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계간 《자음과모음》 2025년 가을호에 실렸던 것이다.
말짓기는 비개인적 신화도 아니고 개인적 허구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실행 중인 말이자 말의 실행으로,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를 통해 사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것을 분리하는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스스로 집단적 언표들을 생산해 낸다.─질 들뢰즈, 『시네마 II: 시간-이미지』 [1]
올해로 탄생 백 주년이 되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오늘날의 우리를 위해 남긴 듯한 말로 시작해 보자. 모두를 위한 유언(遺言) 혹은 유언(幽言). 여기 인용한 말에는 그 특유의 유토피아적 비전이 담겨 있다. 도래할 영화를 향한 미래완료 시제의 언설이랄까. 그는 어쩐지 낡은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온전히 실현된 적은 없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두 권으로 이루어진 『시네마』는 어떤 측면에서 고려해도 『차이와 반복』이나 『의미의 논리』에 견줄 만한 들뢰즈의 주저는 아니다. 하지만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이런 비전을 감지하고 그 현재적 의의를 가늠해 보는 재미가 적이 쏠쏠한 책이다. 특히, 아직 도래하지 않은 영화를 그가 보았던 과거와 당대의 영화들을 통해 상상적으로 스케치하고 있는 듯한 부분들이 그렇다. 확실히 이 책의 재미는 그 불완전한 예지적 부분들에 있다.
그 가운데 《자음과모음》 이번 호의 주제인 작가성과 관련해 잠시 되살려보고 싶은 것은 ‘말짓기’에 대한 논의가 펼쳐지는 부분이다. 대단히 모호하고 미심쩍기 짝이 없음에도 여하튼 널리 알려진 ‘시간-이미지’ 같은 개념에 밀려 비교적 덜 주목받기는 했지만, 소수자 정치학과 긴밀히 얽힌 형태로 예술적 주체성을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신화와 허구를 넘어서는 새로운 이야기하기의 양식을 모색하려는 들뢰즈의 정치미학적 야심이 담긴 개념이 바로 말짓기다. 『시네마』 2권의 번역자인 이정하가 ‘이야기 꾸며대기’라고 옮겼던 이 개념의 원어는 ‘fabulation’으로, 본디 이는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한 이야기, 즉 ‘fable’를 지어내는 행위를 뜻한다. 다만, 이것을 들뢰즈는 어떤 단일하고 고립된 기원으로서의 작가가 아니라 인물과 더불어 서로 물들고 물들이면서 생성되는 중재자(intercesseur)로서의 작가─이런 중재자를 통해 ‘나’는 언제나 타자가 된다─와 결부된 자유간접화법적 실천으로 보고 있다. 종종 이런 실천은 딱히 극영화도 아니고 다큐멘터리도 아닌, 그렇다고 해서 안이하게 에세이적이라고 부르거나 실험영화로 분류하기도 어려운, 독특한 영화적 이야기체를 산출해 내곤 한다.
말짓기 개념은 현대적인 정치영화에 대한 들뢰즈의 구상에서 실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주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활발히 전개되었던 영화에서의 정치적 모더니즘 논의들과는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 그의 정치영화 논의는 민중의 부재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민중은 부재하기 때문에 재현의 대상(리얼리즘)도 아니고 비판의 대상(모더니즘)도 아니다. 오히려 민중은 영화를 통해 생성되어야 한다. 들뢰즈는 관람이라는 제의적 행위를 통해 ‘집단적 신경감응(collective innervation)’에 이르는 민중을 그려본 벤야민의 편에 서는 것도 아니다.[3] 벤야민의 아이디어가 매력적이긴 하지만, 이를테면 1980년대 한국의 비제도권 영화인들을 사로잡았던 유형의 소박한 영화운동론적 실천으로 언제고 치달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보기에 들뢰즈의 논의에서 민중의 부재는 일종의 공리적 결정이다. 따라서 우리는 들뢰즈가 주장하는 바의 근거를 따질 수는 없지만 교훈은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민중을 영화의 외부에 상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 민중은 영화를 통해 생성되어야 하는 만큼 영화의 내부에서 생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커다란 동질적 집단을 형성하지 않는 방식으로 영화의 내부에서 생성되는 민중은 소수집단, 즉 마이너리티일 수밖에 없다. 소수집단의 유형은 무척이나 다양하겠지만 그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현대적 정치영화는 필연적으로 파편화와 파열 위에 구성될 수밖에 없다. 이는 분명 한계이지만 대신 뚜렷한 장점도 있다. 커다란 동질적 집단 내부에서라면 결코 공적인 의제가 되지 못했을 사적인 문제가 소수집단 내에서는 곧바로 정치적인 것이 된다. 물론 이는 소수집단의 바로 그 양적 소수성으로 인해 생기는 질적 특징이다. 이른바 ‘양질전화(量質轉化)’는 양적 다수성(축적)만이 아니라 소수성(분열)을 통해서도 사유할 수 있다.
