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서니 맥콜의 「지속시간에 대한 노트 Notes in Duration」(1975)
※ 올해 서울국제실험영화제(EXiS, 2015.8.20~8.27)는 영화제 기간 동안 「카운터-프로덕션 Counter-Production」이란 주제 하에 시청각갤러리에서 전시, 강연, 퍼포먼스 등을 진행했다. (전시 팸플릿은 이곳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전시 작품 가운데는 앤서니 맥콜(Anthony McCall)의 1975년 설치작품 <앰비언트 라이트를 위한 영화 Long Film for Ambient Light>(1975)가 포함되어 있었다.
앤서니 맥콜이 촬영한 전시장 사진
(1975년 6월 19일 오전 3시. 뉴욕의 Idea Warehouse)
맥콜이 직접 작성한 작품 설명을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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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도 영사기도 사용하지 않는 작품. 세 가지 요소가 모여 이 '영화'를 구성하는데 이 요소들 가운데 어떤 것도 다른 것에 선행하지 않는다.
(1) 벽에 붙은 시간표. 총 50일 치. 실제로 전시가 이루어지는 기간은 시간표 한가운데 표시되어 있다. [※ 원래 이 작품은 1975년 6월 18일 정오부터 다음 날 정오까지 24시간 동안 전시되었다.]
(2) 변형된 공간. 전시실 한가운데에는 전구 하나가 눈높이에 매달려 있다. 창문들은 모두 하얀 종이로 덮여 있는데 이로써 주간에는 광원 역할을 하고 야간에는 반사면(즉, 스크린) 역할을 하게 된다.
(3) 벽에 붙은 「지속시간에 대한 노트」라는 제목의 2페이지짜리 스테이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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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청각갤러리 전시를 위해 「지속시간에 대한 노트」 전문을 번역하게 되었는데 이를 아래 옮겨 둔다.
지속시간에 대한 노트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이 영화는 동적인 작품처럼 여겨지는 것과 정적인 환경처럼 여겨지는 것 사이의 문턱에 조심스레 자리하고 있다. 형식주의적 예술 비평은 단호하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 이 두 가지 상태를 구분하려 해 왔는데, 이러한 분리는 내겐 부조리하게 여겨진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생각이라고 하는 (전기화학적) 과정 또한 물론이거니와,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 우리의 지성이 연속적 시간에 대한 지각을 굳이 ‘순간들’로 분리해 분석하게끔 된 것은 문화적[으로 얻어진] 습성이다. 연속적이고, 중층적이며, 다중적인 지속보다는 정적이고, 절대적인 경험의 덩어리들을 고수하려 드는 것은 편리할지는 모르나 분명 왜곡된 인식의 태도다.
우리는 그것을 감상하는 시간 동안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 예술을 ‘대상’이라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감상하는 시간 동안 변화를 보여주는 예술을 ‘사건’이라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우리보다 오래 살아남는 예술을 ‘영원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중요한 사실은, 본질적으로 연속적인 시간에 기반을 둔 것들이 절단되고 구분되는 것은 바로 우리를 통해서라는 점이다.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벽에 붙은 한 장의 종이는 영화 상영과 마찬가지로 지속[되는 것]이다. 유일한 차이는 그것이 우리의 지각들과 맺는 즉각적인 관계에 있다.
두뇌에 가해지는 자극의 측면에서 보면, 정적인 것이란 [동일하게 여겨지는 것이] 반복되는 사건이다. 숙고가 행해지는 장소가 ‘정적’이건 ‘동적’이건 간에, 우리는 예술 행위라는 맥락 속에서 주의집중의 시간을, 인지와 기억의 과업을 처리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대상이나 사건에 [직접] 다가갈 수 없다. 그것들은 좀처럼 ‘과시’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의도된, 의미를 품은 기호이기 때문에 이[처럼 ‘과시’되지 않는다는] 점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일단 하나의 관념이 ‘마음에’ 자리를 잡고 나면, 그것은 (예술적) 관념들의 회로에 들어가 그 회로 내에서 톺아볼 수 있게 될 뿐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는다. 정적이건 동적이건 어떤 예술작품의 파악은 다른 모든 경험들과 마찬가지로 잠깐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경험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 남은 것이다. 영화 상영과 관련된 규준들 가운데 하나는 ‘제한적으로, 무리지어 보게’ 하는 것이었다. 어떤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특정한 시간에 모이는 것이, 그럼으로써 ‘관객’이라 불리는 사회적 집단을 형성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 집단에는 특수한 행동 특성이 있다.
