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저먼 시네마, 예술, 계몽주의 그리고 공론장
: 알렉산더 클루게와의 대화
대담자: 스튜어트 리브만
(번역: 임경용, 유운성)
(※ 이 인터뷰는 2008년 알렉산더 클루게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옥토버 October』 1988년 가을호(알렉산더 클루게 특집호)에 실렸던 것을 번역한 원고를 옮긴 것이다. 본문 중 [ ] 안의 내용은 인터뷰 원문에는 없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가 덧붙인 것이다. 또한 원문에 없는 주석을 추가했을 경우에는 [역자 주]로 표기했다. 클루게가 영어로 대화하는 과정에서 문법적으로 틀린 표현을 사용했거나 의도와 다르게 잘못 말했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원문엔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데, 번역 과정에서는 문맥을 고려하여 수정, 번역했다.)
다음 인터뷰는 1986년 12월 6일과 16일, 1987년 7월 26일에 뮌헨에서 장시간 영어와 독일어로 진행된 것을 요약한 것이다.
스튜어트 리브만 (이하 SL): 앞으로 2달이 지나면, 그러니까 1987년 2월이 되면 독일 영화감독들은 오버하우젠 선언[1] 25주년을 축하할 수 있습니다. 뉴 저먼 시네마의 탄생을 알린 상징적인 순간이었죠. 그러나 오늘 뮌헨을 방문한 사람들 가운데 독일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곳 지역 극장에서 단지 두 편의 독일 영화만이 상영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을 게 분명합니다. 한 편은 대중적인 코미디 영화인 <남자 Männer>이고 다른 한 편은 모호한 ‘예술 영화’인 <천국 Paradies>이죠. 이 두 편 모두 젊은 여성 감독인 도리스 되리가 연출했습니다. 불행히도, 독일의 영화관들에서 독일 영화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동시대 독일 영화계 안에서 지극히 일반적인 일처럼 보입니다. 때문에 불확실한 성공에 대해, 어쩌면 ‘뉴 저먼 시네마’ 운동의 실패에 대해서까지도 질문을 던져보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인 듯합니다. 감독님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오버하우젠 선언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언 25년 뒤에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 짐작이나 했을까요?
알렉산더 클루게 (이하 AK): 우선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부터 하죠. 저는 되리 감독의 제작방식이 오버하우젠 선언에 참여한 사람들이 원했던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버하우젠 그룹은 [기존의 것과는 다른] 하나의 생산양식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이 그룹[의 영화들]을 내용적인 측면에 의거해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울리히 샤모니의 <그것 Es>(1965), 마이 스필스의 <그렇게 하렴 Zur Sache, Schätzchen>(1967), 베른트 진켈의 <리나 브라케 Lina Braake>(1974-1975) 그리고 도리스 되리의 <남자> 같은 영화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 담긴 저예산 영화를 만드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경험들은 사소한 것일 수도, 복잡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버하우젠 그룹은 어떤 특정한 영화들로, 예컨대 에드가 라이츠나 폴커 슐뢴도르프의 영화들로 특징지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특징짓는 것은 하나의 생산양식이며, 우리는 자본주의가 막 새롭게 시작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거대 비즈니스 시대에도 1802년에나 통용되었을 방법을 사용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생산양식을 추구했던 것이죠.
SL: 감독님께서는 오버하우젠 선언에 참여했던 감독들이 영화를 만드는데 있어서 토대로 삼고자 했던 것이 바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은 ‘작가의 영화’(Autorenfilm)라는 슬로건으로 요약되면서 프랑스의 ‘작가정책’(la politique des auteurs)과 동일한 것으로 오도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변하긴 했지만 독일에서 이 개념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감독님께선 언제나 독일 영화감독들에겐 재정적이고 행정적인 책임이 프랑스 감독들보다 훨씬 많이 부과된다고 하셨죠.
AK: 우린 프랑스 사람들의 용어를 받아들여 그 의미를 변화시켰습니다. 작가의 정치학(Politik der Autoren)[2]에서는 예술적 책임만큼이나 재정적 책임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개념은 1807년부터 1810년에 이르는 시기의, 예나와 아우어슈테트[3] 이후의 프로이센 개혁자들의 그것과 유사합니다. 그들은 베를린에 대학을 설립하고 군대를 재조직했으며 자치 정부를 도입했습니다. 프로이센적인 의미에서 ‘페레스토로이카’를 만든 셈이죠. 이는 행정가들에 의한 위로부터 아래로의 혁명이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와는 사정이 좀 달랐다고 할 수 있는데, 독일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혁명이었던 이것은 매우 의욕적이었던 상급 관리들에 의해 1802년부터 1815년 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비엔나 의회가 그것에 종지부를 찍었고 그들 모두는 사형당하거나 사임해야 했죠. 우리는 이와 같은 유럽에서의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의 조짐들을 매우 선호합니다. 우리는 호르크하이머의 견해를 차용해 좀 더 실용적인 개념들과 결합시켰습니다.
