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에 비평집 『유령과 파수꾼들: 영화의 가장자리에서 본 풍경』을 낸 이후 3년 만에 두 번째 책을 내게 되었다.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 세기의 아이들을 위한 반영화입문』(보스토크프레스, 2021)은 기존의 평론글을 모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제를 단행본 형태로 풀어볼 생각으로 새로 쓴 것이다. 표지와 서문을 올려둔다.
서문
서문을 쓴다는 것은 책의 불완전성을 자인하는 행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왕 쓰기 시작하면 역설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모든 서문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게 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서문은 기왕 쓴 것이니 그대로 둔다고 하면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미 써먹은 말이기도 하고 말이다. 한편,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서문은 무척이나 귀찮은 존재다. 제법 볼만한 것들이 보관되어 있다는 어떤 방으로 손님을 안내하면서 “들어가시기 전에 알아두실 게 있는데요. 그게 뭐냐면…”하고 자꾸 말꼬리를 흐리며 사람을 감질나게 만드는 천박한 주인과 같은 존재가 바로 서문이다.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도 이 책에는 서문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 이유는 어디까지나 제목에 ‘입문’이라는 단어를 썼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띄어쓰기 없이 쓴 ‘반영화입문’이 ‘반영화에 대한 입문’이라는 뜻인지 ‘영화에 대한 반입문’이라는 뜻인지 그도 아니면 ‘영화입문에 반하여’라는 뜻인지 굳이 밝힐 생각은 없다. 더불어, ‘반反’이라는 한자어를 ‘anti-’의 뜻으로 쓴 것인지 ‘counter-’의 뜻으로 쓴 것인지도 밝히고 싶지 않다. 사실 이 책은 의미의 그러한 불확정성 가운데서 진동하고 있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라는 식의 하나 마나 한 안이한 말로 책임을 떠넘길 생각은 전혀 없다. 이미 본문의 집필을 마치고 난 지금도, 나 또한 확정적으로 판단을 내릴 처지가 아님을 솔직히 밝혀두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진정한 입문서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꽤 명확한 상을 지니고 있다. 물론, 내가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입문서는 특정 분야에 학문적으로 접근하려 하는 이들보다는 교양 독자 일반을 대상으로 구성된 책이다. 즉, 교과서보다는 교양서의 성격을 띠고 있는 책이다. 문제는 후자의 책이 종종 전자의 책을 ‘쉽게 풀어서’, 바꿔 말하면 수식이나 전문 용어를 빼고 추론의 과정은 생략하면서 흥미를 돋우는 결과만을 요약해 제시하는 식으로 씌어진다는 데 있다. 여기에 최신 동향에 대한 정보를 더하고 약간의 잡기雜記를 곁들이면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쓴 수필 같은 것이 된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와 관련해 이런 종류의 책을 접하게 되면 개인적으로는 한 명의 독자로서 상당한 모욕감을 느끼곤 한다.
어떤 분야를 대상으로 한 것이든 독자의 지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미래에 대한 믿음과 일맥상통한다)으로부터 출발하는 입문서라면 핵심적 물음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방법적 모색의 과정들 자체를 독자가 오롯이 체험할 수 있게끔 구성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내가 생각하는 입문서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은 로저 펜로즈가 쓴 『황제의 새 마음: 컴퓨터, 마음, 물리법칙에 관하여』이다. 펜로즈는 블랙홀에 대한 특이점 정리를 통해 2020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학자이고, 에셔의 기묘한 판화 그림과 관련해 종종 언급되는 펜로즈 삼각형 (또는 펜로즈 계단) 등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일찌감치 1996년에 국내에 두 권으로 번역서가 나온 『황제의 새 마음』은 “컴퓨터로 마음을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접근하고자 할 때 유용한 방법적 도구로 고려해봄 직한 여러 현대적 이론들(알고리즘과 튜링 기계의 원리,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비재귀적 수학, 그리고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에 이르는)의 한복판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하지만 펜로즈는 결코 결과만을 요약해 제시하는 법이 없다. 그의 책은 각각의 이론적 도구를 떠받치는 정리들로 향하는 추론 과정 자체에 독자를 깊숙이 끌어들이는 한편, 핵심적 물음을 둘러싼 논쟁과도 끊임없이 대면하게끔 하는 구조로 서술되어 있다. 실제로 나는 이 책을 예술 전공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양 강좌의 교재로 삼아 한 학기 동안 강의해본 적도 있다.
