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8

흐름과 보임 : ‘너머’ 없는 세계의 풍경과 에세이 영화


※ 아래는 "풍경"을 주제로 삼은 《오큘로》 제7호(2018.10.10)에 발표했던 글이다.

 

 “초속(超速)의 비행기를 생각해보자. 초속 사진기는 이 비행기를 부동의 모습으로 정착시킬 것이다. 등속운동을 하는 물체 상호간에는 움직임은 없다. 순간을 관찰하면 운동은 존속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저 아킬레스와 거북의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이야기의 맹점은 공간을 고려하지 않은 데서 온다. 비행장·경주로라는 배경에 견줘보면 비행기와 아킬레스가 이동한 공간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공간에는 ‘죽음’, ‘역사’, ‘시대’, ‘생애’ 같은 것이 있다.”

― 최인훈(1936~2018)의 『서유기』(1966) 중에서

“역사의 길에는 길을 잃게 하는 어떤 것이 분명히 있다. 현재는 마치 도시의 맨 끝에 있어서 더이상 도시에 속하지 못하는 마지막 집 같다. 모든 세대는 놀라서 묻는다. 나는 누구이며 내 조상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차라리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고 조상들이 우리와 다른 족속이 아니라 그저 다른 장소에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 로베르트 무질(1880~1942)의 『특성 없는 남자』(1930) 중에서


상념의 주마등을 한 계단 한 계단 천천히 밟으면서 독고준이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본 다음 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찾아 2018년 다원예술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마련된 엘 콘데 데 토레필의 공연 <풍경 앞에서 사라지는 가능성들>(2015)을 보았다. 네 명의 연기자가 이따금 우스꽝스럽고 종종 부조리하고 대체로 과시적으로 안무된 동작들을 취하는 가운데 그러한 동작들과 딱히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지는 않지만 오늘날의 사회와 예술에 대한 성찰을 담은 텍스트가 낭독 및 프로젝션된다. 공연을 보기 전에 살펴본 프로필을 통해, 바르셀로나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 그룹의 작품 가운데는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를 본 이후의 대화 장면들>(2012)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공연 도중에는 라스 폰 트리에 같은 인물이 여전히 예술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는 식의 텍스트를 보곤 헛웃음을 짓기도 했다. 짐짓 세상을 근심하는 예술적 허세와 결합한 공허하게 도발적인 영화적 형식의 대가들을 호명했다는 이유만으로 이 그룹의 작업을 폄훼하려 든다면 온당한 일이 아니겠지만, 어쩐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만은 미리 솔직히 밝혀두는 편이 좋겠다. 즉, 나는 엘 콘데 데 토레필의 공연에 대해 편견 없이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다.

공연을 보는 내내 무대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이런저런 생각들에 골몰하다 가끔 빠져나와 다시 무대를 응시하곤 했는데 사실 <풍경 앞에서 사라지는 가능성들>이란 공연 자체가 이런 관람 방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공연이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영 달라붙지 않는 동작과 텍스트 사이의 거리를 시종일관 가늠하며 집중한다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터이니 말이다. 물론 이런 거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대 위 연기자들의 행위가 불러일으키는 ‘감각’과 텍스트에 담긴 ‘통찰’을 음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러한 감각과 통찰이란 것이 과연 무엇이냐는 물음을 잠시 제쳐둔다면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의문도 떠오른다. 미셸 우엘벡, 파울 B. 프라치아도, 지그문트 바우만 등의 익숙한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머릿속의 참조목록을 뒤적이며 이 공연의 은유와 알레고리를 ‘해석’하고 나아가 의미를 직접 ‘생산’해내는 지적이고 적극적인 관객은 엘 콘데 데 토레필의 이상적인 관객일까 기만당한 관객일까 그도 아니면 조롱의 대상일까?

차라리 불성실한 관객이 되기로 마음먹은 나는, 이전에 보았던, 그리고 엘 콘데 데 토레필의 공연이 있고 나서 한 달 후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서 상영될 예정이었던 장-다니엘 폴레의 풍경영화 <지중해>(1963)와 그에 대한 노엘 버치의 비판을 떠올려 본다. 『영화의 실천』에서 그는 폴레의 시도를 매우 흥미롭게 보면서도 궁극적으로 <지중해>에서는 이미지의 시공간과 필립 솔레르스가 쓴 보이스오버 내레이션 언어 텍스트의 시공간이 각기 서로를 무시하는 것처럼 전개되어 구조적 긴장이 없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숏과 숏의 연결이 없는, 다시 말해 숏의 병치만 있는 영화”라는 것이다. <지중해>를 에세이적 영화의 한 모델로, 버치를 영화적 에세이 개념을 이론화한 선구적 비평가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버치의 이런 비판은 좀 기이하게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에세이적 영화에 대한 버치의 입장을 잘 살펴보면 <지중해>에 대한 그의 비판에는 꽤 일관적인 구석이 있다는 점을 이내 깨닫게 된다. 그는 조르주 프랑쥐의 <짐승의 피>(1949)와 <앵발리드 기념관>(1952)을 진정한 에세이 형식의 영화라고 상찬하면서 이 영화들의 형식은 성찰이고 주제는 이념들의 대립이며 구조는 바로 이러한 대립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하고 있다. 버치에게 있어서 에세이적 영화란 곧 ‘이념들의 영화(un cinéma à idées/cinema of ideas)’다. 내 나름대로 버치의 개념을 부연하자면 이념들의 영화란 이념적인 영화와는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이념들의 영화는 어떤 특정한 이념에 고착된 영화가 아니라 이념들의 배치를 통해 긴장을 만들어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념 자체가 아니라 긴장이다. 심지어 영화작가는 자신이 배치하고 있는 이념들 가운데 어떤 것에도 기댈 필요가 없다. 그러고 보면 <지중해>가 버치의 눈에 그토록 불만족스럽게 비쳤던 이유도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간다. 이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 풍경 이미지들은 어떤 이념들과도 관계되어 있지 않은 가시성(visibility) 자체처럼 보인다. 게다가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에서 긴장이 발생하느냐의 여부 또한 어느 정도 초현실주의적 우연에 내맡겨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에 대해 버치는 “영화는 재봉틀과 우산[을 병치시키는 것]과 같은 단계가 아니다”라고 일갈한다. 폴레에게 있어서 주요한 관심은 이념들 자체의 배치보다는 배치된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에 어떤 틈을 만드는 일이었고 그 틈에서 발생하고 또 거기로 지나가는 것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념들도 그러한 것들 가운데 속할 수 있는지는 다분히 불확정적인 채로 남아 있다. 버치는 그런 틈으로 지나가는 것이 있다면 영화감독 자신도 모르는 것이거나, 그저 사소한 것 ― <지중해>의 경우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 즉 지중해 ― 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을 멈추고 <풍경 앞에서 사라지는 가능성들>의 무대로 돌아와 보면, 이 공연을 이루는 안무 동작들은 <지중해>의 풍경 이미지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이념들과도 관계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 동작들의 배치를 통해 어떤 틈도 만들지 않는 순수한 가시성 자체처럼 보인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보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저 보일 뿐 그 무엇도 보이게 만들지 않는 춤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는 『비미학』의 알랭 바디우라면 아무것도 형상화하지 않는 비인격적인 몸, 사유 자체 외의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 맺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유의 은유”인 동시에 사유의 모든 치장을 포기한다는 점에서 “사유의 순수한 소멸(consumation)”이기도 한 춤이라고 부른 것보다도 멀리, 아마도 지나치게 멀리 나간 것이다. 로베르 브레송은 한 인터뷰에서 “연기자들에게서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감추는 것”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이 춤은 아무것도 감추는 것이 없고 오직 보여주기만 하는 춤이다. 엘 콘데 데 토레필의 파블로 기스버트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연극이라기보다는 무대 위의 추상이라 할 춤이에요. 저희는 지적인 구성을 전개하려 하지 않습니다. 비논리적이거나 모순적일 수도 있는 삶의 다른 형식들을 선호하죠. 저희가 공연에서 한 시간 반 동안 낭독될 텍스트를 제시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말은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죠. 하지만 창작을 개시한다는 건 모험을 찾아 떠나는 것과 같죠. 무엇보다 신체적인 모험이요.”

문득 <풍경 앞에서 사라지는 가능성들>의 춤은 풍경으로서의 춤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서 기스버트가 말하고 있는 추상이란 사실 풍경이라고 이해해도 좋다. 즉,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풍경으로서의 춤이다. 그러니까 엘 콘데 데 토레필의 공연을 풍경 앞에서 사라지는 (저항의? 역사의? 아니면 사유의?) 가능성들에 대한 비판으로 읽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이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무엇이건 모든 가능성들을 삼켜 버리는 풍경의 힘을 목격하게끔 하려 든다. 그런데 모든 의미의 구속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 자체로 심미화된 경관으로서의 풍경이란 것을 어떻게 무대 위로 옮겨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다시 말하지만 풍경으로서의 춤을 통해서다. 그렇다면 <풍경 앞에서 사라지는 가능성들>의 춤에서 유추할 수 있는 풍경의 개념은 어떤 것인가? 

꽤 영리하게도 이들은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1985)에 나타나는 풍경 이미지를 예로 들고 있는데, 유대인에 대한 집단적 고문과 학살이 있었던 장소를 평화롭고 목가적으로 뒤덮고 있는 폴란드의 전원 풍경이 그것이다. 풍경 앞에서 사라지는 역사와 기억의 가능성? 이런 진단은 기껏해야 ‘모든 가능성들을 사라지게끔 하는 풍경의 범람에 저항하라!’는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올바른, 따라서 그만큼 더 미심쩍은 주장을 낳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엘 콘데 데 토레필의 이런저런 말보다는 <풍경 앞에서 사라지는 가능성들>이라는 작품이 제시하고 있는 풍경 개념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 이때 풍경을 자연이나 도시의 경관에 국한해 이해할 필요도 없고, ‘동시대의 풍경’이나 ‘정치적 풍경’ 같은 용례를 비유적인 것이라 해서 굳이 배척할 필요도 없다. 개념을 고찰할 때 우선 고려해야 하는 것은 그것의 사용이지 그것에 대한 정의나 통념이 아니다. 따라서 풍경이라는 개념의 이 모든 사용을 포괄하는 풍경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엘 콘데 데 토레필 스스로도 이처럼 포괄적인 풍경 개념에 의존해 작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풍경 앞에서 사라지는 가능성들>을 보면서 10개의 유럽 도시와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해서, 제목의 ‘풍경’을 이러한 도시들, 혹은 유럽이라는 지리적 경계와 관련지어 생각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풍경은 공연이 이루어지는 무대 위에 벌거벗은 가시성의 춤으로서 제시되는 바로 그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풍경이란 어떤 대상이 그것을 둘러싼 어떤 서사도 없고 가시성 이외의 어떤 속성도 없어 보이는 상태로 변환된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굳이 ‘변환’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풍경이란 자연적으로 혹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풍경과 영화』라는 선집을 편집한 마틴 르페브르는 프랑스의 예술사가 안느 코클랭이 『풍경의 발명(L’invention du paysage)』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장소(lieu)’와 ‘풍경(paysage)’을 구분하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여기서 ‘장소’로 옮긴 것은 그리스어로는 ‘토포스(topos)’에 해당하며 코클랭과 르페브르의 문맥에서는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사건이 벌어지는 ‘무대’ 혹은 순우리말로 ‘터’에 가까운 의미로 읽힌다. (르페브르는 프랑스어 ‘lieu’를 영어로 ‘setting’으로 번역하고 있다.) 코클랭을 참조하며 르페브르는 장소란 “전적으로 가변적인 개념적 구성물”로서 무엇보다 “이야기와 사건의 공간”인 반면 풍경은 “사건성으로부터 해방된 공간”으로서 “일종의 반(反)장소”라고 정의한다. 이런 정의는 흥미롭긴 하지만 풍경에 대한 그의 이해는 여전히 공간 개념에 묶여 있다는 점에서 불충분한 구석이 있다. 비단 공간만이 아니라 사물과 인물, 표정과 몸짓과 행위, 나아가 사건에 이르기까지 어떤 대상이건, 그것이 자신을 둘러싼 서사에서 풀려나고 의미나 가치의 체계로부터 탈각한 것처럼 보일 때, 그리하여 그저 보인다고 하는 가시성 이외의 어떤 속성도 없어 보이는 상태로 변환될 때, 그때 대상은 풍경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풍경은 정신적이다. 가령 정치적 풍경이란 어떤 당파적 서사·의미·가치에서 빠져나와 각각의 당파들이 협상하고 대립하고 갈등을 빚는 상황 자체를 응시할 때 떠오르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동시대적 풍경이란 것을 보고자 하는 이는 언제나 반시대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엘 콘데 데 토레필의 파블로 기스버트는 자신들의 공연이 가시화하고 있는 풍경으로서의 춤을 ‘추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데 다시 한번 주목해 보자. 이는 언뜻 보기에 가시성 그 자체로 환원된 것처럼 보이는 풍경이 실은 미심쩍은 것임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은 “스펙터클의 구체적 존재 양식이 바로 추상”이며 “스펙터클이란 사람들이 단지 바라보기만 하는 화폐”라고 지적한 『스펙터클의 사회』의 기 드보르다. 의미심장하게도, 스펙터클에 대해 논하고 있는 드보르와 풍경에 대해 논하고 있는 코클랭 둘 모두, 각자가 겨냥하고 있는 대상들을 ‘제2의 자연’이라 칭하고 있다. 그저 보이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그렇게 보이게끔 변환되고 구성된 것이라는 점,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풍경 혹은 스펙터클에 대해 고찰할 때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스펙터클이란 권력의 광학이 아니라 건축”(『지각의 중지』)이라는 조너선 크래리의 지적을 되새기면서 말이다. 풍경은 곧 스펙터클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풍경을 비단 대지(land)나 전원(pagus)과만 결부된 개념이 아니라 어떤 대상이 그 무엇보다도 흐름(風)과 보임(景)을 통해 우리에게 현전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도 있다. 이처럼 풍경 개념을 확장해 보면, 영화적 에세이에 관심을 지닌 이들이 왜 종종 풍경을 응시하는 일에 끌리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이 가능해진다. 물론 영화적 에세이스트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풍경은 대개 자연이나 도시의 경관이기는 하다. 이는 영화가 차용하고 있는 풍경 개념이 서구에서 16~7세기에 정립된 회화적 전통의 그것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무성영화 후기의 도시교향악 장르 등은 논외로 하고 현대적 의미에서 본격적인 에세이적 풍경영화라 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그동안 한국의 영화제, 시네마테크, 미술관 등에서 상영된 작품들만 고려해 봐도, 아다치 마사오의 <약칭: 연속사살마>(1969), 장-마리 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예의 <포르티니: 시나이의 개들>(1976)과 <너무 일찍, 너무 늦게>(1982),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캘커타 사막의 베니스라는 그의 이름>(1976), 샹탈 아커만의 <집에서 온 소식>(1977)과 <동쪽>(1993), 제임스 베닝의 <원 웨이 부기 우기>(1977)와 이의 속편인 <27년 후>(2005), 패트릭 킬러의 <런던>(1994) 및 그 뒤를 이은 ‘로빈슨 연작’들, 존 지안비토의 <이윤동기와 속삭이는 바람>(2007), 니콜라 레의 <안더스, 몰루시아>(2012), 김응수의 <아버지 없는 삶>(2012), 제니 올슨의 <로얄 로드>(2015) 등 죄다 자연이나 도시의 경관을 풍경으로 삼고 있다. 이미 지적한 대로 이들의 풍경 개념이 제한적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이러한 사례들만으로도 영화적 에세이에서 풍경의 기능이 어떤 것인지를 살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러한 영화들에서 풍경이 그 자체로 감상의 대상으로 제시되는 법은 없다. 혹은 걸프전 이후 쿠웨이트에 가서 촬영한 베르너 헤어조크의 <어둠의 교훈>(1992) 식으로 재난의 광경을 숭고의 미학으로 승화시켜 바라보지도 않는다. 즉, 위에서 사례로 든 영화들에 보이는 풍경은 개념적으로는 회화적 전통의 풍경과 유사하지만 기능적으로는 전적으로 다른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영화에서 풍경은 일견 자연적이고 선험적으로까지 보이는 그것의 순수한 가시성이 실은 변환되고 구성된 것임을 논증하기 위해 제시된다. 이 말을 영화적 에세이스트들의 진정한 관심은 풍경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이면 혹은 ‘너머’를 파헤치고 폭로하는 데 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풍경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풍경은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다. 다만 풍경은 흐르고(교환) 보이는(가시성) 것일 뿐이다. 그런데 흐름은 그 자체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보이는 것을 통해 가늠해 볼 수밖에 없다. 특정한 순간에 사진 찍듯 바라본 풍경이 교환 없는 가시성 자체로만 비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영화적 에세이는 가시성 이외의 어떤 속성도 없어 보이는 풍경이 실은 교환되는 것이라는 데 주목한다. 하나의 풍경은 그 자체로만 놓고 보면 자명하기 이를 데 없다. 가시성이 극도로 강화된 풍경은 여기와 저기, 그리고 과거와 현재라고 하는 교환의 토대가 되는 시간적·공간적 대립항들의 한쪽을 억누르면서 여기-현재, 여기-과거, 저기-현재, 저기-과거 가운데 하나에 고착된 기만적인 구성물을 산출해낸다. 영화적 에세이스트들은 이처럼 가시성으로만 환원된 것처럼 보이는 풍경 옆에 시간적·공간적으로 이질적인 풍경을 병치하거나 아니면 아예 풍경이 아닌 것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풍경의 가시성은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님을 논증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이러저러하게 보이는 풍경이 그렇게 보이게끔 하는 비가시적 힘에 대한 사유로, 풍경의 이면이나 너머에서가 아니라 풍경들 사이에서 작동하는 힘에 대한 사유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다. 그러한 논증의 과정이 없는 풍경영화는 영화적 에세이와는 거리가 멀다 하겠다. 