현대적 정치영화의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들뢰즈는 (소수집단과 관련해 카프카의 문학이 주는 암시를 염두에 두고) 중재자로서 작가의 형상을 스케치하고 있다. 자유간접화법의 주체로서 중재자는 특정한 개인에게 귀속되지 않는 민중의 신화를 들려주는 자(인류학자)도 아니고, 철저하게 개인적인 허구를 들려주는 고독한 자(창작자)도 아니다. 들뢰즈의 말을 직접 옮기자면,
허구적이지 않은 실제 인물을 취해 그들 스스로가 ‘허구짓기’, ‘전설짓기’, ‘말짓기’를 할 상황을 만드는 (…) 작가는 자신의 인물들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야 하고 인물들 역시 작가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이중적 생성이다.[4]
인물들은 작가의 시각-담론 속에서 스스로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작가는 인물들의 시각-담론 속에서 간접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게 된다.[5]
현실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실제 인물이 스스로 허구와 신화를 말짓기하는 동안 작가와 민중이 동시에 이중적으로 생성되는 영화, 이것이 바로 현대적인 정치영화다. 이런 기획 자체는 분명 매력적이지만, 말짓기와 관련해 들뢰즈가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고 있는 몇몇 중요한 문제들과 함의들을 짚어볼 필요도 있다. 이것을 들뢰즈의 공리와 정리들로부터 유도되는 따름정리들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 가운데 몇몇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 말짓기의 과정은 중재자의 역할 없이는 결코 저절로 일어나지 않을 터다. 이유는 단순하다. 중재자가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영화라는 과정을 개시하기 전에 소수집단으로서 민중이 외부에 선재(先在)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야기의 주체 또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영화적 말짓기의 일반 이론 내지는 방법론을 구성할 수도 없다. 다양한 소수집단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들은 서로 파편화되고 분열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면, 각각의 소수집단에 상응하는 민중의 형상과 말짓기의 양상 또한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태여 영화적 말짓기의 일반적 특성을 헤아리려 하기보다는 실제 작품들 하나하나와 대면하면서 각각이 그려내는 독특한 말짓기의 작은 소용돌이들을 감지해야 한다.[6] 또한, 영화와 더불어 생성된 소수집단-민중의 수 이상의 중재자-작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도 받아들여야 한다. 민중이 외부에 선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작가 또한 마찬가지다. 작가는 하나의 작품과 더불어 생성되며, 이렇게 생성된 작가가 다른 작품의 기원으로 작용할 수는 없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그것을 생성을 경화한다는 점에서 작가성의 타락이라 불러야 마땅할 터다.
