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2023년 10월 2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조너선 크레리의 『지각의 정지: 주의・스펙터클・근대문화』의 옮긴이 후기다. 이 책을 크레리의 다른 저술들과의 연관 속에서 개괄적으로 소개하고자 쓴 것이다.
밤이 다가오자 그녀는 우리가 지배하는 시간이 끝나고 그녀의 시간이 시작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드니 디드로, 「맹인에 관한 서한에 붙임」
코로나 대유행이 한창이던 2021년 초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에세이 영화 <모든 곳에, 가득한 빛All Light, Everywhere>의 연출자인 테오 앤서니는 조너선 크레리의 『관찰자의 기술: 19세기의 시각과 근대성』이 이 작품의 근간이 된 텍스트 가운데 하나라고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초반부에는 『지각의 정지: 주의・스펙터클・근대문화』에서 크레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중요한 이론적 기획에 상응하는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여기서 제작진은 액손Axon 본사 건물을 방문해 회사 대변인과 함께 그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액손의 전신은 1991년에 설립된 테이저 인터내셔널Taser International로 비치사성 무기인 테이저건이 바로 이 회사의 제품이다. 여기서 2008년에 출시한 바디캠은 이후 미국 경찰들에게 널리 보급되었고 오늘날 이 카메라로 촬영된 범죄 진압 현장 기록 영상은 액손의 서버에 실시간으로 저장되어 (주로 경찰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법정 증거 자료로 활용되곤 한다.
어쩐지 쇼핑호스트 같은 인상을 주는 액손의 대변인은 <스타워즈>나 <스타트렉>처럼 하이테크 느낌을 냈다는 2층 통로에서 건물 내부를 둘러보며 “여기엔 비밀이 없습니다”라고 과시하듯 말한다. 그의 말마따나 이 회사의 직원들과 간부들의 업무 공간은 구획별로 나뉘어 있기는 해도 중앙 통로에서 어디나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끔 되어 있다. 그런데 이처럼 ‘투명성’을 자랑하는 이곳 3층에는 선팅 처리된 전면 유리로 둘러싸인,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블랙박스’라 불리는 구역이 있다. 이곳은 회사의 신제품을 연구개발하는 부서가 있는 공간으로 이런 건축적 구조 덕분에 모종의 비밀스러운 느낌을 띠게 된다. 게다가 이곳은 건물 내부의 여타 업무 공간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중앙부 위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쯤에서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분석한 벤담적 파놉티콘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내 우리는 파놉티콘 모델만으로 이 기묘한 건축적 배치를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액손의 블랙박스는 구조적으로는 파놉티콘 중앙의 원형감시탑에 상응하지만 기능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내부에서 근무하는 이들은 정작 감시통제의 책임자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감시통제를 위한 시설이라기보다는 무언가 비밀스러운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자아내고 과장하는 스펙터클적 장치에 가깝다. 여기서 어둠은 사실 환하게 빛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작 사원들의 업무를 관리감독하는 책임을 질 ‘C-스위트’라 불리는 최고 경영진의 자리는 블랙박스에서 내려다보이는 1층에 있다. 즉 감시자인 그들 또한 짐짓 투명한 스펙터클이 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환하게 빛나는 것은 사실 어둠이다. 여하간, 도처마다 온통 빛이다. 이를 두고 엑손의 대변인은 투명성이라고 부른다.
