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2

아이들의 시간: 허우샤오시엔의 초기 3부작

 

※ 아래는 2022년 4월 9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고향의 푸른 잔디> 상영 후 강연한 내용을 당시 활용한 노트와 녹취록을 토대로 다시 정리한 것이다. 



저는 오늘 허우샤오시엔의 초기 3부작에 대해 이야기할 것인데요. 초기 3부작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1980년부터 1982년까지 허우샤오시엔이 일 년에 한 편씩 내놓은 로맨틱코미디들입니다. 이번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상영되고 있는 <귀여운 여인就是溜溜的她>, <바람이 춤춘다风儿踢踏踩>, 그리고 조금 전에 보신 <고향의 푸른 잔디在那河畔青草青>가 그 영화들인데요. 

지난 10년 동안 허우샤오시엔이 내놓은 장편영화는 2015년에 발표된 <자객 섭은낭>이 유일하고, 2000년대에는 네 편, 1990년대에도 네 편의 장편영화를 발표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허우샤오시엔이 다작의 영화작가라고 생각하기는 힘듭니다. 그런데 대만 상업영화계에서 경력을 시작했던 1980년대로 돌아가보면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1980년에 발표한 <귀여운 여인>을 시작으로, <바람이 춤춘다>, <고향의 푸른 잔디>, <펑쿠이에서 온 소년>, <동동의 여름방학>, <동년왕사>, <연연풍진>, 그리고 1987년에 발표한 <나일의 딸>까지 8년 동안 허우샤오시엔은 매년 한 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대만의 상업영화 감독에서 국제적인 예술영화작가로 빠른 속도로 변모해 갑니다. 1989년에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비정성시>는 그 정점에 놓이는 영화죠.

홍콩 출신의 팝스타인 케니 비(Kenny Bee, 钟镇涛)가 주연을 맡은 <귀여운 여인>, <바람이 춤춘다>, <고향의 푸른 잔디>는 허우샤오시엔이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영화들이에요. 여기서 케니 비의 목소리는 본인의 목소리가 아닌 성우가 더빙한 것이죠. 대만영화에서 본격적으로 대사 동시녹음이 이루어진 것은 <비정성시> 이후부터여서 이런 식의 더빙은 그저 당시 대만 영화계의 일반적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허우샤오시엔은 <고향의 푸른 잔디> 이후에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샌드위치 맨>에서 각본가 주티엔원과 작업한 이후로 <자객 섭은낭>까지 계속해서 주티엔원과 작업해 왔어요. <연연풍진>, <비정성시>, <희몽인생>의 경우에는 주티엔원과 더불어 우니엔전이 함께 각본 작업을 했고요. 예외라면 프랑스에서 만든 2007년 작품인 <빨간 풍선>인데 이건 프랑수아 마골랭이 각본 작업을 했죠. 그러니까 이 초기 3부작 이후로 허우샤오시엔이 직접 각본을 쓴 건 21세기에 만든 두 편의 단편 정도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초기 3부작은 시네마스코프 사이즈, 즉 2.35:1의 화면비로 촬영된 이례적인 허우샤오시엔 영화들이기도 해요. 이 작품들 이후로는 허우샤오시엔은 주로 1.85:1 의 화면비로 작업해 왔어요. <자객 섭은낭>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4:3 화면비로 촬영되었고요.

