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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4

시네마레나, 스캔들을 위한 경기장
: 알베르트 세라의 <고독의 오후들>

 

※ 아래 글은 사진 잡지 《보스토크》 51호(2025년 가을호)에 실린 것이다.


투우를 다룬 영화의 제목이 ‘고독의 오후들’이라고 하면 곧바로 머리에 떠오르는 세 개의 텍스트가 있다. 당연히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오후의 죽음』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헤밍웨이의 제목을 빌려온 두 프랑스 영화평론가의 텍스트, 즉 앙드레 바쟁의 「매일 오후의 죽음」과 세르주 다네의 「오후의 슬픈 죽음들」이 뒤를 따른다. 헤밍웨이는 투우에 열광했고, 바쟁은 저 글을 쓰기 전까지 투우를 본 적이 없으며, 다네는 일찍부터 스페인에 투우를 보러 다녔다. 이들의 글에서 감각의 인간과 두뇌의 인간을 가르는 차이를 감지할 수 있을까? 생리적인 것과 문체적인 것을 연결하는 상투적 가정에는 어쩐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께름칙한 구석이 있다. 이를테면, ‘공감을 일으키는 섬세한 여성적 문체’ 같은 진부한 표현이 그렇다. 어린 시절 이후 삼십 년 가까이 보지 않았던 투우에 이런저런 텍스트를 통해 다시 다가갔다는 이가 만든 투우 영화인 <고독의 오후들>은 공감과 반감을 넘어선 아연실색을 유발하고, 섬세한 동시에 거칠기 짝이 없고,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경계를 무심히 교란한다. 

영화와 투우의 관계는 흥미진진한 주제다. 특히 요즘에는 투우가 점점 더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금지되기도 하는 터라 더욱 그렇다. 범죄적인 것과 영화적인 것의 바타유적 친연성을, 이제는 점점 희박해지고 있는 이 지독히도 난처한 결탁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어떤 예술적 활동을 다른 활동에 빗대어 고찰하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투우는 두 가지 점에서 아주 특별하다. 투우에서는 경기와 연기가, 예측불허의 승부와 주도면밀한 의식(儀式)이, 돌발성과 치밀함이 이중나선을 그리며 상승한다. 그거야 프로레슬링 같은 스포츠도 마찬가지 아닌가?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의문이 들었다면 투우의 경우 저 이중나선이 죽음으로 향한다는, 아니 반드시 향해야 한다는 필살의 규칙을 잠시 잊은 것이겠다. 



스페인에서 열리는 산세바스티안영화제에서 작년에 처음 공개한 <고독의 오후들>에서 알베르트 세라가 투우와 영화를 빗대어 보고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담하고 난폭한 동시에 엄정하고 차분한 이 작품에서 영화적 이미지의 내부와 외부를 구획하는 프레임에 대한 세라의 집착은 놀랄 만한 강도로까지 상승한다. 세라의 프레임은 투우사 안드레스 로카 레이가 소와 싸우는 경기장의 모습을 담아낸다기보다 그 자체로 일종의 경기장이 된다. 여기서 그는 집요하게 하나의 표적에 매달린다. 그 표적은 안드레스도 아니고 그와 겨루는 소도 아니다. 일정한 복장과 장구를 갖추고 모종의 절차를 따라 필살의 의례를 수행하는 안드레스의 치밀함, 그런 것들 따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순수한 분노로 내달리는 소의 돌발성, 그리고 이들이 격렬하게 뒤얽히며 예정된 죽음에 다가가는 매 순간을 결코 반복되지 않을 뜻밖의 순간처럼 느끼게 만드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세라의 프레임이 집요하게 좇는 이 표적을 간단히 스캔들이라고 부르자. 스캔들은 이중나선을 그리며 상승하는 돌발성과 치밀함이 치명적 아름다움에 이르는 시간을 필요로 하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스캔들의 독특한 사건성은 그것이 반복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영화적 프레임으로 스캔들을 포착하려는 시도는 일종의 광기나 다름없다.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영화는 원리상 무한히 반복 가능하기 때문이다. 유일함의 반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분명 광기다. 바쟁이라면 이를 형이상학적 외설성이라고 불렀을 터다. 반복 불가능한 스캔들의 체험을 스크린에 비치는 반복 가능한 이미지로 사로잡아 우리에게 전하겠다는 세라의 시도는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라는 스크린상에서 실제의 죽음을 묘사하는 것이 반복 가능성을 통해 죽음에 엄숙함과 영원성을 부여하기에 감동적이라는 바쟁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반복 가능성이 아니라 반복 자체를 통해 죽음의 스캔들을 다루려 든다. 세라에게 프레임이 경기장이라면 반복은 투우사의 카포테나 물레타와도 같다.

반복 가능성이 아니라 반복 자체를 통해 반복 불가능한 것의 체험을 가능케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고독의 오후들>에서 소들의 죽음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이 영화가 언제 어디서든 거듭 상영될 수도 있다는 점과는 무관하다.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스크린상의 죽음이 반복되리라는 것, 즉 지금 상영 중인 영화의 외부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매일 오후의 죽음’은 세라의 관심사가 아니다. 바로 지금 상영 중인 영화의 내부에서 반복 자체를 통해 매 순간 스캔들의 체험을 야기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목표다. 반복은 크게 세 곳의 장소(투우 경기장, 자동차 안, 호텔 객실)만을 오가다시피 하면서 유사한 절차로 진행되는 다섯 차례의 투우 경기를 보여주는 이 영화의 내부에 있다. 세라는 반복의 장소들에 속하지 않는 두 개의 장소 가운데 하나를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주위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어둠 속에서, 검은 소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 그리고 자동차 조수석에 탄 안드레스의 얼굴을 정면에서 포착한 쇼트가 이어진다.



경기장으로서의 프레임 속에서, 스캔들은 성난 소가 카포테나 물레타에 달려들듯 반복에 달려든다. 이때 엄습의 강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프레임의 견고함이 요구된다. 실로 <고독의 오후들>을 이루는 각각의 쇼트들은 절대적인 독립성을 지니고 있다. 롱테이크에만 기대기보다는 여러 다양한 쇼트들을 구사해 장면을 구축하는 데쿠파주의 영화이기도 한데 말이다. 이것은 개별적인 쇼트 하나하나가 ‘매일 오후의 죽음’에 해당하는, 그야말로 ‘고독의 오후들’로 이루어진 영화다. 이 쇼트들은 서로 다른 위치에서 서로 다른 시점에 촬영한 것인데도 집요한 반복의 감각을 준다. 우리는 어떤 영화의 쇼트들을 글로 묘사할 때 종종 그것들 내부의 상황 및 전후 관계에 의존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고독의 오후들>의 쇼트들을 적절히 구분해 묘사하는 일은 꽤 어렵다. 동시대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강고한 형식주의자인 세라의 쇼트들이 이처럼 식별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는 것은 어째서일까? 유사한 상황(‘안드레스가 소를 노려보고, 소가 그의 카포테나 물레타를 노려보고, 그가 카포테나 물레타를 흔들고, 소가 그것을 향해 돌진하고……’)이 거듭되기 때문일까? 그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지만, 실은 무엇보다 세라의 프레임이 거의 철저하다 할 만큼 시선의 벡터를 통제하고 있어서다.

투우 경기장 장면들에서 우리는 관중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카메라는 좀처럼 관중석 쪽을 향하지도 않고 관중이 보일 만큼 고개를 들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펜스 바로 뒤에 모여 있는 관계자들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심지어 투우사와 소와 그들을 둘러싼 모래만이 보이는 부감 쇼트들도 있다. 우리는 소리를 통해서만 관중의 존재를 떠올리는데, 그러다 보니 때로 그 존재 여부 및 함성이나 야유의 사실성이 미심쩍게 느껴지는 때도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매개할 어떤 존재도 없이 각각의 쇼트와 맨눈으로 대면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안드레스의 일상적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경기장 밖의 삶은 호텔 객실과 자동차 내부에서 묘사되는 것이 전부다. 그가 투우 경기를 위한 의상을 입고 벗는 호텔 객실에서 우리는 거울은 볼 수 있지만 창문은 볼 수 없다. 안드레스와 동료 투우사들이 타고 이동하는 자동차 내부는 조수석 쪽에 고정된 카메라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처럼 촬영했다. 우리는 안드레스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영화가 반쯤 지났을 무렵에 나오는, 차창 밖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대응하는, 밤거리 풍경이 보이는 단 하나의 시점 쇼트가 있을 뿐이다. <고독의 오후들>에서 이 풍경은 저 반복의 장소들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하나다. 자동차 조수석에 탄 안드레스의 얼굴을 포착한 쇼트는 이 시점 쇼트 앞뒤로 배치되어 있다. 영화 도입부의 검은 소와 마찬가지로, 이 밤거리 풍경은 프레임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스캔들의 지표다. 

이 유일한 시점 쇼트는 우리에게 이 영화의 쇼트들이 누구의 시점에도 귀속되지 않는 것임을 확실히 일러준다. 투우 경기의 경우, 관중석의 특정한 위치에서 경기장을 전후좌우로 둘러보는 시점을 기준으로 편집하는 스포츠 방송과 달리, 어떤 기준점도 가정하지 않는 여러 대의 카메라로 촬영된 쇼트들의 조합으로 구성되었다. 그럼에도 연속적인 인상을 준다는 점이 놀랍다. 프랑스 개봉 당시 《카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세라가 쓴 표현을 옮기자면, 그는 어떤 직관이나 선입견도 없이 사물들을 포착하는 “두뇌가 없는” 카메라의 역량을 데쿠파주를 통해 강화하고 있다. (카메라의 이런 역량을 믿기에 그는 촬영 현장에서 카메라 오퍼레이터들이 포착하는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모니터를 쓰지 않는다.) 물론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문제 삼을 수도 있다. 세라는 프레임의 견고함을 추구하지만, 쇼트들의 일관성에 매달리는 법은 없다. 문득, 일관성이란 지극히 비인간적인 것으로 진지함과 더불어 광신적인 수도사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라 했던 파졸리니의 말이 떠오른다. 생각해 보라. <고독의 오후들>을 만든 이 작가는 리베르탱들이 한밤의 숲에서 벌이는 난교를 묘사한 <리베르테>의 작가다. 그는 진지함과 일관성을 불문율로 삼는 미스터리물을 기분 좋게 농락한 <퍼시픽션>의 작가기도 하다. 견고한 프레임과 집요한 반복을 통해 스캔들의 경험에 다가간다는 언뜻 모순적인 시도를 떠받치는 그의 신조는 무엇일까? 



2022년에 세라는 자신의 고향인 스페인 북동부의 바뇰레스에서 열리는 축제에 연사로 초청받아 즉흥 연설을 한 적이 있다. 이 연설은 이듬해에 『성 마르티리아를 위해 건배』라는 제목의 책자로 발간되었다. 여기서 그는 프레임을 비단 영화가 아니라 삶의 전 국면에서 의미심장한 개념으로 확장해 쓰고 있다. 왜냐하면 우연은 “잘 구조화된 프레임 내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가 한없이 사랑하는 카니발적 ‘축제(festa)’는 어쩐지 스캔들과 일맥상통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형태의 축제도 정의상 통제 불가능하다. 그것을 실행하고 조직화된 방식으로 관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너무나도 역설적인 도구를 사용하는 것, 즉 혼돈을 만들어내는 것뿐이다.”

지금 왜 세라는 이런 시도에 몰두하는가? 픽션영화에서의 죽음은 언제라도 평행우주에서 초기화할 수 있는 진부한 것이 되고, 다큐영화에서의 죽음은 스마트폰으로 기록되어 온라인에 유포되는 찰나의 충격을 빌려오거나 모방한 것이 된 지금, 거듭되는 실제적 죽음을 통해 영화적 이미지의 육감(肉感)을 되찾기 위해서일까? 하지만, 이 영화에서 소의 죽음은 스캔들이 아니다. 지나치게 우아한 의식과 절차를 따라 거행되는 투우라는 경기 자체의 난폭함만이 아니라, 세라가 프레임의 엄정함과 쇼트의 집요한 반복을 통해 역설적으로 활성화하려 드는 형식의 혼돈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러면 이 영화를 아무리 거듭 본다고 해도 결코 말끔히 가시지 않을 스캔들이 강렬하게 다가올 터다. 그것은 두뇌 없는 카메라가 그야말로 가차 없이 줄기차게 포착해 내는 안드레스의 표정이다. 불안, 안도, 긴장, 공포가 뒤섞인 이 현존하는 최고 투우사의 얼굴에는 스크린상에 아직 실현되지 않은 죽음의 스캔들이 시종일관 어른거린다. 내부 시사 자리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본 안드레스가 충격을 받았던 것도 이 때문은 아니었을까? 두뇌 없는 카메라는 당신이 바라는 대로 당신을 보지 않는다. 모두가 각자의 손에 카메라를 들고 각자의 이미지를 만드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이처럼 무심한 시각이야말로 진정한 스캔들이다. 

2025-07-26

밤과 잠과 꿈 ─ 가상의 태양 아래서 (혹은 안에서)
: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태양과의 대화>


※ 아래 글은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2024 《우주 엘리베이터》 리뷰북에 수록된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대단히 정중한 사람이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벌써 십수 년 전이다. <엉클 분미>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그는 상대방의 이야기가 그다지 자신의 흥미를 끄는 것이 아니어도 주의 깊게 듣는다. 나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상대방에게 그런 느낌을 준다. 그러다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의견을 구하면 차분하게 답하곤 한다. 

물론 그의 인내심에 한계가 없지는 않다. 이런 일이 떠오른다. 공동 기자회견이 마련되어 있었음에도 일군의 기자들이 기어이 그와 단독으로 만나야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답게도 몇 시간을 할애해 그들 각각과 차례로 인터뷰를 한 다음이었다. 그가 대담 장소를 나와 한숨을 쉬고 넌더리를 치며, 하지만 예의 그 미소를 띠고 “정글! 정글! 또 정글!”이라고 내뱉는 것을 나는 보았다.

위라세타쿤에게 정글이라는 장소의 의미를 묻는 것은 서부극을 만드는 감독에게 사막이나 황야 같은 장소의 의미를 묻는 것만큼이나 열없는 일이다. 그에게 정글은 관념적 형상이 아니라 실재적 질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 이런 질료가 어디 정글뿐일까? 밤과 잠, 그리고 꿈 또한 그런 질료에 속한다. 그러니 그에게 굳이 장소의 의미를 묻겠다면 차라리 침대의 의미를 묻는 편이 낫다. 그가 빚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는 것, 영원한 것이 아니라 덧없는 것, 날숨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들숨에 작용하는 것, 이런 질료들을 따라 우리가 배회하게 되는 세계는 그가 창조한 예술적 세계라기보다 그를 매개 삼아 예술로 드러난 세계에 가깝다. 여기엔 “시인이 끊임없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그를 생각한다”고 말했던 호프만슈탈의 태도에 한없이 가까운 시학이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관능적으로 충만한 행복한 수동성의 감각이 있다. 간단히 규정하기 힘든 이 수동성은 작품마다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렇기는 해도 위라세타쿤의 경력 초기부터 어떤 식으로든 뚜렷이 감지되었던 것임은 분명하다. 그것은 <정오의 낯선 물체>나 <아시아의 유령>에서처럼 영화의 진행을 타인들의 우발적 발화에 기꺼이 유희적으로 의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친애하는 당신>에서처럼 한낮의 태양 아래 느긋하게 몸을 내맡긴 인물들의 시간 속에 영화 자체가 한껏 잠겨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아이언 푸시의 모험>이나 <세계의 욕망>에서처럼 공동 연출의 방식으로 작가적 권한을 나누어 행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건, 수동성의 양상이 다를 뿐 관능적 행복의 강도는 언제나 최대로 치솟는다. 위라세타쿤의 퀴어 시네마는 정체성의 정치보다는 수동성의 경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태양과의 대화》(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태양과의 대화. 이 표현이 가리키는 대상은 복수이며 확정적이지 않다. 그 가운데 내가 아는 것은 다음의 셋이다. 

첫 번째 대상은 전시다. 이것은 2022년 5월 28일부터 7월 10일까지 태국 방콕 시티시티 갤러리에서 열린 위라세타쿤의 개인전 제목이다. 나는 이 전시를 보지 못했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짧은 공식 기록물을 보았을 뿐이다. 그가 몇 년 동안 직접 촬영해 모아둔 영상들을 가지고 “그의 개인적 기억이 없는 존재의 가능성을 탐문”한다는 다소 모호한 전시 소개문이 어쩐지 눈길을 끌었다. 분명 위라세타쿤이라는 개인에게서 연유한 것이지만 그에게 귀속되지 않는 존재라니, 어쩐지 그 특유의 수동성에 너무나도 잘 부합하는 표현처럼 다가왔다. 저런 탐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창작자보다는 매개자다.

두 번째 대상은 책이다. 방콕에서 열린 전시에 맞춰 발간된 이 동명의 책에는 GPT-3 플랫폼을 통해 구성한 대화들이 담겨 있다. 이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미디어버스에서 출간되었다. 대화 참여자들 가운데는 위라세타쿤 자신을 비롯해 살바도르 달리, 크리슈나무르티, 아서 C. 클라크, 틸타 스윈튼, 올리버 색스 같은 실존 인물도 있지만 이름 모를 인도 소녀도 있고, 늑대 그리고 블랙홀과 태양 같은 비인간 존재들까지도 있다. 이들의 모든 대화는 위라세타쿤과 공학자인 팻 파타라누타폰이 입력한 프롬프트를 따라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이 작업이 배우들에게 뭐라 말해야 할지 알려주지 않은 채 그들 주위를 서성이며 영화를 연출하는 느낌이었다고 말한다. <정오의 낯선 물체>에서 효과적으로 운용해 성공을 거두었던 ‘우미한 시체’라 불리는 초현실주의적 방법을 인공지능 플랫폼에 적용해본 수동성의 사례랄까?

