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07

정치적인 것의 장소, 다시


※ 이 글은 계간 사진잡지 《보스토크》에 연재하고 있는 '영화의 장소' 칼럼을 위해 쓴 것이다. (2026년 6월에 발간한 제54호에 수록.) 《보스토크》 53호에 실린 「정치적인 것의 장소」와 얼마간 관련된 글이다. 



괴짜들의 수호천사 제임스 L. 브룩스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올해 초이다. 아니, 소식을 들었다기보다는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하는 디즈니플러스가 2월 5일부터 <엘라 맥케이>(2025)를 공개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미국 개봉 당시 상업적으로 크게 실패해 한국에서는 개봉을 거치지 않고 DVD로 직행한 <에브리씽 유브 갓>(2010) 이후 무려 15년 만의 신작이라 반가움이 더욱 컸다. 브룩스의 작품이 한국에서 정식 개봉한 것은 <스팽글리쉬>(2004)가 마지막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유년기나 청년기를 보낸 이들에게 브룩스는 스필버그만큼은 아니어도 대단히 폭넓은 문화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둘의 가장 큰 차이라면, 스필버그의 경우에는 그의 입김이 슬쩍 닿기만 한 것도 사람들이 그의 이름으로 기억하는 반면, 브룩스의 경우에는 그가 상당히 깊숙이 관여한 것이라도 그의 이름을 거의 떠올리지 못한다는 점이겠다. 제작사로서 그는 1986년에 설립한 그레이시영화사(Gracie Films)를 통해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빅>(1988), <장미의 전쟁>(1989), 그리고 <제리 맥과이어>(1996) 등의 히트작을 내놓았고, 선댄스영화제에서 공개된 단편을 보고 매료되어 웨스 앤더슨의 장편 데뷔작 <바틀 로켓>(1996)을 제작하기도 했다. 나이 지긋한 미국인이라면 1970년대의 가장 성공적인 텔레비전 시트콤으로 꼽히는 <메리 타일러 무어 쇼>를 기억하겠지만, 미국인이 아니라도 1989년에 첫 방영된 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그레이시영화사의 대표작 <심슨 가족>은 모두가 안다.

오랫동안 텔레비전에서 경력을 쌓았던 브룩스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1983년으로, 마흔셋의 나이에 발표한 <애정의 조건>을 통해서다. 이 작품은 다섯 개의 아카데미상(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의 희극적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첫 작품은 뉴스룸을 배경으로 한 <메리 타일러 무어 쇼>처럼 자신의 텔레비전 시절 경험을 자양으로 삼은 <브로드캐스트 뉴스>(1987)다. 이 작품은 가장 널리 사랑받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7), 그리고 21세기 첫 십 년의 가장 훌륭한 미국영화 가운데 하나인 걸작 <스팽글리쉬>와 더불어 ‘브룩스적 터치’라는 표현의 타당성을 든든히 뒷받침한다.

그렇지만 브룩스가 자신의 작품에 촘촘하게 개인적인 특성을 박아 넣는 예술가라고 보는 조너선 로젠봄 같은 이는 미국에서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유성영화가 도래한 이후 미국인들이 자국의 희극적 재능의 가치를 알아보는 데는 놀랍도록 둔감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들은 하워드 혹스에 대해 그러했고, 제리 루이스에 대해 그러했고, 프랭크 태쉴린에 대해 그러했고, 블레이크 에드워즈에 대해 그러했고, 일레인 메이에 대해 그러했다. 21세기 들어 그들의 둔감함은 더욱 심화하여 브룩스가 내놓은 영화들은 완벽한 몰이해의 수렁으로 빠져든다. 지난해 12월에 개봉한 <엘라 맥케이>는 미국 평론가들 사이에서 동시대의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낡아 빠진 구식의 영화로 치부되고 흥행에도 실패했다. 이와 정반대로 언론의 너른 호평과 극찬까지 얻은 프랑스의 경우, 개봉을 포기하고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한 데 대한 반발이 거세어져 5월에 제한적으로나마 극장 상영을 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브룩스는 ‘올드 할리우드’의 위대한 로맨틱 코미디 전통을 잇는 우리 시대의 (거의) 유일한 영화감독이다. 이 말은 그가 할리우드 고전기 로맨틱 코미디에 오마주를 표하면서 이 장르의 주제적, 형식적 특성을 비평적으로 재구성한다는 뜻이 아니다. 브룩스의 작업은 로맨틱 코미디에 접근할 때마다 시네필적인 호고(好古) 취향의 과시가 이 장르의 순진함과 충돌하곤 하는 피터 보그다노비치나 코언 형제의 그것과는 거의 공통점이 없다. 그의 작업은 예술적 야심을 품은 젊은 감독이라면 하나같이 비극적, 실존적, 성찰적인 영화를 내놓았던 1970년대 ‘뉴 할리우드’ 시기에 태연자약하게 <새로운 잎> 같은 로맨틱 코미디를 내놓으며 감독으로 데뷔했던 일레인 메이의 그것과 유사한 구석이 있다. (이 시기에 브룩스는 텔레비전 시트콤에 전념하고 있었다.) 즉 그는 로맨틱 코미디의 전통을 회고(과거로 취급함)하거나 갱신(미래로 내세움)하기보다는 당대의 관객들과 협상 가능한 현재적 장르로 이어가고자 한다. 보그다노비치나 코언 형제에게 로맨틱 코미디는 예술가로서 선택 가능한 여러 양식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만, 브룩스에게 그것은 영화와 관객의 관계를 가늠케 하는 지표 식물과 같다. 

