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남겨진 물건이 있어.
한우리의 작품은 종종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남겨짐은 버려짐과는 다르다.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물건은 퇴물이 아니라 유물이다. 그중에서도 어쩌다 이렇게 남겨지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과 결부된 이야기가 빠져 있는 것이다. 이런 결핍은 자연적인 물건이라면 몰라도 한우리의 그것처럼 인공적인 물건이라면 문제가 된다. 그 물건을 대하는 이를 이런 물음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대체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
일찍이 박세당이 『사변록』에서 주장했듯 대상으로서의 물(物)과 방법으로서의 사(事)는 응당 분별해야 하는 것이라면, 한우리의 호기심을 끄는 것은 그것에 다가갈 방법이 뚜렷하지 않은 대상이라는 점에서 사물이라기보다 물건이라고 불러야 한다. 이런 물건들 가운데 특히 그가 집착하는 대상은 시네마토그래프 장치의 구성 요소들(영사기, 카메라, 필름 등)이거나 그 장치를 운용하는 데 필요한 부품들과 장비들(필름 롤러, 현상 탱크 등)이다. 사실, 작가로서 한우리 자신은 이 장치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잘 알고 있고 이 장치와 결부된 이야기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가정하는 어떤 상상의 무지한 주체는 그렇지 않다. 이 주체는 지구에 속한 것들이 낯설기 짝이 없는 외계인이다. 때로 그는 과거로부터 남겨진 것들에 이끌리는 미래인의 모습을 띠기도 한다. 이러한 주체를 한우리 작품의 화자라고 부르자.
여하튼 작가와 화자는 모두 동일한 물건을 앞에 두고 있다. 다만 각각이 하는 일이 다를 뿐이다. 화자는 어떻게든 이 물건에 어울릴 법한 이야기를 꾸며댄다. 그는 자신이 속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신화를 만드는 (척 시늉하는) 자다. 이 신화는 부분적으로 사실적 재료들을 활용하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물건이 결핍하고 있는 이야기를 보충하기엔 턱없이 부족해서 언제라도 거짓이 탄로 나 버릴 것만 같다. 말하자면, 이 신화는 너무 가냘프고 또 희박하다. 그런데 이 가냘프고 희박한 신화를 간신히 떠받치고 있는 것은 결국 저 물건이다. 작가는 바로 이 물건을 돌보는 자다. 자신의 이야기를 상실한 이 물건, 한때는 시네마토그래프 장치의 일원으로 자신을 뽐냈을 이 물건은 저 신화만큼이나 가냘프고 희박하게 존재한다. 그것은 누군가의 돌봄을 요한다. 한우리의 전시는 남겨진 물건 주위에 한시적으로나마 그것을 위한 이야기가 조용히 감돌도록 배려하는 돌봄의 시간이다.
1968년에 장 콜레는 「은하계의 완고한 침묵」[1]이란 글에서 고다르의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영화에서 나온 파편들 같다고 쓴 적이 있다. 삼사백 년이 지난 후, 아카이브에서 발굴한 필름들이 먼지로 화하고 해독해야 할 기호로서 파편들만 남은 미래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물론, 파편들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콜레가 염두에 둔 것은 어디까지나 셀룰로이드 표면에 기록된 시청각적 기호였을 터다. 하지만 콜레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어느덧 유물이 되어버린 시네마토그래프 장치의 요소들 또한 파편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콜레의 말을 한우리의 작품에 대한 언급으로 수용해도 좋지 않을까?
과학소설 또는 환상문학의 외양을 띠고 있는 단편소설 「은입자」(2023)는 한우리의 말에 따르면 “실제와 전혀 관련이 없”으면서도 “실제의 현실에서 다양한 정보를 가져와 가공”한 것이다.[2] 허연정과 공동으로 집필한 이 소설은 한우리의 여러 다른 작업에 맥락을 제공하는 일종의 형판 역할을 한다. 혹은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한우리의 여러 작업이 일종의 파편들이라면, 그의 단편소설 「은입자」는 그 파편들이 떨어져 나온 이미 완료된 상상의 미래에 관한 기록이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한우리의 텍스트를 두고 전민지가 정확히 짚어냈듯 “프랑스어에만 존재하는 시제 ‘전미래’로 (…) 이야기를 건넨다”.[3]
이 소설에서 서로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두 인물은 ‘얇은 사물’이라고 언급되는 물건을 각각 우연히 습득하게 된다. 이 물건은 우리가 (아직은 여전히) 셀룰로이드 필름이라고 부르는 것이지만 저 미래의 인간들은 그것의 기능과 이름에 대한 앎으로부터 멀어진 지 오래다. 2070년 동북아 대도시의 시큐어 콤플렉스에 거주하는 A는 신체에 장착하는 커뮤니케이션 장치에 ‘얇은 사물’을 스캔해서 그것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나중에 그는 이것을 필름이라고 부르는 ‘우리’ 또는 ‘대중’을 만나게 된다. ‘얇은 사물’에 대해 알아가는 방식에서 그보다 흥미로운 쪽은 2033년 서울에 거주하는 B다. 그는 여행지의 한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얇은 사물’을 가끔 해에 비춰 본다. 오래 수고를 들여 시네마토그래프 장치를 발견해 가는 그의 여정은 여기서 시작한다.