따라서 에세이로서의 풍경영화란 서로 이질적인 가시적 풍경들의 특정한 배치를 통해 비가시적인 것의 작용을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여기서의 풍경이 꼭 자연이나 도시의 경관일 필요는 없고 교환(흐름)과 가시성(보임) 자체로 환원된 대상으로서의 확장된 개념의 풍경일 수 있음은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다. 에세이란 형식·양식·스타일·태도·장르가 아니라 방법(method)이다. 그리고 에세이의 대상으로서의 비가시적인 것은 오직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표현하고 또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이념이다. 이런 이념은 내성(內省)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이념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자본이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 마르크스의 『자본』의 영화화를 구상하면서 적은 노트(1927~8)에 ‘방법’이란 용어가 빈번히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가운데 일부만 추려봐도 “변증법의 방법을 보여줄 것”, “방법의 영화화”, “영화 <자본>의 무대는 변증법적 방법을 통한 시각적 교육으로서 전개된다”, “우리에게 있어, [영화 <자본>의] 주제는 마르크스의 방법이다”, “문화적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과업은 변증법적 논증만이 아니라 변증법적 방법을 통한 교육이기도 하다” 등 곳곳에서 방법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또 강조하고 있다. 에이젠슈테인에게 있어서는 변증법적 방법이야말로 곧 에세이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시간적·공간적으로 이질적인 풍경들을 배치하는 것만으로 논증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예컨대 뉴욕증권거래소, 시애틀의 아마존 본사, 중국 동부 연안의 공장 지대, 유럽으로 향하는 보트에 탄 아프리카 난민들, 에이젠슈타인의 <파업>(1925)에서 발췌한 몇몇 장면 등을 적절히 배치하는 것으로 자본주의를 가리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이런 풍경들은 삽시간에 여기-현재를 가시화하고 있는 듯 보이는 제법 지적인 액티비즘의 풍경으로 동질화되고 만다. 특히 증권거래소처럼 동시대 자본주의라는 힘과 관련된 흐름마저도 곧바로 여기-현재의 가시성(전광판과 모니터 앞에 모인 사람들)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상징이 등장할 때는 더욱 그렇다. 에이젠슈테인이 자신의 노트에 증권거래소는 증권거래소로서 제시되어서는 안 되며 수많은 ‘작은 세부들’로 제시되어야 한다고 다짐하듯 기록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앞서 사례로 든 영화들 가운데,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 동유럽의 몇몇 장소들을 방문해 16mm 카메라로 촬영한 풍경들을 별다른 내레이션이나 대사 없이 배치한 아커만의 <동쪽>이 여기-과거의 정서와 저기-현재의 이미지 사이에서 모호하게 진동하다 그것이 무엇이건 어떤 이념도 드러내지 못하고 결국 멜랑콜리로 동질화된 풍경으로 향하는 것도 떠올려 볼 수 있다. 풍경의 가공할 가시성에 저항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며 바로 이 때문에 많은 영화적 에세이스트들이 언어 텍스트를 반(反)풍경적 장치로 활용하는 일에 이끌리는 것이다. 무언의 이미지의 흐름만으로 에세이적 담론을 구성할 수 있으리라는 가정에 반대하며 “에세이 영화는 발화된 것이건 자막 혹은 사이자막으로 처리된 것이건 텍스트의 형식으로 된 말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고까지 주장하는 필립 로페이트 같은 이의 견해(「켄타우로스를 찾아서: 에세이 영화」)가 일견 나이브해 보일지 몰라도 실천적으로 이를 반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이것이건 저것이건 이른바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면 모조리 뭉뚱그려 에세이적 영화라 칭하곤 하는 숱한 논자들보다는 이처럼 논란이 될만한 방식으로라도 규범적 진술을 내놓는 로페이트 쪽이 비평적으로 훨씬 정직하다.

이쯤에서 한국영화의 경우로 눈을 돌려보면, 가시성 이외의 어떤 속성도 없어 보이는 풍경은 적어도 1990년대 후반까지의 한국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설악산 권금성으로 향한 두 남자가 정상에는 오르지 않고 관광객들만 둘러보다가는 시큰둥하게 “그냥 그런데?”라고 말하며 하산해버리는 모습을 무심하게 담은 홍상수의 <강원도의 힘>(1998)의 한 장면은 한국영화의 한 특이점을 이룬다. 자연이나 도시의 경관에 있어서 사정이 이럴진대 그 이외의 대상들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동양적 전통의 풍경화(산수화), 특히 서화일치(書畫一致)라는 표현이 뜻하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등가성 및 이념과 풍경의 일치를 추구하는 문인화(文人畵) 같은 장르의 특성이 한국영화에 이식되었다는 흔적을 찾기도 어렵다. 오히려 우리는 한국 문인화를 대표하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대해 “추사의 경지는 오묘하다 해도 너무 모화사상(慕華思想: 중국 것을 흠모하는 경향)에 빠져 도무지 이 땅의 냄새가 나질 않아”라고 비판하며 화가 장승업에게 “너는 글 없이 그림만으로 완벽한 너만의 화법을 개척해야” 한다고 충고하는 <취화선>(2002)의 김병문(안성기) 같은 인물은 볼 수 있었다. 의미심장하게도, 사람들이 모여 추사의 <세한도>을 함께 감상하는 장면에서 임권택은 원본대로라면 그림 두루마리 왼편에 길게 이어져 있을 추사 자신과 여러 다른 이들의 발문(跋文)을 아예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이 땅의 냄새가 나는 풍경, 이는 그 자체로 심미화되기 이전에 감정적으로 물든 풍경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상처, 트라우마, 혹은 한으로 얼룩져 부정적으로 여성화된 풍경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국영화는 이러한 부정성에서 빠져나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감정적으로 물든 풍경이란 여하간 부정적으로나마 의미화·역사화된 것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벗어나 가시성 자체로 환원된 풍경으로 향할 때 그러한 풍경의 가공할 무의미에 저항해 버티면서 영화를 구성하는 방법론이란 한국영화에 낯선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가 미처 채비를 갖추기도 전에 세상은 서둘러 가시성으로 환원된 것처럼 보이는 풍경으로, 스펙터클로서의 풍경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 이는 <상계동 올림픽>(1988)으로 한국독립다큐멘터리의 역사를 연 인물로 평가되는 김동원이다. 1997년에 그는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명동성당 농성투쟁을 자료화면, 인터뷰, 재연, 내레이션 등을 통해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명성, 그 6일의 기록>을 발표했다. 이 다큐멘터리의 종반부에서 그는 투쟁 10주년이 되는 1997년 6월 10일에 명동성당 주변에서 촬영한 영상들을 편집해 보여준다. 이곳에서 한때 역사적인 투쟁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그 흔한 기념식도 없고,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과 경찰들 몇몇과 거리에서 노래하는 이와 이런저런 이유로 성당을 방문한 사람들이 보일 따름이다. 그렇게, 보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가시성으로 환원된 풍경이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별안간 김동원은 10년 전 투쟁의 현장에 모인 군중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이 풍경 위에 겹쳐(superimpose) 놓더니 이내 아예 과거의 영상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희망은 오직 만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있다”는 내레이터의 말로 이 시퀀스는 마무리된다. 이를 1990년대까지도 잔존한 1980년대식 운동권 영화의 흔적이라고 치부해 버려선 곤란하다. 오히려 그런 흔적이라면 <명성, 그 6일의 기록>이 아니라 이한열을 어쩐지 ‘교회 오빠’를 닮은 ‘운동권 오빠’로 둔갑시켜놓은 장준환의 <1987>(2017)에 넘쳐난다. <명성, 그 6일의 기록>의 김동원은 어느덧 여기-과거의 노스탤지어적 풍경(무용담)으로 화해버린 1987년 명동성동 투쟁의 이미지가 여기-현재의 가시성으로서의 풍경을 배경으로 해서만 의미화·역사화될 수 있다는 데 놀라고 있는 중이다. 저항의 가능성은 어느덧 풍경 앞에서만 성립되는 가능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때 압도적인 가시성의 풍경 앞에서 의미화·역사화의 가능성이 결국 사라지고 삼켜져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은 여전히 남는다. “희망은 오직 만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있다”는 환상적인 내레이션은 이런 불안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기합처럼 들린다. 

이런 추정을 확신하게 된 것은 <명성, 그 6일의 기록>으로부터 꼬박 20년 후에 발표된 김동원의 신작 <내 친구 정일우>(2017)를 보면서다. 이 작품은 김동원 감독을 <상계동 올림픽> 제작으로 이끌었던 고(故) 정일우 신부(본명은 존 데일리)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대부분은 김동원 자신이 촬영한 것이 아닌 생전의 정일우 신부의 모습이 담긴 기록영상과 지인들의 인터뷰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명성, 그 6일의 기록>과 유사하지만, 내레이션이 감독 자신을 포함한 네 명의 화자가 낭독하는 편지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다른 부분이다. 언뜻 회고와 추모의 성격을 띠고 있는 듯한 이 작품에 의외의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은 역시 압도적인 가시성으로서의 풍경이다. 영화가 3분의 2쯤 지났을 무렵, 비극적 과거의 흔적이라곤 찾을 수 없는 상계동과 용산의 현재 풍경, 그리고 바다 위로 건져 올린 세월호의 모습을 극부감으로 찍은 영상이 돌연 제시된다. 그 위로 감독 자신의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이 들려온다. “(…) 공동체란 낯선 단어처럼 들립니다. (…) 상처받은 이들이 앞장서서 싸워야만 하는 이 현실은 과연 끝날 수 있을까요?” 여기서 느껴지는 것은 불안이 아니라 공포이며 이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비명이다. <명성, 그 6일의 기록>이나 <내 친구 정일우>에서 이런 풍경 시퀀스가 드물고 예외적인 것은 오히려 김동원이 오늘날 압도적인 가시성으로서의 풍경이 도래하는 것에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한 때문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김동원의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든 영화적 에세이라고는 불리기 힘든 것이지만, 어느덧 동시대 한국 다큐멘터리 감독들과 영상작가들에게 최신의 경향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하지만 방법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는 풍경 에세이의 풍경들에 맞서는 가장 정밀한 음각(陰刻)의 풍경을 제시하고 있다.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해 자문하기보다는, 재개발 구역이나 도심의 낙후된 지역 등 공동체를 무너뜨리면서 출현한 풍경에 감정적으로 탐닉하는 풍경 에세이들 말이다. 많은 경우 이러한 풍경 에세이들은 풍경의 가공할 가시성에 저항하는 반(反)풍경적 장치로서의 말이 아닌 감정적으로 물든 추억, 회고, 우수의 말들로 풍경을 다시 부정적으로 여성화하곤 한다. 이는 영화적 에세이를 하나의 방법이 아닌 형식이나 스타일로 취한 결과다. 반면 김동원의 말은 반드시 그에 대항하는 말과 함께 온다. 감독 자신의 내레이션이 끝나고 여전히 카메라가 세월호 선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정일우 신부의 말이 들려온다. “왜 그 싸움[을],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맡겨 버리느냐? 왜 그 사람들만이 이 나라를 위한 싸움[을] 해야 되느냐? 얻어맞고, 다치고, 죽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가] 된다면은 저나 여러분들께서 그 덕을 볼 건데, 너무하잖아요?” 이 내레이션이 이어지는 동안 김동원은 세월호 선체를 보여주던 화면을 슬며시 페이드아웃하고 한동안 무지화면만을 남겨 둔다. 풍경의 소멸, 혹은 암흑이라는 절대적인 풍경의 출현. 그렇다, 이것은 내기에 걸린 이미지다. 질 J. 올망은 이미지란 지울 수 없는 것이라고, 지운다 해도 언제나 무언가가 남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마지막으로, <풍경 앞에서 사라지는 가능성들>의 무대로 다시 돌아가 본다. 거듭 말하지만, 이 공연에서 풍경이란 다름 아닌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춤이다. 그렇다면 이 공연을 위해 씌어진 텍스트는 어떠한가? 이것은 춤이라는 풍경의 가시성에 저항하는 반(反)풍경적 장치가 아니다. 그보다는 춤과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사유의 흐름에 가깝다. 이 공연을 보면서 춤과 텍스트를 동시에 경험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엘 콘데 데 토레필은 풍경 앞에서 과연 사유는 버티는지, 아니 버틸 수 있는지를 묻는다. 풍경으로서의 춤의 가시성에 매혹되어 텍스트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사유의 가능성은 사라진다. “사유란 무엇인가? 세계 안의 것이고 세계 밖의 것이다”라고 로베르트 무질은 썼다. 그렇다면 바깥 없는 세계에서 사유란 무엇인가? 이 공연은 가공할 위력의 가시성으로서의 풍경 앞에서 사유를 두고 벌이는 위험한 내기이다, 라고 생각하며 국립현대미술관 멀티프로젝트홀 입구를 나선다.


2024-09-15

전장(戰場)으로서의 스크린, 장르와 풍경 사이에서
: 이만희와 한국영화의 원점

 

※ 1967년에 개봉한 <원점>은 이만희가 만든 51편의 영화 가운데 29번째 영화다. 이 해에만 그는 무려 열 편의 영화를 개봉했다. 1961년에 데뷔한 그는 1931년생으로 프랑스의 누벨바그나 일본의 전후파 세대와 비슷한 또래다. 누벨바그 세대는 텔레비전 시대가 열린 이후 영화계에 들어온 세대인데, 한국의 경우는 텔레비전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이 1970년대부터이니 그들과는 사정이 좀 달랐다. 일본의 전후파와 달리 이만희와 같은 한국 세대는 이십 대에 한국전쟁을 겪었다. 그는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에 군에 입대해 4년 넘게 근무했다. 무엇보다 이만희의 세대에게는 누벨바그나 전후파와 달리 극복해야 할 선배 세대가 없었다. 

이만희의 작업은 영화적 형식과 한국적 풍경의 조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한국영화가 겪은 곤란을 첨예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형식은 고전적 할리우드를 변용한 것일 수도 있고, 당대의 모더니즘을 차용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장르영화를 혼용한 것일 수도 있다. 이만희의 필모그래피에서는 이러한 형식들이 모두 감지되지만 하나같이 한국적 풍경과 모종의 어긋남의 관계에 놓인다. 아래는  2024년 6월 22일 토요일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원점> 상영 후 한 시간 정도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강연에서는 특히 장르영화의 형식과 한국적 풍경의 불화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해 보았다. 



지금 보고 계시는 것은 <원점> 후반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주인공인 신성일과 문희가 눈 덮인 산을 오르는 가운데 숨어 있던 킬러 이해룡이 신성일을 겨누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다룰 주제로 내세운 것(“전장으로서의 스크린, 장르와 풍경 사이에서”)을 예시하기에 좋은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골라 보았습니다. 한 편에는 연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는 총이 있습니다. 연인들은 풍경 속을 배회하고 총은 장르를 재촉합니다. 문제는 이만희가 속해 있던 시기의 한국영화에서 그 둘이 공존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런데도 이만희는 그 둘이 공존하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는 거죠. 말하자면 긴장감 넘치는 산책. 한없이 느긋한 범죄.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공존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전투. 그러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으로서의 스크린. 

이만희의 연인들은 온전히 가까워지기를 망설이며 종종 풍경 속을 배회합니다. 1968년에 만들어졌지만 당시에는 공개되지 못했고 2005년에야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된 걸작 <휴일>이 대표적이죠. 그런데 꼭 연인이 아니어도 무방하고 어떤 죄책감이나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면 무방합니다. <원점>의 신성일은 자신이 영화 초반에 한 경비원을 죽게 했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입장에서 이 죄책감은 납득이 안 됩니다. 때로 이만희 주인공의 죄책감이나 강박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거의 혹은 전혀 알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어요. 이만희의 유작으로 남은 <삼포 가는 길>에서 김진규가 그런 인물이죠. <원점>에서 우리는 신성일이 무엇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해요. 그가 셔터를 내려 경비원을 죽인 게 아니라 경비원 자신이 내린 셔터를 빠져나오려다 죽게 된 것이거든요. 그렇다면 신성일은 자신이 괜히 살인자로 몰릴 것을 걱정할 수는 있어도 사장 앞에서 말하는 것처럼 “살인한 데 대한 죄책을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부조리한 일이거든요.  

그런데 자신의 것이 아닌 죄책감까지도 떠맡는 것, 그래서 풍경 속을 배회하게 되는 것, 이만큼이나 이만희적인 인물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초기의 이만희 영화인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도 북한군인 형이 저지른 살인의 죄책감을 떠맡는 최무룡 같은 인물이 이미 등장하고 있어요. 최무룡이 배회하는 풍경은 한국전쟁의 전장입니다. 이런 모티브가 확실히 이만희스럽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이만희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해서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원점>의 시나리오와 완성된 영화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해요. 이번에 강의를 준비하면서 <원점>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거기서 주인공은 자기를 쫓아온 회사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난 살인자는 아니오! 그 영감은 자기 손으로 내린 샷타에 눌려 죽은 거요!” 경비가 죽었는데 자기가 누명을 쓸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죠. 그리고 회사 입장에서도 회사에 피해가 갈 것 같으니 주인공을 멀리 숨어 있게 한다는 설정이었죠. 그러니까 살인의 죄책감을 떠맡는다는 건 분명 시나리오에는 없고 완성된 영화에만 나타나는 매우 이만희다운 설정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죠. 굳이 자기가 느끼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죄책감까지 느끼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심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이만희 영화에서는 꼭 필요한 설정을 가지고 가는 인물이 바로 신성일이죠.