이런 이유로, 이 글에서 나는 최근에 접한 말짓기의 독특한 사례 하나만을 살필 것이다. 과문한 내가 낯선 이름의 대만 영화감독 소여헨의 첫 장편영화 <공원(公園, Taman-Taman)>(2024)을 보게 된 것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미리 이 영화를 접하고 대단한 신인의 영화라며 추천의 말을 아끼지 않았던 서동진 선생 덕분이다. 선생을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천에서 열리는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 마침 이 영화가 상영되어 요행히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영화는 단박에 범상치 않은 작품임을 감지할 수 있을 만큼 훌륭했다. 그런데 의문이 좀 들었다. 신인 연출자가 비전문 연기자들과의 협업으로 이만큼 능숙한 형식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자 이름 표기 ‘蘇育賢’으로 정보를 찾아보니 그는 미술계에서 활동해 온 지 15년이 넘는 작가였다. 그가 이전에 만든 영상 설치 작품 <화산장(花山牆)>(2013)을 나는 2014년에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서 본 적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때 그의 이름은 대만어식 발음 ‘소여헨(So Yo Hen)’이 아니라 중국어식 발음 ‘쑤위시엔(Su Yu-Hsien)’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지금 내가 정확히 알지는 못하는 이유로, 언제부턴가 그는 자기 이름의 영문 표기와 발음을 바꾼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첫 장편인 <공원>을 내놓기 전부터 이미, 그가 <임시 노동자 숙소(工寮, Gubuk)>(2018)과 <여공들의 기숙사(宿舍, Ký Túc Xá)>(2021) 등의 중편에서 대만에 거주하는 인도네시아 및 베트남 출신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 작업하며 매우 흥미로운 영화적 말짓기의 실천에 도전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7] 이 작품들은 모두 그를 포함해 세 명으로 구성된 ‘당신의 형제 영화사(你哥影視社, Your Bros. Filmmaking Group)’[8]의 이주 노동자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소여헨은 자신의 영화를 ‘워크숍 영화(工作坊电影)’라고 부르는데[9], 작업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고려하면 꽤 그럴듯한 표현이다. 그와 동료들은 대만의 이주 노동자들이나 유학생들을 모집해서 그들과의 공동 워크숍을 통해 시나리오 개발부터 촬영 및 전시에 이르는 전 과정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작업해 오고 있다. 이것은 동시대 미술에서 상당히 보편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 방식을 영화로 끌어온 것이라 하겠다. 이 자체로는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주목할 점은 소여헨의 영화에서 워크숍은 최종 결과물, 즉 전시되거나 상영되는 영화에 이르는 과정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영화의 플롯과 미장센을 이루는 시청각적 구성요소기도 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2018년에 대만 신베이시의 베트남 여공들이 벌인 파업에서 소재를 취한 <여공들의 기숙사>는 베트남 이주민 출신 워크숍 참여자들과 폐공장 내부에 가상의 기숙사 공간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제작되었다. 영화 초반부에는 어쩐지 실제 기숙사에서 촬영한 듯한 느낌도 주지만, 이런저런 잡동사니로 만들어진 ‘기숙사의 신(宿舍之神)’ 같은 설치물이 등장하면서 이곳은 워크숍을 위한 임시 스튜디오라는 것이 돌연 투명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참여자들이 모두 이 설치물을 비롯한 스튜디오 자체를 해체하고 청소를 하고 휴식을 취하고 노래를 부르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난다.
워크숍 참여자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토대로 모종의 역할을 연기하지만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것은 아니다. <임시 노동자 숙소>의 참여자들은 모두 실제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 노동자들로 주말에만 짬을 내어 워크숍에 참여해야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영화 속 설정처럼 경찰을 피해 도주 중인 노동자들은 아니었다. 여기서 그들은 자신의 체험에 기대어 허구적 인물을 만들고 연기하면서 그 인물의 사연을 꾸며댄다. 물론 이런 사실은 관객에게 곧바로 제공되는 정보는 아니다. 조금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일찍이 몽테뉴가 간파한 대로, 어떤 인물을 연기하려 애쓰든 사람은 그런 중에도 항상 자기를 연기하는 것도 사실일 터다. 이 영화의 주요 무대인 도주 노동자 은신처 역시 한 폐공장 내부에 지은 스튜디오다. 그런데 이곳이 실제 은신처가 아니라 스튜디오라는 사실은 <여공들의 기숙사>보다 훨씬 미묘하게 서서히 드러난다. 작은 틈으로 훔쳐보는 듯한 카메라 운용이나 제작진의 모습이 이따금 비치는 등 다큐멘터리적 사실감을 과시하는 뻔한 상투적 기법을 이따금 구사하다가, 결과적으로 이를 워크숍 과정 자체를 촬영하고 있는 상황에 어울리는 기법으로 재정위하는 솜씨도 근사하다. 사실적 기록처럼 보였던 것이 어느새 사실적인 인상을 주는 허구를 연기하는 사실적 존재들에 대한 기록으로 바뀌어 있다.
