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3

플랫폼에서 / 영화관, 그토록 위험한 장소

 

※ 나는 격월간 사진잡지 《보스토크》에 '스톱-모션'이라는 제목으로 3호(2017년 5월 발행)부터 26호(2021년 3월 발행)까지 사진과 영화 사이에서 움직이는 글들을 썼다. (이 글들은 전체적으로 수정하거나 보완하고 연재 당시와는 다른 흐름으로 새롭게 구성하여 추후 책으로 묶어 펴낼 생각이다.) 그리고 《보스토크》 27호(2021년 5월 발행)부터는 '영화의 장소들'이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연재를 시작했다. 이 연재글들은 이전에 썼던 영화평들과는 다소 다른 형식을 취할 예정이라, 그 이유를 밝히는 서문 격의 글인 「플랫폼에서」로 연재를 시작했다. 아래는 이 글과 28호(2021년 7월 발행)에 실린 「영화관, 그토록 위험한 장소」를 묶은 것이다.

    


플랫폼에서


영화의 장소란 무엇인가? 


‘의’라는 조사는 그 쓰임새가 너무도 다양해서 그 앞뒤에 놓인 낱말들이 서로 행사하는 힘을 어림해 본 다음에야 비로소 그 기능이 드러나게 된다. ‘나의 책들’이라는 표현에서 ‘의’는 책들이 나에게 속한 것임을 가리키지만 ‘나의 친구’ 또는 ‘나의 연인’이라 말하면서 ‘의’를 그처럼 소유 관계로 새겨서는 곤란하겠다. 어디 그뿐인가. ‘나의 주인’이라고 하면 귀속의 방향이 ‘나의 책들’의 경우와는 아예 정반대로 바뀌게 되니 말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장소라는 어구의 뜻은 우리가 영화라는 말과 장소라는 말에 각각 부여하는 힘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가장 떠올리기 쉬운 것으로부터 출발해 보자. 

영화의 장소는 이런저런 개별 영화들에 빈번히 나오는 특정한 유형의 공간들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장소들은 영화적 재현의 경향이나 속성을 슬그머니 드러낸다. 이런 장소들 가운데는 그 자체로 시대를 암시하는 지표가 되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영화의 초창기부터 이미 매우 특권적인 장소로 거듭 스크린에 모습을 비추곤 했던 기차역 플랫폼은 바로 그 때문에 시대적 지표로서는 그야말로 무용하고 무력하다. 플랫폼이 시대를 암시하는 지표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건 착각일 뿐이다. 역사 여기저기에 걸린 명판, 드나드는 기차들의 종류, 오고가는 사람들의 옷과 소지품, 구내매점 가판대에 비치된 잡화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의 말투와 억양 등속을 살피지 않는다면, 플랫폼 자체만으로는 그것이 어느 시대의 것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영화와 엇비슷하게 19세기부터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인간의 삶에 파고들기 시작한 어떤 공간이 스크린에 비치고 있음을 알 뿐이다. 

그래서일까, 종종 플랫폼이 영화와 깊은 친연 관계에 있는 어떤 곳에 거의 무매개적으로 맞닿아 있는 장소처럼 보이는 것은? 철저하게 무시간적이기보다는 현대라는 시대와 동일시되고, 누구나 그리고 모든 것들이 오고가지만 아무도 그리고 어느 것도 머물지 않는 곳 말이다. 유일하다고야 할 수 없겠지만, 플랫폼이 매우 강력하게 그런 곳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플랫폼이 영화의 장소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영화적 재현의 경향이나 속성을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영화 자체와 나란히 놓인 것임을, 심지어 영화의 존재 가능성의 조건임을 순순히 받아들이겠다고 자인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플랫폼이란 낱말은 본디 프랑스어로 대포를 쏘기 위해 깔아둔 평평한 형태의 판을 뜻하는 것이었다. 영화의 기원적 풍경을 장식하는 두 개의 상징적 이미지가 역에 도착하는 기차와 달에 우주선을 발사하는 대포라는 것은 정말이지 흥미로운 우연의 일치가 아닐 수 없다. 우선 그 생김새부터가 플랫폼은 오래도록 영화적 재현의 물적 조건이 되어 왔던 스크린과 썩 잘 어울린다. 플랫폼이 지면으로부터 위로 솟아 있는 평평한 노대라면 스크린은 벽으로부터 옆으로 돌출해 있는 평평한 가림판이다. 플랫폼과 유사하게, 스크린 또한 어떤 이미지든 그 위를 오고갈 수 있지만 어떤 이미지도 그 위에 머물지 않는 곳이다.


