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5

<서울 7000>(1976)과 <국풍>(1981)


(※ 2019년 11월 28일부터 12월 6일까지 열리는 서울독립영화제 기간에 서울대학교 영화동아리 얄라셩의 초기 활동을 엿볼 수 있는 8mm 단편 2편이 디지털화되어 공개된다. 1979년 공과대학 재학생들 중심으로 결성된 이 동아리는 1980년에 본부동아리로 등록한 이래 다수의 단편영화를 제작하였고, 특히 이 동아리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서울영화집단(1982~1986)은 1980년대 영화운동의 초기 역사를 기술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곤 한다. 김홍준과 황주호가 공동연출한 <서울 7000>(1976)은 얄라셩 결성 이전 이들이 개인적으로 만든 작품이지만, 얄라셩의 첫 공식상영회(첫 번째 영화마당, 1980.11.7~8)에서 얄라셩의 첫 공동연출작인 <여럿 그리고 하나>(1980)와 함께 상영되기도 했던 작품이다. 전두환 정권이 기획한 관제행사인 '국풍 81'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국풍>(1981)은 서울영화집단의 창립작품인 <판놀이 아리랑>(1982)을 예견케 하는 인터뷰의 이접적 활용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아래는 서울독립영화제 아카이브 특별전에 맞춰 기획된 책자 수록용으로 쓴 리뷰들이다.)


서울 7000 (김홍준 & 황주호, 1976)