푸코는 스펙터클이란 다수의 인간이 소수의 대상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고대 사회에나 걸맞은 것이라고 보았다. 이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원형 경기장이다. 그는 기 드보르의 이름이나 『스펙터클의 사회』는 전혀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사회는 “스펙터클의 사회가 아니라 감시의 사회”라고 단언하며 그와 다른 입장에 선다.[1] 하지만 크레리는 일찍부터 푸코의 견해에 의문을 표하며 스펙터클과 감시를 동시에 고려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가 1989년에 발표한 「스펙터클, 주의, 대항-기억」은 주의의 기술과 스펙터클의 연관을 스케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얼마간 『지각의 정지』의 밑그림이 된 논문이다. 여기서 이미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푸코는 텔레비전을 보거나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데 그리 시간을 쏟았을 법하지 않은데, 만일 그랬더라면 텔레비전이 파놉티콘 기술을 더 완벽하게 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터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 감시와 스펙터클은 그가 주장하듯 서로 대립적인 용어가 아니며 한층 효과적인 규율 장치 속에서 서로 교착되는 용어다. 최근의 기술적 발전은 이러한 중첩 모델을 그야말로 확고히 했다. 감상자의 행동, 주의력, 그리고 안구 운동을 모니터하고 수량화하기 위한 첨단의 이미지 인식 기술이 내장된 텔레비전 세트가 그 예다.”[2]
이 글을 쓸 무렵 크레리가 텔레비전에서 감지했던 감시와 스펙터클의 중첩 모델은 글로벌 인터넷 네트워크와 스마트폰 사용이 일상화된 오늘날의 우리에겐 그리 낯설지 않다. 특히 2020년부터 대략 3년 동안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 대유행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장려되고 강화되면서 보편화된 각종 ‘온택트’ 장치들을 떠올려 보면 더욱 그렇다. 이제는 학교와 기관 들에서 폭넓게 쓰이고 있는 화상 회의 플랫폼 줌의 인터페이스는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비밀스럽게 작용하며 꺼림칙한 느낌을 주었던 스펙터클적 감시의 기술을 환하게 ‘사용자 친화적’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라 하겠다. 이 플랫폼의 사용자들은 다른 이들의 얼굴을 여러 개의 분할 화면로 한꺼번에 보는 감시의 주체인 동시에 스스로의 얼굴을 다수에게 내보이는 스펙터클적 대상이 된다.
물론 온라인 모임 중에 비디오나 오디오를 끄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감추면서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는 사용자도 적지 않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 플랫폼에선 자신의 존재를 한껏 드러내는 사용자일 수 있다. 얼굴 없는 ‘눈팅족’이 어딘가에선 어떤 집단의 얼굴을 대변하는 표상일 수 있고, 스펙터클적 선망의 얼굴이 어딘가에선 얼굴 없는 ‘어그로꾼’일 수 있으며, 익명으로 당신에게 줄기차게 모욕을 가하는 이가 온라인 모임 중엔 온화한 얼굴로 당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조용한 참여자일 수 있다. 중첩의 양상은 서로 판이할지라도 도처에서 감시와 스펙터클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중첩의 양상들을 새로 고안해내고 퍼뜨리고 확장하는 과정과 단단히 맞물려 있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내면화된 스펙터클적 감시의 형식이 바로 집중과 분산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주의(력)의 관리다.
1999년에 출간된 야심작 『지각의 정지』에서 크레리는 19세기 후반부에 당대의 새로운 시청각적 기술들, 사회적・철학적・과학적 담론들, 그리고 예술적・문화적 실천들이 뒤얽히는 가운데 주의라는 논쟁적 개념이 어떻게 떠오르고 변형되고 재구성되었는지를 추적하는 ‘주의의 계보학’을 치밀하게 그려 보인다. 이 책의 치밀함과 집요함은 이따금 독서 중에 길을 잃게 할 정도지만, 그의 논의가 그저 역사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준에서 멈추는 법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오늘날 ‘주목 경제’ 혹은 ‘관심 경제’라고도 불리는 주의 경제attention economy의 운용을 위한 시청각적 인프라가 근대 문화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무언가에서 다른 것으로 빠르게 주의를 전환하는 일을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문화 논리의 일환”이라고 보는 크레리는 19세기 후반의 유럽이라는 시공간을 집요하게 파헤쳐 가속화된 교환과 유통으로서의 자본이 어떻게 주의집중과 주의분산이 서로 교차하는 체제가 되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이 강박적 주기 운동의 체제는 2013년에 출간된 『24/7 잠의 종말』에서 그가 “그림자 없이 불 밝혀진 24/7의 세계”라고 묘사한 초스펙터클적 세계이며, 자본주의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극단적 비활동인 잠마저도 일종의 활동 대기 상태처럼 취급하는 초감시적 세계이기도 하다.[3]