사람들은 종종 영화의 기원이라 하면 움직이는 기차를 떠올리곤 한다. 기차를 타고 가며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보는 행위와 극장에 앉아 스크린 위로 흘러가는 이미지를 보는 행위 간의 유비는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지금이야 풍경이든 이미지든 어느 쪽이나 여간해선 우리의 보기를 촉발하지 않는 지극히 범상한 ‘환경’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플랫폼이라는 영화의 장소로 여간해선 주의가 향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계속해서 교란하는 미혹의 사물이자 현혹의 관념이 바로 기차다. 영화가 갓 탄생했던 때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많고 다양한 기차들이 스크린 위를 가로질렀던 것은,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번연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무언가의 간계였으리라. 그러니 영화에 기차가 출현할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든 전경과 배경의 관계를 바꿔 보려 노력해야 한다. 지각하는 방식에 따라 꽃병으로 보이는가 하면 마주한 두 사람의 옆얼굴로도 보이는 에드거 루빈의 유명한 그림을 대할 때처럼. 

플랫폼은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내리는 승강장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달리는 기차에서 바깥 풍경을 보고 있는 사람의 바로 눈앞에 있는 것, 또 하나의 평평한 형태, 즉 투명한 유리창 또한 플랫폼이다. 이것은 그 투명성으로 인해 카메라로는 직접 찍을 수 없는 플랫폼이다. 물론, 이중노출 같은 매우 단순한 기법을 활용하기만 해도 이 유리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스크린이 되어 그 곁에 있는 인물의 추억과 열망 따위를 거기 펼쳐 보일 수 있다. 다만 이는 일종의 플랫폼으로서 유리창과 스크린의 동종성을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수사적 장치인 탓에 자칫 효과적이기보다는 젠체하는 느낌을 주기 십상이다.

객실 유리창 옆에 앉아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있는 인물을 카메라가 포착할 때, 유리창에 비친 그의 얼굴까지 넌지시 함께 담아내곤 하는 것은, 이처럼 반영에 기대지 않고서는 자신의 존재를 알릴 길이 없는 저 투명한 플랫폼을 잠시나마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차 여행 도중 깜빡 잠들었던 인물이 깨어났을 때, 왜 유리창은 그토록 자주 서리나 성에로 덮여 있는 것이겠는가. 객실 유리창을 옆에 두고 마주앉은 두 사람 사이에서 대화가 시작되곤 하는 것은, 우리의 주의를 그들의 대화로 이끎으로써 저 투명한 플랫폼을 서둘러 다시 감춰야 하기 때문이다. 

플랫폼을 기차와 관련된 공간이나 사물과만 결부시켜 생각할 필요도 없다. 전경과 배경의 관계를 바꿔 보는 데 익숙해지면 이토록이나 다양한 플랫폼들이 스크린에 등장했던가 하고 깜짝 놀라게 된다. 대중에게 공개된 최초의 영화는 일을 마치고 공장에서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 공장 정문 앞의 공터 혹은 광장, 많은 이들이 오고가지만 누구도 여기 머물지 않는다. 일터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느긋한 발걸음으로 퇴근하는 이는 없는 법이라, 심지어 무엇에라도 쫓기는 듯 다들 걸음이 바쁘다. 이 필름과 함께 공개된 것들 가운데는 프랑스 사진협회 회원들이 리옹의 선착장에 도착해 배에서 하선하는 모습을 찍은 필름도 있다. 실내보다는 야외에서, 하나가 아닌 여럿이, 멀어지기보다는 가까워지는 광경을 담아내는 일이 시각적 경이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경험적으로 습득해 활용했음이 분명한 이런 사례들을 하나하나 언급하자면 끝이 없겠다.

