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13

불가능한 포옹

 

※ 아래는 "애도에 관하여"를 표제로 삼은 《보스토크》 제39호(2023.5.18)에 발표했던 글이다.


지난 세기에 현대 영화의 도래를 알렸던 중요한 영화인들 여럿이 안타깝게도 코로나19 대유행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 이 죽음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아직 한국에서는 합법화되지 않은 조력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장-뤽 고다르일 터다. 사진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2019년 9월 9일에 세상을 떠난 로버트 프랭크와 2022년 9월 10일에 세상을 떠난 윌리엄 클라인, 현대 사진의 출발을 상징하는 두 인물의 부고가 대유행 시기의 대략 앞뒤에 들려왔다. 프랭크와 클라인은 사진 작업에서 얻은 통찰─특히, 인물을 포착한 사진적 이미지에서 현실성과 허구성은 분리 불가능하다는 것─을 영화 작업으로 이어가는 일에 전념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타계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영화 문화에서 그들의 노고와 성취에 합당한 관심을 찾아보기란 어려웠다. 이를테면, 데뷔 시절 고다르의 얼굴을 담은 클라인의 사진은 유명하지만, 프랑스 누벨바그 태동기에 파리에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해 고다르의 <기관총부대>와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사이에서 격렬하게 진동하는 <폴리 마구, 당신은 누구세요?>나 <미스터 프리덤>처럼 몰아치듯 선동적인 역작들을 내놓은 그의 경력은 영화사(史)에서 종종 배제되곤 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시네필 문화에는 클라인의 영화에 대한 기억이 없기에 그에 대한 애도는 겸연쩍은 일이 되어버린다.

그렇지만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 있다고 해서, 숱한 개인적 기억이 그의 이미지 주위에 맴돌고 있다 해도, 애도라는 행위에 수반되는 공포감을 떨쳐버릴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그런 기억 때문에 공포감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린다. 대유행 기간에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났지만, 내게 이 시기는 무엇보다 2020년 10월 9일에 타계한 홍성남 영화평론가에 대한 애도를 회피하며 빠져든 자책의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자책에 빠질 때마다 거듭해서 머리에 떠올랐던 것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배수아 옮김, 필로소픽, 2014) 종결부를 채우고 있는 통렬하기 짝이 없는 문장들이었다. 이 글을 쓰기 직전까지도, 나는 베른하르트가 그의 친구였던 파울 비트겐슈타인과의 우정을 술회하고 있는 이 책을 다시 들춰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심지어 지금도 글을 쓰기 위해 가까스로 몇 개의 문장들만을 드문드문 확인하고 나면 재빨리 덮어야 할 지경이다. “우리는 죽음의 낙인이 찍힌 자들을 피한다. 나 또한 이런 저열한 감정에 굴복하고 말았다. 친구가 죽기 몇 달 전부터 나는 구차한 자기보호 본능 때문에 완전히 의도적으로 그를 피했다. 아직도 나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다.” 흡사 나의 고백이어야 할 것이 다른 이의 언어를 빌려 내게 던져진 것처럼, 이 글자들 앞에서 나는 흠칫 놀란다. 여기서 몇 페이지를 더 넘기고 나면 “나는 그의 무덤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는 차갑고 하얀 방역복과도 같은 문장으로 책이 끝난다. 

그처럼 가책을 끝까지 자신의 업으로 짊어질 용기가 없는 나는, 홍성남 평론가가 죽고 나서 일 년 남짓이 지나 작년 1월 중순 겨울날 오후에 강원도 원주시에 있는 하늘원추모관이라는 봉안당을 처음 찾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연구자이자 뮤지션인 유지완 씨가 차로 그곳까지 데려다준 덕이다. 봉안당 앞에 자리한 사무동 건물 1층에는 추모객들을 상대로 하는 작은 상점이 하나 있었는데, 염치없이 빈손으로 온 것을 가릴 요량으로 잠시 매대를 둘러보았지만 물건들이 하나같이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생전의 홍성남 평론가라면 응당 고개를 가로저었을 무언가를 들고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좀 더 무거운 마음으로 찾아뵙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정오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는데도 봉안당 안은 어두침침하기 짝이 없었다. 홍성남 평론가의 유골이 봉안된 자리는 커다란 창문 옆이었지만 어둑한 기운은 여전했다. 어색하게 봉안당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당내가 환해졌다. 누군가 형광등 전원을 켠 것이다. 추모하는 동안에만 등을 켜 두었다가 추모를 마치고 나면 끄고 나가라는 안내문이 입구에 있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홍성남 평론가의 봉안함 옆에는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2010년 12월 1일 이후 10년 가까이 곁에서 간병하다 그의 장례 절차를 마무리하고 세상을 등지신 어머님의 봉안함이 같이 놓여 있었다. 