세 번째 대상은 가상현실 퍼포먼스다. 이것은 2022년 7월 30일부터 10월 10일까지 열린 아이치트리엔날레의 커미션을 받아 제작되었다. 큐레이터 소마 치아키와의 인터뷰에서, 위라세타쿤은 “다른 미디어를 탐구하면서도 시네마로 되돌아온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퐁피두센터에서 이 작품을 선보일 때는 이렇게 말했다. “VR은 무언가 다르다. 그건 전혀 시네마가 아니다. (…) 나는 VR이 꿈에 가깝다는 것을 발견했다.” 꿈은 분명 꿈꾸는 자의 기억에서 연유하는 것이지만 꿈꾸는 자의 의지로 결코 통어할 수 없는 수동적 창조력의 극치다. VR에 관한 위라세타쿤의 언급에는 모호한 구석이 없지 않다. 그의 말은 VR이 관람자에게 꿈과 유사한 체험을 선사한다는 뜻일까? 하지만 그의 말은 그것을 다루는 작가에게 VR은 꿈과 기능적으로 닮은 장치이자 도구라는 뜻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은가?


<메모리아>(아피찻퐁 위라세타쿤, 2021)


이제 우리는 위라세타쿤에게 정글에 관해 묻기보다는 태양에 관해 물어야 한다. 다시 강조하자면, 그에게 정글은 실재적 질료다. 하지만 태양은 더는 그렇지 않다. 태양은 여러 실재적 질료들을 통해 그가 드러내려 하는 어떤 관념적 형상이다. 물론 그는 VR이 우리를 태양으로부터 떼어놓는 매체인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태양은 지구가 그 주위를 도는 천체를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무심한 말에 오도되어서는 안 된다. 그가 제공하는 가상현실 이미지는 컴퓨터로 만들어낸 시뮬레이션이고, 거기 등장하는 태양은 진짜 태양의 모사물일 뿐이라는 상식적인 발언에 자칫 길을 잃어서도 안 된다. 대화의 상대로서 태양은 현실의 천체와 무관한 형상이다. 이 태양은 천체가 아니라 매체다. 이 태양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태양과의 대화라고 명명된 전시와 책과 퍼포먼스는 하나의 태양과 나눈 세 개의 다른 대화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서로 다른 ‘태양들’을 드러내기 위한 세 번의 다른 시도처럼 보인다. 내가 실제로 접할 수 있었던 두 개의 시도만을 고려한다 해도, 위라세타쿤의 첫 VR 작업은 GPT-3가 생성한 대화를 엮은 책과는 전혀 무관한 퍼포먼스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로 하여금 창조적 수동성의 열락을 누릴 수 있게 하는 장치, 그의 기억을 소재로 삼되 그의 통어에서 풀려난 세계를 만들어내는 장치, 달리 말하자면 꿈의 기제를 기술적으로 전유한 비개인적 또는 탈개인적 장치의 고안이라는 점에서는 놀랄 만큼 닮았다. 태양은 이런 장치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위라세타쿤의 영화는 그 자체로 이런 장치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는 이런 장치의 특성을 띤 인물이 종종 등장한다. 의인화된 장치라고 해도 좋겠다. 그의 영화에서 곧잘 마주치게 되는 잠자는 사람들 가운데 <메모리아>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에르난은 이런 장치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주 특별한 존재다. 그는 꿈조차 꾸지 않고 잠에 푹 빠져드는 존재다. 영화의 주인공인 제시카는 이런 상태를 죽음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잠재적으로 세계의 모든 기억을 저장하는 ‘하드 디스크’임을 자처하는 에르난은 접촉을 통해 제시카에게 진정 수동성의 창조적 열락이란 어떤 것인지를 체험케 한다. 여기에는 <열대병>에서 보았던 인간과 비인간의 조우를 둘러싼 애니미즘적 신비 대신 오토마티즘적 경이가 있다. 그것과 대화하고 접촉하는 이를 이런 경이로 이끄는 인격적 비인격이야말로 오늘날 위라세타쿤을 매혹하는 가상적 태양이다. 즉, 에르난은 이런 태양의 형상이다.


<태양과의 대화>(아피찻퐁 위라세타쿤, VR 퍼포먼스)


위라세타쿤의 VR 퍼포먼스를 체험하는 공연장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한가운데 커다란 양면 스크린이 설치된 공간에서 헤드셋을 착용하고 이리저리 느리게 배회하는 일군의 관람자들을 보게 된다. 우리보다 앞서 입장한 이들이 보고 있는 가상현실 속 풍경은 어떠한지 당장은 알 수 없다. 공연장 가운데 놓인 커다란 스크린 양편에는 서로 다른 영상이 프로젝션되고 있지만 그 둘을 동시에 보기는 어렵다. 이처럼 동시적 관람을 어렵게 하는 더블 프로젝션 방식은 위라세타쿤이 초기 설치 작업인 <홍콩에서의 두 번째 사랑>에서부터 이미 사용했던 터다. 먼저 입장해 헤드셋을 쓰고 배회하는 관람자들의 몸짓을 나중에 입장한 관람자들이 일종의 퍼포먼스처럼 보게 하는 방식도 오늘날의 VR 작업에서 낯선 것은 아니다. 

이 작업에서 진정 흥미를 끄는 것은 스크린에 프로젝션되는 두 개의 영상과 헤드셋에 재생되는 가상현실 영상을 위라세타쿤이 흡사 생성형 AI의 작동을 활성화하는 프롬프트처럼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 이때 생성형 AI에 해당하는 장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휴먼 러닝’의 역량을 갖춘 관람자 각각을 유닛으로 삼아 일종의 신경망처럼 기능하는 공연장 자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또 다른 가상적 태양을 마주하게 된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여기서 우리는 아예 그 태양 속에, 태양의 일부로 있다.

스크린에 비치던 두 개의 영상이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우리는 앞서 입장한 관람자들이 벗어둔 헤드셋을 착용한다. 이 체험형 퍼포먼스에서 헤드셋을 쓴다는 것은 눈을 감고 잠에 빠져 꿈을 꾸는 상태와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잠들어 있되 서서 배회하는 몽유의 상태라고 해야 옳겠다. 헤드셋을 쓴 다른 관람자들은 허공에서 떠도는 하얗게 빛나는 조그만 점의 형상으로 보인다. 우리보다 늦게 입장해 아직 헤드셋을 쓰지 않은 관람자들은 알아서 조심스레 우리를 피해 다닐 것이다. 두 부류의 관람자는 스크린이나 디스플레이에 비치는, 러닝타임이 정확히 맞춰진, 이따금 확실히 시선을 유도하는 시각적 요소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영상을 보며 각자의 움직임을 그린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향은 청각적인 수준을 넘어 종종 촉각적으로 다가온다. 

이 퍼포먼스를 관통하는 원리는 단순하고 강력하다. 모두가 다른 것을 보면서도 하나의 응시 안에 놓여야 한다. 이것은 장치의 명령이고 장치적 명령이다. 헤드셋을 쓰고 나면 곧바로 보이는 것은 공연장 전체가 모델링된 증강 현실이다. 공연장 가운데는 여전히 커다란 양면 스크린이 있다. 그런데 공연장 사면의 벽 위쪽으로 더 많은 스크린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 스크린은 이내 하나둘씩 사라지고 하나의 강력한 형상, 하얗게 빛나는 태양의 형상이 떠오른다. 이 태양은 이 퍼포먼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스펙터클한 형상이다. 여기서 위라세타쿤이 이처럼 컴퓨터로 시뮬레이션된 태양의 형상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왜일까? 소마 치아키에게 말하길, 그는 이 작업을 진행할 때 “스크린을 축복하는 동시에 스크린과 작별을 고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헤드셋을 쓰지 않고 공연장을 배회하는 관람자들이 성물로서의 스크린에 경의를 표하는 자리에 놓인다면, 헤드셋을 쓴 관람자들은 스크린에 작별을 고하면서 태양을 환대하는 자리에 놓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태양의 응시 가운데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심해의 구덩이 같은 곳에서 부유하고 있다. 어쩐지 이건 위라세타쿤이 자신의 아득한 기억에서 끄집어낸 무언가를 시뮬레이션한 것 같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 게임을 즐겼고, 아타리가 1982년에 출시한 <E.T.>는 유년기의 그를 사로잡은 게임 가운데 하나였다. 그야말로 배회하는 일이 전부라 할 이 악명 높은 게임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역사상 최악의 컴퓨터 게임으로도 꼽히곤 한다. 어린 시절 이 게임을 플레이해본 이라면 (위라세타쿤이나 나와 동년배라는 뜻이겠지만) 태양과의 대화라 명명된 가상현실 퍼포먼스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움직임의 감각이 <E.T>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문득 깨닫게 될 터다. 배회하고, 구덩이에 빠지고, 때로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것. 그렇다면 여기서 게임의 플레이어는 과연 누구일까? 행복은 누구의 것일까?

2024-06-16

감추는 것과 지켜보는 것: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 아래는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에서 열린 하마구치 류스케 특별전(2024.5.18~26)에 맞춰 발간된 소책자에 실린 짧은 글이다. 이 글의 일부는 격월간 사진잡지 《보스토크》 제45호(2024년 5월 20일 발간)에 실은 보다 긴 글 「터칭 스페이스: 스마트휴먼의 몸짓과 장소」에 활용되었으며 주제적으로 두 글은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너무 위험한 제목이 아닌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곧바로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로, 이것은 주제를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진술이어서, 이것이 실제로 영화의 주제인지와는 상관없이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안의 모든 요소를 이 진술에 비추어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것은 종종 선의 (모순개념까지는 아니어도) 반대개념으로 파악되는 악의 존재를 부정하는 진술이어서, 그 진술과 호응하는 이런저런 의문들을 거듭해서 불러내기 마련이다. 그럼 선은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는 것은 모두 선인가? 이런 진술을 자연의 풍광이 전면화된 자못 생태주의적인 소재의 영화 제목으로 내걸었으니 과연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 제목이 주는 ‘형이상학적’ 부담을 어떻게 떨쳐낼 것인가? 과연 그는 이 영화를 ‘자연에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진부한 사춘기적 교훈과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져갈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런 물음을 품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상영되는 스크린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관 출입구를 나설 때쯤이면, 우리는 이 제목이 일종의 눈속임 내지는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정말이지 이 영화는 악의 형이상학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우리는 제목에는 별 뜻이 없다는 하마구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한다. 그는 관객들이 사춘기적 교훈의 세계에서 배회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실은 다른 영화적 도전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어떤 주제 같은 것을 감지했다면 그것이 무엇이건 그냥 기각해버리는 편이 낫다. 또한, 이 제목은 악의 존재를 부정하는 진술이 아니라 기이할 정도로 이 영화에 결핍되어 있거나 부재하는 것에 관객이 시선을 돌리지 못하도록 하는 유인의 진술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영화는 짐짓 ‘자연에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형이상학적 교훈을 말하는 척하면서 ‘타쿠미의 스마트폰은 화면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소하지만 번연한 사실을 감춘다.

사소한 것부터 살펴보자. 영화의 주인공으로 하라사와 마을의 ‘심부름꾼(べんりや)’임을 자처하는 타쿠미는 하교 시간에 맞춰 외동딸인 하나를 데리러 가는 것을 깜빡하곤 한다. 그때마다 하나는 마을의 숲을 가로질러 혼자 귀가하곤 하는 것 같다. 대체 그는 학교 교사들에게 왜 미리 전화해두지 않는 것일까? 어느 날 하나가 실종되어 부랴부랴 찾아 나설 때도 그가 경찰서든 어디든 서둘러 전화해 알리는 모습 같은 것은 화면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 스마트폰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마을에 설립 예정인 글램핑장 설명회 차 도쿄에서 온 두 사람 중 하나인 마유즈미의 스마트폰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해 주기도 하고, 나중에 그들이 다시 마을로 찾아올 때 만날 장소의 위치를 그녀의 스마트폰으로 공유해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쿠미의 스마트폰은 결코 화면에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에서 스마트기기나 디지털 디스플레이가 화면에 보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그때마다 어김없이 부정성과 연관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물론 부정성과 연관된다 해서 악은 아니다. 그저 하마구치가 거북하게 느끼는 것일 뿐이다. 글램핑장 설립을 추진하는 플레이모드사(社)가 컨설턴트와 진행하는 치졸한 온라인 회의의 모니터 디스플레이, 이 회사의 두 직원인 마유즈미와 다카하시가 하라사와를 다시 찾을 때 자동차에 내비게이션용으로 거치해 둔 다카하시의 스마트폰에 뜨는 데이팅 앱의 알림(“축하드립니다! 모카 씨와의 매칭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을의 다혈질 청년이 플레이모드라는 회사가 어떤 곳인지를 검색해 저녁 식사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태블릿 PC의 디스플레이처럼 말이다. 이런 것들을 다룰 때면 하마구치의 연출은 이따금 어색하고 불안정하다. 따라서, 긴 시간 동안 아무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일 없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객석에서 발언을 경청하고 있는 글램핑장 계획 설명회 장면만큼이나 하마구치의 영화적 세계가 어떤 부재 내지는 배제 위에 성립된 부자연스러운 세계인지 분명히 드러나는 곳도 없을 것이다. 그의 연출은 이런 상황에서 때로 비범한 힘을 발한다.

하마구치는 대화 상황의 연출에 능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거의 말의 교환에 집중하고 있는 <해피 아워>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말 이외의 요소들을 보다 빈번히 대화 상황에 끌어들이려 해 온 작가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배제에서 포함으로 향하는 모험이다. 그 모험이 한 편의 영화에서 종종 부분적으로만 시도될 뿐이라 해도 말이다. <해피 아워>의 중심 잡기 워크숍 장면에서,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 카>, 그리고 <우연과 상상>의 몇몇 빛나는 장면들에서, 우리는 그가 말과 몸짓을, 그리고 말과 움직임을 한층 복합적으로 함께 다루는 식으로 대화 상황의 역동성을 끌어올리려 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는 오늘날 우리의 소통과 몸짓과 움직임을 비롯해 우리를 둘러싼 장소의 성격까지도 변모시키고 있는 디지털 디스플레이 장치들을 대화와 토론 상황에서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지 부분적으로나마 조심스레 건드려본다. 여기에 하마구치의 첫 번째 영화적 도전이 있다. 이 영화를 시각적으로 특징짓는 자연의 범람은,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부재의 부자연스러움을 쉬이 감지하지 못하게 하는 환경으로서의 미장센이다.

하마구치의 두 번째 영화적 도전은 한층 야심적이다. 첫 번째 도전이 동시대적 성격을 띤다면 이 도전은 역사적 성격을 띤다. 그것은 바로 비인칭적 시점을 효과적으로 구사하는 것이다. 물론 비인칭적 시점을 내러티브 영화에서 오롯이 밀고 나가는 작업이라면 일본영화에는 이미 미조구치 겐지와 오즈 야스지로라는 두 명의 거장이 있다. 미조구치의 우주적 냉혹함의 시점과 오즈의 사물적 냉정함의 시점에 필적하는 비인칭적 시점을 과연 오늘날의 일본영화가 회복할 수 있을까? 분명 등장인물의 움직임과 조응하는 것이지만 결코 그의 시점이라고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숲의 나무들을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는 극단적인 앙각 트래킹숏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이 영화는 예사롭지 않다. 이는 하마구치가 거기에 깃든 역사적 야심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자동차의 시점’이 구사된 세 개의 롱테이크다. 하나를 데리러 학교로 찾아간 타쿠미가 교사에게 딸이 이미 하교했다는 말을 듣고 차를 몰고 떠나는 동안, 카메라는 자동차의 후방에서 멀어져 가는 도로를 계속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오프닝에서 보았던 앙각 트래킹숏과 유사한 방식으로 숲의 나무들을 올려다보며 찍은 숏이 뒤따른다.) 마유즈미와 다카하시가 숲속에 있는 타쿠미의 집을 찾아갈 때, 카메라는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있는 타쿠미의 모습을 다카하시가 모는 자동차 측방에서 계속 응시하고 있다. 언뜻 이것은 다카하시의 시점숏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차가 멈추고 프레임 내부로 마유즈미를 뒤따라 그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면서 이내 그것은 어느 인간 주체에게도 귀속되지 않는 숏이 된다. 하나를 찾아 나선 우동집 부부의 자동차 후방에서 초저녁의 어스름 속에 멀어져 가는 도로를 응시하던 카메라는, 그들이 차를 멈추고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갈 때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의 방향을 돌리기도 한다.



이런 롱테이크들은 기묘한 비인칭적 시선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영화 전반에 걸쳐 적용된, 파란색을 주조로 삼으면서 이와 대조를 이루는 붉은색과 주황색을 이따금 화면에 침입시키는 색채 설계만큼이나 인위적인 느낌도 없지 않다. 기법 자체가 눈길을 끄는 스타일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확실히 이것은 거장의 영화라기보다는 야심가의 영화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영화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를 모험으로 이끄는 소수의 거장보다는 모험의 결과를 우리에게 알리는 야심가 여럿인지도 모른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하마구치가 그러한 필요에 가장 걸맞은 우리 시대의 시네아스트 가운데 하나임을 다시금 수긍케 하는 작품이다.


2023-10-02

어둠을 기다리며
: 조너선 크레리의 『지각의 정지: 주의・스펙터클・근대문화』

 

※ 아래 글은 2023년 10월 2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조너선 크레리의 『지각의 정지: 주의・스펙터클・근대문화』의 옮긴이 후기다. 이 책을 크레리의 다른 저술들과의 연관 속에서 개괄적으로 소개하고자 쓴 것이다.




