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23

가을


2013.10.31 『인문예술잡지 F』 제11호(2013.10.31) 발간


잔상(殘像/after-image/Nachbild/image rémanente). 이는 어떤 이미지가 사라진 이후에도 잔존하는 이미지를 일컫는 광학 용어다. 그런데 어떤 이미지 이후에는 과연 그 이미지의 잔여로서의 이미지만 있을 뿐인가? 이후에 있는 것은 남은 것을 초과한다. 이미지 이후에야 비로소 다가오는 것들도 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 이상으로 이미지 이후에 남은 것, 드러나는 것, 다가오는 것 들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고 말이다. 이미지 이후란 사유의 시간, 창조의 시간, 비평의 시간이 개시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번 호 특집을 위해 총 네 분의 예술가들을 자리에 모셨다. 어떠한 이미지들과 조우한 이후, 그들에게 개시된 사유와 창조와 비평의 시간을 엿보고 싶었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김태용은 사뮈엘 베케트의 단편영화 <영화 Film>(1965)가 그에게 불러일으킨 일련의 사유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화해불가: Fiction For Film」을 보내주었다. 부제가 가리키는 대로, 이것은 베케트의 영화를 위한 픽션인 동시에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픽션이기도 하다. 결국 실현되지 못한 채 구상으로만 존재했던 어떤 영화의 ‘흔적’, 그리고 우연히 얻은 여러 삶의 잔상들로 이루어진 임철민의 <프리즈마>는 올해 나온 가장 대담한 한국영화 가운데 한 편일 것이다. 일종의 구체음악과도 같은 이 영화에 대해, 즉흥음악가 홍철기가 임철민 감독을 직접 만나 인터뷰한 기록을 실었다. 이이체 시인의 「활자의 전이: 잔상 이후의 이미지로서의 시/매체」는, 문자의 탄생 이후 전통적으로 종이 매체에 의존해 왔던 시(詩)가 오늘날 다종다양한 시각매체와 만나고 충돌하는 광경에 대한 사색을 담고 있다.

통권 10호를 맞아 조금 두툼해졌던 『인문예술잡지 F』를 이번 호엔 다시 단출하게 꾸려 보았다. 동시대의 담론을 이끌겠다는 식의 거창한 야심 없이, 비평가와 예술가들이 자유로이 실험적 사유를 펼칠 수 있는 조촐한 장(場)을 마련해 보려 했던 창간 당시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 보고 싶었다. 거대 서점의 서가에 버젓이 한 자리를 차지할 만큼의 권위를 갖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어떤 작은 책방의 구석에서 우연히 뽑아 들었다가 낯설고 신기한 기분에 한동안 서서 읽게 되는 그런 잡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와 조우한 이들에게 사유의 시간, 창조의 시간, 비평의 시간을 개시하는 어떤 희미한 이미지처럼. 




고함: 잔상 After-Image

화해불가: Fiction For Film (김태용)
꿈처럼 흐르는 ‘프리즈마’― <프리즈마>(2013)의 임철민 감독 인터뷰 (홍철기)
활자의 전이: 잔상 이후의 이미지로서의 시/매체 (이이체)

돌아봄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 변재규의 <사진 측량> (방혜진)
연극이 기억해줄 수 있는 것― <언젠가> (김해주)

말세움

더글라시즘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 킴킴갤러리와 그의 친구들 (이상길)
[칼럼] 흐름을 넘어선 영화비평 (크리스 후지와라)
[연재] 뤼미에르 은하의 가장자리에서 Part.2
― 고유명으로서의 이미지와 아트갤러리로서의 영화관(中) (유운성)
[Bookend] 독일지식인들은 왜 그렇게 나쁜 문체로 글을 쓰는가 (발터 벤야민)



2013.10.24 영화와 수동성


우연의 일치. 영화와 '수동성'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글 두 편을 나란히 읽었다. 하나는 관람의 수동성에 대해, 다른 하나는 작가 혹은 창작의 수동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건 수동성이라는 단어가 예술과 결부될 때 종종 부정적 함의를 띠곤 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있단 점에서 흥미롭게 다가왔다. 

먼저 읽은 것은 10월 31일에 출간될 『인문예술잡지 F』 제11호(특집: "잔상 After-Image")에 실릴 크리스 후지와라의 칼럼 「흐름을 넘어선 영화비평」이란 글이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 (...) 현대영화가 다루어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관객을 위한 공간이란 없다는 것이다.  (...) 동시대의 이데올로기는 우리는 모두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자라고 떠들어대며, 언제든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든 세상에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최대한 키우라고 충고한다. 영화비평은 우리가 영화를 대할 때 가지는 수동성에 대해 보다 긍정적으로 말해야 한다. 세계가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분명 그것은 우리에 앞서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과 우리의 모든 상호작용의 기저를 이루는 것은, 결국 수동성이다. 수동적인 영화관객으로서, 우리는 영화를 상영하는 이들이 우리의 합의 없이 지정한 장소로, 그들이 지정한 시간에 영화를 보러 간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경험을 [능동적으로] 조정할 수 없다. 우리는 기껏해야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어떤 견해를 표명하(고 다른 관객들의 반감을 살 위험을 무릅쓰)거나, 영화가 끝나기 전에 자리를 떠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수동성의 상태는 오늘날 위기에 처한 관객성의 양식을 위한 조건으로서, 이는 영화적 경험의 기본적 변증법을 보장하며 비평을 만들어내고 유지시키는 긴장을 가능하게 한다."