그런데 로맨틱 코미디는, 특히 고전기 할리우드의 로맨틱 코미디는 현대의 관객들에게 수용되기 쉽지 않은 장르다. 1930년대에 만들어진 로맨틱 코미디를 ‘옛날 영화’이니 이런저런 것들이 맞지 않아도 어느 정도 받아들이던 관객도 자신과 동시대에 속한 작품에는 좀처럼 그런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이 환상에 기초하고 있는 장르라서? 내가 보기에 이건 터무니없는 설명이다. 그런 주장은 <라라랜드>나 <케이팝 데몬 헌터스> 등의 뮤지컬이 오늘날의 관객에게 무리 없이 수용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관객은 어떤 장르가 설정하고 있는 환상의 경계를 인지하고 나면 사실적으로는 아무리 터무니없어도 ‘알면서’ 받아들이고 즐긴다. (우리는 무지한 관객이라는 오래된 이데올로기 비평의 가정을 기각해야 한다.) 그러니까 로맨틱 코미디가 좀처럼 수용되지 않는 이유는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문제는 로맨틱 코미디가 뮤지컬처럼 환상에 기초한 장르가 아니라 여간해선 있을 법하지 않은 상황에 말려드는 괴짜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사실적인 장르라는 데 있다. 로맨틱 코미디의 사건은 여간해선 있을 법하지 않지만 비사실적이지는 않다. 남녀가 거리를 걷다 갑자기 노래를 부르고 춤추며 서로에게 사랑 고백을 하기 시작하자 행인들이 모두 그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추는 일은 아예 있을 법하지 않고 그만큼 비사실적이다. 그러니 환상을 동원해야 한다. 하지만 백만장자의 딸이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청소부와 사랑에 빠진다는 건 여간해선 있을 법하지 않지만 비사실적이지는 않다. 그러니 환상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는 로맨틱 코미디를 괴롭히는 ‘시간적 과민성’의 원인이 된다. 로맨틱 코미디의 수용 여부는 당대의 관객이 일어날 법하지는 않아도 비사실적이지는 않다고 느끼는 일의 한계가 어디인지에 달려 있다. 이 한계를 넘는 순간 관객은 영화가 사실적이지 않고 시대착오적이라며 비난을 가할 것이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로맨틱 코미디는 무엇보다 성적인 것이 암시하는 긴장을 통해 지탱되는 장르다. 따라서 암시가 사라지고 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면 장르 자체가 와해된다. 포르노 뮤지컬은 있을 수 있고 실제로도 있다. 가령, 뮤지컬 <코러스 라인>을 하드코어 포르노로 패러디한 브라질 영화 <오! 헤부세테이우>가 그런 영화다. 하지만 포르노 로맨틱 코미디는 아예 성립되지 않는다. 성적인 것이 약간만 노골적으로 드러나도 그러해서, 로맨틱 코미디의 인물과 요소와 설정을 고루 갖추었어도 홍상수의 <오! 수정>이 좀처럼 이 장르로 지각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쯤에서 정리해 보자. 변화를 상상하기 어려운 ‘자본주의 리얼리즘’ 시대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장르가 바로 로맨틱 코미디다. 스크린에 본격적으로 섹스가 도입되고 나면 거의 불가능해지는 장르가 바로 로맨틱 코미디다. 그렇다면 브룩스가 텔레비전 시트콤으로 성공을 거둔 1970년대는 미국에서 로맨틱 코미디를 만든다는 것이 서서히 까다로운 일이 되기 시작할 무렵이다. 1971년에 리처드 닉슨은 달러를 고정 비율의 금으로 바꾸어주는 금태환 제도를 폐지했고, 이로써 오늘날과 같은 변동 환율제로 향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가 화제의 중심에 섰던 1972년에는 주류 언론의 관심을 받은 최초의 하드코어 포르노라 할 <목구멍 깊숙이>가 극장에서 개봉한다. 메이의 <새로운 잎>이 개봉한 것은 1971년이고 보그다노비치의 <왓츠 업 덕>이 개봉한 것은 1972년이다. ‘뉴 할리우드’의 시대에도 ‘올드 할리우드’의 고도로 과민한 장르는 아직 당대의 관객과 협상할 수 있었다. 


<엘라 맥케이>


오늘날 영화에서는 거의 힘을 잃다시피 한 로맨틱 코미디가 방송용 드라마에서는 제법 건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곳이 섹스가 노골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영역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터다. 또한, 1990년대부터 범람하기 시작한 각종 경연과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인생 역전을 거듭 사실적인 것처럼 비춰주는 영역이기 때문일 터다. 하지만 영화라 불리는 영역에서 로맨틱 코미디는 언제나 과민한 지표 식물이다. 그것이 소재로 삼는 상황이 당대의 관객에게 얼마나 사실적으로 또는 비사실적으로 다가가는지에 따라 그것이 속한 사회의 양태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40년 작품인 <모퉁이 가게>가 1998년에 <유브 갓 메일>로 리메이크되었을 때 원작의 편지 교환을 이메일 교환으로 바꾸었다는 바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갓 연애를 시작한 이를 달뜨게 하는 감정적 응축에 꼭 필요한 ‘말의 지연’이 예전과는 다른 뜻으로 변해가고 있던 때, 보낸 메시지에 즉각적 회신이 없으면 ‘읽씹’으로 느끼게 될 사회를 염두에 둔 사전 조정을 여기서 읽을 수는 없을까?

