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1

몸짓의 영화를 위한 산책: 서현석의 《X(무심한 연극)》


※ 국립현대미술관의 《다원예술 2021: 멀티버스》 프로그램(2021.2.12~12.5)의 일환으로 제작된 서현석의 VR 작품 <X(무심한 연극)>은 2021년 3월 16일부터 4월 1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공연되었다. 아래 글은 해당 프로그램이 종료된 후 발행된 책자(2021.12.30)에 수록된 것이다.




서현석의 VR 신작 <X(무심한 연극)>은 관람객의 참여를 필수적으로 요청하는 장소 특정적 공연이기도 하고, 국립현대미술관의 건축적 구성에 꼭 맞게 설계한 가상적 설치물이기도 하고, 상호 작용적인 부분이 거의 없이 모든 시・공간적 전개가 장치적으로 미리 규정된 영화적 비디오이기도 한 기묘한 작품이다. 달리 말하자면, <X(무심한 연극)>은 실천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여전히 다소 애매한 개념인 ‘다원예술’[1]이 아주 무용한 허구만은 아님을 보여주는 매우 드문 사례다. 이것은 오늘날 공연, 미술, 영화 각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실천들에 매우 유용한 통찰을 제공해주는 작품이지만, 어느 영역에서도 정당하게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도래할 예술의 성격을 띠고 있다.

<X(무심한 연극)>에 대해 고찰하기 위해서는, 현대적 공연 작품을 구성하는 인간 및 비인간 참여자와 관련해 우리가 보통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혼용하는 용어의 그 의미를 다시 한정해 사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행위자(actor)’는 공연에 국한해 배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그보다 의미망이 넓은 용어로 문자 그대로 행위하는 사람 일반을 가리킨다. 그의 행위는 누군가에게 지각될 것을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으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공연장이나 영화관에서 관람 도중 저도 모르게 기침하는 사람의 행위는 다른 이의 주의를 끌기 위한 것이 아니다. 특별히 공연과 관련해서는 ‘수행자(performer)’와 ‘연행자(player)’라는 용어를 구분해 사용하려 한다. 수행자와 연행자의 행위는 반드시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행적 행위와 연행적 행위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와 관련해서는 에리카 피셔-리히테가 존 오스틴과 주디스 버틀러를 참조해 제시한 수행성 개념이 얼마간 도움이 된다. 즉 수행적 행위는 무언가를 표현하지도 않고 의미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자기지시적(오스틴) 혹은 비지시적(버틀러) 특성을 띤다는 것이다.[2] 반면, 연행적 행위는 특정한 상황에서 행위자가 담당하거나 가장하는 역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까닭에 결코 자기지시적이거나 비지시적일 수 없다. 예컨대, 연행자는 연극적 상황에서라면 등장인물을 표현하고, 제의적 상황에서라면 제사장이나 희생양을 의미하는 기표로서의 행위자로 존재한다.

이처럼 용어의 의미를 한정한 후에 서현석의 <X(무심한 연극)>으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이 작품이 수행적 행위와 연행적 행위의 경계를 줄곧 교란하는 한편, 둘 가운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순수 행위(pure act)’를 촉발하고 이를 공연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이려는 대담한 시도로 가득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X(무심한 연극)>을 체험하기 위해 미술관에 온 관람객이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광경은 그보다 앞서 온 관람객이 VR 체험용 HMD 기기를 머리에 쓰고 약간 비틀거리며 미술관 복도를 걷고 있는 모습이다. 뒤에 온 관람객은 나중에야 알게 되는 것이지만, 앞서 온 관람객의 비틀거림은 현실의 미술관 공간과 (그것을 고스란히 모델링해 재구성한) 가상현실 내 미술관 공간의 유사와 차이를 가늠하며 조심스레 발을 옮기는 데서 나온 우연적인 몸짓이다. 작품을 체험하는 관람객의 입장에서 이 몸짓은 수행적이지도 않고 연행적이지도 않은 행위 자체다. 그의 비틀거림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의식적으로 취한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X(무심한 연극)>은 직접 몸을 움직이며 돌아다니지 않고는 제대로 된 체험이 불가능한 작품이지만, 여기서 VR 헤드셋을 통해 제공되는 시청각적 장면들은 사실상 인간 행위자의 동작과 무관하게 기계적으로 전개되는 것이어서, 이를 고려하면 의외로 전통적인 영화와 상동(homologous) 관계에 있기도 하다. 다만, 객석에 앉아 있는 관람객의 몸짓을 완전한 어둠으로 감싸 전적으로 배제할 것을 요청하는 영화와는 달리, <X(무심한 연극)>은 그것을 다른 행위자들작품을 체험하는 동안 관람객을 곁에서 보조하는 수행자[3]와 작품을 체험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다른 관람객들에게 지속적으로 노출함으로써 작품의 구성 요소로 삼고 있다.

