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9

문학과 위생: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

 

※ 아래 글은 《문학과 사회 하이픈》(2022년 가을호)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 종반부에는 보수 공사 중인 히로시마평화기념관, 일명 원폭 돔이 석양을 배경으로 보이는 쇼트가 나온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직후다. 붉은색 사브 900을 몰고 눈 덮인 홋카이도를 찾아간 가후쿠와 그의 운전기사 미사키가 서로 포옹하고, 과거의 트라우마와 똑바로 대면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돼”라고 다짐하는 장면 다음에 말이다. 원폭 돔 쇼트 위로는 “잠자코 있긴! 기다려, 아직 끝나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가후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이내 장면은 가후쿠와 그가 지도한 배우들이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공연하고 있는 극장으로 넘어간다. 즉 가후쿠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말은 그가 연기하고 있는 바냐의 대사다. 이쯤에서 우리는 저 원폭 돔 쇼트가 매우 이상한 자리에 있음을 알게 된다. 히로시마평화기념관은 가후쿠 팀이 <바냐 아저씨>를 공연하고 있는 극장이 아니다. 그런데 원폭 돔 쇼트가 저 자리에 들어가고 그 위로 바냐의 대사까지 얹어지면서 이는 공연 장면의 설정 쇼트처럼 되어버린다. 물론 원폭 돔은 그 자체로 워낙 잘 알려진 기념물이라 이것을 보고 어떤 극장의 외부라고 생각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원폭 돔 쇼트는 분명 설정 쇼트‘처럼’ 기능한다. (언젠가 히로시마를 더는 20세기 역사의 특정한 순간과 결부시킬 수 없는 세대가 도래할 때, 그때는 이것이 완벽하게 설정 쇼트‘로서’ 기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서 굳이 그렇게까지 사변적인 공상에 탐닉할 필요는 없겠다.) 단적으로 말해, 이 쇼트는 무척이나 작위적이다. 게다가 원폭 돔의 상징성 때문에 그 작위성은 한결 두드러진다. 영리한 연출자인 하마구치가 이를 몰랐을 리 없다.[1] 그런데도 원폭 돔과 <바냐 아저씨>를 무리하게 중첩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바냐 아저씨>라는 ‘문학’은 대체 ‘역사’로서의 히로시마에 대해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다 문학은 영화가 역사에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는 위생 관리의 수단이 된 것일까?


위생용품으로서의 무라카미 하루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동명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여기에 더해, 같은 소설집에 실려 있는 「셰에라자드」와 「기노」, 그리고 장편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등 무라카미의 다른 작품에서 얻은 소재나 아이디어도 차용되었음은 하마구치의 몇몇 인터뷰를 통해 익히 알려져 있다. 영화에서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는 <바냐 아저씨> 또한 무라카미가 원작에 도입해 둔 설정이다.

사실 하마구치가 무라카미의 소설을 각색해 신작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닥 의외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해피 아워>와 <아사코> 같은 하마구치의 이전 작품들에서 은근히 감지되었던 관능적 감각에 대한 지극히 소년적인 쑥스러움을 떠올려 보면 오히려 둘은 꽤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여기서 굳이 ‘쑥스러움’이라 표현한 것은 똑바로 바라보지는 않으면서 연신 흘깃거리는 태도, 짐짓 태연함을 가장한 맹렬한 관심을 가리키기 위해서다. 즉 이런 쑥스러움은 어느 정도 부드러운 공격성이 전도된 것이라 봐도 좋다. 하마구치의 영화가 기묘한 것은 이런 소년적 쑥스러움을 허구적으로 매개하는 자리에 정작 여성이 놓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인 ‘동시에’ 그 인물의 연기자로서 카메라 앞에 나타나는 이 여성은 다분히 성적으로 충전된 텍스트를 최대한 무덤덤하게 읊조린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녀의 말과 시선과 몸짓의 세부를 구석구석 살피게 될 익명의 잠재적 관객들을, 즉 “미래의 무한한 시선”을 대리하는 저 무정한 기계 앞에서 말이다. 남자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가 그가 쓴 소설에서 가장 성적으로 노골적인 부분을 차분하게 낭독하는 여성이 등장하는 <우연과 상상>의 두 번째 에피소드(‘문은 열어둔 채로’)는 가장 전형적인 예다. 


<해피 아워>


“미래의 무한한 시선”은 하마구치가 자신의 각본 구성 및 연기 연출 방법에 대해 세밀히 기술한 「영화 <해피 아워>의 방법」에서 카메라 장치의 속성을 규정하며 쓴 표현이다.[2] 하마구치가 자신의 영화에서 허구적 인물과 결부된 텍스트를 어떻게 연기자의 말과 시선과 몸짓의 진동을 촉발하는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지를 가늠케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글이다. 그런데 텍스트와 연기자의 상호 관계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피 아워>의 각본에서 직접 발췌한 대사를 예로 드는 법은 이상하리만치 거의 없다. 그러다 글의 말미에서 하마구치는 텍스트의 의미가 어떻게 현장의 연기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예시하기 위해 유독 영화 종반부의 대사 하나를 직접 인용한다. 바로 “아침까지 남자랑 있었어. 섹스했어”라는 대사다. 영화를 위해 장기간 워크숍을 거쳤다고는 해도 이전에 연기 경험이 전혀 또는 거의 없었던 <해피 아워>의 연기자들에게 이런 발화가 적잖이 진동을 유발하리라는 점을 하마구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등장인물에 대해 연기자가 맺는 관계를 “그녀는 내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나일 뿐이다”라는 역설로 표현하기도 한다.[3] 이런 불확정적 얽힘의 관계 속에서 등장인물의 대사는 어떤 식으로건 연기자의 말과 시선과 몸짓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는 카메라를 통해 포착되어 “미래의 무한한 시선”을 위해 고정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인 셈이다.

사실, 등장인물과 연기자 사이에서 진동하는 스크린적 복합체를 포착하려는 연출적 시도 자체는 현대 영화 이후의 동시대 영화에서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4] 철학자 스탠리 카벨에 따르면,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고전 영화의 경우라 해도 영화에서의 연기자란 작가가 고안한 허구적 등장인물을 실감나게 구현해내는 연극적 의미의 배우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다. 카벨은 카메라 앞에 놓인 이러한 연기자의 현전 자체를 통해 출현하는 스크린적 등장인물을 ‘유형type’이라고 부른다. 연극적 배우는 등장인물을 무대에서 투사하는 반면, 영화적 연기자는 스크린에 투사됨으로써 유형을 산출한다. 이러한 유형은 허구적이기보다는 실재적이다.[5] 이처럼 영화 연기에 내재한 근본적 수동성을 “미래의 무한한 시선”에 노출된 육체의 잠재력으로 파악하는 것 자체보다는, 그러한 육체를 촉발해 유형화하기 위한 기능적 도구로서 텍스트를 동원한다는 점에 하마구치의 독특함이 있다. 

더불어 그는 이처럼 촉발된 육체에 관객의 주의가 최대한 집중되게끔 시각적으로 단순하고 번잡한 요소가 없는 화면을 선호한다. 게다가 그의 영화에서는 연기자의 움직임도 크지 않으며 화면 내부의 동적 요소도 극히 제한되어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이 위생적 강박관념은 극에 달한다. 도쿄에 있는 가후쿠의 집, <바냐 아저씨>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히로시마에서 그가 머무는 숙소, 그가 배우들과 함께 대본 낭독 훈련을 진행하는 연습실 등은 물론이고, 그가 미사키와 함께 홋카이도로 가는 길에 탑승하는 페리의 3등 객실에 이르기까지, <드라이브 마이 카>의 실내 공간들은 이미 고도로 정갈하게 무대화되어 있다. (이처럼 영화적으로 구성된 정갈함을 곧 ‘일본적’인 것이라고 보는 관광객적 망상이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하마구치의 스승인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 특히 최근에 국내 재개봉된 걸작 <큐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 촬영이 진행되었던 터라, 마스크를 쓰고 지나다니는 행인이 보이지 않게 프레이밍해 주로 무인 풍경의 쇼트들 위주로 실외 장면을 구성한 점도 이런 느낌을 강화한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요한 무대적 공간이 되는 자동차의 붉은색은 이러한 풍경을 바탕으로 <드라이브 마이 카>의 위생학을 강조하는 상징적 색채처럼 느껴진다. 이는 눈 덮인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붉은색 자동차가 보이는 (원폭 돔 쇼트 바로 직전에 삽입된) 쇼트에서 정점에 달한다.

따라서 문학적 기능이 없는 기능적 문학이라 할 무라카미의 텍스트가 하마구치의 연기자들을, 그들의 육체를 촉발하기 위해 활용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도입부에서 가후쿠의 아내가 성교 중 트랜스 상태에서 구술하는 이야기는 무라카미의 「셰에라자드」에서 정체불명의 여성이 주인공 하바라와 성교할 때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가져온 것이다. 무라카미가 이 단편의 제목 및 그 인물의 이름으로 ‘셰에라자드’를 택한 것은 『아라비안 나이트』와 자신의 시대적・문학적 거리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증거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언어 자체가 관능적 환기력을 지닐 수 있었던 시기의 문학이다. 이때 성교와 이야기가 결합된 존재로서의 셰에라자드는 그러한 언어의 힘에 대한 은유다. 그런 반면에 무라카미는 그 힘을 완전히 잃어버린 언어로 씌어지는 텍스트의 시대, ‘문학 상실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다. 이때 성교와 이야기의 병치는 둘을 모두 사교의 수단이라는 식으로 동등하게 포괄해버리는 시대에 걸맞은 “무표정한blank 아이러니의 현대적 실천”에 지나지 않는다.[6] 그리고 무라카미의 ‘셰에라자드’는 이러한 병치가 수행되는 자리에 불려온 ‘공허한blank’ 매개자다. 이 매개자의 자리는 이처럼 텅 빈 것이기에 위생적이다. 따라서 하마구치는 안심하고 이 자리를 자신의 연기자에게 제공할 수 있다. 종종 도착적 설정을 끌어들이지만 언어 자체의 관능적 환기력이 없는─혹은 그 반대로 언어 자체에 관능적 환기력이 없기에 도착적 설정의 힘을 빌리는 것일 수도 있는─무라카미적 텍스트는 연기자들을 안심시키면서도 그들의 육체를 촉발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여기서 ‘무라카미적’이라고 한 것은 꼭 무라카미의 텍스트가 필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해피 아워>에서 작가 노세 고즈에가 낭독회에서 읽는 「수증기」라는 단편 소설(노세 고즈에 역의 연기자가 직접 쓴 것이다)이나 <우연과 상상>에서 두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 나오가 세가와 교수 앞에서 낭독하는 그의 소설은 이미 충분히 무라카미적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의 아내 오토를 흠모했고 어쩌면 그녀와 불륜 관계였을지도 모를 젊은 배우 다카쓰키가 이미 죽은 그녀를 대신해 가후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도 있다. 「셰에라자드」에서 무라카미가 “약간 괴담 비슷한 부분도” 있다고 운만 떼고는 정작 쓰지 않은 이야기를, 하마구치는 정말 괴담에 가까운 무라카미적 텍스트로 확장시켰다. 그리고 다카쓰키를 어쩐지 오토의 망령에 신들린 듯한 느낌으로 연출해 성적으로 충전된 텍스트를 읊조리는 여성이라는 모티브에 변주를 꾀하고 있기도 하다. (혹은, 하마구치 영화에서 여성의 자리가 실은 소년적 쑥스러움을 매개하는 자리임을 노출해버리는 순간이랄까?) 

하마구치는 자신의 ‘셰에라자드(들)’을 위한 무라카미적 텍스트를 직접 쓰거나 빌린다. 그리고 ‘셰에라자드(들)’의 자리에 선 연기자들이 텍스트와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표출하는 말과 시선과 몸짓을 카메라를 통해 “미래의 무한한 시선”에 열어둔다. 무엇이 표출될지는 우연에 달린 문제다. 결국, 상상이 우연을 부를 것이다. 이를 위해 하마구치는 연기자가 성적으로 충전된 텍스트를 오히려 감정 없이 무덤덤하게 내뱉도록 훈련시킨다. 이를테면, (실제로 이랬는지는 모르지만) “아침까지 남자랑 있었어. 섹스했어”라는 대사를 “아침까지 남자랑 있었어. 이야기했어”라고 말하는 기분으로 던지게끔 말이다. 성교나 이야기가 똑같은 무게로 사교의 수단이 된 시대에 어울리는 무라카미적 텍스트는 마침내 그것의 기능적 활용 가능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연출자와 만난 것이다. 물론, 오늘날 이런 유의 텍스트는 당신이 대형 서점 신간 소설 코너에 가서 새로 나온 한국소설을 아무거나 집어들어도 열에 아홉은 만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왜냐고?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1989년에 가라타니 고진이 지적한 것처럼 “무라카미가 일찍이 가치전도에 의해 발견한 ‘풍경’은 지금 세계적으로 자명하게 된 풍경”이기 때문이다.[7]


어떻게 여행할 것인가: 하마구치의 드로리안


무라카미적 텍스트를 하마구치처럼 용의주도하게 기능적으로 활용하지 않고 아예 그의 소설 자체를 서사적 뼈대로 삼아 고스란히 따라갈 때 얼마나 공허한 결과가 나오는지는 이치가와 준의 <토니 타키타니>나 트란 안 훙의 <상실의 시대> 같은 영화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마구치는 이를 모르지 않았을 터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의 동명 원작에서 인물과 설정을 차용하지만 그것만을 서사적 뼈대로 삼지는 않는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같은 작품도 참고했다고는 하나 그것으론 불충분했을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무라카미의 소설은 의외로 영화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만 두고 보면 그는 카프카에 필적한다. (실제로 그는 카프카의 「변신」을 차용한 「사랑하는 잠자」를 쓰기도 했다.) 오쓰카 에이지가 조지프 캠벨적인 ‘원질 신화monomyth’에 가깝다고 지적하며 비판적으로 분석한 무라카미 소설의 서사 구조[8]는 그것이 누리는 전 세계적인 인기를 보더라도 분명 보편적이지만, 그 보편성은 ‘무표정한 아이러니를 현대적으로 실천’하는 무라카미의 언어적 장식 없이는 보편적으로 수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살펴본 바대로 무라카미적 텍스트를 기능적으로 활용하고 있기는 해도 하마구치는 어떤 의미에서도 아이러니의 작가라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진정 보편적인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그에게는 무라카미적 서사 구조를 아이러니 없이 지탱할 다른 방책이 필요하다.

