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계간 『인문예술잡지 F』 제21호(2016년 6월 30일 발행)에 기고한 글이다.
오랜 준비 끝에, 당신이 출항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작년 봄이었습니다. 건강 문제로 부득이 당신의 포르투 자택 근처에서 촬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 <벨렘의 노인 The Old Man of Belem>(2014)을 보고 나서 마음이 어지러웠던 무렵이지요. 그러니까 당신의 출항 소식은 갑작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조금씩 비축해 둔 체념을 한숨과 함께 토해내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애도의 물결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영화잡지 두 군데에서 당신의 출항에 관한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이 왔을 때도 주저 없이 거절했지요. 그저 조용히 책상에 앉아, 두 해 전 포르투를 방문했을 때 보았던, 도우루강이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곳에 자리한 저 작은 등대를 홀로 떠올려 보았을 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숙소의 창문을 열었을 때 그 등대가 앞에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당신의 데뷔작 <도우루강의 노동자들 Labor on the Douro River>(1931)에서 한 도시의 삶의 주기를 알리는 지표로 처음 등장했던 그 등대를 말입니다. <포르투에서의 어린 시절 Porto of My Childhood>(2001)에서, 우리는 성마른 시대에 가냘프게 숨 쉬는 문명의 육신으로 화한 그 등대와 다시 조우했었지요.
문득,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이는 그것을 떠올린 이로 하여금 돌연 부도덕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드는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당신의 출항 소식을 듣고 저와 동일한 이유로 자괴감에 빠져든 이가 적지 않으리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으되 그것에 대해 언급하는 일만은 삼가 왔던 저 봉인된 기록을 마침내 들여다볼 수 있으리라는 사실에 흥분하면서, 한편으론 봉인의 해제가 당신의 출항을 조건으로 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기에 차마 기대하지는 못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수줍은 탐욕의 눈빛을 교환하던 배덕자들을 저는 알고 있으며 저 또한 그 무리 가운데 하나임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의 나이 일흔 셋이었던 1981년에 만들었지만 당신이 출항을 결심한 이후에만 공개할 수 있다고 못 박았던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 Visit, or Memories and Confessions>이 아니었다면, 이런 불편한 상황을 감내할 이유는 전혀 없었을 겁니다.
이것은 당신이 카메라로 쓴 유언장일 거라고 추측해 온 사람들도 없지 않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엔 어떤 유언도 없다는 것을, 포르투갈토비스(Tobis Portuguesa) 사(社) 스튜디오의 세트장을 배경으로 당신이 “픽션이란 영화의 진정한 현실”이라 읊조릴 때 이미 당신은 방주의 제작에 착수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1942년부터 당신의 가족이 거주해 왔으나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을 촬영할 무렵에는 빚을 갚기 위해 경매에 넘겨야 했던, 건축가 주제 포르투가 설계한 저택을 영화적 픽션으로 건조(建造)하는 작업을 통해 그 방주를 완성하려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영화에 등장하는 보이지 않는 방문객의 말처럼, 이 저택 자체가, 그리고 이 영화 자체가 하나의 방주에요. 다만 그 방주에 실을 또 다른 방주들—픽션들을 건조하기 위해, 당신은 삼십사 년을 기다려 온 것이었어요. 그것들이 채 준비되기도 전에 방주를 둘러보는 일은 결코 허락될 수 없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고도 이를 심술궂게 창고에 유폐시켜 버린 괴벽의 인간이라는 비난 따위는 무시해도 좋은 것이지요.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에는 두 명의 방문객이 등장합니다. 한 명은 여성이고 다른 한 명은 남성이지요. 영화 말미에 어둠 속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그림자 같은 형체를 제외하고는 당신은 우리에게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아직 당신의 시간에 속하지 않는 이들이기 때문이겠지요. 여자가 저택 내부의 기둥에 대해 말할 때, 남자는 그것은 기둥이 아니라 돛대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배의 돛대야. 그것은 인간을 그의 내밀한 존재에, 그의 수평선에 연결시키지. 보라고, 이 집은 하나의 배야. 베란다와 테라스는 다리와 갑판이지. 하얀 객실들이 통로를 따라 늘어서 있어. 저 아래 가지달린 촛대 같은 소나무가 바다를 나타내지. 오월이면 거기서 뜰 수 있는 잔디의 만(灣)이 빛나고 있어.” 그런가 하면 집안 곳곳에 비치되어 있는 선박 모형들은 당신이 오래도록 신중하고 용의주도하게 방주의 건조를 준비해 왔음을 일러줍니다.