‘얇은 사물’을 해에 비춰 보는 B의 몸짓은 우리를 <낱낱의 사람>(2017)의 한 이미지 앞으로 슬며시 데리고 간다. 우리는 투명한 구체 하나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는 손을 본다. 배경은 흐릿해서 직접 보이진 않지만 투명한 구체에 굴절, 투과되어 비치는 상을 통해 잔물결이 이는 수면임을 알 수 있다. 이따금 구체의 왼편 가장자리로 수면에 반사된 햇빛이 가늘게 비친다. 누군가의 손에 들린 구체 자체는 시네마토그래프 장치와 아무 상관도 없지만, 이 구체를 만지작거리는 저 몸짓은 ‘얇은 사물’을 어루만지는 B의 몸짓과 뚜렷이 중첩되면서 돌연 우리를 저 장치를 대하는 미래인의 감각으로 이끄는 것이 된다.
이 투명한 구체의 이미지가 환기하는 감각은 한우리의 작업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심지어 이 이미지 자체가 직접 인용되기도 한다. 작가의 아버지가 치료를 위해 침을 맞는 모습을 담은 2채널 영상 작품 <희미한 파타 모르가나>(2020)에서, 우리는 이 이미지를 조그맣게 출력한 종이가 문과 벽에 각각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곧바로 눈에 띄는 것도 아니고 감춰진 것도 아닌 상태로 말이다. 침술 치료라는 상황은 이것을 일종의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부적처럼 보이게도 만들지만, <낱낱의 사람>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임을 고려하면 이것이야말로 희미하게 다른 시공을 투사하는 신기루, 즉 파타 모르가나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 투명한 구체의 이미지가 환기하는 감각을 효과적으로 끌어들인 것은 김신재가 기획한 그룹전 《오르트 구름》(아르코미술관, 2025)에서 선보인 설치다. 여기서 한우리의 설치 작업은 다른 작가의 것들과는 조금 떨어져 전시실 출구 왼쪽 구석에 조용히 자리 잡았다. 유리를 녹여 굳힌 후 절단해 만든 조그만 육면체가 바닥에 세워져 있고, <낱낱의 사람>의 16mm 필름이 순환적으로 돌아가는 영사기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이 거기로 떨어진다. 이 설치 작업은 파편화되고 주변화된 시네마토그래프 장치의 상황을 말없이 웅변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한우리의 작업에서 그리움이나 우울증을 감지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주변화된 시네마토그래프 장치의 돌봄에 수반되는 감정은 나지막한 기쁨과 달뜬 놀라움이다. 켄트 존스는 영화는 문화적으로 주변화되는 과정에 있지만 그것은 영화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주변화를 통해 비로소 영화는 시나 무용, 또는 음악처럼 자랑스러운 자리에 놓이게 되었다며 말이다.[4] 물론 이런 영화는 더는 ‘우리’가 알고 있던 시네마토그래프의 조건 속에 있지 않다. 그런데 대체 그 ‘우리’란 누구인가? 「은입자」의 A가 조우하는 ‘우리’는 저 ‘우리’가 가정하는 동일성과는 무관한 존재들이다. 한우리의 설치는 이런 존재들을 위한 영화의 새로운 조건을 탐문한다.
