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26

이웃집 창문


※ 이 글은 계간 사진잡지 《보스토크》에 연재하고 있는 '영화의 장소' 칼럼을 위해 쓴 것이다. (2026년 9월에 발간한 제55호에 수록.) 



주방 겸 거실의 여닫이 창문을 안쪽으로 열고 몸을 살짝 바깥으로 내민 반팔 티셔츠의 남자가 빨래를 널고 있다. 바깥쪽 창문턱에 달린 도르래에 감긴 빨랫줄은 팽팽하게 쭉 뻗어 맞은편 이웃집 창문턱의 도르래로 이어져 있다. 빨래를 거는 남자의 등 너머로 이웃집 창문이 보인다. 창문이 열린다. 빨래를 거는 남자보다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가 어제 자기가 대신 받아둔 소포를 전해주겠다고 말한다. 소포를 들고 오는 그를 따라 카메라가 슬쩍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두 집을 잇는 복도에 난 창으로 그의 얼굴이 언뜻 보인다. 빨래를 널던 남자는 현관으로 가 문을 연다. 그리고 이어지는 둘의 소소한 대화.

호나스 트루에바의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에서 보았던 이 아름다운 장면은 오랫동안 머리에 남았다. 가끔은 몇몇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장 르누아르 영화의 정조와 감흥을 동시대 영화에 맵시 있게 되살려내며 화면 심도와 공간과 행위의 조율을 통해 감정의 얽힘과 짜임을 시각화하는 트루에바의 방식은 물론 매력적이다. 하지만 이 장면에 끌린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서구의 공동주택과 그곳에서의 삶에 대한 갈망이나 환상도 딱히 없다. 나는 그저 누군가의 집 창문을 열면 지근거리에 이웃집 창문이 보이는 그런 장소를 한국영화에서 보고 싶다. 그뿐이다.

요즘 한국영화에 그런 장소가 나온다면 분명 많은 이들이 비사실적이라 여길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 공간이 조금이라도 남의 시선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끔찍이 꺼린다. 아무리 가까운 이웃이라 해도 말이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의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하는 것은 개의치 않는다.) 알루미늄 소재의 새시가 널리 보급된 1970년대 이후로는, 한국 공동주택의 일반형인 아파트에서 거실의 창문은 맞은편 건물이 없거나 아주 멀리 떨어진 경우를 제외하고는 좀처럼 노출되지 않는 구조물이 된다. 그러니 한국영화에서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장소는 지금 한국에서 분명 비사실적이다.

하지만 나는 한국이 아니라 한국영화에서 그런 장소를 보고 싶은 것이다. 또한, 이웃집 창문이 보이는 장소는 내가 실제로 살고 싶은 곳이 아니라 허구로 보고 싶은 곳이다. 그것도 터무니없는 판타지에서가 아니라 자못 사실적인 영화적 세계에서 말이다. 이런 갈망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아주 자연스럽다. 가령, 나는 활화산을 보러 화산섬에 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실제의 활화산을 로셀리니의 <스트롬볼리> 같은 사실적인 허구 영화에서 보는 것은 좋아한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잉그리드 버그만 같은 여인이 그토록 난폭한 대지에서 살아간다는 비사실적 상황을 잠정적이나마 끝내 수긍하게 된다. 이 영화의 위대한 성취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사실적 세계에 할리우드 스타가 존재하는 비사실성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장하는 데 있다. 

이웃집 창문이 보이는 장소를 향한 부조리한 갈망은 남들이 신비적이라 비난해도 아예 반박할 길이 없는 개인적인 믿음에서 연유한 것이다. 자못 사실적인 영화적 세계에 들어온 아주 약간의 비사실성을 관객이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느냐에 영화 형식의 사회적 가능성이 달려 있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거실의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면 이웃집 창문이 보이거나, 그것까지는 아니어도 창밖으로 걸어가던 이웃과 인사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는 구조의 집이 한국영화에 나온다면?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한국영화와 맺는 관객의 관계는 틀림없이 바뀔 것이다. 영화 형식의 사회적 가능성은 바로 이 관계에 달려 있다. 이런 믿음이다.

