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란 무엇입니까?
한때 편지는 띄워 보내는 것이었고 때로 던지는 것이기도(投書) 했지만, 이제는 대부분 누르는―'SEND'라고 쓰여진 버튼이라 불리는 아이콘을―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누르는 편지에는 당장 답신하지 않으면 휴대폰 화면 위에 금새 "메일 보냈는데 읽으셨어요? 살펴보시고 가능한 빠른 회신 부탁드립니다"라는 SMS가 뜨는 것이다. 이런 메시지를 받고 나면 SMS란 'Save My Soul'의 약자라는 고다르의 농담이 생각난다. 하지만 결국, 이내 나도 누른다.
지난여름, 문득 편지 같은 것을 띄워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보내고 나면 한참의 시간이 걸린 후에야 수신인에게 도착하는 그런 편지를. 작년 말 런던에 방문했을 때 공항을 오고가다 알게 된 OOO―이 분이 누구인지는 글에 쓰여 있다―에게. 《보스토크》에 정기적으로 쓰는 칼럼 지면을 이 편지를 띄우는 용도로 잠시 빌려 써서.
코로나19로 사람과 사물이 국경을 넘어 오가는 것이 예전 같지 않으므로 이 편지가 언젠가 OOO에게 우연히 닿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보스토크》가 발간되고 일주일이 채 안되어 OOO에게서 연락이 왔다. (몇 년째 글을 쓰면서도 나는 《보스토크》라는 잡지가 이 정도로 읽히는 줄 몰랐던―김현호 발행인과 박지수 편집장님 및 편집동인 분들께 참으로 민망합니다―것이다.) 알고 보니 OOO는 코로나19 확산으로 고민하다 오랜 영국생활과 그곳에서의 사업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와 있었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식사를 하고, 각자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이제는 친구가 되었다.
(※ 아래 글은 사진잡지 《보스토크》 제22호(2020년 7/8월호)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이곳─그렇다, 이 잡지는 하나의 장소이다─에 글을 쓰면서 잡지가 나올 무렵 갓 개봉해 시중의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를 다룬 적은 없다. 그렇게 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구태여 하나하나 밝힐 필요까지야 없겠다. 아무래도 영화 전문지가 아닌 사진 전문지에 2개월에 한 번씩 실리는 글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시의성을 살려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에 집착하기보다는 이 칼럼을 읽고 나서 DVD나 블루레이,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나 IPTV 등을 이용해 찾아볼 수 있는 과거와 현재의 영화들 가운데 글감을 고르곤 했다. 말하자면 이 장소는 영화계에서 진행 중인 최신의 흐름과 경향을 부지런히 따라잡아야 한다는 의무로부터 나를 간단히 면제시켜 주는 곳─문자 그대로 ‘duty-free’─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오래 이어질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고 한동안 극장에서도 이렇다 할 신작 영화가 개봉되지 않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글감을 찾아 쓰는 일을 망설이게 되었다. 요즈음 영화 관람은 어차피 대부분 집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이를 위한 추천작 가이드도 여기저기 넘쳐나는 마당에 굳이 거기에 하나 더 보탤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런 시기에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열없는 주제는 단연 ‘팬데믹 시대의 이미지’ 같은 것이겠지만, 한편으론 이런 주제를 굳이 피해서 말한다는 것도 어색하게 느껴진다.
사실 우리가 무언가의 특성을 가장 잘 깨닫게 되는 것은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다. 어떤 장치나 제도의 오작동이나 기능 부전은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구성 요소들 가운데 어떤 것이 필수적이고 어떤 것이 부수적인지를 살피게 만든다. 예컨대,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올해 취소된 칸영화제는 초청작 목록만을 정리해 공식 발표했는데, 이로써 필수적 요소만 두고 보면 칸영화제의 기능과 역할이 소고기 등급 시스템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진실을 지나치게 솔직하게 밝혀 버렸다. 여하간 창작자에게나 관람자에게나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영화에 접근하는 일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은 지금과 같은 시기야말로, 우리가 영화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어떤 장치나 제도인지를 재고해 보기에 적기일 수도 있다.