밤이 다가오자 그녀는 우리가 지배하는 시간이 끝나고 그녀의 시간이 시작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드니 디드로, 「맹인에 관한 서한에 붙임」


코로나 대유행이 한창이던 2021년 초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에세이 영화 <모든 곳에, 가득한 빛All Light, Everywhere>의 연출자인 테오 앤서니는 조너선 크레리의 『관찰자의 기술: 19세기의 시각과 근대성』이 이 작품의 근간이 된 텍스트 가운데 하나라고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초반부에는 『지각의 정지: 주의・스펙터클・근대문화』에서 크레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중요한 이론적 기획에 상응하는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여기서 제작진은 액손Axon 본사 건물을 방문해 회사 대변인과 함께 그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액손의 전신은 1991년에 설립된 테이저 인터내셔널Taser International로 비치사성 무기인 테이저건이 바로 이 회사의 제품이다. 여기서 2008년에 출시한 바디캠은 이후 미국 경찰들에게 널리 보급되었고 오늘날 이 카메라로 촬영된 범죄 진압 현장 기록 영상은 액손의 서버에 실시간으로 저장되어 (주로 경찰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법정 증거 자료로 활용되곤 한다.

어쩐지 쇼핑호스트 같은 인상을 주는 액손의 대변인은 <스타워즈>나 <스타트렉>처럼 하이테크 느낌을 냈다는 2층 통로에서 건물 내부를 둘러보며 “여기엔 비밀이 없습니다”라고 과시하듯 말한다. 그의 말마따나 이 회사의 직원들과 간부들의 업무 공간은 구획별로 나뉘어 있기는 해도 중앙 통로에서 어디나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끔 되어 있다. 그런데 이처럼 ‘투명성’을 자랑하는 이곳 3층에는 선팅 처리된 전면 유리로 둘러싸인,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블랙박스’라 불리는 구역이 있다. 이곳은 회사의 신제품을 연구개발하는 부서가 있는 공간으로 이런 건축적 구조 덕분에 모종의 비밀스러운 느낌을 띠게 된다. 게다가 이곳은 건물 내부의 여타 업무 공간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중앙부 위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쯤에서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분석한 벤담적 파놉티콘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내 우리는 파놉티콘 모델만으로 이 기묘한 건축적 배치를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액손의 블랙박스는 구조적으로는 파놉티콘 중앙의 원형감시탑에 상응하지만 기능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내부에서 근무하는 이들은 정작 감시통제의 책임자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감시통제를 위한 시설이라기보다는 무언가 비밀스러운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자아내고 과장하는 스펙터클적 장치에 가깝다. 여기서 어둠은 사실 환하게 빛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작 사원들의 업무를 관리감독하는 책임을 질 ‘C-스위트’라 불리는 최고 경영진의 자리는 블랙박스에서 내려다보이는 1층에 있다. 즉 감시자인 그들 또한 짐짓 투명한 스펙터클이 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환하게 빛나는 것은 사실 어둠이다. 여하간, 도처마다 온통 빛이다. 이를 두고 엑손의 대변인은 투명성이라고 부른다.


푸코는 스펙터클이란 다수의 인간이 소수의 대상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고대 사회에나 걸맞은 것이라고 보았다. 이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원형 경기장이다. 그는 기 드보르의 이름이나 『스펙터클의 사회』는 전혀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사회는 “스펙터클의 사회가 아니라 감시의 사회”라고 단언하며 그와 다른 입장에 선다.[1] 하지만 크레리는 일찍부터 푸코의 견해에 의문을 표하며 스펙터클과 감시를 동시에 고려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가 1989년에 발표한 「스펙터클, 주의, 대항-기억」은 주의의 기술과 스펙터클의 연관을 스케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얼마간 『지각의 정지』의 밑그림이 된 논문이다. 여기서 이미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푸코는 텔레비전을 보거나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데 그리 시간을 쏟았을 법하지 않은데, 만일 그랬더라면 텔레비전이 파놉티콘 기술을 더 완벽하게 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터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 감시스펙터클은 그가 주장하듯 서로 대립적인 용어가 아니며 한층 효과적인 규율 장치 속에서 서로 교착되는 용어다. 최근의 기술적 발전은 이러한 중첩 모델을 그야말로 확고히 했다. 감상자의 행동, 주의력, 그리고 안구 운동을 모니터하고 수량화하기 위한 첨단의 이미지 인식 기술이 내장된 텔레비전 세트가 그 예다.”[2] 

이 글을 쓸 무렵 크레리가 텔레비전에서 감지했던 감시와 스펙터클의 중첩 모델은 글로벌 인터넷 네트워크와 스마트폰 사용이 일상화된 오늘날의 우리에겐 그리 낯설지 않다. 특히 2020년부터 대략 3년 동안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 대유행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장려되고 강화되면서 보편화된 각종 ‘온택트’ 장치들을 떠올려 보면 더욱 그렇다. 이제는 학교와 기관 들에서 폭넓게 쓰이고 있는 화상 회의 플랫폼 줌의 인터페이스는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비밀스럽게 작용하며 꺼림칙한 느낌을 주었던 스펙터클적 감시의 기술을 환하게 ‘사용자 친화적’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라 하겠다. 이 플랫폼의 사용자들은 다른 이들의 얼굴을 여러 개의 분할 화면로 한꺼번에 보는 감시의 주체인 동시에 스스로의 얼굴을 다수에게 내보이는 스펙터클적 대상이 된다. 

물론 온라인 모임 중에 비디오나 오디오를 끄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감추면서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는 사용자도 적지 않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 플랫폼에선 자신의 존재를 한껏 드러내는 사용자일 수 있다. 얼굴 없는 ‘눈팅족’이 어딘가에선 어떤 집단의 얼굴을 대변하는 표상일 수 있고, 스펙터클적 선망의 얼굴이 어딘가에선 얼굴 없는 ‘어그로꾼’일 수 있으며, 익명으로 당신에게 줄기차게 모욕을 가하는 이가 온라인 모임 중엔 온화한 얼굴로 당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조용한 참여자일 수 있다. 중첩의 양상은 서로 판이할지라도 도처에서 감시와 스펙터클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중첩의 양상들을 새로 고안해내고 퍼뜨리고 확장하는 과정과 단단히 맞물려 있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내면화된 스펙터클적 감시의 형식이 바로 집중과 분산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주의(력)의 관리다. 

1999년에 출간된 야심작 『지각의 정지』에서 크레리는 19세기 후반부에 당대의 새로운 시청각적 기술들, 사회적・철학적・과학적 담론들, 그리고 예술적・문화적 실천들이 뒤얽히는 가운데 주의라는 논쟁적 개념이 어떻게 떠오르고 변형되고 재구성되었는지를 추적하는 ‘주의의 계보학’을 치밀하게 그려 보인다. 이 책의 치밀함과 집요함은 이따금 독서 중에 길을 잃게 할 정도지만, 그의 논의가 그저 역사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준에서 멈추는 법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오늘날 ‘주목 경제’ 혹은 ‘관심 경제’라고도 불리는 주의 경제attention economy의 운용을 위한 시청각적 인프라가 근대 문화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무언가에서 다른 것으로 빠르게 주의를 전환하는 일을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문화 논리의 일환”이라고 보는 크레리는 19세기 후반의 유럽이라는 시공간을 집요하게 파헤쳐 가속화된 교환과 유통으로서의 자본이 어떻게 주의집중과 주의분산이 서로 교차하는 체제가 되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이 강박적 주기 운동의 체제는 2013년에 출간된 『24/7 잠의 종말』에서 그가 “그림자 없이 불 밝혀진 24/7의 세계”라고 묘사한 초스펙터클적 세계이며, 자본주의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극단적 비활동인 잠마저도 일종의 활동 대기 상태처럼 취급하는 초감시적 세계이기도 하다.[3] 

『지각의 정지』의 한 부분에서 크레리는 푸코적 감시 사회 모델과 드보르적 스펙터클 사회 모델을 몽타주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면서, 사회를 공동체 없이 재구조화하는 자본주의적 분리의 기술로서의 스펙터클이 정치적 힘으로서의 신체를 축소하는 분산적 감시통제 권력의 기제에 상응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스펙터클은 권력의 광학이 아니라 권력의 건축이다. 이제는 하나의 단일한 기계적 기능으로 수렴되고 있는 텔레비전과 개인용 컴퓨터는 우리를 고정시키고 금 긋는striate 반反유목적 수단들이다. 선택 및 ‘상호작용성’의 환영으로 가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신체를 통제 가능한 동시에 유용한 것으로 만들면서 획정과 정주를 활용하는 주의 관리의 방법들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코로나 대유행 중인 2022년에 긴급히 출간된 정치적 팸플릿 『초토화된 지구: 디지털 시대를 넘어 탈자본주의적 세계로』에서 “소셜 미디어에 혁명적 주체는 없다”는 진단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4]


푸코와 드보르는 크레리에게 비판철학의 방법론적 모델을 제공해준 이들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24/7 잠의 종말』이나 『초토화된 지구』처럼 21세기 들어 그가 주로 내놓은 시사성을 띤 저술들만 놓고 보면 그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협을 경고하는 문명 비판적 철학자처럼 비치기도 한다. 이런 책들에서 크레리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마크 피셔나 『좌파의 길: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의 낸시 프레이저 같은 풍모를 띠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관찰자의 기술』과 『지각의 정지』처럼 20세기 말에 내놓은 저술들에서, 크레리는 푸코의 고고학적・계보학적 분석과 드보르의 고도로 비평적인 에세이 스타일이 결합된 방법으로 주로 19세기의 시각과 근대성에 천착하는 박학다식한 비정통적 역사가의 면모를 보인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전자의 책들이 그가 언제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우리 시대에 대한 시사적 개입이라면, 후자의 책들은 우리 시대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학술적 모험이다. 둘의 관계에 대한 크레리의 인식은 『관찰자의 기술』을 여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인용한 “역사적 유물론자에게 있어서 그가 몰두하는 시대는 실제로 그의 관심을 끄는 시대의 전사前史일 뿐”이라는 말을 통해 분명히 표명된 바 있다.

『관찰자의 기술』과 『지각의 정지』에서 크레리가 몰두하는 시대는 물론 19세기이지만, 전자가 19세기 초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후자는 19세기 후반에 보다 초점을 맞추어 시각과 근대성의 관계를 파헤치고 있다. 그는 시각과 관련해 19세기 초반에, 구체적으로는 1820~30년대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며, 1838년 이후 사진의 발전이나 1870년대와 1880년대의 모더니즘 회화는 이러한 변화의 귀결 내지는 반향이라고 본다. 분명 이때 크레리는 『말과 사물』에서 푸코가 상정하고 있는 ‘근대성의 문턱’에 해당하는 시기를 염두에 두고 중대한 변화들을 고찰하고 있다. 17~18세기의 고전주의 시대를 특징짓는 재현/표상의 에피스테메와 단절하며 역사성에 입각한 근대적 에피스테메가 출현하는 시기 말이다. 푸코에 따르면, 분석의 장소가 세계에 대한 재현/표상에서 유한한 인간으로 이행한 이때부터 지식은 전적으로 선험적이기보다는 “해부학적-생리학적 조건을 띠고, 점차 신체적 구조 내에서 형성”된다.[5] 

크레리는 푸코적 시대 구분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각 시대의 시각성을 나타내는 그만의 은유적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데 카메라 옵스쿠라와 입체경이 그것이다.[6] 둘의 차이를 따져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카메라 옵스쿠라는 장치 외부의 세계를 반드시 전제하지만, 입체경은 장치 내부에 장착된 미세하게 다른 두 장의 사진을 필요로 할 뿐이다. 카메라 옵스쿠라로 이곳저곳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관찰할 대상이 (또는 적어도 그 대상으로부터 나오는 빛이) 현존하는 장소로 거듭 이동하는 일이 필수적이지만, 입체경을 사용하는 관찰자는 굳이 어딘가로 이동할 필요 없이 소프트웨어에 해당하는 사진들만 바꾸면 된다. 카메라 옵스쿠라 장치 내부에 맺힌 상은 관찰자의 신체와 무관한 객관적 재현이지만, 입체경을 통해 지각되는 상은 관찰자의 좌우 두 눈에 개별적으로 입력된 시각 데이터에서 떠오르는 주관적 구성이다. 즉 후자의 ‘주관적 시각’은 철저하게 ‘육화된 시각’이며, 이것이 푸코가 “해부학적-생리학적 조건을 띠고, 점차 신체적 구조 내에서 형성”된다고 지적한 근대적 지식의 특성에 상응하는 시각임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을 터다. 카메라 옵스쿠라 모델에 어울리는 기하학적 광학에서 입체경 모델에 어울리는 생리학적 광학으로 이행하는 데 있어 선구적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색채론』의 괴테이다. 

크레리의 논의에서 주관적 시각은 이중적 의미를 띤다. 그것은 객관적 대상의 반영이나 재현이라는 구속에서 풀려난 자율적 시각으로서, 이를테면 1840년대에 윌리엄 터너가 그린 <빛과 색 (괴테의 이론)─대홍수 뒤의 아침> 같은 회화에서 극단적으로 표명되듯 “잔상을 통해서 태양은 몸에 속하게 되고 몸은 사실상 태양의 효과를 내는 원천의 자리를 맡는” 수준에까지 이른다.[7] 하지만 이 정도로 풀려난 시각을 어떻게 다시 통합할 것인지의 문제가 새로이 제기된다. 이리하여 칸트적 통각 개념은 19세기 들어 지각의 통합이라는 문제와 관련해 주의 개념을 이론적으로 재구성하고 그것의 기능을 조사하는 일련의 시도들로 전환된다. 이는 양안적 시각의 생리학적 작동 방식을 계량화・형식화하고 이러한 시각과 결부된 관찰자를 규범화함으로써 오늘날의 우리가 놓여 있는 스펙터클적 감시 사회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는 것이 크레리의 주장이다. 『지각의 정지』에서 그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19세기 후반의 화가들, 즉 마네, 쇠라, 그리고 세잔이 그린 그림들 역시 주관적 시각의 양가성 속에서 진동하고 있는 작업들로 파악된다. 이로써 크레리의 논의는 우리로 하여금 모더니즘적 ‘순수 시각’을 강조하는 전통적 해석에서 벗어나 분산적 힘과 집중적 힘이 교차하는 역동적인 주의의 장으로서 회화적 표면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이 책의 번역 작업은 주로 코로나 대유행 기간에 이루어졌다. 번역을 결심했던 2019년 당시엔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던 몇몇 사안들이 대유행 기간에 사회적으로 표면화되면서 다분히 ‘역사적’이라고 생각했던 이 책이 예전보다 훨씬 더 시의성을 띠게 된 듯한 느낌도 든다. 크레리는 『초토화된 지구』에서 소셜 미디어가 정치적 역량을 얼마나 위축시키는지를 주의력과 관련지어 진단하면서, “반전 운동이나 반제국주의 운동에 요구되는 지속적 특성을 띤 투쟁과 연대는 소셜 미디어의 확산에 수반되는 일시적이고 공허한 형식의 주의력과는 양립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8] 그렇다고 해서 크레리가 지속적 특성을 띤 집중적 주의력의 회복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그는 스펙터클이 공통의 생활세계를 정지시키지 못하도록 저항하려면 사람들끼리의 만남이 필수적이라고 역설하며 스펙터클은 “‘만남rencontre의 능력을 약화’하는 일을 체계적으로 조직화하고 그러한 능력을 사회적 환각으로, 즉 만남에 대한 거짓된 의식 내지는 ‘만남의 환상’으로 대체”한다고 한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를 거듭 떠올려 본다.[9]

나는 2000년대 초반 영화잡지 《씨네21》 공모를 통해 영화평론가로 등단해 활동하다 대학원에 입학해 영화사와 영화이론을 공부하던 중 이 책을 처음 접했다. 세미나 시간에 함께 읽은 책은 『관찰자의 기술』이었지만 오히려 나는 개인적으로 읽은 『지각의 정지』에 좀 더 끌렸다. 작품에 대한 심미적 감응 능력을 강조하며 얼마간 형식주의적 분석을 차용해 이루어지곤 했던 다분히 도락적이고 미장센 중심적인 시네필적 영화비평에 의문을 품고 있던 시기였고, 정작 작품의 세부를 들여다보는 일은 소홀히 하면서 ‘문화적 산물들’을 관통하는 이데올로기와 그것의 이론적 함의에 주목하는 강단 문화연구의 공허함에도 싫증을 내던 시기다. 어쩌면 완벽한 모델은 아닐지 몰라도 이 책은 순전히 형식주의적이지도, 역사주의적이지도, 실증주의적이지도 않으면서 비평을 빙자한 도락과 문화연구의 공허함 모두를 넘어서는 비판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크레리의 이 책은 어떤 면에서도 영화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영화와 관련해서 무척이나 흥미롭게 다가온다. 시각성 모델과 관련된 그의 논의가 정통적인 매체사 서술에 도전을 가하는 지점이 무엇보다 영화를 통해 더할 나위 없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통상 영화는 사진과 더불어 카메라 옵스쿠라의 장치적 구성을 계승한 매체로 간주된다. 그런데 외부적 세계의 현존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고, 관찰 대상을 보기 위해 이동할 필요도 없으며, 여러 개의 정지 이미지를 결합해 운동을 구성해내는 주관적 절차에 있어 분명 영화는 크레리가 제시한 입체경 모델에 더 가까운 매체처럼 보인다. 더불어, 1870년대 후반에 바그너가 바이로이트에 선보인 무대 건축의 양식, 즉 무대에서 빛나는 환영들에 관객의 주의를 붙들어두기 위해 ‘인공 어둠’[10]을 활용하는 양식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이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관람 환경의 기본값으로 삼은 것이 바로 영화다. 크레리의 이 책은 영화 장치를 구성하는 여러 자연스러워 보이는 요소들이 실은 주의의 체제 속에서 짜깁기로 구성된 것이며 역사적 특징을 띠기에 얼마든지 의문의 대상일 수 있음을 여실히 깨닫게 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지각의 정지』의 은밀한 중핵 내지는 동력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영화다. 크레리는 근대적 시각성의 20세기적 총화라 해도 좋을 영화 장치의 역사적 구성을 미심쩍은 눈으로 보면서도,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등 이후에 출현한 매체들과는 달리 영화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어떤 대안적 가능성 또한 여전히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이 책을 1907년 9월 22일 로마 콜론나 광장에서 영화를 본 경험을 기술한 프로이트의 편지에 대한 언급으로 끝내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늦여름의 저녁 공기가 상쾌한 이 광장에 모여 전혀 바그너적이지 않은 관람 환경 속에서 이따금 상영되는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단체로 휩쓸리는 군중도 아니고 고독하게 분리된 개인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불확정적인 채로 두 극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 과연 이들이 대안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느냐 여부는 단지 스크린에 비치는 영화의 성격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과 제도를 어떻게 바꿀 것이냐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다만, 어느 순간 관람을 중단하고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숙소로 돌아간 프로이트처럼, 일단 우리는 스펙터클의 빛을 보기 위한 인공 어둠이 아닌 어둠 자체가 기다리는 시공으로 일단 자리를 옮겨야 한다. 눈보다 귀를 열어두고 밤을 기다리다가, 이내 잠을 받아들이면서, 만남을 고대하면서.