<서울 7000>의 엔딩 크레딧에 기재된 정보를 따르자면 이 영화는 코다크롬 40(Kodachrome 40) 필름을 써서 엘모 108(Elmo 108) 8mm 카메라로 1976년 11월에 서울에서 촬영되었다. “한 프레임씩 촬영되었으며 촬영 속도는 shot마다 다르게 조절”되었고, “이 영화의 제목에 붙은 숫자 7000은 타이틀을 제외한 모든 부분의 총 프레임 수”를 나타낸다는 점도 명기되어 있다. <서울 7000>은 1976년 당시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홍준과 황주호가 공동으로 연출한 작품(김홍준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독립영화라기보다는 ‘개인영화’)으로, 제3회 한국청소년영화제(1977년 6월 10일 하루 동안 영화진흥공사 시사실에서 개최)에서 기획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른바 ‘콤마 촬영’ 방식(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프레임 단위로 촬영하는 방식)으로 서울 이곳저곳의 풍경을 기록한 이 작품은, 밴드 시카고(Chicago)의 음악 <The Approaching Storm>이 배경으로 깔리는 가운데, 새벽이 지나 해가 떠오르고 다시 해가 진 뒤 밤이 되기까지의 시간적 추이를 따라 서울의 하루를 재구성한 ‘도시 교향악(city symphony)’의 형식을 띠고 있다. 1980년대 영화운동의 모태가 된 서울대학교 영화동아리 얄라셩의 초기 멤버들이 이 동아리가 결성(1979년)되기 전에 개인적으로 만든 작품이지만, 1980년 11월 7일과 8일 양일간 진행된 얄라셩의 첫 공식 상영회(‘첫 번째 영화마당’)에서 동아리의 첫 공동작품인 <여럿 그리고 하나>(1980)와 함께 상영되기도 했다. 그런데 급속도로 근대화된 서울이라는 도시의 리듬을 포착하는 데 주력하고 있는 <서울 7000>은 얄라셩과 이 동아리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서울영화집단(1982~1986)에서 제작된 작품들보다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에 걸쳐 제작된 몇몇 개인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에 보다 가까이 있는 영화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라 할 수 있는 김구림의 <24분의 1초의 의미>(1969)나 이화여대 출신의 여성 영화인들이 결성한 실험영화 제작집단인 카이두 클럽(Kaidu Club)을 이끌었던 한옥희의 <구멍>(1974) 같은 작품을 감싸고 있는 도회적 감수성은 <서울 7000>에서도 분명히 감지된다. 차이가 있다면 도시의 리듬을 수용하는 한편 굴절시키는 매개자로서의 주체, 즉 권태에 빠져 있거나 소외된 도회적 주체의 형상 ― 유현목의 <오발탄>(1961) 이래 한국영화에 깊숙이 스며든 ― 이 <서울 7000>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이 작품이 1970년대 중반 서울의 풍경을 담은 생생한 스케치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1990년대에 두 편의 장편극영화를 만들었던 김홍준은 21세기 들어 <나의 한국영화> 연작(2002~2006) 및 <가루지기 리덕스>(2008) 등의 개인적인 작품들을 내놓은 바 있는데, <서울 7000>은 이러한 작품들에서 뚜렷이 엿보이는 에세이적 성향이 그에게 새삼스러운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국풍 (얄라셩영화연구회, 1981)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나서 1년 후,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는 ‘전국대학생민속국학큰잔치’라는 주제를 내걸고 대학생과 일반인을 대거 동원한 관제행사인 ‘국풍 81’을 개최한다.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한국방송공사가 주관하며 고려대학교 부설 민족문화연구소가 후원한 이 행사는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여의도광장에서 진행되었다. 이는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저항적 대항문화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활동들을 체제 내에 포섭하고자 하는 기획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비판적 관점에서 이 행사를 기록, 재구성한 다큐멘터리 <국풍>은 1979년에 창립되어 올해로 40주년을 맞는 서울대학교 영화동아리 얄라셩의 초기 활동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생들(홍기선, 김동빈, 황주호 등)에 의해 창립되어 1980년에 정식으로 동아리로 등록해 활동하기 시작한 얄라셩은, 이 동아리 출신 위주로 구성된 서울영화집단(1982~1986)과 더불어 1980년대 독립영화운동에 모델을 제시한 그룹으로 간주되곤 한다. <칠수와 만수>(1988)의 박광수, <장미빛 인생>(1994)의 김홍준, <넘버 3>(1997)의 송능한 등 1980~90년대에 새로운 감수성의 한국영화를 내놓으며 충무로에서 데뷔한 감독들이 얄라셩과 서울영화집단에서 활동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국풍>은 여의도광장에서 5일간 열린 행사의 이모저모를 8mm 카메라로 기록한 영상들을 편집해 만든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의의는 그간의 공식적인 기록물들과는 상당히 다른 시각으로 ‘국풍 81’을 담아낸 희귀한 영상자료라는 데만 있지 않다. <국풍>은 얄라셩과 서울영화집단에서 제작된 영화들의 방법론적 연관을 가늠케 한다는 점에서도 비평가들과 연구자들의 주목을 끌 만하다. <국풍>의 사운드트랙은 행사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을 인터뷰해 녹음한 자료 및 당대에 인기를 끈 음악들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영화집단의 창립작품에 해당하는 다큐멘터리 <판놀이 아리랑>(1982)은 공연의 준비 및 실행 과정을 담은 영상과 얼마간 거리를 두고 있는 사운드트랙(관객들의 소감 및 제작진의 토론)의 활용이 흥미로운 작품으로, <국풍>은 이러한 방법론이 이미 얄라셩 시기부터 실험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제작 여건상 적절한 동시녹음 장비나 녹음실을 활용할 수 없었다는 점이 오히려 창조적으로 대안적 방법론을 모색하게 한 사례라고 할 만하다. (<국풍> 제작 당시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한 인터뷰의 질이 너무 나빠 인터뷰 녹취본을 토대로 얄라셩 회원들의 목소리로 다시 녹음한 것을 활용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윤리적으로 타당한가의 여부를 두고 내부 논쟁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송골매의 <세상만사>, 김태곤의 <뱃노래>, 그리고 (<국풍>이 제작된 해인) 1981년에 잠시 국제적인 인기를 누렸던 프로젝트 메들리 그룹 스타스온45의 <Stars on 45>에서 발췌한 음악(이 음악은 서울영화집단의 워크숍 작품 가운데 하나인 문원립의 <대결>(1982)에서도 사용되었다)은 당대의 문화적 풍경을 가늠케 하는 지표로 기능하면서 부분적으로는 내레이션을 대신해 <국풍>에 논평적 기능을 더하고 있기도 하다.



