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19

사막은 보이지 않는다: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2014)


※ 아래 글은 계간 『인문예술잡지 F』  제18호(2015년 가을호)에 실렸던 글이다.



1. Witness Me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클라이맥스, 시타델의 지배자 임모탄의 충실한 ‘워보이’ 가운데 하나였으나 맥스 일행에게로 전향한 눅스는 임모탄의 둘째 아들 릭투스와 함께 불길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맥스 일행의 차량이 무사히 협곡을 빠져나가기 무섭게, 그는 자신이 몰던 트럭의 핸들을 급하게 돌려 일부러 차를 전복시켜 추격자들의 길을 막는다. 트럭이 전복되기 직전, 그는 멀어져가는 맥스 일행의 차량에 탄 이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결코 그들에게 가닿을 리 없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Witness Me.”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은 임모탄의 워보이들이 자살공격을 행할 때마다 동료들에게 사무치게 사력을 다해 토하던 말로, 그때마다 ‘나를 기억해 줘!’라는 애처로운 호소이거나 ‘나를 똑똑히 봐!’라는 소름끼치는 명령처럼 들렸지만, 임박한 죽음을 홀로 껴안기로 마음먹은 이 전향한 워보이와 관련해서는 전혀 다른 뜻을 품는다는 것을 말이다. 눅스와 관객인 우리를 제외하고는 등장인물 가운데 누구도 그의 말을 들을 수 없다. 그러니 이 말은 스스로가 스스로의 죽음의 증인이 되리라는 눅스의 다짐인 동시에, 이제부터 벌어질 무언가를 바라보고 그것의 증인이 되어줄 우리에게 영화가 속삭이는 주문(呪文)이기도 하다. 전자의 경우 증인은 이 픽션의 세계에서 곧 사라질 것이며 후자의 경우 증인은 그 세계 바깥에 있다. 모든 워보이들을 특성 없이 닮아 보이게 만드는 짙은 분장 탓에 스타배우로서의 니콜라스 홀트는 일찌감치 ‘지워져’ 버렸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그는 픽션의 등장인물일 뿐 아니라 스크린이라는 표면에 일시적으로 도래하는 영화의 현신(現身)이기도 한 특권적 형상으로 떠올랐다 곧바로 눈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Witness Me.’라는 말은 어떤 사건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것으로 그것이 눅스의 죽음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지만 그의 죽음과 더불어 스크린에 펼쳐지는 광경은 다소 뜻밖의 것이다. 눅스가 몰던 트럭이 전복되자 곧이어 뒤따르던 차량 한 대가 이를 들이받으며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 공중으로 흩뿌려진다. 이때까지 철저하게 ‘(사)실감’을 강화하는 방식으로만 디지털 합성과 컴퓨터 그래픽을 용의주도하게 활용해 왔던 조지 밀러가 돌연 여기서 자제심을 잃기라도 한 것일까? 디지털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처리한 것이 확연한 차량 부품들과 모래먼지가 흩날리는 가운데 눈먼 기타맨의 기타와 눅스가 몰던 차량에서 떨어져 나온 핸들이 차례로 관객의 눈앞까지 날아오는데 3D의 바로크적 돌출효과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거의 우스꽝스럽게 보일 지경이다. 다만 응당 보여야 할 사람(혹은 시체)의 모습은 어디서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순간 조지 밀러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결국 디지털화된 스크린임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는 데 주저함이 없다. 디지털적으로 강화된 육감(corporeality)이란 결국 픽셀에 의해 지탱되는 것으로 언제라도 스크린 이곳저곳에 특색 없이 흩어질 수 있는 불안한 것임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일견 유사해 보일 수도 있지만, 예컨대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악당들의 머리가 버스비 버클리 풍으로 터져 나가는 광경을 보면서 느끼는 당혹감은 이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클라이맥스의 폭발 광경이 모종의 단념의 정서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며 그 단념이 ‘Witness Me.’라며 우리에게 속삭인 어떤 영화의 사라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영화란, 다름 아닌 서부극이다. 서부극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장소인 사막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우며 2시간여를 달려온 영화가 이제 서부극은 불가능하다고 중얼거리며 픽셀들의 집합이라는 유사-사막에 제 몸을 온전히 내어주며 불타버린다. 그런데 ‘Witness Me.’라고 나직이 말하며 죽어간 눅스의 얼굴이 부정이 아닌 긍정으로 충만했던 것처럼, 이 불가능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것에 대한 확신을 불러들인다. 


