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17

계간 『인문예술잡지 F』 제16호(2015년 3월호) 발간



『인문예술잡지 F』 제16호(2015년 3월호)가 발간되었습니다. 특집은 "오픈 백스테이지". 




관객들은 무대 뒤를 볼 수 없었다. 무대 뒤의 소란과 바쁜 움직임은 무대 앞의 아름다움과 감동을 위해 감추어야 했다. 무대 뒤에서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런 부고를 듣고 울던 배우도 쇼가 진행되면 눈물을 훔치고 무대 앞으로 나가 웃어야 했다. 캔버스 위의 두터운 덧칠에서 화가의 노고를 엿볼 수는 있어도 작가의 작업장을 전시하지는 않았다. 음악을 연주하면서 복잡한 화성악적 계산을 설명하지도 않았다. 예술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한다고 믿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상황은 돌변했다. 작품이 작가와 작가를 둘러싼 이야기들과 함께 소비되기 시작했다. 요절한 천재나 세기의 바람둥이 같은 풍문은 예전에도 있었고, 많은 이들의 작품에 대한 호불호를 결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작가의 민낯과 사적인 사연이 작품과 하나의 이야기로 엮여 관객을, 청중을, 그리고 독자를 만나지 않았다. 여기서 오래된 질문이 다시 시작된다. 예술 작품은 본질적인 ‘참’이나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가? 아니면 모든 작품은 맥락 속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는가? 그리고, 작가들은 고민한다. 무엇으로 다른 이들과 소통할 것인가? 그렇다고 작가의 개인적인 배경, 사연, 작업 과정, 전문가들이나 성공한 오타쿠들의 비평, 그리고 작품이 보는 이들에게, 듣는 이들에게 모두 투명하게 공개된 것일까? 투명성은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라 다시 불투명해진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듯이 작가와 관객이 놓인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 정보의 양과 공개된 과정이 편집된 정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관객들이 과정을 공유하고 비평을 따라하면서 작품을 온전히 소유했다는 안온감, 혹은 즐거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 감정들도 본질적으로 편집되고 만들어진 것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작품이 이야기와 함께 팔리는 현상에 주목했던 이유는 작품과 인간을 함께 팔아야 하는 시대의 고달픈 예술가들의 상황을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차례

[특집: 오픈 백스테이지 Open Backstage]

과시생산과 작가하기 .... 심보선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편집되는 것이어서 진정하다 .... 김수아
오디션 프로그램과 음악산업, 혹은 한없이 투명한 엔터테인먼트와 소비자 .... 차우진

[연재]

예속의 위험, 자유의 모험: 부르디외와 푸코(2) .... 이상길
뤼미에르 은하의 가장자리에서 Part.2: 고유명으로서의 이미지와 아트갤러리로서의 영화관(하) .... 유운성
사회를 재생산하지 말아야 한다 .... 김항
혁명의 넝마주의,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읽기 .... 김수환

[리뷰]

사막의 극장, 그 관객을 찾아: 박민하의 <전략적 오퍼레이션- 하이퍼 리얼리스틱> .... 남수영

2015-03-03

2015년 3월 첫째 주


[20150224]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의 <벨렘의 노인>(2014)


작년 12월, 현역 최고령 영화감독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가 106세 생일을 맞이했다. 그보다 몇 달 전 베니스영화제에서는 그의 신작 단편 <벨렘의 노인 The Old Man of Belem / O Velho do Restelo>이 상영되었다. 『버라이어티 Variety』 에 실린 서면 인터뷰 기사를 살펴보니, 원래 스튜디오에서 촬영할 예정이었지만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 건강에 문제가 생겨 그가 살고 있는 포르토 자택 근처의 정원에서 촬영하게 되었다고 한다. 첫 공개된 지 여섯 달이 지나 비로소 이 작품을 보게 되었는데, 19분 짜리 단편이기는 하지만 루이스 미겔 신트라, 디오구 도리아, 리카르두 트레파, 마리우 바로수 등 그와 오래 함께 작업해 온 이들이 출연하고 있는 데다, 이베리아 반도라는 특정한 지역의 문화에 대한 사색을 불현듯 보편적 문명에 대한 사유로 전환시키고야 마는 올리베이라 특유의 방법론이 유감없이 구사되고 있어, 거장의 일개 소품으로만 치부하는 건 매우 부당한 일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벨렘의 노인>은 그 주제적 너비에 있어서 <아니오, 혹은 지배의 공허한 영광>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물론 이 영화는 올리베이라가 그의 오랜 지기들과 함께 자신의 아파트 '뒷마당'에서 찍은 영상을 자신의 이전 작품들에서 발췌한 영상들과 결합해 만든 소품으로, 어떤 면에서는 '홈 무비'(home movie)에 가깝다 할 작품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벨렘의 노인>의 올리베이라는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의 장-뤽 고다르, <과잉개발의 기억 Memories of Over-Development>의 키들랏 타히믹과 더불어 가장 커다란 사유의 홈 무비 양식을 실험한 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흥미로운 건, 올리베이라가 이 영화는 자신이 이전에 만든 영화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동안 기억에 남을 두 개의 쇼트.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혜성이 보인다. 이때 보이스오버로 다음과 같은 말이 들려온다.


