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07

정치적인 것의 장소, 다시


※ 이 글은 계간 사진잡지 《보스토크》에 연재하고 있는 '영화의 장소' 칼럼을 위해 쓴 것이다. (2026년 6월에 발간한 제54호에 수록.) 《보스토크》 53호에 실린 「정치적인 것의 장소」와 얼마간 관련된 글이다. 



괴짜들의 수호천사 제임스 L. 브룩스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올해 초이다. 아니, 소식을 들었다기보다는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하는 디즈니플러스가 2월 5일부터 <엘라 맥케이>(2025)를 공개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미국 개봉 당시 상업적으로 크게 실패해 한국에서는 개봉을 거치지 않고 DVD로 직행한 <에브리씽 유브 갓>(2010) 이후 무려 15년 만의 신작이라 반가움이 더욱 컸다. 브룩스의 작품이 한국에서 정식 개봉한 것은 <스팽글리쉬>(2004)가 마지막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유년기나 청년기를 보낸 이들에게 브룩스는 스필버그만큼은 아니어도 대단히 폭넓은 문화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둘의 가장 큰 차이라면, 스필버그의 경우에는 그의 입김이 슬쩍 닿기만 한 것도 사람들이 그의 이름으로 기억하는 반면, 브룩스의 경우에는 그가 상당히 깊숙이 관여한 것이라도 그의 이름을 거의 떠올리지 못한다는 점이겠다. 제작사로서 그는 1986년에 설립한 그레이시영화사(Gracie Films)를 통해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빅>(1988), <장미의 전쟁>(1989), 그리고 <제리 맥과이어>(1996) 등의 히트작을 내놓았고, 선댄스영화제에서 공개된 단편을 보고 매료되어 웨스 앤더슨의 장편 데뷔작 <바틀 로켓>(1996)을 제작하기도 했다. 나이 지긋한 미국인이라면 1970년대의 가장 성공적인 텔레비전 시트콤으로 꼽히는 <메리 타일러 무어 쇼>를 기억하겠지만, 미국인이 아니라도 1989년에 첫 방영된 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그레이시영화사의 대표작 <심슨 가족>은 모두가 안다.

오랫동안 텔레비전에서 경력을 쌓았던 브룩스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1983년으로, 마흔셋의 나이에 발표한 <애정의 조건>을 통해서다. 이 작품은 다섯 개의 아카데미상(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의 희극적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첫 작품은 뉴스룸을 배경으로 한 <메리 타일러 무어 쇼>처럼 자신의 텔레비전 시절 경험을 자양으로 삼은 <브로드캐스트 뉴스>(1987)다. 이 작품은 가장 널리 사랑받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7), 그리고 21세기 첫 십 년의 가장 훌륭한 미국영화 가운데 하나인 걸작 <스팽글리쉬>와 더불어 ‘브룩스적 터치’라는 표현의 타당성을 든든히 뒷받침한다.