어쨌거나 그러한 선택의 결과 영화의 장소가 비로소 모습을 비추게 되었다. 무언가의 도착과 열림, 그리고 카메라 쪽으로 다가와서 이내 프레임 양옆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을 담은 이미지는 필연적으로 스크린에 플랫폼을 출현시키게 된다. 이내 영화는 그 역과정으로도 플랫폼을 출현시킬 수 있음을 일러 준다. 프레임 양옆에서 나와 스크린 한복판으로 걸어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무언가의 떠남과 닫힘을 담은 이미지로도 말이다. 시네아스트 또는 영화 작가란 스크린에서 그만의 도착과 떠남의 방식을, 그만의 열림과 닫힘의 방식을, 한마디로 고유의 플랫폼을 창안하고 변주하는 이를 일컫는 말이다. 이 플랫폼은 지극히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한없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스크린은, 거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조차 너무나도 물질적이다. 


불필요한 오해가 없도록 이쯤에서 미리 밝혀 두자면,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려 하는 것은 영화의 작가들이 아니라 영화의 장소들이다. 그리고, 이미 짐작했겠지만, 영화의 장소들이란 결국 플랫폼들이다.

당분간 우리는 영화와 관련해서라면 작가의 이름도, 심지어 작품의 제목도 일절 언급하지 않으면서 이야기하려 한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솔직히 말하자면, 가능한 일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만큼은 확신하고 있다. 

글머리에서 이미 짚어본 대로, 영화의 장소라는 어구의 뜻은 우리 각자가 영화라는 말과 장소라는 말에 각각 부여하는 힘이 어떤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작가의 이름이나 작품의 제목은 으레 장소 자체의 힘을 가늠하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 예를 들어 서부극에 대해 논하는 자리에서 누군가가 “존 포드의 모뉴먼트 밸리를 떠올려 봐!”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이 강력한 형상은 포드적인 것 아래 서부극의 사막을 귀속시키면서 영화의 장소로서 사막의 사막성 자체를 고찰하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 (다짐이 참으로 무색하게도, 영화에 대해 말하면서 벌써 작가의 이름 하나를 발화하고 말았지만, 예를 들기 위한 것이었던 만큼 양해를 구하고 싶다. 작가의 이름 없이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토록 어렵다.) 

우리가 시도하려는 것은 장소를 장소 자체로 숙고해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장소의 이데아 따위를 추구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우리는 언제나 영화와 더불어서만 장소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즉, 해변이라는 장소에 대해 살펴보는 일은 언제나 영화의 해변에 대해 살펴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해변에 대한 우리의 고찰은 언제나 실제로 존재하는,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존재했던, 구체적인 개별 영화에 등장하는 해변에 대해 살펴보는 일로 출발할 것이다. 당연히 우리의 탐색은 어떠어떠한 영화에 나온 해변 이야기로 그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더불어, 우리의 기획이 온전한 것이 되려면, 영화라는 해변, 그리고 영화가 존재하게끔 하는 조건으로서의 해변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며 허용될 수 있는지까지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은 여전히 우리의 기획을 의아하게, 또는 미심쩍게 여길지 모른다. 작가의 이름이나 영화의 제목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어떠어떠한 영화에 나온 장소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뚱딴지같은 소리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우리를 질책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문하겠다. 여덟 그루의 소나무를 가져와 해변 근처에 심었다는 최문한이라는 사람의 이름, 그로부터 연유했다는 송정해변이라는 이름 없이는 강원도 강릉시 창해로의 해변에 대해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고. 오히려 그런 이름들을, 이름들의 역사를 아는 것으로 장소에 대해 알았다고 치부해 버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그저 이름들로 속박되기 이전의 영화의 장소 자체를 감지해 보고 싶은 것이다. 그것도 모든 이름을 배제하기보다는 그저 두 종류의 이름만 언급하지 않기로 다짐하면서. 그것이 스크린에 빛이 투사되는 동안에만 현존하는 일시적인 장소이고, 보고 들을 수는 있어도 만지고 냄새 맡을 수는 없는 장소이며,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영화의 장소일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말이다.