『지각의 정지』의 한 부분에서 크레리는 푸코적 감시 사회 모델과 드보르적 스펙터클 사회 모델을 몽타주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면서, 사회를 공동체 없이 재구조화하는 자본주의적 분리의 기술로서의 스펙터클이 정치적 힘으로서의 신체를 축소하는 분산적 감시통제 권력의 기제에 상응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스펙터클은 권력의 광학이 아니라 권력의 건축이다. 이제는 하나의 단일한 기계적 기능으로 수렴되고 있는 텔레비전과 개인용 컴퓨터는 우리를 고정시키고 금 긋는striate 반反유목적 수단들이다. 선택 및 ‘상호작용성’의 환영으로 가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신체를 통제 가능한 동시에 유용한 것으로 만들면서 획정과 정주를 활용하는 주의 관리의 방법들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코로나 대유행 중인 2022년에 긴급히 출간된 정치적 팸플릿 『초토화된 지구: 디지털 시대를 넘어 탈자본주의적 세계로』에서 “소셜 미디어에 혁명적 주체는 없다”는 진단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4]
푸코와 드보르는 크레리에게 비판철학의 방법론적 모델을 제공해준 이들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24/7 잠의 종말』이나 『초토화된 지구』처럼 21세기 들어 그가 주로 내놓은 시사성을 띤 저술들만 놓고 보면 그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협을 경고하는 문명 비판적 철학자처럼 비치기도 한다. 이런 책들에서 크레리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마크 피셔나 『좌파의 길: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의 낸시 프레이저 같은 풍모를 띠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관찰자의 기술』과 『지각의 정지』처럼 20세기 말에 내놓은 저술들에서, 크레리는 푸코의 고고학적・계보학적 분석과 드보르의 고도로 비평적인 에세이 스타일이 결합된 방법으로 주로 19세기의 시각과 근대성에 천착하는 박학다식한 비정통적 역사가의 면모를 보인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전자의 책들이 그가 언제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우리 시대에 대한 시사적 개입이라면, 후자의 책들은 우리 시대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학술적 모험이다. 둘의 관계에 대한 크레리의 인식은 『관찰자의 기술』을 여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인용한 “역사적 유물론자에게 있어서 그가 몰두하는 시대는 실제로 그의 관심을 끄는 시대의 전사前史일 뿐”이라는 말을 통해 분명히 표명된 바 있다.
『관찰자의 기술』과 『지각의 정지』에서 크레리가 몰두하는 시대는 물론 19세기이지만, 전자가 19세기 초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후자는 19세기 후반에 보다 초점을 맞추어 시각과 근대성의 관계를 파헤치고 있다. 그는 시각과 관련해 19세기 초반에, 구체적으로는 1820~30년대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며, 1838년 이후 사진의 발전이나 1870년대와 1880년대의 모더니즘 회화는 이러한 변화의 귀결 내지는 반향이라고 본다. 분명 이때 크레리는 『말과 사물』에서 푸코가 상정하고 있는 ‘근대성의 문턱’에 해당하는 시기를 염두에 두고 중대한 변화들을 고찰하고 있다. 17~18세기의 고전주의 시대를 특징짓는 재현/표상의 에피스테메와 단절하며 역사성에 입각한 근대적 에피스테메가 출현하는 시기 말이다. 푸코에 따르면, 분석의 장소가 세계에 대한 재현/표상에서 유한한 인간으로 이행한 이때부터 지식은 전적으로 선험적이기보다는 “해부학적-생리학적 조건을 띠고, 점차 신체적 구조 내에서 형성”된다.[5]
크레리는 푸코적 시대 구분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각 시대의 시각성을 나타내는 그만의 은유적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데 카메라 옵스쿠라와 입체경이 그것이다.[6] 둘의 차이를 따져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카메라 옵스쿠라는 장치 외부의 세계를 반드시 전제하지만, 입체경은 장치 내부에 장착된 미세하게 다른 두 장의 사진을 필요로 할 뿐이다. 카메라 옵스쿠라로 이곳저곳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관찰할 대상이 (또는 적어도 그 대상으로부터 나오는 빛이) 현존하는 장소로 거듭 이동하는 일이 필수적이지만, 입체경을 사용하는 관찰자는 굳이 어딘가로 이동할 필요 없이 소프트웨어에 해당하는 사진들만 바꾸면 된다. 카메라 옵스쿠라 장치 내부에 맺힌 상은 관찰자의 신체와 무관한 객관적 재현이지만, 입체경을 통해 지각되는 상은 관찰자의 좌우 두 눈에 개별적으로 입력된 시각 데이터에서 떠오르는 주관적 구성이다. 즉 후자의 ‘주관적 시각’은 철저하게 ‘육화된 시각’이며, 이것이 푸코가 “해부학적-생리학적 조건을 띠고, 점차 신체적 구조 내에서 형성”된다고 지적한 근대적 지식의 특성에 상응하는 시각임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을 터다. 카메라 옵스쿠라 모델에 어울리는 기하학적 광학에서 입체경 모델에 어울리는 생리학적 광학으로 이행하는 데 있어 선구적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색채론』의 괴테이다.