그렇지만 브룩스가 자신의 작품에 촘촘하게 개인적인 특성을 박아 넣는 예술가라고 보는 조너선 로젠봄 같은 이는 미국에서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유성영화가 도래한 이후 미국인들이 자국의 희극적 재능의 가치를 알아보는 데는 놀랍도록 둔감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들은 하워드 혹스에 대해 그러했고, 제리 루이스에 대해 그러했고, 프랭크 태쉴린에 대해 그러했고, 블레이크 에드워즈에 대해 그러했고, 일레인 메이에 대해 그러했다. 21세기 들어 그들의 둔감함은 더욱 심화하여 브룩스가 내놓은 영화들은 완벽한 몰이해의 수렁으로 빠져든다. 지난해 12월에 개봉한 <엘라 맥케이>는 미국 평론가들 사이에서 동시대의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낡아 빠진 구식의 영화로 치부되고 흥행에도 실패했다. 이와 정반대로 언론의 너른 호평과 극찬까지 얻은 프랑스의 경우, 개봉을 포기하고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한 데 대한 반발이 거세어져 5월에 제한적으로나마 극장 상영을 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브룩스는 ‘올드 할리우드’의 위대한 로맨틱 코미디 전통을 잇는 우리 시대의 (거의) 유일한 영화감독이다. 이 말은 그가 할리우드 고전기 로맨틱 코미디에 오마주를 표하면서 이 장르의 주제적, 형식적 특성을 비평적으로 재구성한다는 뜻이 아니다. 브룩스의 작업은 로맨틱 코미디에 접근할 때마다 시네필적인 호고(好古) 취향의 과시가 이 장르의 순진함과 충돌하곤 하는 피터 보그다노비치나 코언 형제의 그것과는 거의 공통점이 없다. 그의 작업은 예술적 야심을 품은 젊은 감독이라면 하나같이 비극적, 실존적, 성찰적인 영화를 내놓았던 1970년대 ‘뉴 할리우드’ 시기에 태연자약하게 <새로운 잎> 같은 로맨틱 코미디를 내놓으며 감독으로 데뷔했던 일레인 메이의 그것과 유사한 구석이 있다. (이 시기에 브룩스는 텔레비전 시트콤에 전념하고 있었다.) 즉 그는 로맨틱 코미디의 전통을 회고(과거로 취급함)하거나 갱신(미래로 내세움)하기보다는 당대의 관객들과 협상 가능한 현재적 장르로 이어가고자 한다. 보그다노비치나 코언 형제에게 로맨틱 코미디는 예술가로서 선택 가능한 여러 양식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만, 브룩스에게 그것은 영화와 관객의 관계를 가늠케 하는 지표 식물과 같다. 

그런데 로맨틱 코미디는, 특히 고전기 할리우드의 로맨틱 코미디는 현대의 관객들에게 수용되기 쉽지 않은 장르다. 1930년대에 만들어진 로맨틱 코미디를 ‘옛날 영화’이니 이런저런 것들이 맞지 않아도 어느 정도 받아들이던 관객도 자신과 동시대에 속한 작품에는 좀처럼 그런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이 환상에 기초하고 있는 장르라서? 내가 보기에 이건 터무니없는 설명이다. 그런 주장은 <라라랜드>나 <케이팝 데몬 헌터스> 등의 뮤지컬이 오늘날의 관객에게 무리 없이 수용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관객은 어떤 장르가 설정하고 있는 환상의 경계를 인지하고 나면 사실적으로는 아무리 터무니없어도 ‘알면서’ 받아들이고 즐긴다. (우리는 무지한 관객이라는 오래된 이데올로기 비평의 가정을 기각해야 한다.) 그러니까 로맨틱 코미디가 좀처럼 수용되지 않는 이유는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문제는 로맨틱 코미디가 뮤지컬처럼 환상에 기초한 장르가 아니라 여간해선 있을 법하지 않은 상황에 말려드는 괴짜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사실적인 장르라는 데 있다. 로맨틱 코미디의 사건은 여간해선 있을 법하지 않지만 비사실적이지는 않다. 남녀가 거리를 걷다 갑자기 노래를 부르고 춤추며 서로에게 사랑 고백을 하기 시작하자 행인들이 모두 그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추는 일은 아예 있을 법하지 않고 그만큼 비사실적이다. 그러니 환상을 동원해야 한다. 하지만 백만장자의 딸이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청소부와 사랑에 빠진다는 건 여간해선 있을 법하지 않지만 비사실적이지는 않다. 그러니 환상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는 로맨틱 코미디를 괴롭히는 ‘시간적 과민성’의 원인이 된다. 로맨틱 코미디의 수용 여부는 당대의 관객이 일어날 법하지는 않아도 비사실적이지는 않다고 느끼는 일의 한계가 어디인지에 달려 있다. 이 한계를 넘는 순간 관객은 영화가 사실적이지 않고 시대착오적이라며 비난을 가할 것이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로맨틱 코미디는 무엇보다 성적인 것이 암시하는 긴장을 통해 지탱되는 장르다. 따라서 암시가 사라지고 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면 장르 자체가 와해된다. 포르노 뮤지컬은 있을 수 있고 실제로도 있다. 가령, 뮤지컬 <코러스 라인>을 하드코어 포르노로 패러디한 브라질 영화 <오! 헤부세테이우>가 그런 영화다. 하지만 포르노 로맨틱 코미디는 아예 성립되지 않는다. 성적인 것이 약간만 노골적으로 드러나도 그러해서, 로맨틱 코미디의 인물과 요소와 설정을 고루 갖추었어도 홍상수의 <오! 수정>이 좀처럼 이 장르로 지각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쯤에서 정리해 보자. 변화를 상상하기 어려운 ‘자본주의 리얼리즘’ 시대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장르가 바로 로맨틱 코미디다. 스크린에 본격적으로 섹스가 도입되고 나면 거의 불가능해지는 장르가 바로 로맨틱 코미디다. 그렇다면 브룩스가 텔레비전 시트콤으로 성공을 거둔 1970년대는 미국에서 로맨틱 코미디를 만든다는 것이 서서히 까다로운 일이 되기 시작할 무렵이다. 1971년에 리처드 닉슨은 달러를 고정 비율의 금으로 바꾸어주는 금태환 제도를 폐지했고, 이로써 오늘날과 같은 변동 환율제로 향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가 화제의 중심에 섰던 1972년에는 주류 언론의 관심을 받은 최초의 하드코어 포르노라 할 <목구멍 깊숙이>가 극장에서 개봉한다. 메이의 <새로운 잎>이 개봉한 것은 1971년이고 보그다노비치의 <왓츠 업 덕>이 개봉한 것은 1972년이다. ‘뉴 할리우드’의 시대에도 ‘올드 할리우드’의 고도로 과민한 장르는 아직 당대의 관객과 협상할 수 있었다. 