<아사코>의 허구적 세계에 동일본대지진을 주요하게 끌어들일 때부터 ‘국제적(으로 통하는) 동시대 일본영화 만들기’를 향한 야심을 드러냈던 하마구치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한결 보편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냈고 마침내 인정받았다. 여기서 보편적인 드라마란 특정한 지역에 대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앎이 없이도 여하간 그곳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하는 위생적 서사 구조를 뜻한다. 이만큼이나 동시대의 일본과 무관하게 널리 수용될 수 있는 동시대의 일본을 무대로 한 동시대 일본영화를 본 것이 과연 얼마만인가? 여전히 나는 대담하면서도 사려 깊은 <해피 아워>의 세계를 가장 좋아하고, <드라이브 마이 카>보다 <우연과 상상>의 세 번째 에피소드(‘다시 한 번’)─성적으로 충전된 무라카미적 텍스트도 없고, 그런 텍스트를 읊조리며 소년적 쑥스러움을 매개하는 여성도 나오지 않는, 여러 의미에서 진정한 우정의 영화─가 훨씬 훌륭하다고 보지만, 지금으로서는 동시대의 문제적 영화로서 <드라이브 마이 카>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열정>이나 <심도> 같은 영화를 만들었던 이가 지금과 같은 연출자가 된 것은 <귀여운 여인>을 만들었던 이가 훗날 <비정성시>를 만든 것만큼이나 영화라는 매체의 ‘민주주의’를 웅변적으로 증언하는 기분 좋은 사건이다. ‘재능’이란 낭만적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깨닫게 해 주니 말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기 전부터, 나는 눈밭을 배경으로 서 있는 붉은색 자동차 사진을 보고 다소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가후쿠와 미사키가 홋카이도로 향하는 것을 보고는 ‘아, 이것만은…’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녀의 어머니가 산사태로 죽은 고향 집의 폐허를 내려다보며 둘이 서로의 트라우마를 토로하고 어루만지는 클라이맥스는 그 순간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왜 이런 뻔한 무리수를 두는 일을 감행한 것일까? 어느 순간 문득, 하마구치는 그저 국제적 영화작가가 되는 것만이 아니라 20세기 말 일본영화가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하면서 그 계보를 잇는 유일무이한 적자로서 그리되겠다는 야심을 품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국제적 예술영화 유통망에서 일본영화에 부과되어 온 ‘이중구속’을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 일본영화에 부과된 이중구속이란 개념적 도식을 활용하는 현대적 미학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전적으로 동시대적인 드라마나 장르 영화를 생산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지향하더라도 봉준호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둘은 모두 하마구치가 존경하는 감독들이다.) 21세기에 들어서 이런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본영화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당대의 미학과 양식을 선도하는 것이면서 보편적인 드라마나 장르 영화를 만드는 것이기도 했던 시대─이를 대표하는 인물은 <라쇼몽>과 <7인의 사무라이>의 구로사와 아키라이며 <교사형>의 오시마 나기사를 거쳐 <하나비>의 기타노 다케시를 끝으로 한동안 맥이 끊겼다─가 한참 전에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특히 서구적 예술영화 유통망은 여전히 이러한 일본영화를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9] 하지만 저 이중구속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고, 결국 21세기의 일본영화는 일종의 ‘로컬 시네마’가 되어 고레에다 히로카즈나 가오세 나오미의 ‘일본적 영화’로서 소수의 해외 예술영화 팬들에게 다가가곤 했다. 물론 대단히 특이한 방식으로 대중 장르를 갱신하는 구로사와 기요시 같은 걸출한 연출자가 있지만, 여전히 많은 이에게 그의 영화는 <큐어>나 <도쿄 소나타> 정도를 제외하고는 요령부득이라 여겨지는 듯하다. 구로사와로서는 오랜만에 이중구속을 벗어난 듯한 <스파이의 아내>가 하마구치의 각본으로 만들어진 것이란 점도 흥미를 끄는 부분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다시 보는 동안, 내겐 요즘 영화들보다는 세기가 전환되던 2000년 전후에 보았던 몇몇 일본영화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하마구치의 서사 구조는 어쩌면 이 영화들을 가로지르는 과거로의 여행을 위한 구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마구치는 자신의 영화적 ‘원체험’이 <백 투 더 퓨처>라고 스스럼없이 밝히곤 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인물들을 트라우마적 과거로 이끄는 무대적 장치로 자동차를 활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브라운 박사가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것들로 개조한 타임머신 카 드로리안처럼 그 자체가 여러 영화적 기억의 조합물이기도 하다. 나는 이 조합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무의식적으로 또는 우연적으로 그리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여하간, 무라카미의 원작에서 차용한 인물과 설정, 그리고 무라카미적인 텍스트는 상당히 개인적인 것에 그칠 수도 있었을 이 ‘조합적’ 여행을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구조에 부드럽게 접속하는 기능을 한다. 


<바람꽃>


홋카이도라고 하면 거기서 유년기를 보냈고 자신의 영화에서 종종 이곳을 소환하기도 했던 영화감독 소마이 신지가 먼저 떠오른다. 특히, 그의 유작 <바람꽃>(2000)은 하마구치의 영화를 보는 동안 곳곳에서 떠올랐다. 여기서 우연히 만나 동반 자살을 기도했다 실패한 두 남녀는 분홍색 렌터카를 타고 여자의 딸을 만나기 위해 홋카이도로 향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와 오토 부부의 딸이 죽은 해는 소마이가 타계한 해인 2001년이고 운전기사 미사키는 죽은 딸과 동갑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가후쿠 역의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젊은 시절 배우 지망생으로 나왔던 스와 노부히로의 데뷔작 <2/듀오>(1997)도 있다. 니시지마를 매개로 삼아 스와와 하마구치의 영화를 느슨하게 전편과 후편 관계로 두고 그가 거듭해서 커플 관계의 파국을 경험하는 과정을 따라가 보는 것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스와의 이름은 <드라이브 마이 카>와 관련해 이중으로 울린다. 첫째는, 그가 히로시마 태생이고 <H 스토리>와 <히로시마에서 온 편지> 등 히로시마를 영화적으로 다루는 문제를 고민한 작품들을 만들어 왔다는 점이다. 동일본대지진에 대한 응답인 2020년 작품 <바람의 목소리>에서, 그는 쓰나미로 부모를 잃고 히로시마에서 친척과 살던 소녀가 홀로 고향을 찾아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둘째는, 등장인물인 ‘동시에’ 그 인물의 연기자로서 카메라 앞에 선 사람의 말과 시선과 몸짓을 포착하는 극영화 작업에 일찍부터 관심을 두었던 연출자가 바로 스와라는 점이다. <2/듀오>에서 그가 즉흥에 기대는 방식은 하마구치와 사뭇 다르기는 해도 말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가 가장 성실하게 되짚고 있는 20세기 최후의 일본영화는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2000)가 아닌가 싶다. (안타깝게도 아오야마는 올해 3월 21일에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두 영화의 서툰 비교는 삼가기로 하자. 상영 시간이 각각 179분과 217분에 달하는 영화라는 사실은 대수롭지 않다. 마음에 상처를 지닌 인물들이 차를 몰고 치유의 여행을 떠난다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끔찍한 사건을 겪고 나서 고통스러워하는 과정까지를 담은 긴 도입부 후에 “2년 후”라는 자막이 뜨면서 새로운 전개로 들어선다는 것도 넘어가기로 하자. 장애로 인해 수화를 사용하거나 실어증에 걸린 인물(들)을 통해 비언어적 소통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자. 남자 주인공 그리고 그보다 어린 두 남녀가 세 개의 꼭짓점을 이루는 트라우마의 삼각형이 어린 남자의 살인 행각으로 인해 무너지면서 결말부로 이행하는 구조를 띠고 있는 영화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살아가지 않으면 안 돼”라는 대사와 “살라고는 하지 않을게. 하지만 죽지는 마”라는 대사가 공명한다는 점에 너무 깊이 몰두할 필요도 없다. 이런 구조적 요소들을 제하고 나서 보이는 것이 ‘연출’이다. 그렇다면 하마구치의 ‘연출’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1990년대 중반에 일본 사회에 충격을 던졌던 옴진리교 사건 ‘이후의 영화’인 <유레카>와 동일본대지진 ‘이후의 영화’인 <드라이브 마이 카> 사이에는 단순히 시간적인 데 국한되지 않는 어떤 거리감이 있다. 사회적 재난과 자연적 재난의 차이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아오야마가 서부극의 신화적 구조를 참조하기는 해도 그의 영화는 결코 신화적 대지 위에서 배회하지 않는다. 화면 내부에 거듭 잡스러운 요소들을 불러들이는 그의 연출로 인해 신화적 추상화가 여간해선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런 요소들을 통해 감지되는 현실이 자꾸 영화 내부로 틈입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마구치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영화적 기억의 대지를 가로지르는 동안 그것을 청결하게 표백해 신화에 어울리는 것으로 만든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드라이브 마이 카>의 위생학과 그 기능이다. 이제 남은 일은 눈 덮인 홋카이도의 대지를 배경으로 치유의 의식을 행하는 두 등장인물-연기자의 말과 시선과 몸짓을 거의 5분 동안 한 호흡으로 담아낸 다소 기이한 구도의 롱테이크 쇼트를 지켜보는 일이다. 진부하기 그지없는 대사로도 이런 순간을 포착해내는 ‘<드라이브 마이 카>의 방법’에는 솔직히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다. 혹시, 성적으로 충전된 것만이 아니라 길고 진부한 대사를 통해서도 배우들을 촉발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했던 것일까? 발화하는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나 민망할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하마구치가 그처럼 큐브릭적인 연출자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여하간, 문제는 그 다음이다.


원폭 돔이 말하는 것


이제 원폭 돔의 쇼트가 어떤 상황에서 등장하는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하마구치의 연출이 성실히 수행하는 기나긴 위생 관리의 여정을 거쳐 홋카이도가 다자키 쓰쿠루의 핀란드처럼 하나의 보편적 ‘풍경’으로 재탄생한 다음이다. 남은 것은 다시 돌아온 히로시마다. 가후쿠와 미사키가 홋카이도에 가기 전까지 영화의 주된 무대였던 이곳이다. 그 무엇보다 이곳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건물이면서도 여태 보이지 않았던 원폭 돔이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는 이 최후의 상징물을 위생적으로 보편화하기 위한 ‘문학’으로서 동원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문학’은 위생 관리를 대리 수행하는 무대극으로 상연된다. 그런데 하마구치의 위생적 강박관념은 분명 그가 의도한 것도 아니고 예상치 못했을 대단히 문제적인 ‘몽타주 효과’를 낳는다.

해질녘에 촬영된 이 원폭 돔의 쇼트를 보면서 “기다려, 아직 끝나지 않았어!”라는 가후쿠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두 개의 쇼트와 하나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하나는 영화의 첫 번째 쇼트다. 성교 중 트랜스 상태에서 이야기하는 오토의 상반신을 창밖의 어스름을 배경으로 포착한 쇼트 말이다. 다른 하나는 가후쿠와 나란히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있는 다카쓰키의 얼굴을 정면에서 잡은 쇼트다. 여기서 그는 가후쿠를 똑바로 바라보며 생전의 오토音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소리音에 들린’ 사람처럼 구술한다. 두 쇼트 모두 약간의 빛이 감도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에 사로잡혀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미사키가 자신의 엄마에겐 두 개의 인격이 있었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린다. 미사키에게 폭력을 가하고 난 다음이면 그녀는 사치라는 이름의 여덟 살 난 소녀처럼 이야기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 보이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건물이다. 미사키의 고향 집처럼 폐허인 채로 남아 있는 원폭 돔은 오토와 다카쓰키처럼 무언가에 사로잡혀 “기다려, 아직 끝나지 않았어!”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가 듣는 것은 바냐를 연기하는 가후쿠의 목소리다. 이렇게 가후쿠는 오토/소리音가 된다. 우리는 오토와 다카쓰키의 내면은 볼 수 없었던 반면 원폭 돔의 내면은 볼 수 있다. 원폭 돔에 바로 뒤이어 <바냐 아저씨> 공연 중인 극장의 무대를 보게 되는 식으로 말이다. 여기서 바냐는 매형이자 고매한 지식인 행세를 하는 세레브랴코프가 자신을 착취해왔다며 거세게 항의하는 중이다. 

줄곧 어딘가 역사 바깥에서만 맴도는 것 같던 영화가 돌연 이상한 방식으로 역사의 복화술을 펼친다. 피해자로서의 바냐의 목소리가 피해자로서의 일본이라는 이미지를 웅변하는 원폭 돔의 이미지와 겹쳐질 때, 무라카미의 다자키 쓰쿠루가 감행하는 치유의 순례는 오늘날 일본 역사 수정주의자들의 정신에 상응하는 것일 뿐이라고 일갈한 오쓰카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10] 하마구치는 뜻밖의 장소에서 무라카미와 다시 만나고 또 그와 위생적으로 공명한다. 그러나 반동적인 것은 언제나 순수한 것에 깃든다.


[1] 웹진 《가미노타네》에 수록된 대담(www.kaminotane.com/2021/09/08/17146)에서 하마구치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원폭 돔 쇼트는 원래 계획에 있던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우연히 얻은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편집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채로 일단 찍어두었던 것을 활용한 것이다. “(…) 보수 공사 중이었어요. 덕분에 이른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원폭 돔’이 아니라 촬영한 시간대를 포함해 우연히 우리 눈앞에 나타난 ‘그 순간의 원폭 돔’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왔죠. 나와 개별적인 관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면서, 그렇다면 써도 좋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생겼어요. 원폭 돔은 보통 아주 단적으로 ‘히로시마’를 상징하는 데 그칠 것 같지만, 이런 상태를 찍은 컷이라면 영화가 도달하는 장소로서 나쁘지 않겠다 싶었죠.” 하마구치 류스케・미야케 쇼・미우라 데쓰야, 「영화의 ‘연출’은 어떻게 발견되는가」, 《필로》 2021년 9/10월호, 131쪽.

[2] 다음 책에 번역, 수록되어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노하라 다다시・다카하시 도모유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 이환미 옮김, 모쿠슈라, 2022, 34~35쪽.

[3] 같은 책, 27~28쪽.

[4] 나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페드로 코스타, 그리고 홍상수의 영화를 주요 참조점으로 삼아 ‘형상-픽션’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러한 복합체의 영화적 존재론을 개진한 바 있다. 유운성, 「형상적 픽션을 향하여─커모드, 아우어바흐, 그리고 영화」,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7년 가을호, 172~211쪽.

[5] Stanely Cavell, The World Viewed: Reflections on the Ontology of Film, Enlarged ed., Harvard University Press, 1979, pp.25~29.

[6] “무표정한 아이러니의 현대적 실천”이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패스티쉬적 특성에 대한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의로, 가라타니 고진은 이를 자신의 무라카미 비평에서 원용한 바 있다. 가라타니 고진, 「무라카미 하루키의 풍경」, 『역사와 반복』,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08, 163~164쪽. 다만 가라타니는 무라카미의 『1973년의 핀볼』이나 『양을 둘러싼 모험』이 무표정한 아이러니의 현대적 실천처럼 보이면서도 그 뒤에 “강한 집착과 전도의 의지를 숨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이런 ‘숨겨진 동기’는 무라카미 이후의 무라카미적 작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 그것은 패스티쉬가 된다.” 가라타니가 이 글을 발표한 것은 1989년이다. 오늘날의 무라카미 자신, 그리고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무라카미 원작의 구조만이 아니라 ‘문체’까지도 차용해 각본을 쓴 하마구치 또한, ‘문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무라카미 이후의 무라카미적 작가”에 속한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가라타니가 인용한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과 소비사회」는 다음 책에 번역, 수록되어 있다. 할 포스터 엮음, 『반미학』, 윤호병 외 옮김, 현대미학사, 1993/2002, 176~197쪽. 

[7] 가라타니 고진, 앞의 글, 179쪽. 

[8]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책(특히 1장과 2장)을 참고. 오쓰카 에이지, 『이야기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 선정우 옮김, 북바이북, 2017.

[9] 10년 전에 나는 다른 글에서 일본영화에 부과된 이중구속의 문제를 오늘날 국제영화제의 ‘검열-효과’와 연관지어 논한 바 있다. 유운성, 「영화제의 검열-효과에 관한 노트」, 《인문예술잡지F》 제4호(2012년 1월), 7~14쪽.

[10]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 대해 논하고 있는 다음 책의 7장을 참고. 오쓰카 에이지, 『감정화하는 사회』, 선정우 옮김, 리시올, 2020. 

2022-11-07

아르케이온의 도둑: 고다르의 <이미지 북>

 

※ 아래 글은 《오큘로 009: 열렬한 희망, 고다르와 이미지의 책》(2021년 10월 10일 발행)에 수록되었던 글이다. 이 글의 후반부는 고다르와 파졸리니의 관계에 대해 요즘 생각해보고 있는 주제와 관련되어 있다. 자신은 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는 예수의 말, 그리고 사도 바울의 삶과 사상을 떠올리면서 파졸리니의 미완의 프로젝트 <성 바울>의 시나리오를 꼼꼼히 다시 읽어볼 때다.


