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22

키노-아이, 사물의 편에서


(아래 글은 계간 <문예중앙> 2012년 겨울호(2012.11.30)에 실렸던 것을 옮긴 것이다. 돌이켜 보면 너무 서둘러 썼던 글이란 생각이 들어 약간 후회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마감에 닥쳐 급하게 쓴 글은 아니다. 원래 원고지 150매 분량 정도로 써 볼 요량으로 이것저것 메모해 두고 있던 참이었는데, 계간지 원고 청탁이 들어오자 덜컥 이 주제로 써 버린 게 경솔한 일이었다는 생각이다. 이러저런 사정으로 원고지 30매 분량의 글이 되었는데, 전체적으론 원래 구상하고 있던 글의 작업노트 같은 느낌도 든다.)


키노-아이(Kino-Eye), 사물의 편에서


과문한 탓인지 칸트가 극작술(dramaturgy)에 관심을 가졌었다는 기록을 접한 기억은 없지만, 그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을 읽고 있노라면 그는 진정 무시무시한 악한이란 어떤 인물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누구 못지않은 관심을 지닌 철학자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흥분과 열정의 절제, 자제, 냉정한 성찰은 여러 가지 의도에서 선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격의 내적 가치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간주하기에는 많은 것이 결여되어 있다. 무릇 선의지의 원칙들이 없이는 이런 것들은 최고로 악해질 수 있고, 악한의 냉혈은 그가 이런 것 없이 악한으로 여겨졌을 때보다, 그를 훨씬 더 위험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직접 우리의 눈에도 더욱 혐오스럽게 만든다.”(임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의 분출을 억지(抑止)할 수 있는 인간, 말하자면 냉철함의 화신이 (선의지의 원칙들이 없이는) 악의 궁극에 닿을 수도 있다는 인식은 오늘날 그다지 색다른 것은 아니어서, 이러한 인식이 (주로 ‘초인’ 개념에 대한 오해로 빚어진) 통속화한 니체 철학과 결합되어 이런저런 (주로 소설, 만화, 영화, 텔레비전 등의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대중적 서사에서 악한의 형상을 고안하는 데 활용되는 사례를 찾기란 어려운 일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그러한 대중적 서사에서 악한의 악함이 끝까지 전적인 악함으로 남는 사례는 거의 찾기 힘들다. 악한의 과거, 혹은 그의 내밀한 약점이나 욕망, 혹은 그의 기이한 취향과 습벽이 서사의 어느 시점에선가 일순간에 터져 나오면서 악한의 악함이 인간화되는 과정이 수반되지 않는 대중적 서사란 매우 드물다. 이와 같은 인간화 과정은 악한의 악함을 빌려 보편적 인간의 악함을 ‘드러내고’ - 이쯤에서 ‘인간 내면의 악’이라는 진부한 표현을 떠올려 보라. 이 표현에 담긴 또 다른 (보다 의미심장한) 뜻은 내면이 없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 그것을 경계하게 만드는 가장 상투적인 방식에 속한다. 또한 악의 인간화 과정은 대중적 서사에서 악한 인물의 구축은 종종 일관성을 포기함으로써만 달성되곤 하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러한 서사에서 악한의 비일관성을 문제 삼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인 만큼이나 무의미한 일이다. 그것은 하나의 약정(stipulation)이며, 독자와 관객들은 그것이 약정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들은 악의 철학이 아니라 그의 패션, 애티튜드, 제스처가 얼마나 독특한지만을 문제 삼는다.  

문득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 인간화 과정을 거친 악을 여전히 우리는 악이라 부를 수 있을까? 칸트가 염두에 두고 있던 악한의 속성은 인간화 과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작동’하는, 완벽하게 인간과 닮은 생체기계의 냉혈이었던가? (안드로이드의 철학? 그렇다면 칸트의 악한에 대한 우리의 혐오는 ‘언캐니 밸리 효과(uncanny valley effect)’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숱한 대중적 서사에서 악한의 비일관성이 두드러지는 것은 인간화 과정에 끝까지 저항하는 악한의 존재가 오히려 비현실적이라는 통속의 혜안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서사 전체가 조롱의 대상으로 격하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기어이 제임스 캐그니 - 악한 인물의 구축이란 무엇보다 패션, 애티튜드, 제스처의 문제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 위대한 배우 - 의 개심을 강요했던 마이클 커티즈의 <더러운 얼굴의 천사들>(1938)은 그 제목을 통해 명료하게 ‘현실적’ 악한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한편, 악한은 사라지고 악의 우의(寓意)만이 남는 경우도 있다. 칼 드레이어의 <사탄의 책의 페이지들>(1920)과 프리츠 랑의 <운명>(1921)같은 무성영화에 등장하는 사탄과 죽음에서부터 사우론의 눈에 이르는 추상화된 악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우의적 상상력에 기대어 악한이 아니라 악 자체를 인간화한다. 그런데 어떤 경우이건 인간화될 수 있는 악을 악이라 부를 수 없다면, 하지만 악이라는 개념에 대한 사회적 약정을 고려할 때 그것을 철저히 사물화 내지는 자연화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면(이를테면, 우리는 준악(峻岳)이나 자연재해를 악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대체 악다운 악이란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악다운 악을 찾는 일에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Destiny (Fritz Lang, 1921)