꽤 오랫동안 <귀여운 여인>, <바람이 춤춘다>, <고향의 푸른 잔디>는 허우샤오시엔을 본격적으로 다룬 비평이나 논집에서도 종종 아예 언급되지 않거나, 본격적으로 허우샤오시엔이 작가로서 등장하기 전에 장르 영화의 관습을 따라 만들어진 대수롭지 않은 영화로 치부되곤 했습니다. 물론 이들 영화를 보고 미래의 비범한 재능을 일찌감치 감지했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평론가라기보다는 점쟁이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이 영화들은 분명 비범한 작품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들이 허우샤오시엔이 극복해내야 했던 약점과 진부함으로 가득한 영화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듣기에 따라 대담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가설에 입각해 강연을 진행할 예정인데요. 이 초기 3부작에는 허우샤오시엔이 영화적으로 성취하고 싶어했던 과제가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가장 적나라한 형태로 담겨 있으며, 이 과제는 흔히 ‘허우샤오시엔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이후의 영화들에서 완수된 것이 아니라 우회되고 회피되었다는 게 그 가설입니다. 말하자면, 조금 불경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비정성시>, <희몽인생>, <남국재견>, <해상화>, 그리고 <자객 섭은낭>처럼 고도의 예술적 수준에 도달한 영화들이, 어떤 측면에서는 허우샤오시엔의 ‘실패’를 증거하는, 혹은 기껏해야 초기에 겨냥했던 과제가 아주 부분적으로 우회된 형태로만 처리된 영화들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 과제란 무엇인가? 단적으로 말하자면, 우연과 돌발성이 깃든 동작을 그 활기와 함께 오롯이 포착하는 형식을 찾는 것입니다. 저는 우연과 돌발성이 깃든 동작이라고 말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연출적 지시가 가해져도 우연과 돌발성을 잃지 않는 동작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동작과 관련해 우리가 얼른 떠올릴 수 있는 대상은 역시 아이들과 동물들입니다. 아이들과 동물들은 허우샤오시엔의 초기 3부작에서 아주 특권적인 자리를 차지합니다. 오늘 보신 <고향의 푸른 잔디>에서는 더욱 그렇죠. 한편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허우샤오시엔과 관련해서는 오즈 야스지로라든지 페데리코 펠리니 같은 감독들이 비교 대상으로 종종 호명되고는 하는데요. <비정성시>의 숨은 참조점이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고요. (저는 <비정성시>를 갱스터 장르와 연계해 보는 이런 주장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허우샤오시엔이나 1947년생으로 그와 동갑내기인 에드워드 양 같은 대만 뉴웨이브 감독들이 자국 영화에 끌어들이고자 했던 것은 찰리 채플린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성공 여부는 차치하고요. 우연과 돌발성이 깃든 동작을 그 활기와 더불어 포착하는 형식의 모델로서 말이죠.


사진 1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허우샤오시엔의 데뷔작인 <귀여운 여인>(사진 1)에서 케니 비가 맡은 주인공은 아이를 입양해 키우고 있는 미혼남이죠. 지금 보고 계시는 숏은 케니 비가 사랑에 빠진 여주인공이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는 것을 방해하러 아이와 함께 식당에 찾아간 부분에서 발췌한 것인데요. 시각적으로 이 구성은 <키드>에서 채플린과 재키 쿠건이 등장하는 이 유명한 이미지(사진 2)를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요. 눈 먼 남자 주인공이 시력을 회복해서 여자 주인공과 로맨스에 빠진다는 <바람이 춤춘다>가 얼마간 <시티 라이트>의 설정을 스위트하게 바꿔 놓은 것이라는 생각도 가능하죠. 하지만 허우샤오시엔은 노골적으로 채플린을 영화에서 제시하고 있지는 않아요. 


사진 2


반면 에드워드 양은 1994년에 발표한, 꽤 과소평가된 코미디인 <독립시대>에서 분명하게 채플린의 제스처를 모델로 삼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요(사진 3). <독립시대>는 우연과 돌발성이 깃든 동작을 그 활기와 더불어 오롯이 포착하는 형식에 대한 관심이 에드워드 양에게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형식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나 <하나 그리고 둘>의 그것에 비해 아주 만족스럽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과제를 제대로 수행해내기는 확실히 어려워요. 허우샤오시엔의 경우, 이러한 과제에서 성공을 거둔 유일한 작품은 <동동의 여름방학>이 아닌가 해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저는 이 작품이 허우샤오시엔의 가장 훌륭한 영화일 수도 있다고 봐요.