크레리의 논의에서 주관적 시각은 이중적 의미를 띤다. 그것은 객관적 대상의 반영이나 재현이라는 구속에서 풀려난 자율적 시각으로서, 이를테면 1840년대에 윌리엄 터너가 그린 <빛과 색 (괴테의 이론)─대홍수 뒤의 아침> 같은 회화에서 극단적으로 표명되듯 “잔상을 통해서 태양은 몸에 속하게 되고 몸은 사실상 태양의 효과를 내는 원천의 자리를 맡는” 수준에까지 이른다.[7] 하지만 이 정도로 풀려난 시각을 어떻게 다시 통합할 것인지의 문제가 새로이 제기된다. 이리하여 칸트적 통각 개념은 19세기 들어 지각의 통합이라는 문제와 관련해 주의 개념을 이론적으로 재구성하고 그것의 기능을 조사하는 일련의 시도들로 전환된다. 이는 양안적 시각의 생리학적 작동 방식을 계량화・형식화하고 이러한 시각과 결부된 관찰자를 규범화함으로써 오늘날의 우리가 놓여 있는 스펙터클적 감시 사회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는 것이 크레리의 주장이다. 『지각의 정지』에서 그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19세기 후반의 화가들, 즉 마네, 쇠라, 그리고 세잔이 그린 그림들 역시 주관적 시각의 양가성 속에서 진동하고 있는 작업들로 파악된다. 이로써 크레리의 논의는 우리로 하여금 모더니즘적 ‘순수 시각’을 강조하는 전통적 해석에서 벗어나 분산적 힘과 집중적 힘이 교차하는 역동적인 주의의 장으로서 회화적 표면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이 책의 번역 작업은 주로 코로나 대유행 기간에 이루어졌다. 번역을 결심했던 2019년 당시엔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던 몇몇 사안들이 대유행 기간에 사회적으로 표면화되면서 다분히 ‘역사적’이라고 생각했던 이 책이 예전보다 훨씬 더 시의성을 띠게 된 듯한 느낌도 든다. 크레리는 『초토화된 지구』에서 소셜 미디어가 정치적 역량을 얼마나 위축시키는지를 주의력과 관련지어 진단하면서, “반전 운동이나 반제국주의 운동에 요구되는 지속적 특성을 띤 투쟁과 연대는 소셜 미디어의 확산에 수반되는 일시적이고 공허한 형식의 주의력과는 양립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8] 그렇다고 해서 크레리가 지속적 특성을 띤 집중적 주의력의 회복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그는 스펙터클이 공통의 생활세계를 정지시키지 못하도록 저항하려면 사람들끼리의 만남이 필수적이라고 역설하며 스펙터클은 “‘만남rencontre의 능력을 약화’하는 일을 체계적으로 조직화하고 그러한 능력을 사회적 환각으로, 즉 만남에 대한 거짓된 의식 내지는 ‘만남의 환상’으로 대체”한다고 한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를 거듭 떠올려 본다.[9]
나는 2000년대 초반 영화잡지 《씨네21》 공모를 통해 영화평론가로 등단해 활동하다 대학원에 입학해 영화사와 영화이론을 공부하던 중 이 책을 처음 접했다. 세미나 시간에 함께 읽은 책은 『관찰자의 기술』이었지만 오히려 나는 개인적으로 읽은 『지각의 정지』에 좀 더 끌렸다. 작품에 대한 심미적 감응 능력을 강조하며 얼마간 형식주의적 분석을 차용해 이루어지곤 했던 다분히 도락적이고 미장센 중심적인 시네필적 영화비평에 의문을 품고 있던 시기였고, 정작 작품의 세부를 들여다보는 일은 소홀히 하면서 ‘문화적 산물들’을 관통하는 이데올로기와 그것의 이론적 함의에 주목하는 강단 문화연구의 공허함에도 싫증을 내던 시기다. 어쩌면 완벽한 모델은 아닐지 몰라도 이 책은 순전히 형식주의적이지도, 역사주의적이지도, 실증주의적이지도 않으면서 비평을 빙자한 도락과 문화연구의 공허함 모두를 넘어서는 비판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크레리의 이 책은 어떤 면에서도 영화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영화와 관련해서 무척이나 흥미롭게 다가온다. 시각성 모델과 관련된 그의 논의가 정통적인 매체사 서술에 도전을 가하는 지점이 무엇보다 영화를 통해 더할 나위 없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통상 영화는 사진과 더불어 카메라 옵스쿠라의 장치적 구성을 계승한 매체로 간주된다. 그런데 외부적 세계의 현존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고, 관찰 대상을 보기 위해 이동할 필요도 없으며, 여러 개의 정지 이미지를 결합해 운동을 구성해내는 주관적 절차에 있어 분명 영화는 크레리가 제시한 입체경 모델에 더 가까운 매체처럼 보인다. 더불어, 1870년대 후반에 바그너가 바이로이트에 선보인 무대 건축의 양식, 즉 무대에서 빛나는 환영들에 관객의 주의를 붙들어두기 위해 ‘인공 어둠’[10]을 활용하는 양식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이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관람 환경의 기본값으로 삼은 것이 바로 영화다. 크레리의 이 책은 영화 장치를 구성하는 여러 자연스러워 보이는 요소들이 실은 주의의 체제 속에서 짜깁기로 구성된 것이며 역사적 특징을 띠기에 얼마든지 의문의 대상일 수 있음을 여실히 깨닫게 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지각의 정지』의 은밀한 중핵 내지는 동력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영화다. 