SL: 호르크하이머의 어떤 견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AK: 부르주아 역사철학과 기업주의의 기원에 관한 것이죠. 이 기원에는 계몽, 즉 직업 선택의 자유, 도덕성, 참여, 정의 등의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는 측면이 감춰져 있습니다. 이것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이론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SL: 초기 기업자본주의 시대가 감독님의 영화 제작 실천을 위한 모델이 되었다는 말씀이신가요?
AK: 우리는 사회주의란 초기 부르주아들의 이상을 주의 깊게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죠. 그 큰 그림 안에서 볼 때 영화는 단지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작은 부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작가[라는 개념]를 만들었고, ‘그레이터 런던’[4] 안에 그러한 작가의 ‘로빈슨주의’(Robinsonism)[5]를 밀어 넣으려 애썼습니다. 즉, 우리는 반-로빈슨주의와 극도의 예술적인 노력, 자유, 경제적 책임을 한데 결합시켰습니다. 제가 베아테 마인카-옐링하우스와 함께 <어제와의 이별>(1967)을 편집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아침, 장비를 빌리고 생각을 정리하다가 부기를 배웠는데, 그때부터 우린 제작자가 되었습니다. 일단 법정에 가서 사업자등록을 해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10만 마르크가 필요했어요. 당시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그 정도 돈은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에겐 굳이 등록이 필요 없는 철학이 있다고 말했죠. 당신의 이름을 서류에 기입하는 것, 그게 바로 제작입니다. 그게 바로 ‘작가의 영화’(Kino der Autoren) - 나그라 녹음기와 아리플렉스 카메라, 편집 테이블, 부기에 대한 지식 그리고 이것이 바로 계몽의 과정이라는 믿음 -입니다. <남자>의 제작자들 역시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 영화를 제작한 제작자들을 살펴보면, 그들만의 제작 방법을 가진 3명의 여성이 눈에 띌 것이며, 그들의 남편들이 모두 오버하우젠 운동에 속해 있었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그들은 원래 남편들의 영화를 제작해 실패를 거듭하다가 결국 여성 감독인 도리스 되리와 작업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처럼 성공을 거둘 때까지 도리스 되리의 영화를 계속 제작해왔죠.
SL: 첫 번째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죠. 감독님의 영화들은 극장에서 상영될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AK: 글쎄요, 극장들은 전문화되고 있습니다. 나이 어린 관객들만을 상대로 하는데, 대개는 12살에서 23살 사이의 관객들이예요. 그들은 뉴 저먼 시네마 따위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어렵다는 거죠. 1944년 이후, 독일은 자국의 영화를 여기서 상영하는 외국 메이저 영화사들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짧게나마 [외국영화와 독일영화가] 잠시 공존하는 시기가 있었죠. 오늘날에는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영화시장은 전적으로 외국 메이저 회사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영화를 빼앗긴 겁니다. 그런 반면에 우리의 제작사 및 제작설비는 그래도 ‘우리 것’입니다. 독일 내에는 약 460명의 영화감독이 있고 그들 중 120명 정도는 제작자들인데, 그들 모두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경제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독립 제작자들이죠. 보시다시피 제 작업실에는 35mm 카메라 한 대와 중고 아리플렉스 카메라 한 대 그리고 몇 개의 장비들이 있습니다. 1/2인치와 3/4인치짜리 비디오 장비들도 보이실 겁니다. 우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느 때고 우리 힘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며 이게 바로 [영화라는] 비즈니스에 대한 우리의 생각입니다. 우린 ‘거대 회사들’로부터 독립적이며 거대 회사를 만들 생각도 없었습니다. <특전 U보트>, <네버엔딩 스토리> 그리고 <장미의 이름> 같은 영화조차도, 베른트 아이힝거(콘스탄틴 영화사의 사장)가 그 영화들을 거대 회사들 및 ‘바바리안 자이언트’(텔레비전 방송사)와 공동 제작한 방법과 수단을 고려하면, 역시 오버하우젠 그룹의 방식을 따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오버하우젠 선언에 동참했던 사람들과 같은 기질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는 제 영화 <강자 페르디난트> 제작을 지휘하며 우리와 매우 밀접하게 일했습니다.
SL: 제가 앞서 말씀드린 바를 따르자면, 독일의 영화관들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종류를 바꾸고자 했던 오버하우젠 선언자들의 욕망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전후 15년 동안, 독일의 영화관들에서는 할리우드 영화와 더불어 대개의 경우 형편없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반동적인 독일 영화들이 상영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은 그때와는 어떻게 다른가요?
AK: 오버하우젠 그룹은 생산양식을 바꾸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가 어디서 어떻게 상영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토론이 가능한 공론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새로운 극장들을 짓고 극장 건축을 발전시키는 일에도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말이죠. 결과적으로 1920년대의 전통은 계승되지 못했습니다. 카페나 레스토랑을 옆에 끼고 있는 극장들이 있으니 이런 곳에서 토론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저 단순히 옆에 끼고 있는 것에 그치고 맙니다. 이건 잘못된 거지요. 우리는 생산[양식]뿐만 아니라 배급[양식]도 변화시켜야 합니다.
