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격월간 사진잡지 《보스토크》 45호(2024년 5월 20일 발행)에 실린 글이다.
텔레비전, VCR, 캠코더, 컴퓨터, 그리고 스마트폰 등은 동적 이미지를 기록하고 재생하는 장치로서 20세기에 뤼미에르적 시네마토그래프가 누리고 있던 특권을 서서히 잠식해 왔다. 이 대체 과정이 거의 완료된 지금, 시네마토그래프 장치는 그것을 대체한 장치들이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디자인적 요소로만, 심지어 어휘로만 남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와 관련된 활동, 프로그램, 어플리케이션 등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곤 하는 퍼포레이션이 있는 필름 모양 아이콘이나, ‘홈시어터’, ‘아이무비’, ‘시네마(틱) 모드’라든지 여전히 영화 크레딧에 나타나는 ‘a film by’ 같은 어휘들을 떠올려보라. 여하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 또한 이처럼 전자적, 디지털적으로 변용된 동적 이미지의 특정한 양식을 예전에 쓰던 표현 그대로 영화라고 부르는 데 별반 거부감이 없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과연 스마트폰을 텔레비전, VCR, 캠코더, 컴퓨터 등과 같은 맥락에 두고 봐도 괜찮은 것일까? 역사적으로 영화는 그 맞수가 등장할 때마다 크게 이중의 방식으로 이에 대응해왔다. (다만, 경제적이고 산업적인 차원에서의 대응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첫째는 새로운 매체의 디스플레이 화면을 영화적 스크린으로 수용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는 영화적 스크린을 그러한 디스플레이에 적응시킬 방법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시도의 초기적 형태로는 주사선이나 픽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디스플레이 화면을 사실적 효과(페이크 다큐멘터리)나 미학적 효과(글리치 아트)를 얻기 위해 전면에 내세우는 사례들이 있다. 한때 영화 이론이나 비평이 주로 관심을 기울인 것도 바로 이쪽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새로운 매체를 다루는 사람의 몸짓과 그가 가로지르는 장소들이 스크린에 비치는 방식이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 캠코더를 들고 금지된 장소로 향하는 학생들, 무언가 비밀스러운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 어두컴컴한 방의 컴퓨터 앞에서 씨름하는 해커 등은, 나란히 앉아 스크린에 비친 영화를 보는 커플만큼이나 한때 영화 스크린에 범람하던 익숙한 클리셰였다. 이렇게 말해도 좋겠다. 20세기의 영화는 이런 몸짓들을 스크린에 비추는 방식을 고안해냈다고. 다정하게, 우스꽝스럽게, 위태롭게, 무시무시하게, 끔찍하게, 긴장되게, 행복하게, 쓸쓸하게, 그리고 온갖 방식으로.
그런데 스마트폰은 어떤가? 이것은 앞서 사례로 든 여러 몸짓을 매우 단조로운 몸짓으로 축소한다. 이를테면 한 손 또는 두 손으로 스마트폰을 잡고 다소 구부정하게 머리를 숙인 채 디스플레이 화면을 들여다보는 그런 몸짓처럼. 사람들이 이처럼 단조로운 몸짓으로 모든 장소를 가로지를 때, 과연 영화는 이것을 어떻게 포착해야 할까?