2. So I Exist In This Wasteland

균질하다고는 할 수 없는 작은 모래알갱이들이 사방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사막의 표면은 흡사 필름 자체를 보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이 경이로운 유사성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초당 18프레임의 16mm 무성영화 작업을 고수하고 있는 너새니얼 도어스키가 <알라야>에서 가장 집요하고도 아름답게 드러내 보인 바 있다. 이 영화는 사막 자체 혹은 그것을 이루는 모래알갱이들을 찍은 숏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필름이라고 하는 물질의 물성을 탐구하는 것을 과제로 삼은 실험영화들은 적지 않지만 그 가운데 <알라야>가 예외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성취해 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물리적이거나 화학적인 방식으로 감광유제를 변형 내지는 손상시키는 식으로 필름 자체에 손대지 않으면서 그저 사막을 주의 깊게 찍는 것만으로 필름의 감촉을 시각화한다는 그 공감각적 아이디어 때문이다.  

사막이 서부극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라는 생각은 사실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해를 피하려면 영화에서 사막의 징후적 기능에 눈을 돌려야 한다. 사막이란 영화가 변용되거나 위태로워지는 순간(마다) 출현하는 불길한 비(非)형상이다. 도어스키의 작품이 보여 주듯 사막은 그 자체로는 필름이라고 하는 취약한 표면에 지나치게 가까울 뿐 아니라 그것이 화면에 범람할 때면 그 압도적 존재감으로 인해 불현듯 영화의 디제시스를 증발시켜버리곤 하는데 지평선을 경계로 그것과 맞닿아 있는 하늘만이 사막은 이야기를 위한 장소이기도 하다는 점을 간신히 암시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신중한 작가라면 섣불리 사막의 마력에 빠져드는 법이 없다. 자크 페이데의 <아틀란티스>와 데이비드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 같은 영화들, 그리고 쉬린 네샤트나 빌 비올라 등 동시대 영상작가들의 몇몇 비디오 작업은 사막의 마력에 걸려들어 옴짝달싹 못하게 된 이미지 자체를 미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도착적이기 짝이 없다. 반면 <탐욕>의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은 리얼리즘적 세부로 넘쳐나는 이 영화 자체와 탐욕으로 휘청거리는 등장인물들을 한꺼번에 무차별적으로 삼켜버리는 사막의 출현을 어떻게든 지연시키려 든다. 상영시간이 9시간에 달했다고 전해지는, 하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이 영화의 오리지널 버전에서 마침내 사막이 등장하는 순간의 충격은 우리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가 하면 현대영화의 작가들이 사막의 형상으로 화면이 뒤덮인 작품을 꺼림칙한 마음으로 수용하는 것은 그들의 미학적 모험이 정점에 달하거나 그 반대로 위기에 처한 순간인 경우가 적지 않아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이후 행보를 기대와 불안감이 섞인 마음으로 지켜보게 만든다. <자브리스키 포인트>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데스 밸리로 향할 때, <파리, 텍사스>의 빔 벤더스가 빅 벤드로 향할 때, <마지막 사랑>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사하라 사막으로 향할 때, <동사서독>의 왕가위가 고비 사막으로 향할 때, <믹의 지름길>의 켈리 리처드가 오리건 트레일을 가로지를 때, 데뷔작 <리노의 도박사> 이후 줄곧 서부 지역에서 맴돌면서도 단 한 번도 서부극을 찍은 적 없는 폴 토머스 앤더슨이 <마스터>에서 동부를 유람하던 그의 인물들을 돌연 애리조나 사막으로 데려갈 때, 그리고 <제리>의 구스 반 산트와 <도원경>의 리산드로 알론소가 지리학을 무시하면서까지 비현실의 황무지로 인물들을 데려갈 때처럼 말이다. 