<화재 주기 Fire Cycle>(1974)와 <네 대의 영사기를 위한 긴 영화 Long Film for Four Projectors>(1974)를 통해, 나는 작품의 지속시간을 늘리는 것이 관객에게 가능한 집중의 성격을 의미심장하게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알고 만족했다. [통상적인 영화와는 달리 작품을 보기 위해] 주의집중을 해야 하는 시간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 작품의 감상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소요될 지는 그저 [관람객 각자에게] ‘열려’ 있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시간에 따라 오고 갔다. 계속해서 바뀌기는 했어도 작품 각각의 구조에는 체계적인 균등성이 있었다. 특정한 위치에서 감상해야 한다는 지시도 없었고, 두 작품 모두 특별히 주의집중의 축이 생기지 않게끔 전체 [전시]공간을 활용했다. (이 점에 있어서 이 두 편의 작품은 <원뿔을 그리는 선 Line Describing a Cone>(1973) 같은 나의 전작들과 다르다. <원뿔을 그리는 선>의 경우에도 관람을 위한 위치는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거기에는 공간을 가로지르는 한 방향의 축이 있었다. [관람객들의] 눈의 방향은 결국 언제나 한 곳으로, 즉 영사기의 렌즈로 향했던 것이다.) 어떤 순간에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있을 때에도 [전시공간의] 규모는 그들을 공간적으로 분리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형식적 특성으로 인해 관람객과 작품 간에 일대일의 관계 성립이 가능해졌다.
이제 나는 다른 기본적인 것들, 즉 시간성과 빛에 대해 탐구하기 위해 [작품에서] ‘공연적’ 측면을 줄여나가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나는 [영화에서] 관습적으로 쓰이는 (비싸고 느리다는 점에서 불리한) 사진화학적, 전기역학적 과정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러한 탐구를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나는 청개구리 같은 짓거리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으며, 모든 ‘제1원리’ 뒤에는 다른 것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고, 내가 [통상적인 방식으로] ‘영화들’을 만드는 일을 계속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동안 나는 [영화]제작의 물리적 과정보다는 예술적 행위로서의 영화 뒤에 숨은 가정들에 천착하려 한다.
앤서니 맥콜
1975년 뉴욕에서
(번역 유운성)
로무알트 카마카의 <히믈러 프로젝트 Das Himmler Projekt>(2000)
※ 2015년 9월 17일부터 24일까지 열릴 DMZ국제다큐영화제에 독일감독 로무알트 카마카(Romuald Karmakar)가 심사위원으로 참석할 예정이라 한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었을 때 특별전을 마련해 초청한 바 있는 감독이다. 그는 21세기 독일영화계에서 크리스티안 펫촐트(Christian Petzold)와 더불어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카마카의 경우 알렉산더 클루게의, 펫촐트의 경우 하룬 파로키의 영화적 동지이자 제자이기도 하다. (얼마 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상영된 펫촐트의 <피닉스 Pheonix>(2014)는 유대인수용소의 생존자 문제를 다룬 수작으로, 놀랄만큼 과대평가된 '예술연습' 영화 파벨 파블리코프스키의 <이다 Ida>(2013) 같은 작품과는 비교를 불허한다. 영화사(史)와 인간의 역사에 접근하는 윤리적 태도도 인상적이지만 느리게 타올라 기어이 관람자를 뒤흔들어 놓고야 마는 감정적 조율이 압도적이다.) 이번 방문기간 동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마카 작품 가운데 한 편인 <히믈러 프로젝트>가 상영된다. DMZ국제다큐영화제의 의뢰를 받아 메인카탈로그에 수록될 짧은 리뷰를 하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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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믈러 프로젝트 The Himmler Project / Das Himmler Projekt
감독: 로무알트 카마카 Romuald Karmakar (2000, 182분)
동시대 독일영화감독들 가운데 가장 비타협적인 인물이라 할 로무알트 카마카는 쉬이 범주화되기 힘든 독특한 작업들로 예민한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한편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함부르크 강연>(2006)과 더불어 그의 가장 대담무쌍한 작품으로 꼽히는 극단적인 ‘낭독의 영화’ <히믈러 프로젝트>(2000)만큼이나 철저하게 카마카다운 영화도 없을 것이다. 카마카는 나치 독일의 2인자였던 하인리히 히믈러가 1943년 10월 4일 폴란드의 포즈난(독일어 명칭은 포젠)에서 92명의 나치 친위대(SS) 장교들에게 행한 연설, 무엇보다 유대인절멸계획에 대한 언급으로 악명 높은 그 연설을 영화의 소재로 취했다. (이 연설은 비밀리에 행해진 것이었지만 전체가 녹음 및 보존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영화의 아이디어는 단순하다. 