이 시나리오를 쓴 김지헌은 이만희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는 <만추>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쓴 분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문예영화로도 알려져 있지만 통상적인 문예영화처럼 원작 문학작품을 각색한 것이 아니라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만들어졌어요. 김지헌 작가는 이만희 감독과는 <만추>와 <원점>, 그리고 역시 필름이 남아 있지 않은 <얼룩무늬의 사나이>까지 세 편을 함께 했습니다. 이건 <원점>의 크레딧인데요. 김지헌의 각본을 이만희 감독과 1966년부터 1970년까지 긴밀하게 작업했던 시나리오 작가 백결이 윤색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원작자로 되어 있는 작가 전지현에 대해서는 국립중앙도서관 등의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봐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인물이 쓴 <원점>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이 시기 한국영화에서 드물지 않은 거짓 크레딧이라고 추정되는데요. [※ 이 강연 정리본을 블로그에 올린 후, 금동현 영화사 연구자에게 연락을 받았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서 디지털 원문 서비스로 열람할 수 있는 영화잡지 《실버 스크린》 15호(1965년 11월호)에 전지현이 쓴 <연인들의 밤>이라는 시나리오가 전재(아래 사진 참고)되어 있는데, 이것이 <원점>의 '원작'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연락을 받고 나서 해당 시나리오를 읽어본 결과, 금동현 연구자의 말대로 이것이 <원점>의 원작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김지헌의 각본과 이만희의 영화와 많은 부분에서 다르지만, 산업 스파이 노릇을 하다 우연히 사람을 죽게 한 남자가 도피 중에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기본 설정, 그리고 단체 관광객들과 어울려 며칠을 보내게 된다는 설정 등은 공통적이다. 더불어 영화 초반부와 종반부에 여주인공이 배회하는 소공동 풍경의 묘사, 남자 주인공과 격투를 벌이다 수위가 셔터에 깔려 죽는 상황 등은 이만희의 <원점>에도 고스란히 수용되었다. 전지현의 각본에서 도피처로 설정된 곳은 해운대관광호텔이나 이만희의 영화에서는 설악산관광호텔로 바뀌었다. 전지현의 시나리오가 <원점>의 원작임을 일러준 금동현 연구자에게 감사드린다.]



영화 <원점>을 보다 보면 구성 자체가 짜임새가 있다기보다는 다소 임의적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적지 않아요. 앞뒤가 안 맞는 부분도 있고, 장면이 바뀔 때 톤이 너무 급격히 바뀐다고 여겨지는 부분도 있는데 그게 또 이 영화의 매력이기는 하죠. 영화 초반부에 사장은 신성일에게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자청한 것이 네 놈이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저놈을 없애지 않으면 7년 간의 비밀이 폭로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영화를 보다 보면 이만희와 각본가는 이 은혜는 어떤 은혜인지, 7년 간의 비밀은 어떤 비밀인지 아예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것 같거든요. 그리고 이 조직은 문희에게 신성일과 설악산에서 시간을 보내라고 하면서 어떤 임무를 주겠다고 하는데 이 임무가 딱히 무엇인지도 명확하지 않아요. 나중에 문희가 신성일에게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때 정말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이상한 건 도피성 여행인데 왜 3일만 있어야 되는지도 알 수 없어요.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보면 이런 설정은 없거든요. 그냥 거기 가서 당분간 숨어 있으라고만 하죠. 여하간 이런 모호한 부분들을 이 영화는 그냥 내버려 둡니다. 이만희의 풍경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기 전에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2006년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이만희 감독 전작전을 연 적이 있는데, 당시 영상자료원은 현재 이곳이 아니라 서초동에 있었습니다. 전작전이라고는 해도 당시 남아 있던 전작이라 그 이후에 추가로 발견된 영화들이 더 있습니다. 당시 진행한 인터뷰에서 백결은 이렇게 밝힌 바 있습니다. [※ 강연 당시 자리하셨던 김홍준 한국영상자료원장님께서는 아래 인터뷰에서 백결이 '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충무로에서 관행적으로 시나리오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고 일러 주셨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스릴러라기에는 어쩐지 조금 나른한 리듬은 이런 작업 방식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죠. 이만희와 백결은 원래의 시나리오에서 인물과 설정을 일부 가져왔을 뿐 사실상 아예 다른 전개로 영화를 만들었어요. 김지헌의 시나리오에는 신성일이 연기한 주인공 이름이 이석이라고 명기되어 있고, 주인공이나 다른 인물이 그 이름을 말하기도 하는데요. 영화에서는 신성일의 이름이 아예 불리지를 않죠. 간혹 이 영화에 대한 리뷰들에서 (당시의 심의용 대본에 의거해) 주인공 이름을 석구라고 쓰는 경우도 있는데 영화에서 신성일의 이름이 불리는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래서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형사들이 문희에게 신성일의 이름을 아느냐고 하니 모른다고 하는 게 성립이 되죠. 즉, 여기서 신성일은 이름 없는 존재라는 것도 이만희의 연출이에요. 원래의 각본에서 신성일과 문희는 첫날 곧바로 육체 관계를 맺고 이후 애정 표현도 아주 노골적으로 하는데 영화에서 신성일은 이만희 특유의 성적 망설임을 지닌 남자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가장 대담한 건 총기의 등장인데요. 영화의 도입부에서부터 대단히 비현실적이게도 건물 경비원이 총기를 들고 나오는데, 이런 설정은 이만희가 이 영화를 얼마간은 무국적적 장르로서도 고려했다는 것이겠죠. 하지만 원래의 시나리오에는 총기라는 것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이런 도입부는 아예 없습니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이미 경비원은 죽었고, 주인공이 스파이 노릇을 하다 사람을 죽였다는 걸 알게 된 회사 사람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해요.

영화의 도입부는 완전히 이만희의 창작물이에요. 거의 대사가 없이 전개되는 이 도입부는 2006년 전작전 당시 이 영화를 처음 접한 영화광들에게 그야말로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시퀀스였어요. 1960년대 한국영화에 이런 순간이 있었다니, 하는 거였죠. 그런데 또 도입부가 지나고 나면 '응? 도입부를 보면서 생각한 거랑 영화가 좀 다른데?'하는 느낌도 받았고요. 이 도입부의 주요 장면을 이루는 것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한밤에 신성일과 경비원이 벌이는 결투인데, 이것은 영화 종반부에서 설악산의 계단을 무대로 펼쳐지는 결투와 호응하죠. 여기서도 또 총이 등장하고 암살자가 이 총에서 발사한 탄에 맞아 신성일은 죽게 됩니다. 도입부와 종반부는 모두 장르적 쾌감이 극대화된 시퀀스이면서 한편으로는 이곳이 한국이라는 단서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의 부재를 특징으로 한다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저는 오늘 풍경이라고 말할 때 그저 자연 풍광을 염두에 두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저는 이 용어를 일상적으로 쓰는 용법과는 조금 다르게 쓸 겁니다. 저는 풍경을 이런 뜻으로 사용할 겁니다. 도시와 자연을 막론하고 어떤 장소의 구체적인 생김새를 드러내는 것, 그리고 그 장소에 있는 사람들을 특징 짓는 몸짓과 말과 동작을 드러내는 것으로요. 딱히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부득이 이런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는데요. 굳이 부연하자면, 우리가 흔히 '경관'이라고 말하는 것과 '풍속'이라고 말하는 것을 섞어서 '풍경'이라고 부르려 한다, 정도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토요일 오후 비 오는 날 한국영상자료원 앞의 풍경이라고 말을 할 수 있겠죠. 이런저런 건물들이 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걸 보면 떠오르는 인상이 있습니다. 잘 바라보고 있으면 2024년 한국 사람들의 어떤 습속이 보이기도 할 거고요. 하지만 오늘 강의에서는 풍경이란 단어를 다음과 같이 쓰지는 않을 거에요. 오늘 밤 하늘의 풍경, 작년 이맘때 태평양의 풍경, 이런 식으로는요. 이건 경관일 수는 있는데 풍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잖아요.

<원점>을 예로 들어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설악산에서 촬영된 눈 덮인 설산은 꽤 추상적인 영화적 무대를 제공하죠. 1960년대 당시 설악산의 자연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도 이국적이었을 거에요. 1960년대는 설악산과 제주도 같은 곳이 비로소 막 국내 관광의 명소로 개발되기 시작했던 때죠. 설악산이 관광 명소로 개발된 것은 분단 이후에 금강산이 갈 수 없는 곳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일반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이곳을 그 대체 장소로 삼으면서라고도 하죠. 

이 영화에서 설악산관광호텔에 모인 관광객들은 이 익명적인 자연적 풍광을 삽시간에 다소 우스꽝스러운 느낌의 현실로, 한국적 풍경으로 돌려놓습니다. 영화에서 보신 것처럼 당시 설악산관광호텔은 십 수 개의 객실밖에는 없었고 이곳에 온다는 것, 그리고 영화에서 산부인과 의사 부인의 대사 중 “비행기에서부터 눈독을 드리든데 왜 이러죠?”라는 말이 있는데, 심지어 비행기를 타고 온다는 건 상류층의 매우 호화판 관광으로 간주되던 때죠. 지금으로 치면 일본 홋카이도로 여행을 가는 것 정도로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호사스럽게 느껴지는 수준이었을 거에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줄 때 <원점>은 돌연 풍속화적인 느낌을 띱니다. 신성일과 문희가 처음 소개되었던 도입부와 비교하면 아주 차이가 커요. 저는 이런 의미에서 한국적 풍경이라는 것을 우리가 떠올려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만희의 도전은 이런 거라는 거죠. 이런 풍속화적 느낌을 주는 한국적 풍경 속에서 영화적 장르를 성립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거요. 이건 훗날 송능한의 <넘버 3>에 의해 다시 건드려지고  봉준호나 박찬욱 같은 감독에게로 이어지는 도전인데, 봉준호는 과감하게 한국적 풍경을 거듭 정면돌파하는 방식을 취하고, 박찬욱은 <공동경비구역 JSA>와 <복수는 나의 것>에서 그걸 시도하다가 결국 돌파하지는 못하고 이후로는 우회해버리는 방식을 취하게 되죠.

그리고 설악산관광호텔이라는 장소는 반쯤은 이국적인 느낌이고 반쯤은 한국적인 느낌을 주는 공간이어서 풍경과 장르를 함께 고려하기에 더할 나위 없죠. 원래의 시나리오에 이미 설정되어 있는 이 장소를 영화에서도 이만희가 그대로 고수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호텔에 모인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동들이 있잖아요? 라디오를 듣는데 거기서 피임약 광고가 나온다든지, 관광객들이 호텔에 도착하자 발레단이 나와서 환영의 춤을 추는 것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원래 시나리오에 있었어요. 이런 풍속화적인 것들은 이만희가 영화에 고스란히 끌어오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죠. 그럼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 장소는 어떻게 비칠까요? 설악산이라는 장소를 오롯이 풍경화해버린 홍상수의 <강원도의 힘> 같은 영화가 나온 지도 사반세기가 넘었는데 말이죠.

문제는 이만희의 장르 감각이 무국적적이라는 데 있어요. 이만희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는 분명 장르영화의 세계에 매혹된 사람이지만, 그리고 전쟁영화, 공포영화, 스릴러영화, 혹은 어쩌면 서부극 등에 대단히 관심을 가진 사람이지만, 이런 남성적 장르들을 한국적 풍경 속에서 사고하는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그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마의 계단>을 만든 사람이 아니냐, 라고 반문하는 분이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전쟁영화의 주요 무대, 즉 전장은 엄밀히 말하자면 풍경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전쟁영화는 서부극과 유사한 종적 특성을 띠죠. 서부극의 황야는 꼭 미국의 서부여야 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서부극이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에서, 심지어 소련(이른바 '레드 웨스턴')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에요. 여하간 인천상륙작전을 촬영하기 위해 굳이 인천에 갈 필요가 없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죠. 대략 바닷가에서 찍고 그곳을 인천이라고 명명하는 것으로 충분해요. 왜일까요? 전쟁영화의 배경은 사실 지명으로 일컬어지는 경관이기 때문이죠. 이만희 감독은 특히 전쟁영화 장르를 선호했고 열 편이 넘는 전쟁영화를 연출했어요. 혹시 이것은 전쟁영화의 풍경 아닌 풍경, 즉 풍경이라기보다는 경관적 특성을 띤 배경이 자신의 장르적 감각을 발휘하기에 적절하다고 느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만희의 뛰어난 스릴러 <마의 계단>은 세트장에서 대부분이 촬영된 영화입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마의 계단>은 흥미진진한 장르영화들이지만 어디까지나 한국적 풍경의 회피 속에서 이루어진 성취입니다. 

그런데 딱히 풍경 특정적이지 않은 남성적 장르영화에 매혹된 한국 감독이 한국적 풍경에서 그 장르가 존립하게끔 하려고 할 때 겪는 곤란은 딱히 이만희만의 것은 아니겠죠. 그건 한국영화라는 것이 탄생한 이래 거의 모든 한국감독들이 겪었던 곤란입니다. 하지만 <원점>의 이만희처럼 그 곤란 자체를 주제로 삼아 스크린이라는 전장에서 풍경과 장르의 대결을 보여준 대담한 감독은 별로 없었습니다. 제가 오늘 강연의 제목을 생각하면서 부제를 “이만희와 한국영화의 원점”이라고 붙인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한국영화가 이런 곤란을 온전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돌파한 것은 21세기 들어서서, <살인의 추억>과 <괴물>의 봉준호 같은 감독을 통해서일 겁니다. 한국적 풍경 속에서 펼쳐지는 연쇄 살인극, 한국적 풍경 속에서 펼쳐지는 몬스터 무비. 그런데 이만희 및 그와 동세대 감독들과 봉준호 및 그와 동세대 감독들의 차이라면 이런 거겠죠. 한국영화계의 상황이 그야말로 처참하던 때라 전자는 후자와는 달리 숙고하고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요. 그러니까 백결의 인터뷰에서 감지되는 것처럼, 일단 가자, 그리고 어찌 되는지 보자, 하는 식으로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죠. 이런 상황은 이만희의 연출작 수만 고려해 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점>은 이만희가 만든 51편의 영화 가운데 29번째 영화에요. 이렇게 보면 이만희가 이때까지 꽤 오래 작업한 감독처럼 들리지만, 그는 1961년에 <주마등>으로 데뷔했어요. <원점>이 나온 게 1967년이니 6년 동안 29편의 영화를 찍었던 거죠. 그리고 <원점>이 발표된 해에 개봉된 이만희 영화만 고려해도 무려 10편이에요. 



<원점>을 떠올려 볼까요? 도입부의 경우 실외 촬영분은 어둠이 내린 밤거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옥상에서 밤거리를 내려다보며 찍은 숏을 보면 지나가는 차들의 불빛과 주변 건물의 네온사인 등이 보이지만 빠르게 패닝으로 이동해서 정확히 식별할 수는 없어요. 종반부의 설악산 계단은 실제로는 금강굴로 가는 길이지만 그저 험준한 악산 어디라고 해도 무방하겠죠. 바로 이런 배경, 이걸 풍경이라고 한다면 완전히 익명화되고 추상화된 풍경, 이런 곳에서 이만희의 장르적 감각은 극대화됩니다. 

그런데 이만희의 다른 한 극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풍경의 영화를, 무엇보다 한국이라는 풍경을 가로지르는 영화를 찍는 거에요. 하지만 이 풍경은 종종 서사를, 이야기를 지연시키는 것입니다. 혹은 서사의 방향을, 이야기의 방향을 아예 딴 데로 돌려놓기도 하고, 인물들을 뚜렷한 이유 없이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듭니다. 말하자면 장르에 장애가 되는 풍경입니다. 신성일을 죽이려고 온 암살자가 입산하는 가운데 돌연 지배인이 “여기서부터는 금엽구역(사냥이 금지된 구역)입니다. 총은 제가 보관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암살자는 순순히 총을 내어놓은 매우 현실적인 한국적 상황이 묘사되고 있는 것도 이런 점에서 재미있습니다. 액션이 펼쳐지려는 순간에 고민하게 만들고, 서스펜스를 불러일으켜야 하는 순간에 실소가 터지게 만들고, 무시무시하고 소름 끼쳐야 하는 것을 서글프게 만듭니다. 

물론 해결책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예 장르를 포기하고 풍경에 천착하면 됩니다. <휴일>은 그렇게 만들어진 걸작입니다. 그런데 <원점>에서 이만희는 장르라고 하는 극과 풍경이라고 하는 극을 시작부터 나란히 제시하고는 과연 영화가 어떻게 될지 보자 하는 식으로 모험을 감행합니다. <원점>은 <마의 계단>이나 <휴일>만큼 완벽한 영화는 아닐 겁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보기에 따라 훨씬 흥미진진한 영화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야말로 풍경과 장르 사이의 전투가 펼쳐지는 전장으로서의 스크린을 눈앞에 마주하게 되죠. 생각해 보세요. <마의 계단>과 <휴일>을 하나의 영화에서 같이 보게 되는 것을요. 그야말로 동시상영으로서의 영화. 그것이 성공이냐 실패냐의 여부와 상관 없이 영화를 보는 사람을 정말 흥분시키는 건 이런 도전이거든요.




영화광들을 사로잡는 저 기나긴 프리크레딧 시퀀스, 풍경 없는 장소에서 펼쳐지는 이만희의 장르적 액션 연출의 극치를 보여주는 시퀀스가 끝나고 나면, 제목과 출연진과 제작진의 이름이 닫힌 셔터 위로 차례로 뜨고, 돌연 이만희식 풍경의 영화가 훅 나타납니다. 조선호텔 인근 소공동의 밤거리를 배회하는 문희의 모습이 보이죠. 주변 건물들의 간판과 지나다니는 사람들 모든 것이 구체적이어서 1960년대 서울의 풍경을 떠올리기에 손색이 없죠.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다시 신성일이 그에게 서류를 훔쳐올 것을 의뢰한 자들과 언쟁을 벌이는 장면이죠. <원점>에서 본격적으로 대화다운 대화, 대사다운 대사가 나오는 건 영화가 시작되고 거의 18분이 지난 바로 여기서부터입니다. 