<엘라 맥케이>


오늘날 영화에서는 거의 힘을 잃다시피 한 로맨틱 코미디가 방송용 드라마에서는 제법 건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곳이 섹스가 노골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영역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터다. 또한, 1990년대부터 범람하기 시작한 각종 경연과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인생 역전을 거듭 사실적인 것처럼 비춰주는 영역이기 때문일 터다. 하지만 영화라 불리는 영역에서 로맨틱 코미디는 언제나 과민한 지표 식물이다. 그것이 소재로 삼는 상황이 당대의 관객에게 얼마나 사실적으로 또는 비사실적으로 다가가는지에 따라 그것이 속한 사회의 양태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40년 작품인 <모퉁이 가게>가 1998년에 <유브 갓 메일>로 리메이크되었을 때 원작의 편지 교환을 이메일 교환으로 바꾸었다는 바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갓 연애를 시작한 이를 달뜨게 하는 감정적 응축에 꼭 필요한 ‘말의 지연’이 예전과는 다른 뜻으로 변해가고 있던 때, 보낸 메시지에 즉각적 회신이 없으면 ‘읽씹’으로 느끼게 될 사회를 염두에 둔 사전 조정을 여기서 읽을 수는 없을까?

미국영화의 스크린에 음울한 반영웅이 숱하게 배회하던 1970년대를 지나 하드 바디가 스크린을 종횡무진하던 1980년대에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브룩스는 여간해선 있을 법하지 않은 사실적인 상황을 과감하게 끌어들인 로맨틱 코미디를 만드는 일에 매달려 왔다. 이 점에서 그는 지극히 ‘고전(기 할리우드)적’이다. 이를테면, <스팽글리쉬>에서 일급의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유부남 셰프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멕시코 출신의 불법 이민자 가사 도우미에게 끌린다. <브로드캐스트 뉴스>에서 일류 대학을 졸업한 워싱턴 방송국의 베테랑 프로듀서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도 다니지 못한 풋내기 남자 앵커에게 끌린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성공한 베스트셀러 작가는 자식이 딸린 레스토랑 여종업원에게 끌린다. 