HMD를 착용하고 ‘허우적거리는’ 관람객의 동작 자체를 공연의 한 부분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X(무심한 연극)>은 권하윤의 <잠재적인 마법의 순간을 위한 XX번째 시도>와 유사한 전략을 취하고 있는 VR 작품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권하윤의 가상공간에서 관람객은 일종의 상호 작용적인 (그런 만큼 실패할 가능성도 있는) 퍼즐 게임을 수행하는 행위자가 된다. 작가가 설계한 게임의 조형적 구조에 따라 상당 부분 미적으로 조율되는 그의 동작은 퍼즐 게임과 마찬가지로 자기지시적/비지시적이며 따라서 수행적이다. 한편으로, 가상공간 바깥에서 그의 동작을 지켜보고 있는 다른 참여자에게도 그것은 수행적인 것으로 비친다. 즉 권하윤의 작품을 체험하고 있는 관람객은 그 자신에게나 다른 이들에게나 한 명의 수행자로 남는다.




반면, 서현석의 작품을 체험 중인 관람객의 동작은 가상공간 안팎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띠면서 두 겹으로 갈라진다. 여기서 관람객은 침대에 누워 있다 깨어나 어느 ‘꼬마’의 인도를 따라 (얼마간 데이빗 린치의 세계를 연상케 하는) 몇몇 장소를 돌아다니는 미지의 존재 역할을 하는 연행자가 된다. 그런데 작품의 진행에 영향을 미칠 아무런 권한도 능력도 없는 (덕분에 실패할 가능성도 없는) 그는 1인칭 RPG의 ‘플레이어’보다는 알렉산드르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에서 퀴스틴 후작의 안내로 에르미타주를 돌아다니는 유령적 존재에 가깝다. 하지만 가상공간 속에서 그가 맡은 역할을 알 리 없는 바깥의 관찰자에게 그의 행위는 자기지시적/비지시적인 것으로 비칠 터이다. <X(무심한 연극)>의 관람객은 상궤를 벗어나 참여자의 눈을 가린 상태에서 진행되는 동시대 공연의 예외적 흐름 속에 놓인 수행자이면서, 1인칭 RPG의 주인공이지만 극의 진행에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점에서 영화관의 관객을 닮은 연행자이다. 그는 눈먼 산책자인 동시에 유령적인 몽상가이다.

이처럼 서현석은 작품을 체험하고 있는 관람객의 동작이 전적으로 연행도 아니고 전적으로 수행도 아닌 불확정적인 상태에 머무르게끔 하고 있다. 그러나 서현석은 이처럼 불확정적인 상태를 만들어내는 일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 상태는 좀처럼 공연의 구성 요소로 포착하기 힘든 순수 행위를 공연의 내부에서 촉발하기 위한 매개에 불과하다.[4] 공연의 내부에서 순수 행위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행위가 무언가를 표현하거나 의미하지 않고 자기지시적/비지시적이 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것은 조르조 아감벤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몸짓이 되어야 한다. 아감벤은 몸짓이란 어떤 목적을 상정하는 수단적 행위도 아니지만, 그 자체가 목적인 행위도 아니라고 보았다. (여기서 전자는 연행적 행위고 후자는 수행적 행위다.) 오히려 몸짓은 “매개성을 전시하며, 수단을 그 자체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고 따라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야말로 몸짓의 역량이다.[5] 그렇다면 종종 보이지 않은 채로 공연의 외부에서 출현하고 사라져버리는 몸짓을 어떻게 공연의 내부에서 보이게 할 것인가?

자기지시적/비지시적 행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미적 형식은 바로 춤이다. 하지만 서현석은 미적인 것을 안무하는 작업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또한, 작가는 공연을 통해 일시적이고 잠정적이나마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에도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는, <X(무심한 연극)>과 비슷한 시기에 문화역서울284에서 선보인 공연 <안개 1>(2021)에서도 그러했듯이, 다른 참여자들이 배제된 상태에서 관람객과 수행자가 일대일로 대면케 하는 편을 선호한다. 공연 내부의 행위자로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은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관람객이 무심결에 취하게 되는 불안(정)한 몸짓이야말로 진정 서현석의 흥미를 끄는 것이다. 