다른 하나는 지난 10월 17일에 발행된 『건축신문』 제7호에 실린, 현시원(큐레이터)과 김홍중(사회학자)이 정윤석의 <논픽션 다이어리>를 둘러싸고 나눈 대담 「다른 언어로 시대에 말을 거는 예술과 학문」이다. "김홍중: 궁극적으로 작가는 수동성에 노출되고 그 수동성이 어떻게 보면 정치적이고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미스터리한 가능성이라고 봅니다. <논픽션 다이어리>도 좀 더 수동성을 개방했으면 어땠을까요? / 현시원: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작가들은 자신의 수동성을 내어주면서 관객들과 만나고 있는 것 같거든요. 1990, 2000년대 작가들은 "난 할 수 있어"보다는, 내가 다 할 수 없다는 어떤 실패의 감각에서 작업의 추동력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 김홍중: 저는 '기생'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사회 정치 윤리 등은 작품 안에 기생해야지, 작품의 색을 규정하는 실체적인 무엇으로 나타나면 안 된다고 봐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야 해요. 그러려면 작가는 사회 정치 윤리를 대상으로 다루면 안 되고, 거기에 물들어야, 병들고 오염되어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작품이 사회 정치 윤리를 기생충으로 품고 있는 병든 숙주가 되어야지, 작가가 대상으로 조작하는 순간이 오면 사회 정치 윤리는 작품으로 들어가지 못하거나 작품을 일그러뜨리는 것으로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 봅니다. (...) 그 기생충, 즉 숨겨져 있는 사회 현상과 문제점들을 발견할 수 있는 힘은 관객과 독자에게 있어요. 그걸 믿어야 하고 (...)"

비평을 가능케 하는 수동성과 비평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 수동성. 이건 요즘 몇 년 간 나를 사로잡았던 문제이고, 지난 2011년부터  『인문예술잡지 F』에 (띄엄띄엄) 연재해 오고 있는 「뤼미에르 은하의 가장자리에서」라는 글을 쓰면서 어떻게든 풀고 싶은 숙제이기도 하다.



2013.9.23 스튜디오 지브리에 대해 두 번 생각함


내 글쓰기는 대체로 자발적이라기보다는 외부의 요청(즉, 청탁)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끝난  「스튜디오 지브리 레이아웃 展」의 카탈로그에 실린  「애니메이션과 리얼리즘의 처소(處所):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이라는 제목의 글도 그렇게 해서 쓰게 된 것 가운데 하나다. 그 글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그동안 애니메이션에 대해선 거의 글을 써 본 일이 없다. 여하간 그 글을 쓰면서 재패니메이션, 특히 지브리 애니메이션에서의 동물 - 폭넓게 괴물이나 요괴까지를 포함해서 - 의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글을 쓸 당시에는 좀 막연하게 이러한 동물의 존재가 모종의 윤리와 결부되어 있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전후 일본(이라는 장소), 이 '역사화된' 장소로 인해 부과되는 금기들 혹은 행위의 한계, 그 한계 너머를 상상하는 것이 허락된 유일한 장르로서의 애니메이션과 그 안의 동물들에 대해 좀 깊이 생각해보게 된 건,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바람이 분다>를 보고 나서다. (몇몇 재패니메이션에서 우리는 인간(일본인)인 채로 무리하게 저 금기를 넘어서려 시도하는 인물들을 보게 되는데, 가장 극단적인 경우에 그 위반의 대가는 신체의 격렬한 파열과 히로시마-나가사키 악몽의 재래이다. 오토모 가츠히로의 <아키라>(1988)는 이의 가장 '고전적'인 예다. 이 영화는 '네오 도쿄'의 불가능성에 대한 음울한 판타지이다.) 갑작스레  「프레시안」의 김용언 기자의 요청을 받아 미술-디자인 평론가인 임근준씨와 이 영화를 두고 대담을 하게 되어, 개봉하자마자 서울극장에 가서 <바람이 분다>를 보았다. 대담 전문은 아래에서 볼 수 있다. 



이 대담에서 나는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서 일본은 비행 - 정확히는 인간이 난다는 것 - 이 금지된 장소로서 간주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헌데, 대체 이탈리아는?) 그러고 보면 <붉은 돼지>는 '미야자키적 금기'를 우회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수단이 다 동원된 작품처럼 보인다. 이걸 바꿔 말하면, <붉은 돼지>는 미야자키의 다른 작품들을 모두 (반대로) 품고 있는 작품이라는 뜻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