사진 3


물론 이런 가설 없이 초기 3부작을 적절하게 허우샤오시엔의 필모그래피 안에 통합하는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허우샤오시엔의 진정한 데뷔작이라고들 하는 <펑쿠이에서 온 소년> 이후의 영화들에서 원숙한 형태로 나타나는 요소들의 싹을 초기 3부작에서 찾는 것이죠. 말하자면, 허우샤오시엔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물과 몸짓과 사건 등의 초기적 형태를 이들 영화에서 감지하는 겁니다. 저는 이런 형식으로 어떤 작가의 필모그래피를 일관되게 통합하려는 시도를 썩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이례적인 영화들에서 뭔가 이후 영화들과 연계되는 부분들을 잠깐 확인해보는 정도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4

사진 5


이것은 1981년 작품인 <바람이 춤춘다>의 도입부에 나오는 장면(사진 4)입니다. 아이들이 폭약으로 장난을 치고 있는데, 실은 이것이 광고 촬영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죠. 이 장소는 타이완 서쪽 펑후 제도의 한 지역이라는데 허우샤오시엔은 이로부터 2년 뒤에 정확히 이 자리에 카메라를 다시 놓을 겁니다. 바로 <펑쿠이에서 온 소년>에서죠(사진 5). 다시 또 아이가 등장하지만 이번에는 여럿이 아닌 하나에요. 장난을 치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그거 길을 아장아장 걷고 있는 건데, 초기 3부작의 활기는 없지만 꽤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화면비는 이제 2.35:1이 아닌 1.85:1로 바뀌었죠. <바람이 춤춘다>가 펑쿠이에 온 외지인들의 이야기라면 <펑쿠이에서 온 소년>은 펑쿠이 사람들의 이야기, 그곳에서 가오슝으로 간 소년들의 이야기죠.


사진 6

사진 7

하나 더 살펴 볼까요. <고향의 푸른 잔디>에는 전기 충격기를 써서 물고기를 남획하는 어른을 아이들이 목격하는 광경이 나오는데요(사진 6). 이것은 1960년대 이후 국민당 국영스튜디오인 CMPC에서 장려된 이른바 ‘건강사실영화healthy realism’에 특징적인 환경적 계몽주의가 반영된 것이라는 지적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보다 2년 뒤에 만든 <동동의 여름방학>에서 우리는 그물을 써서 새를 남획하는 어른을 목격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사진 7). 동물들과 아이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기구나 장치에서 우연과 형식의 대립이라는 허우샤오시엔의 문제를 간접적으로 감지하게도 됩니다. [덧붙이는 말: 2022년 당시 내 강연의 청중으로 참석했던 영화연구자이자 번역가인 홍지영 씨는 <연연풍진>의 야외상영 장면에서 상영되는 영화가 건강사실영화의 선구로 꼽히는 리싱(李行)의 <오리농가養鴨人家>(1965, 영어 제목은 'Beautiful Duckling)[사진 8]임을 일러주셨다.] 