미국영화의 스크린에 음울한 반영웅이 숱하게 배회하던 1970년대를 지나 하드 바디가 스크린을 종횡무진하던 1980년대에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브룩스는 여간해선 있을 법하지 않은 사실적인 상황을 과감하게 끌어들인 로맨틱 코미디를 만드는 일에 매달려 왔다. 이 점에서 그는 지극히 ‘고전(기 할리우드)적’이다. 이를테면, <스팽글리쉬>에서 일급의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유부남 셰프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멕시코 출신의 불법 이민자 가사 도우미에게 끌린다. <브로드캐스트 뉴스>에서 일류 대학을 졸업한 워싱턴 방송국의 베테랑 프로듀서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도 다니지 못한 풋내기 남자 앵커에게 끌린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성공한 베스트셀러 작가는 자식이 딸린 레스토랑 여종업원에게 끌린다. 

이처럼 가까스로 사실적인 설정을 두고는 있지만, 브룩스는 당대 관객의 감각에 맞추기 위해 소재 자체나 서사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찾으려 들지는 않는다. 정치적인 주장을 담은 액션 영화가 운동의 박력을 잃어버리듯, 정치적인 주장을 담은 로맨틱 코미디는 같잖은 소극이 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대신 그는 미국 관객이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 대화 부분을 자막 없이 처리하면서 묘하게 그 뜻과 정서를 감지하게 한다든지, 괴짜 주연들은 물론이고 여느 영화에서라면 물색없이 끼어든 익숙한 훼방꾼이나 악역에 그쳤을 괴짜 조연들을 기어이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든지, 불편한 대화 상황을 섣불리 감정적 폭발로 이끄는 대신 긴장을 조율하며 차분하게 이어가는 등의 섬세한 방식을 선호한다. 그런데, 대략 <스팽글리쉬> 이후부터, 미국인들은 브룩스의 연출이 여간해선 있을 법하지 않은 상황을 사실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기엔 충분치 않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때부터 그의 작품은 설정과 현실 간의 차이로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 외국인에게 그 형식의 섬세함이 훨씬 더 잘 감지되는 것이 된다.

거칠게 말하자면, <엘라 맥케이>는 21세기 여성 버전의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같은 영화다. 이것은 분명 코미디지만 로맨틱 코미디는 아니다. 빈말이라곤 모르고 스스로에 몰두해 입바른 소리만 하는 이상주의자 엘라는 스미스만큼 괴짜지만 정치에 문외한이기는커녕 똑똑하고 유능한 정책가다. 34살에 부지사가 된 그녀는 모시던 주지사가 행정부의 장관으로 발탁되는 바람에 갑자기 주지사로 일하게 된다. 하지만, 가족을 괴롭힌 불륜 행각으로 연을 끊고 살았는데 갑자기 나타나 무턱대고 용서를 구하는 아버지, 좋아하는 여자가 있지만 연애를 시도할 용기가 없어 십수 개월째 자기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남동생, 기자에게 뇌물을 주는가 하면 엘라에게 공직을 요구하는 남편 등으로 그녀 주변은 어지럽기 짝이 없다. 잠깐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것은 고모 그리고 경호원과 이야기를 나눌 때다.

이 영화에는 엘라가 남편과 함께 사는 자신의 집에 있는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애정의 조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그리고 <스팽글리쉬> 등에서 브룩스의 인물들에게 종종 집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지를 생각해 보면 이는 꽤 의미심장하다. 엘라는 집무실이나 회의실에 있거나, 고모의 집이나 식당에 있거나, 동생이나 아버지의 집에 있거나, 이동하는 차 안에 있거나, 그도 아니면 실외에 있다. 엘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장소들을 오가지만 정작 그녀의 장소는 없는 것 같다. 이 점에서 그녀는 말의 내용을 통해서가 아니라 움직임의 궤적을 통해 장르 내부에 정치적인 것의 형상을 그려내는 사람이다. 그런데 한 사람의 이런 움직임이 비사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면?

<엘라 맥케이>는 만연한 불신에 당당히 시대착오로 맞서는 영화다. 주지사가 엘라를 두고 말했듯, “사람들이 다하지 못하는 것을 콕 찌르는” 식으로 말이다. 로맨틱 코미디가 더는 가능하지 않다고 해도, 여간해선 있을 법하지 않지만 비사실적이지는 않은 것은 결코 소진되지 않으리라는 믿음으로 말이다. 우리는 이런 믿음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엘라 맥케이>를 홀대한 미국인들은 헉슬리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멋진 신세계’로 이미 이행한 이들이다.

2026-07-01

우편배달부의 가르침


※ 이 글은 2026년 3월 22일 임재철 선생이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 3월 24일부터 4월 11일까지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여섯 차례에 걸쳐 게시했던 것을 전체적으로 다시 구성한 글이다. 다시 구성한 글은 2026년 6월 20일 영화관 필름포럼에서 열린 추모 행사 "임재철, 무적의 비평가를 기억하며"에 맞춰 임재철아카이브의 젊은 기획자들이 만든 소책자에 수록되었다. 이 소책자에는 정지돈 작가, 금정연 작가의 추모글도 함께 실렸다. 이 글을 정리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준 임재철아카이브의 기획자들(금동현, 문윤기, 배은열, 윤지원, 이광호, 이라진, 이중훈, 한민수)께 감사드린다.