<임시 노동자 숙소>는 좁은 은신처에 있는 한 명의 인물로 시작해 점점 찾아오는 이가 불어나 십수 명이 한곳에 북적이며 각자가 맡은 인물의 사연을 쏟아내는─막스 형제의 <오페라의 밤>(1935)에 나오는 유명한 선실 장면, 즉 밀항자들, 룸메이드들, 난방 기술자들, 네일리스트, 전화를 쓰러 온 승객, 대걸레질을 하러 온 청소부, 그리고 음식을 가져온 승무원들이 차례로 선실에 들어와 뒤섞이면서 초래하는 대혼란의 장면이 떠오를 정도로 희극적인─말의 홍수로까지 밀고 나간다. 일견 다큐멘터리 같은 외양으로 시작한 영화가 말과 말이 얽히고 중첩되면서 급기야 환상적 부조리극으로 바뀌는 것이다. 막스 형제 영화의 선실에서 뒤섞이는 모든 것은 한없이 무의미해지는 반면, 소여헨의 비좁은 은신처에서 사적인 발화들은 모두 첨예하게 정치적인 것이 된다. 그것도 말의 정치적 내용을 통해서가 아니라 뒤섞인 말소리들이 뿜어내는 강렬한 물질성의 감각을 통해서 말이다. 영화는 인물들이 모두 어울려 펼치는 콘서트로 마무리된다.
파업 노동자를 다룬 기숙사 영화와 도주 노동자를 다룬 은신처 영화에서 서로 다른 형식적 전략을 취하는 데서, 특정한 말짓기를 일반적 방법이나 스타일로 고수하지 않는─즉, 말짓기와 결부된 생성적 작가성을 경화하지 않는─소여헨의 섬세함이 엿보인다. 그 결과, 두 영화를 통해 생성되는 소수자의 형상은 자못 다른 성격을 띠게 된다. 흥미롭게도, 소여헨은 이런 과정을 “우화 이야기 같은 과정(寓言故事一样的过程)”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寓言’이란 바로 ‘fable’에 해당하는 단어임을 고려하면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업을 일종의 들뢰즈적 말짓기로 규정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10] <임시 노동자 숙소>는 워크숍 참여자들이 우화 같은 과정으로 말짓기할 플랫폼을 구상하는 이로서의 작가, 즉 창작자라기보다 중재자로서 작가야말로 가장 영화적인 작가일 수 있음을 보여준 소여헨의 첫 영화다.
소여헨의 첫 장편인 <공원>은 대만 타이난시에 있는 타이난공원에서 두 명의 남성이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영화의 스태프로 보이는 이가 그들 사이에 놓인 탁자에 마이크를 두고 나서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스태프에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으로 봐서 둘은 이 촬영 현장에 이미 꽤 익숙해진 상태로 보인다. “언제 귀국할 거야?” “8월에 가려고.” “난 7월에.” “이 영화는 어쩌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뭐.” 우리는 이들이 대만인은 아니며 이 영화에 출연하기로 하고 적잖은 시간 동안 촬영에 참여해 온 사람들일 거라고 짐작한다. 대화를 나누는 도중 또 다른 스태프가 화면 안으로 들어와 둘 중 하나에게 방충 스프레이 같은 것을 건네주고 다시 사라진다. 얼마 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둘을 포착한 숏으로 전환하고 나면,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거의 10분 가까이 고스란히 보여준다. 우리는 이들이 장학금을 받고 대만으로 공부하러 온 인도네시아 출신 유학생임을 알게 된다. 이 가운데 농부의 아들인 아스리는 박사 과정을 마치고 곧 돌아가 직업을 구할 예정이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하산은 그보다는 조금 더 대만에 머물 것 같다.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공원에는 뉘엿뉘엿 땅거미가 지고 어느새 가로등도 불쑥 켜진다. 화면 밖에서 “됐어요, 고마워요!”라고 말하는 제작진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제 촬영을 정리하려는 것인지 카메라가 흔들리며 이미지가 흐려진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어로 ‘공원들’을 뜻하는 ‘Taman-Taman’이라는 글자가 화면에 나타난다.
