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각(陰刻)의 기술
: 이미지, 재난의 가장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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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한국어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6월호에 게재되었던 것을 옮긴 것으로, 게재 당시 제목은 「포스트 시네마 시대의 재난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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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움직이는 사진이라 불리기도 했던 것, 그러다 20세기를 자신의 시대로 삼았던 것, 이제는 움직이는 이미지들(moving images)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 여전히 영화라 불리기는 하지만 가까스로 그러한 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영화적 이미지 고유의 힘이 사라진, 혹은 더 이상 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닌, 이른바 포스트-시네마 시대에 그러한 힘의 빈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 2014년 4월 16일, 하나의 재난이 위세를 떨치며 온갖 무(기)력한 이미지들을 서서히 잠식해가는 광경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질문 가운데 하나다. 그러한 질문에 사로잡힌 채, 꼭 영화라고만은 할 수 없는 몇 편의 영상작업들을 보았다. (사고가 나기 전부터 일정이 잡혀 있었던 강의나 대담과 관련해서였다.)
4월 17일 밤, 나는 거의 혼자만의 힘으로 <수련>(2013)이라는 첫 장편영화를 만든 김이창 감독과 대담을 나누기 위해 마포아트센터에 있었다. 바로 그 시각까지만 해도, 나는 전날의 여객선 사고로 인해 실종된 이들 상당수가 곧 구조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나서 스무 명 남짓한 관객들 앞에서 대담에 임했는데, 전날 있었던 사고에 대한 언급은 따로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련>은 홀로 고시원 생활을 하며 직업을 구하고 있는 한 무술 사범의 삶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김이창 감독 자신이 연기한 주인공이 버려진 건물의 체육관에서 역기를 들고 수련하는 모습을 앙각(low angle)으로 담은 13분짜리 장시간 촬영(long take) 쇼트로 시작된다. 작년 서울독립영화제 이후 이 영화를 본 몇몇 이들은 하나같이 이 첫 쇼트의 힘에 대해 언급했다. ‘그저 지켜보며 기다림’이라고 하는 태도와 결부되어 있는 장시간 촬영 고정 쇼트에 어떻게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감각을 부여할 것인가라는 문제 - 들고 찍기(hand-held)나 이동 촬영의 경우에는 문제가 좀 달라지겠지만 - 는 오늘날 적지 않은 영화감독들을 사로잡고 있다. 촬영이라고 하는 행위 자체가 곧바로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감각과 결부되어 있던 시기, 즉 제법 육중한 35mm 필름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던 십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이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영화라고 하는 예술의 과정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그런데 카메라라는 영화장치와 그것을 둘러싼 조건들이 영화에 부여했던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감각이 소멸되자, 아예 카메라 앞에 (배우, 모델 혹은 피사체로서) 선 이들이 그러한 감각을 내세우기도 한다. 말하자면 영화의 어떤 힘이 사라지자 인간적 힘으로 그 자리를 대체하려 하는 것이다. 오늘날 슬로우 시네마(slow cinema)라고도 불리는 예술영화의 한 경향을 따르는 작업들이 종종 인간의 수행 혹은 수련 자체를 기록하곤 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수련> (김이창, 2013)
물론 이러한 수행의 영화, 수련의 영화가 전적으로 영화의 디지털화로 인해 생겨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온당치 않다. 예컨대, <노스탤지어>(1983)의 마지막 부분에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마른 온천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촛불을 옮기려 애쓰는 인물을 집요하게 보여줄 때, 우리는 거기서 수행 혹은 수련의 감각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영화감독, 촬영감독, 배우 그리고 아마도 이동 촬영용 돌리(dolly)를 밀고 있었을 스태프들은 <수련>의 김이창과 다를 바 없는 물리적/신체적 운동에 빠져 있는 중이다.