SL: [독립적인 방식으로] 영화 제작비를 마련함으로써 생산양식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인식이 1960년대에도 이미 있지 않았나요? 작가영화배급소(Filmverlag der Autoren) 같은 독립 배급사들이 설립되었습니다. 더 작은 배급사들도 있었고요. 주로 미국회사들이 주도한 거대 극장 체인들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몇몇 대안 영화관들도 만들어졌습니다. 제작시스템뿐 아니라 배급시스템을 변화시키려는 노력들도 분명 있었습니다.
AK: 그렇긴 하지만 부적절한 것들이었죠. 지금도 여전히 체인영화관들이 우세를 점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거기에 적합한 영화를 만드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극장용으로 만들어진 에드가 라이츠의 모든 영화는 실패했습니다. 슐뢴도르프는 더 이상 독일에서 극장용 영화를 찍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텔레비전용으로 <세일즈맨의 죽음>을 만들었고 그 뒤론 그런 식의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저는 빔 벤더스가 지금 극장에 걸릴 만한 영화를 찍고 있다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헤어조크는 새로운 극장용 영화를 만들려고 했지만 두 번이나 제작을 중단해야 했죠. 이와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된 건 전환점(Die Wende)[6]을 마련하고자 애쓴 프리드리히 짐머만 같은 사람이 영화계에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런 인간은 때려눕힐 수라도 있죠. 진정 우리에게 버거운 상대는, <아마데우스>와 <아웃 오브 아프리카> 같은 영화를, 혹은 <람보> 같은 영화를, 그도 아니면 <카르멘>이나 <남자> 같은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이 극단적인 노동 분업의 상황입니다. 이른바 관계의 영화(Beziehungsfilme), 그러니까 삼각관계를 다룬 드라마들에만 관심이 쏠려 있기 때문에, 일상적 관계 안에서 운명의 힘을 조야하게 다루는 그런 영화들에서 벗어나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이런 식의 드라마들이 동일하게 반복되면서 일종의 도피주의로 나아가게 됩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가 도피주의로 향하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람보> 역시 진정한 경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게 명백합니다. 이 영화는 8살짜리 철부지가 느끼는 전능함의 감정을 스타일화한 것에 불과합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면, <람보>는 고전적인 서커스와 관련되어 있는 것인데요, 흡사 동물들이 등장하는 로마식 서커스에서처럼 인간의 전능한 힘을 보여줍니다. 말하자면 <람보>는 전능함의 환상을 섬뜩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죠. 이것이 이른바 영화(movie)라 불리는 것들입니다. 미디어는 대다수 대중의 평균연령에 맞게 기능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텔레비전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아동용 영화’의 수준으로까지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전 비평가로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이러한 변화를 반드시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문제일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지속적이고 총체적으로 과중한 부담이 가해진 결과라 할 수 있는데, 결국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생산자로서 살아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깨닫는 순간 인지적 부조화를 경험하고 고통 받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스스로를 자기 삶의 생산자라고 느낀다면 그는 불행할 겁니다. 그래서 차라리 자신의 삶의 관객이길 택하는 거죠. 사회 속에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나마 삶을 변화시키고 싶은 겁니다. 따라서 그가 밤에 보는 영화들은 낮 동안에 경험한 바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결국 경험과 영화 사이에 엄격한 구분이 생기게 되죠. 이는 우리[뉴 저먼 시네마 세대의] 영화에 큰 장애가 됩니다. 왜냐하면 1960년대를 통과해 온 세대인 우리는 경험과 허구가 대립된다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SL: 경력 초기부터 감독님께서는 그런 대립을 파괴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오셨습니다. 감독님과 동료들이 제작해오고 있는 종류의 영화에 동기를 부여한 것도 바로 그런 노력이었고요. 또한 감독님의 제작 전술 및 제도적 개선을 위한 정치적 노력에도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협동 영화’(cooperative film)의 이념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해주셨으면 하는데, 이는 ‘작가의 영화’(author's cinema)의 한계가 명확해졌던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사이, 다른 영화감독들과 함께 <독일의 가을>을 집단적으로 제작하면서 매우 중요하게 부각되었습니다.