<X(무심한 연극)>의 후반부에서, 관람객은 점점 나이든 얼굴이 되어가는 ‘꼬마’의 손을 잡고 바다 위를 가로지르게 된다. 사실, 관람객의 손을 이끄는 이 손은 이중화되어 있다. 하나는 VR 헤드셋이 제공하는 가상현실 속 등장인물인 비인간 연행자의 손이며, 다른 하나는 실제 미술관 공간에서 관람객을 보조하는 인간 수행자의 손이다. 이 불확정적인 손을 맞잡고 있는 관람객의 손 또한 연행적인 손과 수행적인 손으로 이중화되며, 둘 사이에서 진동하는 가운데 그의 손은 하나의 몸짓을 방출하기 시작한다. 관람객은 이 몸짓이 비록 단 한 명일지라도 누군가에게 보이고 있음을 안다. (이러한 앎은 몸짓을 가벼운 흥분으로 들뜨게 한다.) 분명 공연의 내부에서 촉발되는 것이지만 연행도 아니고 수행도 아닌 이 몸짓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행위 자체라고 할 만한 것이며, 이때 관람객은 행위하는 사람이란 것 이외에 아무런 속성도 지니지 않는 문자 그대로의 행위자로 존재한다.

영화감독 자크 리베트(Jacques Rivette)는 1950년 무렵에 쓴 「행위와 행위자」(L’acte et l’acteur)라는 미발표 원고[6]20대 초반에 쓴 것이지만 훗날 그가 <미친 사랑> 같은 걸작에서 구사한 대담한 방법론을 예견케 하는 글에서 시네아스트가 사용하는 요소로 동작, 몸짓, 행위를 꼽으면서, 행위자는 시네아스트의 유일한 표현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행위자는 동작을 위엄을 지닌 몸짓으로 고양시키며 행위자의 개입이 있어야만 몸짓은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리베트가 말하고 있는 행위자는 “어떤 사고방식이나 정신적 세계를 지닌 등장인물(acteur-personnage)이 아니라, 몸짓의 결절점으로서의 행위 주체(acteur-sujet d’actes)”다. 이미지 중심적이거나 몽타주 중심적인 영화 미학적 사고에서 벗어나, 리베트는 “행위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행위자, 행위자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영화를 떠올린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영화는 행위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리베트의 노트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기묘하게 동시대적인 울림을 준다. 리베트는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 장치와 관련해서 순수 행위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그의 생각은 “영화의 요소는 몸짓이지 이미지가 아니다”[7]라고까지 단언하는 아감벤의 주장과도 맞물리면서, 서현석의 <X(무심한 연극)>처럼 확장된 개념의 영화에서 순수 행위로서의 몸짓의 가능성을 고찰하도록 우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한편으로 우리의 눈을 가리기도 하는 장비인 HMD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서현석은 관람객의 몸짓을 공연의 내부에서 촉발하고 그 몸짓이 (HMD를 착용하고 있는 탓에 일종의 맹목 상태인) 관람객 자신에게까지 보이게끔 하고 있다. 

특히, 유령적 연행자로서의 관람객이 그를 인도하는 ‘꼬마’를 따라 계속해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을 걷게 되는 부분에서 그러하다. 가상공간 내에서 이 길의 양옆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로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X(무심한 연극)>의 세계를 체험한 이들이라면 어김없이 이 부분을 지날 때의 압도적인 공포와 불안에 대해 말하게 된다. 물론 관람객은 실제 공간에 낭떠러지란 없고 그가 발을 어디로 내딛건 아무런 위험도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시각과 촉각 사이의 불일치는 끝내 해소되지 않으며, 발이 전하는 확신에 대해 눈은 언제나 의혹으로 반응한다. 다시 한번, <X(무심한 연극)>의 관람객은 유령적인 몽상가와 눈먼 산책자 사이에서, 연행자와 수행자 사이에서 진동하며 몸짓을 방출하는 행위자가 된다. 사위가 온통 깜깜한 가운데 위태롭게 이어지는 낭떠러지 길의 풍경은 관람객 자신의 몸짓을 따라 출렁이며 매 순간 그에게 지각되고, 이러한 지각이 다시 몸짓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반복된다.

관람객이 일종의 ‘가이드가 딸린 산책(guided walk)’을 체험하는 동안, <X(무심한 연극)>의 VR 헤드셋에 저장된 영상은 철저하게 시나리오에 따라 전개된다. (이제야 궁금해지는 것이지만, 내가 만일 침대에서 일어나 ‘꼬마’의 인도를 따르지 않고 그대로 방에 머물렀다면 어땠을까? 이런 경우, 관람객을 보조하는 수행자가 따라야 할 지침은 무엇이었을까?) <X(무심한 연극)>의 후반부에 길게 읊조려지는 내레이션은 자연 속에서 자아의 위치에 대한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의 사색에서 발췌해 재구성한 것으로, 자연을 ‘무심한 연극’이라고 한 슈뢰딩거의 표현은 이 작품의 부제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원래 슈뢰딩거가 쓴 독일어 단어는 연극이나 극장, 혹은 볼거리를 뜻하는 ‘Schauspiel’인데, 이를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연극’이라 옮기고 있고 영어 번역본에서는 ‘spectacle’이라 옮기고 있어 대단히 흥미롭다.[8] 이유인즉,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연극과 스펙터클의 관계에 대한 사유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스펙터클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연극의 여섯 가지 요소 가운데 ‘옵시스(ὄψις)’에 해당하는 영어식 표현이다. 배우와 의상과 무대장치를 비롯한 시각적 요소 일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는 옵시스 없이도 (주제와 인물과 플롯, 그리고 대사와 음악이 있다면) 연극의 효과는 얻어질 수 있다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유명하다.[9] 물론, 현대적 연극, 현대적 공연이란 철저하게 반(反)아리스토텔레스적 노선을 따름으로써 성립된 것이다. 옵시스만으로도 가능하다, 아니 충분하다. VR 장치를 활용한 공연을 구상하면서, 서현석은 인간에게 일체 무심한 옵시스를, 하지만 그것과 대면하고 있는 이에게 순수 행위로서의 몸짓을 촉발할 수 있는 옵시스를 떠올려 본다. 한때 영화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대면했던 이 무심한 옵시스는, 이제 서현석의 <X(무심한 연극)>에서 HMD를 통해 제공되는 가상현실의 형태로 우리를 감싸고 또 인도하고 있다.