물론 알고 있다. 우리가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은 무척이나 강한 가정이라는 것을. 어떤 장소에 실제로 거주하는 이들, 어떤 장소의 역사에 해박한 이들, 어떤 장소에 있는 사물과 사람 들과 친숙하며 그들의 이름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는 이들야말로 때로는 그 장소에 가장 무지한 자일 수 있다는 가정.

 

왜 이런 가정이 필요한가?

플랫폼-스크린에는 이름이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기억하는가?


영화와 관련해서는 작가의 이름도 작품의 제목도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 이는 그저 최소한의 제약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의 장소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예 어떤 이름도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영화에 나오는 장소들을 언급할 때 그 장소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이야기와 더불어 최대한 상세히 묘사할 작정이다. 이런 묘사를 읽으면서 그것이 어떤 영화와 관련된 것인지 쉽게 떠올리는 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영화가 떠오를 때마다,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혹시 가능하다면, 그것을 망각하라. 때로 우리의 묘사는 하나가 아닌 여러 영화를 넘나들면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럴 때 기억은 당신은 혼돈 상태로 몰고 갈 수도 있다.

영화에 대해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 심지어 그것이야말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장 멋진 글쓰기의 방식이라는 것을 실례로 보여준 이는 소설가 최인훈이다. 그는 20세기를 통틀어 한국어로 된 가장 흥미진진하고 탁월한 영화 이야기들을 썼다. 김수영은 뛰어난 시인이지만 당대에 회자된 명작과 화제작 유람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의 영화 이야기는 대개 실없게 느껴지는 수준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김수영은 영화라는 것을 20세기적 교양을 구성하는 필수불가결한 항목으로 삼지 못했던 한국 문학인, 넓게는 지성인 대부분을 상징하는 인물일 수는 있겠다. 오늘날의 젊은 작가들 가운데는 영화적 교양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이들도 있지만, 종종 그들의 감상 목록은 웹 기반 시네필의 소우주 주변을 맴돈다. 무엇보다 그들은 뭔가 이야기하기보다는 제목과 이름 들을 연상적으로 잇는 보다 동시대적인 작업에 골몰하는 것 같다. 반면, 교육용 영화에서부터 소련의 선전 영화, 그리고 해머 영화사의 고딕 호러까지 아우르는 최인훈의 감상 목록은 진정 우리의 흥미를 돋운다. 게다가 그는 영화의 제목도, 그리고 감독의 이름도 언급하지 않은 채로 영화에 대해 말한다. 그럼으로써 영화 자체를 그만의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작품으로, 나아가 새로운 삶으로 바꿔 놓는다.

여기서 우리가 떠올리고 있는 최인훈의 책은 단연 『서유기』다. 이 가공할 만한 소설은 제목을 알 수 없는 한 교육용 영화에 대한 안내로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저 “고고학 입문 시리즈 가운데 한 편”이라는 것을 알 뿐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비교적 느린 템포를 썼으며 클로즈업을 끊임없이 삽입하였고, 동일 장면의 반복 및 심지어는 영사기의 회전을 중단시키고 중요한 장면을 정물 사진으로 볼 수 있게 운용”한 『서유기』라는 소설 전체가 바로 이 교육용 영화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글쓰기는 『서유기』의 전편에 해당하는 『회색인』에서 다소 제한적이나마 이미 충분히 매력적으로 구사된 것이기는 하다. 거기서 주인공 독고준은 ‘당증’이라는 제목의 소련 영화를 떠올리며 사색에 잠긴다. 최인훈은 이 영화를 월남하기 전 북한에서 보았을 것이다. 남한에서는 오늘날까지 한 번도 상영된 적이 없는 이 영화의 원제와 감독의 이름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가 밝히지 않은 것을 굳이 우리가 나서서 밝힐 필요는 없겠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한 편의 흡혈귀 영화 이야기다. 역시 제목과 감독은 밝히지 않은 채로, 최인훈은 탈식민 상황에 있는 한국 남성 지식인의 드라큘라적 정체성에 대한 사색으로까지 거침없이 대담하게 밀고 나간다. 