AK: ‘작가의 정치학’(Autorenpolitik)에는 두 가지 유치한 장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고립이었죠. 그 영화들이 성공을 거둔 바로 그 순간, 그들은 동시에 고립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이 어떤 것인지 전달할 수가 없었어요. 그들과 나머지 사회와의 교환은 단절되었습니다. 두 번째 장애는 우리 작업의 도덕적 차원과 미학적 차원 사이의 갈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SL: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AK: 1977년 당시 독일 좌파는 스스로 분열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예컨대 바더 마인호프 그룹(Baader-Meinhof Gruppe)[7]을 인정해야 했죠. 우린 판사나 정치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회 전체에 대해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관심을 끄는 것들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죠.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린 힘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것을 이해해야 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언제나 검열에 반대했던 - 우리가 보조금을 받고 있을 때일수록 더더욱 - 이유입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보조금을 필요로 하지 않는 영화 - <독일의 가을>을 지칭함 [편집자] - 를 만들기로 결심한 이유기도 합니다. 사실 보조금을 받을 수도 없었죠. 처음에 우리는 각자 10분이나 20분짜리 영상을 만들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중 누구라도 혼자선 사회에 패배할 게 뻔했지만 힘을 모으면 어떤 적수라도 물리칠 수 있었죠. 함께 있었기에 우리는 검열에 강력히 대항할 수 있었습니다. 파스빈더, 슐뢴도르프, 라이츠 및 알프 브루슈텔린과 함께 작업하면서는 꼭 한 편의 ‘클루게 영화’를 만들어야 할 필요도 없었기에 저는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영화’와 협동 영화라는 용어 사이엔 어떠한 모순도 없습니다. 영화는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의 에너지가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제작형식들과 모든 고려사항들이 서로의 작업에 덧붙여질 수 있습니다. 협동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작가의 정치학’이라는 개념만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SL: <독일의 가을>과 <후보자> 그리고 <전쟁과 평화> 같은 영화들이 돈을 벌었을 때 놀라진 않으셨나요? 제작비 전액을 회수하지 않았습니까? 미국에서라면 이런 상황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겁니다.
AK: 네 맞아요. 이 작품들은 보조금 없이 만들어졌지만 결국 모든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었죠.
SL: 그러나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뉴 저먼 시네마 작품들은 통상적인 배급망에서 명백히 배제되어 왔고, 이로 인해 혁신적인 독일 영화들이 문화적으로 게토화되지 않았습니까? 매우 슬픈 일이긴 하지만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운명과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AK: 텔레비전이나 문학 그리고 음악 쪽과 관련해서는 그렇지 않았지만 정작 영화관에서는 실패했죠. 한스-위르겐 지버베르크는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자신의 모든 영화를 상영할 수 있었지만 영화관에서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극장(theater)에서 제 모든 영화를 상영할 수 있었지만, 영화관(movie theater)이 아니라 ‘진짜’ [연극공연을 목적으로 지어진] 극장(‘real’ theater)에서만 가능했죠. 물론 영화관에서 제 영화를 상영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더라면 압도적인 감흥을 선사하는 ‘진짜’ 극장에서만큼 많은 관객들을 모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오늘날의 관객들은 1929년[8]에 사람들을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만든 바로 그 이유들로 고민합니다. 더 푸른 초원이 존재하기만 한다면 거기로 가려고 들 겁니다. 당시 히틀러의 측근이었던 알프레드 후겐베르크[9]가 자금을 댄 푸른 초원[10]은 모든 대중들과 감응하려 시도했습니다. 오늘날엔 그런 일은 거의 시도되지 않고 있죠.
SL: 관객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왜 아직까지 극장용 영화를 만드시나요?
AK: 이런 상황이 영구적으로 지속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 별로 불평하고 싶진 않습니다. 이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저는 새로운 민영 텔레비전 쪽에 참여해 거기서 영화를 계속 할 생각입니다. 영화사(史)는 이제 텔레비전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영화제작자들을 위한 시간이 편성되어 일 년당 총 60시간 분량에 달하는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11] 우리는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제공하는 프로그램들을 만들려고 합니다. 우린 텔레비전에 매우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결국 우리가 원하는 건 영화를 재정립하는 것이죠. 우린 텔레비전을 경유해 다시 영화로 돌아갈 것이고 35mm 제작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게 꼭 필수불가결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될지라도 35mm는 최고의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최선의 매체이기 때문입니다. 여하간 지금 당장은 아주 일반적인 관객(시청자)들에게 도달하는 건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영화관에는 12살에서 18살 사이의 아이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이 삶의 경험(Lebenserfahrung)을 지니고 있는 사회집단이라고는 보기 힘들죠. 경험(Erfahrung) 없는 공론장[12], 이게 오늘날의 영화가 처한 현실입니다.
SL: 그럼 감독님의 텔레비전 프로젝트들은 그 전의 보다 개인적이고 지역적인 영화 배급 시스템을 벗어나 궁극적으로 영화를 되찾기 위한 우회이자 전술적 움직임인 셈인가요?
AK: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영역에서 ‘작가의 영화’의 이념을 실현하고 있는 중입니다. 뉴 저먼 시네마가 지녔던 잠재력의 일부는 텔레비전으로 향했습니다. 예컨대 에드가 라이츠의 <고향 Heimat>(1984)은 딱 텔레비전용 영화죠. 그의 <0시 Stunde Null>(1977) 또한 텔레비전용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집에서 나가길 거부한다면, 그리고 이른바 텔레비전이라는 창문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고 있다면, 우리는 극장에서 사람들을 기다릴 게 아니라 직접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영화관에 가지 않고 특정한 영화만을 선택하는 이유가 있다면 - 실제로 사정이 그러하니 우린 그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 우리는 그들과 접촉을 유지할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영화를 재정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관객들은 텔레비전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SL: 구체적인 예를 좀 들어 주시겠습니까? 감독님 영화의 경우, 극장 상영 시와 텔레비전 방영 시 각각의 관객(시청자)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요?