단색의 배경막 앞에 강연대만이 덩그마니 놓인 세트에서 한 명의 배우(만프레드 자파트카)가 히믈러의 연설 녹음자료를 토대로 작성된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낭독하는 것이다. (3시간에 달하는 영화의 상영시간은 히믈러가 실제로 연설했던 시간과 거의 같다.) 사실 자파트카는 텍스트를 ‘낭독’(reading)한다기보다는 (매우 이례적인 방식이기는 해도) 분명 그것을 ‘연행’(performing)하는 배우로서 - 하지만 히믈러라는 배역을 연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 카메라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간헐적으로 쇼트의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카메라는 낭독 중인 자파트카의 얼굴을 그의 눈높이에서 포착하는 데 집중한다. 그런데 히믈러의 연설 도중 청중이 보인 반응(가령 웃음소리)이 자막으로 제시되는가 하면, 연설 도중 말의 중단이나 실수까지도 가감 없이 드러나고, 행사장의 보안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안 히믈러가 잠시 연설을 중단하고 부하들에게 내리는 지시 또한 고스란히 낭독되는 등, 연설 자체를 재연하려 하기보다는 연설 녹음자료의 시청각적 분석을 통해 연설의 정황을 읽어 내고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진다. 쇼트의 변화는 연설의 토픽이 미묘하게 전환되는 경우나 히믈러가 청중 가운데 누군가를 바라보며 지목하는 경우 - 이때 카메라는 그 청중의 시점에서 앙각으로 히믈러를 올려다본다. - 에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러한 변화에 대한 기대 및 예측과 결부된 서스펜스는 대단히 강렬해지며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관객은 그 의미와 이유를 숙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영화를 보는 이라면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볼 법도 하다. 이것을 제1차 포젠 연설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한 미니멀리즘적 픽션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연설 녹취록의 낭독이라고 하는 사건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로 간주해야 하는가? 이 물음을 픽션과 다큐멘터리 간 경계의 모호함이라고 하는 (이제는 벌써 진부하게 느껴지는) 오늘날 널리 퍼진 담론의 맥락에서 파악하려 드는 건 쓸모없는 일이다. <히믈러 프로젝트>는 하나의 거대한 픽션을 해부하기 위해 마련된 시청각적 실험실이다. 여기서 거대한 픽션이란 히믈러가 연설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바, 나치 친위대가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가운데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의 틀을 완전히 다시 짜는 것이다. 통상 히믈러의 연설은 3시간에 달하는 전체 가운데 유대인절멸에 관한 5분 남짓한 부분만이 강조되고 거듭 인용되어 왔는데, 카마카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제3제국의 거대한 픽션이라는 맥락 속에서 다시 살펴보게끔 한다. 카마카의 집요한 시청각적 분석을 따라 히믈러의 연설을 주의 깊게 살피다 보면, ‘히믈러 프로젝트’가 비단 나치즘 시기에 국한된 과대망상증적 픽션이라기보다는 오늘날까지도 독일을 사로잡고 있는 픽션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닫고 놀라게 된다. 2000년에 <히믈러 프로젝트>가 첫 공개되었을 때 이 영화는 사뭇 예언적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히믈러의 발언은 독일 주도 하의 유럽연합 체제를 좌지우지하는 ‘메르키아벨리즘’(울리히 벡)과 소름끼치게 공명하는 것으로 비친다. 즉, 카마카는 이미 화석화되고 진부한 방식으로만 언급되는 역사적 도큐먼트를 온전히 치밀하게 다시 ‘읽는’ 과정을 통해 어떻게 동시대의 이슈에 개입할 수 있는지를 놀랄 만큼 단순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픽션이나 다큐멘터리, 혹은 에세이 영화 같은 용어들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를 시청각적 문헌학(audio-visual philology)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카마카는 9.11 테러범들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이슬람교 지도자 모하메드 파자지의 2개의 강연 녹음자료를 토대로 한 <함부르크 강연>에서 (다시 한 번 배우 만프레드 자파트카와 함께) <히믈러 프로젝트>에서 실험한 방법론을 더 밀고 나가게 된다. 이들 작업은 ‘낭독’이라는 행위가 전면화된 정치적 미학을 실험했다는 점에서 이따금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 혹은 카마카의 영화적 스승인 알렉산더 클루게의 몇몇 작업들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의 텍스트에서 잠재적 의미를 끌어내거나 다른 텍스트와의 병치를 통해 새롭게 가능한 의미를 더하는 그들의 작업과 카마카의 작업을 나란히 놓는 것은 적절치 않다. 히믈러의 연설이나 파자지의 강연 같은 오명의 텍스트에 이끌리는 카마카는 무엇보다 그러한 텍스트들을 내파시키는 데서 자신의 정치성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