이쯤에서 잠깐 이만희 식으로, 아니 <원점> 식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가겠습니다. 지금은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사라진 이만희 영화 가운데 하나인 1964년 작품 <추격자>에 대한 것인데요. <원점>보다 3년 전에 개봉된 영화죠. 영화는 7월 9일에 개봉했는데 7월 22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도입부의 새 시도 무언극. <추격자>: 증기기관차가 달려오는 오프닝의 첫 카트, 가마니를 산적한 괴뢰군 트럭과 놈들의 검문소, 이어서 나타나는 빨갱이들의 총살형장, 사형수들이 달구지로 끌려나와 담벽 앞에 세워지고, 기관차 통과시의 굉음에 겹쳐 백연을 토하는 총구와 픽 쓰러지는 사람들, 이러한 서두가 한 마디의 대사도 없이 거칠은 효과음만으로 서스펜스를 높여가는데 타이틀백이 나올 때까지 무언극이 장장 20분. 우리 영화로선 보기드문 시도였으나 이것이 제대로 성공했다. 자막이 끝나면 말소리 및 음악소리와 함께 땅굴 속 감방. 자크 베케르의 <구멍>과 [제이 리] 톰프슨의 <나바론[의 요새]>을 연상시킨다.” <원점> 도입부에서도 부분적으로 시도된 이런 무음, 무언의 형식에 대해서 그저 이만희가 시각적인 감독이었다는 둥, 영화적인 감독이었다는 둥 하는 식으로 말하는 건 어쩐지 불충분해 보입니다. 오히려 그는 한국어라고 하는 말, 그리고 1960년대 한국영화의 녹음 수준까지도 일종의 한국적 풍경의 일부로서 느꼈고 그것이 자신의 장르적 감각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던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충무로라고 하는 상업영화의 현장 한복판에서 활동하는 감독으로서 도입부에서 부분적으로만 소리를, 말을 배제하는 방책을 썼던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다시 <원점>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신성일과 경비원의 결투, 소공동을 배회하는 문희, 신성일과 그가 어울리는 패의 언쟁에 이어 장면이 바뀌면 대단히 멋진 숏이 하나 나옵니다. 문희가 거리에서 만난 손님과 자신의 집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이죠. 왼쪽으로는 아파트 외부가, 오른쪽으로는 아파트 복도가 같이 포착되어 있는데요. 카메라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패닝하는 것 말고는 커트 없이 길게 촬영된 쇼트입니다. 아무리 여기서 문희가 거리의 창녀라고 해도, 그리고 지금이 인적이 드문 밤이라고 해도, 역시 낯선 남자와 자기 집으로 간다는 건 어색한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남자의 앞에서 길을 안내하면서 조용히 걸을 수밖에 없어요. 남자 입장에서도 기대감은 있겠지만 어쩐지 남의 시선도 있을까 신경쓰이고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니까 조용히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죠. 게다가 이것이 1960년대라는 것도 생각해야 하겠죠. 여기서 커트가 있었다면 이 긴장은 금방 깨지거나 풀려버렸을 거에요. 아직 아파트 복도로 들어서기 전에 문희는 살짝 뒤를 돌아보며 남자가 따라오는지 확인하는데, 이때 남자가 슬쩍 몸을 돌려 시선을 피하더니 문희가 다시 걷기 시작하니 또 걸어옵니다. 그런데 아파트 복도에 둘이 들어서고 난 뒤 문희가 뒤를 돌아볼 때는 그냥 계속 앞으로 걷습니다. 이제 뭔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구역에 들어섰다는 느낌이겠죠. 그리고 그제서야 커트가 이루어집니다. 이만희의 풍경의 영화, 그 배회의 리듬이 구성되는 방식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부분이어서 잠깐 영상으로 보고 가겠습니다. 



영화 시작부터 이 부분까지 보고 있으면, 이미 <원점>은 두 편의 성격이 다른 영화가 번갈아 상영되는 느낌을 줘요. 신성일 주연의 액션 영화 하나와 문희 주연의 풍경의 영화 하나가 영사기사의 실수로 릴이 뒤섞여 상영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저는 그런데 <원점>이 풍경과 장르를 불화하는 가운데 공존케 하려는 영화라고 본다고 말씀드렸죠. 아주 흥미롭게도, 이만희는 방금 보여드린 두 개의 쇼트 구성을 풍경의 영화를 위해 사용했다가 장르의 영화를 위해 다시 사용합니다. 문희와 손님이 방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여준 다음이죠. 이사장(사무실에서 슬쩍 비치는 명패를 보면 이름이 ‘이상한’인데요. 이상한 사장, 인거죠)의 부하인 전무가 문희의 집으로 찾아오는 것을 보여주는 두 개의 쇼트가 보이는데 앞서 문희와 손님이 아파트로 오는 것을 보여준 두 개의 쇼트와 구성이 동일합니다. 그런데 쇼트의 구성만 같은 게 아니라 인물의 몸짓까지 그래요. 심지어 문희의 손님이 슬쩍 뒤돌아 보았던 곳에서 전무도 똑같은 동작을 취하고 와요. 그런데 전무는 혼자 오고 있는 중이거든요? 그리고 커트해 복도 안쪽에서 전무를 보여주다가 그가 문손잡이를 돌리는 것을 보여주는데요. 직접 보시죠.



지금 보신 부분은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계기적 순간이에요. 왜냐하면 이 부분 이전까지 우리는 신성일 파트와 문희 파트를 서로 아무런 교통 없이, 그냥 두 편의 다른 영화가 번갈아 상영되고 있구나, 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전무라는 사람이 문희의 아파트로 찾아오는 이 장면에서 비로소, 장르가 풍경에 노크를 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때 풍경의 영화에서 사용했던 쇼트 구성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 거죠. 그럼 아 그럼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하고 숨죽이며 보게 되는 거죠. 이건 영화의 이야기나 서사가 아니라 구조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입니다. <원점>은 이야기의 흐름만 따라가면 매우 터무니없는 영화로 보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만희라는 감독이 영화를 어떻게 형식적으로 사고하고 있는지를 정말 잘 보여주는 영화기도 해요.

<원점>을 크게 세 개의 파트로 나눠서 고찰해볼 수 있습니다. 음악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소나타 형식을 띠고 있어요. 제시부라고 할 수 있는 첫 번째 파트에서는 신성일과 경비의 결투가 이루어지는 순수 장르와 소공동을 배회하는 문희의 모습이 보이는 순수 풍경이 나란히 제시되죠. 재현부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파트는 첫 번째 파트의 변주죠. 신성일과 그를 쫓아온 패들의 결투가 설악산을 무대로 펼쳐집니다. 여기서 설악산은 설악산관광호텔 같은 풍경이 아닌 장르에 걸맞은 익명적 무대로 제시됩니다. 여기서 순수 장르가 펼쳐지죠. 신성일은 죽고 다시 우리는 문희를 둘러싼 순수 풍경의 세계로 이행합니다. 이 제시부와 재현부 사이에서 전개되는 두 번째 파트는 우선 설악산관광호텔이라는 혼종적인 장소에서 펼쳐집니다. 반은 장르에 걸맞고, 반은 풍경에 걸맞은 그런 장소죠. 그리고는 두 번째 날 밤에 관광객들이 묵는 야영소, 그리고 신성일과 문희가 무리를 빠져나와 둘이서만 잠시 잠을 청하는 버려진 초막집으로 장소가 이행하면서 점점 풍경은 익명적인 무대로 변해갑니다. 호텔의 객실, 야영소, 그리고 초막집으로 말이죠. 그리고 다시 완전히 익명화된 무대인 계단을 올라가다 신성일은 죽음을 맞습니다. (물론 설악산의 굴 입구로 들어가는 실제 계단이기는 하지만 영화에서는 아주 익명적으로 처리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파트에서는 경비가 계단을 내려와 죽음을 맞았는데 말이죠. 마치 한국이라는 풍경은 장르와는 걸맞지 않다고 받아들이는 듯이 신성일은 죽습니다. 신성일은 문희의 세계로 이행하지 못해요. 그런 이행이 불가능한 건 심리적인 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만희 영화의 구조적 특성에 이유가 있어요. 그러지 않고서야 자신을 쫓아오는 무리를 피해 달아나는데 산길을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굳이 힘겹게 올라가는 경로를 취할 이유가 없죠. 장르는 풍경을 노크하지만 들어가지는 못해요. 산을 내려가면 무엇이 나오나요?문희의 풍경이겠죠. 거기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이제 장르이길 멈추고 오롯이 풍경이, <휴일> 같은 영화가 되겠죠. 그러니까 <원점>의 신성일은 내려가지 않고 올라가는 겁니다. 가장 익명적인 곳이로요.

무리를 피해 들어간 초막집에서 문희만 남겨 두고 신성일이 떠났다가, 돌아와서, 돈을 두고 떠나려는데 문희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죠. “우린 이틀을 지냈으면서도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원래의 시나리오에서는 상황이 이와 전혀 달랐고 둘은 첫날부터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말씀드렸죠. 하지만 이만희의 영화에서 장르(신성일)와 풍경(문희)이 그렇게 쉽사리 관계할 리 없습니다. 문희의 말을 듣고 신성일은 잠시 생각해본 뒤에 굉장히 엄숙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며 문희에게 돈을 건넵니다. “너를... 산다.” 바로 이 대사, <원점>의 가장 해괴한 대사 가운데 하나를 이와 관련해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오직 거래로만 성립될 수 있는 관계. 그런데 이 거래는 풍경에 속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장르에 속하는 것일까요? 이런 모호함을 통해서만 풍경과 장르는 잠시나마 함께 공존할 수 있습니다. 이 모호함이 무너지는 순간 이 대사는 비속한 풍경의 영화의, 풍속화의 대사가 되거나 비속한 장르의 영화의, 신파극의 대사가 되어버릴 겁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원점>은 묘하게 균형이 깨지지 않고 모호한 채로 남아요. 문희의 눈물도 그렇고요. 이런 걸 우리는 종종 부조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부조리는 이만희의 스타일이 아니라 그의 영화를 지탱하는 필수적인 기능으로 요청되는 겁니다. 대부분의 이만희 영화에서 이점을 감지할 수 있지만 <원점>은 이게 스크린에 아주 전면적으로 드러나서 흥미진진한거죠. 이만희가 여기서 하고 싶었던 것을 떠올려 봅니다. 저런 한국 사람들이, 저런 데 모여서, 저런 풍속화적 상황을 만들어내는 가운데, 저런 스파이와, 저런 킬러와, 멜로드라마의 주인공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는 장르가 과연 성립되는가?

풍경과 장르의 대결이라는 오늘의 주제와 관련해서, 그리고 부조리의 기능과 관련해서, <암살자>처럼 둘 모두를 한꺼번에 무화시켜버리는 극단적인 구조적 니힐리즘의 영화도 떠올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해방 직후 신탁통치라는 사안을 두고 좌우대립이 격화된 때, 한국전쟁 직전의 분명한 역사적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영화에요. 어쩐지 매우 이만희답게 알쏭달쏭한 이유로 고뇌에 빠져 있는 킬러로 장동휘가 나오는데요. 역시 고뇌의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혹은 납득이 안 됩니다. 장동휘는 암살 대상을 찾아 하룻밤 동안 춘천호반 인근을 배회하는데 사실상 배회 자체가 목적이 아닌가 여겨질 지경이어서 어떤 식으로도 장르를 영화에 끌어들이지 못해요. 역시 여성이 주요하게 나오는데 장동휘가 돌보고 있는 소녀인 전영선이죠. 그런데 이 소녀는 장동휘가 일을 하러 간 밤새도록 그녀를 감시하러 온 남자와 집안에서 소소한 놀이를 하는 게 전부라서 어떤 식으로도 풍경을 영화에 끌어들이지 못해요. <원점>에서 문희가 초반부에 아파트에 같이 온 손님과 함께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방에만 머물고 끝내 신성일과 만나지 못하는 식이라면 이런 느낌일까요? 구조적 니힐리즘, 나아가 구조적 자학의 인상까지 풍기는 <암살자>를 보고 있으면 역시 장동휘가 주연을 맡았던 <검은 머리>에서 내뱉은 참으로 해괴한 대사가 떠오릅니다. “명령한다. 나를 처벌하라!”는 대사요. 이건 어쩐지 이만희가 이만희 자신에게, 이만희의 영화가 영화 자체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이하 내용은 생략)

2024-07-14

터칭 스페이스: 스마트휴먼의 몸짓과 장소

 

※ 아래는 격월간 사진잡지 《보스토크》 45호(2024년 5월 20일 발행)에 실린 글이다.


<와일드 투어>


텔레비전, VCR, 캠코더, 컴퓨터, 그리고 스마트폰 등은 동적 이미지를 기록하고 재생하는 장치로서 20세기에 뤼미에르적 시네마토그래프가 누리고 있던 특권을 서서히 잠식해 왔다. 이 대체 과정이 거의 완료된 지금, 시네마토그래프 장치는 그것을 대체한 장치들이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디자인적 요소로만, 심지어 어휘로만 남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와 관련된 활동, 프로그램, 어플리케이션 등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곤 하는 퍼포레이션이 있는 필름 모양 아이콘이나, ‘홈시어터’, ‘아이무비’, ‘시네마(틱) 모드’라든지 여전히 영화 크레딧에 나타나는 ‘a film by’ 같은 어휘들을 떠올려보라. 여하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 또한 이처럼 전자적, 디지털적으로 변용된 동적 이미지의 특정한 양식을 예전에 쓰던 표현 그대로 영화라고 부르는 데 별반 거부감이 없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과연 스마트폰을 텔레비전, VCR, 캠코더, 컴퓨터 등과 같은 맥락에 두고 봐도 괜찮은 것일까? 역사적으로 영화는 그 맞수가 등장할 때마다 크게 이중의 방식으로 이에 대응해왔다. (다만, 경제적이고 산업적인 차원에서의 대응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첫째는 새로운 매체의 디스플레이 화면을 영화적 스크린으로 수용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는 영화적 스크린을 그러한 디스플레이에 적응시킬 방법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시도의 초기적 형태로는 주사선이나 픽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디스플레이 화면을 사실적 효과(페이크 다큐멘터리)나 미학적 효과(글리치 아트)를 얻기 위해 전면에 내세우는 사례들이 있다. 한때 영화 이론이나 비평이 주로 관심을 기울인 것도 바로 이쪽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새로운 매체를 다루는 사람의 몸짓과 그가 가로지르는 장소들이 스크린에 비치는 방식이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 캠코더를 들고 금지된 장소로 향하는 학생들, 무언가 비밀스러운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 어두컴컴한 방의 컴퓨터 앞에서 씨름하는 해커 등은, 나란히 앉아 스크린에 비친 영화를 보는 커플만큼이나 한때 영화 스크린에 범람하던 익숙한 클리셰였다. 이렇게 말해도 좋겠다. 20세기의 영화는 이런 몸짓들을 스크린에 비추는 방식을 고안해냈다고. 다정하게, 우스꽝스럽게, 위태롭게, 무시무시하게, 끔찍하게, 긴장되게, 행복하게, 쓸쓸하게, 그리고 온갖 방식으로.

그런데 스마트폰은 어떤가? 이것은 앞서 사례로 든 여러 몸짓을 매우 단조로운 몸짓으로 축소한다. 이를테면 한 손 또는 두 손으로 스마트폰을 잡고 다소 구부정하게 머리를 숙인 채 디스플레이 화면을 들여다보는 그런 몸짓처럼. 사람들이 이처럼 단조로운 몸짓으로 모든 장소를 가로지를 때, 과연 영화는 이것을 어떻게 포착해야 할까? 

이런 영화적 상황을 가정해보자. 때는 20세기 말의 언젠가, 외국의 어느 도시 공항에 막 도착한 한 남자가 있다. 숙소로 예약해 둔 호텔에 가려고 택시를 잡으려는데 녹록지 않다. 이래저래 씨름하다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에 도착한다. 프론트데스크에 가서 체크인을 하는데 아내에게서 전보가 하나 와 있다. 그는 로비의 공중전화 부스에 가서 집에 전화를 건다… 유능한 감독이라면 영화에서 대여섯 개 정도의 장면으로 전개될 이 상황에서 각양각색의 흥미로운 몸짓과 움직임을 연출해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면? 공항에 도착해서 스마트폰으로 예약한 우버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한다. 택시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정보를 살펴보고 메일과 문자를 확인한다. 그의 스마트폰으로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와서 한동안 통화한다. 호텔에 도착해 스마트 체크인을 한다… 장면은 바뀌어도 거의 모든 몸짓이 스마트폰과 결부되다 보니 상당히 유능한 감독이어도 시각적으로 매력적인 화면의 연쇄를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몸짓이 장소의 성격과 별다른 관계가 없다 보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남자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다 이따금 뭔가를 보곤 반응하는 그의 얼굴 클로즈업을 교차시키는 정도가 고작일 수밖에 없다. 영화적 장소는 비가시적인 배경이 되어 물러나게 된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 시대의 영화작가들은 스마트폰을 다루는 몸짓을 영화적으로 수용하고 그러한 몸짓이 펼쳐지는 장소를 재창안한다는 문제를 어떻게 직면하거나, 우회하거나, 또는 회피하고 있는 것일까? 흡연이라고 하는 지독히 단순한 몸짓마저 20세기의 영화를 대표하는 몸짓들 가운데 하나로 전환해낸 그 탁월한 역량─스크린에 등장했던 그 숱한 매력적인 흡연가들을 떠올려보라─을 영화가 스마트폰에 대해서도 다시 발휘할 수 있을까?


*

곧바로 최근의 영화들을 살펴보는 대신, 20세기의 끝자락에 만들어진 계시적인 작품 하나를 기억에서 잠시 끄집어내 보자. 소재의 성격을 지나치게 충실히 좇은 결과 미학적으로 파국을 맞은 빔 벤더스의 로드무비 <이 세상 끝까지>(1991)─원제 ‘Until the End of the World’를 영화의 내용을 고려해 새기면 ‘세상의 종말까지’나 ‘세상이 끝날 때까지’가 더 적절해 보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국내 개봉 당시의 제목을 따르기로 한다─가 그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대학 3학년 때인 1994년 봄에 처음 보았다. 갓 일본에서 출시된 레이저디스크를 누군가 구해와 학생회관 1층에 있던 음악감상실에서 이 영화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해 마지막 날 연강홀(현 두산아트센터)에서 이 영화가 정식 개봉되었을 때 다시 보았다. 일본판은 상영시간이 3시간에 달했지만, 당시엔 으레 그러했듯 국내 개봉판은 심하게 단축되어 2시간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사실 그 해에 벤더스는 거의 5시간에 이르는 감독판을 내놓기도 했었지만, 실제로 이 판본을 접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이 영화는 어떤 측면에서 봐도, 그리고 어떤 판본으로 봐도 성공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다만 감독판에서는 벤더스가 그의 작업에서 요체가 되는 강박을 그것이 급기야 소진되기에 이르는 지점까지 밀고 가는 과정이 지치도록 오롯이 감지되기는 한다. 일찍이 철학자 질 들뢰즈는 이 벤더스적 강박을 간결하게 짚어낸 바 있다. 그것은 두 계열의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을 가지고 혼합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런 시도를 처음 제안한 이는 프란츠 카프카이다.) 두 계열의 한쪽에는 이동-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translation)의 수단들이 있는데, 바로 선박, 자동차, 기차, 비행기 등이다. 다른 한쪽에 있는 것은 표현-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expression)의 수단들로, 편지, 전화, 라디오 및 상상 가능한 모든 ‘인터폰’과 시네마토그래프 장치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두 계열의 혼합은 이동 수단 위에 표현 수단을 얹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기차 안의 전화, 배 위의 우편함, 비행기 안의 영화 등등.