AK: 제 영화 한 편이 극장에 걸리면 대략 9만 명의 관객이 듭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면 약 80만 명이 봅니다. 정확한 숫자를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라이츠의 마지막 극장용 영화는 약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죠. 그런데 그의 <고향>의 경우 독일에서만도 2,100만 명의 시청자가 보았고 전 세계로까지 팔려나갔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사람들이 [영화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전통적 공론장에 더 이상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참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또 다른 많은 이유들이 있죠. 여자들은 강간당할 까 두려워 혼자선 밤에 도심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영화관에 갈 리가 없죠. 게다가 영화들은 조잡하기 짝이 없죠. 우아하게 대접받길 원하는 그네들이 왜 <람보>를 보겠습니까? 이런 영화는 젊은 사내들을 위한 것이지 여성들을 위한 건 절대로 아닙니다. 동일화할 대상이 없거든요. 노인들은 장소가 불편해서 영화관에 가질 않습니다. 진지함과 대중성을 결합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텔레비전에서라면 이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작가의 정치학”(politics of authorship)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때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SL: 감독님께서 텔레비전 관련 정책에 개입하신지는 15년도 더 되었습니다. 국가 소유의 방송사와 독립 영화제작자들 간에 공동제작을 포함한 협업의 기초를 마련했던 1974년 법령 및 1979년의 개정법 제정 과정에서, 막후에서 중요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감독님이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독일 영화 제작에 있어서 위대한 전기를 마련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지난 15년 동안 만들어진, 형식적으로 도전적이고 정치적으로 도발적인 최고의 작품들은 그러한 정책 없이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감독님께선 독일 내 위성 및 케이블 방송을 위한 새로운 법안 마련에 매우 열성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이 법안은 독립 영화제작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AK: 유럽에서 텔레비전은 두 가지 상이한 방향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먼저 이탈리아의 경우를 보면, RAI와 같은 공영 방송 시스템은 그 어느 때보다도 편협해진 반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13]의 방송사는 미국 패스트푸드 광고를 내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둘 모두 이탈리아라는 지형 안에서 섬들이나 마찬가집니다. 마치 맥도널드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시다시피 이탈리아에는 천천히, 많이 먹을 수 있는 음식(점)들도 많습니다. 이처럼 매우 오래된 문화 속으로 서서히 침투해 들어오는 것들이야말로 진정 두려운 것들입니다. 영국의 사례를 보면 우린 이와는 전적으로 다른 상황도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BBC는 절대로 광고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광고를 허용하는 채널의 경우 전체 시청자의 50% 미만에게만 방송됩니다. 그래서 균형이 맞게 되는 거지요. ‘채널 4’(Channel 4)의 경우 광고를 받아들이지만 소수자를 위한 프로그램도 만듭니다. 따라서 매우 균형 잡힌 시스템이 가능해졌고 한 명의 유럽인으로서 저 역시 이런 정책을 환영합니다. 독일에 새로운 미디어, 즉 민간 방송사가 생긴 것은 불과 2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인들에겐 이상하게 여겨지겠지만, 이전에 여기선 국가가 텔레비전을 독점했었거든요. 지금 우리의 관심은, 뉴 저먼 시네마의 모든 잠재력을 동원하여, 그리고 오페라 하우스나 출판사와 같은 모든 구시대적(noncontemporary) 미디어들과 연합하여, 국영채널 및 민영채널 방송시간의 10%정도만이라도 보장받는 독립제작사를 만들 방법을 찾는 데 쏠려 있습니다. 제가 항상 제안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죠. 우린 클라우스 에버딩 같은 오페라 하우스 감독이나 페터 자덱 및 페터 슈타인 같은 베를린대극장(Schauspielhaus) 감독들이 자신들만의 실험을 하면서 누리는 자유가 우리에게도 보장되기를 원합니다. 계획경제 체제처럼 구조화되어 있는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에는 편성책임자들이 있습니다. 민영 방송국에도 운영담당자들이 있죠. 하지만 그들은 절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프로그램을 결정하는 사람은 그 자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미국인들에게 이에 대해 설명하기란 매우 힘든 입이죠.
SL: 어떻게 그런 합의가 이뤄질 수 있었나요?
AK: 모든 영화감독들, 오페라 하우스 감독들, 출판사 편집자들이 각주 장관회의에 찾아갔었죠. 한편 우리는 제1위성채널(SAT1)[14]을 통해 우리 작업의 일부를 방송하고 광고를 했습니다. 우리 전략은 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SAT1의 방송시간을 사는 것이었죠. 이건 나중에 내쳐지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매우 보수적인 환경 속에서 이처럼 창문을 지키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했습니다. 이는 영화와 관련된 정책을 펼칠 때 우리가 활용했던 모델 및 체계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SL: 제가 만나 본 많은 영화감독들은 베르텔스만이나 레오 키르히[15] 같은 회사와 함께 작업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국영방송 체제가 강화되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도 있습니다. 감독님의 노력은 충분히 지지를 얻고 있습니까?