밤이다. 둘은 공원의 다른 자리에서 다시 마주 앉아 있다. 그런데 이 밤은 우리가 앞에서 본 장면과 같은 날 밤인가 아니면 다른 날 밤인가? 이 혼란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지속된다. 둘은 며칠 동안 이 공원에서 만나는 것도 같고, 어느 하루 늦은 오후부터 심야까지 이 공원의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대화를 나누는 것도 같다. 대화 내용으로 보면 여러 날에 걸쳐 공원에서 만나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둘의 옷차림은 영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대로다. 여기서 천일 밤의 이야기는 하룻밤의 이야기로도 넉넉히 펼쳐지는 것 같다. 이럴 때 리뷰어나 비평가가 동원하는 가장 편리한 해석은 이들이 유령이거나 적어도 유령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설명은 이 영화에 걸맞지 않다. 왜냐하면 이들은 분명 제작진과의 협의에 따라 카메라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거나 대화 상황을 연기하고 있음이 처음부터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초반부에 등장했던 10분에 이르는 롱테이크 숏 같은 것은 더는 보이지 않고, 다양한 숏이 구사되는 가운데 숏이 바뀌어도 공원에 흐르는 음악은 이어지는 등 제법 극영화적인 데쿠파주와 사운드 몽타주가 어느샌가 영화의 주를 이룬다. 소여헨의 이전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아하, 이번에는 실내가 아닌 공원이라는 실외가 워크숍의 스튜디오인 셈이군!’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물론, 짐작한 그대로다.)
이 영화가 주는 놀라움은 이런 고안이나 설계, 즉 ‘디스포지티프(dispositif)’[11]를 감지했다고 해서 가시지 않는다. 소여헨은 오히려 이를 영화적 미장센을 위한 양식으로 삼는다. 두 사람은 대만에 와서 일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시를 지어 읽기도 한다. 아스리는 말한다.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내 시를 읽어주고 싶어. 타이난공원에서 그들의 만남에 대한 거지.”[12] 그는 대만 정부가 자신들 같은 유학생을 받고 장학금을 제공하는 것은 인도네시아가 대만에 많은 노동력을 제공해 주기 때문임을 지적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타이난공원에 모이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위한 라디오 방송을 구상하는 것으로 뻗어나간다. 공원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돌 모양의 스피커를 보고 착안한 것이다. 한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 노동자 여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어느새 공원 내의 경비 초소로 들어와 그곳을 방송실 삼아 ‘이니 라디오 인니(ini Radio yinni)’, 즉 인도네시아어로 ‘여기는 인도네시아 라디오 방송입니다’를 송출하고 있다. (그들이 앞서 바라보았던 돌 모양 스피커를 인서트 숏으로 한참 보여주고 나서 돌연 경비 초소에 있는 그들의 모습을 포착한 숏으로 넘어가는 편집을 통해, 의외의 놀라움을 주면서도 시간적 연속성을 유지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방송은 공원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들릴 것이고 청취자들이 “오늘 밤 들으신 소리는 이 공원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영화에 대한 너무나도 투명한 은유다. 그것이 기계적으로 송출되는 동안 특정한 장소에 모인 이들에게만 전달되는 일시적 행복의 감각. 물론 실제로 공원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 리 없다. 그러나 이렇게 사실적인 것이 환상적인 것으로 자연스럽게 열리면서 비가시적인 이주 노동의 경험을 마음껏 말지을 시공간 또한 열린다. 공원이라는 장소는 그 시공간을 둘러치는 엄연한 한계이면서 그것을 보호하는 특권적 구역이기도 하다. 이 공원 안의 작은 초소에서, 여름비 내리는 어느 밤, 혹은 어쩌면 첫날과 같은 날의 밤, 하산은 한 청취자가 보내온 편지와 그녀가 지은 시를 읽는다. 청취자라고? 이 방송이 그저 둘만의 유희가 아니었단 말인가? 문득 어리둥절해진다. 하산은 리사라는 이름의 이주 노동자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시로 써서 보냈다는 것을 읽기 시작한다. 정말일까? “제목은 ‘돈을 벌기 위해’입니다. (…) 어둑한 구석에서 내 몸을 꽉 부여잡는다.” 어느 순간, 하산의 목소리에 정체 모를 여성의 목소리가 겹친다. 그런데 이 목소리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녀는 하산이 읽는 구절들을 하나하나 따라 읽는다.