번역 원고를 꼼꼼히 검토해주신 문학과지성사 편집부 및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한다. 김미경, 김선태, 김현주 등 번역 작업이 고독과 분리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도록 도와준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23년 6월 7일

유운성


[1]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 나남, 2020(번역개정 2판), pp. 394~95.

[2] Jonathan Crary, “Spectacle, Attention, Counter-Memory,” October 50 (Fall 1989), p. 105.

[3] 조너선 크레리, 『24/7 잠의 종말』, 김성호 옮김, 문학동네, 2014, p. 25.

[4] Jonathan Crary, Scorched Earth: Beyond the Digital Age to a Post-Capitalist World, Verso, 2022, p. 14.

[5] 미셸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전면 개역판), p. 437. 번역은 수정. 

[6] 크레리가 이처럼 1820~30년대에 시각성의 측면에서 중요한 단절이 있었음을 상정하고 카메라 옵스쿠라와 입체경을 각각 그 이전과 이후 시대의 시각성을 대표하는 모델로서 제시한 것은 1988년 4월 30일에 디아예술재단Dia Art Foundation의 후원으로 마련된 심포지엄에서다. 크레리 외에도 마틴 제이, 로절린드 크라우스, 노먼 브라이슨, 재클린 로즈 등이 참여한 이 심포지엄의 결과물은 핼 포스터가 책임 편집을 맡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Hal Foster ed., Vision and Visuality, Bay Press, 1988. 한국어판은 핼 포스터 엮음, 『시각과 시각성』, 최연희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2004. 

[7] 조나단 크래리, 『관찰자의 기술: 19세기의 시각과 근대성』, 임동근・오성훈 외 옮김, 문화과학사, 2001, pp. 208~10. 번역은 수정.

[8] Jonathan Crary, Scorched Earth, p. 16.

[9]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이경숙 옮김, 현실문화, 1996, p. 173. 번역은 수정.

[10] 바이로이트축제극장과 인공 어둠에 대한 논의는 다음의 책을 참고. Noam M. Elcott, Artificial Darkness: An Obscure History of Modern Art and Media,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6, pp. 49~59. 이 책에서 엘콧은 조반니 파피니Giovanni Papini가 1907년 5월 18일에 『라 스탐파La Stampa』 지에 게재한 「영화의 철학La filosofia del cinematografo」이라는 흥미로운 기사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엔 “주의가 산만해지는 것을 막는 영화관의 바그너적 어둠에 의해 인공적으로 주의분산이 차단된 […] 오직 하나의 감각, 즉 시각”이라는 구절이 있다. 



2022-11-29

문학과 위생: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

 

※ 아래 글은 《문학과 사회 하이픈》(2022년 가을호)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 종반부에는 보수 공사 중인 히로시마평화기념관, 일명 원폭 돔이 석양을 배경으로 보이는 쇼트가 나온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직후다. 붉은색 사브 900을 몰고 눈 덮인 홋카이도를 찾아간 가후쿠와 그의 운전기사 미사키가 서로 포옹하고, 과거의 트라우마와 똑바로 대면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돼”라고 다짐하는 장면 다음에 말이다. 원폭 돔 쇼트 위로는 “잠자코 있긴! 기다려, 아직 끝나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가후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이내 장면은 가후쿠와 그가 지도한 배우들이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공연하고 있는 극장으로 넘어간다. 즉 가후쿠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말은 그가 연기하고 있는 바냐의 대사다. 이쯤에서 우리는 저 원폭 돔 쇼트가 매우 이상한 자리에 있음을 알게 된다. 히로시마평화기념관은 가후쿠 팀이 <바냐 아저씨>를 공연하고 있는 극장이 아니다. 그런데 원폭 돔 쇼트가 저 자리에 들어가고 그 위로 바냐의 대사까지 얹어지면서 이는 공연 장면의 설정 쇼트처럼 되어버린다. 물론 원폭 돔은 그 자체로 워낙 잘 알려진 기념물이라 이것을 보고 어떤 극장의 외부라고 생각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원폭 돔 쇼트는 분명 설정 쇼트‘처럼’ 기능한다. (언젠가 히로시마를 더는 20세기 역사의 특정한 순간과 결부시킬 수 없는 세대가 도래할 때, 그때는 이것이 완벽하게 설정 쇼트‘로서’ 기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서 굳이 그렇게까지 사변적인 공상에 탐닉할 필요는 없겠다.) 단적으로 말해, 이 쇼트는 무척이나 작위적이다. 게다가 원폭 돔의 상징성 때문에 그 작위성은 한결 두드러진다. 영리한 연출자인 하마구치가 이를 몰랐을 리 없다.[1] 그런데도 원폭 돔과 <바냐 아저씨>를 무리하게 중첩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바냐 아저씨>라는 ‘문학’은 대체 ‘역사’로서의 히로시마에 대해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다 문학은 영화가 역사에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는 위생 관리의 수단이 된 것일까?


위생용품으로서의 무라카미 하루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동명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여기에 더해, 같은 소설집에 실려 있는 「셰에라자드」와 「기노」, 그리고 장편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등 무라카미의 다른 작품에서 얻은 소재나 아이디어도 차용되었음은 하마구치의 몇몇 인터뷰를 통해 익히 알려져 있다. 영화에서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는 <바냐 아저씨> 또한 무라카미가 원작에 도입해 둔 설정이다.

사실 하마구치가 무라카미의 소설을 각색해 신작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닥 의외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해피 아워>와 <아사코> 같은 하마구치의 이전 작품들에서 은근히 감지되었던 관능적 감각에 대한 지극히 소년적인 쑥스러움을 떠올려 보면 오히려 둘은 꽤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여기서 굳이 ‘쑥스러움’이라 표현한 것은 똑바로 바라보지는 않으면서 연신 흘깃거리는 태도, 짐짓 태연함을 가장한 맹렬한 관심을 가리키기 위해서다. 즉 이런 쑥스러움은 어느 정도 부드러운 공격성이 전도된 것이라 봐도 좋다. 하마구치의 영화가 기묘한 것은 이런 소년적 쑥스러움을 허구적으로 매개하는 자리에 정작 여성이 놓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인 ‘동시에’ 그 인물의 연기자로서 카메라 앞에 나타나는 이 여성은 다분히 성적으로 충전된 텍스트를 최대한 무덤덤하게 읊조린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녀의 말과 시선과 몸짓의 세부를 구석구석 살피게 될 익명의 잠재적 관객들을, 즉 “미래의 무한한 시선”을 대리하는 저 무정한 기계 앞에서 말이다. 남자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가 그가 쓴 소설에서 가장 성적으로 노골적인 부분을 차분하게 낭독하는 여성이 등장하는 <우연과 상상>의 두 번째 에피소드(‘문은 열어둔 채로’)는 가장 전형적인 예다. 


<해피 아워>


“미래의 무한한 시선”은 하마구치가 자신의 각본 구성 및 연기 연출 방법에 대해 세밀히 기술한 「영화 <해피 아워>의 방법」에서 카메라 장치의 속성을 규정하며 쓴 표현이다.[2] 하마구치가 자신의 영화에서 허구적 인물과 결부된 텍스트를 어떻게 연기자의 말과 시선과 몸짓의 진동을 촉발하는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지를 가늠케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글이다. 그런데 텍스트와 연기자의 상호 관계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피 아워>의 각본에서 직접 발췌한 대사를 예로 드는 법은 이상하리만치 거의 없다. 그러다 글의 말미에서 하마구치는 텍스트의 의미가 어떻게 현장의 연기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예시하기 위해 유독 영화 종반부의 대사 하나를 직접 인용한다. 바로 “아침까지 남자랑 있었어. 섹스했어”라는 대사다. 영화를 위해 장기간 워크숍을 거쳤다고는 해도 이전에 연기 경험이 전혀 또는 거의 없었던 <해피 아워>의 연기자들에게 이런 발화가 적잖이 진동을 유발하리라는 점을 하마구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등장인물에 대해 연기자가 맺는 관계를 “그녀는 내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나일 뿐이다”라는 역설로 표현하기도 한다.[3] 이런 불확정적 얽힘의 관계 속에서 등장인물의 대사는 어떤 식으로건 연기자의 말과 시선과 몸짓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는 카메라를 통해 포착되어 “미래의 무한한 시선”을 위해 고정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인 셈이다.

사실, 등장인물과 연기자 사이에서 진동하는 스크린적 복합체를 포착하려는 연출적 시도 자체는 현대 영화 이후의 동시대 영화에서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4] 철학자 스탠리 카벨에 따르면,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고전 영화의 경우라 해도 영화에서의 연기자란 작가가 고안한 허구적 등장인물을 실감나게 구현해내는 연극적 의미의 배우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다. 카벨은 카메라 앞에 놓인 이러한 연기자의 현전 자체를 통해 출현하는 스크린적 등장인물을 ‘유형type’이라고 부른다. 연극적 배우는 등장인물을 무대에서 투사하는 반면, 영화적 연기자는 스크린에 투사됨으로써 유형을 산출한다. 이러한 유형은 허구적이기보다는 실재적이다.[5] 이처럼 영화 연기에 내재한 근본적 수동성을 “미래의 무한한 시선”에 노출된 육체의 잠재력으로 파악하는 것 자체보다는, 그러한 육체를 촉발해 유형화하기 위한 기능적 도구로서 텍스트를 동원한다는 점에 하마구치의 독특함이 있다. 

더불어 그는 이처럼 촉발된 육체에 관객의 주의가 최대한 집중되게끔 시각적으로 단순하고 번잡한 요소가 없는 화면을 선호한다. 게다가 그의 영화에서는 연기자의 움직임도 크지 않으며 화면 내부의 동적 요소도 극히 제한되어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이 위생적 강박관념은 극에 달한다. 도쿄에 있는 가후쿠의 집, <바냐 아저씨>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히로시마에서 그가 머무는 숙소, 그가 배우들과 함께 대본 낭독 훈련을 진행하는 연습실 등은 물론이고, 그가 미사키와 함께 홋카이도로 가는 길에 탑승하는 페리의 3등 객실에 이르기까지, <드라이브 마이 카>의 실내 공간들은 이미 고도로 정갈하게 무대화되어 있다. (이처럼 영화적으로 구성된 정갈함을 곧 ‘일본적’인 것이라고 보는 관광객적 망상이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하마구치의 스승인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 특히 최근에 국내 재개봉된 걸작 <큐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 촬영이 진행되었던 터라, 마스크를 쓰고 지나다니는 행인이 보이지 않게 프레이밍해 주로 무인 풍경의 쇼트들 위주로 실외 장면을 구성한 점도 이런 느낌을 강화한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요한 무대적 공간이 되는 자동차의 붉은색은 이러한 풍경을 바탕으로 <드라이브 마이 카>의 위생학을 강조하는 상징적 색채처럼 느껴진다. 이는 눈 덮인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붉은색 자동차가 보이는 (원폭 돔 쇼트 바로 직전에 삽입된) 쇼트에서 정점에 달한다.

따라서 문학적 기능이 없는 기능적 문학이라 할 무라카미의 텍스트가 하마구치의 연기자들을, 그들의 육체를 촉발하기 위해 활용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도입부에서 가후쿠의 아내가 성교 중 트랜스 상태에서 구술하는 이야기는 무라카미의 「셰에라자드」에서 정체불명의 여성이 주인공 하바라와 성교할 때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가져온 것이다. 무라카미가 이 단편의 제목 및 그 인물의 이름으로 ‘셰에라자드’를 택한 것은 『아라비안 나이트』와 자신의 시대적・문학적 거리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증거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언어 자체가 관능적 환기력을 지닐 수 있었던 시기의 문학이다. 이때 성교와 이야기가 결합된 존재로서의 셰에라자드는 그러한 언어의 힘에 대한 은유다. 그런 반면에 무라카미는 그 힘을 완전히 잃어버린 언어로 씌어지는 텍스트의 시대, ‘문학 상실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다. 이때 성교와 이야기의 병치는 둘을 모두 사교의 수단이라는 식으로 동등하게 포괄해버리는 시대에 걸맞은 “무표정한blank 아이러니의 현대적 실천”에 지나지 않는다.[6] 그리고 무라카미의 ‘셰에라자드’는 이러한 병치가 수행되는 자리에 불려온 ‘공허한blank’ 매개자다. 이 매개자의 자리는 이처럼 텅 빈 것이기에 위생적이다. 따라서 하마구치는 안심하고 이 자리를 자신의 연기자에게 제공할 수 있다. 종종 도착적 설정을 끌어들이지만 언어 자체의 관능적 환기력이 없는─혹은 그 반대로 언어 자체에 관능적 환기력이 없기에 도착적 설정의 힘을 빌리는 것일 수도 있는─무라카미적 텍스트는 연기자들을 안심시키면서도 그들의 육체를 촉발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여기서 ‘무라카미적’이라고 한 것은 꼭 무라카미의 텍스트가 필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해피 아워>에서 작가 노세 고즈에가 낭독회에서 읽는 「수증기」라는 단편 소설(노세 고즈에 역의 연기자가 직접 쓴 것이다)이나 <우연과 상상>에서 두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 나오가 세가와 교수 앞에서 낭독하는 그의 소설은 이미 충분히 무라카미적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의 아내 오토를 흠모했고 어쩌면 그녀와 불륜 관계였을지도 모를 젊은 배우 다카쓰키가 이미 죽은 그녀를 대신해 가후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도 있다. 「셰에라자드」에서 무라카미가 “약간 괴담 비슷한 부분도” 있다고 운만 떼고는 정작 쓰지 않은 이야기를, 하마구치는 정말 괴담에 가까운 무라카미적 텍스트로 확장시켰다. 그리고 다카쓰키를 어쩐지 오토의 망령에 신들린 듯한 느낌으로 연출해 성적으로 충전된 텍스트를 읊조리는 여성이라는 모티브에 변주를 꾀하고 있기도 하다. (혹은, 하마구치 영화에서 여성의 자리가 실은 소년적 쑥스러움을 매개하는 자리임을 노출해버리는 순간이랄까?) 

하마구치는 자신의 ‘셰에라자드(들)’을 위한 무라카미적 텍스트를 직접 쓰거나 빌린다. 그리고 ‘셰에라자드(들)’의 자리에 선 연기자들이 텍스트와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표출하는 말과 시선과 몸짓을 카메라를 통해 “미래의 무한한 시선”에 열어둔다. 무엇이 표출될지는 우연에 달린 문제다. 결국, 상상이 우연을 부를 것이다. 이를 위해 하마구치는 연기자가 성적으로 충전된 텍스트를 오히려 감정 없이 무덤덤하게 내뱉도록 훈련시킨다. 이를테면, (실제로 이랬는지는 모르지만) “아침까지 남자랑 있었어. 섹스했어”라는 대사를 “아침까지 남자랑 있었어. 이야기했어”라고 말하는 기분으로 던지게끔 말이다. 성교나 이야기가 똑같은 무게로 사교의 수단이 된 시대에 어울리는 무라카미적 텍스트는 마침내 그것의 기능적 활용 가능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연출자와 만난 것이다. 물론, 오늘날 이런 유의 텍스트는 당신이 대형 서점 신간 소설 코너에 가서 새로 나온 한국소설을 아무거나 집어들어도 열에 아홉은 만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왜냐고?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1989년에 가라타니 고진이 지적한 것처럼 “무라카미가 일찍이 가치전도에 의해 발견한 ‘풍경’은 지금 세계적으로 자명하게 된 풍경”이기 때문이다.[7]


어떻게 여행할 것인가: 하마구치의 드로리안


무라카미적 텍스트를 하마구치처럼 용의주도하게 기능적으로 활용하지 않고 아예 그의 소설 자체를 서사적 뼈대로 삼아 고스란히 따라갈 때 얼마나 공허한 결과가 나오는지는 이치가와 준의 <토니 타키타니>나 트란 안 훙의 <상실의 시대> 같은 영화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마구치는 이를 모르지 않았을 터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의 동명 원작에서 인물과 설정을 차용하지만 그것만을 서사적 뼈대로 삼지는 않는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같은 작품도 참고했다고는 하나 그것으론 불충분했을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무라카미의 소설은 의외로 영화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만 두고 보면 그는 카프카에 필적한다. (실제로 그는 카프카의 「변신」을 차용한 「사랑하는 잠자」를 쓰기도 했다.) 오쓰카 에이지가 조지프 캠벨적인 ‘원질 신화monomyth’에 가깝다고 지적하며 비판적으로 분석한 무라카미 소설의 서사 구조[8]는 그것이 누리는 전 세계적인 인기를 보더라도 분명 보편적이지만, 그 보편성은 ‘무표정한 아이러니를 현대적으로 실천’하는 무라카미의 언어적 장식 없이는 보편적으로 수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살펴본 바대로 무라카미적 텍스트를 기능적으로 활용하고 있기는 해도 하마구치는 어떤 의미에서도 아이러니의 작가라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진정 보편적인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그에게는 무라카미적 서사 구조를 아이러니 없이 지탱할 다른 방책이 필요하다.