이 사진은 2006년 여름, 로카르노로 가는 열차 안에서 내가 직접 찍은 선생의 모습이다. 이 해에 선생이 제작한, 그리고 내가 프로그래머로 있던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폐막작으로 첫 공개된 김영남 감독의 <내 청춘에게 고함>은 로카르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어 국제비평가상과 넷팩상을 수상했다. 2주 가까이 로카르노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단 한 번도 함께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


내가 임재철 선생에게서 떠올리는 건 우편배달부로서 비평가의 형상이다. 한동안 선생은 출판사 이모션북스를 운영하면서 책 주문이 들어오면 직접 포장을 해서 우편으로 부치곤 했다. 책을 부치러 가는 길에 나도 몇 차례 따라나선 적도 있다. 한편으론, 내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전문사 과정에 재학 중이었을 때 수강했던 선생의 영화비평워크숍 수업도 떠오른다. 수강생 셋과 청강생 하나인 단출한 수업이었는데, 그나마 수강생 하나는 학기 도중에 조용히 사라졌다. 이 수업에서는 데이비드 윌스와 피터 브루넷의 『스크린/플레이: 데리다와 영화이론』을 읽으면서, 자크 데리다의 『우편엽서』에서 「진리의 배달부」라는 글을 같이 읽어 나갔다. 하지만 실제로 이 책들을 제대로 다루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수업의 대부분은 선생이 좋아하는 축구 이야기와 이런저런 사담과 험담으로 채워졌고, 그 사이에 (당시에는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던) 아즈마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 자크 데리다에 대하여』에 대한 선생 특유의 ‘난폭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하게도, 서로 무관한 이야기들 사이에서 이따금 어떤 비평적 번득임이 엿보이곤 했다. 사실 이건 수업이라기보다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데리다적인 의미에서 우편적인 것은 위기를 담고 있는 교대나 연기, 잘못 배달되거나 분실될 가능성을 고려하면서 발송하는 것이다. 그리고 편지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도록 하는 구조적인 필연성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송신과 수신이라는 사건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선생의 말들이 꼭 그랬다. 그 말들 자체는 딱히 비평적이랄 것이 없이 여기저기 흩어질 때가 많았지만, 그 말들 사이에서 무언가 비평적인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곤 했다. 참으로 기묘한 방식으로, 여하간 편지는 도착하지 않으면서 도착한다. 그렇게 얻은 가르침 몇몇을 주제별로 정리해 보았다. 


정치적인 영화에 대하여


다니엘 위예와 장-마리 스트로브의 <노동자, 농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선생은 “이 사람들 영화가 왜 진짜 정치적인 줄 아냐? 노동자나 농민은 못 보는 영화를 만들었거든.” 가까스로 망언의 수준에서 벗어난 이 말은 대부분의 노동자나 농민에게 위예와 스트로브의 영화가 삶에서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는 성격의 작품이라는 뜻은 아닐 터다. 한국어 특유의 애매함을 고려하면, 그의 말은 그들의 영화가 대부분의 노동자나 농민이 좋아할 리도 없고 이해할 리도 없는 것이라는 뜻에 가깝겠다. 나는 그의 말에 다음과 같은 뜻도 담겨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노동자나 농민이 좋아하는 영화가 노동자나 농민을 위한 영화일 리 없다. 여기서 ‘노동자나 농민’ 대신 소수자를 지칭하는 표현을 넣어 생각해 보면 그의 말에 담긴 정치적 잠재력이 잘 드러난다. 퀴어가 좋아하는 영화가 퀴어를 위한 영화일 리 없다. 여성이 좋아하는 영화가 여성을 위한 영화일 리 없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단서가 붙어야 한다. 영화가 항상 이랬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영화가 예술이 되어버린 이후, 위예와 스트로브도 그 흐름 속에 있었던 영화의 모더니즘 시기 이후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건 영화가 예술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였다. 오늘날 진정 정치적인 영화를 만든다면 그것은 영화제와 갤러리의 관람객에게 가장 잘 수용되는 성격을 띨 것이 분명하다. 즉 정치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그것이 구원하고자 하는 주체의 소외를 수반한다. 이것이야말로 위예와 스트로브 영화의 딜레마다. 정치적 영화에 대한 선생의 통찰에는 분명히 마키아벨리적인 측면이 있다. 인간을 위한 정치가 인간적인 것일 리 없다는 확신에 가까운 것 말이다.


우정에 대하여


내가 임재철 선생에게서 우편배달부로서 비평가의 형상을 떠올리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선생은 출판사 이모션북스를 운영하면서 신간이 나오면 가방에 몇 권을 넣고 일일이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전해 주시곤 했다. 그러자면 교통비도 만만치 않은 일이라 돈이 궁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선생은 책을 직접 전하고 나면 차나 식사를 함께 하며 이야기를 (대개는 일방적으로) 하는 것을 좋아했다. 한 번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데, 대체 내가 거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는지 상영 도중에 불쑥 들어와 내 옆자리에 앉으시더니 “어, 영화 계속 봐라. 끝나고 책 주려고 왔다.”고 하셔서 놀란 적도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모션북스의 책들은 모두 그렇게 받은 것이다. 다만, 2021년에 나온 네 권의 책, 장-뤽 고다르와 유세프 이샤그푸르의 대담집 『영화의 고고학』, 크리스티안 키슬리 등의 『비디오 에세이 만들기』, 폴 발레리의 『인간과 조개껍질』과 『정신의 위기』는 받지 못했다. 임재철 선생과 오래 교제한 이들이라면 한두 번쯤 (또는 그보다 자주) 겪는 일이지만, 서로 심기가 틀어져 한동안 연락이 뜸하던 무렵에 나온 책들이다. 원서로 먼저 읽고 선생께 추천해 드리기도 했던 앞의 두 권을 제외하고 발레리의 책 두 권은 대전아트시네마 로비에서 판매하던 것을 구입해 갖고 있는데, 나중에 그걸 아시고는 “아니, 왜 그걸 사! 만나서 주려고 했는데!”하며 무척 짜증을 내셨다. 선생이 왜 그렇게 직접 책을 ‘배달’하는 일에 집착하셨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데리다가 말하는 ‘우편적인 것’의 중요성을 일러주셨으면서도 본인은 정작 잘못된 배송의 가능성을 한사코 피하려 든 셈이니 어쩐지 모순된 구석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정에 대한 어떤 낯선 관념을 감지해 보는 것도 가능하다.

