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계간 《현대비평》 제3호(2020년 여름호 / 2020.6.30 발행)에 수록되었던 글이다.
홍상수의 22번째 장편영화 <풀잎들>을 통해 (한국영화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영화라는 문제에 대해 논한다고 하면 의아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그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처럼 한국영화의 감수성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작품도 아니고, 결코 합치될 수 없는 복수의 계열로 구성된 플롯이 전면화된 <옥희의 영화>나 배우이자 연인인 김민희와 처음으로 작업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처럼 그의 경력에서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꼽을 만한 작품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기적이라 할 어떤 특성도 없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풀잎들>은 한국영화를 가능케 하는 익숙한 조건들 자체를 돌연 낯선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홍상수 영화의 역학을 맑고 선명하게 드러내는 영화가 될 수 있었다.
최근에 국내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이창동의 <버닝>이나 봉준호의 <기생충>을 떠올려보자. 하나는 불을 예고하는 건조한 겨울의 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물로 넘쳐나는 습한 여름의 영화이다. 겨울과 여름이라는 계절은 홍상수에게도 낯선 계절이 아니며, 심지어 그의 작품 경력 전체를 이들 계절에 따라 두 개의 계열로 나누어 고려하는 것도 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홍상수에게 낯선 것은 이창동과 봉준호가 무람없이 끌어들이고 있는 방화와 장마라고 하는 불과 물의 과잉이지 겨울과 여름이라는 계절 자체가 아니다. 이유인즉, 이러한 과잉은 필시 과도하게 의미화된 무(無)로서의 상징을 불러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사물들에 반사되어 비치는 먼 곳의 불(햇빛)을, 겨울에는 지상의 사물들을 슬며시 가리거나 허공에 흩날리는 얼어붙은 물(눈)을 카메라에 담는 것으로 충분하다. 거기에 소박하고 희박한 또 다른 불(담배)과 물(술)을 곁들이면 된다.
홍상수의 흑백영화들―<오! 수정>, <북촌방향>, <그 후>, <강변호텔>―이 하나같이 겨울 영화들이었음을 떠올려보면, 2017년 9월에 촬영된 가을 영화인 <풀잎들>의 흑백 화면은 이례적인 감이 없지 않다. 이유영과 김명수가 등장하는 장면이 추가 촬영된 것을 제외하면, 출연진의 수보다 훨씬 적은 다섯 명의 스태프와 함께 단 3일 만에 찍었다고 하는 사실 또한 최근 홍상수의 빠른 작업 속도를 고려한다 해도 놀랍게 다가온다. 물론 영화의 무대가 되는 장소가 몇몇 골목길을 제외하면 단 세 곳의 실내 공간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 작업 기간을 줄이는 데 도움은 되었을 것이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2번 출구 사이의 북쪽 구역에 자리한 카페 이드라, 삼선차, 그리고 안암골이라는 카페와 식당 들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장 주요한 장소는 카페 이드라이다. 극 중에서 김민희의 동생 역을 맡은 신석호가 “어떻게 이렇게 골목 안에 있는 커피집을 알았어?”라고 의아해하며 “아무도 안 올 것 같은데”라고 말하듯, 실제로 이곳은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윤보선길을 따라 북쪽으로 걷다가 오른쪽에 난 작은 길로 일부러 눈길을 돌리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카페다.[1] 카페의 방문객들과 함께 마실 술을 사기 위해 김새벽이 들렀다고 말하는 가게 또한 실제로 카페로 들어오는 골목 바로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가 하면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서 정진영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가 누군가를 만나러 다녀온다고 말하는 “요 근처”는 실제로 카페 이드라 근처에 있는 삼선차라는 곳이다.