시네마토그래프 장치를 탈구축하는 데 관심을 둔 작가가 한우리만은 아니다. 이 장치 주변에서 형성되는 영화적 공간들 자체의 ‘아나키적 조직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도 있다.[5] 한국에서 활동하는 작가로 국한하자면, 과학상자 키트와 OHP 필름을 소재로 삼아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영사 장비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60mm 필름 띠를 수공예적인 방식으로 직접 만들어 선보인 놀라운 전시 《수공영화》(스페이스 비아트, 2015)의 변재규를 떠올려 볼 수 있다. 변재규가 시네마토그래프 장치의 다른 형태를 상상하는 대체역사적 작업에 몰두한다면, 한우리는 짐짓 이 장치에 무지한 주체인 양 가장해 이야기를 꾸며대는 신화적 작업에 몰두한다. 이때 1975년생인 변재규와는 달리 “비디오와 디지털을 먼저 접한 뒤 필름을 경험한” 세대로서 필름을 “과거의 매체가 아니라 디지털 이후 새롭게 등장한 ‘뉴미디어’”로 바라볼 수 있었던 1986년생 작가의 시대착오적 감각이 대단히 중요해진다.[6]
그러고 보면, 시네마토그래프 장치는 자신을 위한 신화를 가져본 적이 없다. 서사적 수준에서의 신화(가령, 신화로서의 서부극)가 있었을 뿐이다. <낱낱의 사람>의 첫 번째 이미지에는 펼쳐진 왼 손바닥에 오른손 검지로 글자를 쓰는 모습이 담겨 있다. 검지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따라가다 보면 이런 문장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순간은 지나가도록 약속되어 있다.” 수수께끼 같은 문장이지만 영사기를 지나가는 필름 프레임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아주 단순한 진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시네마토그래프 장치에서 이러한 순간은 어떻게 지나가는가? 아무런 신화도 없이 지나간다. 다시 강조하자면, 시네마토그래프 장치는 은유(플라톤의 동굴, 카메라 옵스쿠라 등)는 가져본 적이 있어도 신화는 가져본 적이 없다. 한우리는 이 장치를 위한 신화를 만드는 사람이다.[7]
이 사실을 간과하면 한우리의 작품 대부분이 요령부득으로 비치게 된다. 가령, <베르팅커>(2022)에서 16mm 필름 퍼포레이션 구멍에 실을 꿰어보는 행위 같은 것이 그렇다. 이 실은 장소와 사물을 묶어 새로운 시간을 만들곤 했던 요정─한때는 베르팅커라 불렸던 파리─의 보이지 않는 실을 흉내낸 것이다. 이 신화를 참조하자면 시네마토그래프 장치는 베르팅커의 기능을 흉내낸 기계인 셈이다. 이것은 시네마토그래프 장치의 사실적 매체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렇지만 한우리의 신화는 한편으론 현실과 긴밀히 얽혀 있기도 하다. 이 작품 후반부에는 필름 롤러나 현상 탱크를 모델링한 이미지들이 추상 영화적 배경 위로 떠오르기도 한다. 이것들은 더는 산업적으로 생산되지 않는 장비나 부품의 보수 및 유지관리를 위해 실제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공유되는 3D 프린터용 모델링 이미지들이지만, 소설 「은입자」에서는 “덧댄 사물들”이라 명명되어 또 다른 신화 속에 자리 잡고 있다.[8]
대담하게 현실을 언급할수록 신화의 힘은 강화된다. 현실과 동떨어진 신화는 그저 전설일 뿐이다. 이 점에서 한우리의 신화는 허연정이 “우리가 무언가를 현실로 인식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토대로서의 허구”라고 부른 것에 가깝다.[9]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특성을 띤 허구는 정신분석학이 환상으로 정의했던 것이기도 하다. 여하간, 이런 허구 내지는 환상으로서의 신화를 가진 다음에야 비로소, 시네마토그래프 장치로부터 떨어져 나온 물건들은 어엿한 사물이 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그것에 다가갈 방법으로 신화를 참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르팅커>의 화자가 “2013년 독일의 오래된 영화관을 공사하던 중 땅속에 묻혀있는 문서가 발견되면서 이 파리자리의 신화가 공개되었다”고 대담하게 거짓말할 때, 우리는 어쩐지 진심으로 그 말을 믿고 싶은 심정이 된다.
