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DMZ국제다큐영화제가 마련한 특별기획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인 "다큐멘터리와 미장센" 부문에서 상영되는 로버트 크레이머의 <미 1번 국도 Route One/USA>(1989)를 보았다. 상영시간이 4시간 15분에 달하는 영화인데 월요일 오전 10시 반에 상영이 잡혀 있어 관객은 거의 없었다. (나를 포함해 총 여덟 명의 관객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려행>으로 DMZ국제다큐영화제를 찾았고 부산영화제에서 프리미어될 신작 <환생> 마무리작업 중인 임흥순 감독이 와 있었다. <미 1번 국도>를 보고 난 탓인지, 문득 임흥순 감독의 장편데뷔작 <비념>이 떠오르기도 했다.)
로버트 크레이머에 대해 호기심을 품게 된 것은, 십수 년 전 <H 스토리 H Story>(2001)의 제작과 관련한 스와 노부히로의 인터뷰를 읽으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영화의 시작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와는 크레이머와 공동으로 히로시마에 관한 영화 제작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1999년 11월 10일 크레이머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만다. 스와는 <H 스토리> 작업을 계속한 것은 크레이머를 위해서이기도 했다고 술회한다. 당시 나는 <듀오 2/Duo>(1997)와 <마/더 M/Other>(1999) 등의 작품을 통해 스와에게 깊이 관심을 갖고 있던 터였기 때문에, 그와 공동으로 히로시마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던 로버트 크레이머의 작업에도 호기심을 품게 되었다. 그에 대한 몇몇 정보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당시로선 그의 영화를 직접 볼 방법이 없었다.
크레이머의 영화를 처음 접하게 된 건 프랑스에서 출시된 DVD를 통해서였다. 2006년에는 <미 1번 국도>가, 2010년에는 <아이스 Ice>(1970), <마일스톤즈 Milestones>(1975), <닥의 왕국 Doc's Kingdom>(1988)과 <워크 더 워크 Walk the Walk>(1996)가 프랑스에서 차례로 출시되었다. 비로소 크레이머의 영화를 스크린에서 보게 된 건 2014년에 이르러서다. 서울아트시네마의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통해 <마일스톤즈>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상영되었던 것이다. 1960년대 급진주의의 이상이 이후 어떻게 (긍정적으로건 부정적으로건) 분산되었는지를 숱한 인물들의 일상의 궤적을 좇아가며 파고든 이 작품은 그해 영화관에서 본 최고의 영화 가운데 한 편이었다.
<미 1번 국도>는 망명객으로 유럽을 떠돌던 크레이머가 미국에 돌아와 찍은 첫 영화로, <마일스톤즈>의 후속작이라 생각해도 좋지만 그 구성이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여기서 크레이머는 그의 전작 <닥의 왕국>의 주연을 맡았던 폴 맥아이작(Paul McIssac)과 함께 미 1번 국도를 따라 여행하며 당대 미국 사회의 (보수적이건 진보적이건) 여러 인물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세르주 다네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국이라는 장소를 "검진"한다.
"[폴 맥아이작이 연기하고 있는] 의사를 왜 [<미 1번 국도>의 여행의 동반자로] 선택했는가? 로버트 크레이머의 아버지가 의사이기 때문에? (<마일스톤즈>에도 검진 장면이 있다.) 존 포드 영화에는 의사라는 주제가 있기 때문에? (포드는 크레이머가 존경해 마지 않는 인물이고, 내가 항상 생각해 온 바로는, 크레이머야말로 포드의 드문 후계자 가운데 하나이다.) 미국이 병들어 있기 때문에? 혹은 우리가 "진정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서로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물론,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크레이머의 예술 - 그는 예술가, 그것도 위대한 예술가이므로 - 이 근본적으로 의사의 기술, 개업 의사의 기술과 같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추상적으로만 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환자를 골라받을 형편이 될 수 없다." - 세르주 다네, 「세계의 웅성거림 La rumeur du monde」 (1989)
크레이머는 지나치게 일찍 세상을 떴다. 하지만 올해 초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회고전이 마련되었던 존 지안비토(John Gianvito)의 영화에서, 혹은 미셸 클레이피(Michel Khleifi)와 에얄 시반(Eyal Sivan)의 <루트 181 Route 181: Fragments of a Journey in Palestine-Israel>(2004) 같은 영화에서 크레이머의 '여행'이 지속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고보니 프랑스에서 DVD로 출시된 피터 왓킨스의 <여행 Resan>(1987)을 구입해 두곤 보는 일을 미뤄두고 있었다. (이 영화는 상영시간이 14시간 33분에 달한다.) 돌연 이 영화가 떠오른 것은 순전히 그 제목 때문일 것이다. 마침 추석 연휴가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