"예술작품이란 우리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 창조된 동물들과 식물들을 외부에 투사(projection)하는 것이다." 

혜성이 건물 뒤편으로 사라지고 나면, 돌연 한낮의 숲(식물들) 풍경이 펼쳐진다. (프레임 내에는 보이지 않는) 온갖 동물들이 내는 소리가 풍경 속에 뒤섞이는 가운데,


"서정적 작품들, 그리고 극적인 작품들 또한 하나의 정원이다. 허나 그것은 호랑이가 포효하고 인어가 노래하는 동물원이다."


<벨렘의 노인>은 테이셰이라 드 파스코아이스(1877~1952)가 쓴 카밀루 카스텔루 브랑쿠(1825~1890)에 대한 전기소설 『회개자 O Penitente』(1942, 아래 사진)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하나, 이 책을 읽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어떤 식으로 각색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다. 영화는 한 정원 벤치에 갑옷을 입은 세르반테스(리카르두 트레파)가 앉아 있는 가운데, (포르투갈의 호머, 베르길리우스 혹은 단테로 일컬어지는) 『루지아다스 Os Lusiadas』의 작가 루이스 드 카몽이스(루이스 미겔 신트라)가 다가와 말을 건네고, 뒤이어 테이셰이라 드 파스코아이스(디오구 도리아)와 카밀루 카스텔루 브랑쿠(마리우 바로수)가 이들의 대화에 합류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파스코아이스의 말을 다른 세 인물이 주로 듣고 있는 편이다.) 그리고 올리베이라 자신의 이전 작품들, <불운의 사랑>(1978), <아니오, 혹은 지배의 공허한 영광>(1990), <절망의 날>(1992), <제5제국>(2004)에서 발췌한 영상 및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소비에트 시기에 활동했던) 그리고리 코진체프의 <돈키호테>(1957)에서 돈키호테가 풍차와 결투를 벌이는 장면이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코진체프의 <돈키호테>는 30여 년 전 국내 텔레비전 방영 당시 본 이후 좀처럼 다시 볼 기회를 얻지 못했었다.) 




재미있는 것은 <벨렘의 노인>에 출연한 배우들이 (이미 여러 다른 올리베이라 영화에서도 얼굴을 비춘 이들이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인용되고 있는 올리베이라의 과거 네 편의 영화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캐스팅은 매우 용의주도하게 이루어졌다. 



왼쪽부터 루이스 미겔 신트라, 디오구 도리아, 리카르두 트레파, 마리오 바로수
(이들 뒤로 올리베이라가 살고 있는 아파트 건물이 보인다)


(1) 카밀루 카스텔루 브랑쿠 역으로 등장하고 있는 마리우 바로수는 배우라기보다는 올리베이라와 주앙 세자르 몬테이루 영화의 촬영감독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사실 그는 <벨렘의 노인> 이전에 이미 올리베이라의 <프란시스카>(1981)와 <절망의 날>에서 카밀루 카스텔루 브랑쿠 역을 맡아 연기한 바 있다. 즉 그는 올리베이라에게 있어서 카밀루 카스텔루 브랑쿠 전담 배우이기도 한 셈이다. 

(2) 디오구 도리아는 <아니오, 혹은 지배의 공허한 영광>에서 포르투갈 병사 가운데 한 명으로 출연하기도 했고 올리베이라의 1981년 작품 <프란시스카>에서 주인공 주제 아우구스토 역을 맡았다. 극중에서 주제 아우구스토는 카밀루 카스텔루 브랑쿠의 절친인 동시에 연적이기도 하다. (올리베이라의 <불운의 사랑>은 브랑쿠의 원작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벨렘의 노인>에서 디오구 도리아는 브랑쿠에 대한 전기소설을 쓴 테이셰이라 드 파스코아이스 역을 맡고 있다. 