이런 영화적 상황을 가정해보자. 때는 20세기 말의 언젠가, 외국의 어느 도시 공항에 막 도착한 한 남자가 있다. 숙소로 예약해 둔 호텔에 가려고 택시를 잡으려는데 녹록지 않다. 이래저래 씨름하다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에 도착한다. 프론트데스크에 가서 체크인을 하는데 아내에게서 전보가 하나 와 있다. 그는 로비의 공중전화 부스에 가서 집에 전화를 건다… 유능한 감독이라면 영화에서 대여섯 개 정도의 장면으로 전개될 이 상황에서 각양각색의 흥미로운 몸짓과 움직임을 연출해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면? 공항에 도착해서 스마트폰으로 예약한 우버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한다. 택시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정보를 살펴보고 메일과 문자를 확인한다. 그의 스마트폰으로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와서 한동안 통화한다. 호텔에 도착해 스마트 체크인을 한다… 장면은 바뀌어도 거의 모든 몸짓이 스마트폰과 결부되다 보니 상당히 유능한 감독이어도 시각적으로 매력적인 화면의 연쇄를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몸짓이 장소의 성격과 별다른 관계가 없다 보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남자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다 이따금 뭔가를 보곤 반응하는 그의 얼굴 클로즈업을 교차시키는 정도가 고작일 수밖에 없다. 영화적 장소는 비가시적인 배경이 되어 물러나게 된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 시대의 영화작가들은 스마트폰을 다루는 몸짓을 영화적으로 수용하고 그러한 몸짓이 펼쳐지는 장소를 재창안한다는 문제를 어떻게 직면하거나, 우회하거나, 또는 회피하고 있는 것일까? 흡연이라고 하는 지독히 단순한 몸짓마저 20세기의 영화를 대표하는 몸짓들 가운데 하나로 전환해낸 그 탁월한 역량─스크린에 등장했던 그 숱한 매력적인 흡연가들을 떠올려보라─을 영화가 스마트폰에 대해서도 다시 발휘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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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최근의 영화들을 살펴보는 대신, 20세기의 끝자락에 만들어진 계시적인 작품 하나를 기억에서 잠시 끄집어내 보자. 소재의 성격을 지나치게 충실히 좇은 결과 미학적으로 파국을 맞은 빔 벤더스의 로드무비 <이 세상 끝까지>(1991)─원제 ‘Until the End of the World’를 영화의 내용을 고려해 새기면 ‘세상의 종말까지’나 ‘세상이 끝날 때까지’가 더 적절해 보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국내 개봉 당시의 제목을 따르기로 한다─가 그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대학 3학년 때인 1994년 봄에 처음 보았다. 갓 일본에서 출시된 레이저디스크를 누군가 구해와 학생회관 1층에 있던 음악감상실에서 이 영화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해 마지막 날 연강홀(현 두산아트센터)에서 이 영화가 정식 개봉되었을 때 다시 보았다. 일본판은 상영시간이 3시간에 달했지만, 당시엔 으레 그러했듯 국내 개봉판은 심하게 단축되어 2시간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사실 그 해에 벤더스는 거의 5시간에 이르는 감독판을 내놓기도 했었지만, 실제로 이 판본을 접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이 영화는 어떤 측면에서 봐도, 그리고 어떤 판본으로 봐도 성공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다만 감독판에서는 벤더스가 그의 작업에서 요체가 되는 강박을 그것이 급기야 소진되기에 이르는 지점까지 밀고 가는 과정이 지치도록 오롯이 감지되기는 한다. 일찍이 철학자 질 들뢰즈는 이 벤더스적 강박을 간결하게 짚어낸 바 있다. 그것은 두 계열의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을 가지고 혼합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런 시도를 처음 제안한 이는 프란츠 카프카이다.) 두 계열의 한쪽에는 이동-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translation)의 수단들이 있는데, 바로 선박, 자동차, 기차, 비행기 등이다. 다른 한쪽에 있는 것은 표현-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expression)의 수단들로, 편지, 전화, 라디오 및 상상 가능한 모든 ‘인터폰’과 시네마토그래프 장치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두 계열의 혼합은 이동 수단 위에 표현 수단을 얹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기차 안의 전화, 배 위의 우편함, 비행기 안의 영화 등등.