사진 8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탈것, 그러니까 자동차, 버스, 기차, 오토바이 등등의 것들과 결부지어 등장인물들을 제시하는 오프닝이나 엔딩에 대한 허우샤오시엔의 은밀한 선호가 초기작에서는 아주 노골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점일 텐데요. <연연풍진>과 <남국재견> 도입부에서 기차를 타고 등장하는 인물들을 떠올리는 분들은 많을 것입니다. <남국재견>의 경우, 자동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꼼짝 못하게 된 인물들을 보여주며 끝나죠. <동동의 여름방학>은 도입부의 졸업 연설 장면이 지나가고 나면 네 명의 등장인물이 자동차를 타고 와서 병원에 내리는 것으로 시작해서 시골에 가서 여름방학을 보낸 아이들이 아버지의 자동차를 타고 마을을 떠나는 모습으로 끝납니다. <쓰리 타임즈>의 현대 에피소드는 장첸과 서기가 오토바이를 타고 타이페이 시내를 가로지르는 모습을 길게 포착한 롱테이크 쇼트로 시작합니다. <카페 뤼미에르>와 <빨간 풍선> 도입부에서 본 전차들을 떠올리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물론 이런 '성숙한’ 허우샤오시엔 영화들에서 탈것과 인물들의 성격이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법은 없고, 현상학적 시간의 경과를 환기시키는 추상적이면서 정동적인 기능에 국한되죠. 그런데 초기작에서는 탈것과 인물들의 성격이 아주 직접적으로 연관됩니다. 오늘 보신 <고향의 푸른 잔디>를 떠올려 보시면 터널을 빠져 나오는 기차와 경주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시작해서 선생님이 타고 떠나는 기차를 따라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끝이 나죠. 여기서 기차의 운동은 고스란히 아이들이 지닌 활력 및 생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진 9

사진 10

<바람이 춤춘다>는 해안가에 정박되어 있는 배들 옆에서 인물들이 바다에 떠 있는 배의 광경을 보는 것으로 시작해요(사진 9). 여기서 둘은 커플이죠. 둘은 유럽 여행을 함께 가기로 했는데 결말의 공항 장면에 이르면 케니 비와 사랑에 빠진 여주인공은 비행기를 타기 전에 케니 비를 만나 미래를 기약하죠. 그러니까 오프닝의 정박된 배는 이 미심쩍은 커플의 교착된 관계와 직접적으로 상응하는 것이 됩니다. 얼마 후에 케니 비는 느릿하게 움직이는 우마차를 타고 등장해요(사진 10). 뭔가 초연해 있는 것 같고 한가로워 보이는 인상이죠. 

<귀여운 여인>의 오프닝이 가장 노골적이죠. 자전거나 오토바이 같은 이륜차는 허우샤오시엔에게서 굉장히 긍정적인 활력과 연관되는 반면에, 자동차 특히 자동차를 모는 여자는 부정적인 대상이 되요(사진 11). 초기작에서는 이건 거의 규칙과도 같아요. 이 자동차를 몰고 나타난 여주인공은 시골로 가서 아이와 같은 몸짓을 회복한 이후에라야 ‘인간화’되죠. <고향의 푸른 잔디>에서도 주인공 케니 비를 납치하듯 데려가기 위해 타이페이에서 온 여자가 나오는데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하실 겁니다.


사진 11


이렇게, 초기 3부작이 이후의 ‘성숙한’ 영화들과 연계되는 부분을 잠깐 확인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초기작들을 허우샤오시엔이라는 작가의 전체 필모그래피에 균질되게 통합하려는 시도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이미 말씀드렸죠. 저는 오히려 초기작에 모종의 가능성으로서 잠재해 있던 것이 이후의 작업에서 어떻게 포기되거나 굴절되었는지, 왜 그것은 허우샤오시엔이라는 작가를 특징짓는 고도의 미적 형식으로 통합될 수 없었던 것인지를 따져보는 게 훨씬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우연과 형식의 갈등이라는 지극히 영화적인 문제이기도 해요. 허우샤오시엔의 초기작에서 우연은 아이들과 동물들의 동작과 결부된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도시와 대비되는 시골은 이러한 동작을 활성화하는 공간으로 제시됩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어른들조차도 이곳에 오면 아이와 같은 움직임들을 취하게 되요. 이런 동작과 움직임들의 활력은 ‘성숙한’ 허우샤오시엔 영화들에서는 거의 직접적으로 감지되지 않는 것입니다. <귀여운 여인>에는 이와 관련해 아주 흥미로운 장면들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발췌한 영상(아래)을 보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시골이라는 이 공간에 들어서면서부터 어른들 또한 아이와 같은 몸짓을 취하게 됩니다. 개개 인물들의 동작이 꼼꼼하게 연출되었다기보다는 어느 정도 지시를 주고 즉흥적으로 움직이게 한 후에 이것을 카메라로 포착한 듯한 인상입니다. 재미있는 건 순수한 놀이의 와중에 측량 작업을 하러 온 자들이 나타난다는 것이에요. 말하자면 형식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돌연 인물들이 마비 상태가 됩니다. 여주인공이 “도망쳐!”라고 소리치면서 다시 운동이 시작되는데요. 우연과 형식이라는 것의 갈등이 이야기 설정에 들어가 있어서 확실히 흥미롭게 여겨지는 부분이에요. 이 영화에서 시골에 와서 아이들의 몸짓을 회복한 어른들이라면 이런 부분(아래)도 떠오릅니다.