아무래도 벤더스는 <이 세상 끝까지>를 촬영하기 전에 영화에 대한 들뢰즈의 저서를 읽은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그 책에서 자신에 대해 들뢰즈가 기술한 부분은 읽은 것 같다. 영화가 제작된 때를 기준으로 근미래인 1999년을 배경으로 삼은 이 영화는 들뢰즈가 카프카적 제안을 벤더스가 이어받은 것이라고 본 두 계열의 “상상 가능한” 온갖 혼합물들이 등장한다. 벤더스는 이 영화가 SF 장르에 속함을 구실 삼아 오늘날 우리에게는 익숙한 것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거나 상용화되지 않았던 장치들까지 마음껏 끌어들였다. 보트 위의 캠코더, 자동차 안의 캠코더, 버스 안의 캠코더, 자동차 안의 대시보드 모니터와 내비게이션 프로그램, 기차 안의 화상전화, 비행기 안의 개인 모니터… 그러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면 우주선에 탄 주인공이 지구의 친구들과 화상으로 그룹 통화를 하는 모습까지 보게 된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 끝까지>의 인물들은 어쩐지 오늘날 유튜브의 ‘여행 크리에이터’들을 꼭 빼닮은 것 같기도 하다. 기묘한 것은, SF적 상상이 가미된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이 SF적 상상이 가미된 디자인과 더불어 화면에 들어오게 되자, <도시의 알리스>(1974)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1976) 같은 영화에서 그토록 멋지게 발휘되었던 벤더스의 능력이 사라져 버린다는 점이다. 커뮤니케이션 수단들과 그 혼합물들을 다루는 인간의 몸짓을 영화적으로 포착하는 능력 말이다.


사진 1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은 벤더스가 표현-커뮤니케이션 수단에 대한 상상을 밀고 나가 무언가를 보는 사람의 시지각 정보만이 아니라 두뇌 반응까지 동시에 기록하고 이를 맹인도 볼 수 있게 두뇌로 직접 전송하는 장치를 끌어들이면서다. 오늘날의 VR 기기와 의료용 MRI 기기를 접속한 형태에 가까운 이 장치는 나중에는 인간이 꾸는 꿈마저도 생화학적 정보로 기록해 재생하게끔 개량된다. 어쩌면 <이 세상 끝까지>에서 미적으로 흥미를 끄는 유일한 것은 글머리에서 언급한 바 새로운 매체의 디스플레이 화면을 영화적 스크린으로 수용했다는 점이겠다. 이 영화가 등장하는 꿈의 이미지들은 일종의 글리치 아트를 떠올리게 하는데, 영화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이 회화적 이미지들은 초기 아날로그 HD 비디오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정작 저 미래적 장치를 다루는 인간의 몸짓은 그야말로 완전한 마비 상태에 가까운 것이 되어버린다. 꿈을 기록하기 위해 취해야 할 몸짓은 그저 자는 것이다. 이렇게 기록된 자신의 꿈 이미지들에 매혹된 사람들은 꿈의 기록이 이루어지고 나면 동굴에 틀어박혀 그 이미지들이 재생되는 휴대용 소형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다(사진 1). 마치 오늘날의 우리가 애플리케이션들을 가로지르며 우리의 욕망이 연신 디스플레이되는 스마트폰 화면을 종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진 2


<이 세상 끝까지>에서 벤더스는 자신의 강박을 밀고 나가면 논리적으로 어떻게 귀결되는지를 보았다. 두 커뮤니케이션 계열의 혼합이란 각각의 계열이 아직 극단적이지 않을 때나 가능하다. 우리가 온갖 표현 수단들을 동원해 자기의 내면을 가시화하고 향유하는 일에만 몰두할 때 우리의 움직임은 중단된다. 벤더스는 이 영화를 치유의 이야기로 끝맺고 있지만, 언젠가 도래할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극단적 스펙터클과 결부된 몸짓을 구원하는 데는 실패한다. 그가 치유의 이동 수단으로 제시하는 것은 의미심장하게도 우주선이다. 우주선에서 화상으로 이루어지는 그룹 통화는 극단에 이른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에 어울리는 궁극의 혼합물인 걸까(사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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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더스가 그의 야심적인 실패작을 내놓은 지도 30여 년이 흐른 지금, 오늘날의 극단적 스펙터클 장치는 그가 상상했던 것만큼 번잡하지는 않다. 당신이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는 스마트폰을 보라. 그런데 이 기기를 조작하는 몸짓을 영화적으로 포착하는 일은 보기보다 쉽지 않다. 그래서 상당수의 영화 예술가들은 스마트폰을 가능한 화면에 보여주지 않으면서, 심지어 스마트폰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세계인 양 시침 뚝 떼고 영화를 만드는 편을 택하기도 한다. 이런 은폐와 배제는 때로 독특하게 매력적인 영화적 세계를 낳기도 한다.

홍상수의 <여행자의 필요>(2024)에는 스마트폰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상당히 부자연스럽다고 해야 할 정도인데 신기하게도 영화를 보는 동안 이 사실을 깨닫기는 쉽지 않다. 설령 자각하더라도 이내 잊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런 배제가 없었더라면 이 영화의 많은 장면은 지금과 다른 것이 되거나 아예 사라져야 했을 터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한국 사람들에게 프랑스어 개인 교습을 하는 이리스는 암기해야 할 문장을 굳이 그때그때 수첩에 펜으로 적어 건넨다. 그녀는 한국 남자 인국의 집에서 동거하고 있는데,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집에 불쑥 찾아와 곤란한 상황이 된다. 어머니가 돌아가고 나자 인국은 잠시 집을 나가 있던 이리스를 찾아 동네를 배회한다. 만일 홍상수가 등장인물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이리스는 수첩에 펜으로 문장을 적는 대신 문자나 메일로 보낼 것이고, 집에 들르겠다는 어머니의 문자나 전화를 받은 인국은 곤란한 상황을 미리 피할 수 있게 되고, 나중에 그는 이리스에게 이제 집에 돌아와도 좋다고 또 문자나 전화를 할 것이다. 이런저런 몸짓이 모두 스마트폰을 만지는 몸짓으로 통합되고, 어떤 사물들은 화면에서 사라지고, 배회의 장소들은 화면에 끼어들 틈이 없게 될 터다. 

홍상수의 영화적 세계는 스마트폰의 부재를 통해서만 가장 근사하게 활성화되는 그런 세계다. 물론 이 영화에 스마트폰이 아예 부재하지는 않는다. 이리스가 만난 사람들이 윤동주의 시 번역문을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찾아 그녀에게 건네는 장면들이 있다. 검색에 의존하지 않고 시를 곧바로 그 자리에서 번역해 말로 들려준다는 건 정말이지 너무 무리한 설정이라 생각했던 탓일까? 여하튼, 이렇게 해서 커뮤니케이션에 지연을 도입하는 시어(詩語)의 역량이 드러난다. 홍상수의 세계에 잠시 모습을 비춘 스마트폰 덕분에.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3)에서 하라사와 마을의 ‘심부름꾼(べんりや)’임을 자처하는 타쿠미는 하교 시간에 맞춰 외동딸인 하나를 데리러 가는 것을 깜빡하곤 한다. 그때마다 하나는 마을의 숲을 가로질러 혼자 귀가하곤 하는 것 같다. 대체 그는 학교 교사들에게 왜 미리 전화해두지 않는 것일까? 어느 날 하나가 실종되어 부랴부랴 찾아 나설 때도 그가 경찰서든 어디든 서둘러 전화해 알리는 모습 같은 것은 화면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 스마트폰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마을에 설립 예정인 글램핑장 설명회 차 도쿄에서 온 두 사람 중 하나인 마유즈미의 스마트폰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해 주기도 하고, 나중에 그들이 다시 마을로 찾아올 때 만날 장소의 위치를 그녀의 스마트폰으로 공유해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쿠미의 스마트폰은 결코 화면에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에서 스마트기기나 디지털 디스플레이가 화면에 보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그때마다 어김없이 부정성과 연관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마구치는 이것들을 좀 거북하게 느끼는 것 같다. 글램핑장 설립을 추진하는 플레이모드사(社)가 컨설턴트와 진행하는 치졸한 온라인 회의의 모니터 디스플레이, 이 회사의 두 직원인 마유즈미와 다카하시가 하라사와를 다시 찾을 때 자동차에 내비게이션용으로 거치해 둔 다카하시의 스마트폰에 뜨는 데이팅 앱의 알림(“축하드립니다! 모카 씨와의 매칭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을의 다혈질 청년이 플레이모드라는 회사가 어떤 곳인지를 검색해 저녁 식사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태블릿 PC의 디스플레이어 등등. 이런 것들을 다룰 때면 하마구치의 연출은 어색하고 불안정하다. 따라서, 긴 시간 동안 아무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일 없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객석에서 발언을 경청하고 있는 글램핑장 계획 설명회 장면만큼이나 하마구치의 영화적 세계가 어떤 부재 내지는 배제 위에 성립된 부자연스러운 세계인지 분명히 드러나는 곳도 없을 것이다. 그의 연출은 이런 상황에서 때로 비범한 힘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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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회나 회피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일까? 스마트폰을 자연스럽게 화면에 노출하면서도 그것을 다루는 몸짓을 단조롭지 않게 포착하고, 스마트폰 사용으로 인해 스크린에 나타날 가능성이 사라진 장소들을 어떻게든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이정홍의 장편 데뷔작 <괴인>(2023)에는 이 문제와 관련해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꺼내 들며, 이정홍은 종종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화면 자체를 스크린에 끌어들이기도 한다. 이런 부분의 연출에서 <괴인>에 유별나게 특이하거나 비범한 구석은 없다. 게다가 주인공 기홍이 방이나 벤치에 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릴 때면 어쩔 수 없이 몸짓의 마비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부자연스러운 장면에 속한다. 그런데 이 부자연스러움은 홍상수나 하마구치의 그것과는 다르다. 스마트폰의 부재가 아니라 존재로 인한 부자연스러움이기 때문이다. 

기홍이 그의 자동차 지붕을 찌그러뜨린 하나와 함께 카센터에 들렀을 때 그가 정비사와 함께 흡연구역으로 가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 여기에는 의자가 두 개 놓여 있고 둘은 거기에 앉는다. 이때 하나가 흡연구역으로 들어온다. 정비사는 담배 피우실 거냐며 자리를 내주려 하는데 하나는 자기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면서 계단 쪽에 가서 앉는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는 이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이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담배도 피우지 않는 하나가 대체 왜 흡연구역으로 와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부자연스러운 설정을 통해 이정홍은 스마트폰이 담배와 유사하게 다룰 수 있는 영화적 사물일 수 있음을, 흡연구역이 그것의 영화적 장소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스마트폰을 다루는 몸짓은 대부분 담배를 피우는 몸짓과 교환가능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디서나 담배를 피울 수 있던 시절은 오래전에 지나갔지만, 스마트폰은 (적어도 아직은) 어디서나 만지작거릴 수 있으니까.

최근 국내 개봉된 영화들 가운데 스마트폰을 다루는 몸짓을 영화적으로 포착하는 문제와 관련해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미야케 쇼의 <와일드 투어>(2018)다. 이 영화는 스마트폰으로 찍은 영상을 직접 스크린에 수용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노라면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몸짓들도 피하지 않으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영화적으로 흥미롭게 재구성될 수 있을지 여러 사례들을 통해 보여준다. 그 가운데 하나를 떠올려보자. 문화센터의 바이오리서치 프로그램 조력자를 맡고 있는 남자 대학생이 중학생들과 산에 올라 답사하다가 혼자 스마트폰으로 주변을 촬영하고 있는데 나뭇가지에 버섯 같은 게 있다면서 다가와 앉는 여학생이 있다. 그러자 그는 그녀에게 지퍼백을 하나 꺼내 건네주고 그녀가 나뭇가지에서 버섯을 따는 동안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얼마 후 여학생은 그에게 여자친구랑 문자질하냐고 물어보고, 그는 아니라고 하면서 추위를 느끼는지 입으로 손을 후후 불며 또 스마트폰을 보고, 그의 이런 모습을 여학생이 슬쩍 바라보고… 이런 사소한 말과 몸짓들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 장면에선 가히 서부극적인 긴장감이 넘쳐난다.


사진 3
사진 4


이 긴장감이 실로 서부극적인 것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나중에 드러난다. 미야케는 짐짓 스마트폰이 스크린에 범람하는 것을 내버려 두는 척하면서 실은 스마트폰으로는 어쩐지 꺼림칙한 표현-커뮤니케이션의 순간을 찾아낸다. 그것은 바로 고백의 순간이다. 이 순간 스마트폰은 자취를 감춘다. 중학교 3학년인 타케가 그의 문화센터 프로그램 조력자인 대학생 우메에게 손편지를 써서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그녀는 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그리고 어색한 분위기를 털어내고자 뭔가 함께 마실 음료수를 사 오겠다고 말하며 타케의 왼쪽 팔을 살짝 만진 후에 자리를 떠난다. 그녀가 떠난 후 타케는 그녀가 만진 자리를 오른손으로 가볍게 만져 본다(사진 3).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야말로 기습적으로, 우리는 미야케가 여기서 존 포드의 무성영화 <단지 친구일 뿐(Just Pals)>(1920)의 한 장면을 영화의 제목과 더불어 은밀하게 불러내는 광경을 보게 된다. 이 영화에서 마을의 백수인 빔은 빌이라는 떠돌이 소년을 보살피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여교사 메리가 빔을 찾아와 빌을 학교에 보내라고 권유한다. 그녀는 빔의 왼쪽 팔을 살짝 만진 후에 자리를 떠난다. 그녀가 떠난 후 빔은 그녀가 만진 자리를 오른손으로 가볍게 만져 본다(사진 4).

언젠가 고백의 순간마저도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해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으로 대체되는 날이 올까? 아니면 그런 날은 이미 와 있는데도 나만 모르고 있는 것일까? 고백의 순간마저도 그렇게 대체된다면 아무리 미야케라 해도 그런 세계를 사는 스마트휴먼의 몸짓과 장소를 영화적으로 포착하기는 정말이지 어려울 터다.


2024-07-04

폐허와 역사

 

※ 아래는 격월간 사진잡지 《보스토크》 43호와 44호에 실렸던 두 편의 글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왕빙의 사진 <이름 없는 남자>


엔데믹 이후 맞이하는 첫 신년을 기다리면서 왕빙의 데뷔작 <철서구>를 오랜만에 다시 보았다. 상영시간이 554분에 달하는 터라 자정 무렵부터 보기 시작해 1부(‘공장’)와 2부(‘얀펀 거리’)를 보고 눈을 좀 붙였다 일어나 점심을 먹고 3부(‘철로’)를 내처 보고 나니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 영화에 곧바로 이어서 보려고 준비해 둔 블루레이도 하나 있었지만 잠시 미루었다 몇 시간 뒤 자정 지나 신년에 보기로 했다.

<철서구>의 최종 편집본이 처음 발표된 해는 2003년이다. 2002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선보였던 5시간짜리 중간 편집본은 국내에서는 ‘틱시지구’라는 제목으로 같은 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나는 이 편집본을 복사한 비디오로 이 영화와 처음 만났다. ‘틱시지구’는 이 다큐멘터리의 주요 무대인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톄시구(铁西区)의 영어식 표기인 ‘Tiexi Qu’를 우리말로 어색하게 옮긴 듯한 제목이다. 그런가 하면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는 기묘하게도 최종 편집본에서 3부만을 따로 떼어 ‘티에시구(3): 철로’라는 제목으로 상영했었다. 서구에서는 ‘铁西’라는 한자를 ‘철로의 서쪽’으로 풀어 옮긴 ‘West of the Tracks’라는 제목이 통용되고 있다. 여하간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 이 영화는 ‘틱시지구’도 아니고 ‘티에시구’나 ‘톄시구’도 아닌 ‘철서구’라는 제목으로 익숙하게 불리고 있다.


<철서구>


집에서 볼 연말 영화로 굳이 이 다큐멘터리를 고른 것은 발표 20주년을 기념한다거나 하는 따위의 형식적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그런 기념은 시네마테크나 영화제의 몫이(지만 안타깝게도 종종 방기된)다. 3년 동안의 팬데믹은 정말이지 20세기가 흔적과 잔향으로서도 완전히 끝나버렸다고 느끼게 할 정도였지만 짜장 21세기적인 것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분명치 않았으며, 그래서 이번 연말에는 20세기적인 것의 소멸 과정과 잔존 양식을 생생히 구체적으로 담아낸 영화를 보면서 이것저것 생각해보고 싶었다. 이때, 중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공업지구였던 선양 톄시구의 해체 과정을 1999년 10월부터 2001년 4월까지 기록한 왕빙의 <철서구>는 세밑 종일의 영화로 더할 나위 없었다. 


폐허의 프롤레타리아


20세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을 무렵,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베이징에서 TV용 영상물들을 만들던 왕빙은 친구에게서 빌린 디지털카메라(아마추어 홈비디오용이라 할 3CCD 파나소닉 Mini-DV)를 들고 선양시로 향했다. 그에게 선양이 낯선 곳은 아니었다. 베이징전영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하기 전 그는 선양에 있는 루쉰미술학원에서 사진을 공부하며 거기서 3년을 살았기 때문이다. 졸업 후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온 그는 한때 전성기를 누렸으나 이제는 낙후되어 여러 국영기업이 도산하고 수많은 노동자를 해고하며 변화를 겪고 있는 톄시구를 구석구석 기록하며 2년을 보낸다. 그 와중에 새로운 밀레니엄이 도래한다.