<아사코>의 허구적 세계에 동일본대지진을 주요하게 끌어들일 때부터 ‘국제적(으로 통하는) 동시대 일본영화 만들기’를 향한 야심을 드러냈던 하마구치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한결 보편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냈고 마침내 인정받았다. 여기서 보편적인 드라마란 특정한 지역에 대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앎이 없이도 여하간 그곳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하는 위생적 서사 구조를 뜻한다. 이만큼이나 동시대의 일본과 무관하게 널리 수용될 수 있는 동시대의 일본을 무대로 한 동시대 일본영화를 본 것이 과연 얼마만인가? 여전히 나는 대담하면서도 사려 깊은 <해피 아워>의 세계를 가장 좋아하고, <드라이브 마이 카>보다 <우연과 상상>의 세 번째 에피소드(‘다시 한 번’)─성적으로 충전된 무라카미적 텍스트도 없고, 그런 텍스트를 읊조리며 소년적 쑥스러움을 매개하는 여성도 나오지 않는, 여러 의미에서 진정한 우정의 영화─가 훨씬 훌륭하다고 보지만, 지금으로서는 동시대의 문제적 영화로서 <드라이브 마이 카>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열정>이나 <심도> 같은 영화를 만들었던 이가 지금과 같은 연출자가 된 것은 <귀여운 여인>을 만들었던 이가 훗날 <비정성시>를 만든 것만큼이나 영화라는 매체의 ‘민주주의’를 웅변적으로 증언하는 기분 좋은 사건이다. ‘재능’이란 낭만적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깨닫게 해 주니 말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기 전부터, 나는 눈밭을 배경으로 서 있는 붉은색 자동차 사진을 보고 다소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가후쿠와 미사키가 홋카이도로 향하는 것을 보고는 ‘아, 이것만은…’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녀의 어머니가 산사태로 죽은 고향 집의 폐허를 내려다보며 둘이 서로의 트라우마를 토로하고 어루만지는 클라이맥스는 그 순간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왜 이런 뻔한 무리수를 두는 일을 감행한 것일까? 어느 순간 문득, 하마구치는 그저 국제적 영화작가가 되는 것만이 아니라 20세기 말 일본영화가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하면서 그 계보를 잇는 유일무이한 적자로서 그리되겠다는 야심을 품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국제적 예술영화 유통망에서 일본영화에 부과되어 온 ‘이중구속’을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 일본영화에 부과된 이중구속이란 개념적 도식을 활용하는 현대적 미학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전적으로 동시대적인 드라마나 장르 영화를 생산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지향하더라도 봉준호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둘은 모두 하마구치가 존경하는 감독들이다.) 21세기에 들어서 이런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본영화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당대의 미학과 양식을 선도하는 것이면서 보편적인 드라마나 장르 영화를 만드는 것이기도 했던 시대─이를 대표하는 인물은 <라쇼몽>과 <7인의 사무라이>의 구로사와 아키라이며 <교사형>의 오시마 나기사를 거쳐 <하나비>의 기타노 다케시를 끝으로 한동안 맥이 끊겼다─가 한참 전에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특히 서구적 예술영화 유통망은 여전히 이러한 일본영화를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9] 하지만 저 이중구속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고, 결국 21세기의 일본영화는 일종의 ‘로컬 시네마’가 되어 고레에다 히로카즈나 가오세 나오미의 ‘일본적 영화’로서 소수의 해외 예술영화 팬들에게 다가가곤 했다. 물론 대단히 특이한 방식으로 대중 장르를 갱신하는 구로사와 기요시 같은 걸출한 연출자가 있지만, 여전히 많은 이에게 그의 영화는 <큐어>나 <도쿄 소나타> 정도를 제외하고는 요령부득이라 여겨지는 듯하다. 구로사와로서는 오랜만에 이중구속을 벗어난 듯한 <스파이의 아내>가 하마구치의 각본으로 만들어진 것이란 점도 흥미를 끄는 부분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다시 보는 동안, 내겐 요즘 영화들보다는 세기가 전환되던 2000년 전후에 보았던 몇몇 일본영화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하마구치의 서사 구조는 어쩌면 이 영화들을 가로지르는 과거로의 여행을 위한 구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마구치는 자신의 영화적 ‘원체험’이 <백 투 더 퓨처>라고 스스럼없이 밝히곤 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인물들을 트라우마적 과거로 이끄는 무대적 장치로 자동차를 활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브라운 박사가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것들로 개조한 타임머신 카 드로리안처럼 그 자체가 여러 영화적 기억의 조합물이기도 하다. 나는 이 조합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무의식적으로 또는 우연적으로 그리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여하간, 무라카미의 원작에서 차용한 인물과 설정, 그리고 무라카미적인 텍스트는 상당히 개인적인 것에 그칠 수도 있었을 이 ‘조합적’ 여행을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구조에 부드럽게 접속하는 기능을 한다. 


<바람꽃>


홋카이도라고 하면 거기서 유년기를 보냈고 자신의 영화에서 종종 이곳을 소환하기도 했던 영화감독 소마이 신지가 먼저 떠오른다. 특히, 그의 유작 <바람꽃>(2000)은 하마구치의 영화를 보는 동안 곳곳에서 떠올랐다. 여기서 우연히 만나 동반 자살을 기도했다 실패한 두 남녀는 분홍색 렌터카를 타고 여자의 딸을 만나기 위해 홋카이도로 향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와 오토 부부의 딸이 죽은 해는 소마이가 타계한 해인 2001년이고 운전기사 미사키는 죽은 딸과 동갑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가후쿠 역의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젊은 시절 배우 지망생으로 나왔던 스와 노부히로의 데뷔작 <2/듀오>(1997)도 있다. 니시지마를 매개로 삼아 스와와 하마구치의 영화를 느슨하게 전편과 후편 관계로 두고 그가 거듭해서 커플 관계의 파국을 경험하는 과정을 따라가 보는 것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스와의 이름은 <드라이브 마이 카>와 관련해 이중으로 울린다. 첫째는, 그가 히로시마 태생이고 <H 스토리>와 <히로시마에서 온 편지> 등 히로시마를 영화적으로 다루는 문제를 고민한 작품들을 만들어 왔다는 점이다. 동일본대지진에 대한 응답인 2020년 작품 <바람의 목소리>에서, 그는 쓰나미로 부모를 잃고 히로시마에서 친척과 살던 소녀가 홀로 고향을 찾아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둘째는, 등장인물인 ‘동시에’ 그 인물의 연기자로서 카메라 앞에 선 사람의 말과 시선과 몸짓을 포착하는 극영화 작업에 일찍부터 관심을 두었던 연출자가 바로 스와라는 점이다. <2/듀오>에서 그가 즉흥에 기대는 방식은 하마구치와 사뭇 다르기는 해도 말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가 가장 성실하게 되짚고 있는 20세기 최후의 일본영화는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2000)가 아닌가 싶다. (안타깝게도 아오야마는 올해 3월 21일에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두 영화의 서툰 비교는 삼가기로 하자. 상영 시간이 각각 179분과 217분에 달하는 영화라는 사실은 대수롭지 않다. 마음에 상처를 지닌 인물들이 차를 몰고 치유의 여행을 떠난다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끔찍한 사건을 겪고 나서 고통스러워하는 과정까지를 담은 긴 도입부 후에 “2년 후”라는 자막이 뜨면서 새로운 전개로 들어선다는 것도 넘어가기로 하자. 장애로 인해 수화를 사용하거나 실어증에 걸린 인물(들)을 통해 비언어적 소통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자. 남자 주인공 그리고 그보다 어린 두 남녀가 세 개의 꼭짓점을 이루는 트라우마의 삼각형이 어린 남자의 살인 행각으로 인해 무너지면서 결말부로 이행하는 구조를 띠고 있는 영화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살아가지 않으면 안 돼”라는 대사와 “살라고는 하지 않을게. 하지만 죽지는 마”라는 대사가 공명한다는 점에 너무 깊이 몰두할 필요도 없다. 이런 구조적 요소들을 제하고 나서 보이는 것이 ‘연출’이다. 그렇다면 하마구치의 ‘연출’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1990년대 중반에 일본 사회에 충격을 던졌던 옴진리교 사건 ‘이후의 영화’인 <유레카>와 동일본대지진 ‘이후의 영화’인 <드라이브 마이 카> 사이에는 단순히 시간적인 데 국한되지 않는 어떤 거리감이 있다. 사회적 재난과 자연적 재난의 차이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아오야마가 서부극의 신화적 구조를 참조하기는 해도 그의 영화는 결코 신화적 대지 위에서 배회하지 않는다. 화면 내부에 거듭 잡스러운 요소들을 불러들이는 그의 연출로 인해 신화적 추상화가 여간해선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런 요소들을 통해 감지되는 현실이 자꾸 영화 내부로 틈입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마구치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영화적 기억의 대지를 가로지르는 동안 그것을 청결하게 표백해 신화에 어울리는 것으로 만든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드라이브 마이 카>의 위생학과 그 기능이다. 이제 남은 일은 눈 덮인 홋카이도의 대지를 배경으로 치유의 의식을 행하는 두 등장인물-연기자의 말과 시선과 몸짓을 거의 5분 동안 한 호흡으로 담아낸 다소 기이한 구도의 롱테이크 쇼트를 지켜보는 일이다. 진부하기 그지없는 대사로도 이런 순간을 포착해내는 ‘<드라이브 마이 카>의 방법’에는 솔직히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다. 혹시, 성적으로 충전된 것만이 아니라 길고 진부한 대사를 통해서도 배우들을 촉발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했던 것일까? 발화하는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나 민망할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하마구치가 그처럼 큐브릭적인 연출자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여하간, 문제는 그 다음이다.


원폭 돔이 말하는 것


이제 원폭 돔의 쇼트가 어떤 상황에서 등장하는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하마구치의 연출이 성실히 수행하는 기나긴 위생 관리의 여정을 거쳐 홋카이도가 다자키 쓰쿠루의 핀란드처럼 하나의 보편적 ‘풍경’으로 재탄생한 다음이다. 남은 것은 다시 돌아온 히로시마다. 가후쿠와 미사키가 홋카이도에 가기 전까지 영화의 주된 무대였던 이곳이다. 그 무엇보다 이곳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건물이면서도 여태 보이지 않았던 원폭 돔이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는 이 최후의 상징물을 위생적으로 보편화하기 위한 ‘문학’으로서 동원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문학’은 위생 관리를 대리 수행하는 무대극으로 상연된다. 그런데 하마구치의 위생적 강박관념은 분명 그가 의도한 것도 아니고 예상치 못했을 대단히 문제적인 ‘몽타주 효과’를 낳는다.

해질녘에 촬영된 이 원폭 돔의 쇼트를 보면서 “기다려, 아직 끝나지 않았어!”라는 가후쿠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두 개의 쇼트와 하나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하나는 영화의 첫 번째 쇼트다. 성교 중 트랜스 상태에서 이야기하는 오토의 상반신을 창밖의 어스름을 배경으로 포착한 쇼트 말이다. 다른 하나는 가후쿠와 나란히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있는 다카쓰키의 얼굴을 정면에서 잡은 쇼트다. 여기서 그는 가후쿠를 똑바로 바라보며 생전의 오토音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소리音에 들린’ 사람처럼 구술한다. 두 쇼트 모두 약간의 빛이 감도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에 사로잡혀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미사키가 자신의 엄마에겐 두 개의 인격이 있었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린다. 미사키에게 폭력을 가하고 난 다음이면 그녀는 사치라는 이름의 여덟 살 난 소녀처럼 이야기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 보이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건물이다. 미사키의 고향 집처럼 폐허인 채로 남아 있는 원폭 돔은 오토와 다카쓰키처럼 무언가에 사로잡혀 “기다려, 아직 끝나지 않았어!”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가 듣는 것은 바냐를 연기하는 가후쿠의 목소리다. 이렇게 가후쿠는 오토/소리音가 된다. 우리는 오토와 다카쓰키의 내면은 볼 수 없었던 반면 원폭 돔의 내면은 볼 수 있다. 원폭 돔에 바로 뒤이어 <바냐 아저씨> 공연 중인 극장의 무대를 보게 되는 식으로 말이다. 여기서 바냐는 매형이자 고매한 지식인 행세를 하는 세레브랴코프가 자신을 착취해왔다며 거세게 항의하는 중이다. 

줄곧 어딘가 역사 바깥에서만 맴도는 것 같던 영화가 돌연 이상한 방식으로 역사의 복화술을 펼친다. 피해자로서의 바냐의 목소리가 피해자로서의 일본이라는 이미지를 웅변하는 원폭 돔의 이미지와 겹쳐질 때, 무라카미의 다자키 쓰쿠루가 감행하는 치유의 순례는 오늘날 일본 역사 수정주의자들의 정신에 상응하는 것일 뿐이라고 일갈한 오쓰카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10] 하마구치는 뜻밖의 장소에서 무라카미와 다시 만나고 또 그와 위생적으로 공명한다. 그러나 반동적인 것은 언제나 순수한 것에 깃든다.


[1] 웹진 《가미노타네》에 수록된 대담(www.kaminotane.com/2021/09/08/17146)에서 하마구치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원폭 돔 쇼트는 원래 계획에 있던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우연히 얻은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편집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채로 일단 찍어두었던 것을 활용한 것이다. “(…) 보수 공사 중이었어요. 덕분에 이른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원폭 돔’이 아니라 촬영한 시간대를 포함해 우연히 우리 눈앞에 나타난 ‘그 순간의 원폭 돔’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왔죠. 나와 개별적인 관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면서, 그렇다면 써도 좋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생겼어요. 원폭 돔은 보통 아주 단적으로 ‘히로시마’를 상징하는 데 그칠 것 같지만, 이런 상태를 찍은 컷이라면 영화가 도달하는 장소로서 나쁘지 않겠다 싶었죠.” 하마구치 류스케・미야케 쇼・미우라 데쓰야, 「영화의 ‘연출’은 어떻게 발견되는가」, 《필로》 2021년 9/10월호, 131쪽.

[2] 다음 책에 번역, 수록되어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노하라 다다시・다카하시 도모유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 이환미 옮김, 모쿠슈라, 2022, 34~35쪽.

[3] 같은 책, 27~28쪽.

[4] 나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페드로 코스타, 그리고 홍상수의 영화를 주요 참조점으로 삼아 ‘형상-픽션’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러한 복합체의 영화적 존재론을 개진한 바 있다. 유운성, 「형상적 픽션을 향하여─커모드, 아우어바흐, 그리고 영화」,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7년 가을호, 172~211쪽.

[5] Stanely Cavell, The World Viewed: Reflections on the Ontology of Film, Enlarged ed., Harvard University Press, 1979, pp.25~29.

[6] “무표정한 아이러니의 현대적 실천”이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패스티쉬적 특성에 대한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의로, 가라타니 고진은 이를 자신의 무라카미 비평에서 원용한 바 있다. 가라타니 고진, 「무라카미 하루키의 풍경」, 『역사와 반복』,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08, 163~164쪽. 다만 가라타니는 무라카미의 『1973년의 핀볼』이나 『양을 둘러싼 모험』이 무표정한 아이러니의 현대적 실천처럼 보이면서도 그 뒤에 “강한 집착과 전도의 의지를 숨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이런 ‘숨겨진 동기’는 무라카미 이후의 무라카미적 작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 그것은 패스티쉬가 된다.” 가라타니가 이 글을 발표한 것은 1989년이다. 오늘날의 무라카미 자신, 그리고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무라카미 원작의 구조만이 아니라 ‘문체’까지도 차용해 각본을 쓴 하마구치 또한, ‘문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무라카미 이후의 무라카미적 작가”에 속한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가라타니가 인용한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과 소비사회」는 다음 책에 번역, 수록되어 있다. 할 포스터 엮음, 『반미학』, 윤호병 외 옮김, 현대미학사, 1993/2002, 176~197쪽. 

[7] 가라타니 고진, 앞의 글, 179쪽. 

[8]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책(특히 1장과 2장)을 참고. 오쓰카 에이지, 『이야기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 선정우 옮김, 북바이북, 2017.

[9] 10년 전에 나는 다른 글에서 일본영화에 부과된 이중구속의 문제를 오늘날 국제영화제의 ‘검열-효과’와 연관지어 논한 바 있다. 유운성, 「영화제의 검열-효과에 관한 노트」, 《인문예술잡지F》 제4호(2012년 1월), 7~14쪽.

[10]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 대해 논하고 있는 다음 책의 7장을 참고. 오쓰카 에이지, 『감정화하는 사회』, 선정우 옮김, 리시올, 2020. 

2022-11-07

아르케이온의 도둑: 고다르의 <이미지 북>

 

※ 아래 글은 《오큘로 009: 열렬한 희망, 고다르와 이미지의 책》(2021년 10월 10일 발행)에 수록되었던 글이다. 이 글의 후반부는 고다르와 파졸리니의 관계에 대해 요즘 생각해보고 있는 주제와 관련되어 있다. 자신은 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는 예수의 말, 그리고 사도 바울의 삶과 사상을 떠올리면서 파졸리니의 미완의 프로젝트 <성 바울>의 시나리오를 꼼꼼히 다시 읽어볼 때다.