전형이란 것이 있을 리 없는 서부극의 전형을 확립한 작가로 (잘못) 알려져 온 존 포드에게 있어서 모뉴먼트 밸리는 사막의 사막성을 강조하는 것이면서 가까스로 사막에 저항해 버티고 선 형상으로서 영화의 희미한 가능성의 표식이 된다. 따라서 그의 영화에 사막이라는 비형상이 범람할 때는 <3인의 대부>처럼 믿음과 결부된 성서적 모티브(3인의 동방박사 이야기, 뉴 예루살렘이라는 지명 등)를 과잉하지 않고는 버텨낼 수 없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 ‘약속의 땅’이라 부르는 유타 주의 산후안 밸리로 향하는 몰몬교도들의 여정을 그린 <웨건 마스터> 역시 마찬가지다. 서부극이라는 장르에 한없는 존중을 표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동일성을 해체하고 산란시키는 데 기여한 할리우드의 대가들은 <리오 브라보>의 하워드 혹스처럼 사막을 서부극의 공간에서 주의 깊게 밀어내기 위한 서사를 고안하거나 “사막은 미국 서부의 일부를 보여줄 뿐”이며 “산들, 폭포들, 숲이 울창한 지역들, 눈 덮인 산꼭대기 등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 <벌거벗은 박차>의 안소니 만처럼 사막이야말로 서부극의 주 무대라는 관념에 이의를 표하기도 했다. 그 스스로 ‘안티-웨스턴’이라 부른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에서 로버트 알트만은 눈 속에 파묻혀 죽어가는 주인공을 보여줌으로써 서부극에 종언을 고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사막의 은폐가 서부극을 사로잡는 강박이라는 점을 서툴게 고백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신중하고 사려 깊은 방식으로 1990년대에 새삼 우리의 눈길을 서부극으로 돌려놓은 두 편의 미국영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와 짐 자무시의 <데드 맨>에서 사막은 어둠 저편으로 조심스레 물러나 있다.  

사실 서부극의 전형이나 그것의 주 무대로서의 사막이라는 관념은 풍경 없는 풍경으로서의 사막이 범람하는 가운데 감히 희희낙락하는 인물들을 어떻게든 용인할 수 있었던 이들에 의해 사후적으로 성립된 것으로, 스파게티 웨스턴이라 불리기도 한 이탈리아제 서부극, <황야의 7인>의 예기치 않은 성공이 혁명국가의 청소년들에게 미칠 악영향에 고심하던 소비에트의 관료들에 의해 추진된 ‘레드 웨스턴’, <스타워즈> 시리즈나 <백 투 더 퓨처 3> 그리고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와 같은 공상과학물, 그리고 한국에서라면 1960년에서 1970년대 초에 걸쳐 제작된 이른바 ‘만주 웨스턴’의 계보를 이은 김지운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같은 영화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멜 깁슨 주연의 <매드 맥스> 3부작, 특히 2편에 해당하는 <로드 워리어>가 사막을 전면화하며 그처럼 사후적으로 서부극을 명명한 영화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기원으로 간주되는 것들에는 전형이 (있을 수) 없고, 변형으로 간주되는 것들이 전형과 더불어 기원(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주제 이전에 변주가 있는 것처럼. 서부극에서의 ‘서부’란 미국의 서부여도 좋고 아니어도 무방한 어떤 영화적 비(非)장소의 환유라면, 그러한 비장소조차도 기어이 가시적인 것으로 환원시키지 않고는 그것의 이름을 부르거나 자신의 소재로 삼지 못하는 취약한 예술인 영화가 마지못해 끌어들인 비형상의 형상이 바로 사막이다. 말하자면 사막이란 서부극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서부극이 솟아난 텅 빈 바탕의 징후이며, 스크린상의 사막의 범람은 오히려 서부극을 나아가 영화를 위기에 몰아넣는 것이다. 그것은 사막을 길들이고 은폐하는 기예이자 기능으로서의 서부극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바로 사막이야말로 영화의 자리라고, 적어도 지금부터는 거기야말로 영화의 자리라고, 무엇보다 서부극과 관련해서는 거기를 최소화하거나 감추거나 밀어내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그것을 성립시킬 수 없다고,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속삭인다. 그리고 불타버린다.