소설의 이 부분에는 작지만 의미심장한 트릭이 있다. 1960년에 영국에서 제작된 저 흡혈귀 영화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인 1961년 여름에 서울의 중앙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최인훈이 영화를 본 것도 이 무렵일 것이다. 『회색인』은 1963년 6월부터 1964년 6월까지 잡지 《세대》에 ‘회색의 의자’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1958년 가을부터 1959년 여름까지다. 그렇다면 주인공 독고준이 저 흡혈귀 영화를 보고 사색에 잠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착오로 인해 최인훈의 영화 이야기는 더욱 오묘하고 두터워진다. 

그러니,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기억에 사로잡히지 마라.


우리는 떠올린다. 독고준이 보았을 리 없지만 보았던 저 흡혈귀 영화의 제목과 묘하게 공명하는 제목을 지닌, 우리가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만 보았던 또 한 편의 흡혈귀 영화를. 우리는 이것을 친척 형제나 친구들 없이 영화관에서 혼자 보았던 최초의 영화로 기억한다. 

소프트코어 포르노 영화의 주연으로 한때 명성을 떨쳤던 여배우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에서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흡혈귀로 분한 그녀가 어깨에 자신의 관을 직접 떠메고, 처연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한 모습으로, 한밤중에 어디론가 도피하는 장면. 우리가 최인훈의 흡혈귀론을 처음 읽었을 때 머리에 떠올린 것도 바로 이 장면이었다. 영화에 실제로 이 장면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여하간, 금지된 영화를 홀로 보는 행위를 비로소 감행한 탈유년 시기의 두려움과 죄책감, 그리고 약간의 들뜬 기분과 공명하는 장면이었다. 이 싸구려 영화는 30대 초반부터 이미 거장이라는 칭송을 듣기 시작한 걸출한 영화감독의 조카인 스물여섯의 청년이 만든 데뷔작이었다. 몇 년 후 그의 삼촌은 그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엄청난 예산과 스타급 배우들을 동원한 흡혈귀 영화를 만들게 된다. 이 영화는 영화관 자체를 영화의 장소로 숙고하기 위한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영화관, 그토록 위험한 장소



영화 카메라가 즐겨 찾는 장소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영화관이다. 

영화가 탄생한 이래 지금껏 스크린에 비친 장소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그 가운데 영화관보다 훨씬 자주 비친 장소 또한 적지 않다. 누구나 금방 떠올릴 수 있을 거실이나 골목길만 해도 그렇다. 이처럼 너무 흔하고 평범해서 그 자체로는 즉각 의미화되지 않는 장소야말로 기실 영화가 움직이기에 가장 좋은 곳이기는 하다. 그런데 정작 흥미로운 방식으로 다루기는 쉽지 않아서 거실이나 골목길을 영화적으로 운용하는 방식만 눈여겨 봐도 얼마나 숙련된 감독인지 가늠해볼 수 있을 정도다. 대개의 영화에서 거실이나 골목길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장면이 전환될 때나 보이는 기능적인 매개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범용한 연출자들은 제대로 다루기가 까다로운 곳인 만큼 얼른 잠깐만 보여주고 넘어가는 수작을 너도나도 부린 결과지만 말이다. 서둘러 지하실이나 창고로 향하거나 계단이라도 동원하지 않으면 그들의 무능은 금방 탄로가 나고 말 터이다. 

영화관은 거실이나 골목길과 성격이 전혀 다른 장소다. 번잡한 설명이 없어도 필요하면 언제든 넘어갈 수 있는 지하실과 창고와 계단이 잇대어진 장소기도 하다. 이는 결코 중립적인 장소가 아니어서 영화 속에 영화관이 등장하면 관객은 이를 무언가 의미심장한 장치로 여기기 마련이다. 영화관을 단순히 스크린에 몇 차례 보여주는 일만으로도 별다른 노력 없이 자기반영적 또는 자기성찰적 작품이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영화 속의 영화에서 벌어지는 일과 영화관에서 벌어지는 일을 제법 상관적으로 엮어 놓으면 그런 인상은 한층 강화될 것이다. 이런 편리함 때문인지 영화관은 도무지 가망 없는 연출자들이 만든 실없는 영화의 무대로 곧잘 활용되곤 했고 또 여전히 그러하다.