이렇게 구구절절 카페 이드라의 위치와 주변에 대해 기술한 것은, <풀잎들>을 비롯한 홍상수의 영화가 구체적인 어느 장소로부터 출발하는 것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홍상수는 종종 자신의 영화가 장소와 배우로부터 출발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것은 그다지 별난 것은 없는 장소이되 여하간 다른 곳(어느 카페)이 아닌 바로 이곳(카페 이드라)이고, 이곳이 아닌 그곳이나 저곳이 선택되는 경우에는 전적으로 다른 영화가 생성될 수도 있는 그런 곳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자체로, 혹은 무언가 다른 것과 관련해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 장소이다. 이렇게 보면 북한으로부터의 대남 방송이 들려오는 파주의 황량한 외곽(<버닝>)이나 성북동과 후암동과 북아현동 등의 풍경을 조합해 ‘한국적’ 공간의 특성을 허구적으로 강화한 기묘한 경로(<기생충>)는 홍상수의 영화가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무겁거나 거대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홍상수의 장소를 그 안이나 위에서 영화적 유희가 펼쳐지는 의미의 진공이나 무의미의 표면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여도 곤란하다. 그의 장소는 선재적이거나 맥락적인 의미가 없을 뿐이지 언제나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 자체가 생성되는 코라(chora)로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홍상수의 영화는 당대 한국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풍경에 대한 직접적이거나 상징적인 발언이 결코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의 장소성 자체에 대한 날카로운 심문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심문’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홍상수가 한국영화라는 문제에,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들 가운데 하나로서의 영화적 장소를 성립시키는 문제에 실제로 관심을 두고 있는 작가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그런 문제는 아예 그의 안중에 없을 것이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장-뤽 고다르에 관한 극히 도발적인 작가론 「파국적 슬로모션」에서 정작 고다르 자신은 고다르적인 문제(혹은 ‘고다르 현상’)를 문제로서 지니고 있지 않으며 그것을 하나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그의 영화를 대하는 우리들이라는 주장을 펼친 적이 있다. 이는 고다르의 영화를 당대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풍경과 관련지어 해석해버리는 상투적 독해들에 대한 우회적 항의가 담긴 의미심장한 주장이지만, 고다르를 이러한 풍경으로부터 그처럼 초월해 있는 인물로(만) 간주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외견상 그와 전연 성격을 달리하는 작가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홍상수야말로 하스미가 그리고 있는 문제적 작가의 유형에 훨씬 가까워 보인다.
홍상수의 영화는, 그리고 무엇보다 <풀잎들>은, 여러 한국영화에서 별다른 반성 없이 수행되는 장소의 미장센과 몽타주―장소 내부에서, 그리고 장소와 장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의 자명성을 미심쩍은 것으로 보이게 한다. 군데군데 전통적인 가옥 형태가 남아 있는 북촌 인근에 자리한, 딱히 지역색을 특정하기 힘든 이드라라는 카페는 미장센을 고려하고 다른 장소와 몽타주 되기에 앞서 우선 그곳 자체의 특성을 가늠해보아야 하는 일종의 모나드처럼 제시된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결코 서로를 이름으로는 부르지 않고 대명사로만 부르는 익명의 남녀들이 제각각 짝을 이루어 카페 안팎에서 대화를 나눈다.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승희라는 죽은 여자의 이름 뿐이다.[2] 기이하게도 남자들의 직업은 모두 배우이다. 각각의 짝들이 각각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김민희는 이들의 대화를 카페 한구석에서 엿듣거나 엿보며 노트북에 무언가를 쓴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는 이들에 대한 상상이 덧붙여진 논평이 이따금 김민희의 보이스오버로 들려온다. 이때 카메라는 카페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남녀들은 벽면을 배경으로(그림 1과 그림 2), 카페 밖 테이블에서 대화를 나누는 남녀는 반사로 인해 내부가 보이지 않는 창을 배경으로(그림 3) 포착하고 있어, 분명 다들 지척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짝은 서로 어떤 상호작용도 없이 나름의 구역만을 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카페의 안과 밖을 조망할 수 있는 구석 자리에 앉아, 이들을 바라보거나 다른 구역의 인물과 잠깐이나마 말을 섞게 되기도 하고, 커트 없는 재프레임화(reframing)을 통해 이들과 가까이에 있음이 시각적으로 분명히 제시되는 이는 김민희 뿐이다(그림 4). 이로 인해 그녀는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어떤 쇼트나 장면의 바깥, 즉 외화면영역의 존재론으로 우리를 이끄는 매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 시퀀스를 이루는 이상의 쇼트들만으로는 좀처럼 카페 이드라라는 공간이 전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인물들의 말과 시선을 통해 지시되기만 할 뿐 한 번도 보이지 않는 카페의 주방 공간과 주인의 모습―반면, 카페 이드라와 대칭을 이루는 안암골 시퀀스에서는 식당의 주방 공간과 주인의 모습이 분명하게 제시된다―은 강력하게 결여 내지는 결핍의 느낌을 전달한다.