잠시 생각해 보자. 고다르의 <이미지 북> 도입부에 나온 ‘archives et morale’이라는 자막은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이 지나도 어렵지 않게 금방 떠올릴 수 있다. 분명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면 이 작품의 꽤 후반부에 나오는 ‘archéologie et pirates’이라는 자막은 영화를 보고 난 직후에도 여간해선 떠오르지 않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리스어 ‘아르케(ἀρχή)’에 공통의 기원을 두고 있는 두 단어, 즉‘archives’와 ‘archéologie’가 작품의 앞뒤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영화를 거듭 보고 난 다음이었다. 예민한 이들이라면 사정이 달랐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다(혹은 없다)고 하는 것, 즉 연상─정확하게는 ‘association/dissociation’의 과정이 부단히 반복되는 것─이야말로 고다르의 작업을 움직이는 제일의 원리라는 것을 여기서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여하튼, 아카이브와 고고학이라는 서로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는 용어들이 <이미지 북>에 등장하고 있음을 일단 깨닫고 나니, 결코 고다르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는 두 명의 사상가와 그들의 저서가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다. 하나는 『지식의 고고학』의 미셸 푸코이고 다른 하나는 『아카이브병』의 자크 데리다이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고다르가 그의 영화에서 직접 언급하거나 그것을 통해 환기시키는 철학적・예술적 저술들을 부단히 떠올리며 그의 영화에 접근하려 드는 이는 자신이 어느덧 과대망상적 독해에 빠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뿐이다. 그러니, 주의하도록 하자, 고다르의 영화에서 몽테스키외와 베카신은 어디까지나 동일한 무대에서 동등한 권리를 갖고 움직이는 등장인물들일 뿐이라는 점을 잊지 않도록. 주의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이브병』의 도입부를 여기 옮겨놓고 고다르의 영화와 함께 살펴보자 제안하고픈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다. (다짐은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 우리는 떠올려본다, 아르케란 시작(commencement)과 명령(commandement)을 한꺼번에 거명한다는 것을. 분명 이러한 거명은 동일한 것 안에 두 개의 원리들이 있음을 가리킨다. 자연이나 역사를 따르는 원리─물리적, 역사적 혹은 존재론적 원리─가 그 하나로 여기는 일이 시작되는 곳이고, 율법을 따르는 원리─입법론적 원리─가 다른 하나로 여기는 인간들과 신들이 명령을 내리는 곳이자 권위와 사회 질서가 행사되는 곳으로서 바로 이곳으로부터 지시가 내려온다.


이런 종류의 텍스트를 매개로 고다르의 영화에 접근할 때 과대망상적 독해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으면서 그것도 오직 피상적으로만 읽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고다르 자신의 독서가 언제나 피상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데리다의 독자라면 위에 인용한 도입부만을 읽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비단 독서에 있어서만 그러할까? ‘법의 정신’이 여러 소제목들 가운데 하나로 쓰였다 해서 <이미지 북>의 이해를 위해서는 몽테스키외에 대한 면밀한 독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일이 터무니없는 만큼이나, 한스 오테가 작곡한 《소리의 책(Das Buch der Klänge)》이 영화에 사용되고 제목을 짓는 데도 영감을 주었다 해서 이 곡의 의의를 과장하는 일 또한 그러하다. (고다르와 음반사 ECM 레코드와의 협력 관계는 잘 알려져 있는데 <이미지 북>에 사용된 오테의 곡 역시 ECM에서 발매된 헤르베르트 헨크의 연주 음반이다.)

일단 거칠게 나눠보자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기원을 묻는 고고학이 시작과 관련된 것이라면 아카이브는 명령과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아카이브 자체가 직접 어떤 명령을 내리고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명령에 모종의 권위를 부여한다─‘이러이러한 사례들에 비추어 볼 때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게끔─는 점은 분명하다. 대체로 이러한 명령은 이론적인 법칙보다는 실천적인 율법에 가깝겠지만 말이다. (오늘날에는 예술적 판단마저도 아카이브에 근거해 정초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조사연구의 충실함과 윤리적 정당성에 기대어 작가와 작품을 평가하는 편이 낫다고 보는 식이니 말이다. 지금에 와서 미적 가치판단의 출구 없는 미궁에 다시 빠져들 필요야 없겠지만, 그런 식의 평온한 나태함을 비평적 입장으로 수용할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다.) <이미지 북>의 도입부에 ‘archives et morale’이라는 자막이 제시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기서 고다르가 겨냥하고 있는 것이 아카이브 및 그것에 근거를 둔 명령의 실천적인 차원이라는 쪽에 확실히 무게가 실리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는 고다르의 방식이 아니다. 푸코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있어서도 아카이브는 반드시 고고학과 더불어 사유되는 것이며 고고학은 반드시 아카이브와 더불어 사유되는 것이다. 아카이브 없는 고고학은 공허하고 고고학 없는 아카이브는 맹목이라고 믿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고다르를 진정 에세이스트적 정신의 소유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는 그가 시작과 명령이라는 서로 환원 불가능한 아르케의 의미들을 언제나 동시에 붙들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르케란 오직 아포리아를 통해서만 사유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이리하여 그의 영화는 아도르노가 「형식으로서의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한 가정 내지는 전제에 입각해 에세이적 움직임의 궤적을 따르게 된다.


하나의 단어가 여러 다른 것들을 의미한다면 그것들은 서로 완전히 다르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감춰져 있다 하더라도 단어의 통일성은 대상 자체에 있는 통일성을 상기시키는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통일성을 오늘날의 보수적 철학자들이 주장하듯 그저 언어적 친연성으로 간주해 버려서는 안 된다. (……) 에세이는 추론적 절차에 단순히 대립하는 입장에 있지 않다. 에세이는 비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의 명제들이 전체로서 서로 어울려 일관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에세이는 논리적 규준들을 따른다.


오늘날 에세이적 작업이라 하면 일종의 자유연상을 따르는 스타일을 취하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아도르노는 그런 수필 같은 작업은 아예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아도르노 자신은 편성(configuration)이나 성좌(constellation)라고 부르지만 폴 발레리는 유추(analogy)라고 부르고 마츠모토 토시오는 은유라고 부르며 앙드레 바쟁은 수평적 몽타주라고 부르는 에세이적 방법─물론 여기에 구체(球體)의 형태를 띤 책과 영화를 상상해본 에이젠슈테인의 아이디어를 더해도 좋다─에 대해 생각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이 있다.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에세이란 “문화적으로 미리 결정된 특수한 대상들”에 대한 고찰로서 이러한 대상들은 푸코라면 담론 구성체라고 불렀을 법한 것이다. 언뜻 보기에 에세이적 방법은 연상의 흐름을 따라 유사한 것들을 배열하는 작업처럼 비칠 수도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 작업이 진정 겨냥하고 있는 것은 서로 떨어진 불연속적 요소들을 가로지르는 보편적 상동성(homology)─오늘의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전적으로 그릇된 발레리의 용어 자체가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방법’ 속에서 에세이적 정수를 읽어내는 그의 통찰이다─을 파악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미지 북>에서 고고학과 아카이브, 시작과 명령, 존재론적 원리와 입법론적 원리라는 양극을 부지런히 오가는 고다르가 겨냥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아르케는 결코 규정되거나 정의되는 법은 없지만 움직임 속에서, 아니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에서, 그것도 오직 사이에서만 경험된다.

무엇보다도, 이론적으로 상관적인 짝─archive/archéologie─을 고찰하기 위해 실천적으로 상반적인 짝─morale/pirates─을 함께 끌어들이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그다운 것이다. 이에 착안하면 ‘archives et morale’과 ‘archéologie et pirates’라는 일견 기이해 보이는 조합에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를테면 1960년대에 발표한 <중국 여인>에서 그가 마오주의의 의미를 탐문하는 방식은 그것을 여름 휴가와 나란히 두고 그 둘을 동시에 산출하는 보편성은 무엇인지 묻는 것이었다.) 무언가의 의미는 그것의 속성을 규정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다른 관념들과 이리저리 결합해보는 시도들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다고 보는 태도라고나 할까? 들뢰즈가 고다르를 두고 무언가의 의미를 단정하는 계사 ‘이다(est)’의 영화작가가 아니라 끊임없이 유예하는 접속사 ‘그리고(et)’의 영화작가라고 불렀던 것은 이런 태도 때문이었으리라. 이는 나무 블록을 가지고 노는 아이의 천진난만함을 닮은 것이다. 여하간, 덕분에 우리는 쉽사리 유사성의 함정에 빠져드는 실수를 피할 수 있게 된다. 대신 노략질(pirates)을 윤리(morale)로 취한다는 것─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이미지 북>의 핵심적인 테제가 아닐까?─의 의미에 대해 고려해보게 된다.


그림 1


가령 <이미지 북>에서 고다르가 혁명에 관해 이야기할 때 거듭 등장하는 이미지 하나를 살펴보자. 그것은 흰옷을 입은 한 소년이 길에서 붉은색 바퀴 같은 것을 굴리고 있는 이미지(그림 1)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바퀴가 아니라 필름을 감는 데 쓰는 릴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워낙 저화질인 데다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이미지라서 정작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붉은색 바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도 고다르가 혁명에 대해 고찰하는 방식은 역시 말과 이미지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식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기보다는 말을 훔쳐서 이미지에 건네주고 다시 이미지를 훔쳐서 말에 건네준다고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혁명(révolution)은 일단 ‘굴린다(revolve/ribouler)’는 행위와의 연계 속에서 파악되고 이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구르는 바퀴의 이미지가 화면에 떠오른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소년이 굴리고 있는 것은 단순한 바퀴가 아니라 필름이 감겨 있는 릴이다. 그는 이 릴을 어디서 가져온 것일까? 혹시 훔친 것은 아닐까? 고다르적 연상의 노선에서 혁명이란 ‘다시-훔친다(re-voler)’는 행위와도 얼마든지 연계될 수 있다. 그렇다면 혁명과 연계된 이러한 행위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을 겨냥해 수행되는 것일까? 고다르에게 있어서 그것은 영화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릴을 굴리며 뛰어가는 소년의 이미지는 일단 (고다르의 동반자 안느-마리 미에빌의 저서 제목으로 쓰인) ‘말하는 이미지들(images en parole)’이라는 텍스트와 몽타주되며, 얼마 후에는 붓으로 쓰여진 ‘말과 이미지(parole et image)’라는 텍스트와 다시 몽타주된다(그림 2). 그렇다면 영화란 무엇인가? 


그림 2


확실한 것은, 다시 훔쳐내야 하는 것도 영화이고 다시 굴려 돌아가게 해야 하는 것도 영화라는 것뿐이다. 이런 식으로 노략질은 하나의 윤리가 된다. 그렇다면 과연 영화를 무엇으로부터 훔쳐내야 한다는 말인가? 일단 아카이브를 교묘하고 기민하게 활용하는 고착화된 명령들로부터다. 고착화된 명령들은 CMD 혹은 명령 프롬프트와 다를 바 없으며, 이런 명령들과 관계하는 아카이브는 점점 데이터베이스화된다. 푸코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역사적 아프리오리로서의 아카이브가 형식적 아프리오리로서의 데이터베이스로 화하는 것이다.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고다르가 쓰는 용어로는 전자는 랑가주, 그리고 후자는 랑그에 대략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고다르에게 있어 랑가주가 역사적 아프리오리에 상응한다는 것은 흔히 오해하듯 그가 제멋대로의 임의적인 사적(私的) 언어에 집착하는 이가 아님을 암시한다. <이미지 북>의 종반부에서 그는 다짐하듯 말한다. “하지만 랑그는 결코 랑가주가 되지 못할 것이다(mais la langue ne serait jamais le langage)”라고. 그렇다, 데이터베이스는 결코 아카이브를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다. 혹은, 언제나 저항이, 아니 노략질이 있을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미 <영화의 역사(들)>에서부터 고다르는 어느덧 한 세기가 넘는 역사를 거치는 동안 이런저런 방식으로 정전화(正傳化)되고 문화적 기억의 일부가 되어버린 영화 이미지들을 ‘도용’─다시 강조하건대, 훔치고 굴리기─하여 그것들을 어떻게든 중립화하고 비결정적인 것으로 변환하려 시도한 바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는 지독히 반(反)아카이브적인 인물처럼 비친다. 하지만 이런 그의 작업이야말로 아카이브를 데이터베이스화의 위협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분명 고다르는 데이터베이스화된 아카이브의 질서를 교란하고 흐트러뜨린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 결과로 얻은 이미지들을 다시 아카이브에 자리매김하고 특수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이런 점에서 고다르의 작업은 진정 고고학적이다. 이는 고고학이란 담론들을 아카이브의 요소 내에서 특수화된 실천들로 기술하는 것이라고 했던 푸코의 의미에서 그러하다. 푸코와 마찬가지로 고다르 역시 고고학을 어떤 시원(始原)이나 창조적 개시에 대한 탐구와 관련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온갖 고유명들에 짓눌려서는 안된다. 주의하라고, 이미 말했다. 고다르의 영화에서 몽테스키외와 베카신은 어디까지나 동일한 무대에서 동등한 권리를 갖고 움직이는 등장인물들일 뿐이라는 점을 잊지 않도록. 그런데 이쯤에서 『지식의 고고학』의 한 부분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다. (이번에도 결국 다짐은 충동을 이기지 못한다.) 어쩐지 다소 딱딱한 느낌을 주지만 그것이 원저의 냉철함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이정우의 번역으로 해당 부분을 읽어 보자.


고고학은 (……) 단지 언표들의 규칙성을 수립하고자 할 뿐이다. 여기에서의 규칙성이란 (……) 언표적 기능이 수행되도록 해주는 조건들의 집합을 가리킨다. (……) 고고학은 발명을 추구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이 최초로 어떤 진리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된 이 순간(감동적인, 우리는 이에 동의한다)에 무감각한 것으로 머무른다. 즉 고고학은 이 축제의 아침들이 내뿜는 빛을 재건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 고고학이 린네 또는 뷔퐁의, 페티 또는 리카르도의, 피넬 또는 비샤의 텍스트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정초하는 성자(聖者)들의 목록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한 담론적 실천의 규칙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일부 표기를 수정하고 ‘언설(言說)’ 대신 ‘담론’이라는 용어로 바꾸었다.]


여기서 푸코가 ‘규칙성(régularité)’이라 부른 것과 나란히 놓을 수 있는 고다르의 용어가 있다면 무엇일까? 단어의 연관성에 기대어 ‘규칙(règle)’을 그 후보로 내세워서는 곤란하다. <이미지 북>에서 고다르가 “나는 규칙도 예외도 알지 못했다(je ne connaissais ni les règles ni les exception)”는 몽테스키외의 회고의 말을 따라 읊조릴 때, 이는 그가 규칙과 예외를 모두 가능케 하는 ‘조건들의 집합’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고다르가 『법의 정신』에서 발췌해 인용하고 있는 부분은 아니나다를까 모두 이 책의 서문 몇 페이지에 국한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도 이 책에 피상적으로만 접근해야 한다.) 푸코가 규칙성이라 부른 이러한 조건들의 집합, 이를 가리키는 고다르식 용어가 바로 ‘법(loi)’이다. 그의 영화에서 존재론적인 것과 입법론적인 것은 동일한 무대에서 동등한 권리를 갖고 서로 교차하며 아르케란 오직 그들 사이에서만 경험될 수 있는 것처럼, 법이라는 말 또한 이론적인 법칙과 실천적인 율법 양자를 왕복하는 움직임의 궤적을 통해서만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지식의 고고학이라는 푸코의 기획이 무엇보다 언표들의 규칙성과 관련된 것이라면 고다르의 고고학적 실천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이미지들의 법과 관련된 것이다. 여기에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미지들의 법이란 이미지들을 운용하는 데 있어 제도적인 측면에서 따라야 할 율법적 규칙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법이 제도적으로 율법화되곤 할 때마다 고다르는 노략질(pirates)로 맞설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영화에 여기저기서 ‘훔쳐온’ 온갖 이미지들이 만연하는 이유다. 다른 한편으로, 이미지들의 법이란 이미지들을 운용하는 데 있어 미학적인 측면에서 근거를 제공해 주는 이론적 법칙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법이 미학적으로 이론화되곤 할 때마다 고다르는 윤리(morale)를 내세우는 것으로 맞설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영화에 정치적 표상으로 들끓는 이미지들이 등장하고 온갖 정치적 슬로건들이 만연하는 이유다. 이렇게 보면 그가 1982년에 발표한 <열정>에 나오는 “영화에는 법이 없어, 그래서 사람들은 여전히 영화를 좋아하지(Il n'y a pas de loi au cinéma, c'est pour ça qu'on l'aime encore)”라는 대사가 새삼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흔히 이 대사 속의 ‘loi’는 ‘규칙’─공식적인 영문판 프린트에서는 ‘rule’─으로 번역되었고 또 그렇게 이해되곤 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원래 대사의 반어적 뉘앙스가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우리는 법의 부재를 두고 희희낙락거릴 수도 없지만, 그것을 정의 내리고 규정할 수도 없다. ‘법의 정신’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미지 북>의 4부에서 고다르는 자신의 고고학적 실천과 관련된 곤혹스러움을 몽테스키외의 말을 빌려 읊조리고 있다. 고다르가 낭독하고 있는 부분을 어쩐지 친밀한 느낌을 주는 이재형의 번역으로 읽어 보자.