톄시구는 제국주의 일본이 괴뢰국인 만주국을 설립한 직후인 1934년에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조성한 공업지구로, 선양시를 가로질러 이곳과 중국의 다른 지역을 잇는 화물 운송용 철로 또한 당시 일본에 의해 처음 놓인 것이다. 톄시구가 전성기를 맞은 것은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이후인 1980년대로, 문화혁명 시기에 농촌으로 하방되었던 이들이 돌아와 이곳의 공장들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급기야 지구 내 거주민 수가 한때 백만 명이 넘기도 했다. 톄시구의 노동자 거주 구역인 얀편 거리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 군수품 공장에서 일하러 온 이들이나 국공내전을 피해 도망쳐 온 이들이 모여 살면서 조성된 곳이었으나, 왕빙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이미 재개발을 앞둔 터라 거주민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집들은 무너지면서 점점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처럼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퇴적물이 역사적으로 어지러이 교착된 톄시구라는 장소는 어떤 면에선 20세기 자체를 품은 대단히 중국적인 지층이다. 분명 왕빙의 관심은 이 장소의 역사적 지층 주변에서 맴돌지만, 그의 영화는 이곳과 관련된 어떤 역사적 기록물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톄시구에서 운행하는 열차를, 가까스로 운영 중인 제련 공장과 도금 공장과 판금 공장을, 얀펀 거리의 집들과 가게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닐 뿐이다. (몇 년 전 파리에서 열렸던 왕빙의 전시 제목이 ‘걸어 다니는 눈’이었던 것을 떠올려 본다.) 이렇다 할 촬영팀도 없이 혼자서 말이다. 공장과 열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얀펀 거리를 일없이 배회하는 청년들, 해고된 또는 퇴직한 노동자들, 이런저런 잡일을 하며 빌붙어 사는 넝마주이 등의 행위와 몸짓을, 그리고 그들이 토해내는 이야기를 왕빙은 별다른 장비 없이 비디오카메라와 거기 내장된 마이크로 담아냈다. 이렇게 기록된 것들을 아홉 시간이 넘는 분량으로 편집하면서, 그는 장소가 일종의 인물처럼 비치고 인간성이 장소성과 불가분하게 얽히는 지점까지 밀고 나간다.

 <철서구>를 관장하는 장소의 생물학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영화가 자본주의 도입 이후 동시대의 다른 중국영화들이 여간해선 진입하지 못했던 영역에 발을 들이게 한다. 중국인의 삶에 구체적으로 천착하면서도 종족적 형상으로 쉬이 응집되지 않는 진정 계급적인 형상을 발견하는 것 말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는 어떻게 종족에 대한 구체적 기록이 프롤레타리아의 보편적 존재 증명이 될 수 있는지의 문제다. 『공산당 선언』 말미에 등장하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라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호명, 여기서 독일어로 ‘aller Länder’에 해당하는 ‘만국의’라는 표현은 모든 대지와 모든 나라에 동시에 속하면서 결코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지극히 제한된 대지에 머물면서도 모든 나라를 (초월하지 않고) 가로지르며 솟아오르는 프롤레타리아의 형상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 

소비에트 시기 러시아영화는 에이젠슈테인이나 베르토프의 작업을 통해 주저 없이 이 문제로 돌진했던 반면, 중국영화는 <황토지>(1984)의 천카이거나 <붉은 수수밭>(1988)의 장이머우에 이르기까지도 농민-대지-중국의 강고한 결속을 이어갔다. <소무>(1997)의 지아장커로 대표되는 1990년대 이후 등장한 독립영화 감독들은 농민을 인민으로 확장하고 대지를 도시로 연장하면서도 중국이라는 항을 만국적 보편성으로 가로지르는 일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철서구>에서 왕빙은 톄시구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급기야 한 퇴직 노동자의 입에서 나온 다음과 같은 놀라운 발언을 포착하기에 이른다. 이 노동자는 중국인으로서는 무척이나 수치스러운 존재일지 모르지만 더할 나위 없이 계급적인 존재로서 명확히 자기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 프롤레타리아적이다.


나한텐 해고당한 아들이 셋이고 해고당한 며느리가 둘이야. 걔들이 다니던 공장들은 다 파산했어. (…) 난 열여섯 살 때 여기로 왔는데 올해 일흔셋이야. 원래는 허베이성 출신이지. 전쟁 때문에 고향을 떠났어. 일본인들이 일찌감치 그 지역을 점령해서 손에 닿는 사람이면 아무나 징집하고 있었거든. 여기는 훨씬 안전했어. 난 이리로 도망쳐 와서 일본 공장에서 일했어.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




<철서구>


주지하다시피, 공장과 철로는 영화의 기원과 맞닿아 있는 소재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초기 영화들 가운데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1895)은 대중적으로 상영된 최초의 영화로 알려져 있고 <열차의 도착>(1896)은 진정 현대의 신화라고 해도 좋을 위치에 있는 작품이다. 왕빙의 영화 도입부는 톄시구의 공장들 사이로 지나가는 열차의 맨 앞에서 찍은 쇼트들로 이루어져 있다. 뤼미에르의 영화와는 달리,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도, 공장에서 나오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인민의 형상을 대신해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은 길게 이어진 철로, 그리고 그 양옆에 늘어선 휑한 건물들과 벽들의 거무튀튀한 형상뿐이다. 사방이 온통 눈으로 뒤덮인 이곳은 분명 중국의 한 특정한 장소이지만 따로 주어진 정보가 없다면 그 특정성을 감지하기란 쉽지 않다. 열차 맨 앞에서 왕빙이 들고 있는 카메라 렌즈에 이따금 눈이 날아와 달라붙는다. 

이처럼 그는 영화의 기원을 불러들이면서 그것을 지우고,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꿈이 어지러이 교착된 중국의 구체적 장소를 관통하면서 인민을 지우고 대지를 지우고 국가를 지운다. 하지만 거기 남는 것은 공백이 아니라 폐허다. 공백과는 달리 폐허에는 여전히 흔적과 잔향이 있다. <철서구>에서, 그리고 이후 이어진 여러 작업에서 왕빙은 20세기의 폐허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형상을 탐색하는 일에 천착한다. 다만 그 형상은 지금 당장은 역사 바깥에 있다. 이를 “근원적 절제”라고 부르는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어떤 폐허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한 사람에 오롯이 집중한 왕빙의 <이름 없는 남자>(2009)가 “물론 중국의 민중들일 테지만, 분명 그것을 넘어서는” 민중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본다(『민중들의 이미지』, 여문주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3).

그런데 이러한 탐색이 여전히 유효할까? 이름 없는 프롤레타리아는 어떻게 호명(이름 부르기)할 수 있을까? 엔데믹 이후 맞이하는 첫 신년을 기다리며 오랜만에 다시 본 <철서구>는 이런 물음을 불러일으킨다. 어느새 자정이 지나 신년이다. 감상을 잠시 미뤄두었던 블루레이 디스크를 플레이어에 넣고 재생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갈 무렵, 뤼미에르 형제와 그들의 촬영기사들이 세계 곳곳에서 이름 없는 존재들을 찍은 영화들이 모니터에서 빛난다. 


역사를 노래하는 부기우기


왕빙의 <철서구>가 처음 공개되고 나서 1년여가 지난 2004년 6월, 칼아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영화를 만들어온 미국 영화작가 제임스 베닝은 1975년에 손에 넣은 후 30년 가까이 써 온 볼렉스 16mm EBM 카메라를 들고 고향인 위스콘신주 밀워키로 향한다. 27년 전에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 <원 웨이 부기우기>에 나오는 장소들을 찾아가 카메라를 그때 그 자리에 정확히 다시 세우고 모든 쇼트를 다시 촬영할 계획이었다. 

1970년대 후반이면 주로 철강업과 광산업으로 한때 호황을 누렸던 밀워키가 침체기로 접어들던 무렵이다. 베닝이 이 영화를 촬영한 이듬해인 1978년부터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밀워키 같은 도시의 성장을 이끌었던 산업은 이후 점차 중국 경제를 견인하는 자리로 이동하게 될 터였다. 공장들은 빠져나가고 가축 사육장은 거의 문을 닫은 밀워키의 공업지구에서 베닝은 “그곳의 쇠퇴를 기록하고자 했다”. 영화의 기원과 맞닿아 있는 두 가지 소재, 즉 공장과 철로는 세기 전환기에 촬영된 왕빙의 영화와 1977년에 촬영된 베닝의 영화를 공평하게 가로지르는 몰락의 기호이기도 하다.


<원 웨이 부기우기>(위)와 <27년 후>(아래)


<원 웨이 부기우기>는 각각 1분 길이의 쇼트 60개로 이루어진 영화인 만큼, 거기에 새로 ‘리메이크’한 것을 이어서 덧붙이면 꼭 2시간짜리 영화가 될 것이었다. 다만 새로 촬영한 60개의 쇼트에도 사운드트랙은 27년 전의 것을 그대로 입힐 계획이었다. 예전에 각각의 쇼트에 모습을 비췄던 베닝의 가족과 친구들이 이번에도 그대로 나올 것이지만, 그 사이에 세상을 떠서 출연할 수 없는 경우에는 대체할 사람을 찾는 대신 그의 부재를 그대로 드러낼 작정이었다. 풍경이 완전히 바뀐 경우에도 유사한 풍경을 찾는 대신 예전의 그 자리에 놓인 카메라에 포착된바 지금 그대로를 보여줄 터였다. <27년 후>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런데 ‘다큐멘터리적’인 왕빙의 영화와 달리 ‘구조적’인 베닝의 영화는 우리가 흔히 역사라고 부르는 것과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인다. 역사란 무엇인가? 그것을 사실이나 사건, 정보나 이야기 등의 체계적 집적으로 간주한다면 베닝의 영화는 역사와는 아예 무관하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27년의 차이를 철저히 공백으로 두고 병치된 이중적 구성물을 보면서 이것이 기억과 시간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밀워키 태생으로 이 도시가 호황을 누리던 시절 거기서 유년기를 보냈던 베닝 자신의 개인적 기억 같은 것은 영화에 없다. 여기서 기억이란 이 영화의 구조에 호기심을 느낀 관객이 저마다 마음에 나름의 방식으로 그려가는 모호하고 불확정적인 무늬일 터다. 

하지만 나는 베닝의 영화에 대해 말하면서 기억이나 시간보다는 역사라는 단어를 사용하길 고집하겠다. 그 이유는 우선 그것이 낡고 고리타분하며 볼품없고 거추장스러운 단어, 즉 우리의 일상적 어휘 목록에서 사라져가는 다분히 ‘인간적’ 흔적을 간직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이나 시간 개념을 얼마든지 비인격적으로 고찰할 수 있지만 역사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더불어, 베닝의 영화는 역사 개념을 지나치게 크고 넓고 보편적이고 포괄적이며 대의에 사로잡힌 과대망상증적 용법에서 해방시켜 그것이 영화와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고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때 영화와 역사에 대한 물음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형태를 띠게 된다. (이미지라는 개념을 작게는 하나의 쇼트에서 크게는 한 편의 영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때) 역사는 이미지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이미지 사이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가? 그렇게 출현한 역사는 얼마나 지속되는가? 역사영화의 진정한 작가로서의 제임스 베닝, 얼마나 근사한가!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기술적 이미지와 역사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고찰한 선구자들 가운데 하나다. 미국에서 지낸 말년에 쓴 『역사: 끝에서 두 번째 세계』(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12)에서, 그는 역사적 현실과 사진적 현실은 모두 정해진 탐구 방법이 없음을 지적하며 사진을 통해 우리는 “사물을 넘어서는 사유가 아닌 사물을 관통하는 사유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외부 세계의 찰나적 현상을 망각에서 구원하는 사진의 능력에 빗대어 역사 개념을 재고해본다. 그가 역사 개념을 이른바 역사주의라 불리는 과대망상증적 용법에서 해방할 가능성을 숙고하는 것은 바로 사진을 통해서다. 

분명 그의 역사 개념에는 대단히 유연한 데가 있다. 그렇지만 무차별적으로 카메라 앞에 놓인 모든 대상을 받아들여 기록하는 기술적 이미지의 특성(발터 벤야민이 광학적 무의식이라고 부른 특성)에 크라카우어는 어쩐지 불편하고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 같다. 사진이 제시하는 “모든 경험 연관에서 떨어져 나온 (…) 대상의 불친절한 추상”(「사진 속 베를린」)에, 카메라 앞에서 벌어진 모든 현상들을 모조리 담아내는 사진의 “공허한 공간”(「사진」)에 의혹을 품곤 했던 독일 시절의 그가 말년의 글 어딘가에도 여전히 잠복해 있는 것 같다. 사실 그는 구원의 역량이 사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몫이라고 보았던 것은 아닐까? 사유가 관통하지 않은 사진은 의미화되지 않은, 즉 역사화되지 않은 사물들로 가득한 공허한 공간으로 남지 않겠는가? 크라카우어의 역사에는 어딘가 주지주의적인 기미가 있다.


<오페라의 밤>


선집 『과거의 문턱: 사진에 관한 에세이』(김남시 옮김, 열화당, 2022)에는 독일 시절의 크라카우어가 1920~30년대에 쓴 사진에 관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가 사진에 느낀 불안을 고스란히 노출한 구절들을 읽고 있노라면, 내겐 막스 형제(그루초, 하포, 치코)의 영화 <오페라의 밤>(1935)의 유명한 선실 장면이 떠오른다. 밀항자들, 룸메이드들, 난방 기술자들, 네일리스트, 전화를 쓰러 온 승객, 대걸레질을 하러 온 청소부, 그리고 음식을 가져온 승무원들이 차례로 선실에 들어와 뒤섞이면서 초래된 대혼란의 장면 말이다. 이처럼 영화적 장소가 공허한 축적물이 되는 순간만큼이나 크라카우어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도 없을 터다. 하지만 그는 ‘여하튼’ 혹은 ‘기어이’ 그것을 긍정한다. 어떻게? 바로 역설을 통해서다. 『영화의 이론』(김태환・이경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4)에서 그는 “이 영화에서 막스 형제는 주어진 우주의 결속 관계를 과격하게 파괴함으로써 역으로 그것을 증명한다”고 썼다. 무언가가 파괴된다는 것은 바로 그 무언가가 있다는 증거라는 식이다. 여기서 ‘주어진 우주의 결속 관계’라는 표현을 ‘역사’로 바꿔 읽어보면 크라카우어의 문장에 잠복해 있는 불안이 더 잘 감지된다.

막스 형제의 영화에는 사진과 영화의 파편적 특성에서 실재나 역사나 우주를 감지하고자 하는 크라카우어의 역설적 정신이 없다. 그들은 사물을 넘어서려 하지도 않고 관통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저 사물과 함께 뒹군다. 이렇게 해서 막스 형제는 앞서 제시한 물음을 한층 과격하게 바꾼다. 이처럼 사물화한 이미지 내에서(도), 그리고 사이에서(도)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면 역사란 대체 무엇인가요? 그렇게 발생한 역사가 꼭 지속될 필요가 있나요? 유머가 없는 역사가 무슨 소용인가요? 

히틀러가 집권하자 크라카우어가 망명길에 오른 1933년, 하포는 소비에트 러시아 투어 공연 후 (미국 정부에 건넬 기밀문서를 품에 넣고) 유럽을 거쳐 오는 동안 독일을 휩쓸고 있는 반유대주의의 부상을 목격했다. 그해에 개봉된 걸작 <오리 수프>에서 그루초는 전쟁마저도 그 특유의 화법으로 사물화해 버린다. 그의 발언은 니힐리즘의 극에 달한 유머로서의 역사 개념과 맞닿아 있다. “전쟁 계획은 이래요. 그건 당신 목숨만큼 값진 거죠. 너무 싸게 대하면 안 되죠. 그건 새끼들을 돌보는 고양이처럼 돌봐야 해요. 새끼 고양이 들어봤어요? 물론 아니겠죠. 브리지 게임을 하느라 바쁘니까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어요? 사랑해요.”


<원 웨이 부기우기>(위)와 <27년 후>(아래)


크라카우어의 주지주의적 역설과 막스 형제의 니힐리즘적 유머 사이에서 베닝의 영화와 역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자. 베닝의 쇼트는 막스 형제의 그것만큼이나 유머러스하고 무의미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니힐리즘적이지는 않다. <원 웨이 부기우기>를 이루는 60개의 쇼트는 순차적으로 전개되어 전체적으로 어떤 내러티브를 구성하거나 암시하지도 않는다. 베닝은 쇼트 각각이 “1분짜리 내러티브”라고 말했다. 다만 매 쇼트를 꼭 1분 동안 촬영했다는 뜻은 아니다. 촬영분을 중간중간 조금씩 잘라내고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점프컷’으로 이어 붙여 만든 쇼트도 있으니 말이다. 매 쇼트에 소리(음향, 음성, 음악 등)가 있지만 그것이 해당 쇼트를 촬영하는 동안 실제로 녹음한 것인지는 종종 확실치 않다. 그저 풍경만 보이기도 하고, 사람이나 동물이 등장하기도 하고, 자동차나 트럭이나 기차가 멈춰 있거나 지나가기도 하지만 통상적 의미에서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숨김없이 분명하게 조율된 베닝의 쇼트가 크라카우어를 불안케 하는 과적된 공허함으로 향하는 경우는 없다. 나란히 선 쌍둥이가 전화와 기적 소리에 맞춰 음료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동작을 반복하고, 손발은 뒤로 묶이고 입에는 재갈이 물린 한 사람이 텅 빈 거리에서 뒹굴고 있을 때, 돌연 모종의 수수께끼가 저 쇠락해가는 도시에 내러티브화되지 않은 역사의 감각을 불러오니 말이다. 여기서 떠오르는 건 망설임 가운데서 어떻게든 영화를 긍정하려 했던 크라카우어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모든 영역에서 결단적 대결을 불러내야 한다. 이것이 모든 판돈을 건 역사 과정의 도박이다. 자연의 이미지는 그 요소들로 분해된 의식이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내맡겨진다. 그 요소들의 근원적 질서는 사라진 지 오래다. (…) 따라서 의식에는, 자연의 올바른 질서에 대한 예감을 일깨우는 건 아니더라도, 모든 주어진 배열의 임시성을 증명하는 임무가 맡겨진다.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는 해방된 의식이 이 의무를 수행한다. 그 의식은 자연적 현실을 산산조각내고 부서진 조각들을 서로 바꾸어 놓는다. 사진에 반영되는 이 잔여물의 무질서는 자연요소들 사이의 익숙한 모든 관계를 지양함으로써 가장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그를 수행하는 것이 영화의 가능성 중 하나다. 영화는 잘라낸 부분들을 낯선 형성물로 연결할 때마다 그 가능성을 실현한다. (「사진」 중에서)


크라카우어 식으로 말하자면, <원 웨이 부기우기>에서 베닝이 수행한 작업은 쇼트의 익숙한 연결을 지양하면서 낯선 형성물을 만들어내는 대항-역사(주의)적 전략이겠다. 그처럼 낯선 것이 어느덧 익숙한 것이 되었을 때, 또 다른 부기우기가 시작된다. 물론 이는 <27년 후>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베닝과 왕빙의 영화를 함께, 그리고 또 다른 무수한 영화들을 끊임없이 거듭해서 낯선 연결 속에 두어야 하는 임무를 띤 우리 자신을 향한 말이기도 하다. 