2019-11-03

영원한 불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 아래 글은 대한항공 기내지 《비욘드》 2019년 4월호에 기고한 것이다. 지난 4월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탄생한 지 꼭 80주년이 되는 때였다.) 


<영원한 젊음 Youth Without Youth>(2007)


1970년대 ‘새로운 할리우드’의 핵심적 인물이었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어느 때부터인가 ‘실패한 신동’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비평적 반전을 거쳐 그에게 덧씌워진 한때의 거물이라는 이미지는 바야흐로 80세를 맞은 지금까지도 가시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마음의 저편>(1982)부터 <트윅스트>(2011)에 이르는, 대체로 미적지근한 평가를 받거나 때로 혹평을 받았던 1980년대 이후 코폴라의 영화들을 재평가하고자 하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재평가는 종종, 그 호의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코폴라 작품들이 <대부> 1부(1972)와 2부(1974), <도청>(1974), 그리고 <지옥의 묵시록>(1979) 같은 1970년대의 걸작들에는 못 미치지만 예사로운 영화들보다는 수준 높은 작품들이라는 식의 논지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바꿔 말하자면, 코폴라가 1970년대에 너무 뛰어난 영화들을 내놓은 나머지 이들 영화의 그늘에 가려 그 이후의 영화들이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식이다.


<트윅스트 Twixt>(2011)


<레인메이커>(1997) 이후 한동안 연출에서 손을 뗀 것처럼 보였던 코폴라가 21세기 들어 <영원한 젊음>(2007)으로 돌아왔을 때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우아한 걸작은 종종 예상치 못한 샛길로 빠져드는 요령부득의 내러티브를 지닌 범작으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코폴라가 2년 후 내놓은 <테트로>(2009)와 더불어, 1970년대의 공인된 걸작들에 필적하는 말년의 양식의 빼어난 예인 동시에 코폴라 영화들을 가로지르는 모티브와 강박관념 일체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며 여행하기를 거듭하다 마침내 그 핵심에 놓인 ‘불화’를 용감하게 응시하는 영웅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인 1960년대 후반에, 영화평론가 앤드류 새리스는 아직 <대부>를 연출한 거물이 되기 전이었던 코폴라의 초기작만을 본 상태에서 놀랄 만한 혜안으로 이 젊은 감독의 특징을 간파해냈다. 그는 코폴라의 UCLA 졸업작품으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너는 이제 다 컸어>(1966)와 마이크 니콜스의 <졸업>(1967)을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졸업>에서의 니콜스의 연출이 <너는 이제 다 컸어>에서의 코폴라의 연출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니콜스는 좋은 영화들만을 참조하는 반면 코폴라는 이따금 나쁜 영화들을 참조한다는 것이다.” 다분히 양가적인 뜻이 있는 문장이지만, 여하간 여기서 새리스는 코폴라 영화의 핵심을 짚고 있다. 

<대부>가 1970년대 새로운 할리우드가 낳은 ‘고급’ 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론 B급 영화적인 폭력 장면과 선정영화(exploitation movie)에나 어울릴 법한 누드 장면들이 적잖이 삽입되어 있음도 사실이다. 다만 세례식과 일련의 살인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는 후반부의 유명한 시퀀스에서처럼 솜씨 좋게 주류영화의 분위기 속에 녹아들어 있을 뿐이다. 코폴라가 B급 영화의 산실인 로저 코먼의 제작사 AIP(American International Pictures)에서 영화 경험을 쌓았다는 것은 ‘나쁜 영화들’에 대한 코폴라의 집착에 부분적인 설명밖에는 제공해주지 못한다. 그는 할리우드 고전기 영화는 물론이고 유럽 예술영화에서도 자양을 취하는 한편, 공식적 영화사(史)에는 등재되지 못한, 아니 심지어 등재될 가망이 없는 영화들(이를테면 포르노그래피)까지 넘나들면서 영화라는 우주의 불균질성 자체를 자신의 영화 속에 껴안으려 한 드문 미국 감독이다. 이는 코폴라와 마찬가지로 코먼의 밑에서 영화 경험을 쌓은 마틴 스콜세지나 피터 보그다노비치와 같은 이들에게선 거의 감지되지 않는 특징이다. 