만일 내가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명령을 내려야 하는 것에 대한 지식을 더 많이 갖게 하고, 복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복종하는 데서 새로운 즐거움을 느끼도록 할 수 있다면, 나는 내가 인간들 가운데 가장 행복하다고 믿을 것이다. 만일 내가 인간들로 하여금 그들의 편견에서 벗어나도록 할 수 있다면, 나는 내가 인간들 가운데 가장 행복하다고 믿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편견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르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인간들을 깨우쳐주려고 애씀으로써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는 이 보편적 덕성을 실천할 수 있다.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에 따르는 유연한 존재인 인간은 그에게 그 자신의 본성을 보여주면 그것을 이해할 수도 있고, 그것을 빼앗으면 그것에 대한 감정까지 잃어버릴 수도 있다. (……) 나는 이 작업을 (……) 수도 없이 포기했다. 나는 구상 따위는 안 짜고 그냥 내 목표만 따랐다. 나는 규칙도 모르고 예외도 몰랐다. 내가 진실을 발견한 것은 오직 그것을 잃어버리기 위해서였다. [‘nature’는 ‘성격’ 대신 ‘본성’으로, ‘ouvrage’는 ‘책’ 대신 ‘작업’으로 옮겼으며, 번역을 아주 약간 수정하였다.]


위의 문장들을 고다르가 이따금 낭독하는 동안 정작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대부분 학살과 살인과 모욕과 감금과 순교와 처형 등의 광경을 담은 폭력의 이미지들이다. 영화작가로서 고다르가 근심하는 지점은 이러한 이미지들과 연관된 현실의 폭력에 있다기보다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다루는 ‘법(loi)’ 자체에 있다. 이와 관련해서 그는 배우 헨리 폰다가 출연한 두 편의 미국영화, 즉 존 포드의 1939년 작품 <젊은 날의 링컨>과 알프레드 히치콕의 1956년 작품 <누명 쓴 사나이>를 흥미롭게 끌어온다. 전자의 영화에서는 법─정확히는 법률 서적─과의 만남에 들떠 있는 젊은 폰다의 모습을, 후자의 영화에서는 감옥에 갇힌 채 법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나이든 폰다의 모습을 발췌해 보여준다(그림 3).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법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il y a quelque chose qui cloche dans la loi)”고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여기서 법은 결코 사법적인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것은 실천적인 정의론과도 거의 관련이 없다. 여기서 고다르는 할리우드라는 하나의 역사적 아프리오리가 제공했던 규칙성으로서의 법이 특정한 순간에 정립되고 붕괴되는 국면들─1939년과 1956년─을 폰다의 이미지들을 통해 포착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림 3


돌이켜 보면, 그의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는 이미지들의 법이 아포리아를 통해서만 파악되는 아르케이길 그치고 일종의 제도이자 관습법이 되었을 무렵 시도된 일련의 혁명 속에 있는 것이었다. 명령하고 지시하는 권위로서의 법을 다시 아포리아 속에 두라는 요청, 이는 법의 정신을 회복하라는 요청이다. 각각의 이미지들이 자신들의 시원(始原)적 지위를 과시하지도 않고 명령 프롬프트를 통해 호출되는 데이터베이스의 요소도 아닌 채로 존재하는 곳, <이미지 북>의 고다르는 그곳을 캐나다 실험영화 작가 마이클 스노우의 표현을 빌려 ‘중앙 지역(la région centrale)’이라 부른다. 이 영화의 5부는 여러 아랍영화에서 발췌한 이미지들로 가득한데 이것들은 서구화된 시네필들의 기억 속에 보편적으로 자리 잡지 못한 이미지들이라 할 수 있다. 이제 고다르는 서구적 시네필의 정전들과 단단히 묶여 있는 이미지들의 갱생이란 역시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건너온 노략질의 대가가 여전히 새로운 아르케이온을 물색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2022-07-23

[영상] 행동에서 담론으로, 느리게 배우는 사람의 교훈

 

※ 아래는 2019년 6월 9일(일)에 "행동에서 담론으로, 느리게 배우는 사람의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인디스페이스에서 강연한 것을 기록한 영상이다. 강연은 홍기선 감독의 <수리세>(1984)와 김동원 감독의 <명성, 그 6일의 기록>(1997)을 함께 상영한 뒤에 진행되었다. (<수리세>와 <명성, 그 6일의 기록>은 네이버시리즈온에서 온라인 감상 및 다운로드 가능하다.이 강연은 인디스페이스가 기획한 "비평기획: 영화를 말하다"의 일환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강연 영상은 인디스페이스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CH가지에 업로드되어 있다. (아래 그림을 클릭하면 해당 영상으로 이동.)



강연 개요

방법으로서의 액티비즘이야말로 한국 독립다큐멘터리의 기원이자 중추가 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이는 없을 것이다. 이때 액티비즘이란 어떤 식으로건 상황에 대한 개입(intervention)을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종종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우리는 1980~90년대에 제작된 초기의 독립다큐멘터리에서 이미 이와는 꽤 다른 방식으로 상황에 접근하는 몇몇 주목할 만한 예들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상황이 종료된 후에야 현장에 도착한 이들, 현장에 있지만 상황의 의미가 분명치 않다고 느끼는 이들, 말하자면 느리게 배우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기입(inscription)의 액티비즘이라 할 만한 것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기입이란 이중의 뜻을 지닌다. 서로 맞서는가 하면 긴밀히 얽혀 있기도 한 여러 정치・사회적 힘들이 상황을 구성한다는 의미에서의 기입이 그 하나다. 그리고 느리게 배우는 사람으로서의 다큐멘터리스트가 그처럼 모순적인 힘들이 동시에 기입된 상황을 포착하고 이를 다시 현 상황에 투사하고자 시청각적 기록물의 배치를 통해 수행하는 담론적 기입이 있다. 제도권 밖에서 제작된 최초의 다큐멘터리로 꼽히는 서울영화집단의 〈판놀이 아리랑〉(1982)은 이미 개입이 아닌 기입의 액티비즘을 그 방법으로서 추구하고 있었다. 본 강연에서는 서울영화집단의 〈수리세〉와 푸른영상의 〈명성, 그 6일의 기록〉을 함께 보면서 이러한 기입의 액티비즘이 오늘날 다시 주목 받고 있는 에세이적 영화 실천에 어떤 유용한 암시를 주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022-07-10

로셀리니, 영화 영년


※ 아래 글은 2004년에 출간된 《로베르토 로셀리니》(홍성남, 유운성 엮음, 한나래)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서울시네마테크(대표 임재철)가 기획, 주최한 로베르토 로셀리니 회고전의 일환으로 발간되었던 책으로 현재 절판되었다. 회고전은 서울아트시네마(당시에는 아트선재센터 지하1층에 위치)에서 2004년 6월 29일부터 7월 12일까지 열렸다. 이 글과 더불어, 나는 <이탈리아 여행>에 대한 평문을 써서 책에 함께 실었는데, 그 글은 여기 옮기지 않았다.




로셀리니, 영화 영년 (2004)
: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삶과 영화 세계



“로셀리니 없이는 살 수 없다” 
─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혁명 전야>

“내 나이 이제 일흔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여생을 영화를 엿 먹이는 데 바칠 생각이다”
─ 로베르토 로셀리니, 1970년 1월 12일 



로셀리니와 그 이후 : 약간의 계보

로베르토 로셀리니에 관해 논하는 작업은 이중의 탈신화화를 둘러싸고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는 로셀리니라는 인물 주위를 휘감고 있는 신화와 전설의 안개를 걷어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로셀리니가 수행한 영화(장치)의 탈신화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로셀리니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영화 작가와 그가 만든 작품을 선형적 진화 내지는 퇴보라는 관점에서 다루는 습관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그의 영화 경력은 정말이지 방사상으로 퍼져 나가는 궤적을 그리기 때문에 연대기적 서술을 통해서는 그 궤적을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로셀리니라는 인물은 무엇보다 <무방비 도시>(1945)[1]와 <전화의 저편>(1946), 그리고 <독일 영년>(1948)과 같은 전후의 3부작과 관련하여 이른바 ‘네오리얼리즘의 아버지’로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먼과의 스캔들, 버그먼을 주연으로 삼아 제작한 일련의 ‘모던 시네마’들이 1950년대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과 젊은 영화 작가들에게 미친 영향도 자주 이야기되곤 한다. 사실 로셀리니 ‘이후’의 영화적 계보를 만들어보는 것은 꽤 흥미로우면서도 약간은 당혹스러운 일이다. 엄밀히 말해 로셀리니 이후의 감독들 가운데 ‘로셀리니적’인 영화감독은 단 한 명도 없지만, 어떤 면에서는 모두가 다 로셀리니의 후예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로셀리니는 어떤 학파를 만들었다기보다는 그 이후에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지경으로까지 영화를, 혹은 영화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아니면 적어도 그런 가능성을 제공한) 인물이기 때문에, 현대 영화의 작가라면 그 누구나 로셀리니에게 빚지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사실 이것은 이미 비평가 시절의 자크 리베트에 의해 오래 전에 간파된 것이기도 하다. 


로베르토 로셀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약간의 계보를 그려볼 수는 있다. 우선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에서 감지되는 <독일 영년>, 나폴리의 카프리 섬에서 촬영된 장뤽 고다르의 <경멸>과 <이탈리아 여행>(1954) 사이의 유사성 같은 것을 떠올려 볼 수 있다. 하지만 1960년대의 ‘누벨 바그’ 그룹이 보여준 로셀리니에 대한 오마주가 아니더라도 계보는 얼마든지 더 확장될 수 있다. 가령 에이드리언 마틴은 다음과 같은 폭넓은 계보를 그려 보이기도 한다. 네오리얼리즘 시기의 로셀리니 영화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1960년대 브라질의 '시네마 노부cinema novo'나 쿠바 영화, 여러 면에서 로셀리니의 텔레비전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장 마리 스트로브의 독특한 ‘역사 영화’들, 공간적 배경 가운데 하나로 스트롬볼리 섬을 활용한 난니 모레티의 <나의 즐거운 일기>(의 두 번째 에피소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1990년대에 내놓은 일련의 걸작들,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생존 투쟁을 그려 보이는 벨기에 다르덴 형제의 영화 등등. 게다가 왕년의 누벨 바그 감독들이 1980년대 이후에 보다 섬세한 방식으로 로셀리니를 다시 끌어들이는 방식에릭 로메의 <녹색광선>, 리베트의 <누드모델>, 그리고 고다르의 <신 독일 영년>[2]과 <영화사> 연작 등도 주목할 만하다는 것이다.[3] 

고다르는 스스로를 로셀리니의 양자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로셀리니는 고다르의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나마 다른 이의 손에 이끌려 <비브르 사 비>를 보고 나서는 “시간 낭비”라고 말했으며, 고다르에게는 (경멸적인 의미에서) “자넨 점점 안토니오니주의에 다가가고 있군”이라고 말해 충격을 안겨 주기도 했다.[4] 그의 견해가 어찌 되었건 고다르는 자신의 말대로 충실히 로셀리니의 계보를 이어왔고, <영화사> 연작은 로셀리니 후기의 원대한 계획에 비교될 만한, 하지만 고다르만의 야심적인 에세이이다. 한편 키아로스타미는 자신의 3부작 및 <체리 향기>, 그리고 무엇보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가리라>를 통해, 로셀리니의 풍경 속에서 불안을 희석시키고 미스테리만을 남겨둔다. 그의 영화의 인물들은 로셀리니의 인물들처럼 세계라는 풍경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영화 <ABC 아프리카>와 <텐>, 키아로스타미가 인터뷰에서 디지털 카메라에 관해 언급한 말[5], 그리고 그가 <텐>에 관해 남긴 열 문단의 짧은 글[6]은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오늘날의 영화에 로셀리니적인 네오리얼리즘의 방식을 다시금 불러들일 가능성에 대한 탐색일 것이다. 로셀리니의 경력영화 감독에서 미디어를 통한 교육가로을 거꾸로 밟아 온 키아로스타미는 말년의 로셀리니와는 달리 여전히 ‘영화의 힘’을 믿는 감독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가 있다. 올리베이라는 그저 로셀리니의 풍경을 찾아가고 현대 영화와 관련해 그가 남긴 암시들을 뒤쫓는 데 그치지 않고, 로셀리니의 전체적인 비전에 맞먹는 너비와 깊이로 유럽 문명을 근심하는 유일무이한 시네아스트일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너비와 깊이는 로셀리니아 올리베이라 같은 감독들 세대에게나 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로셀리니는 1906년생, 올리베이라는 1908년생이다). 그의 최근작 <나는 집으로 간다>나 <토킹 픽처>는 이상할 만큼 문명의 위기에 대한 근심으로 가득하다. <세계의 시초로의 여행>과 관련지을 수 있을 <토킹 픽처>에서 역사 교수인 로사 마리아는 딸과 함께 여객선을 타고 바스코 다 가마의 위대한 여정을 다시 시작한다(다만 수에즈 운하의 덕택으로 희망봉을 거쳐 멀리 돌아갈 필요가 없을 뿐이다). 그녀는 그리스 문명이 최초로 유럽에 전파된 마르세이유, 폼페이와 베수비오 화산의 나폴리, 아테네 여신을 모시던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테네 등을 거쳐 수에즈 운하를 통과, 남편이 있는 봄베이로 향한다. 그녀는 딸에게 문명의 기념비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려주는가 하면,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나긴 이야기를 나눈다. 올리베이라는 여기서 온갖 장소들을 단숨에, 동시에 느긋하게 가로지르면서 로셀리니의 언어 및 문화의 충돌, 문명에 대한 근심을 얼싸안는다. 하지만 로사 마리아는 결코 봄베이로 가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폭발 사고로 딸과 함께 죽고 만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실패작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올리베이라가 왜 점점 이런 당혹스러울 만큼 갑자기 닥쳐오는 파국에 이끌리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로셀리니의 결론 : “나는 영화의 미래를 믿지 않는다”

이렇게 자꾸 계보를 그리는 작업은 자칫 로셀리니 신화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로셀리니가 스스로의 영화 작업특히, 후기의 텔레비전작업을 통해 애써 성취하고자 했던 영화의 탈신화화에 대한 이해로부터 우리를 점점 더 멀어지게 할 우려가 있다. 그러니 다시 애초의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하자. 먼저 로셀리니를 둘러싸고 있는 구름들. 로셀리니에 관한 빼어난 전기를 저술한 바 있는 태그 갤러거는 자신의 책의 서문에서 “그를 옹호한다는 것은 종종 그가 한 말들을 반박하는 일을 필요로 한다”[7]는 기이한 말을 한다. 아마 이것은 두 가지 뜻으로 읽혀야 할 것이다. 로셀리니는 어느 정도는 허풍선이였고 거짓말쟁이였으며 때로는 자신의 경력을 그릇되게 진술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를 꼽아 보자면, 그는 젊은 시절 영화 쪽 일거리를 얻기 위해 자신이 프랑스에 가서 장 르느와르와 함께 일한 적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8] 그런데 로셀리니의 경력에 관련된 허구들을 교정하는 것보다 그를 옹호하는 데 있어서 더욱 힘든 것은, 영화 미학이나 예술과 관련해 그가 내뱉은 발언들이 주의 깊게 검토해 보면 대부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든 것들이며 반드시 교정, 여과, 변형, 혹은 때로는 전적인 반박을 필요로 한다는 데서 생겨난다. 바꿔 말하자면 때로 로셀리니의 영화들은 그 자신이 말한 것과는 다른 것이거나 나아가 그의 ‘의도’를 넘어 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그러니 우리는 차라리 로셀리니의 ‘의도’가 아니라, 그의 작품 자체가 보여주는 ‘의도’, 작품 자체와 다른 것이 아니며 작품에 수반되는 것도 아닌 작품 자체로서의 ‘의도’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해석의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루이 14세의 집권>