누군가는 이런 상상을 낯간지럽다고 느낄지 모른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얼마간 나도 그렇다. 하지만 한국영화를 보는 우리는 부잣집 단독주택 지하의 비밀 공간에 오랫동안 몰래 숨어 살아온 남자가 있다거나, 외계인에게 쫓기는 시골 마을 청년이 말을 타고 호쾌하게 도로를 질주한다는 식의 엄청난 비사실성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한국영화를 보는 우리가 오히려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부모와 자녀가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며 (결혼이나 직업에 관한 이야기 말고) 이런저런 무의미하고 소소한 대화를 주고받고 이따금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는 모습일지 모른다. 그저 내가 당신의 말을 듣고 있음을 알리고 말을 이어가기 위해 하는 말, 무의미하지만 분명하게 사회적으로 기능하는 친교의 말이야말로 한국영화의 인물들에게 어느새 참으로 낯선 것이 되었다. 한국영화에서 주방 겸 거실에 놓인 식탁은 무거운 침묵의 자리이거나, 누군가 금방이라도 체할 듯한 어색한 의식(‘먹는 일’로서 식사)의 자리이거나, 종종 다툼으로 번지는 불화의 자리다. 그렇다면 앞에서 묘사한 가족 식사 장면은 아주 약간의 비사실성에 해당하는 것일까 아니면 엄청난 비사실성에 해당하는 것일까?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나는 한국영화가 긍정적인 인간관계를 좀더 자주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저 영화적 공간에 생기를 더하고 영화적 대화에 활력을 더하는 아주 약간 비사실성이 더해진 사실적인 허구를 보고 싶은 것뿐이다. 이런 허구는 르누아르의 <랑주 씨의 범죄>나 <암캐>, 혹은 야마나카 사다오의 <백만냥의 항아리>처럼 범죄적인 것과 관계할 수도 있다. 한국영화의 계보를 참조해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에겐 <하녀>의 김기영을 잇는 영화작가도 있고 <오발탄>의 유현목이나 <휴일>의 이만희를 잇는 영화작가도 있지만,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나 <로맨스 빠빠>의 신상옥을 잇는 영화작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언제라도 엄청난 비사실성으로 이행 가능한 환상적 사실성의 작가도 있고 사실적인 것의 모럴에 천착하는 작가도 있지만 비사실적 사실성 내지는 사실적 비사실성의 작가는 없는 셈이다.

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영화의 상상력이 평범한 한국적 장소의 사실적 특성에 지나치게 조건화되어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럼 두 종류의 선택만이 가능하다. 장소로부터 벗어나거나 아니면 장소에 매달리는 것이다. 환상적 사실성의 작가는 외딴곳이나 교외나 지방 도시나 시골을 무대로 삼거나, 여러 공간을 짜맞추어 원하는 ‘그림’을 만들거나, 아예 세트를 지어 촬영하거나, 그도 아니면 과거나 미래로 향하는 수밖에 없다. 사실적인 것의 모럴에 천착하는 이는 실제 장소의 특성에 조응하는 인물과 서사를 어떻게든 구성하려 든다. 21세기의 한국영화는 박찬욱과 김기덕 등 주로 전자에 속하는 이들을 통해 국제적인 주목을 끌었다. 후자 쪽으로는 홍상수가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아주 약간의 비사실성을 부분적으로 끌어들이곤 한다. 봉준호와 이창동은 언뜻 후자의 계열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끊임없이 후자를 곁눈질하는 전자의 계열에 속하는 이들이다.

평범한 한국적 장소라고 하면 얼른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아파트다. 하지만 대체로 엇비슷한 건축적 구조를 띠고 있는 데다 외부에서 실내 쪽을 향해 카메라를 둘 곳도 마땅치 않은 한국의 아파트는 영화적 무대로 삼기가 대단히 까다로운 장소다. 이곳은 홍상수가 한사코 피하려 드는 장소이고, 봉준호도 데뷔작 이후 다시는 돌아가지 않은 장소다.

나는 올해 초부터 미디액트에서 영화비평워크숍을 진행하면서 참여자들과 함께 아파트(와 때로는 여타 공동주택)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몇몇 한국영화들을 살펴보았다. 나는 영화 선정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봉준호의 <플란다스의 개>, 이창동의 <오아시스>, 윤종찬의 <소름>, 박찬옥의 <파주>, 장건재의 <잠 못 드는 밤>, 김보라의 <벌새>, 김세인의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김덕중의 <컨버세이션>, 이종수의 <부모 바보> 등 다양한 영화가 언급되었다. 각각의 영화가 아파트라는 장소의 내부와 외부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장소의 사실적 특성에 지나치게 집착해 온 것이 그동안 한국영화의 인물, 대화, 서사를 조건화하고 급기야 정체 상태에 이르게 한 것일지 모른다는 가정을 검토해 보고 싶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좀더 세밀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이상할 정도로 주인공이 아파트의 저층부에, 특히 1층에 거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그곳이야말로 창문을 열거나 베란다로 나가면 오가는 이웃이 보이는 영화적 미장센의 장소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다시 트루에바의 저 아름다운 장면을 떠올린다. 요즘 한국영화에 그런 장소가 나온다면 분명 많은 이들이 비사실적이라 여기겠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집 창문을 열면 지근거리에 이웃집 창문이 보이는 그런 장소를 상상한다. 그것도 아파트로 가득한 서울 같은 도시에서, 기왕이면 바로 그 아파트에서 말이다. 이는 한 명의 관객으로서 나의 권리다. 그런 장소가 스크린에 나오게 되면 어쩐지 한국영화 자체가 바뀔 거라는 생각까지 해 본다. 아주 약간의 비사실성은 일종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이제 한국영화는 지금 여기의 삶만이 아니라 가능한 삶을 함께 모색할 때도 되었다. 환멸 없는 환상은 공허하고 환상 없는 환멸은 맹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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