보통 우리가 영화라고 하면 떠올리는 것은, 카메라로 사람이나 사물이나 풍경을 촬영하고, 마이크로 소리를 녹음하고, 이렇게 해서 얻은 것들을 재료로 해서 일정 시간 동안 영사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그것을 여럿이 한자리에 모여 관람하거나 홀로 감상하는 일이다. 그런데 정말 영화라는 것은 카메라, 마이크, 영사 및 재생 장치, 스크린이나 모니터, 영화관 같은 요소들의 총합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일까? 파블레 레비 같은 이는 2012년에 내놓은 ‘Cinema by Other Means’라는 제목의 책에서 다양한 역사적 사례들을 검토하며 다른 방식의 영화 혹은 다른 수단을 통한 영화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도 했다.
여느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지난 몇 달 동안 주로 집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문득 그동안 영화의 주변에서 배회하다 마주치곤 했던 다른 방식의 영화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보게 되었다. 어쩌면 선뜻 영화라 부르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화들과 다를 바 없이 영화의 가능성에 맞닿아 있는 그런 것들, 하지만 이름 붙이기 힘든 무엇들. 그러고 보니 영화 보기란 조용히 앉아서 기억 흔적을 다시 더듬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나의 기억은 아니라 해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모종의 기대와 흥분을 품고 환대할 수 있을지도.
십여 년 전, 필리핀에서 열리는 시네마닐라영화제의 심사위원을 맡게 되어 마닐라를 방문했을 때다. 나와는 다른 부문의 심사를 맡은 젊은 태국 영화평론가와 점심을 함께 먹고 거리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는 거리를 걷다가도 그림엽서를 파는 작은 상점들이 나타나면 그때마다 엽서를 한두 장씩 사서 가방에 넣고는 했다. 정말 의아하게 보인 것은 그가 엽서를 고르는 태도였다. 그의 몸짓은 무언가 맘에 드는 엽서를 찾고 있다기보다는 매대를 단숨에 쓱 훑어보고는 곧바로 눈에 들어오는 엽서를 잽싸게 집어 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수집가보다는 오히려 배달원의 몸짓처럼 보였다. 분명 그는 엽서를 사 모으는 중이었는데도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서 그런 인상을 받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한참 거리를 걷다가 우체국이 나타나자 그는 잠깐 들러 가자며 양해를 구했다. 우체국에 들어가서 그는 조금 전까지 사 모은 그림엽서들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 작은 수첩을 꺼내어 거기 적혀 있는 주소들을 엽서에 빠르게 옮겨 적기 시작했다. 물론 간단한 안부 인사를 적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떤 이들에게 보내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방콕에 있는 친한 친구들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이틀 후면 자기는 방콕으로 돌아갈 터이고 이내 친구들을 만나게 되겠지만 엽서는 제법 시간이 지난 후에 친구들에게 도착할 것이라면서, 자신을 들뜨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시차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곤 갖고 있던 엽서 가운데 두 장을 내게 주면서 귀국하면 곧 만나게 될 한국의 친구들에게 보내보라고 권유했다.
그와는 달리 당시 내게는 지인들의 주소를 적은 수첩 같은 것이 없었다. 마땅히 엽서를 보낼 곳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가 준 엽서들을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았고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하나에는 120여 년 전 필리핀 어부의 모습이 담긴 흑백 사진이, 다른 하나에는 필리핀의 대중교통 수단 중 하나인 지프니 위에 올라탄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컬러 사진이 있다. 엽서 하단에 조그맣게 적힌 정보를 보고 이제야 알게 된 것인데 원래 컬러 사진이 아니라 흑백 사진에 수작업으로 색을 입힌 것이다. ‘King of the Road’라는 제목의 전시에서 필립 지라르도가 선보인 사진이라 한다.