특히 로셀리니의 후기작과 관련한 논쟁들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리모트 컨트롤 줌zoom과 팬pan, 달리dolly 숏으로 구성된 단순한 롱테이크 촬영기법, 배우가 ‘낭독’할 대사가 적혀진 프롬프트 카드prompt card, 거울을 이용한 트릭 촬영[9] 등이 그저 로셀리니의 게으름 때문에 활용된 것이며 거기서 생겨난 미학적 효과라고 하는 것들은 그저 부수적인 것이었을 뿐이라고 하는 식의 비판은 사실 의미 없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미 그렇게 우리 앞에 주어져 있는 그 영화들이 진정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는가 하는 것일 게다. 사실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볼 때, 로셀리니의 후기작들은 그가 말한 바대로의 인류의 역사와 문명에 대한 ‘교육적인didactic/didattico' 효과를 지닌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 영화들 속에 “어떤 시대의 어떤 공간을 사로잡고 있던 관습, 편견, 공포, 야망, 개념들, 그리고 고통 등에 맞선 한 인간, 즉 혁신자”[10]들이 그려져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만일 그 영화들이 어떤 감흥을 준다면 그것은 (적어도 내게는) 그들의 그 ‘영웅적인’ 행위 때문은 결코 아니다. 그들의 말 또한 대단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단언하건대 ‘교육적인’ 목적에서라면 로셀리니의 <소크라테스>(1971)를 보는 것보다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직접 읽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오히려 재구성된 고대 아테네의 일상적인 삶 속에 역사적 인물을 위치 짓는 방식, 예컨대 소크라테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장에 들러 문어를 사들고 갈 때라든가 독배를 마신 뒤 천천히 앞뒤로 오가며 다리가 무거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더할 나위 없이 ‘냉정한’ 태도로 응시하는 그 카메라가 신기하게 여겨질 따름이다. 이러한 시선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 것인가? 유물론적 시선? 차라리 인물의 몸짓과 표정에 따라 미리 정확하게 동조화되어 있는 상상적인 자동-시각 기계의 그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일체의 판단중지, 감상sentiment의 통로를 차단하기, 이는 내부에서 활동하는 모든 의식들을 감싸 안는 최외각最外殼의 의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루이 14세의 집권>(1966) 바로 이런 의식을 획득함으로써 로셀리니의 영화 경력에서 결정적으로 인식론적 단절을 이루어 낸 영화다. 그런데 이미 그때 로셀리니는 매우 역설적이게도 영화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다. “나는 영화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믿는다. 나는 인간, 역사, 세계의 미래, 이데올로기들의 공존을 믿지만, 영화의 미래는 믿지 않는다. 나는 영화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건 죽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임을 확신한다”.[11] 그는 일찌감치 텔레비전의 가능성에 매혹되었고 죽을 때까지 그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직접적 시각direct vision과 실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17세기의 교육학자인) 코메니우스적인 믿음으로 “텔레비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을 가능케 한다”[12]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제 텔레비전은 로셀리니의 주장과는 반대로 (적어도 이른바 ‘영화의 힘’을 믿는 이들에게는) 가장 경멸스러운 매체 가운데 하나가 되지 않았는가? 누군가의 말처럼 “텔레비전은 비전(시각)이 아니다Television is not vision."


마침내 영화에 이르기까지 

1960년대 초반, 로셀리니는 앞으로 그가 시도할 원대한 계획의 초안을 짜고 있었다. 이 계획은 텔레비전 시리즈의 형태로 완성, 발표될 예정이었는데 그 범위는 선사 시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거의 모든 것들의 역사를 포괄하고 있다. 선사시대의 수렵과 사냥 등에 관한 것에서부터 시작해,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에 관해 다루고, 고대 세계의 학문과 철학의 대가들을 하나씩 살펴본 뒤, 르네상스기의 학자들, 지리상의 발견을 수행한 사람들, 백과전서파, 근대과학의 창시자들도 차례로 다루고자 했던 것이다. 거기 덧붙여 화학의 역사, 농업의 역사, 음식의 역사와 같은 것들도 다룰 예정이었다.[13] 로셀리니의 기획 하에 그의 아들 렌조 로셀리니가 연출한 텔레비전 시리즈물 <생존을 위한 인간의 투쟁>(1970~71)은 전체 작업의 가이드라인, 일종의 '척수spinal cord'가 될 것이었다.  

잠시 시간을 훌쩍 거슬러 올라가 보도록 하자. 이처럼 방대한 기획을 머릿속에 구상할 수 있었던 인물인 로셀리니는 1906년 5월 8일 이탈리아의 부유한 신흥 부르주아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건축업에 종사하는 인물이었는데, 사업 수완이 썩 좋지는 않았다고 한다. 로셀리니의 밑으로는 세 동생이 있었는데, 남동생인 렌조, 여동생인 마르첼라와 미카엘라가 그들이다. 이 가운데 렌조는 일찍부터 음악에 흥미를 느껴 작곡을 공부했고 후일 로셀리니의 많은 영화에서 음악을 담당하게 된다. 로셀리니는 어린 시절부터 영화관을 즐겨 찾았는데, 특히 로마에 들어선(1918년) 최초의 거대하고 현대적인 극장이었던 ‘코르소 치네마Corso Cinema'[14]는 그의 아버지가 세운 것이어서 언제라도 자유롭게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이 극장은 당시 로마의 영화적 중심지였다. 66세 되던 해에 로셀리니는 그 당시를 회고하며 “나는 그것, 즉 영화가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그리피스가 탄생하는 것을 지켜보았다”고 말하기도 했다.[15] 그가 가장 좋아한 감독은 찰리 채플린이었는데, 그의 영화가 보여주는 위대한 휴머니티에 깊이 감화되었다고 한다.[16] 그 외에 그리피스,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 무르나우 등도 그가 사랑했던 감독으로 알려져 있으며 킹 비더 또한 빼놓을 수 없다.[17] 

그는 잦은 병치레아마 꾀병도 포함해서로 인해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할 수 없었다. 개인교습 덕택으로 간신히 중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지나시오ginnasio'는 끝마칠 수 있었지만, 고등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리체오liceo'의 졸업장을 따는 건 무리였다. 가정교사와 함께 공부를 계속하기는 했지만, 수학이나 물리학은 매우 좋아했던 반면 (대학입학에 요구되는 고등학교 졸업장 취득에 필수 과목이었던)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우는 것만큼은 끔찍하게 싫어했다. 오히려 학교 생활보다 로셀리니의 정신 세계에 훨씬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그의 집에 드나들던 아버지의 지인들과 예술가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것은 한껏 고양된 자유주의liberalism 정신이었고, 이는 당대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파시스트 체제[18]의 가치관당대 파시스트 체제가 제도화하고 있던, 새로이 부상한 중류계급인 프티부르주아의 가치관, 즉 로셀리니의 가족과 같은 계층에 의해서는 경멸되었던 가치관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또한 로셀리니는 어머니로부터는 종교적 심성을 물려받았다. 한편으로 당대 이탈리아 상층 부르주아의 전형적인 환경 속에서 자라난 로셀리니는 전형적인 플레이보이이자 방탕한 청년이기도 했다. 그는 9살 때 운전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15살에 처음으로 자신의 자동차를 가졌다. 그는 낭비벽이 심했으며 특히 여자, 돈, 그리고 시간을 낭비하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사실 그는 나이 일흔이 되어서도 영화를 만드는 일보다는 여자를 사귀는 데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곤 했다. 

로셀리니가 영화를 시작하게 된 것도 (부유한 종조부로부터 동생 렌조와 함께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특유의 낭비벽으로 인해 돈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는 1932년 한 영화사에 더빙조수로 입사할 수 있었다. 1930년대 초반 이탈리아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의 공세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산업 보호를 위해 파시스트 정부는 외국영화에 대한 더빙을 의무화하고 외화 수입 관세를 걷어 제작자들에게 보조금 형식으로 지급하는 법령을 1933년 발표했다. 1936년에 로셀리니는 마르셀라 데 마르키스[19]와 결혼했고 1937년에 첫 아들 로마노를 얻었으며, 영화 스크립트를 쓰거나 조감독 생활을 하면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이때 그는 당대 이탈리아 최고의 감독 가운데 하나였던 고프레도 알레산드리니가 연출을 맡은 <비행사 루치아노 세라>(1938)의 시나리오 작업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는데, 이 영화에는 무솔리니의 아들이자 영화잡지 <치네마Cinema>지의 편집장이기도 했던 비토리오 무솔리니도 관련되어 있었다. 이 작품은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되어 레니 리펜슈탈의 <올림피아>와 함께 무솔리니컵Coppa Mussolini을 공동수상했다. 또 로셀리니는 직접 몇 편의 단편영화들을 연출하기도 했다.  


네오리얼리즘의 신화

이제 <무방비 도시>와 함께 ‘네오리얼리즘’ 영화감독으로서의 로셀리니를 이야기할 차례다. 네오리얼리즘은 <무방비 도시>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이는 영화가 현실을 담고 지배적인 권력에 비판을 가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한 최초의 영화운동이었다고 보는 속설은 꽤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로셀리니 신화’ 혹은 ‘네오리얼리즘의 신화’에 대한 재검토로부터 다시 시작해 보려 한다. 분명 여기에는 수치스러운 과거와의 단절을 이루기 위한 의도적인 부인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파시스트정권의 영화 진흥 정책이 없었더라면 전후 이탈리아 영화의 영광은 가능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20] 또한 이미 <무방비 도시> 이전에 네오리얼리즘적 영화형식을 선취한 영화들이 있었다는 사실[21]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네오리얼리즘을 <무방비 도시>와 관련짓는 것은 굳이 그 기원, 파시즘이라고 하는 사악한 아버지를 부인하면서 네오리얼리즘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시도일 따름이다. 이는 종전 이후, 특히 네오리얼리즘의 쇠퇴기를 전후해서 이탈리아 영화계의 좌파 비평가들에 의해 열정적으로 시도되었다.[22] “스타일을 전후의 경험과 관련짓는 이와 같은 비평적 개입은, 네오리얼리즘이 파시즘과 관련 있음을 고려한다면 결코 가질 수 없었을 도덕적 의미를 그것에 부여했다”.[23] 사실 네오리얼리즘을 낳은 것은 파시즘 그 자체였다. 

<무방비 도시>와 <파이잔>을 통해 비평적 격찬을 받았던 로셀리니가 <독일 영년> 이후의 영화들, 특히 잉그리드 버그먼과의 스캔들[24] 이후에 그녀를 주연으로 삼아 찍은 일련의 영화들 및 <기적>(1948),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1950) 같은 ‘종교적’인 영화들로 인해 비판받게 되었던 것도, 네오리얼리즘의 성화聖化 작업을 위한 절차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로셀리니는 ‘네오리얼리즘의 아버지’였지만, 파시즘과 연루된 아버지였고, 또 언제라도 다시 ‘반동적인’ 사상으로 회귀할 수 있는 위험한 아버지였던 셈이다. 1948년 4월 이탈리아의 좌파들이 선거에서 패배하고 기독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이후,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서 로셀리니의 영화들은 더욱 수상쩍게 여겨지는 것들이었다. 


<하얀 배>


로셀리니의 첫 장편영화 <하얀 배>(1941)는 당시 이탈리아 해군의 지원에 힘입어 제작된 일종의 파시스트 선전영화로,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으로부터의 영향이 두드러진 영화다. 선전영화냐 아니냐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기도 하지만 정작 영화를 보고 나면 이 영화의 선전영화적 성격을 완전히 부인하기는 힘들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여러 가지 면에서 <무방비 도시> 및 그 이후의 로셀리니 영화들의 특징(으로 지적되는 것)들을 이미 보여준다는 점이다. 예컨대 공공의 적에 맞서는 집단여기서는 이탈리아 해군 병사들적 투쟁, 명백히 멜로드라마적인 요소들, 꽉 짜인 내러티브에 의존하기보다는 개별적인 사건들에 집중하는 삽화적 구성, 비전문배우의 기용, 세트가 아닌 실제 공간의 활용, 그리고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결합 등이 그것이다. <하얀 배>가 이런 특징을 지니게 된 데는 로셀리니 자신의 선택도 중요했음은 물론이지만 그보다 이 영화를 기획했던 프란체스코 데 로베르티스라는 인물의 존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해군장교이면서 아마추어 영화제작자이기도 했던 그는 스타 시스템에 의존하는 픽션 영화의 관습에 반발하여 ‘진실한’ 이야기, 장소, 인물에 근거한 영화를 찍기를 원했다. 그가 연출한 잠수함 승무원들에 관한 영화인 <해저의 사나이들Umini sul fondo>(1941)은 네오리얼리즘적인 특징들을 앞서 보여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네오리얼리즘의 선구자”[25]였던 것이다. 이후 로셀리니는 <비행사 돌아오다>(1942), <십자가의 사나이>(1943)를 연달아 발표했는데, 이들 영화는 <하얀 배>에 뒤이어 각각 이탈리아 공군, 육군을 차례로 다룬 것들이었다. 

로셀리니의 명성을 전 세계에 떨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이탈리아 영화의 저력을 알린 <무방비 도시>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이 영화에 관해 널리 유포되어 있는 그릇된 정보들을 바로잡는 일부터 시작해 보자. 먼저 이 영화는 통상 네오리얼리즘의 첫 번째 걸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여러 가지 점에서 네오리얼리즘의 기준에서 많이 어긋나 있다. 이 영화의 서사적 일관성과 인과관계에 따른 전개는 로셀리니가 이후에 만든 그 어떤 영화보다도 두드러지며, 다소 진부한 영웅주의와 멜로드라마적 요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들 자체는 <무방비 도시>가 전해 주는 영화적 힘과 감동의 원천이 된다. 오히려 이 영화와 관련해서 꼭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관습적인’[26] 요소들이 아니다. 관습적인 요소들을 근거로 비평적 평가(절하)를 행할 때에는 반드시 주의가 필요한데, 첫째 그러한 관습이 창안, 유포, 확립된 시기와 창작자가 맺고 있는 ‘거리’이것을 창작자들에게 주어지는 ‘상상력의 지평’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며 둘째는 관습적인 요소들로 인해 영화의 내적 질서가 얼마나 위협받고 있는가이다. 그런데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를 관습적인 요소들의 개입을 근거로 비판한다는 것은 그 ‘거리’ 내지는 ‘상상력의 지평’을 고려해 볼 때 타당한 것이 못된다. 지금에 와서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무방비 도시>에 얽힌 여러 전설과 소문들이다. 전쟁 중의 극도로 어려운 시기의 로마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제작비가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 필름을 제대로 구할 수 없어서 여기저기서 구한 필름들을 그때 그때 활용하여 조명도 부족한 상태에서 촬영해 화면이 거칠다는 것, 그리고 대부분이 실제 장소에서 로케이션 촬영되었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무방비 도시>의 제작비는 당대 이탈리아 영화계의 기준으로 볼 때 결코 적은 것은 아니었다. 또한 영화의 많은 장면이 스튜디오 내에 지어진 세트에서 촬영되었다(물론 전쟁으로 파괴된 로마 시내를 찍은 장면들은 실제 장소에서 촬영된 것으로 당대 로마의 풍경을 빼어나게 포착하고 있다).[27] 1995년에 행해진 필름 복원 작업을 통해서 밝혀진 사실은, 이 영화가 그간의 속설과는 달리 여러 종류의 필름들로 찍혀진 것이 아니라 세 종류의 필름만으로 촬영되었으며 그것도 야외장면(Farrania C6가 사용됨)과 실내장면(Agfa Super Pan과 Agfa Ultra Rapid가 사용됨) 각각에 따라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로셀리니가 숏의 구성 자체에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조명 부족 때문에 화면이 어둡고 거칠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영화 화면에서 보이는 기술적인 문제는 촬영상의 문제가 아니라 현상 과정에서 생긴 문제였다는 것도 밝혀졌다.[28] 


<무방비 도시>


하지만 때로는 오해나 전설이 후대에 오히려 생산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무방비 도시>는 그 좋은 예다. <무방비 도시> 이후 로셀리니가 <파이잔>을 내놓았고 이 두 편의 영화로 인해 확고하게 네오리얼리즘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자리 잡았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로셀리니는 원래 <무방비 도시>를 최종적으로 완성된 판본과 같은 구성이 아니라 네 개의 독립적인 에피소드레지스탕스를 돕다가 체포되어 사형된 신부, 남편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달려 나가다 총에 맞아 죽은 임신한 여인, 배신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고문당한 레지스탕스 지도자, 그리고 파괴 공작을 벌이는 아이들 패거리에 관한 것를 묶은 삽화적 구성의 영화로 기획했다. 하지만 영화의 프로듀서였던 치아라 폴리티의 주장을 따라 이 에피소드들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바대로 단일한 스토리 안으로 통합되게 된다.[29] 로셀리니의 기획은 결국 여섯 개의 에피소드를 지닌 <전화의 저편>에서 실현되었다. 이와 같은 삽화적 형식은 로셀리니의 작품을 특징짓는 중요한 것이기도 한데, 꼭 <전화의 저편>,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 그리고 <인디아>(1959)등과 같이 명백히 분절된 (동시에 주제적으로 느슨한 관련을 맺고 있는) 에피소드들을 묶은 영화가 아니더라도, 로셀리니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각각의 사건들이 다른 사건들과 유기적 연관 없이 일회적이고 우연적인 성격을 띤다는 점을 삽화적 형식에 대한 선호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의 마지막 장편영화 <메시아>(1976)가 예수의 삶을 다룬 여타의 성서사극들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로셀리니의 영화들은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들이 (피상적으로라도)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이야기에 대한 시각적 프리젠테이션presentation의 성격을 띠었던 영화사 초기의 작품들과도 닮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로셀리니의 영화는 스펙터클의 제공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는 그러한 영화들과 확연한 차이가 있다. 