1990년대 비디오 문화의 한복판을 통과해온 가련한 세대에 속하는 우리는 이런 영화를 떠올린다. 얼굴을 반쯤 가리는 금속제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사내가 거리에서 나눠주는 시사회 초대권을 받은 사람들이 새로 개관한 메트로폴이라는 영화관에 모여든다. 이후 영화는 관객들이 하나둘씩 좀비로 변하거나 살육되는 광경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연출자는 시사회 관객들 가운데 맹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각본상의 기막힌 설정조차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할 만큼 무능했지만, 적어도 그 맹인의 통찰력 있는 발언을 남겨둘 정도로는 충분히 야심적이었다. 상영 중인 공포영화가 문제의 원인이라 생각하고 영사실에 난입해 필름을 망가뜨린 후 의기양양해 있는 어느 사내가 말한다.

─ 이젠 저 빌어먹을 영화가 더이상 우리를 해치진 못할 거요.

맹인은 말한다.

─ 영화가 아니라 영화관이에요. 사람을 죽이는 건 이 영화관이라고요!


영화관이 그런 거라니까요.

원인은 자신이 아니라 영화관에 있는 거라고, 눈먼 영화는 고백한다. 정말이지 이 고백은 너무 솔직해서 어처구니없게 여겨질 정도다. 영화가 자신의 무력함을 이렇게 인정해버려도 괜찮은 건가?

사람들은 보통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한다. 영화가 날 사로잡았어, 영화가 너무 별로야, 영화 정말 소름 끼치더라. 그런데 영화가 고백한 대로라면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영화관이 날 사로잡았어, 영화관이 너무 별로야, 영화관 정말 소름 끼치더라.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의 내면에서 활동하는 모든 정동은 영화 자체보다는 영화관을 통해 활성화되는 것이 아닐까? 좀더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영화의 역량이라고 믿는 것은 사실 영화적 환경의 역량이 아닐까?

굳이 이를 실험을 통해 검증하겠다고 하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무엇을 독립변수로 삼고 무엇을 통제변수로 삼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합의하기가 수월하지만은 않을 터다. 예컨대, 전국적 체인망을 갖춘 멀티플렉스와 구식의 단관 영화관은 그 건축적 구조보다도 지각의 측면에서 차이가 큰데, 스피커가 아닌 다른 곳에서 나는 온갖 소리까지 독립변수로 고려한다면 감각 소음 데시벨은 어느 정도로 할 것이며 냄새 요인은 어떤 성분들로 구성해 조절해야 할까? 게다가 이 실험의 핵심적 종속변수인 정동은 대체 어떻게 측정한다는 말인가?

이런 실험을 실제로 수행한 사례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하간, 영화만을 놓고 보면 두 개의 서로 다른 입장이 경합을 벌여 온 것만은 분명하다. 

영화의 무력함을 실토하면서 영화관의 힘을 강조하는 경우, 당연한 일이지만 영화 속 영화관의 스크린에 비치고 있는 영화의 수준은 대부분 졸렬하기 짝이 없다. 영화 속에서 귀신이나 악령이 들린 영화로 지목되는 것들은 졸작이거나 조잡한 기록물 또는 스너프 필름 따위다. 메트로폴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이름 모를 공포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영화 속 영화 자체가 연출자의 무능을 숨김없이 폭로하는 자학적 패러디로 고안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물론, 이 무능한 연출자는 영화 속의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가 졸렬할수록 영화관 자체의 영향력이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라는 당치도 않은 핑계를 들먹일 수도 있다. 그의 카메라가 번번이 스크린 앞을 벗어나 영화관 건물 구석구석을 지하에서 옥상까지 부지런히 누비고 다니는 것도 그러고 보면 수긍할 만한 일이다.

이와는 극단적으로 다른 입장에서 만들어진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려본다. 시사회 초대권을 받고 찾아간 영화관에서 형편없는 영화를 보게 된다는 설정은 앞서 떠올려본 공포영화와 같다. 다만, 그 영화에서와는 달리 여기서 관객들은 뭔가 굉장한 것이라도 보고 있는 양 법석을 떨지 않는다. 그저 무표정하게 앉아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는 상영 도중 돌연 감상을 포기하고 미련 없이 자리를 뜬다.