생전에 선생이 좋아하셨던 영화는 그때그때 달랐지만, 하워드 혹스의 <리오 브라보>는 각별하게 생각한 영화 가운데 하나다. 2000년대 초중반, 한참 16mm와 35mm 필름을 사 모으시기 시작하던 무렵에 35mm 프린트를 구입해 소장하고 계셨던 영화 중 하나기도 하다. (가끔은 직접 수집한 필름 중 하나를 꺼내 사무실에서 영사해 보여주시기도 하셨는데, 로베르 브레송의 <무셰트>를 그렇게 16mm 프린트로 보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 영화를 무척 좋아하셨던 것은 확실한데 이 영화에 관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공적인 자리에서 영화에 대한 강연 같은 걸 하실 때도 이야기가 곧잘 옆길로 새기는 했지만, 사석에서는 그야말로 한두 마디 논평만 툭 던지고는 “이거 만들 때 혹스가 말이야……” 하며 영화를 둘러싼 뒷이야기로 빠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선생이 “라울 월쉬 만큼 셰익스피어적인 감독은 없지.”라는 식으로 말하면, 대체 저게 무슨 뜻일까 하고 골똘히 생각하게 되어버리곤 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 결국 며칠 동안 셰익스피어를 읽고 월쉬로 돌아오게 된다.) 여하간 나는 <리오 브라보>야말로 선생이 생각하는 우정의 관념에 가장 가까운 영화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실력이 되는(good enough)”이라는 지극히 혹스적인 대사 표현에 담긴 프로페셔널들의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리오 브라보>를 거듭 보면서 나는 이 영화가 악당들의 위협은 있지만 서스펜스는 거의 없거나 현저히 약한 액션영화라는 것을 깨달았다. 악당들의 위협은 구실에 지나지 않고, 실은 서너 명의 남자들이 서너 군데 장소를 배회하면서 가끔 스릴을 즐기고 유유자적 시간을 때우는 서부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선생과 조금 가까운 사이가 되고 나면, 한밤의 거리와 공원, 그리고 편의점 따위를 오가면서 온갖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새운 경험이 있게 마련이다. 문득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이 배회의 시간에 여자가 있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무척 드물었다. <리오 브라보>는 이 남자들의 공동체를 귀엽다는 듯, 혹은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는 여성적 시선이 관통하고 있는 영화다. (이 영화의 각본 작업에는 여성 최초로 휴고상 후보에 오른 SF 작가이기도 한 리 브래킷이 참여했는데, 그는 <빅 슬립>에서 처음 혹스와 작업한 후 <리오 브라보> 이후의 혹스의 후기작들, 그리고 <스타워즈> 시리즈 가운데 걸작으로 꼽히는 ‘제국의 역습’ 편의 각본 작업에도 참여했다.) ‘침대’ 옆에서 페드로 곤잘레스가 존 웨인에게 빨간 여성용 속옷을 대어보고, 이를 문간에 선 앤지 디킨슨이 우습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통쾌한 장면 같은 것 말이다. 혹스적 공동체가 20세기의 남성적 시네필리아에 한 모델이 되어 주었다면, 그리고 선생은 분명 거기에 매혹된 사람 가운데 하나였지만, 이제 우리는 혹스 영화를 가로지르는 저 여성적 시선으로 그것을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내가 우편배달부에게서 얻은 두 번째 가르침이다. 


시네필리아에 대하여


임재철 선생이 광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였던 시절에 상영한 <시네마니아>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영화를 보는 일이 삶 자체가 되어버린 뉴욕의 영화광들을 다룬 것이었는데, 거기 나오는 이들 가운데 몇몇은 자신이 뉴욕 유학 시절에 이따금 본 적도 있다고 하셨다. 이 영화와 거기 나오는 인물들에 대한 선생의 태도는 양가적이었다. 영화 보기의 매혹에 공감하면서도 그런 식으로 영화에 삶을 의탁해 버리는 이들을 지독히도 경멸했다. 아니, 그런 이들을 걱정하셨다. 실제로 선생 주위에는 그런 영화광 청년들(주로 남자들)이 제법 있었다. 영화제나 시네마테크를 찾는 일에 전념하며 연애도 직업도 소홀히 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선생은 등짝을 때리면서 “야, 영화 좀 그만 봐!”라고 하시곤 했다. 선생이 운영하던 영화관 필름포럼이 낙원상가에 있던 2005년, 서울국제문학포럼 일정으로 방한한 하스미 시게히코가 존 포드의 <웨건 마스터> 상영 전에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강연이 끝나고 선생을 따라 하스미 선생과 식사하는 자리에 끼게 되었는데, 거기서 하스미 선생은 일본에서 자신이 강연할 때마다 객석에서 꼭 보게 되는 이들이 있는데 서울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여기에도 그런 이들이 있는 것 같다며 “선생 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이런 사람들을 보면 무척 걱정이 됩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임재철 선생이 통역해 주셨다). 선생에게도 그런 기질이 있었다.