[1] 직역하면 ‘multielemental arts’가 되어야 하겠으나 제도적으로는 ‘interdisciplinary arts’나 ‘multidisciplinary arts’에 해당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흥미롭게도, <X(무심한 연극)>을 제작 지원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영문 홈페이지에서는 다원예술을 ‘performing arts’라고 표기하고 있다. 

[2] 에리카 피셔-리히테, 『수행성의 미학: 현대예술의 혁명적 전환과 새로운 퍼포먼스 미학』, 김정숙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2017), 43~56. 피셔-리히테에 따르면, 수행적 행위는 비록 잠정적이나마 어떤 현실을 생성한다는 점에서 현실구성적(오스틴) 또는 극적(버틀러) 특성 또한 띤다. 그런데 이는 연행적 행위의 특성이기도 하다. 사실, 피셔-리히테는 연행적 행위라는 범주를 따로 고려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처럼 연행적 행위라는 범주를 도입해 수행적 행위와 비교해 보면, 수행성의 핵심은 바로 자기지시성 혹은 비지시성에 있다는 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3] 사실, 각각의 관람객을 매번 보조하는 이 수행자야말로 <X(무심한 연극)>의 가장 특권적인 관람객이라고 할 수 있다.

[4] 관람객이 그저 관람객으로만 있을 때, 즉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고만 있을 때 항시 발생하는 순수 행위 대부분(몰입, 웃음, 한숨, 탄식, 기침, 졸음, 딴짓 등등)은 좀처럼 지각되지 않으며, 따라서 공연의 외부에 자리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예외가 없지는 않다. 이러한 순수 행위들이 여러 관람객을 통해 집단적으로 표출되는 경우(예컨대, 웃음 바다가 된 객석), 또는 개별적이라도 누군가가 심하게 야유를 퍼붓거나 보란 듯이 격한 동작으로 중도 퇴장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예외적 행위는 이미 수행이나 연행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린 셈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몇몇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이런 예외적 행위가 공연에서 지니는 수행적 가치나 연행적 가치를 간파하고 이를 기민하게 활용하기도 했다. 영화에 있어서라면, 서현석의 <X(무심한 연극)>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확장영화(expanded cinema)의 계보에서, 특히 레트리즘(Lettrism) 작가들이 구사한 공연 전략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의 책들을 보라. Kaira M. Cabañas, Off-Screen Cinema: Isidore Isou and the Lettrist Avant-Garde (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4) 그리고 Nicole Brenez, Introduction to Lettrist Cinema, trans. Clodagh Kinsella (Berlin: Sternberg Press, 2014).

[5] 조르조 아감벤, 「몸짓에 관한 노트」, 『목적 없는 수단: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 김상운・양창렬 옮김(서울: 도서출판 난장, 2009), 68~72. 

[6] 미발표 상태로 반세기 넘게 오래된 공책에 끼워져 있던 이 글은 리베트가 2016년에 세상을 떠난 이후 2017년에야 공개되었고 2018년에 프랑스에서 출간된 리베트의 비평문 모음집에 수록되었다. Jacques Rivette, “L’acte et l’acteur,” in Textes Critiques, ed. Miguel Armas and Luc Chessel (Paris: Post-éditions, 2018), 321~327.

[7] 조르조 아감벤, 「몸짓에 관한 노트」, 같은 책, 65.

[8] 에르빈 슈뢰딩거, 『물리학자의 철학적 세계관』, 김태희 옮김(서울: 필로소픽, 2013), 40.

[9] 최근에 번역, 출간된 다음의 책에는 옵시스의 문제에 대한 두 철학자의 흥미로운 논쟁이 담겨 있다. 필립 라쿠-라바르트・장-뤽 낭시, 『무대』, 조만수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