잠시 생각해 보자. 고다르의 <이미지 북> 도입부에 나온 ‘archives et morale’이라는 자막은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이 지나도 어렵지 않게 금방 떠올릴 수 있다. 분명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면 이 작품의 꽤 후반부에 나오는 ‘archéologie et pirates’이라는 자막은 영화를 보고 난 직후에도 여간해선 떠오르지 않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리스어 ‘아르케(ἀρχή)’에 공통의 기원을 두고 있는 두 단어, 즉‘archives’와 ‘archéologie’가 작품의 앞뒤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영화를 거듭 보고 난 다음이었다. 예민한 이들이라면 사정이 달랐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다(혹은 없다)고 하는 것, 즉 연상─정확하게는 ‘association/dissociation’의 과정이 부단히 반복되는 것─이야말로 고다르의 작업을 움직이는 제일의 원리라는 것을 여기서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여하튼, 아카이브와 고고학이라는 서로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는 용어들이 <이미지 북>에 등장하고 있음을 일단 깨닫고 나니, 결코 고다르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는 두 명의 사상가와 그들의 저서가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다. 하나는 『지식의 고고학』의 미셸 푸코이고 다른 하나는 『아카이브병』의 자크 데리다이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고다르가 그의 영화에서 직접 언급하거나 그것을 통해 환기시키는 철학적・예술적 저술들을 부단히 떠올리며 그의 영화에 접근하려 드는 이는 자신이 어느덧 과대망상적 독해에 빠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뿐이다. 그러니, 주의하도록 하자, 고다르의 영화에서 몽테스키외와 베카신은 어디까지나 동일한 무대에서 동등한 권리를 갖고 움직이는 등장인물들일 뿐이라는 점을 잊지 않도록. 주의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이브병』의 도입부를 여기 옮겨놓고 고다르의 영화와 함께 살펴보자 제안하고픈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다. (다짐은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 우리는 떠올려본다, 아르케란 시작(commencement)과 명령(commandement)을 한꺼번에 거명한다는 것을. 분명 이러한 거명은 동일한 것 안에 두 개의 원리들이 있음을 가리킨다. 자연이나 역사를 따르는 원리─물리적, 역사적 혹은 존재론적 원리─가 그 하나로 여기는 일이 시작되는 곳이고, 율법을 따르는 원리─입법론적 원리─가 다른 하나로 여기는 인간들과 신들이 명령을 내리는 곳이자 권위와 사회 질서가 행사되는 곳으로서 바로 이곳으로부터 지시가 내려온다.


이런 종류의 텍스트를 매개로 고다르의 영화에 접근할 때 과대망상적 독해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으면서 그것도 오직 피상적으로만 읽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고다르 자신의 독서가 언제나 피상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데리다의 독자라면 위에 인용한 도입부만을 읽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비단 독서에 있어서만 그러할까? ‘법의 정신’이 여러 소제목들 가운데 하나로 쓰였다 해서 <이미지 북>의 이해를 위해서는 몽테스키외에 대한 면밀한 독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일이 터무니없는 만큼이나, 한스 오테가 작곡한 《소리의 책(Das Buch der Klänge)》이 영화에 사용되고 제목을 짓는 데도 영감을 주었다 해서 이 곡의 의의를 과장하는 일 또한 그러하다. (고다르와 음반사 ECM 레코드와의 협력 관계는 잘 알려져 있는데 <이미지 북>에 사용된 오테의 곡 역시 ECM에서 발매된 헤르베르트 헨크의 연주 음반이다.)

일단 거칠게 나눠보자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기원을 묻는 고고학이 시작과 관련된 것이라면 아카이브는 명령과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아카이브 자체가 직접 어떤 명령을 내리고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명령에 모종의 권위를 부여한다─‘이러이러한 사례들에 비추어 볼 때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게끔─는 점은 분명하다. 대체로 이러한 명령은 이론적인 법칙보다는 실천적인 율법에 가깝겠지만 말이다. (오늘날에는 예술적 판단마저도 아카이브에 근거해 정초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조사연구의 충실함과 윤리적 정당성에 기대어 작가와 작품을 평가하는 편이 낫다고 보는 식이니 말이다. 지금에 와서 미적 가치판단의 출구 없는 미궁에 다시 빠져들 필요야 없겠지만, 그런 식의 평온한 나태함을 비평적 입장으로 수용할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다.) <이미지 북>의 도입부에 ‘archives et morale’이라는 자막이 제시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기서 고다르가 겨냥하고 있는 것이 아카이브 및 그것에 근거를 둔 명령의 실천적인 차원이라는 쪽에 확실히 무게가 실리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는 고다르의 방식이 아니다. 푸코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있어서도 아카이브는 반드시 고고학과 더불어 사유되는 것이며 고고학은 반드시 아카이브와 더불어 사유되는 것이다. 아카이브 없는 고고학은 공허하고 고고학 없는 아카이브는 맹목이라고 믿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고다르를 진정 에세이스트적 정신의 소유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는 그가 시작과 명령이라는 서로 환원 불가능한 아르케의 의미들을 언제나 동시에 붙들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르케란 오직 아포리아를 통해서만 사유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이리하여 그의 영화는 아도르노가 「형식으로서의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한 가정 내지는 전제에 입각해 에세이적 움직임의 궤적을 따르게 된다.


하나의 단어가 여러 다른 것들을 의미한다면 그것들은 서로 완전히 다르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감춰져 있다 하더라도 단어의 통일성은 대상 자체에 있는 통일성을 상기시키는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통일성을 오늘날의 보수적 철학자들이 주장하듯 그저 언어적 친연성으로 간주해 버려서는 안 된다. (……) 에세이는 추론적 절차에 단순히 대립하는 입장에 있지 않다. 에세이는 비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의 명제들이 전체로서 서로 어울려 일관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에세이는 논리적 규준들을 따른다.


오늘날 에세이적 작업이라 하면 일종의 자유연상을 따르는 스타일을 취하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아도르노는 그런 수필 같은 작업은 아예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아도르노 자신은 편성(configuration)이나 성좌(constellation)라고 부르지만 폴 발레리는 유추(analogy)라고 부르고 마츠모토 토시오는 은유라고 부르며 앙드레 바쟁은 수평적 몽타주라고 부르는 에세이적 방법─물론 여기에 구체(球體)의 형태를 띤 책과 영화를 상상해본 에이젠슈테인의 아이디어를 더해도 좋다─에 대해 생각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이 있다.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에세이란 “문화적으로 미리 결정된 특수한 대상들”에 대한 고찰로서 이러한 대상들은 푸코라면 담론 구성체라고 불렀을 법한 것이다. 언뜻 보기에 에세이적 방법은 연상의 흐름을 따라 유사한 것들을 배열하는 작업처럼 비칠 수도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 작업이 진정 겨냥하고 있는 것은 서로 떨어진 불연속적 요소들을 가로지르는 보편적 상동성(homology)─오늘의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전적으로 그릇된 발레리의 용어 자체가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방법’ 속에서 에세이적 정수를 읽어내는 그의 통찰이다─을 파악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미지 북>에서 고고학과 아카이브, 시작과 명령, 존재론적 원리와 입법론적 원리라는 양극을 부지런히 오가는 고다르가 겨냥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아르케는 결코 규정되거나 정의되는 법은 없지만 움직임 속에서, 아니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에서, 그것도 오직 사이에서만 경험된다.

무엇보다도, 이론적으로 상관적인 짝─archive/archéologie─을 고찰하기 위해 실천적으로 상반적인 짝─morale/pirates─을 함께 끌어들이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그다운 것이다. 이에 착안하면 ‘archives et morale’과 ‘archéologie et pirates’라는 일견 기이해 보이는 조합에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를테면 1960년대에 발표한 <중국 여인>에서 그가 마오주의의 의미를 탐문하는 방식은 그것을 여름 휴가와 나란히 두고 그 둘을 동시에 산출하는 보편성은 무엇인지 묻는 것이었다.) 무언가의 의미는 그것의 속성을 규정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다른 관념들과 이리저리 결합해보는 시도들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다고 보는 태도라고나 할까? 들뢰즈가 고다르를 두고 무언가의 의미를 단정하는 계사 ‘이다(est)’의 영화작가가 아니라 끊임없이 유예하는 접속사 ‘그리고(et)’의 영화작가라고 불렀던 것은 이런 태도 때문이었으리라. 이는 나무 블록을 가지고 노는 아이의 천진난만함을 닮은 것이다. 여하간, 덕분에 우리는 쉽사리 유사성의 함정에 빠져드는 실수를 피할 수 있게 된다. 대신 노략질(pirates)을 윤리(morale)로 취한다는 것─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이미지 북>의 핵심적인 테제가 아닐까?─의 의미에 대해 고려해보게 된다.


그림 1


가령 <이미지 북>에서 고다르가 혁명에 관해 이야기할 때 거듭 등장하는 이미지 하나를 살펴보자. 그것은 흰옷을 입은 한 소년이 길에서 붉은색 바퀴 같은 것을 굴리고 있는 이미지(그림 1)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바퀴가 아니라 필름을 감는 데 쓰는 릴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워낙 저화질인 데다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이미지라서 정작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붉은색 바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도 고다르가 혁명에 대해 고찰하는 방식은 역시 말과 이미지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식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기보다는 말을 훔쳐서 이미지에 건네주고 다시 이미지를 훔쳐서 말에 건네준다고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혁명(révolution)은 일단 ‘굴린다(revolve/ribouler)’는 행위와의 연계 속에서 파악되고 이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구르는 바퀴의 이미지가 화면에 떠오른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소년이 굴리고 있는 것은 단순한 바퀴가 아니라 필름이 감겨 있는 릴이다. 그는 이 릴을 어디서 가져온 것일까? 혹시 훔친 것은 아닐까? 고다르적 연상의 노선에서 혁명이란 ‘다시-훔친다(re-voler)’는 행위와도 얼마든지 연계될 수 있다. 그렇다면 혁명과 연계된 이러한 행위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을 겨냥해 수행되는 것일까? 고다르에게 있어서 그것은 영화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릴을 굴리며 뛰어가는 소년의 이미지는 일단 (고다르의 동반자 안느-마리 미에빌의 저서 제목으로 쓰인) ‘말하는 이미지들(images en parole)’이라는 텍스트와 몽타주되며, 얼마 후에는 붓으로 쓰여진 ‘말과 이미지(parole et image)’라는 텍스트와 다시 몽타주된다(그림 2). 그렇다면 영화란 무엇인가? 


그림 2


확실한 것은, 다시 훔쳐내야 하는 것도 영화이고 다시 굴려 돌아가게 해야 하는 것도 영화라는 것뿐이다. 이런 식으로 노략질은 하나의 윤리가 된다. 그렇다면 과연 영화를 무엇으로부터 훔쳐내야 한다는 말인가? 일단 아카이브를 교묘하고 기민하게 활용하는 고착화된 명령들로부터다. 고착화된 명령들은 CMD 혹은 명령 프롬프트와 다를 바 없으며, 이런 명령들과 관계하는 아카이브는 점점 데이터베이스화된다. 푸코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역사적 아프리오리로서의 아카이브가 형식적 아프리오리로서의 데이터베이스로 화하는 것이다.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고다르가 쓰는 용어로는 전자는 랑가주, 그리고 후자는 랑그에 대략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고다르에게 있어 랑가주가 역사적 아프리오리에 상응한다는 것은 흔히 오해하듯 그가 제멋대로의 임의적인 사적(私的) 언어에 집착하는 이가 아님을 암시한다. <이미지 북>의 종반부에서 그는 다짐하듯 말한다. “하지만 랑그는 결코 랑가주가 되지 못할 것이다(mais la langue ne serait jamais le langage)”라고. 그렇다, 데이터베이스는 결코 아카이브를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다. 혹은, 언제나 저항이, 아니 노략질이 있을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미 <영화의 역사(들)>에서부터 고다르는 어느덧 한 세기가 넘는 역사를 거치는 동안 이런저런 방식으로 정전화(正傳化)되고 문화적 기억의 일부가 되어버린 영화 이미지들을 ‘도용’─다시 강조하건대, 훔치고 굴리기─하여 그것들을 어떻게든 중립화하고 비결정적인 것으로 변환하려 시도한 바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는 지독히 반(反)아카이브적인 인물처럼 비친다. 하지만 이런 그의 작업이야말로 아카이브를 데이터베이스화의 위협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분명 고다르는 데이터베이스화된 아카이브의 질서를 교란하고 흐트러뜨린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 결과로 얻은 이미지들을 다시 아카이브에 자리매김하고 특수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이런 점에서 고다르의 작업은 진정 고고학적이다. 이는 고고학이란 담론들을 아카이브의 요소 내에서 특수화된 실천들로 기술하는 것이라고 했던 푸코의 의미에서 그러하다. 푸코와 마찬가지로 고다르 역시 고고학을 어떤 시원(始原)이나 창조적 개시에 대한 탐구와 관련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온갖 고유명들에 짓눌려서는 안된다. 주의하라고, 이미 말했다. 고다르의 영화에서 몽테스키외와 베카신은 어디까지나 동일한 무대에서 동등한 권리를 갖고 움직이는 등장인물들일 뿐이라는 점을 잊지 않도록. 그런데 이쯤에서 『지식의 고고학』의 한 부분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다. (이번에도 결국 다짐은 충동을 이기지 못한다.) 어쩐지 다소 딱딱한 느낌을 주지만 그것이 원저의 냉철함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이정우의 번역으로 해당 부분을 읽어 보자.


고고학은 (……) 단지 언표들의 규칙성을 수립하고자 할 뿐이다. 여기에서의 규칙성이란 (……) 언표적 기능이 수행되도록 해주는 조건들의 집합을 가리킨다. (……) 고고학은 발명을 추구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이 최초로 어떤 진리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된 이 순간(감동적인, 우리는 이에 동의한다)에 무감각한 것으로 머무른다. 즉 고고학은 이 축제의 아침들이 내뿜는 빛을 재건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 고고학이 린네 또는 뷔퐁의, 페티 또는 리카르도의, 피넬 또는 비샤의 텍스트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정초하는 성자(聖者)들의 목록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한 담론적 실천의 규칙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일부 표기를 수정하고 ‘언설(言說)’ 대신 ‘담론’이라는 용어로 바꾸었다.]


여기서 푸코가 ‘규칙성(régularité)’이라 부른 것과 나란히 놓을 수 있는 고다르의 용어가 있다면 무엇일까? 단어의 연관성에 기대어 ‘규칙(règle)’을 그 후보로 내세워서는 곤란하다. <이미지 북>에서 고다르가 “나는 규칙도 예외도 알지 못했다(je ne connaissais ni les règles ni les exception)”는 몽테스키외의 회고의 말을 따라 읊조릴 때, 이는 그가 규칙과 예외를 모두 가능케 하는 ‘조건들의 집합’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고다르가 『법의 정신』에서 발췌해 인용하고 있는 부분은 아니나다를까 모두 이 책의 서문 몇 페이지에 국한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도 이 책에 피상적으로만 접근해야 한다.) 푸코가 규칙성이라 부른 이러한 조건들의 집합, 이를 가리키는 고다르식 용어가 바로 ‘법(loi)’이다. 그의 영화에서 존재론적인 것과 입법론적인 것은 동일한 무대에서 동등한 권리를 갖고 서로 교차하며 아르케란 오직 그들 사이에서만 경험될 수 있는 것처럼, 법이라는 말 또한 이론적인 법칙과 실천적인 율법 양자를 왕복하는 움직임의 궤적을 통해서만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지식의 고고학이라는 푸코의 기획이 무엇보다 언표들의 규칙성과 관련된 것이라면 고다르의 고고학적 실천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이미지들의 법과 관련된 것이다. 여기에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미지들의 법이란 이미지들을 운용하는 데 있어 제도적인 측면에서 따라야 할 율법적 규칙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법이 제도적으로 율법화되곤 할 때마다 고다르는 노략질(pirates)로 맞설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영화에 여기저기서 ‘훔쳐온’ 온갖 이미지들이 만연하는 이유다. 다른 한편으로, 이미지들의 법이란 이미지들을 운용하는 데 있어 미학적인 측면에서 근거를 제공해 주는 이론적 법칙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법이 미학적으로 이론화되곤 할 때마다 고다르는 윤리(morale)를 내세우는 것으로 맞설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영화에 정치적 표상으로 들끓는 이미지들이 등장하고 온갖 정치적 슬로건들이 만연하는 이유다. 이렇게 보면 그가 1982년에 발표한 <열정>에 나오는 “영화에는 법이 없어, 그래서 사람들은 여전히 영화를 좋아하지(Il n'y a pas de loi au cinéma, c'est pour ça qu'on l'aime encore)”라는 대사가 새삼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흔히 이 대사 속의 ‘loi’는 ‘규칙’─공식적인 영문판 프린트에서는 ‘rule’─으로 번역되었고 또 그렇게 이해되곤 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원래 대사의 반어적 뉘앙스가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우리는 법의 부재를 두고 희희낙락거릴 수도 없지만, 그것을 정의 내리고 규정할 수도 없다. ‘법의 정신’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미지 북>의 4부에서 고다르는 자신의 고고학적 실천과 관련된 곤혹스러움을 몽테스키외의 말을 빌려 읊조리고 있다. 고다르가 낭독하고 있는 부분을 어쩐지 친밀한 느낌을 주는 이재형의 번역으로 읽어 보자.