이 영화의 연출자에게 영화관은 그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시사회가 시작된 이후로는 그는 고작 두 종류의 쇼트─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 그리고 영화 속 영화 자체─만 사용한다. 나란히 한 방향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총격전 장면이 서로 몽타주되고 있을 뿐, 영화관 자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스크린이나 빛이 새어드는 출입구를 보여주는 그 흔한 쇼트조차 없다. 여기서 영화관은 항상 외화면영역에 놓이며 따라서 몽타주의 효과로서만 지각된다.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이 고집스러운 연출자는 속삭인다. 영화관은 핑계라구, 우리는 오직 영화와 대면할 뿐이야.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관을 소재로 삼은 영화는 대개 이 두 극단 사이에 위치한다. 감독으로서는 이처럼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편이 유리하기도 하다. 영화관을 매개로 영화문화에 대해 논평하다가 필요에 따라 이런저런 영화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풀어 놓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카메라를 영화관으로 가져가기만 해도 뭔가 잘 풀릴 것 같은 기분, 이런 유혹에 저항하기는 여간해선 쉽지 않다. 그저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영화에 등장하는 영화관 장면만을 한데 모아 구성해도 장편영화 길이의 비디오 에세이 한 편은 너끈히 만들 수 있을 만큼 역사적 사례가 풍부해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관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신중한 감독이라면 카메라를 들고 선뜻 영화관으로 달려가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영화관에서 영화의 가능성을 찾느니 그는 차라리 다른 곳을 물색할 것이다. 영화관은 그런 목적으로 찾을 수 있는 최후의 장소다. 문자 그대로라면 ‘영화의 집(館)’을 뜻하는 명칭이 무색하게도, 종종 이 위험한 장소는 카메라를 들고 그곳을 방문한 이들과 그들의 영화를 한꺼번에 궁지로 밀어 넣기 일쑤다. 이 장소는 아직 탄생하지 않은 영화의 목숨을 대가로 해서만 자신의 몸을 보여주는 곳이다.

적잖이 경력을 쌓은 영화감독이 갑작스레 자신의 영화에서 영화관을 보여주면 우리는 불안해진다. 저 고집스러운 연출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떠올려본 영화는 그의 열 번째 연출작이다. 이 작품 이전에 그는 자신의 영화에서 영화관의 풍경을 보여주려 한 적이 없다. 그는 화가로 경력을 시작했지만, 자신의 영화에서 화가를 등장시킨 것은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그는 통상 절제와 금욕의 시네아스트로 알려져 왔지만, 이 영화에는 이례적이라 할 만큼 탐미적인 장면들이 있다. 그는 평생 딱 한 편의 실패작을 만들었는데, 그건 바로 이 영화의 시사회 장면에서 상영 중인 영화다. 이 영화 속 영화는 그가 평생을 두고 추구한 영화적 형식의 꼭 반대편에 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실패작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그는 자신이 다른 형식의 영화도 만들 수 있는 연출자임을 입증한 셈이 되었으니 말이다.

영화에 영화관이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의미심장한 설정으로 보이기 마련이라, 즉각적으로 관객과 평단의 관심을 끌 만한 무언가를 애타게 찾는 신인 감독에게는 오히려 대단한 유혹이 될 수도 있다. 드물기는 해도, 영화관이 등장하는 근사하고 훌륭한 데뷔작을 만든 이들도 있다. 그들이 품은 야심에 걸맞은 성취를 거두었을 때 그 결과물은 때로 경이롭기도 했지만,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그들은 이후의 경력에서 다시는 데뷔작에 버금가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거나, 예술가로서 명성을 이어간다 해도 지독한 과작의 작가로서만 그럴 수 있었다. 그들은 영화를 위해 영화관의 힘을 잠시 빌리는 대가로 자신들의 경력 전체를 저당잡힌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관의 유혹은 끈질기다. 특히 갓 들뜨기 시작할 무렵에 있는 연인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 이만한 곳이 없다.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모르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영화관은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에게 특권적인 장소로 인기를 누리는 곳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애틋한 마음은 있어도 서로의 눈을 줄곧 마주하고 있기엔 다소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나란히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며 열정 어린 시선의 공명을 오롯이 체험할 수 있는 영화관은, 사랑에 필수적인 긴장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영화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랑에 빠져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연인들은 카메라로 담아내기에 적절치 않다. 둘 가운데 한 사람의 얼굴만 담아내거나, 그렇게 찍은 각각의 얼굴을 번갈아 교차시키거나, 둘을 한꺼번에 포착한다 해도 기껏해야 그들의 옆모습을 보여주는 게 고작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영화는 나란히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연인들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인 우리를 연인들의 시선 한가운데 꼭짓점에 두는 묘수를 고안해냈다. 이는 현실에서라면 우리가 도저히 자리할 수 없는 위치, 즉 스크린의 시점이다.