2024-06-16

감추는 것과 지켜보는 것: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 아래는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에서 열린 하마구치 류스케 특별전(2024.5.18~26)에 맞춰 발간된 소책자에 실린 짧은 글이다. 이 글의 일부는 격월간 사진잡지 《보스토크》 제45호(2024년 5월 20일 발간)에 실은 보다 긴 글 「터칭 스페이스: 스마트휴먼의 몸짓과 장소」에 활용되었으며 주제적으로 두 글은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너무 위험한 제목이 아닌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곧바로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로, 이것은 주제를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진술이어서, 이것이 실제로 영화의 주제인지와는 상관없이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안의 모든 요소를 이 진술에 비추어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것은 종종 선의 (모순개념까지는 아니어도) 반대개념으로 파악되는 악의 존재를 부정하는 진술이어서, 그 진술과 호응하는 이런저런 의문들을 거듭해서 불러내기 마련이다. 그럼 선은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는 것은 모두 선인가? 이런 진술을 자연의 풍광이 전면화된 자못 생태주의적인 소재의 영화 제목으로 내걸었으니 과연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 제목이 주는 ‘형이상학적’ 부담을 어떻게 떨쳐낼 것인가? 과연 그는 이 영화를 ‘자연에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진부한 사춘기적 교훈과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져갈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런 물음을 품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상영되는 스크린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관 출입구를 나설 때쯤이면, 우리는 이 제목이 일종의 눈속임 내지는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정말이지 이 영화는 악의 형이상학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우리는 제목에는 별 뜻이 없다는 하마구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한다. 그는 관객들이 사춘기적 교훈의 세계에서 배회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실은 다른 영화적 도전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어떤 주제 같은 것을 감지했다면 그것이 무엇이건 그냥 기각해버리는 편이 낫다. 또한, 이 제목은 악의 존재를 부정하는 진술이 아니라 기이할 정도로 이 영화에 결핍되어 있거나 부재하는 것에 관객이 시선을 돌리지 못하도록 하는 유인의 진술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영화는 짐짓 ‘자연에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형이상학적 교훈을 말하는 척하면서 ‘타쿠미의 스마트폰은 화면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소하지만 번연한 사실을 감춘다.

사소한 것부터 살펴보자. 영화의 주인공으로 하라사와 마을의 ‘심부름꾼(べんりや)’임을 자처하는 타쿠미는 하교 시간에 맞춰 외동딸인 하나를 데리러 가는 것을 깜빡하곤 한다. 그때마다 하나는 마을의 숲을 가로질러 혼자 귀가하곤 하는 것 같다. 대체 그는 학교 교사들에게 왜 미리 전화해두지 않는 것일까? 어느 날 하나가 실종되어 부랴부랴 찾아 나설 때도 그가 경찰서든 어디든 서둘러 전화해 알리는 모습 같은 것은 화면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 스마트폰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마을에 설립 예정인 글램핑장 설명회 차 도쿄에서 온 두 사람 중 하나인 마유즈미의 스마트폰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해 주기도 하고, 나중에 그들이 다시 마을로 찾아올 때 만날 장소의 위치를 그녀의 스마트폰으로 공유해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쿠미의 스마트폰은 결코 화면에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에서 스마트기기나 디지털 디스플레이가 화면에 보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그때마다 어김없이 부정성과 연관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물론 부정성과 연관된다 해서 악은 아니다. 그저 하마구치가 거북하게 느끼는 것일 뿐이다. 글램핑장 설립을 추진하는 플레이모드사(社)가 컨설턴트와 진행하는 치졸한 온라인 회의의 모니터 디스플레이, 이 회사의 두 직원인 마유즈미와 다카하시가 하라사와를 다시 찾을 때 자동차에 내비게이션용으로 거치해 둔 다카하시의 스마트폰에 뜨는 데이팅 앱의 알림(“축하드립니다! 모카 씨와의 매칭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을의 다혈질 청년이 플레이모드라는 회사가 어떤 곳인지를 검색해 저녁 식사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태블릿 PC의 디스플레이처럼 말이다. 이런 것들을 다룰 때면 하마구치의 연출은 이따금 어색하고 불안정하다. 따라서, 긴 시간 동안 아무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일 없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객석에서 발언을 경청하고 있는 글램핑장 계획 설명회 장면만큼이나 하마구치의 영화적 세계가 어떤 부재 내지는 배제 위에 성립된 부자연스러운 세계인지 분명히 드러나는 곳도 없을 것이다. 그의 연출은 이런 상황에서 때로 비범한 힘을 발한다.

하마구치는 대화 상황의 연출에 능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거의 말의 교환에 집중하고 있는 <해피 아워>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말 이외의 요소들을 보다 빈번히 대화 상황에 끌어들이려 해 온 작가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배제에서 포함으로 향하는 모험이다. 그 모험이 한 편의 영화에서 종종 부분적으로만 시도될 뿐이라 해도 말이다. <해피 아워>의 중심 잡기 워크숍 장면에서,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 카>, 그리고 <우연과 상상>의 몇몇 빛나는 장면들에서, 우리는 그가 말과 몸짓을, 그리고 말과 움직임을 한층 복합적으로 함께 다루는 식으로 대화 상황의 역동성을 끌어올리려 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는 오늘날 우리의 소통과 몸짓과 움직임을 비롯해 우리를 둘러싼 장소의 성격까지도 변모시키고 있는 디지털 디스플레이 장치들을 대화와 토론 상황에서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지 부분적으로나마 조심스레 건드려본다. 여기에 하마구치의 첫 번째 영화적 도전이 있다. 이 영화를 시각적으로 특징짓는 자연의 범람은,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부재의 부자연스러움을 쉬이 감지하지 못하게 하는 환경으로서의 미장센이다.

하마구치의 두 번째 영화적 도전은 한층 야심적이다. 첫 번째 도전이 동시대적 성격을 띤다면 이 도전은 역사적 성격을 띤다. 그것은 바로 비인칭적 시점을 효과적으로 구사하는 것이다. 물론 비인칭적 시점을 내러티브 영화에서 오롯이 밀고 나가는 작업이라면 일본영화에는 이미 미조구치 겐지와 오즈 야스지로라는 두 명의 거장이 있다. 미조구치의 우주적 냉혹함의 시점과 오즈의 사물적 냉정함의 시점에 필적하는 비인칭적 시점을 과연 오늘날의 일본영화가 회복할 수 있을까? 분명 등장인물의 움직임과 조응하는 것이지만 결코 그의 시점이라고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숲의 나무들을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는 극단적인 앙각 트래킹숏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이 영화는 예사롭지 않다. 이는 하마구치가 거기에 깃든 역사적 야심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자동차의 시점’이 구사된 세 개의 롱테이크다. 하나를 데리러 학교로 찾아간 타쿠미가 교사에게 딸이 이미 하교했다는 말을 듣고 차를 몰고 떠나는 동안, 카메라는 자동차의 후방에서 멀어져 가는 도로를 계속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오프닝에서 보았던 앙각 트래킹숏과 유사한 방식으로 숲의 나무들을 올려다보며 찍은 숏이 뒤따른다.) 마유즈미와 다카하시가 숲속에 있는 타쿠미의 집을 찾아갈 때, 카메라는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있는 타쿠미의 모습을 다카하시가 모는 자동차 측방에서 계속 응시하고 있다. 언뜻 이것은 다카하시의 시점숏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차가 멈추고 프레임 내부로 마유즈미를 뒤따라 그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면서 이내 그것은 어느 인간 주체에게도 귀속되지 않는 숏이 된다. 하나를 찾아 나선 우동집 부부의 자동차 후방에서 초저녁의 어스름 속에 멀어져 가는 도로를 응시하던 카메라는, 그들이 차를 멈추고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갈 때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의 방향을 돌리기도 한다.



이런 롱테이크들은 기묘한 비인칭적 시선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영화 전반에 걸쳐 적용된, 파란색을 주조로 삼으면서 이와 대조를 이루는 붉은색과 주황색을 이따금 화면에 침입시키는 색채 설계만큼이나 인위적인 느낌도 없지 않다. 기법 자체가 눈길을 끄는 스타일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확실히 이것은 거장의 영화라기보다는 야심가의 영화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영화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를 모험으로 이끄는 소수의 거장보다는 모험의 결과를 우리에게 알리는 야심가 여럿인지도 모른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하마구치가 그러한 필요에 가장 걸맞은 우리 시대의 시네아스트 가운데 하나임을 다시금 수긍케 하는 작품이다.


2024-06-02

아이들의 시간: 허우샤오시엔의 초기 3부작

 

※ 아래는 2022년 4월 9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고향의 푸른 잔디> 상영 후 강연한 내용을 당시 활용한 노트와 녹취록을 토대로 다시 정리한 것이다. 



저는 오늘 허우샤오시엔의 초기 3부작에 대해 이야기할 것인데요. 초기 3부작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1980년부터 1982년까지 허우샤오시엔이 일 년에 한 편씩 내놓은 로맨틱코미디들입니다. 이번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상영되고 있는 <귀여운 여인就是溜溜的她>, <바람이 춤춘다风儿踢踏踩>, 그리고 조금 전에 보신 <고향의 푸른 잔디在那河畔青草青>가 그 영화들인데요. 

지난 10년 동안 허우샤오시엔이 내놓은 장편영화는 2015년에 발표된 <자객 섭은낭>이 유일하고, 2000년대에는 네 편, 1990년대에도 네 편의 장편영화를 발표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허우샤오시엔이 다작의 영화작가라고 생각하기는 힘듭니다. 그런데 대만 상업영화계에서 경력을 시작했던 1980년대로 돌아가보면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1980년에 발표한 <귀여운 여인>을 시작으로, <바람이 춤춘다>, <고향의 푸른 잔디>, <펑쿠이에서 온 소년>, <동동의 여름방학>, <동년왕사>, <연연풍진>, 그리고 1987년에 발표한 <나일의 딸>까지 8년 동안 허우샤오시엔은 매년 한 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대만의 상업영화 감독에서 국제적인 예술영화작가로 빠른 속도로 변모해 갑니다. 1989년에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비정성시>는 그 정점에 놓이는 영화죠.

홍콩 출신의 팝스타인 케니 비(Kenny Bee, 钟镇涛)가 주연을 맡은 <귀여운 여인>, <바람이 춤춘다>, <고향의 푸른 잔디>는 허우샤오시엔이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영화들이에요. 여기서 케니 비의 목소리는 본인의 목소리가 아닌 성우가 더빙한 것이죠. 대만영화에서 본격적으로 대사 동시녹음이 이루어진 것은 <비정성시> 이후부터여서 이런 식의 더빙은 그저 당시 대만 영화계의 일반적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허우샤오시엔은 <고향의 푸른 잔디> 이후에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샌드위치 맨>에서 각본가 주티엔원과 작업한 이후로 <자객 섭은낭>까지 계속해서 주티엔원과 작업해 왔어요. <연연풍진>, <비정성시>, <희몽인생>의 경우에는 주티엔원과 더불어 우니엔전이 함께 각본 작업을 했고요. 예외라면 프랑스에서 만든 2007년 작품인 <빨간 풍선>인데 이건 프랑수아 마골랭이 각본 작업을 했죠. 그러니까 이 초기 3부작 이후로 허우샤오시엔이 직접 각본을 쓴 건 21세기에 만든 두 편의 단편 정도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초기 3부작은 시네마스코프 사이즈, 즉 2.35:1의 화면비로 촬영된 이례적인 허우샤오시엔 영화들이기도 해요. 이 작품들 이후로는 허우샤오시엔은 주로 1.85:1 의 화면비로 작업해 왔어요. <자객 섭은낭>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4:3 화면비로 촬영되었고요.

꽤 오랫동안 <귀여운 여인>, <바람이 춤춘다>, <고향의 푸른 잔디>는 허우샤오시엔을 본격적으로 다룬 비평이나 논집에서도 종종 아예 언급되지 않거나, 본격적으로 허우샤오시엔이 작가로서 등장하기 전에 장르 영화의 관습을 따라 만들어진 대수롭지 않은 영화로 치부되곤 했습니다. 물론 이들 영화를 보고 미래의 비범한 재능을 일찌감치 감지했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평론가라기보다는 점쟁이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이 영화들은 분명 비범한 작품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들이 허우샤오시엔이 극복해내야 했던 약점과 진부함으로 가득한 영화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듣기에 따라 대담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가설에 입각해 강연을 진행할 예정인데요. 이 초기 3부작에는 허우샤오시엔이 영화적으로 성취하고 싶어했던 과제가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가장 적나라한 형태로 담겨 있으며, 이 과제는 흔히 ‘허우샤오시엔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이후의 영화들에서 완수된 것이 아니라 우회되고 회피되었다는 게 그 가설입니다. 말하자면, 조금 불경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비정성시>, <희몽인생>, <남국재견>, <해상화>, 그리고 <자객 섭은낭>처럼 고도의 예술적 수준에 도달한 영화들이, 어떤 측면에서는 허우샤오시엔의 ‘실패’를 증거하는, 혹은 기껏해야 초기에 겨냥했던 과제가 아주 부분적으로 우회된 형태로만 처리된 영화들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 과제란 무엇인가? 단적으로 말하자면, 우연과 돌발성이 깃든 동작을 그 활기와 함께 오롯이 포착하는 형식을 찾는 것입니다. 저는 우연과 돌발성이 깃든 동작이라고 말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연출적 지시가 가해져도 우연과 돌발성을 잃지 않는 동작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동작과 관련해 우리가 얼른 떠올릴 수 있는 대상은 역시 아이들과 동물들입니다. 아이들과 동물들은 허우샤오시엔의 초기 3부작에서 아주 특권적인 자리를 차지합니다. 오늘 보신 <고향의 푸른 잔디>에서는 더욱 그렇죠. 한편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허우샤오시엔과 관련해서는 오즈 야스지로라든지 페데리코 펠리니 같은 감독들이 비교 대상으로 종종 호명되고는 하는데요. <비정성시>의 숨은 참조점이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고요. (저는 <비정성시>를 갱스터 장르와 연계해 보는 이런 주장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허우샤오시엔이나 1947년생으로 그와 동갑내기인 에드워드 양 같은 대만 뉴웨이브 감독들이 자국 영화에 끌어들이고자 했던 것은 찰리 채플린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성공 여부는 차치하고요. 우연과 돌발성이 깃든 동작을 그 활기와 더불어 포착하는 형식의 모델로서 말이죠.


사진 1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허우샤오시엔의 데뷔작인 <귀여운 여인>(사진 1)에서 케니 비가 맡은 주인공은 아이를 입양해 키우고 있는 미혼남이죠. 지금 보고 계시는 숏은 케니 비가 사랑에 빠진 여주인공이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는 것을 방해하러 아이와 함께 식당에 찾아간 부분에서 발췌한 것인데요. 시각적으로 이 구성은 <키드>에서 채플린과 재키 쿠건이 등장하는 이 유명한 이미지(사진 2)를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요. 눈 먼 남자 주인공이 시력을 회복해서 여자 주인공과 로맨스에 빠진다는 <바람이 춤춘다>가 얼마간 <시티 라이트>의 설정을 스위트하게 바꿔 놓은 것이라는 생각도 가능하죠. 하지만 허우샤오시엔은 노골적으로 채플린을 영화에서 제시하고 있지는 않아요. 


사진 2


반면 에드워드 양은 1994년에 발표한, 꽤 과소평가된 코미디인 <독립시대>에서 분명하게 채플린의 제스처를 모델로 삼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요(사진 3). <독립시대>는 우연과 돌발성이 깃든 동작을 그 활기와 더불어 오롯이 포착하는 형식에 대한 관심이 에드워드 양에게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형식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나 <하나 그리고 둘>의 그것에 비해 아주 만족스럽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과제를 제대로 수행해내기는 확실히 어려워요. 허우샤오시엔의 경우, 이러한 과제에서 성공을 거둔 유일한 작품은 <동동의 여름방학>이 아닌가 해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저는 이 작품이 허우샤오시엔의 가장 훌륭한 영화일 수도 있다고 봐요.