다시 네오리얼리즘.[30] 만일 사회 참여적 영화의 시작으로서 네오리얼리즘을 바라보려는 이가 있다면 이때 적어도 로셀리니는 그 범주에 포함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식의 네오리얼리즘은 (적어도 로셀리니에게 있어서라면) 착각일 뿐이다.[31] 우리는 네오리얼리즘에서 인간 외적, 그리고 내적 총체로서의 리얼리티에 대한 윤리적 지향성이라고 하는 부르주아의 미의식, 부르주아적 원칙의 작동을 본다. 네오리얼리즘의 영화들이 바쟁을 한없이 매혹시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셀리니는 이런 식의 윤리적 지향성과는 거리가 먼 감독이었고, 결국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갔다. 로셀리니의 영화에서는 바쟁 특유의 “강박적 주체obsessive subject"스스로의 의식에 의해 필연적으로 굴절되는 대상의 속성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 영화적 이미지가 지닌 특수한 신뢰성, 즉 지표적 흔적의 신뢰성에 의거하여 끝없이 대상과의 점근선을 만들어가려 시도하는 주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리얼리티와 시간의 예술인 영화를 통해 시간에 대한 저항을 시도하는 모순적이고 숭고한 주체[32]에게 특유한 현상학적 지향성이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 역시 바쟁 특유의 현상학적 지향성은 아무래도 로셀리니보다는 데 시카, 특히 그의 <움베르토 D>같은 영화 쪽에 더 잘 어울리는 감이 있다. 개인적으로 볼 때, 바쟁은 (비록 그가 귀도 아리스타코 같은 이탈리아 비평가들의 로셀리니 격하에 반대하여 장문의 편지를 쓰기도 했지만[33]) 끝내 로셀리니만큼은 자신의 리얼리즘 ‘이론’에 포섭할 수 없었던 것처럼 여겨진다. 게다가 ‘버그먼 시기’의 로셀리니는 그에게 매력적인 존재이긴 했지만 동시에 19세기 후반의 물리학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마이켈슨-몰리의 유명한 실험이 초래한 바와도 같은 결과를 영화에 가져왔다는 점에서만 그런 것이었다. 로셀리니를 받아들이자면 이제 바쟁 식의 리얼리티는 에테르ether와도 같은 허구적인 구성물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로셀리니는 빛(영화)은 에테르(리얼리티) 없이도 전파되어 광원의 형상을 전달할 수 있음을 입증했던 것이다. 바쟁에게 있어서는 광원의 형상이 각인된 흔적으로서의 리얼리티가 지닌 총체성을 보존하고 형상과 리얼리티간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시되었지만, 로셀리니에게 있어서는 그 광원의 배열상태, 특히 한 시대의 에피스테메 내지는 문명, 그 중에서도 유럽 문명 자체를 일거에 담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로셀리니의 많은 영화들이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 놓인 개인의 모습에 집중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한편 바쟁보다 젊은 비평가들은 로셀리니의 영화, 특히 <스트롬볼리>(1950), <유럽 ’51>(1952), 그리고 <이탈리아 여행> 등의 영화가 가진 함의를 거의 직관적으로 알아차렸다. 또한 그들은 거기서 새로운 이론을 끌어내지는 않았지만, 대신 이후의 영화 작업을 통해 현대영화의 도래를 분명하게 입증했다.  

로셀리니가 네오리얼리즘에 대해 언급할 때 즐겨 사용했던 표현 가운데 하나는 “도덕적 입장moral position'이다. 또한 그는 '리얼리티'라는 표현보다는 '세계'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예컨대 그는 1954년 <카이에 뒤 시네마>의 트뤼포와 로메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네오리얼리즘)은 본래 세계에 대한 전망perspective을 제공하는 도덕적 입장이었다. 이후 그것은 미학적 입장이 되었지만, 애초에 그것은 도덕적인 것이었다”[34] 이는 말 그대로보다는 로셀리니의 영화 자체와 관련지어 주의 깊게 해석되어야 한다. 정작 리얼리티 자체를 주된 관심으로 삼지 않았던 로셀리니의 영화들은 “세계라는 개념보다는 그것의 위기를 보여주는 데, 그럼으로써 영화의 위치와 의미를 재정의”[35]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말하는 도덕적 입장이라는 것은 영화 작가가 취해야 할 ‘사회적 의무’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말한 바대로 “세계(의 위기)에 대한 전망” 보다 정확하게는 세계의 위기 앞에 놓인 인간의 행위와 앎그것이 과학적, 철학적 지식이건, 종교적 신념이건, 설명할 길 없는 불가해한 체험을 통한 인식이건 간에사이의 관련을 역동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다만 여기에 옳고 그름이나 선악의 판단이 개입되어서는 안 될 뿐이다. <무방비 도시>나 <파이잔>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레지스탕스, 배신자, 난민들, 프란체스코회의 수도사들 등등뿐만 아니라 <독일 영년>의 소년, <스트롬볼리> 이후 ‘3부작’이나 <화형대의 잔다르크>(1955)에서 잉그리드 버그먼이 연기한 여성 주인공들, <인디아>에 등장하는 인물들(및 마지막 에피소드의 원숭이), <로베레 장군>에서 비토리오 데 시카가 연기한 사기꾼, <루이 14세의 집권>의 루이 14세 등등, 얼마든지 이을 수 있는 이 목록은 전형적인 ‘로셀리니적 인간’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각각 상이한 시대에 속해 있는 이 인간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특정한 위기의 국면, 그리고 그때 그들이 반응하는 양식들에 대한 가차 없이 냉철한 탐구야말로 로셀리니가 말한바 '도덕적 입장'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겠는가? 로셀리니가 아직은 역사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가까웠던 사건을 과감하게 응시함으로써 사건을 역사화한 전후 최초의 감독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도덕적 입장'에 근거한 것이다. 사실 로셀리니가 파시스트시기에 만든 전쟁 3부작<하얀 배>, <비행사 돌아오다>, <십자가의 사나이>역시 당대의 사건, 그것도 전쟁이라고 하는 극적인 사건에 천착하고 있는 작품들이었다. 나아가 로셀리니의 작업은 한 마디로 특정한 사회적 상황의 묘사나 리얼리티의 획득을 넘어서 있는 문명의 역학dynamics[36]에 대한 ‘현대적인’ 탐구라 할 만한 것이며, 그것은 또한 로셀리니만의 네오리얼리즘이기도 하다. 앞에서 로셀리니의 작업에 대해 논하면서 물리학상의 혁신, 이른바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끈 19세기의 실험을 유비로 끌어들인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고다르 또한 <인디아>에 대한 짧은 글에서 그 영화가 “리만과 플랑크의 이론이 기하학과 고전적 물리학을 포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의 영화를 포괄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한 편에는 이탈리아 영화가 다른 한 편에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작업이 있다”고 한 자크 리베트의 주장은 여전히 타당하다. 


시각의 대리인들

로셀리니의 관심이 ‘문명’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의 영화 전체를 놓고 윤곽을 그려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 이를 위해서는 프랑수아 트뤼포가 한 인터뷰에서 밝힌 흥미로운 견해를 참조할 만하다. 

그의 삶에서의 한 순간, 즉 영화 <인디아>에 해당하는 순간을 잘 생각해보고 그의 전 경력을 고찰해보면, 우리는 그가 특수한 사례에서 시작해 각각의 영화에서 범위를 넓혀 갔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의 첫 번째 전후 영화는 <무방비 도시>인데, 이는 한 도시에 관한 것이었죠. 그 이후의 <전화의 저편>의 여섯 에피소드는 남쪽에서부터 북쪽에 이르는 이탈리아 전역에 관한 것이었죠. 다음에 그는 <독일 영년>과 <유럽 ’51>을 통해 유럽대륙 전체로 관심을 확장합니다. 그는 보편적인 것을 무척이나 갈망했던 인물이었습니다.[37]

그는 크게 네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절묘하게 혼합한 걸작 <인디아>[38]를 통해 아예 유럽을 벗어난다. 아니 유럽을 감싸 안는 보다 큰 문명권, 그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모두의 요람”인 인도로 향한다. 그리고 로셀리니가 1960년대 이후 천착하게 될 텔레비전 영화들에 대한 원대한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 즈음이다. 인도는 그에게 또 다른 영화적 세계로의 길을 열어준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959년에 완성된 이 영화는 그 해 칸영화제에 출품되었지만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젊은 감독들의 ‘새로운’ 영화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그 해 칸에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와, (미국정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한 매우 정치적인 이유로) 공식 경쟁 부문에서 제외되기는 했지만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이 있었다. 이때 <인디아>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챈 것은 장 뤽 고다르였다. 흥분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인디아>는 모든 일반적인 영화들에 역행한다. 여기서 이미지는 그저 그것을 만들어낸 관념idea의 보충물일 따름이다.[39] <인디아>는 절대적으로 논리적인, 소크라테스보다도 더욱 소크라테스적인 영화다. 각각의 이미지는 <멕시코 만세!>같은 영화의 숏처럼 그 자체로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의 광채이며 로셀리니가 바로 이 진리와 함께 출발하였기 때문에 아름답다. 로셀리니는 다른 이들이라면 20년이 지나서야 도달할지 모를 지점을 이미 넘어서 버렸다. <인디아>는 리만과 플랑크의 이론이 기하학과 고전적 물리학을 포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의 영화를 포괄하고 있다. 다음 호에 나는 <인디아>가 왜 세계의 창조인가를 입증해 보일 생각이다.[40]

<인디아>


이미 <카이에 뒤 시네마>는 로셀리니가 자국 내에서는 (네오리얼리즘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그리고 미국에서는 (버그먼과의 스캔들 때문에) 비난[41]을 받았던 1950년대 내내 그에 대한 옹호를 견지해 왔다. 그 비평적 옹호의 중심에는 <스트롬볼리>, <유럽 ’51>, <이탈리아 여행>으로 이어지는 3부작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특히 로셀리니의 후기 경력을 고려해 볼 때 더욱 흥미로운 영화들은 사실 이들 영화라기보다는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와 <화형대의 잔다르크>같은 영화들이다.) 이 시기의 영화들이 후일 ‘누벨바그’의 개화를 알릴 감독들에게 그토록 매혹적이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아모레>[42]에서의 안나 마냐니의 말을 좀 바꿔 말해보자면 로셀리니의 영화에 미친 이들은 은총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은총은 어떠한 은총인가? 여기서 리베트가 쓴 "로셀리니에 대한 편지"라는 유명한 비평문의 한 부분을 살펴보자.

로셀리니에게 있어서, 무언가를 보고 있는 눈을 담고 있는 숏들이 그의 영화 내에 형성한 거대한 조화만큼이나 이 위대한 영화 감독의 징표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도 달리 없다. 베를린의 폐허 속에 놓여진 어린 소년의 시각이건, <기적>의 산 위에 있는 안나 마냐니의 시각이건, 로마의 교외나 스트롬볼리 섬, 나아가 이탈리아 전역에 존재하는 버그먼의 시각이건 마찬가지다.[43] 

로셀리니의 영화가 지니고 있는 여러 ‘모던 시네마’의 요소생략, 인과관계에 의거하지 않은 느슨한 구성 등들이 당대 <카이에 뒤 시네마>의 필진들을 감화시켰음은 사실이지만, 리베트가 그리고 훗날 《시네마》에서 질 들뢰즈가 재차 지적한 바와 같이 로셀리니 작품 속에 나타난 ‘보는 것’에 대한 강조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행위자의 영화가 아닌 견자voyant의 영화”). 이것은 나아가 영화 이미지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의 문제와도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 영년> 이후, 로셀리니의 영화에는 일종의 시각의 대리인이라고 할 만한 인물들이 종종 등장한다. 이 인물들은 풍경 속에 놓인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처음엔 그 풍경을 간과한다. 즉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닌 한층 깊숙한 곳으로 여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로셀리니의 영화가 종종 자동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인물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유럽 ’51>, <이탈리아 여행>, <불안>, 그리고 좀 나중에 만들어진 <검은 영혼>(1962) 등이 있다. 이들 영화는 모두 어떤 커플, 혹은 한 여인이 자동차를 몰고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로셀리니 영화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주제적 요소들의 기원은 <전화의 저편>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이미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조라는 이름의 흑인 미군 병사는 마지막에 가서야 빈민들이 모여 있는 메르겔리나 동굴 거주지의 모습을 보고는 놀라는데, 이전까지 그는 술에 취해 있거나 차를 몰고 다녔던 탓에 풍경의 내부로 여행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던 인물이다. 그는 서둘러 자신이 몰고 온 차를 타고 황급히 사라진다.[44] 하지만 이후의 로셀리니 영화에서 인물들은 풍경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한다. <스트롬볼리>의 카린처럼 그들은 거기 완전히 사로잡혀 버린다. 혹은 <이탈리아 여행>의 캐서린에게 그러하듯이 풍경은 끊임없이 인물들의 시각을 위협한다. 풍경과 시각 사이의 거리는 소멸된다. 이러한 거리의 소멸, 이는 로셀리니 영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나아가 본다는 행위에 있어서 무매개적인 직접성directness[45]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텔레비전 시기의 로셀리니가 지녔던 코메니우스적인 신념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유럽 '51>
     

<유럽 ’51>을 자세히 살펴보자. 이 영화의 첫 숏은 운송파업 때문에 차를 잡지 못하고 오래 걸어 아픈 다리를 끌고 귀가하는 노부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들 앞을 여주인공 이레네의 차가 쏜살같이 스쳐 지나간다.[46] 이레네의 정신적 변화는 그녀의 아들이 자살한 이후[47] 도시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고’ 풍경에 의해 자극받음으로써 시작된다. 그녀는 풍경에 압도된다. 교외로 나간 그녀가 맞닥뜨리게 된 낯설고 당혹스러운 풍경들, 하층 계급의 여인을 대신해 우연히 일하게 된 공장에서 육중한 기계들[48]과 거기서 나는 소음에 의해 이레네가 점점 정신을 잃게 되는 장면 같은 걸 떠올려 보라. 한편 영화관에서 상영중 인 수자원 에너지의 이점을 홍보하는 다큐멘터리에서는 어느 순간 다량의 물이 빠르게 회전하며 빨려 들어가는 거대한 구조물이 보여지는데, 이는 이레네의 아들이 추락한 나선계단의 모습과 놀랄 만큼 흡사하다. <유럽 ’51> 이외의 영화를 두고 보자면, <스트롬볼리>의 여주인공 카린이 스트롬볼리 섬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처음으로 보게 된 화산의 위용, 그녀 남편이 사 온 족제비가 토끼를 물어 죽이는 모습, 그리고 그 유명한 다랑어잡이 시퀀스 등이 있다. <이탈리아 여행>의 캐서린이 보게 되는 납골당이나 폼페이 유적에서 발굴된 부부의 시체 같은 것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이 여성들은 배회하는 여성들이자 풍경에 사로잡힌 ‘갇힌 여인들’인 것이다. 그들은 풍경의 포로이다. 이것을 근거로 좀 더 밀고 나가자면 이러한 로셀리니 영화들에 대해 결국 영화를 본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도 있다. 우리는 영화관, 스크린이라는 풍경에 사로잡힌이 점에서 <유럽 ’51>에서의 영화관 장면, 그리고 거기서 상영되는 것이 교육적 목적의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게 여겨진다포로들이다. 그런데 이 본다는 행위가 세계를 향한 인간의 능동적 개입,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의미의 생산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로셀리니의 영화가 가장 강렬한 힘을 발산하는 순간은 인간의 지식, 경험, 문화가 풍경이 무심하게 분출해내는 압도적인 힘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다. 버그먼이 연기한 부르주아 여인이 어떤 원시성, 야수성, 오래된 과거의 흔적과 마주하는 순간은, 바로 이러한 이유로 문명에 대한 탐구가 될 수 있었다.  