<성냥>(2024)의 화자는 「은입자」에서 ‘세계’를 벗어나 ‘구역’을 찾아 나서던 A를 닮았다. 삶을 둘러싼 거의 모든 것들이 등재된 ‘세계’와 여기 속하지 않은 ‘구역’이라는 구분은 <성냥>에서도 이어진다. ‘구역’이라는 설정 때문에 아무래도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를 떠올리게 되지만, 한우리의 신화는 이 영화의 명상적 시공보다는 타르코프스키에게 영감을 제공한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 『노변의 피크닉』의 환상적 시공에 가까이 있다. 한편, 한우리의 시공에서 “통신 어플리케이션의 이름이면서 (…) 접속이라는 단어가 무의미한 연결망 속의 삶 그 자체를 뜻하기도”(「은입자」)[10]하는 ‘세계’는 “끊임없이 마법사들에 의해 새로워져 간다. 매끈하고, 투명하고, 빠르게”(<성냥>) 말이다. 이런 진술은 오늘날 디지털 네트워크화된 세계에 대한 언급일까? 마법사는 오늘날의 테크노그라트를 빗댄 것일까? 이런 언급에 그친다면 그것은 신화가 아닌 은유일 뿐이다. 그래서 <성냥>의 화자는 “세이렌에 의하면 세계는 불과 30년 전만 해도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고 덧붙이며 서둘러 하나의 고유명으로 신화적 존재를 호명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한우리의 작업은 남겨진 물건으로서 시네마토그래프 장치를 디지털 시대에 다시 사물화하려는 시도다. 하멜른의 전설에서 모티브를 얻은 <투명한 감각>(2022)에서, 피리 부는 사나이를 미처 따라가지 못한 세 아이(보지 못하는 아이, 듣지 못하는 아이,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는 사라진 친구들이 남긴 조각들로 어떻게든 그들을 기억해 보려 한다. 개인전 《루프: 개를 흔드는 꼬리》(아마도예술공간, 2024)에서 처음 선보인 <루프>(2024)는 <투명한 감각>의 이야기를 조형적으로 풀어낸 듯한 설치 작품이다. 영사기에서 나온 16mm 필름은 전시장 한쪽에 자리 잡은 커다란 투명 직사각형 아크릴 패널 내에 설치된 여러 개의 필름 롤러를 거쳐 다시 영사기로 들어간다. 이 필름에는 3분 남짓한 짤막한 단편영화가 담겨 있다. 복잡한 미로에서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행위에 시시포스 신화를 느슨하게 덧댄 것이다. 이 영화는 천장에 걸려 아래로 길게 늘어진 투명 아크릴 끄트머리에 조그맣게 영사된다.
세 아이가 재구성한 기억이 사라진 친구들과는 다른 무엇이 되듯, 한우리가 재구성한 장치는 과거의 시네마토그래프 장치와는 다른 무엇이 된다. 어쩐지 유사해 보이지만 결코 꼭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들 사이에는 어떤 틈이 있게 마련이다. 이 틈에서 발생하는 것이 바로 영화적 효과고 영화적 감각이다. 여기서 한우리는 이야기가 아닌 사물로서의 신화를, 즉 사물-신화를 만들었다. 사라진 것에 대한 기억이 없는 누구라도 그것과 재구성된 것의 미묘한 차이를 느끼게 하는 유사물을 말이다. 다만 이 감각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남아 있는 자들의 거듭된 노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루프 속의 시시포스에게 비극은 없다. 그는 스스로 돌볼 것이다.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이 뒤섞인 미로 속에서 숨바꼭질하는 아이들의 입가에 떠오르는 행복이, 비록 희미한 신기루 같은 것일지라도, 그런 행복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 아마도, 그는 다음과 같은 속삭임을 따라가는 자다.
사람들이 구역에 누군가 살고 있다는 듯 말하는 걸 들었어요.[11]
주
[1] Jean Collet, “Le dur silence des galaxies,” Cahiers du Cinéma no. 199 (March 1968), pp. 60-61.
[2] 한우리・허연정, 「은입자」, 『은입자』, 포스트잇포스트워크, 2023, pp. 1-63. 인용 부분은 일러두기에서 발췌.
[3] 전민지, 「멋진 구세계」, 『은입자』, p. 67.
[4] Kent Jones, “The Marginalization of Cinema,” Film Comment vol. 52, no. 6 (Novemeber/December 2016), p. 59.
[5] Rosa Barba, On the Anarchic Organization of Cinematic Spaces, Hatje Cantz Verlag, 2021.
[6] 한우리, 「관념이 아닌 사물로: 포스트-시네마 시대 필름에 대한 몇 가지 생각」, KMDb(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2025.1.13, www.kmdb.or.kr/story/237/8331.
[7] 한우리는 자신의 작품이 “디지털 시대에 여전히 필름으로 작업하는 이들의 창작하는 방식에 대한 은유”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그가 여기서 은유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신화다. 한우리, 위의 글.
[8] 한우리・허연정, 앞의 글, pp. 48-53.
[9] 허연정, 「사물의 일」, 『은입자』, p. 71.
[10] 한우리・허연정, 앞의 글, p. 6.
[11] 아르카디 스트루가츠키・보리스 스트루가츠키, 『노변의 피크닉』, 이보석 옮김, 현대문학, 2017, p.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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