AK: 네. 라이츠와 슐뢴도르프는 제가 제안한 바와 동일한 작업을 했습니다만 모범이 될 만한 것은 아니었죠. 결국 그들은 독일 공영방송과 작업하지 않으면 미국에서 작업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내몰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자신들의 작품을 변화시킬 수 없었던 겁니다. 이제 그들은 공영방송 시스템에 익숙해진 관객들과 단단히 결합되어 있습니다. 1990년대 들어 관객들이 새로운 작품을 원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바꾸지 못할 겁니다. 이 감독들은 러시아 사람들이 만들었던 서사적 영화(epic film), 혹은 영화사 초기에 뤼미에르나 멜리에스가 만들었던 단편영화나 1분 남짓한 영화들 등의 영화사적 유산을 떠나서는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이런 제한은 일종의 검열이나 다름없죠. 그들로선 그걸 준수해야 하겠지만 관객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는 저예산의 원칙을 고수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이런 생각에 동조하는 감독들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영화에 많은 돈이 들어가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화만으로 혁신을 일으키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언제나 외부로부터의 지원이 필요하죠. 파스빈더는 연극계 출신입니다. 슐뢴도르프는 프랑스에서 왔죠. 헤어조크는 저처럼 아마추어고요. 전 변호사고 그는 작가죠. 그는 결코 영화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는 매우 나이브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듭니다.
SL: 독립영화제작자들이 새로운 위성채널을 사용하는 것과 관련된 합의서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고 계신 걸로 압니다만, 이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또 다른 위성채널과 관련된 것이라던데 맞나요?
AK: SAT1에서 우린 전혀 수익을 얻지 못했습니다. 새로 생긴 RTL Plus 채널에 공급할 작품을 만들기 위해, 우린 최근 덴초(Dentso)[16]라는 큰 일본회사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 회사는 일본 최대 광고회사 가운데 하나로 아직 유럽엔 지사가 없지만, 영 앤 루비캄(Young & Rubicam)과 함께 DYR[17]이라는 합작 광고회사를 설립하려 하는 중입니다. 우리는 방송시간을 확보하고 그들은 방송될 프로그램의 스폰서가 되는 거죠. 그들은 단지 광고를 위한 공간을 확보하길 원할 뿐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할당된 방송시간의 10% 내에서 광고를 내보내는 대신 우릴 지원하는 데 사전 동의했습니다.
SL: 사전에 프로그램을 선별하진 않나요? 작품도 보지 않고 계약하는 건가요?
AK: 예, 그게 계약 조건입니다.
SL: 일단 작품을 만들고 그 다음에 파는 거군요.
AK: 우린 작품을 팔진 않습니다. 한번 방송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거죠. 그들이 보기에 적합하지 않은 작품이 방송될 수도 있습니다. 우선 지불부터 하고 작품을 보는 건 나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작품을 주류 내부에 두면서도 동시에 정치적, 경제적인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그들이 프라임 타임 한 시간 가운데 3분의 광고 시간을 15만 마르크에 판매한다고 칩시다. 나중에 그들은 또 다른 3분을 15만 마르크에 판매할 수 있는데 이건 그들의 수익이 되는 거죠. 우린 제작비의 절반만 지불하고 나머지는 광고 수익으로 충당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프라임 타임에 방송될 한 시간짜리 새로운 프로그램 제작비로 30만 마르크를 쓸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SL: 만일 제가 젊은 영화감독이고 영화를 만들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감독님을 찾아 가면 되나요? 덴츠사에서 오는 돈을 감독님께서 관리하시나요?
AK: 당신 혼자 찾아와선 안 되고 반드시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와야 합니다. 그럼 우린 즉각 당신에게 1만 마르크의 선금을 주고 24분짜리 프로그램을 만들어오라고 할 겁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가 당신에게 실망하게 되면, 그때 우린 더 이상 함께할 수 없겠죠. 아니면 다음을 기약해야 하겠죠. 그리고 아시다시피 돈을 쥐고 있는 건 제가 아닙니다. 덴츠사는 제게 돈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면 덴츠사는 당신에게 직접 지불하죠.
SL: 덴츠사는 감독님이나 편성위원들의 조언에 대한 보수를 지급합니까?