지금 보신 부분들에는 분명 미적 형식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허우샤오시엔이 ‘성숙한’ 영화들에서 끝내 통합하지 못한, 혹은 <동동의 여름방학> 같은 영화에서 예외적으로 형식과 조화를 이루게 되었던 슬랩스틱적 활력이 있습니다. 이런 슬랩스틱적 요소는 그저 초기영화의 장르적 관습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허우샤오시엔이 기꺼이 버리려 한 것이라고 제가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허우샤오시엔 영화에 자꾸만 이러한 활력적, 동적 요소들이 축소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에요. 아이와 풍선이 전면에 (다시) 등장하는 <빨간 풍선>의 경우는 아주 분명하고요. 특히 1996년에 발표한 <남국재견>은 이 점에서 아주 흥미롭습니다. 이 작품 이전에 허우샤오시엔은 <비정성시>, <희몽인생>, <호남호녀> 등 대만 현대사를 다룬 고도의 미적 형식을 갖춘 영화들을 내놓았습니다. <남국재견>은 이 작품들과 사뭇 다른데, 묵직한 영화들을 만들면서 잠시 떨어져 있던 저 동적 요소들을 정련된 형식 속으로 다시 끌어들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남국재견>의 이런 부분(아래)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아요. 



이 장면에 등장하는 커플의 모습은 조금 전 보여드린 <귀여운 여인>의 커플의 모습의 어떤 흔적을 간직하고 있죠. 시골의 기차역에 내리기 무섭게 아이와도 같은 몸짓을 회복하는 그런 것이요. 하지만 뭐랄까요. 상당히 절제된 모습입니다. 실제로 이 장면의 중심은 대화를 나누는 후경의 남자들인데, 이 대화 내용은 흥미롭게도 (혹은 매우 징후적이게도) 왜 자동차를 안 타고 기차를 타고 왔느냐 뭐 이런 탈것에 대한 것이죠. <남국재견>은 자동차와 오토바이 등 탈것의 운동감을 풍부하게 되살려내는 영화인데, 생각해보면 이런 탈것들을 따라 카메라가 같이 움직일 때 배경은 계속 바뀌지만 인물과 탈것의 상대적 위치는 고정적인 채로 남게 되어 굉장히 형식적인 운동이 되고 있어요. 사실, <귀여운 여인>이나 오늘 보신 <고향의 푸른 잔디> 같은 초기작에서 자전거 같은 이륜차를 타고 나란히 달리는 인물들이 주는 활력은 거리낌없이 드러나는데 이후로 허우샤오시엔은 이런 노골적인 드러냄에 조심스러워져요. 얼마나 조심스러운가 하면 1995년 작품인 <호남호녀>의 도입부를 보면 잘 알 수 있죠. 어떤 면에서 <남국재견>은 이 활력을 형식으로 다시 포착하고자 하는 시도인데, 그 전에 <호남호녀>의 도입부 같은 ‘테스트’가 있었던 거죠. <호남호녀>의 제목이 나오고 나면 바로 나오는 부분인데, 이것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탈것과 함께 인물이 제시되는 부분이죠. 이 장면에서 탈것이 제시될 때의 조심스러움은 얼마간 전체 쇼트를 보아야 감지되는 것입니다. 발췌 영상(아래)을 보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여주인공의 방에 놓인 텔레비전에서 영화가 방영 중인데 바로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이죠. 재미있는 건 그 가운데 특히 두 남녀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해변가를 따라 달리는 장면을 골랐다는 겁니다. 이건 <호남호녀>의 인물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운동입니다. 하지만 허우샤오시엔이 초기에서부터 분명하게 매혹되었던 종류의 운동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즈가 포착한 활력의 형식을 어떻게 오늘날의 영화로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가령 <귀여운 여인>에는 이런 자전거 라이딩 장면이 있어요(아래).