사진 3


물론 이런 가설 없이 초기 3부작을 적절하게 허우샤오시엔의 필모그래피 안에 통합하는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허우샤오시엔의 진정한 데뷔작이라고들 하는 <펑쿠이에서 온 소년> 이후의 영화들에서 원숙한 형태로 나타나는 요소들의 싹을 초기 3부작에서 찾는 것이죠. 말하자면, 허우샤오시엔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물과 몸짓과 사건 등의 초기적 형태를 이들 영화에서 감지하는 겁니다. 저는 이런 형식으로 어떤 작가의 필모그래피를 일관되게 통합하려는 시도를 썩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이례적인 영화들에서 뭔가 이후 영화들과 연계되는 부분들을 잠깐 확인해보는 정도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4

사진 5


이것은 1981년 작품인 <바람이 춤춘다>의 도입부에 나오는 장면(사진 4)입니다. 아이들이 폭약으로 장난을 치고 있는데, 실은 이것이 광고 촬영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죠. 이 장소는 타이완 서쪽 펑후 제도의 한 지역이라는데 허우샤오시엔은 이로부터 2년 뒤에 정확히 이 자리에 카메라를 다시 놓을 겁니다. 바로 <펑쿠이에서 온 소년>에서죠(사진 5). 다시 또 아이가 등장하지만 이번에는 여럿이 아닌 하나에요. 장난을 치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그거 길을 아장아장 걷고 있는 건데, 초기 3부작의 활기는 없지만 꽤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화면비는 이제 2.35:1이 아닌 1.85:1로 바뀌었죠. <바람이 춤춘다>가 펑쿠이에 온 외지인들의 이야기라면 <펑쿠이에서 온 소년>은 펑쿠이 사람들의 이야기, 그곳에서 가오슝으로 간 소년들의 이야기죠.


사진 6

사진 7

하나 더 살펴 볼까요. <고향의 푸른 잔디>에는 전기 충격기를 써서 물고기를 남획하는 어른을 아이들이 목격하는 광경이 나오는데요(사진 6). 이것은 1960년대 이후 국민당 국영스튜디오인 CMPC에서 장려된 이른바 ‘건강사실영화healthy realism’에 특징적인 환경적 계몽주의가 반영된 것이라는 지적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보다 2년 뒤에 만든 <동동의 여름방학>에서 우리는 그물을 써서 새를 남획하는 어른을 목격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사진 7). 동물들과 아이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기구나 장치에서 우연과 형식의 대립이라는 허우샤오시엔의 문제를 간접적으로 감지하게도 됩니다. [덧붙이는 말: 2022년 당시 내 강연의 청중으로 참석했던 영화연구자이자 번역가인 홍지영 씨는 <연연풍진>의 야외상영 장면에서 상영되는 영화가 건강사실영화의 선구로 꼽히는 리싱(李行)의 <오리농가養鴨人家>(1965, 영어 제목은 'Beautiful Duckling)[사진 8]임을 일러주셨다.] 


사진 8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탈것, 그러니까 자동차, 버스, 기차, 오토바이 등등의 것들과 결부지어 등장인물들을 제시하는 오프닝이나 엔딩에 대한 허우샤오시엔의 은밀한 선호가 초기작에서는 아주 노골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점일 텐데요. <연연풍진>과 <남국재견> 도입부에서 기차를 타고 등장하는 인물들을 떠올리는 분들은 많을 것입니다. <남국재견>의 경우, 자동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꼼짝 못하게 된 인물들을 보여주며 끝나죠. <동동의 여름방학>은 도입부의 졸업 연설 장면이 지나가고 나면 네 명의 등장인물이 자동차를 타고 와서 병원에 내리는 것으로 시작해서 시골에 가서 여름방학을 보낸 아이들이 아버지의 자동차를 타고 마을을 떠나는 모습으로 끝납니다. <쓰리 타임즈>의 현대 에피소드는 장첸과 서기가 오토바이를 타고 타이페이 시내를 가로지르는 모습을 길게 포착한 롱테이크 쇼트로 시작합니다. <카페 뤼미에르>와 <빨간 풍선> 도입부에서 본 전차들을 떠올리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물론 이런 '성숙한’ 허우샤오시엔 영화들에서 탈것과 인물들의 성격이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법은 없고, 현상학적 시간의 경과를 환기시키는 추상적이면서 정동적인 기능에 국한되죠. 그런데 초기작에서는 탈것과 인물들의 성격이 아주 직접적으로 연관됩니다. 오늘 보신 <고향의 푸른 잔디>를 떠올려 보시면 터널을 빠져 나오는 기차와 경주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시작해서 선생님이 타고 떠나는 기차를 따라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끝이 나죠. 여기서 기차의 운동은 고스란히 아이들이 지닌 활력 및 생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진 9

사진 10

<바람이 춤춘다>는 해안가에 정박되어 있는 배들 옆에서 인물들이 바다에 떠 있는 배의 광경을 보는 것으로 시작해요(사진 9). 여기서 둘은 커플이죠. 둘은 유럽 여행을 함께 가기로 했는데 결말의 공항 장면에 이르면 케니 비와 사랑에 빠진 여주인공은 비행기를 타기 전에 케니 비를 만나 미래를 기약하죠. 그러니까 오프닝의 정박된 배는 이 미심쩍은 커플의 교착된 관계와 직접적으로 상응하는 것이 됩니다. 얼마 후에 케니 비는 느릿하게 움직이는 우마차를 타고 등장해요(사진 10). 뭔가 초연해 있는 것 같고 한가로워 보이는 인상이죠. 

<귀여운 여인>의 오프닝이 가장 노골적이죠. 자전거나 오토바이 같은 이륜차는 허우샤오시엔에게서 굉장히 긍정적인 활력과 연관되는 반면에, 자동차 특히 자동차를 모는 여자는 부정적인 대상이 되요(사진 11). 초기작에서는 이건 거의 규칙과도 같아요. 이 자동차를 몰고 나타난 여주인공은 시골로 가서 아이와 같은 몸짓을 회복한 이후에라야 ‘인간화’되죠. <고향의 푸른 잔디>에서도 주인공 케니 비를 납치하듯 데려가기 위해 타이페이에서 온 여자가 나오는데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하실 겁니다.


사진 11


이렇게, 초기 3부작이 이후의 ‘성숙한’ 영화들과 연계되는 부분을 잠깐 확인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초기작들을 허우샤오시엔이라는 작가의 전체 필모그래피에 균질되게 통합하려는 시도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이미 말씀드렸죠. 저는 오히려 초기작에 모종의 가능성으로서 잠재해 있던 것이 이후의 작업에서 어떻게 포기되거나 굴절되었는지, 왜 그것은 허우샤오시엔이라는 작가를 특징짓는 고도의 미적 형식으로 통합될 수 없었던 것인지를 따져보는 게 훨씬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우연과 형식의 갈등이라는 지극히 영화적인 문제이기도 해요. 허우샤오시엔의 초기작에서 우연은 아이들과 동물들의 동작과 결부된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도시와 대비되는 시골은 이러한 동작을 활성화하는 공간으로 제시됩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어른들조차도 이곳에 오면 아이와 같은 움직임들을 취하게 되요. 이런 동작과 움직임들의 활력은 ‘성숙한’ 허우샤오시엔 영화들에서는 거의 직접적으로 감지되지 않는 것입니다. <귀여운 여인>에는 이와 관련해 아주 흥미로운 장면들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발췌한 영상(아래)을 보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시골이라는 이 공간에 들어서면서부터 어른들 또한 아이와 같은 몸짓을 취하게 됩니다. 개개 인물들의 동작이 꼼꼼하게 연출되었다기보다는 어느 정도 지시를 주고 즉흥적으로 움직이게 한 후에 이것을 카메라로 포착한 듯한 인상입니다. 재미있는 건 순수한 놀이의 와중에 측량 작업을 하러 온 자들이 나타난다는 것이에요. 말하자면 형식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돌연 인물들이 마비 상태가 됩니다. 여주인공이 “도망쳐!”라고 소리치면서 다시 운동이 시작되는데요. 우연과 형식이라는 것의 갈등이 이야기 설정에 들어가 있어서 확실히 흥미롭게 여겨지는 부분이에요. 이 영화에서 시골에 와서 아이들의 몸짓을 회복한 어른들이라면 이런 부분(아래)도 떠오릅니다.



지금 보신 부분들에는 분명 미적 형식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허우샤오시엔이 ‘성숙한’ 영화들에서 끝내 통합하지 못한, 혹은 <동동의 여름방학> 같은 영화에서 예외적으로 형식과 조화를 이루게 되었던 슬랩스틱적 활력이 있습니다. 이런 슬랩스틱적 요소는 그저 초기영화의 장르적 관습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허우샤오시엔이 기꺼이 버리려 한 것이라고 제가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허우샤오시엔 영화에 자꾸만 이러한 활력적, 동적 요소들이 축소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에요. 아이와 풍선이 전면에 (다시) 등장하는 <빨간 풍선>의 경우는 아주 분명하고요. 특히 1996년에 발표한 <남국재견>은 이 점에서 아주 흥미롭습니다. 이 작품 이전에 허우샤오시엔은 <비정성시>, <희몽인생>, <호남호녀> 등 대만 현대사를 다룬 고도의 미적 형식을 갖춘 영화들을 내놓았습니다. <남국재견>은 이 작품들과 사뭇 다른데, 묵직한 영화들을 만들면서 잠시 떨어져 있던 저 동적 요소들을 정련된 형식 속으로 다시 끌어들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남국재견>의 이런 부분(아래)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아요. 



이 장면에 등장하는 커플의 모습은 조금 전 보여드린 <귀여운 여인>의 커플의 모습의 어떤 흔적을 간직하고 있죠. 시골의 기차역에 내리기 무섭게 아이와도 같은 몸짓을 회복하는 그런 것이요. 하지만 뭐랄까요. 상당히 절제된 모습입니다. 실제로 이 장면의 중심은 대화를 나누는 후경의 남자들인데, 이 대화 내용은 흥미롭게도 (혹은 매우 징후적이게도) 왜 자동차를 안 타고 기차를 타고 왔느냐 뭐 이런 탈것에 대한 것이죠. <남국재견>은 자동차와 오토바이 등 탈것의 운동감을 풍부하게 되살려내는 영화인데, 생각해보면 이런 탈것들을 따라 카메라가 같이 움직일 때 배경은 계속 바뀌지만 인물과 탈것의 상대적 위치는 고정적인 채로 남게 되어 굉장히 형식적인 운동이 되고 있어요. 사실, <귀여운 여인>이나 오늘 보신 <고향의 푸른 잔디> 같은 초기작에서 자전거 같은 이륜차를 타고 나란히 달리는 인물들이 주는 활력은 거리낌없이 드러나는데 이후로 허우샤오시엔은 이런 노골적인 드러냄에 조심스러워져요. 얼마나 조심스러운가 하면 1995년 작품인 <호남호녀>의 도입부를 보면 잘 알 수 있죠. 어떤 면에서 <남국재견>은 이 활력을 형식으로 다시 포착하고자 하는 시도인데, 그 전에 <호남호녀>의 도입부 같은 ‘테스트’가 있었던 거죠. <호남호녀>의 제목이 나오고 나면 바로 나오는 부분인데, 이것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탈것과 함께 인물이 제시되는 부분이죠. 이 장면에서 탈것이 제시될 때의 조심스러움은 얼마간 전체 쇼트를 보아야 감지되는 것입니다. 발췌 영상(아래)을 보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여주인공의 방에 놓인 텔레비전에서 영화가 방영 중인데 바로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이죠. 재미있는 건 그 가운데 특히 두 남녀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해변가를 따라 달리는 장면을 골랐다는 겁니다. 이건 <호남호녀>의 인물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운동입니다. 하지만 허우샤오시엔이 초기에서부터 분명하게 매혹되었던 종류의 운동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즈가 포착한 활력의 형식을 어떻게 오늘날의 영화로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가령 <귀여운 여인>에는 이런 자전거 라이딩 장면이 있어요(아래).



앞서 저는 <바람이 춤춘다>와 <펑쿠이에서 온 소년>에서 동일한 위치에 카메라를 두고 찍은 두 개의 쇼트를 비교해 보여드렸습니다. <펑쿠이에서 온 소년>의 저 노란 옷을 입은 소녀는 오른쪽으로 난 길로 들어가 사라질 거에요. 이런 쇼트는 대단히 의미심장하게 여겨지는데요. 왜냐하면, 아이의 몸짓, 끝내 통제되지 않는 채로 남는 우연을 간직한 몸짓, 이러한 몸짓을 형식화한다는 과제가 허우샤오시엔에게서 유보되고 일단 그러한 몸짓을, 우연을 화면 밖으로 밀어내거나 아니면 화면 안에서 통제 가능한 우연으로 전환하는 방향으로 방법이 바뀌는 순간을 상징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사진 12


허우샤오시엔의 ‘성숙한’ 작품들에서 미학적으로 통제 가능한 우연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불, 조명이에요(사진 12). 운동학적으로 동적인 우연의 몸짓이 아니라 정동적인 우연을 조절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는 거죠. 이로써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는 무엇보다 조명 설계에 있어 대단히 풍부하고 복잡한 영화가 됩니다. 또는 <자객 섭은낭>에서처럼 안개 같은 자연 현상이 정동적 우연의 요소로 풍부하게 활용되죠. 

<바람이 춤춘다>에는 이러한 전환과 관련해 대단히 흥미로운 쇼트가 하나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귀여운 여인>과 동일한 배우들이 맡았습니다. 이 영화에는 내용상으로도 뭔가 사실적인 생동감이 넘치는 화면을 얻기 위해 특정한 상황을 꾸미고 몰래카메라 형식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담아내는 설정(광고 촬영이나 사진 촬영)이 있어요. 실제로 허우샤오시엔은 <펑쿠이에서 온 소년>의 마지막 거리 장면에서 이런 식의 촬영술을 끌어들이기도 했습니다. 확실히 우연과 형식의 대립이라는 문제는 허우샤오시엔을 사로잡은 진정한 영화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바람이 춤춘다>의 한 부분을 보죠. 역시 시골로 오게 된 어른들이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과정에서 그들의 몸짓을 발견한다는 설정이죠. 



곧바로 이어서 다음 부분(아래)을 보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참 숨바꼭질을 하고 나서 아이들은 프레임 바깥으로 하나둘씩 사라집니다. 그리고 두 남녀주인공은 어른의 몸짓을 회복해 가요. 그리고 망원렌즈로 포착되어 배경이 흐릿했던 화면이 ‘성숙한’ 작품들에서 익숙한 광각의 화면으로 전환되어 갑니다. 자전거는 이들이 직접 타지는 않고 그들 곁을 자꾸 스쳐지나가고요. 저 뒤편으로는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입니다. 어느덧 흔히 허우샤오시엔 스타일의 화면이라고 하는 것이 출현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것은 아이들의 몸짓을 배제하면서, 그들의 운동학적 우연을 연기와 물 같은 정동적인 우연으로 대체하면서 얻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식은 얻었지만 우연의 활력은 없어요. 대신 명상적 우연이 들어오고, 이것들과 더불어 기억이, 추억이, 역사가 허우샤오시엔의 이미지를 채웁니다. <펑쿠이에서 온 소년>에서 <호남호녀>까지의 궤적이 바로 그거죠. 그래서 <동동의 여름방학>은 이른바 ‘진정한’ 데뷔 이후의 허우샤오시엔 영화들 가운데서 매우 이례적인, ‘미숙한’ 초기 3부작의 과제에 다시 도전해 성공을 거둔 드문 영화가 됩니다. 허우샤오시엔은 이 방향으로 더 밀고 나가지는 않았고 <남국재견> 이후에 어떤 흔적들을 다시 포착하는 정도였죠. 하지만 이 방향으로 밀고 나갔다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흥미로운 맞수가 되었을 수도 있어요. 다만 허우샤오시엔은 키아로스타미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자동차라는 장치, 공간을 그다지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거든요. 적어도 그렇게 보입니다. 특히 자동차 내부에서 촬영하는 것은 대단히 불편하게 느끼는 듯해서 <고향의 푸른 잔디>에서 타이페이에서 온 여자가 케니 비를 납치하듯 데려가는 불쾌한 장면 정도를 제외하고는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에서 자동차 내부의 데쿠파주를 찾아보는 건 대단히 어려워요. 적어도 지금까지의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만을 고려한다면 그가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 같은 영화를 만든다는 건 정말 상상하기 힘들죠. 그는 인물이 직접 운전하지 않는 기차나 버스, 전철의 내부에서 촬영하는 것을 편안하게 느끼고, 인물이 직접 탈것을 다룬다면 주변이 열려 있는 자전거나 오토바이 같은 이륜차를 따라가는 것을 편안하게 느끼는 것 같거든요.

허우샤오시엔 영화에서 간혹 우리는 부감으로 어떤 거리나 골목을 조망하는 인상적인 쇼트들을 보게 되는데요. 인물들이 그 안에서 상당히 큰 폭으로 움직이는데도 카메라는 그걸 줄곧 따라가곤 합니다. 아이들이 상징하는 우연적 몸짓의 활력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는 사례 하나를 보는 것으로 오늘의 강연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그러면 허우샤오시엔이 형식을 얻으면서 불가피하게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고 제가 오늘 말한 것이 무언지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고향의 푸른 잔디>의 이 부분은 제가 초기 3부작에서 좋아하는 부분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해요. 여기에서 보이는 롱테이크 부감 쇼트는 허우샤오시엔의 이후 영화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이런 동적 활력을 뿜어내지는 않습니다. 이런 활력은 추억과 기억과 역사의 세계가 아니라 현재적인 것에 대한 절대적 믿음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거든요. 제 생각에 <자객 섭은낭> 같은 영화를 보면 허우샤오시엔은 여전히 자신의 미적 형식에 초기작의 동적 활력을 통합해내려고 하고 있어요. 생각해 보면 대단한 야심이죠. 이미 그의 영화들은 동시대 영화에서 가장 고도의 형식에 도달해 있거든요. 실제로 결국 실행에 옮기지만 못했지만 허우샤오시엔은 원래 <자객 섭은낭>을 16mm 볼렉스 카메라를 써서 전체를 핸드헬드로 촬영하려고도 했어요. 전통적인 구식의 볼렉스 카메라는 매 쇼트를 찍을 때마다 태엽을 감아야 하고 한 번에 30초 정도 길이밖에는 찍을 수 없어서 제법 긴 롱테이크 쇼트는 엄두도 낼 수 없어요. 실제로 허우샤오시엔은 2대의 볼렉스 카메라를 일본 촬영지에 가져갔는데 촬영감독이 이런 카메라로는 작업할 수 없다고 해서 결국 35mm로 작업했다죠. 그럼 <고향의 푸른 잔디>의 해당 부분(아래)을 보면서 마무리하도록 하죠.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