만일 내가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명령을 내려야 하는 것에 대한 지식을 더 많이 갖게 하고, 복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복종하는 데서 새로운 즐거움을 느끼도록 할 수 있다면, 나는 내가 인간들 가운데 가장 행복하다고 믿을 것이다. 만일 내가 인간들로 하여금 그들의 편견에서 벗어나도록 할 수 있다면, 나는 내가 인간들 가운데 가장 행복하다고 믿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편견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르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인간들을 깨우쳐주려고 애씀으로써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는 이 보편적 덕성을 실천할 수 있다.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에 따르는 유연한 존재인 인간은 그에게 그 자신의 본성을 보여주면 그것을 이해할 수도 있고, 그것을 빼앗으면 그것에 대한 감정까지 잃어버릴 수도 있다. (……) 나는 이 작업을 (……) 수도 없이 포기했다. 나는 구상 따위는 안 짜고 그냥 내 목표만 따랐다. 나는 규칙도 모르고 예외도 몰랐다. 내가 진실을 발견한 것은 오직 그것을 잃어버리기 위해서였다. [‘nature’는 ‘성격’ 대신 ‘본성’으로, ‘ouvrage’는 ‘책’ 대신 ‘작업’으로 옮겼으며, 번역을 아주 약간 수정하였다.]


위의 문장들을 고다르가 이따금 낭독하는 동안 정작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대부분 학살과 살인과 모욕과 감금과 순교와 처형 등의 광경을 담은 폭력의 이미지들이다. 영화작가로서 고다르가 근심하는 지점은 이러한 이미지들과 연관된 현실의 폭력에 있다기보다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다루는 ‘법(loi)’ 자체에 있다. 이와 관련해서 그는 배우 헨리 폰다가 출연한 두 편의 미국영화, 즉 존 포드의 1939년 작품 <젊은 날의 링컨>과 알프레드 히치콕의 1956년 작품 <누명 쓴 사나이>를 흥미롭게 끌어온다. 전자의 영화에서는 법─정확히는 법률 서적─과의 만남에 들떠 있는 젊은 폰다의 모습을, 후자의 영화에서는 감옥에 갇힌 채 법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나이든 폰다의 모습을 발췌해 보여준다(그림 3).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법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il y a quelque chose qui cloche dans la loi)”고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여기서 법은 결코 사법적인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것은 실천적인 정의론과도 거의 관련이 없다. 여기서 고다르는 할리우드라는 하나의 역사적 아프리오리가 제공했던 규칙성으로서의 법이 특정한 순간에 정립되고 붕괴되는 국면들─1939년과 1956년─을 폰다의 이미지들을 통해 포착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림 3


돌이켜 보면, 그의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는 이미지들의 법이 아포리아를 통해서만 파악되는 아르케이길 그치고 일종의 제도이자 관습법이 되었을 무렵 시도된 일련의 혁명 속에 있는 것이었다. 명령하고 지시하는 권위로서의 법을 다시 아포리아 속에 두라는 요청, 이는 법의 정신을 회복하라는 요청이다. 각각의 이미지들이 자신들의 시원(始原)적 지위를 과시하지도 않고 명령 프롬프트를 통해 호출되는 데이터베이스의 요소도 아닌 채로 존재하는 곳, <이미지 북>의 고다르는 그곳을 캐나다 실험영화 작가 마이클 스노우의 표현을 빌려 ‘중앙 지역(la région centrale)’이라 부른다. 이 영화의 5부는 여러 아랍영화에서 발췌한 이미지들로 가득한데 이것들은 서구화된 시네필들의 기억 속에 보편적으로 자리 잡지 못한 이미지들이라 할 수 있다. 이제 고다르는 서구적 시네필의 정전들과 단단히 묶여 있는 이미지들의 갱생이란 역시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건너온 노략질의 대가가 여전히 새로운 아르케이온을 물색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2022-05-21

몸짓의 영화를 위한 산책: 서현석의 《X(무심한 연극)》


※ 국립현대미술관의 《다원예술 2021: 멀티버스》 프로그램(2021.2.12~12.5)의 일환으로 제작된 서현석의 VR 작품 <X(무심한 연극)>은 2021년 3월 16일부터 4월 1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공연되었다. 아래 글은 해당 프로그램이 종료된 후 발행된 책자(2021.12.30)에 수록된 것이다.




서현석의 VR 신작 <X(무심한 연극)>은 관람객의 참여를 필수적으로 요청하는 장소 특정적 공연이기도 하고, 국립현대미술관의 건축적 구성에 꼭 맞게 설계한 가상적 설치물이기도 하고, 상호 작용적인 부분이 거의 없이 모든 시・공간적 전개가 장치적으로 미리 규정된 영화적 비디오이기도 한 기묘한 작품이다. 달리 말하자면, <X(무심한 연극)>은 실천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여전히 다소 애매한 개념인 ‘다원예술’[1]이 아주 무용한 허구만은 아님을 보여주는 매우 드문 사례다. 이것은 오늘날 공연, 미술, 영화 각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실천들에 매우 유용한 통찰을 제공해주는 작품이지만, 어느 영역에서도 정당하게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도래할 예술의 성격을 띠고 있다.

<X(무심한 연극)>에 대해 고찰하기 위해서는, 현대적 공연 작품을 구성하는 인간 및 비인간 참여자와 관련해 우리가 보통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혼용하는 용어의 그 의미를 다시 한정해 사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행위자(actor)’는 공연에 국한해 배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그보다 의미망이 넓은 용어로 문자 그대로 행위하는 사람 일반을 가리킨다. 그의 행위는 누군가에게 지각될 것을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으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공연장이나 영화관에서 관람 도중 저도 모르게 기침하는 사람의 행위는 다른 이의 주의를 끌기 위한 것이 아니다. 특별히 공연과 관련해서는 ‘수행자(performer)’와 ‘연행자(player)’라는 용어를 구분해 사용하려 한다. 수행자와 연행자의 행위는 반드시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행적 행위와 연행적 행위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와 관련해서는 에리카 피셔-리히테가 존 오스틴과 주디스 버틀러를 참조해 제시한 수행성 개념이 얼마간 도움이 된다. 즉 수행적 행위는 무언가를 표현하지도 않고 의미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자기지시적(오스틴) 혹은 비지시적(버틀러) 특성을 띤다는 것이다.[2] 반면, 연행적 행위는 특정한 상황에서 행위자가 담당하거나 가장하는 역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까닭에 결코 자기지시적이거나 비지시적일 수 없다. 예컨대, 연행자는 연극적 상황에서라면 등장인물을 표현하고, 제의적 상황에서라면 제사장이나 희생양을 의미하는 기표로서의 행위자로 존재한다.

이처럼 용어의 의미를 한정한 후에 서현석의 <X(무심한 연극)>으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이 작품이 수행적 행위와 연행적 행위의 경계를 줄곧 교란하는 한편, 둘 가운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순수 행위(pure act)’를 촉발하고 이를 공연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이려는 대담한 시도로 가득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X(무심한 연극)>을 체험하기 위해 미술관에 온 관람객이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광경은 그보다 앞서 온 관람객이 VR 체험용 HMD 기기를 머리에 쓰고 약간 비틀거리며 미술관 복도를 걷고 있는 모습이다. 뒤에 온 관람객은 나중에야 알게 되는 것이지만, 앞서 온 관람객의 비틀거림은 현실의 미술관 공간과 (그것을 고스란히 모델링해 재구성한) 가상현실 내 미술관 공간의 유사와 차이를 가늠하며 조심스레 발을 옮기는 데서 나온 우연적인 몸짓이다. 작품을 체험하는 관람객의 입장에서 이 몸짓은 수행적이지도 않고 연행적이지도 않은 행위 자체다. 그의 비틀거림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의식적으로 취한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X(무심한 연극)>은 직접 몸을 움직이며 돌아다니지 않고는 제대로 된 체험이 불가능한 작품이지만, 여기서 VR 헤드셋을 통해 제공되는 시청각적 장면들은 사실상 인간 행위자의 동작과 무관하게 기계적으로 전개되는 것이어서, 이를 고려하면 의외로 전통적인 영화와 상동(homologous) 관계에 있기도 하다. 다만, 객석에 앉아 있는 관람객의 몸짓을 완전한 어둠으로 감싸 전적으로 배제할 것을 요청하는 영화와는 달리, <X(무심한 연극)>은 그것을 다른 행위자들작품을 체험하는 동안 관람객을 곁에서 보조하는 수행자[3]와 작품을 체험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다른 관람객들에게 지속적으로 노출함으로써 작품의 구성 요소로 삼고 있다.

HMD를 착용하고 ‘허우적거리는’ 관람객의 동작 자체를 공연의 한 부분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X(무심한 연극)>은 권하윤의 <잠재적인 마법의 순간을 위한 XX번째 시도>와 유사한 전략을 취하고 있는 VR 작품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권하윤의 가상공간에서 관람객은 일종의 상호 작용적인 (그런 만큼 실패할 가능성도 있는) 퍼즐 게임을 수행하는 행위자가 된다. 작가가 설계한 게임의 조형적 구조에 따라 상당 부분 미적으로 조율되는 그의 동작은 퍼즐 게임과 마찬가지로 자기지시적/비지시적이며 따라서 수행적이다. 한편으로, 가상공간 바깥에서 그의 동작을 지켜보고 있는 다른 참여자에게도 그것은 수행적인 것으로 비친다. 즉 권하윤의 작품을 체험하고 있는 관람객은 그 자신에게나 다른 이들에게나 한 명의 수행자로 남는다.




반면, 서현석의 작품을 체험 중인 관람객의 동작은 가상공간 안팎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띠면서 두 겹으로 갈라진다. 여기서 관람객은 침대에 누워 있다 깨어나 어느 ‘꼬마’의 인도를 따라 (얼마간 데이빗 린치의 세계를 연상케 하는) 몇몇 장소를 돌아다니는 미지의 존재 역할을 하는 연행자가 된다. 그런데 작품의 진행에 영향을 미칠 아무런 권한도 능력도 없는 (덕분에 실패할 가능성도 없는) 그는 1인칭 RPG의 ‘플레이어’보다는 알렉산드르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에서 퀴스틴 후작의 안내로 에르미타주를 돌아다니는 유령적 존재에 가깝다. 하지만 가상공간 속에서 그가 맡은 역할을 알 리 없는 바깥의 관찰자에게 그의 행위는 자기지시적/비지시적인 것으로 비칠 터이다. <X(무심한 연극)>의 관람객은 상궤를 벗어나 참여자의 눈을 가린 상태에서 진행되는 동시대 공연의 예외적 흐름 속에 놓인 수행자이면서, 1인칭 RPG의 주인공이지만 극의 진행에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점에서 영화관의 관객을 닮은 연행자이다. 그는 눈먼 산책자인 동시에 유령적인 몽상가이다.

이처럼 서현석은 작품을 체험하고 있는 관람객의 동작이 전적으로 연행도 아니고 전적으로 수행도 아닌 불확정적인 상태에 머무르게끔 하고 있다. 그러나 서현석은 이처럼 불확정적인 상태를 만들어내는 일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 상태는 좀처럼 공연의 구성 요소로 포착하기 힘든 순수 행위를 공연의 내부에서 촉발하기 위한 매개에 불과하다.[4] 공연의 내부에서 순수 행위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행위가 무언가를 표현하거나 의미하지 않고 자기지시적/비지시적이 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것은 조르조 아감벤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몸짓이 되어야 한다. 아감벤은 몸짓이란 어떤 목적을 상정하는 수단적 행위도 아니지만, 그 자체가 목적인 행위도 아니라고 보았다. (여기서 전자는 연행적 행위고 후자는 수행적 행위다.) 오히려 몸짓은 “매개성을 전시하며, 수단을 그 자체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고 따라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야말로 몸짓의 역량이다.[5] 그렇다면 종종 보이지 않은 채로 공연의 외부에서 출현하고 사라져버리는 몸짓을 어떻게 공연의 내부에서 보이게 할 것인가?

자기지시적/비지시적 행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미적 형식은 바로 춤이다. 하지만 서현석은 미적인 것을 안무하는 작업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또한, 작가는 공연을 통해 일시적이고 잠정적이나마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에도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는, <X(무심한 연극)>과 비슷한 시기에 문화역서울284에서 선보인 공연 <안개 1>(2021)에서도 그러했듯이, 다른 참여자들이 배제된 상태에서 관람객과 수행자가 일대일로 대면케 하는 편을 선호한다. 공연 내부의 행위자로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은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관람객이 무심결에 취하게 되는 불안(정)한 몸짓이야말로 진정 서현석의 흥미를 끄는 것이다. 

<X(무심한 연극)>의 후반부에서, 관람객은 점점 나이든 얼굴이 되어가는 ‘꼬마’의 손을 잡고 바다 위를 가로지르게 된다. 사실, 관람객의 손을 이끄는 이 손은 이중화되어 있다. 하나는 VR 헤드셋이 제공하는 가상현실 속 등장인물인 비인간 연행자의 손이며, 다른 하나는 실제 미술관 공간에서 관람객을 보조하는 인간 수행자의 손이다. 이 불확정적인 손을 맞잡고 있는 관람객의 손 또한 연행적인 손과 수행적인 손으로 이중화되며, 둘 사이에서 진동하는 가운데 그의 손은 하나의 몸짓을 방출하기 시작한다. 관람객은 이 몸짓이 비록 단 한 명일지라도 누군가에게 보이고 있음을 안다. (이러한 앎은 몸짓을 가벼운 흥분으로 들뜨게 한다.) 분명 공연의 내부에서 촉발되는 것이지만 연행도 아니고 수행도 아닌 이 몸짓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행위 자체라고 할 만한 것이며, 이때 관람객은 행위하는 사람이란 것 이외에 아무런 속성도 지니지 않는 문자 그대로의 행위자로 존재한다.

영화감독 자크 리베트(Jacques Rivette)는 1950년 무렵에 쓴 「행위와 행위자」(L’acte et l’acteur)라는 미발표 원고[6]20대 초반에 쓴 것이지만 훗날 그가 <미친 사랑> 같은 걸작에서 구사한 대담한 방법론을 예견케 하는 글에서 시네아스트가 사용하는 요소로 동작, 몸짓, 행위를 꼽으면서, 행위자는 시네아스트의 유일한 표현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행위자는 동작을 위엄을 지닌 몸짓으로 고양시키며 행위자의 개입이 있어야만 몸짓은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리베트가 말하고 있는 행위자는 “어떤 사고방식이나 정신적 세계를 지닌 등장인물(acteur-personnage)이 아니라, 몸짓의 결절점으로서의 행위 주체(acteur-sujet d’actes)”다. 이미지 중심적이거나 몽타주 중심적인 영화 미학적 사고에서 벗어나, 리베트는 “행위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행위자, 행위자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영화를 떠올린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영화는 행위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리베트의 노트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기묘하게 동시대적인 울림을 준다. 리베트는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 장치와 관련해서 순수 행위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그의 생각은 “영화의 요소는 몸짓이지 이미지가 아니다”[7]라고까지 단언하는 아감벤의 주장과도 맞물리면서, 서현석의 <X(무심한 연극)>처럼 확장된 개념의 영화에서 순수 행위로서의 몸짓의 가능성을 고찰하도록 우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한편으로 우리의 눈을 가리기도 하는 장비인 HMD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서현석은 관람객의 몸짓을 공연의 내부에서 촉발하고 그 몸짓이 (HMD를 착용하고 있는 탓에 일종의 맹목 상태인) 관람객 자신에게까지 보이게끔 하고 있다. 

특히, 유령적 연행자로서의 관람객이 그를 인도하는 ‘꼬마’를 따라 계속해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을 걷게 되는 부분에서 그러하다. 가상공간 내에서 이 길의 양옆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로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X(무심한 연극)>의 세계를 체험한 이들이라면 어김없이 이 부분을 지날 때의 압도적인 공포와 불안에 대해 말하게 된다. 물론 관람객은 실제 공간에 낭떠러지란 없고 그가 발을 어디로 내딛건 아무런 위험도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시각과 촉각 사이의 불일치는 끝내 해소되지 않으며, 발이 전하는 확신에 대해 눈은 언제나 의혹으로 반응한다. 다시 한번, <X(무심한 연극)>의 관람객은 유령적인 몽상가와 눈먼 산책자 사이에서, 연행자와 수행자 사이에서 진동하며 몸짓을 방출하는 행위자가 된다. 사위가 온통 깜깜한 가운데 위태롭게 이어지는 낭떠러지 길의 풍경은 관람객 자신의 몸짓을 따라 출렁이며 매 순간 그에게 지각되고, 이러한 지각이 다시 몸짓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반복된다.

관람객이 일종의 ‘가이드가 딸린 산책(guided walk)’을 체험하는 동안, <X(무심한 연극)>의 VR 헤드셋에 저장된 영상은 철저하게 시나리오에 따라 전개된다. (이제야 궁금해지는 것이지만, 내가 만일 침대에서 일어나 ‘꼬마’의 인도를 따르지 않고 그대로 방에 머물렀다면 어땠을까? 이런 경우, 관람객을 보조하는 수행자가 따라야 할 지침은 무엇이었을까?) <X(무심한 연극)>의 후반부에 길게 읊조려지는 내레이션은 자연 속에서 자아의 위치에 대한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의 사색에서 발췌해 재구성한 것으로, 자연을 ‘무심한 연극’이라고 한 슈뢰딩거의 표현은 이 작품의 부제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원래 슈뢰딩거가 쓴 독일어 단어는 연극이나 극장, 혹은 볼거리를 뜻하는 ‘Schauspiel’인데, 이를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연극’이라 옮기고 있고 영어 번역본에서는 ‘spectacle’이라 옮기고 있어 대단히 흥미롭다.[8] 이유인즉,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연극과 스펙터클의 관계에 대한 사유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스펙터클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연극의 여섯 가지 요소 가운데 ‘옵시스(ὄψις)’에 해당하는 영어식 표현이다. 배우와 의상과 무대장치를 비롯한 시각적 요소 일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는 옵시스 없이도 (주제와 인물과 플롯, 그리고 대사와 음악이 있다면) 연극의 효과는 얻어질 수 있다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유명하다.[9] 물론, 현대적 연극, 현대적 공연이란 철저하게 반(反)아리스토텔레스적 노선을 따름으로써 성립된 것이다. 옵시스만으로도 가능하다, 아니 충분하다. VR 장치를 활용한 공연을 구상하면서, 서현석은 인간에게 일체 무심한 옵시스를, 하지만 그것과 대면하고 있는 이에게 순수 행위로서의 몸짓을 촉발할 수 있는 옵시스를 떠올려 본다. 한때 영화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대면했던 이 무심한 옵시스는, 이제 서현석의 <X(무심한 연극)>에서 HMD를 통해 제공되는 가상현실의 형태로 우리를 감싸고 또 인도하고 있다.