오늘날 디지털 영화제작에서 장시간 촬영과 결부된 수행 혹은 수련의 감각을 가장 극단적으로 몰고 나가고 있는 예는 아마 차이 밍량과 그의 ‘행자’(行者) 연작 - <행자>(2012), <무색>(2012), <금강경>(2012), <몽유>(2012), <행자수상>(2013) - 일 것이다. 이것은 차이 밍량의 페르소나로 잘 알려진 배우 이강생이 법복을 입고 아주 느리게 여러 공간들을 걷는 모습을 담은 매우 단순한 구성의 단편영화로 거의 미술관용 인스톨레이션에 가까운 개념적인 작업이다. 올해 베를린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53분짜리 중편 <서유>는 이 연작의 여섯 번째 작품인데, 여기서 차이 밍량은 이강생이 한 지하도 계단을 아주 느린 걸음으로 내려가는 광경을 거의 20여 분에 이르는 장시간 촬영 고정 쇼트에 담아 보여준다. 한편, <수련>에서 김이창이 자신이 수련할 체육관 바닥을 세심하게 물걸레질하는 장면에서는, 실시간 촬영으로 추수의 광경을 담아낸 <노>(2003)나 조개잡이 광경을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포착한 <더블 타이드>(2009)의 샤론 록하르트 - 그녀는 디지털이 아닌 16mm 필름으로 작업했다. - 를 떠올리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내게 <수련>의 첫 쇼트는 신선하다기보다는 꽤 익숙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나는 <수련>의 첫 쇼트와 그 이후 이어지는 유사한 쇼트들에서 어떤 영화적 힘도 감지할 수 없었다. 이 영화에서는 한때 영화가 담당했던 특정한 힘의 역할을 그야말로 인간의 완력이 온전히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완력을 다시 철저하게 비인칭적(impersonal) 시선의 카메라로 포착함으로써 얻어낸 - <수련>의 첫 쇼트는 녹화버튼이 눌러진 상태로 체육관 바닥에 놓인 카메라로 촬영되었다. 주인공이 역기를 바닥에 떨어뜨릴 때마다 카메라도 격하게 흔들리곤 한다. - 이러한 이미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만일 <수련>을 일종의 ‘순수영화’(pure cinema)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영화가 빠져나간 자리를 채우는 인간의 완력, CCTV 스타일의 비인칭적이고 비인간적인 시선, 홍보영상과도 같은 자연풍경,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 착한 내레이션 등에 의해 지시되는 영화적 텅 빔의 상태, 요약하자면 영화의 부재를 통해 오히려 영화를 강력하게 지시하고 또 호명하는 영화적 순진성(idiocy) 때문일 것이다. <수련>의 마지막 쇼트, 한가운데 부분이 완전히 허물어진 가운데 건물 두 동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광경은 이 영화의 형식에 대한 완벽한 은유가 되고 있다. 없음을 통해 지시되는 한때 있었던 것의 기억 말이다. 그런데 그 부재의 자리에 현실적으로 솟아난 것은 무엇인가? 폐허, 곧 재난이다. 재난의 언저리로 밀려난 이미지다.
김이창 감독과의 대담을 마치고 난 하루 뒤인 4월 18일, 나는 옥인콜렉티브의 비디오 작품 상영회 및 대담을 참관하기 위해 한국영상자료원으로 향했다. 여객선 침몰사고와 그 이후 이어진 안타까운 소식들 때문인지 관객은 많지 않았다. 우연히도, 정황은 옥인콜렉티브의 단편 <작전명―까맣고 뜨거운 것을 위하여>(2012)를 매우 특별한 자리에 있게 했다. 암전된 화면, 위험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이 작품은 국가의 각종 재난대피 매뉴얼을 패러디한 것으로, 원자력 사고 발생 시 개개인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고안된 가상의 기체조 매뉴얼 비디오다.
<작전명―까맣고 뜨거운 것을 위하여> (옥인콜렉티브, 2012)
이 비디오는 (요가나 다이어트 비디오, 혹은 각종 안전수칙 비디오에서 차용했을 법한) 익숙한 영상 상투구들로만 가득하며, 그런 까닭에 영화적으로는 텅 빈 상태이자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완벽하게 ‘탈-영화적’이다. 다만 <수련>의 텅 빔이 순진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작전명>의 텅 빔은 그야말로 예술적 전술이라 할 만한 것이다. 이러한 전술적 텅 빔 속에서, 또 다른 수련(기체조)이 펼쳐진다. (“작전을 실행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수련이므로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참여해 주시길 바랍니다.”) ‘숙련된 마스터’의 기체조 동작은 때로는 따라 하기 쉽지 않은데 - 때로 이 사실은 ‘숙련된 마스터’ 오른편 뒤 여성 보조요원의 서툰 동작으로 인해 강조된다. - 그의 완벽한 동작은 <수련> 식의 완력이 아니라 우스꽝스러움을 유발한다. 웃음이 공포의 외투가 된 곳에서 효력의 과시는 도리어 무(기)력함을 상기시킬 뿐이다. 이처럼 영화적으로는 텅 비어 있되 상투적으로는 빈 곳 없이 꽉 찬 <작전명>의 거짓 충만함은 편재하는 재난 이외에 아무 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여기서도 이미지는 그 힘이 아니라 부재를 통해 강력하게 재난을 지시한다.
지난 3월 22일과 23일, 인디아트홀 공 옥상의 폐공장 옆에서 진행되었던 <서울 데카당스―Live>(2014) 또한 연극의 부재를 통해 연극을, 그리고 무엇보다 재난을 지시하는 공연이었다. 이 공연은 옥인콜렉티브의 비디오 작업 <서울 데카당스>(2013)와 개념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전자에는 연극 <구일만 햄릿>(2013)에서 연기했던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이, 후자에는 트위터에 친북 메시지를 게시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박정근이 등장하고 있다. 공연과 비디오 작업 모두에서, 하나의 단순한 상황이 인물들에게 던져진다. 즉, 그들이 섰던 혹은 서게 될 무대 -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경우 <구일만 햄릿>의 무대, 박정근의 경우 ‘법정이라는 무대’ - 를 위한 연기의 기술(技術)을 어떤 가상의 무대에서 ‘수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극연출자들과 전문배우가 그들을 지도하는 이들로서 등장한다.