그런데 영화와 관련해서는 양자역학만큼 강한 이론은 말할 것도 없고 유력한 이론이랄 것조차 없다시피 하다. 그저 다른 것보다 조금 널리 읽히는 문헌들이 있는 정도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이론을 갖춘 ‘영화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와 관련된 기존의 문헌들을 읽고 또 문헌들을 생산하는 분과로서의 ‘영화 연구’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교양서 성격의 입문서를 쓰는데 활용할 이론적 도구 또한 전무하다. 이런 사정은 영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흔히 예술이라 불리는 모든 영역에서 마찬가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다른 예술들은 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역사적 두터움을 지니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이론적・역사적 취약함은 생산자와 수용자 각각으로 하여금 영화를 대하는 방법의 문제를 두고 끊임없이 스스로 고민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 어떤 절대적인 이론적 접근도 허용하지 않고 역사적 사례에 호소하는 일도 무력하게 만드는 영화의 강고한 모호함이야말로 그 주변에서 온갖 쟁론들이 펼쳐지게끔 하는 역동적 동인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나는 영화와 관련된 핵심적 물음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영화하는가?’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들을 둘러싸고 흥미로운 제안을 내놓은 세 명의 영화인을 주요 등장인물로 내세워 일종의 비평적인 사변 소설을 써 보고자 했다. 앙드레 바쟁, 장뤽 고다르, 그리고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 바로 그들이다. 나는 이들이 쓴 글이나 이들이 만든 영화 작품 자체를 교과서적으로 해설하려 들기보다는, 그들의 글과 작품을 매개로 삼아 오늘날의 저널리즘에서, 학계에서, 그리고 일상적 담화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는 동시대적 쟁론들을 검토해보고자 했다.
이 책의 구도를 미심쩍게 바라보며 이런 물음을 던지는 이도 있을 수 있다. 당신은 왜 정전의 자리에 오른 글이나 작품을 남긴 영화 작가나 평론가를 내세우고 있는가? 바쟁, 고다르, 에이젠슈테인은 물론이고 이 책에서 당신이 언급하는 사례들은 지나치게 유럽 중심적이지 않은가? 사실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작업을 중요하게 고려해보고는 있지만, 실제로 이 책에서 나는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중동, 중남미 그리고 아프리카의 영화인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본연의 기능에 충실한 입문서라면 핵심적 물음 주위를 집요하게 맴돌면서 사유의 연습을 수행해야 할 터인데,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중동, 중남미 그리고 아프리카의 사례를 선택하는 일은 자칫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게 여겨질 수 있다. 나는 유럽 중심적이지 않은 사례를 선택했다는 것만으로 뭔가 문제를 돌파했다는 듯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얼마간의 비판을 감수하고서라도, 20세기의 영화 담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서구적 사유들과 제대로 대결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나는 인도의 리트윅 가탁, 일본의 마츠모토 토시오, 그리고 필리핀의 롤란도 B. 톨렌티노 같은 아시아 영화인들이 전개한 논의들에 대단히 흥미를 느끼고 있지만, 이들에 대해 자세히 논하는 일은 이 책과는 성격을 달리할 후속 작업으로 미뤄 두기로 했다. 그러한 논의들에 나 자신이 끌리게 된 과정에서 실제로 상당한 역할을 한 서구적 사유들을 건너뛰고 입문서를 쓴다는 것은 자칫 사다리를 걷어차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다시 생각해보니, 영화에 대해 사유하는 일에 위계나 단계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하므로, 사다리를 걷어찬다는 표현보다는 다리와 길을 끊는다는 표현이 더 낫겠다.)
이 책에는 적지 않은 주석이 포함되어 있지만, 인명이나 용어를 해설하기 위해 쓴 경우는 거의 없다. 간혹 있다고 해도 해당 용어와 얽혀 있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 국한되어 있다. 즉, ‘프리츠 랑(Fritz Lang, 1890~1976): 독일의 영화감독. <M>과 <메트로폴리스>가 대표작. 나치의 압력을 피해 할리우드로 망명해 범죄 영화와 서부극 등을 연출.’ 또는 ‘누벨바그(Nouvelle Vague): 1960년을 전후해서 프랑스에서 일어난 새로운 영화 운동.’ 식의 주석이 이 책에는 없다. 사실상 아무것도 설명하고 있지 않은 이런 식의 주석은 출판계에서 여전히 관행적으로 존속되고 있는 적폐 가운데 하나다. 이런 주석은 무언가를 찾는 기쁨을 누릴 권리를 독자에게서 박탈하고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독자를 언제나 참고서에 매달리는 수험생 취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쾌감을 준다.