떨면서
힘없이
쑤시는 몸을.
아이는 칭얼거리며 울어댔다.
“엄마… 배고파… 아빠는 어딨어?”
일어나 걸었다.
두 팔로 몸을 꽉 부여잡고.
이때, 아스리는 조용히 짐을 챙겨 일어나 초소를 떠난다. 카메라가 그의 움직임을 슬며시 따라가면 초소 입구 옆에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 가운데 한 여성이 초소로 들어와 아스리의 자리에 앉아 하산을 대신해 시를 마저 낭독한다. 우리가 들은 것은 그녀의 목소리였다. 멀어져가는 아스리의 모습 위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시는 누구의 것일까? 소여헨의 각본에 있는 것일까? 영화 초반부에 그러했듯 이주 노동자의 입장에서 두 사람이 쓴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리사라는 이름을 지닌 이 여성 이주 노동자가 쓴 것일까? 사실 이 질문은 무의미하다. 여기는 영화의 인물들이 작가가 중재자로서 마련한 디스포지티프 속에서 스스로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작가는 이들의 말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그야말로 자유간접화법적 주체성이 명확히 표명되는 순간이다. 시를 다 읽은 리사는 하산에게 “오늘 밤 들려지길 기다리는 많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어요. 긴 밤이 될 거에요”라고 말한다. 어디에? 아마도 그들 곁에, 초소 앞에 줄지어 선 사람들 가운데. 모든 밤과도 같은 하룻밤을 지금껏 아스리와 함께 했던 하산도 “그래요, 밤이 끝나지 않을 수도 있죠”라고 말하고 조용히 자리를 뜬다. 거기 또 다른 여성이 들어와 앉는다. 그녀의 이름은 리스티다. 리사는 하산이 담당했던 라디오 진행자 역할을 맡고 있다. 하산은 아스리와 달리 공원을 떠나지 않고 줄 맨 뒤로 가서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밤은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공원>이라는 영화적 공원은 또 다른 경이를 마련해두고 있다.
<공원>을 보고 꼬박 25년 전에 나온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걸출한 데뷔작 <정오의 낯선 물체>를 떠올리는 건 불가피한 일이다. 그런데 아피찻퐁의 영화가 민중의 경험과 기억에 뿌리를 두면서 그것을 ‘승화(sublimation)’한다면, 소여헨은 그것으로 자신의 작품 전체를 물들인다.[13] 말짓기의 형태와 관련해서도, 종종 아피찻퐁은 <정오의 낯선 물체>에서 효과적으로 활용한 초현실주의적 우아한 시체(exquisite corpse) 놀이에서부터 <태양과의 대화> 프로젝트에 도입한 오늘날의 AI에 이르는 비인칭적 무의식의 장치에 매혹되곤 하지만, 이미 <임시 노동자 숙소>에서 유감없이 보여주었듯 소여헨은 집단적인 것의 주체적 소음을 어떻게든 살려내려 든다. 그렇게 하면서, 서동진이 프레드릭 제임슨을 떠올리며 지적했듯, “주변이라는 것이 (…) 현실의 참다운 면목이 드러나는 두드러진 계기, 즉 알레고리적 징후”임을 보여준다.[14]