앞서 서술한 조건들을 염두에 두고 악의 위상학을 우선 따져 보면 악은 인간의 사물적인 부분을 지칭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사물적인 것은 유기체적인 것도, 동물적인 것도 아닌, 차라리 기계적이라 불러야 합당한 것으로서, 그 강렬한 사물성으로 인해 추상화가 불가능하고 어떠한 인간화 과정에 의해서도 변치 않는 채로 남는 것이다. 즉 인간 속의 비-인간, 보다 정확하게는 인간을 구성하는 비-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그 무엇, 칸트라면 경향성(inclination)이라 불렀을 그 무엇이 특별히 절제와 결부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악으로, 이러한 악을 향한 의지를 악함으로, 이러한 악함을 지닌 이를 악한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거의 금욕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러한 악한의 형상은 이미 세속적 악의 개념으로부터는 한참 멀리 떨어진 것이지만 - 무협물이나 액션물 같은 대중적 서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명상과 수도, 심신단련에 힘쓰는 악한의 모습은 저 금욕적 형상을 다시 세속화한 것이다. - 적어도 칸트적 악한의 이상형으로 간주되기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일체의 의지를 자신 안의 사물성에 복속시키려는 의지, 그럼으로써 생체적 자동기계의 프로그램(경향성)에 따른 운동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운동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의지야말로 악의지라 할 수 있다. (안드로이드가 결코 칸트적 악한이 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지의 부재 때문이다. 악의지는 주어진 프로그램에 따른 자기제어(self-regulation)가 아니라 스스로 프로그램을 설정하고 그에 따르고자 하는 자제(abstinence)이기 때문이다.) 

『모비 딕』(1851)에서만 해도, 허먼 멜빌은 현대적 악한을 형상화하기 위해, 비-인간적 사물성을 향한 의지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한 마리의 고래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에이해브는 악의 새로운 개념에 맞서 필사적으로 인간화된 악의 유효성을 주장하기 위해 피쿼드호에 올라야 했다. 그는 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게는 그 흰 고래가 바로 내 코앞까지 닥쳐온 벽일세. 때로는 그 너머에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 [...] 나는 녀석한테서 잔인무도한 힘을 보고, 그 힘을 더욱 북돋우는 헤아릴 수 없는 악의를 본다네. 내가 증오하는 건 바로 그 헤아릴 수 없는  존재야.” 하지만 『필경사 바틀비』(1853)에서 멜빌은 더 이상 우회하지 않는다. 바틀비에게서 멜빌은 우리 세기의 악의지를 미리 보았고, 이는 에이해브가 고래에게 덧씌운 잔인무도함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한 인간이 스스로 껴안은 사물성의 억센 침묵일 뿐임을 수긍했다. 백여 년이 지난 후, 멜빌을 흠모한 나머지 그의 성(姓)을 자신의 것으로 삼은 한 프랑스인은, 굳은 침묵과 함께 스크린을 배회하는 자제의 화신들에게서 칸트적 악한에 가까운 형상을 찾으려 들었다. 하지만 그의 악한들 역시 악을 무엇보다 패션, 애티튜드, 제스처의 문제로 환원시켰다는 점에선 캐그니의 악한과 그리 멀리 떨어진 것만도 아니었다. <사무라이>(1967)와 <붉은 원>(1970)의 알랭 들롱은 악한으로 분(扮)한 패션, 애티튜드, 제스처의 모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세기 이후, 사실 예술가들의 관심은 자신들의 작품 속에 악한의 형상을 구현해내는 작업에 있지 않았다. 모종의 프로그램을 설정하고 그 프로그램에 자발적으로 따르는 과정을 통해, 혹은 우연을 끌어안고자 하는 자동성(automatism)의 실험을 통해, 예술가들은 아예 스스로가 과거의 예술에 대한 악한이 되기를 꿈꾸었다. (돌이켜보면 이 기획을 가장 멀리까지 밀고 나간 건 미술 쪽이었다. 오늘날의 미술은 일시적인 담론적 제스처이자 궁극적으로 덧없는 것이 되었다.) 오직 영화처럼 뒤늦게 탄생한 예술만이 다른 예술들이 이미 밟고 지나간 길을 어쩔 수 없이 처음부터 다시 더듬었을 뿐이다. 다른 예술들이 악의지 자체를 예술적 프로그램 삼아 모더니즘의 신화를 써내려가는 동안 그들이 남긴 헌옷가지를 찾아 뒤지며 말이다. 자크 랑시에르의 말대로,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말레비치나 쇤베르크 시대에 영화는 예술의 미학적 자율성에 맞서 낡은 표상적인 세계에 대한 예술의 복종을 내세움으로써 예술의 모더니티라는 순박한 신학을 저지하기 위해 일부러 온”(『영화 우화』) 예술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더니즘 이후의 소설의 경우에도 악의 우화를 완성시키는 일은 아직 미완의 기획으로 남아 있긴 마찬가지여서, 포크너의 『팔월의 빛』(1932)의 조 크리스마스나 보르헤스의 불한당들 속에서, 그리고 로베르토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의 문인들과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1998)의 미래의 종(種)과 코맥 매카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5)의 안톤 쉬거 속에서 비인격적 악의지가 모습을 바꿔 가며 계속해서 출몰하는 것이다. 이는 칸트적 악한을 형상화하기에 걸맞은 대중적 서사의 구축에 항상 관심을 기울여 왔던 영화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이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의 소설들에서 영감을 얻었거나 그것들을 직접 각색한 영화들 가운데서 사물성을 향한 의지의 현현으로서의 악한을 성공적으로 묘사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 (칼 드레이어와 루이스 부뉴엘은 모두 포크너의 『팔월의 빛』을 영화화하는 데 깊은 관심을 보였지만 이들의 기획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L'Argent (Robert Bresson, 1983)