영화적 장소는 외화면영역에 대한 믿음 없이는 결코 구축될 수 없다. 단순한 예를 들자면, 어떤 인물의 얼굴이 담긴 쇼트 다음에 이어지는 풍경 쇼트가 그 ‘인물이 바라보는 풍경’으로 의미화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쇼트가 시간적으로 동시적이며 공간적으로 연장적이라는 허구적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물론 역사적으로 이러한 의미화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기법 내지는 문법의 문제로 치환되어 버린 것이 사실이다. 새삼스럽게도 <풀잎들>은 이처럼 문법으로 치환된 믿음이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다. 이러한 근본문제가 풀리지 않는 이상 영화적 장소라는 것은 실제로는 펜로즈의 계단(Penrose Stairs)일 뿐이지만 짐짓 상승과 하강의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순환적인 정신적 구조물이 될 수밖에 없다. 정진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카페 이드라를 잠시 벗어나 근처(삼선차)에 누군가를 만나러 갔던 김새벽이, 약속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 지인을 기다리다 찻집의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을 거듭해서 오르내리는 모습(그림 5)을 보자. 이는 계단이 하나의 영화적 무대가 될 수 있을지를 가늠해보기 위해 일단 거기에 덧씌워진 온갖 상징을 남김없이 소거해 버리고자 하는 강박적 몸짓처럼 비치기도 한다. 홍상수는 담배와 술, 그리고 이것들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소소한 대화를 통해 불과 물과 공기(분위기)를 영화적 원소로 변용하는 데 있어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어려움을 겪는 것은 우리이며 이는 특히 장소와 관련해서 그러하다. 그가 언제나 구체적 장소들로부터 출발하는 영화들을 찍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장소들을 이루는 원소가 여느 한국영화의 장소들을 지탱하는 대지를 이룰 수 있느냐 하는 물음 앞에서 우리는 망설이게 된다. 게다가 <밤과 낮>, <밤의 해변에서 혼자>, 그리고 <클레어의 카메라> 같은 영화에서 그의 (캐릭터라기보다는) 배우들이 이국의 장소들을 배회하는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물감 없이 비칠 때 이 망설임은 의혹으로까지 향하게 된다.
홍상수의 영화를 통해 미심쩍은 무엇으로 비치게 되는 건 한국영화의 장소들만이 아니다. 영화적 이미지에 상상적으로 기입된 주어/주체의 자리 또한 그러하다. 주인공을 모든 영화적 이미지의 주체로 호명하는 한편 영화적 ‘자기(ego)’라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는 오늘날의 무수한 한국영화들을 떠올려 보라. 주어라는 문법적 요소를 지닌 언어와는 달리 본질적으로 비인칭적/무인칭적이라 할 수 있는 영화적 기호는 특정한 앵글, 지속시간, 카메라의 움직임 및 쇼트의 병치를 통해 화면상의 인물을 주체로 (여겨지게끔) 자리매김하곤 한다. 이 인물은 무엇보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프레임의 바깥을 보고 또 바깥으로 이동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이러한 보기와 움직임을 실제로 수행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수행할 가능성과 능력이 있는 존재여야 한다. 이상의 내용을 고려해보면, 영화와는 달리 사진은 그 기호에 주어/주체의 인상을 부여할 수 없는 매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점에서만큼은 사진이 영화보다 덜 기만적이라 해도 좋겠다. 홍상수의 영화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문제는, 달리 말하자면, 오늘날의 한국영화에서 과도하게 주체화된 영화적 이미지가 사진적 이미지의 엄정한 비인칭성/무인칭성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적지 않은 그의 영화에서 사진이나 사진 찍기의 몸짓이 예기치 못한 순간에 돌출하곤 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풀잎들>은 글쓰기의 내면성을 통해 강화되는 언어적 주체와 같은 존재가 영화적 기호에 스며드는 것에 집요하게 저항한다. 보이스오버로 들려오는 김민희의 글은 그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의 외면적인 말과 행위 위에서 미끄러진다. 홍상수의 영화를 두고 비난하는 이들이 상투적으로 내뱉곤 하는 “매번 자기 얘기만 한다”는 말은 피상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의 영화에서 자전적인 요소들은 특정한 장소에 있는 특정한 배우들을 허구와 사실이 교차하는 가운데 진동시켜 몸짓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일 뿐 어떠한 영화적 주어/주체의 생성에도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홍상수의 영화는 우디 앨런의 영화와는 다르며 심지어 이들 간에는 일말의 닮은 구석도 없다.