앞서 저는 <바람이 춤춘다>와 <펑쿠이에서 온 소년>에서 동일한 위치에 카메라를 두고 찍은 두 개의 쇼트를 비교해 보여드렸습니다. <펑쿠이에서 온 소년>의 저 노란 옷을 입은 소녀는 오른쪽으로 난 길로 들어가 사라질 거에요. 이런 쇼트는 대단히 의미심장하게 여겨지는데요. 왜냐하면, 아이의 몸짓, 끝내 통제되지 않는 채로 남는 우연을 간직한 몸짓, 이러한 몸짓을 형식화한다는 과제가 허우샤오시엔에게서 유보되고 일단 그러한 몸짓을, 우연을 화면 밖으로 밀어내거나 아니면 화면 안에서 통제 가능한 우연으로 전환하는 방향으로 방법이 바뀌는 순간을 상징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사진 12


허우샤오시엔의 ‘성숙한’ 작품들에서 미학적으로 통제 가능한 우연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불, 조명이에요(사진 12). 운동학적으로 동적인 우연의 몸짓이 아니라 정동적인 우연을 조절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는 거죠. 이로써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는 무엇보다 조명 설계에 있어 대단히 풍부하고 복잡한 영화가 됩니다. 또는 <자객 섭은낭>에서처럼 안개 같은 자연 현상이 정동적 우연의 요소로 풍부하게 활용되죠. 

<바람이 춤춘다>에는 이러한 전환과 관련해 대단히 흥미로운 쇼트가 하나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귀여운 여인>과 동일한 배우들이 맡았습니다. 이 영화에는 내용상으로도 뭔가 사실적인 생동감이 넘치는 화면을 얻기 위해 특정한 상황을 꾸미고 몰래카메라 형식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담아내는 설정(광고 촬영이나 사진 촬영)이 있어요. 실제로 허우샤오시엔은 <펑쿠이에서 온 소년>의 마지막 거리 장면에서 이런 식의 촬영술을 끌어들이기도 했습니다. 확실히 우연과 형식의 대립이라는 문제는 허우샤오시엔을 사로잡은 진정한 영화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바람이 춤춘다>의 한 부분을 보죠. 역시 시골로 오게 된 어른들이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과정에서 그들의 몸짓을 발견한다는 설정이죠. 