3. Some Kind of Redemption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는 두 개의 사막이 시종일관 충돌하고 있다. 하나는 영화의 촬영지인 아프리카의 나미브 사막으로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막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하나는 픽셀들의 집합으로서의 유사-사막, 즉 디지털 스크린이다. 전자는 지독하게 과시적(誇示的)이고 후자는 교묘하게 과시적(寡示的)이다. 

디지털 특수효과를 만끽하며 짐짓 흥청거리는 것처럼 보였던 <해피 피트> 시리즈에서 짓궂게도 픽셀의 유사-사막을 얼음으로 가득 채웠던 조지 밀러는 이번에는 작심이라도 한 듯 사막이라는 저 위험한 비형상으로 (다시) 향한다. 그런데 멜 깁슨 주연의 <매드 맥스> 3부작 이후(3편은 1985년에 개봉되었다) 오랜만에 실제의 사막으로 귀환하면서, 그는 사막 자체가 아니라 더 이상 사막의 감촉과 아무런 유사성도 없는 디지털의 표면, 이 유사-사막을 단호하게 자신의 영화의 가상적 토대로 삼고 있다. 디지털 스크린은 한때 영화에서 사막이 떠맡았던 역할, 비형상의 형상이자 텅 빈 바탕의 징후라고 하는 그것을 픽셀의 유사-사막에 ‘논리적’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이때 실제의 사막, 나미브 사막의 범람은 유사-사막에 솟아오른 모뉴먼트 밸리와 같은 것이면서 그 유사-사막에 ‘형상적’으로 정착되어 과시적(寡示的)인 것의 사막성을 과시적(誇示的)으로 들뜨게 하기 위한 것이 된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사막과 마침내 들뜬 유사-사막 간의 대결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은 CG로 만들어낸 거대한 모래폭풍 속으로 맥스 일행과 그들을 뒤쫓는 임모탄의 워보이들이 진입하기 직전의 광경을 묘사한 익스트림 롱숏(사진 1)일 것이다. 이 광경은 이 영화가 사막이라는 물리적 비장소가 아니라 디지털의 표면이라는 논리적 비장소에서 펼쳐지는 형상의 서부극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진 1] 모래폭풍 속으로 진입하는 맥스 일행과 임모탄의 전사들


결국 디지털 편집 프로그램의 타임라인에 올라 변형되고 말 SF영화의 ‘소스영상’을 위해 35mm 필름 촬영을 고집하는 <인터스텔라>의 크리스토퍼 놀란 같은 쓸데없는 허식과 낭비가 조지 밀러에게는 없다. 디지털 영화제작이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는 영화사(史)에서 ‘억압된 것의 귀환’을 가능케 했다는 『뉴미디어의 언어』의 마노비치적 명제를 기꺼이 수용하면서도 전기안구도기록법(EOG:electro-oculography)으로 보완한 정교한 모션캡처로 영화이미지에 어떻게든 지표성(좌표계에서 상대적 위치와 운동의 지표성)을 부여하려 한 <베오울프>의 로버트 저메키스처럼 소심하지도 않다. 조지 밀러가 본격적으로 컴퓨터그래픽을 수용하면서 그동안 왜 인간이 아닌 돼지와 펭귄 같은 동물을 그 주인공으로 삼았을지 생각해 보라. 혹시 그것은 디지털에 자신의 영화를 의탁하면서 놀란 식의 노스탤지어도 저메키스 식의 멜랑콜리아도 거부하겠다고 마음먹은 강한 냉소주의자의 유머는 아니었을까?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CG를 최소화하며 이른바 ‘아날로그 액션’의 진수를 보여준 영화로 회자되기도 했다. 그런 진술은 이른바 ‘아날로그적인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멜랑콜리아가 아드레날린 과잉의 폭력으로 분출해 버리고 만 <옹박>이나 <레이드> 시리즈와 이 영화의 차이를 간과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이미 꽤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이 영화는 실사 촬영한 소스영상을 용의주도하게 디지털의 표면에서 합성해내는 작업을 통해 제작되었고, 앤드류 잭슨이 이끈 시각효과 팀이 주조해낸 숏은 2000개가 넘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액션을 실제로 찍었다는 사실 자체라기보다는 그렇게 찍은 것을 디지털의 표면에 배치해 합성하고 조작함으로써 디지털 육감의 강화를 노렸다는 점이다. 디지털 영화제작에서 기술적인 상식이 된 원리, 몽타주는 숏과 숏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숏 내부에서도 이루어진다는 원리를 명심하면서 말이다. 여기서는 ‘리얼’의 ‘리얼리티’가 아니라 ‘버추얼’의 ‘(코포)리얼리티’(이것을 흔히 가상현실이라 부르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가 문제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이제는 더 이상 그 뜻을 판별하기 힘든 ‘과시적인 사막’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점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실사’는 디지털의 표면을 통해 영화로 귀환하지만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다. 한쪽 팔이 없는/지워진 퓨리오사/테론이 심하게 부상을 입은 채로 시타델로, 저 손상된 자들의 요새로 돌아가는 것처럼.   

