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10월 31일에 보스토크프레스에서 출간된 『식물성의 유혹: 사진 들린 영화』는 『유령과 파수꾼들: 영화의 가장자리에서 본 풍경』(미디어버스, 2018),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보스토크프레스, 2021)에 이은 나의 세 번째 책이다. 아래는 이 책의 서문이다.
사진과 영화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믿던 야만적 즐거움의 시대가 있었다. 영화는 초당 24장의 사진을 스크린에 영사하는 매체로 간주되던 시절의 이야기다. 영화를 구성하는 이런 사진들을 프레임이라고 부르곤 했다. 오늘날 영상 매체를 다루는 이들도 프레임이라든지 FPS(초당 프레임 수) 같은 용어들을 여전히 쓰고는 있지만 약간의 기술적 이해만 있으면 이런 용어들이 더는 예전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다. 이 용어들이 가리키던 대상이나 과정은 사라졌음에도 어쨌거나 용어들이 남아 있어 사라짐이 은폐되는 것이다. 우리는 화폐라는 말을 여전히 쓰고 있지만 오늘날의 화폐는 조개(貨)나 비단(幣)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심지어 이 말이 조개와 비단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도 거의 없다. 물론 이런 완벽한 사라짐이야말로 기원의 자리에 걸맞은 것이다.
다른 의미에서, 사진과 영화는 이제 화폐와 동일한 기반에 놓이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픽셀 또는 비트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개념)을 과연 ‘기반’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물질적・기술적 기반에 대한 고찰만으로 사진과 영화의 관계를 다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그런 고찰에서 나오는 것은 빈약하기 짝이 없는 시시한 결론들밖에는 없을 터다. 영화가 초당 24장의 사진으로 구성되건, 사진이나 영화가 모두 픽셀과 비트의 조합물이건, 이는 우리가 사진과 영화를 실제로 지각하는 경험적 차원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이는 조개에 관한 과학적 연구가 고대의 화폐 문화를 이해하는 일에, 픽셀과 비트에 관한 수학적・공학적 연구가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일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베르그송의 통찰을 나름대로 빌려 말하자면, 사진과 영화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지극히 물질적이지만, 어디까지나 ‘사물’과 ‘표상’ 사이에 있는 존재로서의 이미지라는 점에서 그렇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는 그것을 종이, 필름, 스크린, 모니터 등의 물질적 ‘기반’으로 환원하려 들면 돌연 정신적 차원을 드러내고, 그것을 정신적 실체로 환원하려 들면 엄연한 물질적 현존으로 저항하곤 한다. 사진과 영화의 관계를 묻는다는 것은 이처럼 이중적인 특성을 띤 두 대상, 게다가 인접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매우 이질적인 두 대상의 관계를 묻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고찰의 까다로움은 배가된다. 그러한 관계 자체가 물질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특성을 띠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을 띤 대상 또는 관계에 대해서 우리는 속성들의 집합을 구성할 수 없다.
가령, 서로 다른 사람(들)과 사람(들)이 관계 맺는 방식들 가운데 하나인 ‘게임’에 대해 생각해보자. 게임이란 무엇인가? 축구・야구・농구・배구 같은 구기와 권투・레슬링・유도・주짓수 같은 격투기, 바둑・장기・체스나 고스톱・포커・마작 그리고 컴퓨터로 온라인상에서 플레이하는 리그오브레전드・오버워치・디아블로 등 일정한 규칙을 정해 두고 승부를 겨루는 행위를 우리는 모두 게임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모든 행위를 가로지르는 공통의 속성은 무엇인가? 속성을 규정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는 게임이라는 대상에 어떻게도 분석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위에 언급한 행위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게임이라는 용어로 포괄해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이해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게임이라 불리는 행위들의 공통적 속성을 먼저 파악한 뒤 각각의 사례를 검토하는 방식이 아니라, 축구를 하거나 바둑을 두거나 리그오브레전드를 관전하는 등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수행을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서다.
이 책이 사진과 영화의 관계를 탐색하는 방식이 바로 이와 같다. 나는 사진과 영화 각각의 존재론으로부터 출발해 그 둘의 연관을 따져보기보다는 마치 귀신 들리듯 사진 들린 영화들을 찾아다니며 산책하고 싶었다. 에세이란 이러한 산책자의 움직임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 책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분석적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대상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에세이다. 에세이는 판단을 위한 보편적 규칙이 일반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이질적 대상들에 대한 관찰・비고・단상・주석의 장르라고 보는 리오타르를 따르면 말이다. 아도르노는 에세이의 진정한 주제는 자연과 문화가 환원 불가능할 정도로 얽힌 ‘이차적 자연’─다시 베르그송을 떠올려 보면, 사물과 표상 사이에 있는 물질로서의 이미지가 여기 해당하겠다─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절차에 있어서는 과학적이고 방법에 있어서는 철학적인 에세이의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이 책의 초안이 된 것은 2017년 5월부터 2021년 3월까지 사진 잡지 《보스토크》에 ‘스톱-모션’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들이다. 하지만 한 권의 단행본으로 구성을 잡으면서 몇 개의 주요 토픽에 따라 글들을 분류하고 전체적으로 다시 쓰다시피 했다. 그 과정에서 원래의 글에서 일부만 활용하거나 다른 지면에 발표했던 글을 활용하기도 했고 어떤 부분은 완전히 새로 쓰기도 했다. 그리고 ‘스톱-모션’ 칼럼에 발표되었던 글이라 해도 이 책에서 염두에 둔 토픽과 어울리지 않거나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글은 아예 활용하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탄생하는 책은 없다. 이 책 역시 보스토크프레스 편집진의 제안과 격려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정기적으로 글을 쓰도록 지면을 마련해준 김현호 발행인, ‘스톱-모션’이라는 칼럼 제목을 제안하고 언제나 정중하고 절제된 압력을 행사해 꼬박꼬박 마감일을 각인해준 박지수 편집장 두 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두 분은 내 글에 따뜻하면서도 날카로운 논평을 해 주는 최선의 독자이기도 하다. 때로 어쩐지 글을 성급하게 마무리 지었다 싶으면 엄하게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며 글 전체를 다시 쓰게도 하는 김미경에게는 항상 고마운 마음이다. 책의 몇몇 부분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글과 말로 나누어 주신 강상우 감독님, 김수환 선생님, 김신욱 작가님, 서동진 선생님, 신은실 평론가님, 이윤영 선생님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은밀히 저자를 사로잡고 있는 강박이 우리 시대에 걸맞은 픽션의 가능성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저 픽션일 뿐임을 당신이 알고 있는 픽션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지고의 믿음이라는,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의 유명한 말을 본문에서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강박을 은밀한 채로 남겨두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서문이 딸린 책은 결국 이런 은밀함을 허용하지 않는 법이다.
2023년 8월 7일
유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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