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Anna (1975)
(dir. 알베르토 그리피 & 마시모 사르키엘리 / 이탈리아 / 1975년 / 225분 / 1.33:1)
1972년 2월의 어느 날, 배우 마시모 사르키엘리(Massimo Sarchielli)는 로마 나보나 광장의 한 카페에서 안나라는 이름의 소녀를 만난다.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그녀는 임신 8개월 째였고 보호시설에서 도망쳐 나와 머무를 곳도 없이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그녀를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와 보살피던 사르키엘리는 친구 알베르토 그리피(Alberto Grifi)에게 연락해 그녀에 관한 영화를 함께 만들어 보자고 제안한다. 파운드푸티지 영화 <불확실한 검증 La verifica incerta>(1964, 영화보기)으로 이탈리아 실험영화계에서 주목받고 있던 그리피는 당시 여러 예술가들이 그 미학적 가능성을 실험 중이었던 비디오를 활용해 그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오픈릴 방식의 비디오레코더로 촬영된 최초의 이탈리아 영화 - 이는 다시 그리피가 직접 개발한 ‘비디그라포’(vidigrafo)라는 장비를 통해 16mm로 전환되었다 - 이자 다이렉트 시네마와 시네마베리테의 유산을 계승하며 그것을 한계에까지 밀어붙인 걸작 <안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들은 우선 사르키엘리가 나보나 광장의 카페에서 안나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재연하는 것으로 시작했고 이는 <안나>의 도입부를 이룬다. 이후 영화는 안나가 머물게 된 사르키엘리의 집과 나보나 광장을 오가며 전개되는데, 사르키엘리의 아파트에서는 비디오라는 기록매체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앤디 워홀의 영화를 방불케 할 만큼의 냉담한 집요함으로 안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 - 특히 이가 들끓는 안나가 사르키엘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샤워하는 모습을 거의 외설적으로 느껴질 만큼 적나라하게 기록한 악명 높은 장면은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보는 이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 하고 있는 반면, 나보나 광장에서는 그곳을 배회하는 사람들과의 인터뷰, 이들이 정치사회적 현안 혹은 안나와 관련된 문제를 두고 벌이는 논쟁, 가정주부의 인권을 부르짖는 여성주의 단체의 집회 등 당대 이탈리아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여러 광경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이탈리아 1977년 운동을 가능케 한 분위기를 포착한(혹은 예견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프랑스 68혁명에 앞서 만들어진 장 루슈와 에드가 모랭의 <여름의 연대기>(1961)나 크리스 마르케의 <아름다운 오월>(1963) 같은 영화들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안나>의 ‘정치적 미학’은 워홀의 <블루 무비>(1969) - 비바와 루이스 월든이 무좀과 임질에서부터 베트남전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섹스하고 샤워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 -, 하라 가즈오의 <극사적 에로스>(1974) 그리고 1960년대와 70년대 미국 좌파의 인류학적 보고서라 할 로버트 크레이머와 존 더글러스의 <마일스톤즈>(1975) 사이에서 진동하고 또 표류한다고 보아야 할 옳을 것이다. <안나>는 정치의 가능성을 다시 발견하기 위해 ‘극사적’(極私的) 영역을 포괄하는 ‘일상생활의 실천’에 대한 다큐멘터리적 세사(細査)로 향하지만, 이는 돌발적인 사건(안나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며 불현듯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빈첸조라는 이름의 스태프)에 의해 굴절되는가 하면 주인공의 반발(출산장면의 촬영을 거부하는 안나)에 의해 가로막힌다. <안나>는 제도에 반발하거나 거기서 일탈한 이들(안나와 나보나 광장의 청년들) 주변을 집요하게 맴도는 영화이고 영화의 제작 방식 또한 사뭇 반제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피와 사르키엘리가 안나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끌어들인 조건들(사르키엘리의 아파트, 장시간촬영이 가능한 비디오, 사실의 기록과 분리불가능한 구성적 요소로서 재연의 활용)은 이미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제도로 기능한다. 감독들이 염두에 두거나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빈첸조와 안나에 의한 영화의 굴절과 중단은 (아무리 대안적인 방식이라 할지라도) 영화 제작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제도적 특성들에 대한 인간적 저항으로서, 1970년대 이탈리아의 정치적 지형에 상응하는 진정한 영화적 특이점들이 된다. 보다 간명하게 말하자면, <안나>는 그 실패를 통해 저항을 증거하는 영화다. 소설가 레이첼 커쉬너가 『아트포럼 Artforum』에 기고한 글("Woman in Revolt". 원문보기)에서 적절히 지적했듯, 그리피와 사르키엘리의 영화에서 안나라는 인물은 1970년대 “노동계급의 물질적 조건에서 히피, 학생, 비정규직 노동자, 마약중독자 그리고 여타 소외된 자들의 세계로의, 이탈리아 좌파의 구성상의 변화를 나타내는 징후”로서 읽힐 수 있다.