<풀잎들>의 결말부에서, 우리는 식당 안암골 시퀀스에 등장했던 이유영과 김명수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을 한꺼번에 보게 된다. (이유영과 김명수의 대화 장면은 추가로 촬영된 것임을 고려하면, <풀잎들>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든 등장인물을 한 장소에 모으는 것이 원래의 의도였으리라 추정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어느덧 밤이 되었다. 그동안 몇몇은 머리를 식히거나 누군가를 만나거나 식사를 하러 잠시 다른 곳에, 그러니까 바깥에 다녀오기도 했다. 물론 <풀잎들>에서 카페 이드라의 바깥 가운데 가장 기묘하게 느껴지는 공간은 카페 입구 왼쪽으로 이어져 있는 골목일 것이다. 실제로는 막다른 골목인 이곳으로, 낮에는 안재홍이, 밤에는 김새벽과 정진영이 향한다(그림 6). 낮에는 서로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각자 다른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서영화와 기주봉, 김새벽과 정진영은 밤이 되자 합석해 카페 앞 가게에서 사 온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낮에는 카페의 다른 구역에 전혀 시선을 돌리지 않던 공민정과 안재홍이 이 광경을 보고 있다(그림 7). 김민희는 소주를 마시는 무리로부터 합석을 권유받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가 안재홍과 잠깐 대화를 나누게 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구역들의 경계는 무너지고, 바깥과 관련해 조금씩 다른 기억과 경험을 지닌 이들이 미미하게 상호작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끝내 카페 이드라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여전히 거기 모여서 말이다. 미장센과 몽타주를 통한 장소의 구축 가능성은 다시 유예된다. 그렇다면 주체는 어떠한가? 잠시 담배를 피우러 나온 김민희, 안재홍, 그리고 정진영은 시차를 두고 차례로 같은 자리에 서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프레임의 오른쪽 바깥을 바라본다. 거기서는 낮에 어느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던 자리에서 안선영과 신석호가 한복을 입고 자리를 바꿔 가며 서로의 사진을 찍어 주고 있다. 연인들을 바라보는 자리의 주체는 계속해서 바뀌고, 그들이 보고 있는 연인들 또한 번갈아 자리를 바꾸어 카메라를 든다. <풀잎들>은 실제로 존재하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처럼 비치기까지 하는 카페 이드라라는 장소의 내부와 그 왼쪽의 골목을 포착한 세 장의 사진(그림 8)과 함께 끝난다. 이미지에 결코 주어/주체의 자리를 용납하지 않는 사진에 고스란히 자신의 장소를 의탁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은 이곳으로 들어오는 골목과 다른 곳으로 향하는 골목이다.
주
[1] 카페 이드라 인근의 풍경과 내부의 모습은 유튜브 영상(www.youtube.com/watch?v=qdiizBkgyZo)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이 영상은 2014년에 촬영된 것인데 유심히 보면 <풀잎들>에서 김민희가 앉아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던 자리에 영화평론가 허문영 선생이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이 카페를 찾은 것은 2018년 가을에 <풀잎들>이 개봉한 이후였는데 당시에도 허문영 선생이 같은 자리에 앉아 글을 쓰고 계셨다. 그 이후로 나는 이 영화의 보이지 않는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분이라는 생각을 떨쳐내기 힘들다.
[2] 카페 이드라는 죽은 자만이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장소처럼 보인다. <풀잎들>에서 이곳과 완벽히 대칭을 이루는 장소는 김민희가 동생과 동생의 애인과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식당인 안암골이다. 여기서 그녀는 그들을 ‘진호’와 ‘연주’라고 하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들이 식사하는 동안 옆에서는 이유영과 김명수가 낮술을 기울이고 있는데, 그들 또한 서로를 ‘순영’과 ‘재명’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들은 자살한 지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이 죽은 자는 ‘김교수’라고 불릴 뿐이어서 이름은 알 수 없다. 한편, 각각 호명의 금지와 허용으로 구분되는 장소의 모나드들인 카페 이드라와 안암골을 오가며 매개하는 인물인 김민희의 이름은 여기서도 불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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