이처럼 가까스로 사실적인 설정을 두고는 있지만, 브룩스는 당대 관객의 감각에 맞추기 위해 소재 자체나 서사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찾으려 들지는 않는다. 정치적인 주장을 담은 액션 영화가 운동의 박력을 잃어버리듯, 정치적인 주장을 담은 로맨틱 코미디는 같잖은 소극이 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대신 그는 미국 관객이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 대화 부분을 자막 없이 처리하면서 묘하게 그 뜻과 정서를 감지하게 한다든지, 괴짜 주연들은 물론이고 여느 영화에서라면 물색없이 끼어든 익숙한 훼방꾼이나 악역에 그쳤을 괴짜 조연들을 기어이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든지, 불편한 대화 상황을 섣불리 감정적 폭발로 이끄는 대신 긴장을 조율하며 차분하게 이어가는 등의 섬세한 방식을 선호한다. 그런데, 대략 <스팽글리쉬> 이후부터, 미국인들은 브룩스의 연출이 여간해선 있을 법하지 않은 상황을 사실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기엔 충분치 않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때부터 그의 작품은 설정과 현실 간의 차이로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 외국인에게 그 형식의 섬세함이 훨씬 더 잘 감지되는 것이 된다.

거칠게 말하자면, <엘라 맥케이>는 21세기 여성 버전의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같은 영화다. 이것은 분명 코미디지만 로맨틱 코미디는 아니다. 빈말이라곤 모르고 스스로에 몰두해 입바른 소리만 하는 이상주의자 엘라는 스미스만큼 괴짜지만 정치에 문외한이기는커녕 똑똑하고 유능한 정책가다. 34살에 부지사가 된 그녀는 모시던 주지사가 행정부의 장관으로 발탁되는 바람에 갑자기 주지사로 일하게 된다. 하지만, 가족을 괴롭힌 불륜 행각으로 연을 끊고 살았는데 갑자기 나타나 무턱대고 용서를 구하는 아버지, 좋아하는 여자가 있지만 연애를 시도할 용기가 없어 십수 개월째 자기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남동생, 기자에게 뇌물을 주는가 하면 엘라에게 공직을 요구하는 남편 등으로 그녀 주변은 어지럽기 짝이 없다. 잠깐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것은 고모 그리고 경호원과 이야기를 나눌 때다.

이 영화에는 엘라가 남편과 함께 사는 자신의 집에 있는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애정의 조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그리고 <스팽글리쉬> 등에서 브룩스의 인물들에게 종종 집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지를 생각해 보면 이는 꽤 의미심장하다. 엘라는 집무실이나 회의실에 있거나, 고모의 집이나 식당에 있거나, 동생이나 아버지의 집에 있거나, 이동하는 차 안에 있거나, 그도 아니면 실외에 있다. 엘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장소들을 오가지만 정작 그녀의 장소는 없는 것 같다. 이 점에서 그녀는 말의 내용을 통해서가 아니라 움직임의 궤적을 통해 장르 내부에 정치적인 것의 형상을 그려내는 사람이다. 그런데 한 사람의 이런 움직임이 비사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면?

<엘라 맥케이>는 만연한 불신에 당당히 시대착오로 맞서는 영화다. 주지사가 엘라를 두고 말했듯, “사람들이 다하지 못하는 것을 콕 찌르는” 식으로 말이다. 로맨틱 코미디가 더는 가능하지 않다고 해도, 여간해선 있을 법하지 않지만 비사실적이지는 않은 것은 결코 소진되지 않으리라는 믿음으로 말이다. 우리는 이런 믿음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엘라 맥케이>를 홀대한 미국인들은 헉슬리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멋진 신세계’로 이미 이행한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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