하지만, 이 알레고리가 서동진의 바람처럼 개별적인 것을 통해 전체적인 것을 드러내는 알레고리, 즉 세계의 알레고리가 될 수 있을까? <공원>이 탁월한 말짓기의 영화라면 그것은 이 영화를 통해 생성되는 소수집단-민중이 결코 어디에도 어떻게든 통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그러할 것이다. 초소를 떠난 아스리는 밤의 공원을 하염없이 걷고 있다. 아스리를 따라가는 제작진의 카메라 그림자가 그의 등에 비친다. 그의 말이 보이스오버로 들려온다. “좋아요, 마지막 시를 읽을게요. 이 영화의 전체 제작 과정을 나타내는 시요. 이게 끝인 거 같은데… 이젠 거의 끝났죠. 제목은 ‘공원으로’에요.” 그리고 그는 자신이 어떻게 페이스북을 통한 연기자 모집 공고를 보고 이 프로젝트에 지원하게 되었으며 촬영 과정은 어떠했는지 이야기한다. 그러다 보면 아스리는 어느덧 공원을 벗어나 인도네시아의 자기 집(으로 추정되는 곳)에 와 있다. 집 앞에는 스무 명 남짓한 여성들과 아이들이 모여 앉아 있다. 아스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며 카메라 쪽을 향해 더는 따라오지 말라고 손짓한다. 지금껏 영화 <공원>을 통해 형성된 말짓기의 형상이 이곳으로까지 연장될 수 있을까? 이 말짓기와 더불어 공원에서 생성되었던 소수집단-민중은 아스리의 집 앞에 모인 (그리고 집 안에 있을) 사람들로까지 연장될 수 있을까?
들뢰즈를 따르자면, 다른 소수집단-민중은 다른 말짓기를 필요로 한다. 즉, 하나의 공원으로는 불충분하다. 하나의 공원에서 곧바로 다른 공원으로 이어지는 길은 없다. 제임슨을 따르자면, 하나의 주변은 알레고리적으로 세계를 드러낸다. 즉, 하나의 공원이면 충분하다. 하나의 공원은 수많은 다른 공원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들뢰즈가 일터로 떠난 민중이 다른 장소를 물들일 낮의 도래에 내기를 건다면, 제임슨은 두런두런하는 민중의 말로 물드는 밤의 지속에 내기를 건다. 공원을 떠나 인도네시아의 집으로 향하는 아스리와 공원에 남아 자기가 말할 차례를 기다리는 하산은 이 불가피한 긴장을 대변하는 민중의 형상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인도네시아어 제목 ‘Taman-Taman’은 이 긴장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도 같다.
<공원>의 마지막 부분, 밤마다 타이난공원에 모여드는 스쿠터족들의 노래가 들려오는 가운데 공원의 낮과 밤 풍경이 차례로 보인다. 나는 잠시 이 긴장 속에 머물고 싶다. 하지만 머지않아 저 공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래서 행복한 말짓기의 세계라는 것이 가능한지 이야기해 줄, 작가가 아닌 낯선 타자들을 다시 만나야 한다. 언젠가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가 말했듯, 언제나 예술은 예술가 자신보다 수준이 높고 흥미로우며 한 편의 영화는 으레 그것을 연출한 사람보다 지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15]
주
[1] 질 들뢰즈, 『시네마 II: 시간-이미지』, 이정하 옮김, 시각과 언어, 2005, p. 429. 번역은 일부 수정. 여기서 ‘말의 실행’으로 옮긴 ‘acte de parole’은 원래 존 L. 오스틴의 화행(話行, speech act)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표현이다. 인용한 들뢰즈 텍스트 해당 부분의 문맥을 고려해 뜻이 좀 더 분명히 드러나도록 ‘말의 실행’으로 옮겨 보았다.
[2] 현대적 정치영화에 대한 들뢰즈의 논의는 특히 다음 부분을 참고. 위의 책, pp. 419~431.
[3] 김수환은 ‘집단적 신경감응’이 소비에트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창작 활동 전 시기를 관통해 온 생체심리학적 지향을 요약해 줄 수 있는 개념도 된다고 짚으면서, 벤야민의 어떤 텍스트들에서 이 용어가 등장하고 있는지를 살피고 있다. 김수환, 『비교의 산파술: 에이젠슈테인과 벤야민 겹쳐 읽기』, 문학과지성사, 2025, pp. 171~175.