이제야 많은 것들이 비교적 환히 보입니다. 그래요, 당신은 마치 우연처럼 가장해 모든 것을 준비해 왔던 거였어요. 포르투갈토비스가 설립된 것은 당신이 첫 영화를 선보이고 나서 일 년 뒤인 1932년이었고, 이듬해 이 스튜디오는 포르투갈에서 제작된 최초의 유성영화이자 당신이 배우로 출연한 <리스본의 노래 A Song of Lisbon>를 내놓았지요. 당신이 포르투갈 카네이션 혁명 이후 발표한 첫 영화이자 세 번째 장편인 <베닐드 혹은 성모 Benilde or the Virgin Mother>(1975)를 비롯해, 방주 계획을 처음으로 공공연히 드러낸 일곱 시간짜리 대작 <비단구두 The Satin Slipper>(1985)를 촬영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지요. 이 스튜디오는 당신의 마지막 장편영화 <제보와 그림자 Gebo and the Shadow>가 발표된 2012년에 문을 닫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에서 당신이 보여주는 삼십여 년 전의 포르투갈토비스 스튜디오는 이미 온갖 삭구(索具)로 가득한 방주처럼 보였어요.
그뿐이 아닙니다. 당신이 주제 포르투가 설계한 저택으로 이사한 것은 첫 장편영화인 <아니키 보보 Aniki-Bobo>가 개봉한 1942년이었고, 이 저택이 경매에 넘어간 1981년은 <봄의 제전 Acto da Primavera>(1963) 이후 오랜 휴지기 끝에 장편영화 작업으로 복귀한 당신이 <과거와 현재 Past and Present>(1971)에서 시작된 ‘좌절된 사랑의 사부작’을 마감하는 <프란시스카 Francisca>를 발표한 해이기도 했지요. 비로소 저택을 방주—픽션으로, 진정한 현실로 전화시킬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당신은 그 방주—픽션에 실을 또 다른 방주들—픽션들을 건조하기 위해 새로운 동료들을 찾아 나섰어요.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에서 방문객들의 대화를 쓰기도 한 소설가 아구스티나 베사루이스와 <프란시스카>에서 <제5제국 The Fifth Empire: Yesterday as Today>(2004)까지 줄곧 당신과 함께 한 프로듀서 파울로 브랑쿠가 바로 그들이지요.
방주의 출항을 결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무리되어야 하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때로 당신은 이것이야말로 가장 어렵고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당신이 해결책을 모색하는 동안, 영화인들 몇몇은 그들 나름의 방주 계획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페데리코 펠리니는 당신이 <비단구두>를 발표하기에 앞서 <그리고 항해는 계속된다 And the Ship Sails on>(1983)를 발표했고, 알렉산드르 소쿠로프는 어쩐지 생기 없어 보이는 <러시아 방주 The Russian Ark>(2002)에 서둘러 몸을 싣고 떠났으며, <필름 소셜리즘 Film Socialisme>(2010)의 장-뤽 고다르는 소쿠로프 식의 ‘디지털 방주’를 미심쩍게 바라보면서 그것의 좌초와 표류를 증언하는 데서 자신의 자리를 재발견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픽션이란 영화의 진정한 현실”이라는 당신의 주장에 호응하는 “상상력이 없는 이들은 현실로 도피한다.”는 문장으로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2014)을 시작하고 있는 고다르는, 한편으론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델로리에의 말(“그래, 그때가 우리가 누린 최고의 시간이었어.”) 속에서 당대와 불화하는 반어를 찾습니다. 이런 와중에, 아직은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이 공개되기 전이었던 터라, 우리는 <아니오, 혹은 지배의 공허한 영광 No, or the Vain Glory of Command>(1990)과 <토킹 픽처 A Talking Picture>(2003)가 보여주는 몰락과 재앙과 파국의 픽션이 당신의 방주에 실릴 작은 방주들이 아니라 방주 자체라고 성급히 믿어버리는 우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당신의 방주는 대립물과 부정성마저도 모두 포괄해 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검과 대지, 남성과 여성, 사랑과 소유, 권력과 좌절”을 차례로 언급하는 당신의 말을 직접 듣기 전까지는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시아인인 제가 방주와 문명을 연결하는 서구적 사고를 납득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타이타닉>(1997)이나 <인터스텔라>(2014) 등의 영화를 보면 미국인들도 그다지 잘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 같으니 차라리 유럽적 사고라고 부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을 마무리하면서 당신이 다음과 같이 토로할 때 다소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던 것은? “영토상으로 볼 때, 포르투갈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도 마치 우리에게 책임이 주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세계의 운명을 간파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왜인가?”