한동안<원년Anno Uno>(1974)을 통해 다시 극장용 영화로 복귀할 때까지로셀리니의 마지막 영화로 기록되었던 단편 <순결>(1963)[49]은 매우 흥미롭다. 이 영화를 살펴보기 전에 잠시 이 시기의 로셀리니에 관해 말하자면, 그는 인도에서 싹을 틔웠던 그 원대한 계획, 문명의 역사에 관한 프로젝트를 실현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는 점점 '백치화cretinization'되어가는 문명에 염증을 느꼈고, 공공연하게 영화의 죽음을 떠벌리고 다녔으며, 인간들이 그저 영화가 아니라 다른 인간들을, 사물들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들 방법을 궁리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자신이 <인디아>를 내놓은 이후에 만든 몇몇 영화들, 그 자신도 지적한 바대로 이전의 영화들로 후퇴한 영화들을 매우 수치스러워했다. <로베레 장군>은 오랜 만에 그에게 비평적 찬사를 안겨 준 영화였지만[50] 그는 전혀 만족스러워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검은 영혼> 제작 당시에는 주연배우에게 연출을 맡기고 현장을 떠나 버리는 무책임한 행동을 하기까지 했다. 로셀리니 영화의 전체 궤적을 두고 말하자면, 그는 범위를 넓히는 작업에서도 한 발 물러나 다시 이탈리아 내부로 돌아오고<로베레 장군>, <로마의 밤>(1960), <비바 이탈리아>(1961), <바니나 바니니>(1961)있었으며, 심지어 당대의 유행을 쫓은 <검은 영혼>은 <달콤한 인생> 식의 펠리니적 모더니즘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꼭 이 시기가 소모적인 시기였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화형대의 잔다르크>에서 처음 시도한 거을 이용한 트릭촬영기법을 <바니나 바니니>에서 좀 더 다양화했는가 하면, <로베레 장군> 제작 도중에는 이후의 그가 가장 중요한 도구로 활용하게 될 리모트 컨트롤 줌[51]을 개발해 내기도 했다. 즉 이 시기는 로셀리니 후기의 영화적 스타일을 가능케 할 기술적 도구들이 다듬어지고 정교화되는 시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결국 이 기술적 도구들은 로셀리니의 첫 번째 텔레비전 장편 극영화인 <루이 14세의 집권>에서 탁월한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어느 정도는 히치콕의 <현기증>이나 마이클 파웰의 <피핑 톰>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 <순결>에서, 로셀리니는 영화 이미지의 유혹적 속성에 대한 조롱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 즉 이 영화는 로셀리니의 영화 경력에서 본다는 것에 대한 믿음, 정확히는 이미지를 본다는 행위가 세계를 향한 인간의 능동적 개입을 이끌 가능성에 대한 완전한 부인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나타낸다. 비행기 스튜어디스에게서 정숙한 어머니의 이미지, 오이디푸스적 환상의 이미지를 발견하고 거기 완전히 사로잡혀 버리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로셀리니는 영화적 이미지라는 감옥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는 그토록 정숙해 보였던 여인이 금발머리의 헤픈 여자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자이는 그녀가 지독하게 자신을 쫓아다니는 남자를 떨쳐내기 위해 취한 계략이었지만충격에 휩싸이고 만다. 그는 방에 처박혀 벽에 투사된 여인의 이미지, 과거 그가 자신의 8mm 카메라로 촬영한 여인의 이미지를 어루만지며 고통스러워한다. 이미지 속의 여인은 더 이상 시각의 대리인이 아니라 보는 이의 시선을 고스란히 반사하는 나르시시즘의 대상이다. <순결>에는 스스로의 독단에 사로잡혀 더 이상 세계와 대면하기를 포기한 인간에 대한 로셀리니의 근심이 있다. 또한 이는 영화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자의 가장 신랄한 선언문이기도 했다. 


<순결>



인간과 세계에 대한 믿음

<루이 14세의 집권>은 원래 자크 리베트에게 맡겨졌던 것이다. 그는 막 <수녀>를 끝마친 참이었고, 약간 주저하기는 했지만 이 텔레비전용 영화의 연출에 동의했다. 하지만 곧 거절했고 결국 시나리오 작가 장 그뤼오는 로셀리니에게 연락을 취해 연출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사실 로셀리니는 단편 <순결> 이후 거의 4년간을 아무런 일없이 지내고 있었기에 연출 제의를 즉각 수락했다. 그는 후일 장 그뤼오에게 몇 차례나 “<루이 14세의 집권>으로 자네가 날 살렸다네!”라고 말하기도 했다.[52]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셀리니의 경력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로셀리니 스스로가 말한바 “사진을 둘러싸고 있는 신화를 탈신화화”[53]하는 작업의 진정한 출발이 될 것이었다. 이 영화에서 그간 로셀리니가 조금씩 개발해 왔던 리모트 컨트롤 줌은 팬, 그리고 약간의 달리 숏 및 장시간 촬영과 결합되어 거의 아무런 ‘영화적인’ 효과도 발산하지 않는 기이한 공간, 로셀리니의 후기작을 특징짓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물론 이런 식의 촬영은 스탭들의 불평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는 베니스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출품되었고 몇몇 사람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1966년 10월 8일 프랑스 텔레비전을 통해 (흑백으로) 방송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텔레비전용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극장에서도 개봉되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로셀리니가 '고문 도구' 내지는 '현미경'으로 간주했던 카메라의 가차 없이 냉혹한 힘은 여기서 진정 빛을 발한다. 오늘날에 와서 보면, 평론가 시절의 리베트가 로셀리니의 영화의 특징으로 지적했던 것들은 오히려 그때 당시의 영화들보다 <루이 14세의 집권>같은 후기작들에 더 어울리는 감이 있는데, 그 통찰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특히 리베트가 로셀리니의 카메라와 연기 연출에 관해 언급한 부분을 떠올려 보면 더욱 그렇다.[54] 추기경 마자랭의 죽음까지를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묘사하고 있는 초반부, 그리고 놀랄 만큼 세밀하게 다룬 루이 14세의 식사 장면 등은 로셀리니영화의 또 다른 경지다. 더 이상 시각의 대리인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로셀리니는 이제 인물의 사소한 몸짓 하나에 문화 전체를 담는다. 어색한 몸짓, 기계적인 몸짓, 시선을 어디 둘지 몰라 불안해하는 배우의 눈동자는 매우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루이 14세 시기의 프랑스 궁정, 그 광대한 건축물과 예법과 패션으로 치장된 문화의 과잉 속에 자리 잡고 있을 때, 그 효과는 정말이지 놀라운 것이다. 

로셀리니의 후기작과 관련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아드리아노 아프라는 현대적인 개념의 ‘에세이적 영화essayistic cinema'를 만든 이들, 혹은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무너뜨린 이들의 작업과 로셀리니의 후기작들을 비교해 보는 것도 유용한 일일 것이라고 제안한다.[55] 한편 들뢰즈는 《시네마 2: 시간-이미지》에서, 세르주 다네가 언급한 바 있는 ‘고다르적 페다고지’, ‘스트라우프적 페다고지’과 같이 새로운 방식으로 시각적인 것과 발화행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영화적 페다고지의 모델을 최초로, 단순하지만 결정적인 방식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로셀리니의 후기 작업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56] 하지만 들뢰즈의 책에서 로셀리니와 관련하여 가장 감동적으로 읽히는 부분은 다른 곳에 있다. 

오직 세계에 대한 믿음만이 인간을 그가 보고 듣는 것들과 다시 연결시킬 수 있다. 영화는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을, 즉 우리와 세계간의 유일한 고리를 담아내야 한다. 영화적 환영의 본성은 종종 다음과 같이 생각되었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현대 영화의 힘이다. 우리가 기독교인이건 무신론자이건 간에, 전 세계적 정신 분열증의 시대에 놓인 우리에게는 이 세계를 믿어야 할 이유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믿음의 완전한 탈바꿈이다... 후기의 작업에서 로셀리니는 예술에 대한 흥미를 잃었는데, 이는 그것이 유치하고 슬픔에 사로잡혀 있으며 세계의 상실 앞에서 흥청거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예술을 버리고 삶이 영속될 수 있다는 믿음을 회복시켜 줄 도덕성을 택했다. 로셀리니는 의심할 바 없이 여전히 앎의 이상을 고수했고 이 소크라테스적인 이상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단순한 믿음 안에다 그것을 위치시킬 필요가 있었다. <화형대의 잔다르크>가 오해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갈가리 찢긴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을 지니기 위해서는 잔다르크가 하늘에 있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이 세계를 믿을 수 있는 것은 영원의 높이에 있기 때문이다.[57]

<화형대의 잔다르크>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높이에 대한 지적이다. 이 높이는 <화형대의 잔다르크>에서는이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재판이 벌어지는 지상과 그것을 내려다보는 천상 사이를 왕복한다들뢰즈와 말한 바와 같은 의미를 띠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로셀리니의 여타의 작품을 고려해 볼 때는 매우 불안정한 의미를 띤다. 왜냐하면 로셀리니의 영화에서 인물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놓이는 순간은 매우 불길한 사건을 예고하는 것이거나, 우리로 하여금 판단을 유보하게 만드는 모호한 순간인 경우가 종종 있는 까닭이다. 가령, <독일 영년>의 소년은 폐허가 된 한 건물의 고층에서 건너편에 있는 자신의 집 현관 쪽을 내려다보는데, 마침 영구차가 와 그의 죽은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 가는 참이다. 다음 순간 소년은 명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유럽 ’51>의 이레네는 그녀가 갇힌 정신 병원의 이층 창문을 통해 자신을 유폐시키고 떠나가는 가족들을 바라본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기적>의 난니나나 <스트롬볼리>의 카린이 영화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은 높은 산 위이다. 그녀들은 (그들 자신이 생각하는 바대로) 구원을 얻었는가, 아니면 버림받은 것인가? <검은 영혼>의 아드리아노 역시 자기 집 테라스에서 아내가 차를 타고 떠나버리는 것을 본다. 유사한 설정은 심지어 <루이 14세의 집권>에서도 나타난다. 바로 푸케가 총사대장 달타냥에게 체포되어 끌려가는 모습을 궁정의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루이 14세의 모습이 묘사된 부분이 그러하다. 이후 루이 14세는 자신이 만든 온갖 종류의 장식적인 것들의 힘에 둘러싸인다. <이탈리아 여행>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인물들이 직접 무언가를 내려다보지는 않지만 (로셀리니 영화에서는 아주 이례적으로 사용된) 크레인에 실린 카메라가 아예 허공으로 치솟아 인물들을 내려다본다. 오히려 로셀리니의 영화에서 아무리 단순할지라도 강력한 믿음을 가진 이들은 내려다보는 위치에 놓이지 않는다. 그들은 평면 위에서 왕복한다. 설령 지형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해 있을 지라도 그들이 무언가를 내려다보는 일은 거의 없다.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의 프란체스코, <소크라테스>의 소크라테스, 그리고 <메시아>의 예수 등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그러니까 들뢰즈는 매우 이례적인 순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해되었을지도 모르는 순간으로부터 지극히 로셀리니적인 주제를, 나아가 정작 로셀리니의 작품 내부가 아니라 바깥에서만 존재했던 것인지도 모르는 확신을 읽어 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영화 영년

로셀리니의 마지막 극장용 장편영화인 <메시아>[58]는 1976년 2월 18일 파리의 다섯 개 극장에서 최초로 개봉되었다. 그리고 7개월 뒤인 9월 30일 로마에서도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1975년 6월에서 7월 사이에 42일 동안 튀니지에서 촬영되었다. 로셀리니는 이 영화의 더빙을 가능한 값싸게, 빠르게 끝내버렸고 문제가 생겨도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로셀리니의 이런 버릇은 영화에 대한 그의 접근방식의 변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멀게는 젊은 시절 더빙 조수로 일하던 시기의 지루한 경험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건 영화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은 평을 받았다. 걸작은 아닐지 모르지만 <메시아>는 분명 발견을 기다리는 영화이다. <메시아>가 파리에서 개봉되고 난 후, 이탈리아에서 개봉되기 전에 로셀리니는 일흔 번째 생일을 맞았고 잉그리드 버그먼이 그의 생일 파티를 마련해 주었다. 이후 로셀리니는 두 편의 텔레비전용 다큐멘터리를 더 찍었을 분이다. 

그는 1977년 5월에 칸영화제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 그는 몇 년 간 거의 다른 이들의 영화를 보지 않고 지내 왔었다. 영화제에서 그는 (의무적으로) 몇 편의 영화를 보았지만 그를 매혹시킨 건 딱 한 편뿐이었다. 그건 바로 타비아니 형제의 이탈리아 영화 <파드로 파드로네>였다. 이 영화는 16mm로 촬영된 것이었으며 게다가 텔레비전 방송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로셀리니는 심사위원들을 설득하고 비싼 보석을 선물하는 등 뇌물을 먹이기까지 하며뻔뻔스럽게도 보석을 사는 데 들어간 비용은 영화제 쪽에 청구했다<파드로 파드로네>가 황금종려상을 받을 수 있도록 손을 썼다. 수상 결과는 그의 뜻대로 되었다. 한 술 더 떠 심사위원특별상과 최우수감독상에 해당하는 영화는 아예 없다고 발표되었다. 이는 영화제에 일대 스캔들을 불러 일으켰고, 영화제 위원장은 자신은 로셀리니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한편 로셀리니는 “타비아니 형제에게 상을 주는 것은 영화와 텔레비전의 만남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라고 선언했다.[59]
 

*

로셀리니는 그토록 물의를 빚었던 칸영화제가 끝나고 나서 일주일 후, 1977년 6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다음 날인 6월 4일, 프랑스 텔레비전에서는 그의 마지막 작품 <퐁피두센터>(1977)가 방송되었다. 죽기 직전의 그가 마지막까지 계획하고 있었던 것은 칼 마르크스에 관한 텔레비전용 영화였다.



[1] 이 글에서 영화 제목 뒤에 표기된 연도는 해당 영화가 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소개되거나 개봉된 해를 가리킨다. 한편 로셀리니가 만든 (혹은 제작을 담당한) 텔레비전용 영화들이나 시리즈물의 경우에는, 방송되기 이전에 영화제 등을 통해 미리 소개된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해당 작품이 텔레비전을 통해 처음으로 방송된 해를 기준으로 삼아 표기했다.  

[2]  로셀리니의 영화 <독일 영년>의 프랑스 제목 ‘Allemagne année zéro’를 고다르다운 방식으로 차용한 이 영화의 원제는 ‘Allemagne 90 neuf zéro’ 혹은 ‘Allemagne année 90 neuf zéro’이다. 여기서 제목의 단어 가운데 ‘neuf’는 프랑스어에서 ‘9’의 의미와 함께 ‘새로운’이라는 뜻도 함께 지니고 있다. 따라서 제목은 ‘독일 (19)90년’으로 해석될 수도, ‘신 독일 영년’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3] Adrian Martin, “Always a window : Tag Gallagher's Rossellini”
이 글은 에이드리언 마틴이 쓴 태그 갤러거의 빼어난 로셀리니 전기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모험The Adventures of Roberto Rossellini》에 관한 리뷰이다. 하지만 단순한 리뷰의 차원을 넘어 로셀리니 이해에 도움이 될 만한 많은 아이디어들을 제공한다.

[4] Tag Gallagher, The Adventure of Roberto Rossellini, Da Capo Press, 1998, p.553.

[5] Mehrnaz Saeed-Vafa & Jonathan Rosenbaum, “Interviews with Abbas Kiarostami”, Abbas Kiarostami,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pp.120~121.

[6] Abbas Kiarostami, “Statement on 10”, 앞의 책, pp.124~125 이 글은 2002년 칸영화제에서 <텐>이 상영될 당시, 영화의 프레스북에 실렸던 것이다. 

[7] Tag Gallagher, 앞의 책, preface. 이 글에서 로셀리니의 전기적 사실을 기술할 때는 주로 이 책을 참고하였음을 밝혀 둔다.

[8] 같은 책, p.46 인용. 또한 태그 갤러거는, 사보이와 니스에 잠깐 유람을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로셀리니는 1946년 이전에 이탈리아 바깥으로 오래 여행한 적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로셀리니가 젊은 시절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다녔다는 이야기들은 여러 자료들을 검토해 볼 때 잘못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같은 책, p.710). 