내가 아는 한 선생은 영화를 탐식하듯 보는 사람이 아니었고, 누군가의 필모그래피를 ‘도장깨기’하듯 파들어 가는 사람도 아니었다. (선생과 오래 교류하셨던 박상준 선생에 따르면, 젊은 시절의 선생은 외국에 다녀올 때 국내에 나와 있지 않은 영화의 VHS 테이프를 잔뜩 구입해 오다 세관에 걸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선생 식으로 말하자면, 그런 이들은 지성의 부족을 리스트 채우기로 만회하려 드는 약한 인간, 즉 시네마니아에 불과하다. 반면, 강한 인간의 시네필리아는 어떤 강박도 없는 쾌락으로 영화들 사이를 지나간다. 그는 동일한 태도로 영화 뿐 아니라 철학 사이로, 문학 사이로, 음악 사이로, 무엇보다 축구(에 대한 소식) 사이로 지나갔다. 이 점에서 선생의 시네필리아에는 지극히 니체적인 데가 있었다.

말년의 선생이 영화관에 자주 가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의 신작(클린트 이스트우드, 장-뤽 고다르, 장-마리 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예, 구로사와 기요시, 봉준호 등)이나, 선생을 따르던 이들이 열광하는 젊은 감독들의 영화는 파일을 구해서라도 종종 챙겨 보셨다. 나도 고다르의 <이미지 북>이나 만다 구니토시의 <사랑의 눈빛을> 같은 영화의 파일을 수소문해 구해 선생께 보내드린 적이 있다. 칸영화제에서 처음 봉준호의 <괴물>을 보고 돌아와 극찬하셨던 선생은 그 이후의 봉준호 영화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셨는데 “너무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게 문제”라는 것이었다. 하마구치 류스케에 대해서는 “벼락 맞아 만든” <해피 아워>를 제외하고는 대수롭지 않다고 여겼다. 내가 <우연과 상상>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에피소드는 대단히 훌륭하다고 말씀드리자 파일을 구해 달라셔서 보내드린 적이 있지만 이후에 따로 의견을 듣지는 못했다. 선생이 살아 계실 때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던 마지막 영화는 아라이 하루히코의 2023년 영화 <하나쿠타시>였다. (원제는 ‘꽃을 썩게 하는 비’라는 뜻이지만 한국에는 ‘에로티즘 시나리오’라는 황당한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선생은 이것이 홍상수 영화에 대한 일본식의 유쾌한 그리고 탁월한 해석이라고 보았고 하루히코가 주연 아야노 고의 외양을 홍상수와 똑 닮게 분장한 것을 너무 재미있어하셨다. 


주고받는다는 것에 대하여


나와 한예종 영상이론과 전문사 과정 동학으로 말년까지 임재철 선생과 긴밀히 교류하셨던 변호사 박형섭 형에게서 사진을 전해 받았다. 돌아가시기 꼬박 일 년 전, 알라딘빌딩 1층에서 있었던, 금정연 작가와 내가 함께 진행한 V. F. 퍼킨스의 『영화로서의 영화』 북토크 직후에 찍은 것이다. 선생과 형의 아들, 그리고 내가 같은 프레임에 들어 있다. 이 책은 선생 생전에 이모션북스에서 번역, 출간한 마지막 책이다. 한편으로는, 선생이 영화관 필름포럼을 낙원상가 4층에서 개관(2005년)해 운영하던 초기, 서른 살 전후의 젊은 친구들을 모아 꾸린 워크숍(2008년)에서 내게 강의를 맡긴 책이기도 하다. 별도의 모집 과정이 없이 지인들을 통해 추천받은 이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어쩐지 ‘지하조직’ 같은 워크숍이었다. 주로 선생 자신이 진행한 이 워크숍에는 나중에 이모션북스에서 출간한 스탠리 카벨의 『눈에 비치는 세계』를 번역한 이두희, 롤랑 바르트의 『미슐레』를 번역한 한석현 등이 참여했다.


사진을 보면 선생과 내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다. 이래서 사진은 거짓말투성이라는 거다. 사진을 보다가 생각해 본다. 선생은 내게 무엇을 주었는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삶을 주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유형의 인간, 영화제나 시네마테크를 찾는 일에 전념하며 연애도 직업도 소홀히 하는 인간, 내가 바로 그런 인간(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한때 선생은 장-마리 스트로브의 말을 내게 훈계처럼 들려주셨는데(글에도 인용하신 적이 있다) “시네필의 90% 정도는 타인의 영화 속에서 찌꺼기를 모으는” 이들이고 “시네필리아란 결국 야심의 결여다.”라는 게 그것이었다. 나는 한예종 영상이론과 전문사 시절 선생의 영화비평워크숍을 함께 들었던 친구인 김미경과 결혼했고, 또 다른 친구인 임경용은 출판사와 서점을 운영하며 《오큘로》를 함께 발간하고 내 첫 책과 최근의 책을 출간했다. 서른 살의 우리는 선생이 프로그래머로 있던 광주국제영화제에서 함께 일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제안을 받아 일하게 되었으며, 김미경은 광주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립 기획을 추진하는 팀에 합류했고, 경험이 전무했던 임경용은 여기서 카탈로그 출판 담당으로 일하다 나중에는 더북소사이어티/미디어버스를 설립해 출판과 서점 일에 뛰어들었다. 장례식에 선생의 마지막 길을 뵈러 간 우리 셋은 가족분들과 선생의 최근 젊은 제자들(또 다른 서른 살 무렵의 청년들)의 배려로 입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입관식이 마무리될 무렵, 마치 거짓말처럼 어디선가 검은 나비가 날아들었다. (나중에 49재를 마치고 위패를 태우는 소지 의식을 할 때도 검은 나비가 날아와 다들 놀랐다.) 