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당신이 세계의 운명을 당신의 집의 운명과 나란히 놓으면서, 영화를 통한 세계와 집의 동시적 방주화—픽션화에서 묵시록적 구원의 비전을 가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야 당신이 미셸 피콜리의 입을 빌려 ‘나는 집으로 간다’(I'm Going Home)고 말했던 바의 뜻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것은 부인이 아니라 긍정이었어요. 거처 없이 배회하는 형상들(페드로 코스타의 형상들, 홍상수의 형상들, 차이밍량의 형상들, 리산드로 알론소의 형상들 등등)이야말로 오늘날 영화의 픽션이라면,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의 당신은 집이라는 것을 영화가 자신의 픽션으로 삼을 수 있었던 시대를 증언하는 형상인 것이지요. 오월의 해변가에서 당신의 이 영화가 공개되고 나서 몇 달 후, 스위스 소도시의 호반에서는 샹탈 애커만의 <노 홈 무비 No Home Movie>(2015)가 상영되었어요. ‘집이 없는 영화’의 시대가 열리던 때에 경력을 시작했던 그녀는, 이런저런 영화에서 거듭 집으로 돌아가려 시도하면서도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I Don't Belong Anywhere)라며 짐짓 호기를 부렸던 오늘날의 감독이지요. 당신이 방주를 타고 바다를 가로지를 때 고물에서 내려다보면 그녀가 구명보트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이 방주의 출항을 결심하기 위해 마무리해야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잊고 있었네요. 그건 당신으로 하여금 사진적 이미지란 비단 환영이 아니라 극도의 현실이라는 점을 깨닫게 만든 한 사건을 영화화하는 것이었어요. 사진 속 죽은 여인의 미소에 매혹되어 그녀에게 한없이 빠져들게 되는 이삭이라는 청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앙젤리카의 이상한 사례 The Strange Case of Angelica>(2010)가 바로 그 영화이지요. 당신의 방주—픽션에 실을 이 마지막 방주—픽션을 마련하기까지 무려 반세기가 걸렸습니다.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에서 당신은 당신 자신과 아내를 제외하고는 —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림자 같은 형체로 잠깐 모습을 보일 뿐인 방문객들을 제외하고는 — 그 누구도 카메라 앞에 세우지 않았습니다. 대신 당신과 아내의 가족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하나하나 가리키거나 그들을 촬영한 오래된 필름들을 영사기에 돌려가며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지요. 사진적인 것에 대한 이 강고한 믿음은 바로 저 앙젤리카에게서 기원한 것일 터지요. 이 믿음은 더 이상 우리에게 속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저는 당신의 믿음을 존중합니다. 그러한 믿음을 통해 당신은 스스로가 속해 있던 시대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증언자로 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신은 사진적 이미지에 생을 부여하는 것은 기억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 나는 나의 부모님, 나의 아내, 나의 아이들을 기억한다. 시간은 흐르고 미래는 언젠가 과거가 될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기억한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미미하기 짝이 없는 나의 존재… 그리고 나는 사라진다.” 스스로를 기억하는 기억, 영화라고 부르는 것.
저는 당신이 방주에 오르기 전에 딱 한 번 당신을 만났습니다. 저는 당신 앞에 서 있었지만 차마 말을 건넬 엄두는 내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친구였던 작가 주제 레지우의 시로 작업한 두 편의 시네포엠 단편 <빌라두콘드 이야기 Romance de Vila do Conde>와 <색유리창과 죽은 성녀 O Vitral e a Santa Morta>가 상영되었던 2008년 베니스영화제에서였습니다. 1965년에 촬영해 둔 것이었지만 뒤늦게 완성한 것이었지요. 그래요, 당신은 미래가 언젠가 과거가 될 것임을 항상 염두에 두며 작업하는 영화감독이었습니다. 동시에 과거를 언젠가 도래할 미래로 밀어 넣곤 했지요.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을 보고 나서 오래도록 귓가에 감도는 것은 그 오래된 필름 릴들이, 아직 펼쳐지지 않은 과거가 영사기에 감겨 맹렬히 돌아가는 소리입니다. 이미 출항한 당신이 아니라 출항을 앞둔 당신에게 이 편지를 띄우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겁니다.
Sleep Furiously!
2016년 6월 9일
※ 추신: 두 해 전 포르투의 그 작은 등대를 찾았을 때, 등대 입구의 빨간 문에는 누군가 붙여 놓고 간 스티커가 한 장 붙어 있었습니다. 출항을 준비하시기 전에 이 귀여운 야만의 표식을 보셨는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