<안나>는 1975년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이듬해에는 칸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후로 무려 40여 년 동안 이 영화는 이탈리아 영화계의 몇몇 이들에게는 전설처럼 떠도는 영화가 되었고 이탈리아 바깥에서는 거의 완전히 망각 속에 파묻혔다. (<안나>가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디지털 복원판이 2011년 베니스영화제 및 2012년 로테르담영화제에서 상영되면서부터다.) 이 영화에 얽힌 불운은 이것만이 아니다. 영화를 공동연출한 그리피와 사르키엘리는 크레딧 문제 - 사람들은 이 영화를 전적으로 그리피의 것으로 간주하곤 했다 - 로 갈라섰고, 안나는 빈첸조에게 아이를 떠넘기고 사라진 뒤 결국 로마의 정신병동에 입원했으며 그 이후 소식은 (지금까지도)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빈첸조는 한 싸움에 말려들었다 살해되었다. 두 명의 감독은 이 영화가 다시 빛을 보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피는 2007년에, 사르키엘리는 2010년에 사망했다.) 마치 흡혈귀처럼, <안나>는 그와 연루된 이들의 생을 박탈함으로써 육신을 얻었고, 오랜 기간 어둠 속에 잠들어 있다가, 홀연히 깨어나 우리 앞에 나타났다.
(* <안나> 복원판은 오스트리아 비엔나국제영화제(Viennale: Vienna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 의해 2013년에 DVD로 출시되었다. 비엔나영화제는 2012년에 알베르토 그리피 특별전을 마련한 바 있는데, 이 DVD는 그 특별전과 연계되어 기획, 출시된 것이다. 비엔나영화제 홈페이지(www.viennale.at)의 온라인 숍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었는데, 8월 25일 현재 확인해 보니 올해 영화제 준비로 잠시 온라인 숍을 폐쇄중이다. 이 영화는 다가오는 9월 DMZ 다큐영화제에서 상영될 예정이라 한다.)
키들랏 타히믹 Kidlat Tahimik
지난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필리핀 독립영화의 '아버지'(tatay) 키들랏 타히믹 특별전이 열렸다. 2011년 한국에서의 타히믹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감독에게서 받은 DVD로 이미 본 영화들이긴 했지만, 이처럼 한 자리에서 원래의 16mm 필름으로 볼 수 있어 행복했다. 당대의 다른 아시아영화들과 타히믹의 영화들을 나란히 놓고 생각해 보면, <향기어린 악몽 Perfumed Nightmare>(1977)은 오가와 신스케의 <산리츠카: 헤타 부락 Sanrizuka: Heta Village>(1973), 리트윅 가탁(Ritwik Ghatak)의 <티타쉬라 불리는 강 A River Called Titash>(1973), 소흐랍 샤히드 살레스(Sohrab Shahid Saless)의 <단순한 사건 A Simple Event>(1974)과 더불어 1970년대 아시아영화에 '지정학적 미학'(geopolitical aesthetics)의 새로운 대지로 향하는 창을 열어 보인 작품이고(하지만 창은 서둘러 닫혔다), <무지개 가운데는 왜 노란색일까? Why is Yellow the Middle of Rainbow?>(1994)는 비슷한 시기에 나온 다카미네 고의 <운타마기루 Untamagiru>(1989), 허우샤오시엔의 <희몽인생 The Puppetmaster>(1993) 그리고 배용균의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1995)과 함께 대안적/대항적 역사 기술 - 공적 역사의 창백함에 맞서, 이야기들(신화, 일기, 개인적 기억은 물론이고 허구에 이르기까지)의 재구성을 통해 역사적 '인상과 경험'을 복원시키는 것 - 의 방법론을 한층 정교화한 영화라 할 수 있다(이들의 시도는 계승되지 못했다).
<향기어린 악몽>
나는 키들랏을 2009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보았다. 막 부산에 도착한 나는 해운대의 게스트센터에서 ID카드를 찾고 있었는데 바로 옆에서 한 백발의 노인이 ID카드와 이런저런 게스트패키지를 주섬주섬 챙기고 있는 중이었다. 대학시절(1990년대) 해적판 VHS 테입을 구해서 본 <향기어린 악몽>의 주인공과 너무나도 흡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보고 '키들랏 타히믹인가?'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칠 무렵, 30년이라는 시간이 인간의 얼굴에 응당 가하게 마련인 변화의 폭을 가늠하며 망설이고 있을 무렵, 어느새 그 백발의 노인은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그는 정말 빨리 걷는다.) 내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한 건 같은 날 오후, <향기어린 악몽>을 보러 간 영화관에서였다. 당시 이 영화는 닉 데오캄포의 16mm 중편 <올리버 Oliver>(1983)와 함께 상영되었는데, 16mm로 촬영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주제적으로나 형식적으로 전혀 연관이 없는 두 영화를 묶어 상영한 건 지나치게 운영상의 편의만을 고려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관객과의 대화 진행을 맡은 프로그래머는 두 편의 영화를 아예 보지 않았거나 그저 건성으로 보고 온 게 분명했다.)