곧바로 이어서 다음 부분(아래)을 보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참 숨바꼭질을 하고 나서 아이들은 프레임 바깥으로 하나둘씩 사라집니다. 그리고 두 남녀주인공은 어른의 몸짓을 회복해 가요. 그리고 망원렌즈로 포착되어 배경이 흐릿했던 화면이 ‘성숙한’ 작품들에서 익숙한 광각의 화면으로 전환되어 갑니다. 자전거는 이들이 직접 타지는 않고 그들 곁을 자꾸 스쳐지나가고요. 저 뒤편으로는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입니다. 어느덧 흔히 허우샤오시엔 스타일의 화면이라고 하는 것이 출현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것은 아이들의 몸짓을 배제하면서, 그들의 운동학적 우연을 연기와 물 같은 정동적인 우연으로 대체하면서 얻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식은 얻었지만 우연의 활력은 없어요. 대신 명상적 우연이 들어오고, 이것들과 더불어 기억이, 추억이, 역사가 허우샤오시엔의 이미지를 채웁니다. <펑쿠이에서 온 소년>에서 <호남호녀>까지의 궤적이 바로 그거죠. 그래서 <동동의 여름방학>은 이른바 ‘진정한’ 데뷔 이후의 허우샤오시엔 영화들 가운데서 매우 이례적인, ‘미숙한’ 초기 3부작의 과제에 다시 도전해 성공을 거둔 드문 영화가 됩니다. 허우샤오시엔은 이 방향으로 더 밀고 나가지는 않았고 <남국재견> 이후에 어떤 흔적들을 다시 포착하는 정도였죠. 하지만 이 방향으로 밀고 나갔다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흥미로운 맞수가 되었을 수도 있어요. 다만 허우샤오시엔은 키아로스타미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자동차라는 장치, 공간을 그다지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거든요. 적어도 그렇게 보입니다. 특히 자동차 내부에서 촬영하는 것은 대단히 불편하게 느끼는 듯해서 <고향의 푸른 잔디>에서 타이페이에서 온 여자가 케니 비를 납치하듯 데려가는 불쾌한 장면 정도를 제외하고는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에서 자동차 내부의 데쿠파주를 찾아보는 건 대단히 어려워요. 적어도 지금까지의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만을 고려한다면 그가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 같은 영화를 만든다는 건 정말 상상하기 힘들죠. 그는 인물이 직접 운전하지 않는 기차나 버스, 전철의 내부에서 촬영하는 것을 편안하게 느끼고, 인물이 직접 탈것을 다룬다면 주변이 열려 있는 자전거나 오토바이 같은 이륜차를 따라가는 것을 편안하게 느끼는 것 같거든요.

허우샤오시엔 영화에서 간혹 우리는 부감으로 어떤 거리나 골목을 조망하는 인상적인 쇼트들을 보게 되는데요. 인물들이 그 안에서 상당히 큰 폭으로 움직이는데도 카메라는 그걸 줄곧 따라가곤 합니다. 아이들이 상징하는 우연적 몸짓의 활력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는 사례 하나를 보는 것으로 오늘의 강연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그러면 허우샤오시엔이 형식을 얻으면서 불가피하게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고 제가 오늘 말한 것이 무언지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고향의 푸른 잔디>의 이 부분은 제가 초기 3부작에서 좋아하는 부분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해요. 여기에서 보이는 롱테이크 부감 쇼트는 허우샤오시엔의 이후 영화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이런 동적 활력을 뿜어내지는 않습니다. 이런 활력은 추억과 기억과 역사의 세계가 아니라 현재적인 것에 대한 절대적 믿음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거든요. 제 생각에 <자객 섭은낭> 같은 영화를 보면 허우샤오시엔은 여전히 자신의 미적 형식에 초기작의 동적 활력을 통합해내려고 하고 있어요. 생각해 보면 대단한 야심이죠. 이미 그의 영화들은 동시대 영화에서 가장 고도의 형식에 도달해 있거든요. 실제로 결국 실행에 옮기지만 못했지만 허우샤오시엔은 원래 <자객 섭은낭>을 16mm 볼렉스 카메라를 써서 전체를 핸드헬드로 촬영하려고도 했어요. 전통적인 구식의 볼렉스 카메라는 매 쇼트를 찍을 때마다 태엽을 감아야 하고 한 번에 30초 정도 길이밖에는 찍을 수 없어서 제법 긴 롱테이크 쇼트는 엄두도 낼 수 없어요. 실제로 허우샤오시엔은 2대의 볼렉스 카메라를 일본 촬영지에 가져갔는데 촬영감독이 이런 카메라로는 작업할 수 없다고 해서 결국 35mm로 작업했다죠. 그럼 <고향의 푸른 잔디>의 해당 부분(아래)을 보면서 마무리하도록 하죠.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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