하지만, 나란히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는 연인들을 보여주는 일에도 대가가 따른다. 영화관의 연인들이란 영화적으로 불길한 징조다. 이런 장면은 그들의 미래에 파국이 놓여 있음을 넌지시 알린다. 영화관 나들이 중인 한 부부를 보자. 이들은 얼떨결에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지만 막 사랑에 빠진 커플이나 다름없다. 나중에 죽음의 그림자가 아내를 덮쳤을 때 우리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바로 이 장면이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남편과는 달리 아내가 이상하리만치 줄곧 경계의 시선으로 스크린을 노려보았던 것은 이 불길한 미래를 예감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런가 하면, 영화 상영용 스크린을 야외에 설치하는 광경을 보고 함께 미소짓던 젊은 커플의 모습도 떠오른다. 물론 이것은 제대로 된 영화관도 아니다. 아직 영화는 시작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스크린을 바라보며 잠시 나란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모종의 위험이 그들에게 파고들기엔 충분하다. 이토록 맑은 얼굴로 영화의 도래를 기뻐하던 그들은, 결국 오래 함께하지는 못할 것이다. 




문제는 영화인가 영화관인가? 

우리는 다시 메트로폴 영화관에서 맹인이 내뱉은 말로 되돌아온다. 그렇다면 영화는 발명되었지만 아직 영화관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어떨까? 메트로폴 영화관을 무대로 한 공포영화가 한국에서 비디오로 출시─재킷에는 “악령의 메트로폴 극장이 죽음의 광기를 부른다”고 씌어 있다─되어 가난한 문화의 영화광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던 무렵, 오랫동안 침체기에 있었던 한 노장이 오래전에 떠나온 공포영화에 다시 손대면서 떠올린 아이디어는 이런 것이었다. 궁지에 몰리긴 했어도 영화관의 힘을 직접 빌려 영화적 갱생을 꾀하기는 어쩐지 꺼림칙하게 느껴졌던 것일까?




그는 영화가 아직 그야말로 장터의 구경거리였던 시절로 되돌아간다. 사람들은 영화가 상영(이라기보다 전시)되고 있는 천막의 이곳저곳에서 앉거나 서서 산만하게 구경하고 있다. 달려오는 기차를 찍은 필름도 있고 제법 음란한 소재를 다룬 듯한 필름─사진의 발명 이후 시각 매체의 역사는 포르노그래피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게 된다─도 있다. 구경꾼들 가운데는 드라큘라 백작과 전생에 그의 아내였던 미나라는 여인도 있다. 이들의 교제는 갓 시작되었지만, 한편으로 이들은 아주 오래된 연인이기도 하다. 나란히 서서 스크린을 바라보는 일의 위험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그들은 이내 스크린으로부터 눈길을 돌려 다른 곳을 본다. 불멸의 이념에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드라큘라는 자신과 시네마토그래프가 동종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용없다. 파국은 어김없이 그에게 닥칠 것이다.

영화관을 통해 우리는 영화적 장소의 사건성을 여실히 깨닫는다. 혼자가 아닌 둘이서, 나란히 앉거나 서서, 아주 잠깐 스크린을 바라보기만 해도, 그 순간 영화관은 어김없이 출현하고야 만다. 영화관은 일군의 설비를 갖춘 건축물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유령적인 무언가를 공동으로 응시함으로써 촉발되는 위험한 사건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영화는 그러한 사건의 봉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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