옥인콜렉티브의 <서울 데카당스―Live>(2014) 공연이 끝난 후의 '무대'
중요한 것은 (1) 인물들에게 주어진 무대가 ‘가상적’ - 폐공장 옆의 옥상, 비디오 촬영을 위해 마련된 (취조실을 연상케 하는)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세트 - 이라는 것이고 (2) 그들이 수행하는 리허설은 이미 과거에 끝난 공연(<구일만 햄릿>) 혹은 사실상 공연이 아닌 것(법정에서의 재판)을 위한 준비이기에 부조리하다는 점이다. 여기서 연극, 비디오, 텍스트(셰익스피어의 <햄릿>, 진술서) 등의 매체는 각각에 고유한 미학적 힘을 비워낸 텅 빈 형식, 즉 폐허로서 호출되며 오직 그럼으로써만 인물들을 둘러싼 재난의 형상에 상응하는 ‘상황’(situation)을 (탈)구성하게 된다. 이처럼 예술적 폐허만이 실재를 불러들일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옥인콜렉티브의 에토스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작업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상황 속에 던져진 개인들이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 드러내는 표정과 몸짓을 관찰하게끔 하는 것 외에 아무런 목적도 지니고 있지 않다. 이때 표정과 몸짓은 그 자체로 재난의 풍경이 된다. 이처럼 꽤 역설적인 방식으로 연극이라는 매체의 힘 - 브레히트적 의미에서 게스투스(gestus)를 촉발시키는 것 - 과 정치성을 회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울 데카당스> 연작은 <작전명>은 물론이고 옥인콜렉티브의 또 다른 작업 <거리의 돈키호테>(2013)와도 동일한 예술적 전략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거리의 돈키호테>에서 그들은 경제위기로 시달리고 있는 스페인에서 길 가는 시민들로 하여금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몇몇 구절들을 낭독케 하고 이를 기록했다.
오늘날 포스트-시네마 시대의 영화, 포스트-드라마 시대의 연극, 보다 일반적으로는 포스트-미디어 시대의 예술을 사유하려 하는 이들이 종종 빠져들곤 하는 오류는 담론(적 형식) 자체를 예술화하려는 데서 비롯된다. 하지만 재난이 끊임없이 우리를 위협하는 시대에, 그러한 시도는 오늘날 흔히 접하게 되는 비판적 전통에 선 어수선한 ‘혼합 매체’ 작업들이 결국 재난의 희화화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무(기)력하다. 특정한 장르 혹은 매체 내에 머물더라도 그것의 미학을 온전히 비워내면서 음각(陰刻)으로 재난을 그려내는 것이 미래의 우리를 위한 동시대성이 아닐까? 이때 영화적 이미지는 그의 폐허의 가장자리에서 소멸을 기다리는 것으로 자신의 윤리를 회복하고, 어쩌면 부활을 꿈꿀 수도 있을 것이다.
제가 느꼈던 건 많다 와 없다 와 외시하는 무언가였습니다. 그러다 이 글에 나타난 화자의 느낌을 떠올려봤습니다. 연관된 강의도 있었고, 책도 읽었기에 떠올리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피로더군요. 그것이 만들어낸 지시하는 손가락은 말로 할 수 없(다)는 걸 생각하게 했습니다. 글을 읽다 보니 과문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20세기의 영화들은 과연 지금에서 그것들의 부활(재활)을 간구할 만한 영화들이기도 했을까란 의문도 들었습니다. (이 글 내에선 짧은 언급이었지만 그동안 말씀하신 것들, 그것들을 고려해 이해한 바로는 이전세기의 영화는 그것들의 의장보다 매체적인 특성 때문에 20세기를 자신들의 시대로 삼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맞나요?) 그리고 제가 아는 한에서 많은 비평가, 평론가, 철학자, 사상들이 각자의 부문에서 그것을 정의하거나 정의하지 못 했던 것들도요. 불완전하고 미욱한 정의와 세련되고 유보적인 은유들. 모두가 하나같이 가장 진실된 정의를 말하고자 하지만 결국 정의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것이 무엇인지 보려는 사람도 결국엔 보지 못하고 말 거라는걸 예기하게 했습니다. 이상하네요. 분명 희망적인 글맺음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폐허가 그곳에 자리했던 한때의 영광을 외시하여 유위전변을 함축하는 것처럼 어쩌면이란 부사 하나에 사실적으로 와닿았던 건 영화의 부활보다 우리의 현실은 그것의 종말에 더 가깝게 다가가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이 글에서 화자의 피로는 아마 앞으로의 방점에 따라 정의되는 선험적 징후가 될 거란 생각이 들어요. 보는 사람으로서 그것이 치유의 피로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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