아무래도 벤더스는 <이 세상 끝까지>를 촬영하기 전에 영화에 대한 들뢰즈의 저서를 읽은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그 책에서 자신에 대해 들뢰즈가 기술한 부분은 읽은 것 같다. 영화가 제작된 때를 기준으로 근미래인 1999년을 배경으로 삼은 이 영화는 들뢰즈가 카프카적 제안을 벤더스가 이어받은 것이라고 본 두 계열의 “상상 가능한” 온갖 혼합물들이 등장한다. 벤더스는 이 영화가 SF 장르에 속함을 구실 삼아 오늘날 우리에게는 익숙한 것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거나 상용화되지 않았던 장치들까지 마음껏 끌어들였다. 보트 위의 캠코더, 자동차 안의 캠코더, 버스 안의 캠코더, 자동차 안의 대시보드 모니터와 내비게이션 프로그램, 기차 안의 화상전화, 비행기 안의 개인 모니터… 그러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면 우주선에 탄 주인공이 지구의 친구들과 화상으로 그룹 통화를 하는 모습까지 보게 된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 끝까지>의 인물들은 어쩐지 오늘날 유튜브의 ‘여행 크리에이터’들을 꼭 빼닮은 것 같기도 하다. 기묘한 것은, SF적 상상이 가미된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이 SF적 상상이 가미된 디자인과 더불어 화면에 들어오게 되자, <도시의 알리스>(1974)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1976) 같은 영화에서 그토록 멋지게 발휘되었던 벤더스의 능력이 사라져 버린다는 점이다. 커뮤니케이션 수단들과 그 혼합물들을 다루는 인간의 몸짓을 영화적으로 포착하는 능력 말이다.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은 벤더스가 표현-커뮤니케이션 수단에 대한 상상을 밀고 나가 무언가를 보는 사람의 시지각 정보만이 아니라 두뇌 반응까지 동시에 기록하고 이를 맹인도 볼 수 있게 두뇌로 직접 전송하는 장치를 끌어들이면서다. 오늘날의 VR 기기와 의료용 MRI 기기를 접속한 형태에 가까운 이 장치는 나중에는 인간이 꾸는 꿈마저도 생화학적 정보로 기록해 재생하게끔 개량된다. 어쩌면 <이 세상 끝까지>에서 미적으로 흥미를 끄는 유일한 것은 글머리에서 언급한 바 새로운 매체의 디스플레이 화면을 영화적 스크린으로 수용했다는 점이겠다. 이 영화가 등장하는 꿈의 이미지들은 일종의 글리치 아트를 떠올리게 하는데, 영화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이 회화적 이미지들은 초기 아날로그 HD 비디오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정작 저 미래적 장치를 다루는 인간의 몸짓은 그야말로 완전한 마비 상태에 가까운 것이 되어버린다. 꿈을 기록하기 위해 취해야 할 몸짓은 그저 자는 것이다. 이렇게 기록된 자신의 꿈 이미지들에 매혹된 사람들은 꿈의 기록이 이루어지고 나면 동굴에 틀어박혀 그 이미지들이 재생되는 휴대용 소형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다(사진 1). 마치 오늘날의 우리가 애플리케이션들을 가로지르며 우리의 욕망이 연신 디스플레이되는 스마트폰 화면을 종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세상 끝까지>에서 벤더스는 자신의 강박을 밀고 나가면 논리적으로 어떻게 귀결되는지를 보았다. 두 커뮤니케이션 계열의 혼합이란 각각의 계열이 아직 극단적이지 않을 때나 가능하다. 우리가 온갖 표현 수단들을 동원해 자기의 내면을 가시화하고 향유하는 일에만 몰두할 때 우리의 움직임은 중단된다. 벤더스는 이 영화를 치유의 이야기로 끝맺고 있지만, 언젠가 도래할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극단적 스펙터클과 결부된 몸짓을 구원하는 데는 실패한다. 그가 치유의 이동 수단으로 제시하는 것은 의미심장하게도 우주선이다. 우주선에서 화상으로 이루어지는 그룹 통화는 극단에 이른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에 어울리는 궁극의 혼합물인 걸까(사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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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더스가 그의 야심적인 실패작을 내놓은 지도 30여 년이 흐른 지금, 오늘날의 극단적 스펙터클 장치는 그가 상상했던 것만큼 번잡하지는 않다. 당신이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는 스마트폰을 보라. 그런데 이 기기를 조작하는 몸짓을 영화적으로 포착하는 일은 보기보다 쉽지 않다. 그래서 상당수의 영화 예술가들은 스마트폰을 가능한 화면에 보여주지 않으면서, 심지어 스마트폰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세계인 양 시침 뚝 떼고 영화를 만드는 편을 택하기도 한다. 이런 은폐와 배제는 때로 독특하게 매력적인 영화적 세계를 낳기도 한다.
홍상수의 <여행자의 필요>(2024)에는 스마트폰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상당히 부자연스럽다고 해야 할 정도인데 신기하게도 영화를 보는 동안 이 사실을 깨닫기는 쉽지 않다. 설령 자각하더라도 이내 잊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런 배제가 없었더라면 이 영화의 많은 장면은 지금과 다른 것이 되거나 아예 사라져야 했을 터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한국 사람들에게 프랑스어 개인 교습을 하는 이리스는 암기해야 할 문장을 굳이 그때그때 수첩에 펜으로 적어 건넨다. 그녀는 한국 남자 인국의 집에서 동거하고 있는데,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집에 불쑥 찾아와 곤란한 상황이 된다. 어머니가 돌아가고 나자 인국은 잠시 집을 나가 있던 이리스를 찾아 동네를 배회한다. 만일 홍상수가 등장인물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이리스는 수첩에 펜으로 문장을 적는 대신 문자나 메일로 보낼 것이고, 집에 들르겠다는 어머니의 문자나 전화를 받은 인국은 곤란한 상황을 미리 피할 수 있게 되고, 나중에 그는 이리스에게 이제 집에 돌아와도 좋다고 또 문자나 전화를 할 것이다. 이런저런 몸짓이 모두 스마트폰을 만지는 몸짓으로 통합되고, 어떤 사물들은 화면에서 사라지고, 배회의 장소들은 화면에 끼어들 틈이 없게 될 터다.