<디멘시아 13 Dementia 13>(1963)


로저 코먼이 제작비를 댄 저예산 공포영화 <디멘시아 13>(1963)으로 데뷔한 코폴라는 할리우드의 거물이 된 이후에도 자신의 천출(賤出)을 굳이 부정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디즈니가 제작하고 마이클 잭슨이 주연을 맡은 테마파크용 3D 뮤직비디오 <캡틴 이오>(1986)는 그 제작비와 일급의 제작진 구성을 고려하면 기이하다 할 만큼 B급 SF영화의 감성으로 넘쳐난다. 짐짓 우아한 시대극 멜로드라마의 외양을 취한 <드라큘라>(1992)에는 주로 1970년대에 양산된 ‘유로트래쉬(Eurotrash)’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섹슈얼한 이미지와 수간을 연상케 하는 장면까지 등장하고 있다.


<캡틴 이오 Captain EO>(1986)


확실히 코폴라의 영화는 종종 쉬이 통합되지 않는 불균질한 요소들과 스타일들이 뒤섞여 있는 불화의 영화라고 할 만하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대부> 1부와 2부 또한 예외가 아니다. 여기서 뉴욕에서 촬영된 장면들과 시칠리아에서 촬영된 장면들은 그 시각적 설계에 있어 매우 다르다. <대부> 2부의 경우, 마피아 두 세대의 삶은 별다른 서사적 동기화 없이 과감하게 교차되고 있다. 코폴라가 여행 혹은 여정의 플롯을 선호한다는 것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인데, 이는 상이한 장소 혹은 시간 사이를 오가면서 그때마다 스타일 상의 변이를 꾀하기 위한 좋은 구실이 된다. 이의 가장 잘 알려진 예는 물론 <도청>에 이어 두 번째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지옥의 묵시록>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임신 사실을 알고 가출해 여행길에 오른 주부의 이야기인 <레인 피플>(1969)과 이혼을 앞둔 중년 주부가 돌연 시간을 거슬러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는 <페기 수 결혼하다>(1986)처럼 유사한 모티브를 각각 공간적 혹은 시간적 여정으로 변주해낸 사례도 있다.


<레인 피플 Rain People>(1969)


코폴라적인 불화가 가장 두드러지게 각인된 곳은 다름 아닌 그의 인물들의 몸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의 인물들은 종종 아직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몸과 마음의 불화에 시달리곤 한다. 코폴라적 인물이란 죽은 여동생의 망령에 사로잡힌 청년이거나(<디멘시아 13>),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소년이거나(<너는 이제 다 컸어>), 임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젊은 주부이거나(<레인 피플>), 형의 죽음과 아버지의 부상으로 예기치 않게 마피아 가족과 조직 전체를 떠맡게 된 샌님이거나(<대부>), 어쩐지 사십 대처럼 보인다는 말을 듣는 이십 대거나(<럼블 피쉬>(1983)) 십 대의 몸으로 돌아가 고교 시절을 다시 겪게 되는 중년 주부이거나(<페기 수 결혼하다>), 죽지 않는 몸으로 수백 년을 살아온 흡혈귀이거나(<드라큘라>), 조로증에 걸려 성인의 몸을 하고 살아가는 소년(<잭>(1996))이다.

공간적으로는 루마니아, 스위스, 인도, 그리고 몰타를, 시간적으로는 고대에서 2차 대전 전후의 시기를 넘나드는 <영원한 젊음>에서, 번개를 맞고 돌연 청년의 몸을 갖게 된 언어학자는 과거에 죽은 연인과 꼭 닮은 여인을 만나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이 여인은 고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생의 존재들에 종종 사로잡히는가 하면, 그로부터 사랑의 속삭임을 들을 때마다 점점 더 먼 고대의 존재에 사로잡히고 점점 더 빠르게 나이 든 모습이 되어 간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원작 소설에서 코폴라는 자신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가로지르기 위한 여정의 실마리를 찾은 것 같다. 그가 그 여정의 끝에서 마주치게 되는 진실은 자신의 몸과 불화하는 두 존재 간의 영원한 불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