십여 년 전이라고는 하지만, 여행 중에 그림엽서를 사서 지인들에게 보내는 취미는 이미 그때도 꽤 예스럽게 비치는 것이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도 조만간 그렇게 비치게 될까?) 그런데 시차를 그 존재 조건으로 하는 인상주의적 편지라고 해도 좋을 엽서를 고르고 보내는 과정에서, 그 젊은 평론가는 영화 비슷한 무언가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가 엽서를 고르고 보내는 과정을 다시 떠올려 본다. 주의 깊게 고르기보다는 순간적인 감흥에 따라 자못 무심하게, 다만 신속하게 엽서를 집어 드는 그의 몸짓은 스냅 사진을 찍는 이의 그것과 닮아 보인다. 영화는 분명 사진과 함께 이러한 인상주의적 역량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사진과 마찬가지로 현상이라고 하는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했던 까닭에, 이미지의 포착과 이미지의 감상 사이에 시차가 생기는 일을 피할 수 없었다. 뷰파인더와 디스플레이가 일체화되어 시차를 소거해 버리는 기기를 흔히 찾아볼 수 있게 된 지금에도, ‘라이브 시네마’ 같은 용어가 내겐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작년 11월에 영국에서 겪은 일이다. 나는 런던한국영화제의 초청을 받아 영국 관객들을 대상으로 1980년대의 한국독립영화에 관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아내와 함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해서 휴대 전화를 확인해 보니 김신욱 작가라는 분─이 잡지의 성실한 독자라면 내가 작가의 이름 뒤에 ‘라는’을 덧붙인 것을 보고 분명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이 픽업 나오실 거라는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마침 공항 주변의 교통이 원활하지 않아 조금 늦게 도착하기는 했지만, 우리는 결국 약속한 곳에서 그를 만나 픽업 차량을 타고 숙소로 향했다.
공항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로 접어들 무렵, 운전 중인 그에게 “작가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어떤 작업을 하시는지요?”라고 물었다. (성실한 독자라면 이쯤에서 폭소를 터뜨릴 것이다.) 의례적인 물음이라 생각했던지 그는 사진 작업을 하고 있다고 짧게 대답했다. 이런 유의 대화는 대개 이쯤에서 “아, 그렇군요”라는 말과 함께 점점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의 질문은 계속되었고 다행히도 그의 답변 또한 점점 상세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에서 예술대학을 졸업한 후에 사진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영국에 왔다. 어쩌다 보니 여행객들을 픽업해 차량으로 공항과 시내를 오가는 일을 주업에 가까운 부업으로 삼게 되어버렸는데 이게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간다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런던과 히드로 공항을 오간 것만 3,000번이 넘는다고도 했다.
조금씩 대화에 흥이 오르면서 그는 자신의 사진 작업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들려주기 시작했다. 빈번히 공항을 오가다 보니 공항 주변의 장소들과 그곳의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두게 되었고 이는 결국 사진 작업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특히, 공항 주변에서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광경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취미를 지닌 덕후들을 지칭하는 플레인 스포터들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그는 공항 작업의 결과물로 최근에 한국에서 두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면서 전시를 준비하며 만든 소책자 하나와 전시 리플릿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Unnamed Land: Air Port City’라는 제목으로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공개한 몇몇 사진들이 《보스토크》라는 사진 잡지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면서 말이다.
“《보스토크》요?”
“네, 사진 잡지인데, 혹시 아세요?”
