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없이 말하는 것보다는 침묵하는 편이 낫다. 희망 없이 수다를 떠는 데서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냉소주의자의 태도다. 다만 희망을 낙관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낙관이란 지금 처해있는 상황을 둘러싼 요인들로 미루어 볼 때 얼마간 바람직한 미래가 가능하다고 진단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주식시장이 낙관적이라거나 부동산시장이 안정화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경제전문가의 발언 같은 것을 떠올려 보라. 희망은 여건에 비추어 미래를 낙관하는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가능성의 조건 자체를 응시하는 일이다. 희망은 낙관이라고 하는 타협을 용인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긍정하는 것이다. 주식시장이나 부동산시장에 대한 전망을 내놓기보다는 그것들을 없애버리자고 요구하는 것이 희망이다."
이것은 올해 단행본으로 출간할 요량으로 지난 여름부터 쓰고 있던, 이번 겨울에는 꼭 마무리하려 하는 글의 첫 문단이다. 집필이 지연되는 바람에 결국 출간은 늦어지게 되었다. 사전 광고라도 하듯 온전히 마무리하지 못한 원고의 일부를 온라인에 토막토막 공개하는 일은 삼가야 하겠지만, 2019년이 가기 전에 (지난 10년 간의 영화 베스트 목록 같은 것을 꼽기보다는) 일단 이 부분만은 어떤 식으로건 미리 꺼내놓고 싶었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요즘 들어 영화나 영상작품에 대한 비평을 읽다가 피로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가 처음으로 공식적인 지면에 영화평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1년(21세기의 첫 해)인데,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작품에 대한 경험과 풍부한 문헌 지식으로 무장한 글들이 도처에서 쏟아져나오고 있다. 이는 그 자체로 환영할 만한 일이며, 개인적으로는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가능한 이런저런 글들을 찾아 읽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데 정작 글들을 읽다 보면 전망과 조망과 관망 사이 어디선가 진동할 뿐 어떤 희망의 이념도 감지할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희망의 이념 바깥에서 움직이는 비평이란 있을 수 없고, 어떤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긍정은 물론이고 비판조차도 희망이라는 준거를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는 법인데도 말이다.
지난 달, 부산 영화의 전당이 기획한 시네마테크 총서의 일환으로 더들리 앤드류의 『앙드레 바쟁』(임재철 옮김, 이모션북스)이 발간되었다. 1978년에 출간(2013년에 개정판이 출간)되어 이제는 고전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에 대해 무성의하게 짧은 찬사를 늘어놓는 것은 무례한 일이겠다. 이 전기의 주인공인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여기서 더들리 앤드류가 인용하고 있는 세르주 다네의 말은 여러모로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다네는 주장하기를, "나쁜 영화작가는 아무런 아이디어가 없으며, 좋은 영화작가는 너무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위대한 영화작가는 단 하나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 단 하나의 아이디어를 갖는다는 것, "이것은 그로 하여금 항상 변화무쌍하고 흥미로운 풍경을 지날 때 제대로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준다." 다네는 이러한 진술이 비평가에게도 마찬가지로 타당하며, 앙드레 바쟁은 (1943년에서 1958년 사이에) 예외적으로 그러한 인물이었다고 지적한다. 나는 여기서 다네가 말하고 있는, 영화작가나 비평가의 길을 인도하는 '단 하나의 아이디어'을 '희망'으로 바꿔 이해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앙드레 바쟁은 희망의 대가라 할 만한 인물이다. 『앙드레 바쟁』을 읽는 누구라도 이 책의 도처에서 이 사실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작년 이맘때(정확히는 2018년 12월 22일), 나는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앙드레 바쟁 탄생 100주년 기념 포럼에 참석해 일본 학자 호리 준지 씨의 발표 이후 이어진 대담에 함께 한 적이 있다. 이튿날에는 영화의 전당 시네마테크관에서 '앙드레 바쟁이 사랑한 영화들' 프로그램 가운데 한 편인 앙드레 말로의 <희망 L'espoir>(1945)을 (영화관에서는 처음으로) 보았다. 이것은 (현재 집필 중인 단행본의 작은 토픽들 가운데 하나인) '무(無)에 대한 헌신'을 영화라는 불투명한 매체의 이념(희망)으로 삼고 있는 바쟁의 태도에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그제(12월 18일) 종로3가의 인디스페이스에서 경순 감독의 신작 다큐멘터리 <애국자 게임 2: 지록위마>를 보았다.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그리고 상영 후 이어진 대담 자리에서 "점점 희망이라는 말을 덜 쓰게 된다"는 경순 감독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저 미완의 원고의 첫 문단을 서둘러 꺼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작품이 이석기 내란 선동 사건 및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의 진실을 다룬, 혹은 은폐된 진실을 파고드는 다큐멘터리로 알려진 것은 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한국사회 전반에, 심지어 이른바 '진보진영' 내부에까지 파고들어버린 하나의 태도, 즉 이념(희망)을 상상하는 데도 한계와 룰과 테두리가 있어야 함을 당연시하는 이상한 태도 - 이를테면 <지록위마>에서도 비판적으로 언급되고 있듯, "국민은 헌법 밖의 진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심상정의 말 같은 것 - 에 대해 (비록 도중에 종종 멈칫하기는 해도 여하간) 문제제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주위에 희망의 결계(結界)가 둘러쳐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석기 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은 그 결계의 존재를 드러내보인 것일 뿐 결계의 원인은 아닐 것이다.
2020년을 맞이하기 전에,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단순하게 희망을 말하는 법부터 익힐 것을 다짐하고 또 요청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