홍상수의 영화적 세계는 스마트폰의 부재를 통해서만 가장 근사하게 활성화되는 그런 세계다. 물론 이 영화에 스마트폰이 아예 부재하지는 않는다. 이리스가 만난 사람들이 윤동주의 시 번역문을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찾아 그녀에게 건네는 장면들이 있다. 검색에 의존하지 않고 시를 곧바로 그 자리에서 번역해 말로 들려준다는 건 정말이지 너무 무리한 설정이라 생각했던 탓일까? 여하튼, 이렇게 해서 커뮤니케이션에 지연을 도입하는 시어(詩語)의 역량이 드러난다. 홍상수의 세계에 잠시 모습을 비춘 스마트폰 덕분에.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3)에서 하라사와 마을의 ‘심부름꾼(べんりや)’임을 자처하는 타쿠미는 하교 시간에 맞춰 외동딸인 하나를 데리러 가는 것을 깜빡하곤 한다. 그때마다 하나는 마을의 숲을 가로질러 혼자 귀가하곤 하는 것 같다. 대체 그는 학교 교사들에게 왜 미리 전화해두지 않는 것일까? 어느 날 하나가 실종되어 부랴부랴 찾아 나설 때도 그가 경찰서든 어디든 서둘러 전화해 알리는 모습 같은 것은 화면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 스마트폰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마을에 설립 예정인 글램핑장 설명회 차 도쿄에서 온 두 사람 중 하나인 마유즈미의 스마트폰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해 주기도 하고, 나중에 그들이 다시 마을로 찾아올 때 만날 장소의 위치를 그녀의 스마트폰으로 공유해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쿠미의 스마트폰은 결코 화면에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에서 스마트기기나 디지털 디스플레이가 화면에 보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그때마다 어김없이 부정성과 연관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마구치는 이것들을 좀 거북하게 느끼는 것 같다. 글램핑장 설립을 추진하는 플레이모드사(社)가 컨설턴트와 진행하는 치졸한 온라인 회의의 모니터 디스플레이, 이 회사의 두 직원인 마유즈미와 다카하시가 하라사와를 다시 찾을 때 자동차에 내비게이션용으로 거치해 둔 다카하시의 스마트폰에 뜨는 데이팅 앱의 알림(“축하드립니다! 모카 씨와의 매칭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을의 다혈질 청년이 플레이모드라는 회사가 어떤 곳인지를 검색해 저녁 식사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태블릿 PC의 디스플레이어 등등. 이런 것들을 다룰 때면 하마구치의 연출은 어색하고 불안정하다. 따라서, 긴 시간 동안 아무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일 없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객석에서 발언을 경청하고 있는 글램핑장 계획 설명회 장면만큼이나 하마구치의 영화적 세계가 어떤 부재 내지는 배제 위에 성립된 부자연스러운 세계인지 분명히 드러나는 곳도 없을 것이다. 그의 연출은 이런 상황에서 때로 비범한 힘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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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회나 회피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일까? 스마트폰을 자연스럽게 화면에 노출하면서도 그것을 다루는 몸짓을 단조롭지 않게 포착하고, 스마트폰 사용으로 인해 스크린에 나타날 가능성이 사라진 장소들을 어떻게든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이정홍의 장편 데뷔작 <괴인>(2023)에는 이 문제와 관련해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꺼내 들며, 이정홍은 종종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화면 자체를 스크린에 끌어들이기도 한다. 이런 부분의 연출에서 <괴인>에 유별나게 특이하거나 비범한 구석은 없다. 게다가 주인공 기홍이 방이나 벤치에 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릴 때면 어쩔 수 없이 몸짓의 마비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부자연스러운 장면에 속한다. 그런데 이 부자연스러움은 홍상수나 하마구치의 그것과는 다르다. 스마트폰의 부재가 아니라 존재로 인한 부자연스러움이기 때문이다.