그럼 나는 선생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주고받는다는 개념은 선생에게 낯선 것이었다. 선생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주면 돌려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가져갔다. 선생은 사람들에게서 무언가를 가져가면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주었다. 가령, 도쿄에서 열린 드레이어 특별전을 보러 가서 내가 구입했던 도록은 공항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내 짐들을 살피며 “어? 이건 내가 좀 봐야겠다.”고 말하는 선생의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토론토에 출장을 가서 구입한 페데리코 펠리니의 <진저와 프레드> DVD도 마찬가지의 운명을 겪었다. 한때 TCM(24시간 내내 1930년대와 1940년대의 미국영화를 주로 방영했던 터너클래식무비는 한국 케이블방송 출범 이래 최고의 채널이었다)에서 부지런히 비디오테이프에 녹화해 두었던 숱한 영화들도 마찬가지다. 이 가운데 돌려받은 것은 하나도 없다. 아마 지금쯤은 파주의 어느 창고에 있을 것이다. 대신 선생은 불쑥 이런저런 책을 읽어보라며 건네 주기도 하고 때로는 메일로 보내기도 했다. (선생이 번역한 가와무라 미나토의 2016년 저작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벨상을 받을 것인가?』 미출간 원고가 아직도 내 컴퓨터에 있다.) 때로는 이것은 꼭 보라며 영화에 직접 만드신 자막을 넣어 보내실 때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등가교환은 없었다. (돌려)주고받는 대신 이것을 주고 저것을 가져가고, 이것을 가져가고 저것을 줄 뿐이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 가치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가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선생은 내가 한국에서 만난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보다 더 반자본주의적인 인간이었다. (누군가 선생에게 건물을 살 돈을 주면 아마 그 돈으로 상영 프로그램 수십 개를 꾸리거나 서점을 열 궁리를 하셨을 거다.) 그러던 선생이 내게 딱 한 번, 내가 가져온/빌려온 것을 돌려달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미셸 클레이피와 에얄 시반의 3부작 다큐멘터리 <루트 181: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여행의 편린들> DVD가 그것이다. 나는 선생이 이 DVD를 구입하시자마자 가져와서/빌려와서 보고 무척 마음에 들어 전주영화제에서 상영한 적이 있다. 나는 반은 농담으로, 반은 진담으로, “선생님께서 가져가신 제 OOO을 돌려주시면 저도 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선생은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아니, 이 새끼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걸 돌려드리기도 전에 이렇게 세상을 떠나고 마셨다. 결국 우리 사이에 거래(deal)는 한 번도 성립되지 않았다. 거래는 정치를 파괴하고, 우정을 파괴하며, 시네필리아를 파괴한다. 이것은 내가 우편배달부의 삶에서 얻은 네 번째 가르침이다.


비인격적/비인칭적인 것의 중요성에 대하여


『영화도둑일기』의 한민수 작가에게서도 사진을 한 장 전해 받았다. 임재철 선생께서 남긴 것들을 정리하다 찾은 것이라고 한다. 2008년 초에 찍은 것이다. 아주 익숙한 가르침의 현장이다. 선생을 처음 개인적으로 만난 것도 패스트푸드점이었고 가장 자주 이야기를 나눈 곳도 패스트푸드점 아니면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선생의 강의나 강연은 한 주제로 깊이 파고드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나의 화제에서 다른 화제로 불쑥 넘어갔다가 이내 또 다른 화제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사적인 대화에서라면 이 전환은 때로(라기보다 종종) 듣는 이를 피로하게 만들 정도로 일탈의 선을 그리곤 했지만, 강의나 강연에서는 신기하게도 어느새 원래의 주제로 돌아와 있곤 했다. 여하튼,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선생의 가르침은 하나의 주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주제들을 가로지르는 움직임 속에서, 혹은 주제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곤 했다. 그런 가르침 가운데 가장 내게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비인격적/비인칭적(impersonal)인 방식으로 인간적 개념들을 다시 생각하는 일의 중요성이다. 학부에서 물리교육을 전공하고 20세기의 영미 분석철학 저작들에 심취해 있던 내게 대학원에 진학해 생경한 인문학 이론들(당시의 내게는 어떤 식으로도 도무지 ‘이론’처럼 여겨지지 않았고 현학적인 잡설로만 비쳤던)을 습득하는 일은 만만치가 않았다. 나는 주로 인문학 쪽 배경을 지닌 동년배 평론가들에 비해 현저히 그 분야의 독서량이 적다고 느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 선생이 특유의 말투로 말씀하신 것을 흉내 내어 보면 이런 식이다. “야, 그걸 가지고 뭘 고민하냐, 이놈아. 무의식, 의지, 욕망 이런 걸 자꾸 개인적/인간적으로 생각하려 드니까 그 책들이 이해가 안 되는 거야. 나의 무의식, 나의 의지, 나의 욕망, 나의 정념, 나의 지각, 나의 이데올로기, 나의 권력, 나의 행동 이런 게 다 개소리고 망상이라는 게 20세기 사상의 발견인 건데, 그걸 염두에 두지 않으니까 그렇지. 인간적 개념들을 다 비인칭적/비인격적으로 바꿔서, 인간적 소유격을 쓸 수 없는 개념이라고 생각해 봐…… 밥이나 먹으러 가자!”

