이지 않았는데, 대개는 그저 피상적인 인상에만 근거한 것이다. (예컨대 롱테이크, 롱숏, 절제된 대사가 이들 영화의 특징이라는 지적은 마렌 아데의 <나만의 숲 The Forest for the Trees>(2003) 같은 영화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비판들에 맞서 그간의 결과물들을 재검토하고 ‘진화’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이야말로 이들의 작업을 이론적인 동시에 실천적인 ‘기획’(project)으로서 간주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드라이레벤>은 그러한 노력이 얼마만큼의 창조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가를 보여준 드물게 모범적인 사례다.
※ 주
[2] 이후 크리스티안 펫졸트, 도미닉 그라프, 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가 주고 받은 이메일은 <리볼버>에도 게재된 바 있다 : 독일어 원문 및 영어 번역본 다운받기 (베를린영화제 포럼부문 카탈로그 내 <드라이레벤> 관련 페이지 PDF파일로 작품해설 및 인터뷰 등도 함께 수록되어 있음)
유운성 프로그래머님.
답글삭제안녕하세요. 새로운 블로그에 둥지를 마련하셨군요.
시네21을 통해서도 유 프로그래머님의 글을 만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베를린파의 영화'.
하룬 파로키에게 깊은 관심이 있는 저로서는,
그의 후배격일 이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되어 한껏 고무되어 있답니다.
특히, 이 부분.
"비평과 창작행위가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특수한 '독일적' 상황"
지난 2월 필름 포럼에서 있었던 유 프로그래머님의 강연 이후,
'에세이 필름'과 조우하게 된 것 만큼이나 기대가 큽니다...
여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기를.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씨네 21'에 새로 연재를 시작하게는 되었습니다만, 지면이 매우 제한적이라 아주 개괄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씨네 21'에 연재하는 칼럼과 관련해 읽어볼만한 참고자료들은 본 블로그에 올려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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