해답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것은 기계장치로서의 카메라를 예술가의 도구가 아니라 예술가를 대체하는 하나의 비인격적인 몸으로 간주하는 것이었으며, 앙드레 바쟁은 일찌감치 이를 “역사상 처음으로 외부세계의 이미지가 엄격한 메커니즘에 따라 인간의 창조적 개입 없이 자동적으로 형성되게 되었다. [...] 모든 예술은 인간의 존재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지지만, 사진에서만 유일하게 우리는 인간의 부재를 향유한다”(「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는 말로 간명하게 요약했다. 바쟁의 안티-휴머니즘적 자동주의가 하나의 이론적 극단으로 남았다면, 실제에 있어서 영화는 카메라의 몸과 인간의 몸 - 카메라 뒤의 인간(감독 및 제작진)과 카메라 앞의 인간(배우)의 몸 모두 - 을 동조화(synchronization)시키는 데서 자신의 모더니티를 발견했다. 이는 기계장치의 창조성이 최대한 발휘되게끔 인간의 표현성을 제한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물론 영화적 표현성의 근원과 관련해 그것이 카메라 자체인지 몽타주인지의 여부를 두고 벌이는 논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는 포스트-프로덕션은 물론이고 영사까지를 폭넓게 시네마라는 기계장치를 구성하는 과정으로 바라보면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 기계장치의 창조성을 가리키기 위한 다양한 명명이 존재했지만 - 가령, 지가 베르토프의 키노-아이, 장 앱스탱의 포토제니, 로베르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래프 - 사실 그것은 영화가 고유하게 품고 있는, 혹은 그렇게 가정된 비인격적 경향성에 따라 작업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에 다름 아니었다. 영화에서 온전한 악한의 형상은, 일관적이지 않고 불완전한 악한들을 백여 년이 넘게 지켜봐왔던 눈과 그것을 자신의 눈으로 삼고자 했던 이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영화 예술가들은 지난 세기의 다른 예술가들처럼 인위적으로 고안된 프로그램에 입각해 과거의 예술에 대해 악한이 되기를 도모할 필요가 없었는데, 시네마라는 기계장치는 그 자체로 예술에 대한 반역이기에 그것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드레이어와 부뉴엘이 『팔월의 빛』을 스크린에 옮기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영화는 저 내밀한 부름에 기꺼이 자신들의 몸을 의탁한 결과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리츠 랑은 <운명>의 우의화된 죽음이 아니라 마부제 박사에게서 이중화된 영화적 몸에 걸맞은 악한의 형상을 찾았다. 


혹은, 카메라를 든 이들이 종종 거울에 이끌리는 건 우연이 아니다.






2013-02-19

노동의 시간, 예술의 시간: 배윤호의 <서울역>


노동의 시간, 예술의 시간
: 배윤호의 <서울역>(2013, 84min)


2011년 8월, 옛 모습으로 '복원'된 서울역 역사에는 '문화역 서울 284'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COUNTDOWN'이라는 제목의 개관 전시가 열렸었다. 하지만 이 개관전과 연계되어 제작된 작품 가운데 최고의 작품은 당시 전시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전시될 수 없었다. 그 작품은 이 전시를, 그것의 비천함을 지켜본 이후에라야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것이었다. 