선생이 쓰신 글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은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2003년 12월 11일~12일)에서 발표하신 「오즈 야스지로의 반(反)휴머니즘」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 나타나는 비인칭적이고 탈중심적인 시선에 대해 논한 이 글은 21세기 한국 영화비평의 걸작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실 무렵 선생은 직접 글을 타이핑해 쓰는 일을 좀 꺼리시곤 했다. 선생은 심포지엄에서 발표할 주요 내용을 메모한 노트를 들고 나를 앞에 앉혀 두시고는 흡사 ‘과외’를 하듯 강의를 하시며 그걸 녹음한 파일을 문서로 정리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정리한 문서 파일을 드리자, 이번엔 사무실 컴퓨터 앞에 나를 앉으라고 하시고는 바로 등 뒤에 앉아서 “음, 여기는 이렇게 고쳐라. 거기는 무슨 단어랑 무슨 단어 사이에 이렇게 써라……” 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문장을 고쳐 나가셨다. 말하자면 나는 선생의 비인격적/비인칭적인 자동기계가 되었던 셈이다. 2004년에 광주국제영화제에서 열린 특별전에 맞춰 펴낸 『장 마리 스트라우브/다니엘 위예』에 수록된 선생의 글 「스트라우브-위예의 세계로의 입문」도 이런 식으로 해서 완성한 것이다. 이런 사정을 읽고 나면 어떤 권위적인 작업 현장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실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항상 다가가고 싶었던 어떤 글쓰기가 이루어지는 현장을, 이렇게 그 한복판에서 비인격적/비인칭적 자동기계가 되어 체험해 본다는 건 쉽게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다.

나중에 나는 임경용 미디어버스 사장과 《오큘로》를 창간하고 웹사이트를 만들면서 일본에서만 출간된 선생의 글 「오즈 야스지로의 반(反)휴머니즘」을 웹사이트를 통해 2016년에 한국에 처음 공개했다. 내가 그 글을 타이핑한 당사자라 원고 파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생께는 허락을 구했다기보다는 정중하게 ‘통보’를 드렸다. 내가 선생께 가한 작은 ‘복수’였다고나 할까? 선생은 전화로 무척 화를 내셨지만 글을 내리라고 하시지는 않았다. 이 글은 《오큘로》 웹사이트에 올린 것 가운데 (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이들이 읽은 글이다.


비평적인 것에 대하여


임재철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오랫동안 소식을 주고받지 못했던 몇몇 분들과 연락하거나 만나게 되었다. 모두 선생을 통해 알게 되었던 분들로 선생의 부고를 듣고 연락해 오셨다. 대부분은 딱히 영화계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아니다. 이런 분들과 선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생전의 선생이 다른 이들에 대해 그러셨듯 주로 선생에 대해 험담하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선생은 어떤 사람과 조금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면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 들려주시곤 했다. 금정연 작가가 추도문에 썼듯, “국제정치, 축구, 미국과 프랑스와 일본의 대학 제도, 속류 사회학, 문학, 관계의 역학, 개인주의, 그리고 영화 조금”을 비롯해, 이런저런 개인적인 사업 구상까지 말이다. 그런데 생전의 선생과 교류했던 이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하며 서로 놀라게 되곤 한다. 선생은 사람들을 만나 온갖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모두에게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았다. 사정이 이런 까닭에, 선생을 다른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이는 십중팔구 착각에 빠져 있는 셈이 된다. 선생은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이곳에 저곳의 소식을 전하고 저곳에 이곳의 소식을 전하곤 했지만, 이곳과 저곳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 하는 법은 없었다. 나는 선생의 말과 글보다도 바로 이 간극에서, 이 간극을 오가는 움직임에서 어떤 자세를 배우려 했던 것은 아닐까. 다시 금정연의 말을 빌리자면, “선생님이 내게 가르쳐준 건 지식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그 방식을 비평적 자세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문득 오래전에 쓴 「영화비평의 ‘장소’에 관하여」라는 글을 꺼내 읽어보았다. 《영화언어》 2003년 겨울호에 실린 이 글은 내가 갓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쓴 것이다. 이 글에는 적잖은 사람의 이름이 나오지만 선생을 언급하는 부분은 없다. 딱히 선생이 쓰신 어떤 글을 인용하지도 않았다. 딱히 선생이 들려준 말을 참고해 쓴 부분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도, 한예종 전문사 과정에서 선생의 영화비평워크숍 수업을 듣고, 선생이 프로그래머로 있던 광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램팀에서 일하고, 선생이 대표로 있던 서울시네마테크에서 칼 드레이어 회고전 등을 꾸리는 일에 참여하는 등 선생과 함께 있으면서 배운 자세 내지는 방식이 강렬한 다짐처럼 글에 새겨져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런가 하면, 글의 마지막 문단을 읽으면서는 선생에 대한 조사(弔詞)를 그때 미리 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이제 나는 이 글을 하나의 헌사로서 선생께 드리고 싶다. 선생의 가르침대로, 받은 것을 돌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받은 적이 없는 것을 돌려드리는 것이다.

“비평가는 어디든 정주할 자리를 찾아 자신만의 집을 짓고 거기 안일하게 머물며 거짓 열광으로 들뜬 발화만을 내뱉는 대신, 장소들 사이를 오가며 먼 곳의 소식을 전하는 배달부가, 장소들을 움직이고 교통하게 만들고 중첩시키는 비평적 몽타주의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우리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린 그저 또 다른 장소를 찾아 총총히 길을 떠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