다만 ‘시네마’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의 쓰임새를 미리 밝혀 두는 편이 좋겠다. 외국에서 출간된 영화 관련 문헌들을 읽다 보면 ‘film’은 개개의 영화 작품을 가리킬 때, 그리고 ‘cinema’는 영화 일반을 가리킬 때 사용되곤 한다. 한편으로는 ‘movie’나 ‘motion picture’ 같은 말도 있다. 그러나 한국어로는 모두 ‘영화’다. 홍상수가 만든 한 편의 영화(‘A Film by Hong Sang-Soo’)도 ’영화‘고 한국영화(’Korean Cinema’)도 ‘영화’다. 나는 그야말로 ‘영화답게’ 모호하고 개별과 일반을 넘나드는 ‘영화’라는 한자어가 마음에 든다. 그래서 책 전체에 걸쳐 특별한 표기 없이 ‘영화’라고 썼고 외국 문헌을 번역해 인용할 때도 가급적 ‘cinema’와 ‘film’을 모두 ‘영화’로 옮겼다. 하지만 일부러 독자를 혼란스럽게 할 뜻은 없으므로, 어떤 보편적 이념(형)으로서의 영화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싶을 때는 ‘시네마’라고 명기했다. ‘필름’은 사진 이미지가 각인되는 물질적 매체를 가리키는 경우에 국한해 사용했다.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라는 제목은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에서 따온 것이다. 정확히는 이 책에 수록된 단편 가운데 하나인 「한밤의 조우」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말에서 따왔다. 이 단편은 각기 다른 시간대에 속해 있어 서로 대화는 가능하지만 접촉이 불가능한 존재들 간의 일시적인 만남을 다루고 있다. 나는 이 매혹적인 단편에서 발췌한 구절들을 박민하 작가의 영상 작업에 대해 논한 글 「영화, 혹은 소통 불가능한 감각의 사막을 찾아서」에서도 인용한 바 있다. (몇몇 사정으로 아직 출판되지 않은 이 글은 본서의 주제와도 느슨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발터 벤야민은 ‘역사철학테제’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진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자신의 세대를 가리키며 ‘세기의 아이들’◆이라는 멋진 표현을 썼다. 원래의 문맥에서 떼어내 이 책의 부제를 위해 활용하는 일이 과연 온당한 짓인가도 싶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이 함축적인 표현에 담긴 벤야민의 희망을 어떻게든 우리 세기의 것으로 삼고 싶었다.
2021년 9월
유운성
◆ 원래의 독일어 단어는 현세주의자를 뜻하는 ‘Weltkind’이지만 벤야민은 직접 프랑스어본을 만들면서 이를 ‘세기의 아이들(les enfants du siècle)’이라고 옮겼다. 이를 고려하면 ‘Weltkind‘는 ’세계(Welt)의 아이(Kind)‘라는 뜻을 염두에 두고 쓴 표현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겠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책을 참고. 미카엘 뢰비, 『발터 벤야민: 화재경보』,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난장, 2017, 134~139쪽. 1983년에 초판이 나온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에서, 역자인 반성완은 ‘Weltkind’를 ‘현세주의자’로 옮겼다. 발터 벤야민 선집 가운데 하나로 2008년에 출간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폭력비판을 위하여/초현실주의 외』(도서출판 길)에서 역자인 최성만은 이를 ‘평범한 사람들’이라 옮겼다. 『발터 벤야민: 화재경보』의 뒷부분에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프랑스어판의 한국어 번역본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양창렬의 번역으로 해당 부분을 읽어 보면 의미가 훨씬 선명하게 다가온다. ”여기서 우리가 제시하는 성찰들 (…) 파시즘의 반대자들이 희망을 걸었던 정치가들이 무릎을 꿇고 좀 전까지 자신들의 것이었던 대의를 배신하면서 패배를 시인하는 와중에, 이 성찰들은 선의의 인간들이 남발했던 약속들에 농락당한 세기의 아이들에게 보내진다.“(243쪽)
------
보스토크프레스의 제안과 격려가 없었더라면 정말이지 나는 이런 책을 쓸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집필에 착수했다 해도 끝까지 마무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책을 내기까지 원고를 세밀히 살피고 의견을 준 김현호 발행인, 박지수 편집장, 이기원 평론가 세 분께 우선 감사드리고 싶다.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서울아트시네마, 대전아트시네마, 아트선재센터, 그리고 아르코미술관에서 진행한 다음의 강연들은 이 책을 집필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강연에서 제시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집필에 활용하기도 했고, 책의 초고를 바탕으로 강연하면서 귀중한 피드백을 얻기도 했다. ‘역량과 유령: 영화에 대한 두 개의 가설’(서울아트시네마, 2017년 9월 12일), ‘스크린으로서의 세계: 키아로스타미의 버추얼리티’(서울아트시네마, 2021년 5월 16일), ‘독신과 불신’(대전아트시네마, 2019년 11월 17일부터 12월 29일까지 매주 일요일), ‘에이젠슈테인을 다시 읽는다’(대전아트시네마, 2021년 7월 8일부터 8월 12일까지 매주 목요일), ‘반영화입문: 연명하지 않는 영화의 삶’(아트선재센터, 2020년 8월 3일부터 8월 23일까지 매주 월요일), ‘파편들 사이에서 말하기: 불확정적 영상 작품을 대하는 비평의 자세’(아르코미술관, 2019년 10월 3일) 등이 그것이다. 이와 더불어, 《보스토크》, 《오큘로》, 《기획회의》 등 잡지에 기고했던 글들도 상당한 수정을 거쳐 몇몇 부분에 활용되었다. 본서 1장의 내용을 절반 정도로 축약한 글은 《씨네21》 창간 26주년 특집호(1300호)에 ‘시네마, 역량과 유령 사이에서’라는 제목으로 실리기도 했다. 영화에 대해 강연하고 글을 쓸 기회를 준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