AK: 우리 - 저와 클라우스 에버딩, 그리고 에른스트 피퍼 - 는 방송시간을 확보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것들을 결정하고 싶진 않아요. 위험하고 시간 낭비인 데다가, 우린 관리자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가급적 단순하게 처리합니다. 내년엔 우리에게 52시간이 할당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26시간은 가장 신랄한 뉴스를 다루는「슈피겔 Der Spiegel」에 할애할 겁니다. 만약 우리가 프로그램을 채우지 못하면 할당된 방송시간을 덴츠사에 넘겨야 하고 그럼 그들은 월드 스포츠 베스트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겠죠. 여하간 저희는 26시간만 책임지면 되고 그 시간은 최고의 오페라나 최고의 영화 등 최고의 서사물들을 다루는 프로그램에 할당될 겁니다. 각각의 프로그램은 매우 짧고 마치 잡지처럼 24분 내에 몇 개의 프로그램들이 함께 들어갈 겁니다. ‘협동 영화’보다 더 급진적이지만 어느 정도는 그와 유사하다고도 할 수 있죠. 일종의 신문과 비슷한 겁니다. 발자크나 헤밍웨이도 신문에 글을 썼었죠. 이런 방식으로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 포맷에서 벗어난 90분짜리 프로그램을 만들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매우 짧은 형식 안에서라면 도식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 아주 만족한다고는 말 못하겠습니다. 전 18시간짜리 영화를 만들고 싶을 뿐이에요. 전『역사와 완고함』처럼 두껍고 철저한 책만 써 왔습니다. 저는 짧은 포맷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 모든 작가들은 각각 이처럼 짧은 3분짜리 단편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저는 모든 초심자들이 90분짜리 영화를 만들도록 도와줄 수는 없지만 수없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도록 해 줄 순 있죠.
SL: 이러한 작품들이 언제 어디로 배급될 것인지는 누가 결정하나요? 이 작품들은 독일 전역에서 방송되는 건가요, 아니면 몇몇 주들에서만 방송되나요?
AK: 독일 전역에 방송될 겁니다.
SL: 동시에요?
AK: 네, EPS라고 불리는 직접송신위성으로요.
SL: 무엇이 언제 방송될 것인지 결정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프로그램이 방영될 때 감독님께서도 말씀을 하시나요?
AK: 우리에게 할당된 방송시간 중에는 프라임 타임도 있고 B1이나 B타임, 혹은 C타임도 있습니다. 우린 이 모든 것을 적절히 안배해야 하겠지만 그 가운데 절반은 A타임, 즉 프라임 타임일 겁니다. 물론 시청률을 올리기엔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라이츠의 <고향>같은 경우엔 시청자들을 끌었죠. 베른트 진켈의 <아버지들과 아들들 Fathers and Sons>(1986)도 그랬고요. 제 작품들은 많은 시청자들을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말한 10%라는 건 누군가 다른 이가 만든 주류 프로그램에 반하는 토요일에 방송되는 모든 마이너리티 프로그램들을 합산한 수치입니다.
SL: 사람들은 감독님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AK: 우린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공영과 민영을 막론하고 모든 텔레비전 방송국들이 우리 프로그램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분량을 제작할 수 없기 때문에 방송시간이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제작한 프로그램들은 받아들여지고 있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우리가 라디오, 저널, 오페라 하우스, 출판사 등으로부터 새로운 작가들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라이츠, 슐뢴도르프, 진켈 등이, 그리고 어느 정도는 벤더스도 이와 꽤 비슷한 시도를 했지만 많은 영화감독들이 그렇다고는 할 수 없죠.
SL: 슐뢴도르프가 감독님의 프로그램에 참여할까요?
AK: 물론이죠. 다른 감독들도요. 그리고 프로그램이 다 차서 참가하려고 했던 누군가가 자신이 누락된 데 대해 섭섭해 한다면, 전 그들을 위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따낼 겁니다. 제가 그들에게 믿음을 갖고 있기만 하다면요.
SL: 이건 감독님께서 자주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란 표현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AK: 저는 위로부터의 혁명은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작가의 영화’가 유아기에 지녔던 장애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화를 기반으로 삼아 사회를 변혁시킬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선 “아래로부터의” 전략은 매스 미디어를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촬영감독이거나 작가일 수는 없고, 재능과 시간 그리고 방영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죠. 텔레비전 방송 체제는 만인을 기반으로 한다, 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모든 사람이 전문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은 그들이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죠. 그러나 미디어의 어떤 작은 영역 안에서라면 아래로부터의 전략이 가능합니다. 영화판이 협력으로 충만할 때 더 좋아지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어떤 토대, 즉 “모세혈관들” 안에 자유가 흘러넘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단 제가 독단적으로라도 그러한 토대부터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SL: 이제 화제를 바꿔, 오버하우젠 선언에 동참한 사람들의 요구로 만들어진 가장 중요한 기관 가운데 하나에 대해 이야기해 보면 좋겠습니다. 감독님과 라이츠, 데틀레프 슐라이어마허는 1962년에 울름영화연구소(Ulm Institut für Filmgestaltung)를 설립했고 이 기관은 아직까지 존재합니다. 이것은 “위로부터의 혁명”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제도의 한 모델처럼 여겨집니다. 이 기관의 기능은 무엇이었고 지금은 또 어떠한지요?
AK: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 기관은 뉴 저먼 시네마의 이론분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를 모델로 삼아 만들어졌습니다. 그곳과 같은 지침에 따라 운영되죠. 우린 호르크하이머가 사회조사연구소에서 발전시킨 형식을 받아들였습니다.
SL: 그곳에 학생도 있습니까?
AK: 학생은 없습니다. 연구자들만 있죠.
