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2017년 3월 1일 발간된 영상비평 전문지 『오큘로』 제4호에 '아메리칸 언더커런츠' 특집 글 가운데 하나로 실렸던 것이다.
촬영 현장의 조쉬 사프디(좌)와 베니 사프디(우)
누구라도 일단 사프디 형제의 영화를 보고나면, 선동적으로 들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우리 시대의 존 카사베츠!’라고 경박하게 외치고 싶은 충동이 들 것이다. 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망원렌즈에 포착된 연약하고 불안정한 몸짓들, 금방이라도 기화되어 사라져버릴 듯한 형상들, 이들 속에서 카사베츠의 ‘그림자들’이나 ‘얼굴들’의 잔영을 느끼지 못한다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다. 하지만 이런 첫인상은 피상적일 뿐이라는 것을 이내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를테면 사프디 형제를 동시대 미국 독립영화의 가장 중요한 이름으로 기억하게 만든 <아무도 모른다>의 스크린 위를 배회하는 것은 니콜라스 레이의 청춘들(<이유 없는 반항>)과 제리 샤츠버그의 헤로인 중독자들(<백색공포>) 사이 어디쯤에 있는 불안한 영혼들이다. (<아무도 모른다> 촬영 전 형제와 만난 샤츠버그는 “영화에 진짜 마약쟁이를 출연시켜선 안 된다.”고 충고해 주었다고 한다.) 한편 사프디 형제는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뉴욕 인디영화의 이름은 아벨 페라라라고 말한다. (페라라는 <키다리 아빠>에서 노상강도 역으로 카메오 출연하기도 했다.)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무척이나 섬세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실제의 현실과 관계 맺는 픽션의 양식을 가공하는 데 있어서는, 미국영화라는 영토를 벗어나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부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나 페드로 코스타 등의 미학과 공명한다고 여겨지는 부분도 적지 않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이곳과 저곳의 영화적 유산들을 하나의 평면에서(만) 사유할 수 있는 유리한 (동시에 불리한) 위치에 있음을 명확히 자각하며 작업하는 세대(미겔 고메스, 라야 마틴, 도미타 가츠야, 마티아스 피녜이로 등)에 속하는 이들 형제는, 노골적으로 미학적 전위에 서려 하기보다는 영화적 유산에 기대어 (뉴욕을 무대로 한) 거리영화라 부를 수 있을 법한 소(小)장르에 새로이 활력을 불어넣는 데 집중하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이 작은 야심의 결과는 무척이나 크다. 영화적으로는 진부해질 대로 진부해져버린 뉴욕이라는 도시가 이들의 영화에서는 진정 영화적인 도시, 아니 영화로서의 도시로 갱생하는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때 이들의 영화는 영향과 흔적이 아니라 전적인 공명을 통해 영화적 유산과 관계하며, 그럼으로써 그것을 팽창시킨다.
<키다리 아빠 Daddy Longlegs>(2009)
사프디 형제의 부모는 베니가 불과 생후 6개월이 되었을 때 이혼했는데, 이혼한 부모 밑에서 겪은 어린 시절의 경험은 이후 자전적 드라마인 <키다리 아빠>(2009)의 토대가 된다. 영화를 좋아하고 사진기와 비디오카메라로 일상을 기록하는 데 열광적이었던 아버지 ― 그는 300시간 분량의 영상기록을 남겼고 일부는 <키다리 아빠> 개봉 당시 공개되기도 했다. ― 덕택에 형제는 일찌감치 영화에 빠져들었고 고등학교 때 친구 알렉스 캘먼과 함께 ‘레드버킷(Red Bucket)’이라는 이름의 영화제작집단을 결성했다. 보스턴대학 시절 만난 샘 리센코, 브렛 주트키위츠, 재커리 트레이츠 등이 레드버킷에 합류했고, 2012년까지 영화뿐만 아니라 웹 프로젝트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영상물을 제작했다. (제작집단 레드버킷의 영상물은 비메오 사이트(vimeo.com/user7918188)에서 볼 수 있다.)
<도둑맞는 일의 즐거움 The Pleasure of Being Robbed>(2008)
이들의 장편 데뷔는 좀 기묘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2007년 여름, 케이트스페이드 핸드백의 홍보용 단편영화 제작을 의뢰받은 조쉬는 우여곡절 끝에 (케이트스페이드의 공동창업자인) 앤디 스페이드의 아이디어(도벽이 있는 여주인공에 관한 이야기)를 장편으로 확장시키는 기획에 착수한다. <도둑맞는 일의 즐거움>은 스페이드의 지원 하에 조쉬의 연출로 완성되었고, 베니의 단편 <외로운 존의 친구들>과 함께 2008년 칸영화제 감독주간 폐막작으로 상영되었다. 감정과 충동의 형상으로서의 인물들, 그러한 인물들이 생성하는 불규칙적 운동에 조응하는 삽화적 구성, 인물들을 둘러싼 공간에 비추어 그들을 포착하는 카메라, 배우들이 상대적으로 카메라를 덜 의식하며 연기하게끔 하기 위한 망원렌즈의 사용 등 사프디 형제의 영화적 특성은 이미 여기서부터 뚜렷했지만, 이를 보다 밀고 나간 것은 이듬해에 발표한 <키다리 아빠>라고 해야 할 것이다. (2009년 칸영화제 상영 당시 제목은 ‘Go Get Some Rosemary’였지만 나중에 ‘Daddy Longlegs’라는 지금의 제목으로 바뀌었다. 프랑스에서는 ‘Lenny and the Kids’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프라운랜드>(2007)의 감독인 로널드 브론스타인이 2주간 아이들을 맡아 돌보면서 생활이 점점 엉망이 되어가는 이혼남 레니 역을 맡고 각본 및 편집에도 참여한 이 영화에서, 사프디 형제의 유년의 경험과 브론스타인의 실제 삶은 영화적 소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영화라는 상상적 몸의 연장처럼 되어버린다.
<아무도 모른다 Heaven Knows What>(2014)
뉴욕 거리를 배회하는 마약중독자들의 삶 속으로 파고든 <아무도 모른다>는 사프디 형제가 지하철 승강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리엘 홈즈라는 여성의 실제 경험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그 자신 마약중독자였던 홈즈가 형제의 권유로 쓴 자전적 기록물인 『뉴욕의 미친 사랑』을 토대로 (제리 샤츠버그의 충고를 무시하고) 홈즈 자신과 실제 마약중독자들을 출연시켜 만들었다. “이야기라기보다는 난투극이며, 소리치거나, 무언가를 궁리하거나, 사랑이나 약이나 무망한 이해를 애타게 찾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장면들의 모음”(숀 로저스)으로 여겨질 만큼, 여기서 마약중독자들은 사회적, 윤리적 문제로서가 아니라 감정과 충동의 형식으로서의 영화에 더할 나위 없이 조응하는 형상으로 비치고 있다. 이 영화는 2014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첫 공개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아리엘 홈즈는 이후 안드레아 아놀드의 <아메리칸 허니>(2016)에 출연하는 등 배우로서의 경력을 이어가고 있다.
2014년 사프디 형제는 세바스천 베어-맥클라드, 오스카 보이슨과 함께 독립영화스튜디오인 엘라라픽처스(Elara Pictures)를 설립했고, 2017년 현재 로버트 패틴슨 주연의 신작 <굿 타임>을 제작 중이다. (엘라라픽처스 홈페이지(www.elarapictures.com)에서는 선댄스영화제 단편부문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사프디 형제의 <검은 풍선>(2012) 등의 단편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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