배윤호 감독의 84분짜리 에세이 <서울역>이 이제야 우리 앞에 주어진 것은 그 때문이다. (얼마 전 <인문예술잡지 F> 제8호(2013년 1월호)에는 <서울역>의 스틸사진들을 소재로 한 배윤호 감독의 포토에세이가 게재된 바 있다.) 제목 그대로 이 에세이적 다큐멘터리는 서울역(의 복원과정)에 관한 것이지만, 제목이 지시하는 서울역은 이제 더 이상 서울역이 아니다. (지금의 서울역은 저 서울역의 곁에 서 있다.) 두 개의 지시대상 사이에서 흔들리는 '서울역'이라는 고유명, 그 고유명의 혼란. 


혼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서울역>은 분명 서울역의 '복원'과정을 담아내고 있는 영화이지만 여기서의 '복원'이란 이미 3중의 의미를 띠기 때문이다. 

(1) 이 다큐멘터리는 구 서울역 역사가 문화역 서울 284로 '복원'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공간이 복원되면서 이름은 박탈되었다.) 흥미로운 건, 이런 식의 '복원'과정을 담은 영화에서 흔히 기대할 법한 과거의 공간과 현재의 공간 사이의 대비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에서 제시되는 몇 장의 흑백사진으로 그치고 만다. 그럼으로써 어떠한 '복원'도 결코 과거를 현전시킬 수 없다는 데서 나오는 추억과 멜랑콜리로부터 간단히 빠져나온다.

 (2) 대신 정말 '복원'이라고 하는 과정이 진행되는 현재에 천착한다. 무엇보다 서울역 복원공사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모습에 천착한다. 그들이 작업하고, 잡담을 나누고, 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자는 모습. 그런데 이 노동과 휴식의 시간은 사실 정작 복원공사가 마무리되고 나면 어떠한 의미도 부여받지 못하고 기억에서 잊혀질 시간이다. 망각이 예정되어 있는 이 시간을 기어이 지켜보게 하는 것 이외에 <서울역>은 어떤 다른 목적도 두고 있지 않은 영화처럼 보일 정도다. 서울역의 실패한 '복원'에 대해 우리는 <서울역>이 '복원'하고 있는 이 무의미한, 가치를 부여받지 못하는 시간의 절대적인 힘을 맞세울 수 있게 된다. 

(3) 그런가 하면 <서울역>은 서울역 '복원' 과정을 하나의 전시('COUNTDOWN')가 준비되는 과정으로 보게끔 만는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경구처럼 보여주(고 들려주)되 어떤 것도 입증하려 들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영화가, 불현듯 동시대의 담론적/비평적 미술과 퍼포먼스에 대해 날을 세우기 시작한다. 이때 감독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지만, 대신 몽타주를 통해 말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서울역 복원과정에 참여한 노동자들이야말로 'COUNTDOWN' 전시를 가능케 한 설치미술가 혹은 퍼포먼스의 공연자처럼 여겨지는 반면, 정작 전시에 실제로 참여한 아티스트들의 작품과 공연은 그 노동자들의 작업의 조악하고 비천한 모방처럼 여겨진다.) 그렇다고 해서, 정작 전시에는 참여하지 않으면서 사후라고 하는 유리한 지점(vantage point)에서 그걸 비평하는 작품을 내놓았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가 <서울역>의 작가를 비난해야 할까? (실제로 <서울역>은 서울역의 복원과정에 대한 다큐멘터리인 만큼이나 예술제도(좁게는 하나의 미술제도로서의 전시)라고 하는 것에 대한 비평적 에세이이기도 하다.) 물론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서울역>은 지아 장커의 <무용>(2007)처럼 노동의 시간과 예술의 시간이 뒤얽힌 나선을 따라 미끄러지는 영화다. 



아직은 이 영화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상세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없다. 다만 최근의 몇몇 한국 다큐멘터리들에 비추어 다음과 같은 말은 덧붙일 수 있겠다. 배윤호의 <서울역>은 이강현의 <보라>(2010)의 의미화되지 않는 시간의 즉물성과 김경만의 <미국의 바람과 불>(2011)(에서 파운드푸티지를 활용하지 않고 직접 촬영한 영상들)의 '한국적' 이벤트들에 대한 차가운 시선이 동시에 느껴지는 영화라고 말이다. 

* 배윤호 감독의 <서울역>은 2013년 2월 23일(토) 오후 2시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인문예술잡지 F>독자들을 대상으로 첫 공개될 예정이며, 상영이 끝난 후 대담이 마련되어 있다. 상영회 참석을 원하는 이들은 이곳을 참조. 대담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녹취, 정리해 이 포스트 아래에 붙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