(3) 올리베이라의 손자인 리카르두 트레파는 <제5제국>에서 주인공 세바스티앙 왕을 연기했다. 세바스티앙 왕은 1578년 모로코 원정 당시 크사르-엘-케비르(Ksar-El-Kebir) 전투 도중 사라졌는데(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나 시체가 발견되지 않음), 이후 그는 포르투갈이 위기에 처할 때 다시 나타나 제국을 세우고 지배하리라는 메시아주의적 전설, 이른바 '세바스티앙주의'의 주인공이 되었다. (올리베이라 영화에서 세바스티앙주의의 의미에 대해서는 Caroline Overhoff Ferreira, "Heterodox/Paradox: The Representation of the Fifth Empire in Manoel de Oliveira's Cinema" 같은 글을 참고할 수 있다. 이 글은 Dekalog 2: Manoel de Oliveira (Wallflower Press, 2008)에 수록되어 있다. 포르투갈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인 페르난두 페소아가 쓴 「세바스티앙주의 그리고 제5제국」은 김한민 작가가 옮기고 엮은 페소아 산문집 『페소아와 페소아들』에 실려 있다.) <벨렘의 노인>에서 트레파는 돈키호테의 복장을 한 세르반테스로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올리베이라는 자신만의 십자군 전쟁을 꿈꾸었던 세바스티앙 왕의 치기와 풍차에 달려드는 돈키호테의 광기를 대응시키고 있다. 또한 그는 크사르-엘-케비르 전투 이후 포르투갈의 몰락과 무적함대 패배 이후의 스페인의 몰락을 나란히 놓고 사유한다. 올리베이라에게 있어서 세바스티앙과 돈키호테는 이베리아적 이상의 몰락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면서, 나아가 실패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문명의 불안이 구체화된 보편적 형상이기도 하다.

(4) 루이스 미겔 신트라는  <아니오, 혹은 지배의 공허한 영광>에서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에서 치른 마지막 식민지 전쟁에 나선 병사들에게 자신의 조국이 과거에 겪은 일련의 실패의 역사를 들려주는 하사관 역으로 출연했다. 이런 그가 <벨렘의 노인>에서는 바스쿠 다 가마의 항해를 소재로 포르투갈의 영광을 노래한 『루지아다스』의 저자 카몽이스 역을 맡고 있다. 카몽이스는 『루지아다스』를 바로 그 세바스티앙 왕에게 헌정했었다. (이 책은 1988년 삼영서관에서 국역본으로도 출간된 바 있으나 현재는 절판되었다. 1880년에 나온 영역본은 이곳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그는 죽기 2년 전(카몽이스는 1580년에 사망해 바스쿠 다 가마의 유해가 안치된 벨렘 지구의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크사르-엘-케비르에서의 세바스티앙 왕의 패전 소식을 듣게 된다. <아니오, 혹은 지배의 공허한 영광>에서 유일하게 패배가 아닌 영광을 노래하고 있는 부분, 즉 바스쿠 다 가마 에피소드는 바로 『루지아다스』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며, 제목 또한 이 책의 한 부분("오, 지배에 대한 갈망이여! 오, 공허한 욕망이여!", 제4곡 95연)에서 연유한 것이다. 

'벨렘의 노인'이라는 제목 또한 『루지아다스』에서 연유한 것이다. 인도로 향하는 바스쿠 다 가마의 선단이 출항한 곳이 바로 리스본 벨렘 지역의 항구인데, 『루지아다스』 제4곡(특히 94~104연을 보라)에는 이 항해자들에게 경고의 말을 내뱉는 한 노인이 등장한다. 평자들은 이 에피소드가 이 책에서 그려진 탐험에 양가적인 의미와 불확실성을 끌어들임으로써 제국주의적 이상의 낭만화로 저항 없이 빠져들지 못하게끔 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벨렘의 노인>은 풍차 날개에 매달려 안쓰럽게 허우적대는 돈키호테가 땅에 떨어지는 모습, 그리고 카몽이스가 『루지아다스』 제4곡의 97연을 읊조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끝난다. 이것이 우리 시대 '벨렘의 노인'이기를 자처한 올리베이라가 던지는 경고처럼 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하지만 이것을 '유언'이라 간주하지는 말자.)

"운명의 여신이 그들에게 뭘 약속했다는 것인가? 자랑할 만한 이야기가 대체 무엇인가? 야자수가 뭐란 말인가? 승리가 뭐란 말인가? 승리의 영광이 대체 뭐란 말인가?"