홍성남 평론가가 수술을 받고 나서 입원해 있을 때 나는 병원에서 몇 차례 어머님을 뵌 적이 있다. 문병을 간 우리 부부를 침대에 앉아 바라보는 홍성남 평론가의 눈에서는 우리가 알고 좋아했던 사람의 흔적을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수술이 잘 끝났다고는 해도 뇌 기능이 회복될 가망이 없음이 역력해 보이는 그의 얼굴은 아이의 얼굴도 아니었고 광인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의 얼굴이었다. 이 얼굴을 어루만지며 어머님께서는 “지난번보다 훨씬 좋아졌지?”라며 연신 우리에게 다짐하듯 물어보셨다. 나는 나중에 베른하르트의 잔인한 문장들 앞에서 이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나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친구는 이미 죽음에 가까이 가 있는데 나는 아직 그렇지 않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나는 “죽음의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칠까 봐 너무도 두렵기 때문에” 홍성남 평론가를 더는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죽음은 기어이 다가와 무심히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 홍성남)께서 2020년 10월 9일(금)에 별세하였기에 알려드립니다. 

빈소 원주의료원 1호실. 발인 10월 11일(일) 11시. 화장장 충주화장장.


그는 2020년 10월 9일 오후 10시 50분에 강원도 원주의료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미조구치 겐지의 <산쇼 다유>를 막 보고 나온 참이었고 부고 문자는 이튿날에야 뒤늦게 받았는데 그날은 바로 내 생일이었다. 부고를 받고 나서도 나는 그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조문을 가서 애도를 표한다는 것이 얼마간 자기 위로의 행위도 된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십 년 동안 나의 것으로 삼아온 수치심과 죄책감을 그의 장례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조금도 덜어내고 싶지 않았다. 그를 각별히 아꼈던 방혜진 평론가─홍성남 평론가 그리고 나와 함께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대한 단행본을 구상하고 《토킹 픽처》라는 이름의 웹진 창간도 꽤 구체적으로 진행한 적이 있지만 어느 것도 실현되지는 못했다─에게서도 몇 차례 연락이 왔지만 나는 끝내 애도를 회피했다. 무엇보다 나는 장례식장에 놓여 있을 그의 영정 사진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영정 사진에는 고인이 된 이들이 침착하고 평온하게 또는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바라보는 모습이, 그렇게 해서 우리를 바라보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에게 요구하는 표정이다. 우리는 죽음을 위로하는 한편으로 죽음이 우리를 위로하길 바란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죽음마저도 삶의 얼굴을 띨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죽음의 얼굴로서 대면하고 그래서 피해왔던 그를 저 가상적 삶의 얼굴로 마주할 수 없었다.

내게는 그와 함께 찍은 사진들이 몇 장 있다. 대개는 나의 동반자인 김미경이 찍은 것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우리 부부는 그와 함께 종종 국내외로 여행을 다녔는데 도쿄국립근대미술관필름센터(현재는 국립영화아카이브)에서 열리는 칼 드레이어 특별전을─특히 당시로선 어디서도 구해볼 수 없었던 <글롬달의 신부>를─보기 위해 2003년 11월 초에 일본에 간 것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가 찍힌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카메라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 좀처럼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사실, 그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은 내겐 한 장도 없다. 기념사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2004년 3월 말에 대만의 타이페이에서 허우샤오시엔을 만나 인터뷰를 하던 당시에 찍은 사진을 봐도 그렇다. 인터뷰 자리에 동석해 그저 이따금 질문을 던졌을 뿐인 우리 부부도 태연하게 카메라를 똑바로 보고 있는데도, 정작 인터뷰어인 홍성남 평론가 자신은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코에 대고 슬며시 카메라를 피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런 자세는 너무나도 그다운 것이라 그 밖의 다른 자세를 떠올리기 힘들 정도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사진에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카메라 앞에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내길 꺼리는 이들의 흔적이나 부재가 아닐까? 그러한 흔적이나 부재는 외화면 영역이나 비가시 영역 같은 용어로는 포착되지 않는 무척이나 개인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진에 찍힌 홍성남 평론가와 가장 근사하게 공명하는 이는 그날 카메라로 우리를 찍고 있었기에 정작 그 자신은 사진에 보이지 않는 사람일 터다. 카메라 앞에 서기보다는 종종 뒤에 머물곤 했던 유맹철 씨는 영화제나 시네마테크 일을 하기도 했지만 최근까지 한동안은 영사 기사로 근무하면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이들 누구보다 스크린에서 멀리 떨어져 뒤쪽에 있기도 했다. 지금 여기에서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이들 외에는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다짐한 듯한 사람들, 오늘날에 전면화된 텔레-비주얼한 얼굴성을 단호히 거부하는 이런 사람들의 얼굴을 죽음의 얼굴로 대면하는 것은 소름 끼치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얼굴을 우리를 바라보며 위로하는 저 가상적 얼굴로 대면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죽음과의 포옹은 불가능하다. 아직 내게는. 그렇다면 수치스러운 채로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