[9] 무성 영화 시기에 사용되었던 트릭 촬영 기법을 로셀리니가 발전시킨 것으로, 카메라 뒤편에 위치해 있는 배경 그림을 카메라 앞에 있는 거울에 반사시킴으로써 거울 건너편에 있는 실제 배경과 합성하는 기법을 말한다. 후반 공정 없이 촬영 과정에서 수행되는 특수 촬영 기법 가운데 하나로, 로셀리니는 이를 그의 첫 번째 장편 컬러 영화인 <화형대의 잔다르크>(1955)에서 처음 시도한 이후, 몇 차례의 실험을 거쳐 후기의 텔레비전 영화에서 중요한 형식적 스타일로 확립하게 된다. 일명 슈프탄 프로세스Schüfftan process라고도 불리는 기법으로 히치콕이 <협박>의 대영박물관 장면을 촬영할 때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Adriano Aprà, “Rossellini's Historical Encyclopedia”, in David Forgacs, Sarah Lutton & Geoffrey Nowell-Smith (ed.), Roberto Rossellini : Magician of the Real, BFI publishing, 2000, p.139 미리 밝혀두자면,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로셀리니의 후기작 가운데 구해 볼 수 있었던 것은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네 편 <루이 14세의 집권>, <소크라테스>, <메디치 가의 시대> 그리고 <메시아>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른 영화들은 몇몇 장면들만을 단편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로셀리니의 후기작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못했다. 대신 로셀리니의 후기 영화들에 대한 전체적인 조감도를 제공하는 한편, 거기서 매우 특징적이라고 할 만한 형식적 특징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룬 아프라의 위 글이 본서에 번역, 수록되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10] 같은 글, p.162.

[11] Roberto Rossellini, "Seeing with our own eyes", in Don Ranvard (ed.), Roberto Rossellini, BFI Dossier, no.8, British Film Institute, 1981, p.84.

[12] 같은 글, p.84.

[13] Tag Gallagher, 앞의 책, p.552 여기서 갤러거는 로셀리니의 구상을 도표화해서 제시하고 있다. 

[14] <유럽 ’51>에서 여주인공 이레네(잉그리드 버그먼)이 들어가는 극장이 바로 이곳이다

[15] Tag Gallagher, 앞의 책, p.13.

[16] 흥미롭게도 비평가인 페레이둥 오베이다는 로셀리니에게 채플린이 매력적이었던 진정한 이유는 그의 휴머니티 때문이 아니라 (특히 초기영화들에서 두드러지는) ‘비인간성inhumanity'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로셀리니의 영화가 지니고 있는 (이탈리아 영화에서는 매우 특이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감상성의 부재, 사물과 인간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냉정한 시선 등을 고려해 볼 때 일견 타당한 구석이 없지 않다. 하지만 로셀리니는 오베이다의 이런 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같은 책, p.36). 한편 앙드레 바쟁은 비토리오 데 시카와 로셀리니가 현실에 접근하는 방식상의 차이에 대해 논하면서 데 시카가 “정감 어린 호기심”을 지니고 접근하는 데 반해 로셀리니는 “가차 없는 엄밀성”의 태도를 견지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앙드레 바쟁, “<유럽 ’51>”, 《영화란 무엇인가?》, 박상규 옮김, 시각과 언어, 1998, p.457).

[17] 태그 갤러거는 영화적으로 볼 때 킹 비더야말로 로셀리니, 데 시카, 비스콘티 및 여타 네오리얼리즘 감독들에게 주요한 모델이었음을 지적한다(Tag Gallagher, 앞의 책, p.37). 로셀리니는 1952년 이탈리아 잡지 <비앙코 에 네로Bianco e Nero>에 실린 마리오 바르도네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난 비더의 영화들에 깊이 감화되었다. <군중>(1928)이나 <할렐루야>(1929) 같은 영화들 말이다. 그 영화들은 그때 내가 보았던 유일한 ‘고전적’ 영화들이었을 게다”("Colloquio sul neorealismo," Bianco e Nero, no.2, 1952). 내가 참고한 것은 David Forcacs, Sarah Lutton & Geoffrey Nowell-Smith (ed.), 앞의 책, pp.149~155에 영어로 번역, 수록된 것임을 밝혀 둔다. 

[18] 로셀리니는 16~38세에 이르는 20년이 넘는 세월을 파시스트 체제하에서 보냈다.

[19] 그 전에 로셀리니는 1932년 러시아 망명객이자 여배우였던 아샤 노리스와 결혼식을 올렸으나, 그녀 아버지의 반발로 이틀 만에 파경을 맞았다. 

[20] Tag Gallagher, 앞의 책, pp.47~8.

[21] 로셀리니도 인터뷰에서 네오리얼리즘의 기원은 2차 대전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들에 있다고 피력한 바 있다. “Colloquio sul neorealismo,” Bianco e Nero, no.2, 1952.

[22] 전후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전성기, 즉 대략 1948년까지에 이르는 시기 동안에는, 이탈리아 내에서 정작 ‘네오리얼리즘’이라는 용어는 이 시기의 이탈리아 영화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용어는 1930년대에는 문학적인 용어로만 매우 드물게 사용되었을 뿐이며, 전쟁 기간 동안에는 1930년대의 프랑스 영화들, 특히 장 르느와르, 마르셀 카르네, 줄리앙 뒤비비에의 영화들우리에게는 흔히 ‘시적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들로 알려져 있는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어떤 자료들은 비스콘티의 <강박관념>(1943)을 ‘네오리얼리즘’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비평적으로 사용된 이탈리아 영화라고 밝히고 있는데, 틀린 것은 아니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다. 당시 이탈리아 비평계의 문맥 안에서 그것은 비스콘티의 이 영화가 1930년대의 프랑스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Tag Gallagher, 앞의 책, p.268, 733, n.12.

[23] Hugo Salas, "Roberto Rossellini"

[24] 로셀리니는 <무방비 도시>와 <파이잔>을 보고 감명을 받은 버그먼으로부터 함께 일하고 싶다는 편지를 받은 이후, 1949년에 그녀를 만나기 위해 미국 방문했다. 같은 해 버그먼은 <스트롬볼리> 촬영을 위해 로마로 온다. 하지만 로셀리니와 그녀 사이의 내밀한 관계가 알려지고 버그먼의 임신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이 사건은 일대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  

[25] Tag Gallagher, 앞의 책, p.66

[26] 로셀리니 자신도 후일 이 영화가 자신이 이후의 영화들을 통해 완전히 제거하고자 했던 유형의 유혹적인 것들에 의해 ‘오염되어’ 있는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Davis Forgacs, Rome Open City, BFI publishing, 2000, p.11.

[27] 같은 책, p.11.

[28] 같은 책, p.26.

[29] 같은 책, p.14.

[30] 네오리얼리즘에 관해서는 이 책에 실린 두 편의 글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그저 로셀리니와 관련해 몇 가지 비평적 언급만을 하고자 한다. 

[31] 때로는 로셀리니 자신이 네오리얼리즘이 ‘사회적’인 영화라는 식의 주장을 한 것도 사실이다. “네오리얼리즘과 더불어, 우리는 (…) 더 이상 개인적이거나 이기적이지 않은 사회적인 영화의 활용을 성취하게 되었다” Roberto Rossellini, "Interview with Gian Luigi Rondi," Il Tempo, 8 May 1976. David Forgacs, 앞의 책, p.73에서 재인용.

[32] Philip Rosen, Change Mummified : Cinema, Historicity, Theor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1, p.3~41. 여기서 로젠은 바쟁의 이미지 존재론과 그 특유의 현상학적 주체에 대한 호의 어린 재검토를 통해 그의 이론이 시간성, 나아가 역사성과 관계되는 방식에 관해 자세하게 논하고 있다. 

[33] Andre Bazin, "Defence of Rossellini", in Cinema Nuovo, 25 August 1955. 바쟁이 아리스타코에게 보낸 이 편지는 앙드레 바쟁, 앞의 책, pp.441-454에도 번역, 수록되어 있다.  

[34] Jim Hiller (ed.), “Interviews with Roberto Rossellini”, Cahiers du Cinema: The 1950sNeo-Realism, Hollywood, New Wav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5, p.209. 

[35] Hugo Salas, 앞의 글

[36] <센소>, <레오파드>, <저주받은 자들>, 그리고 <루드비히> 같은 영화에서의 루치노 비스콘티도 이와 비슷한 탐구를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작업은 이탈리아 영화 특유의 센티멘털리티를 고도로 예술적인 경지로 끌어올림으로써 굉장한 정서적 감흥을 안겨주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로셀리니와 결정적으로 다르다. 물론 어떤 점에서는 비스콘티가 센티멘털리티를 불러일으키는 영화를 만들었다기보다는 센티멘털리티 자체에 대한 분석을 행했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37] 여기서 인용한 트뤼포의 말은 카를로 리자니가 만든 로셀리니에 관한 다큐멘터리 <Roberto Rossellini: Frammenti e battute>(2000)에 수록된 것을 옮긴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국내에서도 DVD(알토미디어)로 출시되었다.

[38] 이 영화 이외에도 로셀리니는 인도에서 16mm 필름으로 촬영한 것들을 편집해 각각이 대략 30분 정도의 길이를 지닌 10부작 텔레비전 시리즈를 만들었다. 이 시리즈는 1959년에 이탈리아와 프랑스 텔레비전을 통해 (원래 컬러로 찍혀진 것이었지만) 흑백으로 방송되었다. 극장용은 35mm 필름으로 촬영되었지만 일부 장면예컨대 호랑이가 등장하는 부분에서는 16mm 필름이 블로우업되어 사용되었다. 

[39] 이 말은 고다르의 것이라기보다는 로셀리니가 한 말을 인용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예컨대 로셀리니는 1959년 <카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이때의 진행자는 페레이둥 오베이다와 자크 리베트였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관념들이지 이미지가 아니다”  Jim Hiller (ed.), 앞의 책, p.213 그런데 로셀리니의 영화 이미지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실제로 고다르가 감독으로 데뷔한 뒤 그가 영화 이미지에 접근하는 방식에도 커다란 암시를 주었던 것 같다. 

[40] Jean Narboni & Tom Milne (ed.), Godard on Godard, Da Capo Press, 1972, p.150. 원래의 글은 Cahiers du Cinema 96, June 1959에 실렸다.

[41] 잉그리드 버그먼은 로셀리니와 작업한 마지막 영화이자 다분히 표현주의적인 <불안>(1954)이 작품은 전작인 <화형대의 잔다르크>보다 나중에 촬영되었지만 그보다 앞서 개봉되었다에 출연한 뒤, 프랑스로 가 장 르느와르의 <엘레나와 남자들>에 출연했고 로셀리니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리고 할리우드로 돌아가 아나톨 리트박의 <아나스타샤>에서 몰락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후손 아나스타샤 공주 역을 맡아 연기하는데, 여기서 ‘고귀함→비천함→고귀함’의 경로를 따르는 아나스타샤의 인생역정은 이상하게 버그먼 자신의 그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미국으로 돌아온 버그먼이 대중에게 호소하는 반성문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말이다. 이 영화로 버그먼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42] 안나 마냐니가 주연한 두 개의 단편, 즉 장 콕토의 일인극이 원작인 <인간의 목소리>와 페데리코 펠리니가 원안을 쓴 <기적>펠리니는 여기서 방랑자 역할로 직접 출연했다을 한데 묶은 영화이다. 이 가운데 <기적>은 장 르느와르의 <시골에서의 하루>, 마르셀 파뇰의 <조프르와>와 함께 묶여 <사랑의 방식The Way of Love>이라는 제목의 옴니버스 영화로 1950년에 미국에서 공개되었다.  

[43] Jacques Rivette, “Letter on Rossellini", Jim Hiller (ed.), 앞의 책, p.200. (자크 리베트, "로셀리니에 대한 편지", <필름 컬처>, vol.3, no.1, 1999)

[44] <전화의 저편>의 이 순간을 두고 산드로 베르나르디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단지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역사의 한 시기에 대한 전체적인 감각을 끌어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로셀리니의 눈은 사유의 기관organ of thought인 것이다”. 베르나르디는 로셀리니 영화에서의 풍경이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띠며 영화의 주제와 관련해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전화의 저편>에서 <인디아>에 이르는 영화를 통해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로셀리니에게서 “인물들이 그들의 시각적 경험을 통해 자신에게서 벗어나 그들이 속한 세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풍경 속에서이다”. Sandro Bernardi, “Rossellini' Landscapes : Nature, Myth, History”, in David Forgacs, Sarah Lutton & Geoffrey Nowell-Smith (ed.), 앞의 책, pp.50~63.    

[45] 말년의 로셀리니는 ‘직접적 시각direct vision'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때 코메니우스의 용어 ‘autopsy'를 종종 사용했다. ’autopsy'란  검시檢視 혹은 검시檢屍의 뜻도 있지만 코메니우스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것to see with one's own eyes'을 뜻한다. 로셀리니는 텔레비전이 바로 이러한 직접적 보기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의 방대한 프로젝트는 그에 따라 구상된 것이다. 

[46] <유럽 ‘51>은 서로 조금씩 다른 몇 개의 판본들이 남아 있는데, 크게 이탈리아어판과 영어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노부부가 등장하는 장면은 베니스영화제 상영본과 당시 이탈리아 개봉판에는 포함되어 있지만, 영어판에서는 삭제되었다. 직접 확인해 본 바에 따르면 영어판은 이레네의 차가 거리를 가로지르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따라서 내가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탈리아어판에 근거한 것이다. <유럽 ’51>의 여러 판본들 간의 차이를 상세히 알고 싶다면 Tag Gallagher, 앞의 책, p.694를 참고하라.  

[47] 1946년에 로셀리니는 첫 아들 로마노를 잃게 된다. 그의 죽음은 로셀리니를 깊은 슬픔에 빠지게 했고, 어느 정도는 <독일 영년> 및 <유로파 ’51>에서의 아이의 죽음이라는 주제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독일 영년>은 로마노에게 바쳐졌다. 

[48] 이 공장장면에서 기계의 비인간적인 위력이 묘사되는 방식은 로셀리니의 데뷔작 <하얀 배>에서 전투중인 전함의 운용 과정이 묘사되는 시퀀스와 상당히 닮아 있다. 두 영화 모두에서 기계적인 것의 압도적인 힘에 짓눌리는 인물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49] 고다르, 파졸리니, 그리고 우고 그레고레티가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RoGoPaG>의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이다. ‘RoGoPaG’이라는 제목은 각각의 에피소드의 연출을 맡은 감독들의 성에서 알파벳을 따 결합한 것이다. 

[50] 이 영화는 1959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마리오 모니첼리의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황금사자상을 공동수상했다. 

[51] 이후 로셀리니는 이 리모트 컨트롤 줌의 기능을 더욱 향상시켜 25~250mm에 이르는 초점거리 내에서 자유로이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52] Tag Gallagher, 앞의 책, pp.571~2.

[53] 같은 책, p.574.

[54] “이 시선은... 가장 활동적이다. 중요한 것은 이 시선이 웰즈처럼 외관의 변화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요, 무르나우처럼 외관의 응축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며, 외관을 포착하는 데 집중한다는 점이다. 각각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한 사냥, 각각의 위험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신체적인 수색(그리고 그런 까닭에 영적인 수색이기도 한, 육체를 통한 영혼의 탐구), 승리와 흥분의 몇몇 정의할 수 없는 특징을 이미지들에게 동시에 부여하는 포획과 추적의 끊임없는 운동”( Jacques Rivette, 앞의 글 p.197) “놀랄 만큼 새로운 연기, 여기서 연기란 완전히 폐지된 것처럼, 더 상위의 필연성에 의해 점차 목숨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배우들을 말라붙게 하는 방식... 나는 앞으로 도래할 영화에서의 연기가 이와 같은 것이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가 오랜 시간 동안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종류의 연기이다”(p.202).

[55] Adriano Apra, 앞의 글, pp.142~143.

[56] Gilles Deleuze, Cinema 2 : The Time-Image, Hugh Tomlinson & Robert Galeta (tran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9, pp.247~248.

[57] 같은 책, p.172.

[58] <메시아>에 관해 한글로 씌어진 간략한 리뷰는 유운성, “로셀리니의 <메시아>”를 참고.
 
[59] Tag Gallagher, 앞의 책, p.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