그리고, 『루지아다스』는 바다를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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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5]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2014)



2015년도 벌써 두 달이 지났다. 두 달 동안 본 개봉작들을 다시 떠올려 보니 기대에 미치지 못했거나 실망한 영화들이 적지 않다. 마이크 리의 <미스터 터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메리칸 스나이퍼>, 베넷 밀러의 <폭스캐처>는 각각 매력이 없지 않은 영화들이었지만 보는 동안 자세를 고쳐 잡게 만드는 건 아니었다.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은 이들 형제 영화세계의 정수가 담긴 작품이라고는 결코 생각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내내 감탄을 내뱉게 만드는 희한한 힘을 지녔다. (영화를 보고 나서, 다르덴 형제는 결코 위대한 영화를 만든 적도 없고 앞으로도 만들 것 같지 않은 위대한 영화감독들이라는 좀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문으로만 듣다 비로소 보게 된 영화들 가운데 파벨 파블리코브스키의 <이다>와 미로슬라브 슬라보슈비츠키의 <트라이브>를 나는 좀 심드렁하게 본 편이다. 이 두 편의 영화에서는 (형식이라기보다는) '미적 전략' 내지는 '미적 디자인'이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앞선다. 올해 들어 처음 본 영화들 가운데서는 (개봉작은 아니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내 영화관에서 본 애미 시겔(Amie Siegel)의 <동독/동독 DDR/DDR>(2008)과 <출처 Provenance>(2013)가 가장 근사했다. 최근의 개봉작들 가운데서는, 올해가 아닌 작년 말에 개봉된 두 편의 영화,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맵 투 더 스타>가 단연 압도적이다.  

연극과 현실의 삶이 기묘하게 대구를 이루며 때로 갈라서고 때로 마주치고 때로 뒤섞이는 스토리텔링 자체는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본 미이케 다카시의 <식녀 쿠이메 Over Your Dead Body> 역시 이런 계열의 영화에 속하는데, 새롭지 않은 스토리텔링에 진부하고 우스꽝스러운 연출이 더해져,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미이케 다카시 필모그래피 한 켠에 자리한 '불명예의 전당'(hall of shame) - 그의 최근작 가운데서는 <역전재판 Ace Attorney>(2011)이 이곳에 안치된 바 있다 - 에 썩 잘 어울리는 작품이 되었다.) 아사야스의 영화에서 정말 흥미로운 것은 인물들의 표정과 말투, 그리고 제스처가 배치되는 상황들의 모호함에 있다. 그는 삶이란 한 편의 연극이라는 낡아빠진 은유를, 삶이란 시시각각 상황이 바뀌는 연극이며 인간들은 그때마다 변화된 상황에 걸맞은 역할 혹은 가면을 재빠르게 취해야 한다는 보다 흥미로운 (장 르누아르적) 통찰로 수정해 받아들인다.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나 크로넨버그의 <맵 투 더 스타>는 이를 중심 없는 레이어들(layers)만으로 구성된 삶의 가상성(virtuality)이라는 보다 음울한 전망으로 밀고 나간다. 그러고 보면 '가장'(masquerade)이야말로 동시대 영화의 가장 두드러진 모티프 가운데 하나가 된 것 같다.) 물론 그 누구도 삶이 요구하는 기민함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누구나 매 순간마다 변신의 실패를 거듭하기 마련이지만, 다만 우리는 서로의 실패에 눈감을 뿐이다. '사교'(社交)란, 이 의식적인 맹목의 능력을 갖춘 이들이 경합하는 광경을 일컫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마 베프 Irma Vep>(1996)와 <8월 말, 9월 초 Late August, Early September>(1998)는 아사야스를 1990년대 프랑스 영화계의 기대주로 꼽게 만들었지만, 그 이후 10여 년 간 그의 필모그래피는 적이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여름의 조각들 Summer Hours>(2008) 이후 - 혹은, 이보다 덜 알려진 작업이지만, 작곡가 칼하인츠 슈톡하우젠과 안무가 앙줄렝 프렐조카주와의 협업 프로젝트 <엘도라도 Eldorado>(2008) 이후 - 3부작 TV 미니시리즈 <카를로스 Carlos>(2010), 그리고 <실스 마리아> 등의 작품을 내놓으면서 그는 점점 '마스터 디렉터'에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마스터피스'라 할 만한 아사야스의 작품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