크레리는 근대적 시각성의 20세기적 총화라 해도 좋을 영화 장치의 역사적 구성을 미심쩍은 눈으로 보면서도,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등 이후에 출현한 매체들과는 달리 영화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어떤 대안적 가능성 또한 여전히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이 책을 1907년 9월 22일 로마 콜론나 광장에서 영화를 본 경험을 기술한 프로이트의 편지에 대한 언급으로 끝내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늦여름의 저녁 공기가 상쾌한 이 광장에 모여 전혀 바그너적이지 않은 관람 환경 속에서 이따금 상영되는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단체로 휩쓸리는 군중도 아니고 고독하게 분리된 개인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불확정적인 채로 두 극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 과연 이들이 대안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느냐 여부는 단지 스크린에 비치는 영화의 성격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과 제도를 어떻게 바꿀 것이냐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다만, 어느 순간 관람을 중단하고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숙소로 돌아간 프로이트처럼, 일단 우리는 스펙터클의 빛을 보기 위한 인공 어둠이 아닌 어둠 자체가 기다리는 시공으로 일단 자리를 옮겨야 한다. 눈보다 귀를 열어두고 밤을 기다리다가, 이내 잠을 받아들이면서, 만남을 고대하면서.
번역 원고를 꼼꼼히 검토해주신 문학과지성사 편집부 및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한다. 김미경, 김선태, 김현주 등 번역 작업이 고독과 분리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도록 도와준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23년 6월 7일
유운성
주
[1]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 나남, 2020(번역개정 2판), pp. 394~95.
[2] Jonathan Crary, “Spectacle, Attention, Counter-Memory,” October 50 (Fall 1989), p. 105.
[3] 조너선 크레리, 『24/7 잠의 종말』, 김성호 옮김, 문학동네, 2014, p. 25.
[4] Jonathan Crary, Scorched Earth: Beyond the Digital Age to a Post-Capitalist World, Verso, 2022, p. 14.
[5] 미셸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전면 개역판), p. 437. 번역은 수정.
[6] 크레리가 이처럼 1820~30년대에 시각성의 측면에서 중요한 단절이 있었음을 상정하고 카메라 옵스쿠라와 입체경을 각각 그 이전과 이후 시대의 시각성을 대표하는 모델로서 제시한 것은 1988년 4월 30일에 디아예술재단Dia Art Foundation의 후원으로 마련된 심포지엄에서다. 크레리 외에도 마틴 제이, 로절린드 크라우스, 노먼 브라이슨, 재클린 로즈 등이 참여한 이 심포지엄의 결과물은 핼 포스터가 책임 편집을 맡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Hal Foster ed., Vision and Visuality, Bay Press, 1988. 한국어판은 핼 포스터 엮음, 『시각과 시각성』, 최연희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2004.
[7] 조나단 크래리, 『관찰자의 기술: 19세기의 시각과 근대성』, 임동근・오성훈 외 옮김, 문화과학사, 2001, pp. 208~10. 번역은 수정.
[8] Jonathan Crary, Scorched Earth, p. 16.
[9]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이경숙 옮김, 현실문화, 1996, p. 173. 번역은 수정.
[10] 바이로이트축제극장과 인공 어둠에 대한 논의는 다음의 책을 참고. Noam M. Elcott, Artificial Darkness: An Obscure History of Modern Art and Media,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6, pp. 49~59. 이 책에서 엘콧은 조반니 파피니Giovanni Papini가 1907년 5월 18일에 『라 스탐파La Stampa』 지에 게재한 「영화의 철학La filosofia del cinematografo」이라는 흥미로운 기사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엔 “주의가 산만해지는 것을 막는 영화관의 바그너적 어둠에 의해 인공적으로 주의분산이 차단된 […] 오직 하나의 감각, 즉 시각”이라는 구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