그러니까, 잡지라는 장소는 이런 것이다. 김신욱 작가의 공항 연작 사진들은 이 잡지 9호를 통해 소개되었다. 나는 그때 이 칼럼에서 구로사와 기요시가 2016년에 발표한, 그다지 관심을 끌지는 못한 공포영화 한 편을 두고 ‘식물성의 유혹’에 대해 썼다. 하지만 우리는 공항을 통과해가는 여행객들처럼 서로에 대해 몰랐고, 서로의 작품과 글에 대해 알지 못했다. 심지어 우리 둘은 14호에서 다시 한번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잡지를 만드는 편집진의 입장에서는 뭐 이런 불량한 작자들이 다 있는가 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 법도 하다.
김신욱 작가에게서 받은 전시 소책자에는 이영준 선생이 공항비평가라는 직함으로 쓴 글─제목은 이영준 선생다운 심술과 솔직함이 드러나는 ‘기껏 영국까지 가서 공항 주변만 맴돌다 왔다’이다─이 실려 있다. 나는 이 글을 읽다가 과거의 김포공항에는 송영대라는 게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는 계류장과 활주로를 향해 열려 있는 공항 2층의 야외 발코니로, 배웅하는 이들이 비행기가 떠나는 광경을 볼 수 있게끔 배려한 유료 시설이었다. 아하! 그동안 한국에서 종종 환송대라고 번역해 온, 크리스 마커가 만든 단편영화에 나오는 공항의 ‘la jetée’도 바로 이런 것이었겠구나. 생김새만 놓고 보면, 말 그대로 발코니인 김포공항의 송영대와 방파제 형태를 띤 오를리공항의 그것은 전혀 다르지만 말이다. 여하간 그저 배웅하고 보내는 곳이라는 뜻만 지닌 환송대보다는 그런 뜻과 더불어 맞이하는 곳이라는 뜻도 함께 지닌 송영대 쪽이 훨씬 멋스럽게 들린다.
오늘날엔 전 세계 어느 곳의 공항에도 송영대 같은 시설은 없다. 가족이나 지인 들이 해외로 떠나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어서일까? 배웅이나 마중을 나간다손 쳐도 기껏해야 공항 내 출국장이나 입국장을 들르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주말이면 공항 인근의 언덕이나 풀밭에 가서 자리를 잡고,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들이 타고 있을 오고 가는 비행기들을 하염 없이 바라보고 기록하고 사진을 찍는 스포터들이 있다. 이들을 송영꾼이라 불러도 좋겠다. 김신욱 작가의 몇몇 공항 사진들에는 이런 송영꾼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들은 일정한 주기를 두고 모종의 움직임이 반복적으로 펼쳐지는 허공에, 그 이름 없는 장소에 매혹된 이들이다. 스크린 또한 이러한 장소이다. 이름 없는 공항이나 영화관은 있을 수 없겠지만, 허공이나 스크린에 이름을 붙인다면 우스꽝스러운 일이리라. 이러한 장소에 오롯이 매혹되기 위해서는 거기서 오고 가는 무언가를 본다는 행위 자체의 완벽한 무용성을, 그 쓸모없음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기 위해 히드로 공항으로 향할 때도 김신욱 작가가 아내와 나를 데려다주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들은 바에 따르면, 최근에 그는 괴물이 나타난다는 소문으로 유명한 네스 호 인근에서 사진 작업을 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전시를 열 예정이라고 했다. 서울에서도 전시를 열 계획이라 준비를 위해 2020년 초에 한국에 들어올 예정이라 했다. 우리는 서울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했고 그는 그러마고 약속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일정이 조정되었는지 여태까지 전시가 열렸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고, 그 이후로 연락을 주고받은 일도 없다.
연락하라는 것은 빈말이 아니었어요, 라는 말은 어떻게 해야 빈말이 아닐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본 끝에, 오래 전 젊은 태국 평론가에게 받은 두 장의 엽서를 꺼내고, 이것들을 김신욱 작가에게 받은 전시 소책자 표지 위에 얹어 스캔하고, 엽서에 적기에는 조금 길다 싶은 편지 비슷한 글을 써서, 이렇게 태연자약하게 《보스토크》에 실어 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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