녹색의 땅으로 향하던 맥스와 퓨리오사는 다른 이들이 잠든 사이 대화를 나눈다. 퓨리오사는 임모탄의 여자들이 “희망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말한다. 그럼 당신은 무엇을 찾느냐는 맥스의 물음에 그녀는 “redemption”이라고 짧게 답변한다. 이는 개봉 당시 한국어로 ‘구원’이라 번역되었다. 문맥을 고려할 때 적절한 번역이지만 나는 이 말의 의미를 보다 확산시키고 싶다. 디지털의 표면에서 이루어지는 ‘버추얼’의 ‘(코포)리얼리티’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이 말을 듣고 있노라면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영화의 이론』의 부제이자 이 책의 핵심적 논제가 되고 있는 ‘redemption of physical reality’라는 표현이 머릿속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 희망이란 한 번도 접하지 못한 것 혹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는 이들의 정념과 맞닿아 있는 것이라면 ‘redemption’의 추구란 손상된 조각들을 매만지면서 거기 결여된 것을 기억의 강렬함으로 버텨내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의 의지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녹색의 땅으로 향하는 퓨리오사는 ‘redemption’에 대해 말하면서 실은 희망을 좇는 이들과 같은 정념을 품고 있다. 방향을 돌려놓는 것은 맥스로 그는 녹색의 땅 또한 황폐해졌음을 알게 된 이후 이번엔 오토바이를 타고 사막을 가로질러 다른 녹색의 땅을 찾아가려는 중인 일행을 막아서며 시타델로 돌아갈 것을 제안한다. 그는 ‘redemption’이 도망쳐 나온 곳으로의 귀환(re-)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그 귀환이 반드시 ‘redemption’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란 점 또한 솔직히 고백한다. “we might be able to... together... come across some kind of redemption.” 우리가 함께 시타델(사진 2)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면, 구원-회복-복원-속죄 같은 것(some kind of redemption)과 우연히 마주치게(come across)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 2] CG 작업이 마무리되기 이전의 시타델의 모습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맥스 일행과 임모탄의 전사들은 최후의 추격전을 벌인다.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차량이, 차량과 차량이 부딪히고, 내동댕이쳐지고, 상처입거나 손상되고, 죽거나 파괴되고 급기야 이들이 이미 지나쳐왔던 저 운명의 협곡으로 다시 향할 때까지 디지털의 과시적(寡示的) 표면 위에서 온갖 (코포)리얼한 물리적 액션이 과시적(誇示的)으로 펼쳐진다. 죽기 직전까지 눅스가 몰던 차량에서 떨어져 나온 핸들이 앞으로 돌출해 튀어나와 거기 장식된 우스꽝스러운 해골 문양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그 순간까지. 디제시스의 액션이 픽셀 스크린의 어둠으로 환원되는 그 순간까지. 어쩌면 이 어둠은 녹색의 땅으로 향하던 도중 임모탄의 여인 가운데 하나가 트럭 내부 천장에 새겨진 해골 문양을 짐짓 무심한 듯 만지작거리던 그 순간에 예견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때 우리는 그 몸짓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제 와서야 그녀의 몸짓을 새삼 떠올리게 된 것은, 이들이 간밤에 밤하늘을 홀로 배회하는 인공위성을 바라보며 나누었던 이야기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채로 돌아온 이들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한때는 세상의 모든 이들이 같은 쇼를 볼 수 있게 했었다는 장치, 영화의 운명을 바꿔놓고 떠도는 저 무심한 기원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채로 말이다. 혹은, 천체는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