기홍이 그의 자동차 지붕을 찌그러뜨린 하나와 함께 카센터에 들렀을 때 그가 정비사와 함께 흡연구역으로 가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 여기에는 의자가 두 개 놓여 있고 둘은 거기에 앉는다. 이때 하나가 흡연구역으로 들어온다. 정비사는 담배 피우실 거냐며 자리를 내주려 하는데 하나는 자기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면서 계단 쪽에 가서 앉는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는 이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이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담배도 피우지 않는 하나가 대체 왜 흡연구역으로 와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부자연스러운 설정을 통해 이정홍은 스마트폰이 담배와 유사하게 다룰 수 있는 영화적 사물일 수 있음을, 흡연구역이 그것의 영화적 장소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스마트폰을 다루는 몸짓은 대부분 담배를 피우는 몸짓과 교환가능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디서나 담배를 피울 수 있던 시절은 오래전에 지나갔지만, 스마트폰은 (적어도 아직은) 어디서나 만지작거릴 수 있으니까.
최근 국내 개봉된 영화들 가운데 스마트폰을 다루는 몸짓을 영화적으로 포착하는 문제와 관련해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미야케 쇼의 <와일드 투어>(2018)다. 이 영화는 스마트폰으로 찍은 영상을 직접 스크린에 수용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노라면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몸짓들도 피하지 않으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영화적으로 흥미롭게 재구성될 수 있을지 여러 사례들을 통해 보여준다. 그 가운데 하나를 떠올려보자. 문화센터의 바이오리서치 프로그램 조력자를 맡고 있는 남자 대학생이 중학생들과 산에 올라 답사하다가 혼자 스마트폰으로 주변을 촬영하고 있는데 나뭇가지에 버섯 같은 게 있다면서 다가와 앉는 여학생이 있다. 그러자 그는 그녀에게 지퍼백을 하나 꺼내 건네주고 그녀가 나뭇가지에서 버섯을 따는 동안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얼마 후 여학생은 그에게 여자친구랑 문자질하냐고 물어보고, 그는 아니라고 하면서 추위를 느끼는지 입으로 손을 후후 불며 또 스마트폰을 보고, 그의 이런 모습을 여학생이 슬쩍 바라보고… 이런 사소한 말과 몸짓들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 장면에선 가히 서부극적인 긴장감이 넘쳐난다.
이 긴장감이 실로 서부극적인 것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나중에 드러난다. 미야케는 짐짓 스마트폰이 스크린에 범람하는 것을 내버려 두는 척하면서 실은 스마트폰으로는 어쩐지 꺼림칙한 표현-커뮤니케이션의 순간을 찾아낸다. 그것은 바로 고백의 순간이다. 이 순간 스마트폰은 자취를 감춘다. 중학교 3학년인 타케가 그의 문화센터 프로그램 조력자인 대학생 우메에게 손편지를 써서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그녀는 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그리고 어색한 분위기를 털어내고자 뭔가 함께 마실 음료수를 사 오겠다고 말하며 타케의 왼쪽 팔을 살짝 만진 후에 자리를 떠난다. 그녀가 떠난 후 타케는 그녀가 만진 자리를 오른손으로 가볍게 만져 본다(사진 3).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야말로 기습적으로, 우리는 미야케가 여기서 존 포드의 무성영화 <단지 친구일 뿐(Just Pals)>(1920)의 한 장면을 영화의 제목과 더불어 은밀하게 불러내는 광경을 보게 된다. 이 영화에서 마을의 백수인 빔은 빌이라는 떠돌이 소년을 보살피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여교사 메리가 빔을 찾아와 빌을 학교에 보내라고 권유한다. 그녀는 빔의 왼쪽 팔을 살짝 만진 후에 자리를 떠난다. 그녀가 떠난 후 빔은 그녀가 만진 자리를 오른손으로 가볍게 만져 본다(사진 4).
언젠가 고백의 순간마저도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해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으로 대체되는 날이 올까? 아니면 그런 날은 이미 와 있는데도 나만 모르고 있는 것일까? 고백의 순간마저도 그렇게 대체된다면 아무리 미야케라 해도 그런 세계를 사는 스마트휴먼의 몸짓과 장소를 영화적으로 포착하기는 정말이지 어려울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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