[1] 직역하면 ‘multielemental arts’가 되어야 하겠으나 제도적으로는 ‘interdisciplinary arts’나 ‘multidisciplinary arts’에 해당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흥미롭게도, <X(무심한 연극)>을 제작 지원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영문 홈페이지에서는 다원예술을 ‘performing arts’라고 표기하고 있다. 

[2] 에리카 피셔-리히테, 『수행성의 미학: 현대예술의 혁명적 전환과 새로운 퍼포먼스 미학』, 김정숙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2017), 43~56. 피셔-리히테에 따르면, 수행적 행위는 비록 잠정적이나마 어떤 현실을 생성한다는 점에서 현실구성적(오스틴) 또는 극적(버틀러) 특성 또한 띤다. 그런데 이는 연행적 행위의 특성이기도 하다. 사실, 피셔-리히테는 연행적 행위라는 범주를 따로 고려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처럼 연행적 행위라는 범주를 도입해 수행적 행위와 비교해 보면, 수행성의 핵심은 바로 자기지시성 혹은 비지시성에 있다는 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3] 사실, 각각의 관람객을 매번 보조하는 이 수행자야말로 <X(무심한 연극)>의 가장 특권적인 관람객이라고 할 수 있다.

[4] 관람객이 그저 관람객으로만 있을 때, 즉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고만 있을 때 항시 발생하는 순수 행위 대부분(몰입, 웃음, 한숨, 탄식, 기침, 졸음, 딴짓 등등)은 좀처럼 지각되지 않으며, 따라서 공연의 외부에 자리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예외가 없지는 않다. 이러한 순수 행위들이 여러 관람객을 통해 집단적으로 표출되는 경우(예컨대, 웃음 바다가 된 객석), 또는 개별적이라도 누군가가 심하게 야유를 퍼붓거나 보란 듯이 격한 동작으로 중도 퇴장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예외적 행위는 이미 수행이나 연행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린 셈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몇몇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이런 예외적 행위가 공연에서 지니는 수행적 가치나 연행적 가치를 간파하고 이를 기민하게 활용하기도 했다. 영화에 있어서라면, 서현석의 <X(무심한 연극)>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확장영화(expanded cinema)의 계보에서, 특히 레트리즘(Lettrism) 작가들이 구사한 공연 전략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의 책들을 보라. Kaira M. Cabañas, Off-Screen Cinema: Isidore Isou and the Lettrist Avant-Garde (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4) 그리고 Nicole Brenez, Introduction to Lettrist Cinema, trans. Clodagh Kinsella (Berlin: Sternberg Press, 2014).

[5] 조르조 아감벤, 「몸짓에 관한 노트」, 『목적 없는 수단: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 김상운・양창렬 옮김(서울: 도서출판 난장, 2009), 68~72. 

[6] 미발표 상태로 반세기 넘게 오래된 공책에 끼워져 있던 이 글은 리베트가 2016년에 세상을 떠난 이후 2017년에야 공개되었고 2018년에 프랑스에서 출간된 리베트의 비평문 모음집에 수록되었다. Jacques Rivette, “L’acte et l’acteur,” in Textes Critiques, ed. Miguel Armas and Luc Chessel (Paris: Post-éditions, 2018), 321~327.

[7] 조르조 아감벤, 「몸짓에 관한 노트」, 같은 책, 65.

[8] 에르빈 슈뢰딩거, 『물리학자의 철학적 세계관』, 김태희 옮김(서울: 필로소픽, 2013), 40.

[9] 최근에 번역, 출간된 다음의 책에는 옵시스의 문제에 대한 두 철학자의 흥미로운 논쟁이 담겨 있다. 필립 라쿠-라바르트・장-뤽 낭시, 『무대』, 조만수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2020). 

2021-09-23

구르는 공의 감촉: 박솔뫼의 『우리의 사람들』(창비, 2021)


※ 아래는 계간 《문학과사회》 2021년 여름호(134호)에 실렸던 것이다.




박솔뫼의 인물들도 무언가를 하기는 한다. 주로 먹고 마시고 자고 걷고 보고, 종종 생각한다. 다만 그가 “뭔가를 했던 사람들”(p. 219)이라고 부르는 ‘어른들’에게 이러한 ‘함’은 행위보다는 무위에 가까운 것으로 비치겠지만 말이다. 어정버정하는 자식을 향해 “넌 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러고 사니!”라고 말하는 부모의 시선이 꼭 그런 것이겠다. 그럼 박솔뫼의 인물이라면 슬쩍 몸을 뒤틀고 꼼지락대며 잠시 “무얼 하나 무얼 하나 벽에 대고 혼잣말을 하”(p. 17)다가는 “실제 해도 좋지만 상상으로 더 좋은 [……] 여행과 자전거와 수영”(p. 158) 같은 것을 떠올리다가 이내 잠들어 버릴 것 같다. 그러다 잠에서 깨면 “학교들을 다니고 회사를 다니고 돈을 벌고 세금을 내고 할 것들을 다한 내가 어딘가 어느 순간을 눌러놓고 빼먹은 것처럼 아직 덜 자란 사람처럼 느껴”(p. 186)지는 이유를 생각하다가 또 잠들어 버릴 것만 같다.

무위로서의 행위 또는 행위로서의 무위가 반복되는 박솔뫼의 소설적 세계를 긍정하는 세 가지 익숙한 방식이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실체화된 무(無)를 문학적 행위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이들의 견해에 기대는 방식이다. ‘아무것도 안 함(do-nothing)’을 ‘무를 함’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무의 궤적을 그리며 움직이는 언어를 충실히 좇는 일에 문학의 본질이 있다고 본다. 이런 이들이라면 표제작 「우리의 사람들」에서 ‘네시’라는 단어가 “새벽 네시”(p. 27)처럼 시간을 가리키다가 (몇 페이지 건너) “새벽에 네시를 본 이야기”(p. 32)처럼 전설의 괴수를 가리키는 식으로 슬며시 전이되는 것을 예사롭게 보아 넘기지 않을 터이다. 더불어 “나의 직장 동료 하나”(p. 27)라는 표현에서 ‘하나’가 사람의 이름인지 그저 하나의 기수인지가 불분명해지는 순간도 놓치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박솔뫼는 말라르메가 아니며 『우리의 사람들』은 『이지튀르』가 아니다. 무엇보다 무라고 하는 전혀 촉각적이지 않은 관념은 박솔뫼의 흔들흔들 찰랑이는 언어들 틈에서 기껏해야 그저 어색한 자리밖에는 얻지 못한다. 언제나 “말을 손으로 만져보는 느낌”(p. 78)을 궁금해하며 미래처럼 막연한 시간조차도 “손으로 만지고 반복한 미래는 어떤 것이었을지 다시 생각”(p. 179)하는 작가의 언어들 틈에서 말이다. 대신 우리는 “공을 던지세요”(p. 72)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이 공은 무와 관련된 관념으로서의 공(空)이기 이전에 일단 손에 잡아 쥐고 던질 수 있는 공이어야 한다.

어쩐지 조금 한가한 놀이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 공은, 확실히 박솔뫼의 소설적 세계에 잘 어울리는 사물이다. 이는 제목부터 직접 공놀이를 언급하고 있는 「농구하는 사람」 같은 단편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무를 함’이라는 추상적 행위/무위를 감각적으로 대체하는 ‘공놀이하기’는 사실 박솔뫼의 소설을 움직이고 또 그 속에서 움직이는 어떤 보편적인 은유적 형상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원환(圓環)의 유희다. 농구나 야구나 테니스 같은 놀이에 쓰이는 공, 인물이 타기도 하고 그 곁을 스쳐지나기도 하는 자전거의 바퀴, 결국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야 하는 산책이나 출장이나 휴가의 경로 등이 얼른 떠오르지만, 『우리의 사람들』에서 원환의 유희는 그저 소재적인 수준에 그치지 않으며 구조적인 반복을 촉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늦여름의 부산은 아주 많은 여러번의 수만큼 계속되었으면 좋겠다”(p. 63)는 바람에 걸맞게 부산 연작이라 해도 좋을 단편들로 꾸려진 이 소설집에서는, “숲을 헤매는 사람들은 [……] 여러개의 같은 장면들을 반복하면서”(p. 34) 걷고 또 걸으며, 이미 죽은 열두명의 여자들이 강간 살해범을 거듭 죽이는 등의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여기는 “영원하지 않지만 때때로 놀랄 정도로 반복되는 일”(p. 223)들의 세계다.

이 반복의 원환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박솔뫼의 소설적 세계를 긍정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진다. 그의 소설에서는 종종 실재적인 것과 허구적인 것이 같은 층위에 자리하고, 현실 세계와 가능 세계가 동일한 평면에서 교호하며, “어떤 시간들은 뭉쳐지고 합해지고 늘어나고 누워 있고 미래는 꼭 다음에 일어날 것이 아니고 과거는 꼭 지난 시간은 아니”(pp. 176~177)다. 이러한 문학적 시공을 유토피아적 영원으로 간주하면서 거기서 이루어지는 어쩐지 좀 나른하기도 하고 책임이나 의무로부터 방면된 듯한 영구 운동을 긍정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여기에 세대론적 또는 시대론적 해석을 거칠게 덧붙이면 박솔뫼 소설의 감수성은 돌연 ‘힐링문화’의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까지 비치게 된다. 말하자면 이는 그의 소설을 홍상수적 구조와 감각으로 재구성한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상상만으로도 어질어질해지는 꺼림직한 조합이지만─를 보듯 읽는 셈인데, 과연 이런 무시간적 혹은 탈시간적 유토피아가 박솔뫼의 문학적 시공에 부합하는가, 라는 물음은 이미 그가 자신에게 물은 물음이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천국의 시간을 반복해보고” 이내 “그 시간은 미래임에도 미래처럼 여겨지지 않았고 마치 슬픈 과거 같았다”(p. 183)고 토로한다.

반복의 원환이 가로지르는 박솔뫼의 문학적 시공을 굳이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간주하려면, 니콜라 푸생의 그림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의 낙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나’란 바로 죽음이다. 박솔뫼의 유토피아는 나른한 영원의 시간을 얼룩지게 하는 크고 작은 죽음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이 죽음들 가운데는 만만찮은 역사적 무게를 지닌 것들도 있다. 일본 좌익 진영에서 벌어진 우치게바, 제주 4・3항쟁, 재일조선인 권희로의 야쿠자 살인과 인질극, 나가야마 노리오의 연쇄 살인 행각, 광주민주화운동 및 그와 관련된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등등. 하지만 이러한 죽음들의 무게로 인해 박솔뫼 소설의 시공이 움푹 파이는 법은 결코 없다. 박솔뫼는 이러한 역사적 죽음을 「이미 죽은 열두명의 여자들과」의 권태로운 죽음이나 「영화를 보다가 극장을 사버림」의 여릿한 죽음 같은 허구적 죽음들과 무람없이 같은 평면에 두는 소설가다. 이 죽음들은 「펄럭이는 종이 스기마쓰 성서」의 화자가 떠올리는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세운 집들이 있는 부산 아미동의 비석들처럼 너나없이 비인칭적인 죽음들이 되며 그럼으로써 문학적 ‘산책’의 무대가 된다. 박솔뫼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매일 산책 연습’이라는 문학적 운동을 반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무대가 된다.

이 산책을 다시 역사적으로 의미화함으로써 박솔뫼의 소설적 세계를 긍정하는 방식도 있다. 즉 이러한 산책은 무언가를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기에 현재에 (증언)할 수도 없고 미래에 (약속)할 수도 없는 세대의 ‘그나마’ 윤리적인 행위/무위라고 보는 것이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는 “뭔가를 했던”, 아니 그보다는 무언가를 했다고 자부하는 어른들이 선호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덜 자란 사람”들이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과거에 관심을 두고 부지런히 익혀 불완전하나마 증언의 말들을 미래에 전해주기를 바란다. 어른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박솔뫼는 정지돈이 아니며 『우리의 사람들』은 『모든 것은 영원했다』가 아니다. 정지돈이 무엇보다 읽고 듣는 일에 몰두하는 작가라면, 박솔뫼는 무엇보다 보고 만지는 일에 끌리는 작가다. (물론, 둘은 모두 작가답게 부지런히 쓴다.) 정지돈의 소설이 작가가 읽고 들은 전설들을 엮어 세운 일종의 문학적 비석이라면, 박솔뫼의 소설은 주인 모를 비석들이 누운 자리를 배회하며 그것들을 보고 만지는 행위/무위를 반복하는 문학적 발라드(balade)─산책이자 유람이라는 뜻에서, 혹은 들뢰즈적 용법으로─이다. 하지만 박솔뫼는 자신의 산책이 불완전하고 파편적인 방식으로 역사적인 것과 만나는 움직임이라는 해석에는 분명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광주에 가면 “1980년 5월의 기억을 길을 걷는 중간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흔적이라는 말과 증거, 자취라는 말을 생각해보았지만 모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p. 205)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박솔뫼다운 공놀이란 어떤 것일까? 이러한 공놀이가 곧 역사이자 이야기가 되고 “농구하는 사람과도 최인훈의 이야기는 할 수 있”(p. 77)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광장으로 표상된 역사라는 “공을 더듬기만 하면 되는 건가. 더듬으며 이런 감촉이라고 이런 크기라고 생각해보면 될까”(p. 72)? 

이쯤에서 우리는 박솔뫼의 네번째 소설집 『우리의 사람들』이 그의 두번째 소설집 『겨울의 눈빛』 말미에 수록된 「9월 도쿄에서」라는 작가 노트를 은밀히 서문으로 삼고 있는 책이라는 점을 떠올려야 한다. 박솔뫼가 이 작가 노트를 쓴 것은 2015년 후반이고 『겨울의 눈빛』이 출간된 것은 2017년 9월이다. 이상하게도 그 2년 사이에 발표한 단편들은 『겨울의 눈빛』에 하나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한편으로, 『우리의 사람들』에 수록된 단편들은 모두 「9월 도쿄에서」를 쓰고 나서 2016년 이후에 발표한 것들이다. 「9월 도쿄에서」는 1970년대에 우치게바로 동료들을 잃은 뒤 텐트 연극 운동을 지속해온 연극인 사쿠라이 다이조와의 만남, 그리고 영화인이자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합류한 ‘테러리스트’였던 아다치 마사오와의 조우를 서술하고 있는 에세이다. 『우리의 사람들』에 실린 단편들 가운데 「우리의 사람들」과 「농구하는 사람」은 이 에세이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이 가운데 「우리의 사람들」은 2016년에 발표한 것인데도 『겨울의 눈빛』에는 수록되지 않았으며 대신 이번 소설집의 표제작이 되고 있다.

소설집에 한데 모을 단편들을 고를 때 박솔뫼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을지를 추정하는 일은 삼가기로 하자. 아마 그건 박솔뫼 자신도 모르는 것이거나 우리에게 말해준다 해도 이미 그건 사실이 아닐 것이다. 2015년 도쿄에서의 만남과 조우가 작가로서의 그에게 어떤 계기 혹은 위기가 되었으리라는 추정은 더더욱 삼가기로 하자. 그건 심리적 전기의 영역에 속하는 것일 뿐 박솔뫼 소설의 비평적 이해와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9월 도쿄에서」가 중요한 텍스트인 이유는 공의 감촉이 곧 역사이자 이야기가 될 수도 있으리라는 대담하고 상쾌한 문학적 믿음이 거기서 처음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는 세간의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한 일을 한 어른임에도 “‘나는 이런 것을 했다’라는 식의 느낌이 거의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아다치 마사오 같은 이를 보며 떠올린 믿음일 수도 있다. 여기서 박솔뫼는 아직 공을 떠올리고 있지는 않다. 게다가 여전히 어른들의 표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그것을 “죽은 자들만이 본 것”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정신적인 것 막연한 것이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은 [……] 눈에 보이고 우리가 잡고 던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할 때 이미 그는 공을 떠올리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우리의 사람들』은 단지 공을 보고 잡고 만지고 던지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공의 감촉은 그것을 굴리고 주고받기도 하는 가운데 느껴야 함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그런데 구르는 공의 감촉을 느끼려면 공을 따라 부지런히 함께 움직이거나 공을 부지런히 주고받는 수밖에 없다. 즉 “일백년 전 국경에 있던 사람들은 왜 그곳에 있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거기에 아무런 어색함이 없도록 흐르듯이 흘러가는 골짜기에 화장실용 휴지를 굴리는 것처럼 그게 통통통 소리를 내며 흰 길을 만드는 것처럼 하는 것”(p. 25)이고 “야구공을 주고받으며 야구공의 감촉을 처음으로 배우며 이런 것이었다고 익히며 농구공 이야기를 하”(p. 77)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박솔뫼의 역사-이야기가 문학적 발라드의 형태를 띠게 되는 이유다. 물론 박솔뫼의 소설 쓰기는 결코 일방향적이지 않아서 산책의 소설과 더불어 진행 중인 잠의 소설─세번째 소설집 『사랑하는 개』에 실린 「여름의 끝으로」처럼─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절대적 무위라고밖에 여겨지지 않는 잠이 행위가 될 수 있을까? 지금은 이에 대한 생각은 잠시 미뤄두고 『우리의 사람들』과 2개월 간격을 두고 출간된 박솔뫼의 일곱번째 장편소설을 들고 입으로 “미래 산책 연습”이라는 제목을 웅얼대며 구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