같은 해 12월, 나는 필리핀의 시네마닐라 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아 마닐라에 가게 되었다. 키들랏과 처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도 그 때다. 영화제 폐막식 자리에서, <점성사와 빨치산 The Woven Stories of the Other>(2006)과 <하수구 Imburnal>(2008)의 감독 셰라드 안토니 산체스(Sherad Anthony Sanchez)와 대화를 나누던 중, 나는 한국에서 키들랏의 전작을 모아 상영하는 회고전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셰라드는 그가 마침 이곳에 와 있다고 하며 - "아, 타타이(아버지)! 저기 와 계신데?"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폐막식장 한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름 그대로 '조용한 번개' - 타갈로그어 '키들랏 타히믹'을 직역하면 이런 뜻이 된다 - 처럼, 그렇게 그가 거기 있었다. 일군의 젊은 필리핀 감독들과 환담을 나누면서. 그 이후, 2010년 12월 마닐라에서 그를 다시 만났고, 2011년에는 그의 장단편 전작이 마침내 한국에서 상영되었다. (한편, 2013년에는 크리스토퍼 파브섹(Christopher Pavsek)이 저술한 『영화의 유토피아: 고다르, 클루게, 타히믹에 있어서 영화와 그 미래 The Utopia of Film: Cinema and its Future in Godard, Kluge and Tahimik』가 출간되기도 했다. 나는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 못했다.)
영화를 만든다는 건 일시적이나마 어떤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이다. 종종 이 공동체는 영화가 완성되고 나면 사라진다. 이와 관련해,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의 감독이 있다. 첫째,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이들을 매번 찾아나서는 이들이 있다. 둘째, 자신과 뜻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함께 있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있다. (본디 예외적이었지만 점점 늘어가는 유형으로, 전적으로 홀로 영화를 만드는 이들도 있기는 하다. 이렇게 해서 영화는 '오디오비주얼 아트'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슬기롭게도, 영화의 신은 둘 가운데 어느 쪽을 특별히 편애하지는 않는다. 이 두 가지 유형 사이에는 차이만 있을 뿐 위계는 없다. (위계를 가정하는 건 인간적인 바람일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알베르토 그리피와 마시모 사르키엘리의 <안나>만 해도, 이 영화의 연출자들이 '영화로 만들기에 좋은 소재'로서 안나라는 소녀를 '발견'했음은 분명하며 이들이 그녀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만든 일시적 공동체는 촬영이 끝난 후 완전히 파탄나 버렸다. 하지만 이 영화는 걸작으로 남았다. 여기에 영화 고유의 잔혹성이 있다.) 물론 타히믹은 이 가운데 후자에 속하며 그것도 아주 극단적인 축에 속한다. 그의 영화적 공동체는 바로 그의 (실제) 가족이다. 우리는 <향기어린 악몽>의 주인공 타히믹이 극중 독일에서 만난 임신부가 그의 실제 아내 카트린(Katrin)이며 그녀 뱃속의 아이는 그의 첫째 아들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그 아이와 어머니를 <누가 요요를 만들었나? 누가 월면차를 만들었나? Who Invented Yo-Yo? Who Invented the Moon Buggy?>(1979)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무지개 가운데는 왜 노란색일까?>는 자신의 아이와 함께 기록해나간 그림책이자, 일기이며, 또한 1980~90년대 필리핀의 현실에 대한 풍자적 코멘트이기도 하다.
나는 지난 8월 15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키들랏이 마침내 '완성'(!)한 <과잉개발의 기억 Memories of Over-development>(1980~2014)을 보다 그만 말문이 막혔다. 키들랏이 20년 넘게 진행해 온 마젤란의 필리핀인 노예에 관한 이 이야기는 - 그사이 촬영은 여러차례 중단되었고 키들랏은 더 이상 마젤란의 노예 역할을 할 수 없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 작년에 촬영이 재개되어, 예전의 16mm 촬영분과 비디오 촬영분이 뒤섞인 형태로 완성되었다. 키들랏의 아내 카트린은 물론이고, 그의 세 명의 아들 그리고 손자들이 모두 등장하는데 - 거칠게 정리하자면 둘째 아들이 연기한 주인공이 한 노인(키들랏)을 찾아 다니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짜여져 있다 - 극중에서 묘사된 이들의 직업 또한 (키들랏의 경우를 제외하면) 실제 그대로이다. 사실, '완성'된 <과잉개발의 기억>은 원래의 역사적 에세이 프로젝트가 이리저리 굴절된 끝에 온전히 키들랏 가족의 '홈비디오'로 소박하게 정리된 것이라고 보아야 옳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미학적으로 실패한 영화이다. 하지만 그 실패를 통해, 가족이라는 형태로 지속되어 온 하나의 영화적 공동체의 성공을 증거하는 영화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2년 전 한국에서의 전작 회고전 당시 함께 마련되었던 키들랏 전시의 제목은 "패밀리-트리, 필름-매트릭스"(Family-Tree, Film-Matrix)였다.
(*<과잉개발의 기억>은 9월에 개막하는 「미디어시티 서울 2014」 (2014.9.2~11.23) 기간 중에 다시 상영될 예정이라 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