[4] 질 들뢰즈, 앞의 책, pp. 428~429. 번역은 일부 수정.
[5] 위의 책, p. 364.
[6] 가령, 이지영은 위라세타쿤의 <정오의 낯선 물체>가 말짓기를 비롯한 들뢰즈적 정치영화의 전략들을 어떻게 구현하고 있는지를 다음의 논문에서 분석한 바 있다. 이지영,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정오의 낯선 물체>의 구조적 특징의 분석을 통한 현대정치영화적 함의: 들뢰즈의 ‘이야기 꾸며대기’ 개념과 ‘집단적 발화의 배치’ 개념을 중심으로」, 《영상예술연구》 제17호, 2010, pp. 11~41.
[7] 소여헨의 작품들을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디아스포라영화제의 이혁상 프로그래머와 고은주 팀장,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강진석 프로그래머께 깊이 감사드린다. 소여헨의 <여공들의 기숙사>는 2022년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단편경쟁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8] 소여헨 외에 건축가인 티엔종위안(田倧源)과 미술사 연구자 랴오슈휘(廖修慧)가 2017년에 설립하였다.
[9] 林怡秀, 「采访: 你哥影视社」, 《艺术论坛》, 2023.1.5, www.artforum.com.cn/interviews/14362 ‘워크숍 영화’는 소여헨만의 것은 아니고 오늘날의 작가들과 평자들 사이에서 적잖은 관심을 끌고 있기도 하다. 가령, 김예솔비는 다음 글에서 “청소년기의 감각이 실현되는 장소로서 워크숍 영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김예솔비, 「이 실패를 멈추지 않기: (반)성장담으로서의 워크숍 영화」, 웹진 『비유』 2025 5/6월호. 일본 평론가 아카사카 다이스케는 『프레임 밖으로: 현대영화의 미디어 비판(フレームの外へ─現代映画のメディア批判)』(2019)에서 고전적 영상을 무비판적으로 계승하는 상업적인 영상에 대립하는 집단적인 작업이 성립하는 장소로서 학교 등에서 이루어지는 워크숍이 중요해지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일본영화의 경우, 구사노 나츠카의 <왕국(王国)>(2019)이나 스즈키 다쿠지의 <폿포 마을 사람들(ポッポー町の人々)>(2012) 같은 작품을 사례로 꼽고 있다. 아카사카 다이스케는 내가 정재훈의 <에스퍼의 빛>(2024)에 대해 인디스페이스에서 한 강연(2025년 8월 3일)의 녹화 영상을 인터넷에서 (AI 번역기의 도움을 빌려) 찾아본 후,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워크숍 영화와 관련해서 영화감독 라울 루이즈가 2003년에 발표한 <텅 빈 페이지의 현기증(Vertigo of the Blank Page>을 떠올렸다고 전해오기도 했다. 아카사카 다이스케 씨와 연락해 준 번역가 홍지영 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10] 위의 글.
[11] 오늘날의 영화에서 디스포지티프의 부상에 대한 논의는 다음 책 9장을 참고. 에이드리언 마틴, 『미장센과 영화 스타일: 고전기 할리우드에서 뉴 미디어 아트까지』, 허문영 옮김, 컬처룩, 2025.
[12] 타이난공원은 실제로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 노동자들이 모여 교류하는 곳이며, 소여헨과 그의 동료들이 <임시 노동자 숙소>에 출연할 사람들을 찾았던 곳도 바로 여기다. 林怡秀, 앞의 글.
[13]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물듦(contamination)’ 개념과 자유간접화법적 주체성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유운성, 『물듦: 상호감염의 미학』, 미디어버스, 2025.
[14] 서동진, 「공원의 내러티브」, 《보스토크》 제50호(2025년 여름호), pp. 98~104.
[15] Manoel de Olievria & Jean-Luc Godard (1993). “Godard et Oliveira sortent ensemble”, in Jean-Luc Godard par Jean-Luc Godard tome 2: 1984-1998, Cahiers du Cinéma, 1998, p.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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