SL: 한때는 학생도 있지 않았습니까?
AK: 네, 1969년에요. 하지만 학생혁명 당시에, 우리 연구소도 그 영향을 받았는데, 버림받고 말았죠. 학생들이 장비를 들고 떠나버렸어요. 저희와 연구소만 남은 거죠.
SL: 학생을 받으실 생각은 더 없으신가요?
AK: 없습니다. 우린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차라리 도제 시스템을 믿는 게 낫죠. 매우 오래된 방식이긴 하지만 영화를 만든다는 건 실질적인 문제니까요. 대학에서 배우는 이론들이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제작과는 거의 상관없는 것들이죠.
SL: 이제는 거의 공식적인 정부기관처럼 되지 않았나요?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으로 운영되고 있는데요.
AK: 정부기관처럼 보이긴 하지만 독립적입니다. 사설기관이지만 위원회엔 공무원들을 두고 있죠. 매년 20만 마르크의 돈을 바덴 뷔르템부르크 주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250만 마르크 정도에 달하는 거대한 영화/텔레비전 스튜디오를, 제2독일공영방송(ZDF) 및 서부독일방송(WDR)과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습니다.
SL: 매년 정부에 예산을 신청하셔야 하는 건가요?
AK: 네.
SL: 실적과 관련한 정치적 압력은 없습니까?
AK: 없습니다. 그럴 가능성은 항상 도사리고 있지만 지난 25년 동안은 문제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봅니다. 바바리아 주 의원단이 슈투트가르트에 오면 왜 이런 빨갱이 기관에 지원을 계속하는지 항상 물어보기는 하죠. 그럼 주장관들은 이런 사소한 문제엔 관심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연구소는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SL: 감독님을 제외하고 연구소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있나요?
AK: 귄터 회르만, 막시밀리안 마인카, 라인하르트 칸 등 약 30명 정도가 있죠.
SL: 연구소의 영화감독이나 이론가들은 각기 자신의 프로젝트를 진행합니까? 30여 개 정도의 서로 다른 팀이 있는 건가요? 또 감독님께선 세미나나 이론적인 토론에도 참여하십니까?
AK: 아뇨. 여긴 학교가 아닙니다. 이곳은 조사와 산업적인 용어로는 “개발”이라고 부르는 것을 수행하는 연구소입니다. 새로운 테크닉, 새로운 드라마투르기, 파일럿 스터디 등을 개발하죠. 제작을 하는 그룹과 이론적 연구를 하는 그룹들이 있습니다. 각각은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저는 연말에 모든 성과를 모아서 위원회에 보고하죠. 1월이 되면 제가 다음 해 작업에 필요한 보조금을 각 그룹들에 전달합니다.
SL: 감독님 혼자 그 예산을 결정하십니까?
AK: 글쎄요, 각 그룹들에 물어보죠.
SL: 제한된 영역이긴 하나, 최소한 울름영화연구소는 뉴 저먼 시네마의 작은 승리를 보여준 것 같습니다. 감독님께선 독립영화제작을 위한 싱크탱크와 본거지 역할을 할 수 있는 항구적인 기관을 설립하셨습니다. 미국에선 이런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미국영화연구소(AFI)는 명칭만 그럴싸하죠.
AK: 이것이 계속 운영되고 있다 해서 승리라고까지 말하고 싶진 않군요.
SL: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사회조사연구소에 대한 언급은 감독님의 사유와 창조 작업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쳐 왔던 지적 편력 상의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밝혀 줍니다. 1950년대 후반, 감독님은 재건된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으셨습니까?
AK: 전 사회조사연구소의 법률적 문제들을 담당했습니다. 그때 전 변호사였고 단편소설들을 썼죠. 영화 일을 하게 된 건 나중의 일입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저를 작가로서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들은 저에 대해 이렇게 말했죠. “저 친구는 최고의 변호사이고 우리도 그를 좋아하지만, 영화를 만들어선 안 되고 어떤 경우에라도 소설을 써선 안 돼.” 마르셀 프루스트 이후 더 이상 소설을 쓴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게 아도르노의 견해였습니다. 최악의 상태, 그러니까 제가 책을 쓰려는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저를 프리츠 랑에게 소개시켰죠. 랑 감독이 저를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저는 좀 더 가치 있는 일, 즉 사회조사연구소를 위한 법률 자문을 계속 하게 되었을 겁니다. 저를 그들과 묶어 놓기 위한 계산적 행동과 우정이 뒤섞인 것이었다고나 할까요.
SL: 어떤 종류의 법률적 문제들을 다루셨나요?
AK: 아, 이것저것 많은 일을 했죠. 특히 그들의 배상 요구를 다뤘어요.
SL: 둘 가운데에서는 아도르노와 더 친하셨죠?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AK: 1870~1871년 전쟁[18]이 끝난 어느 날, 아도르노 가문 - 코르시카에서 와 제노바에 정착한 가문이었죠 - 의 한 코르시카 장군이 포로로 사로잡혀 보켄하임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 3세 아래서 장군까지 올라간 사람이었어요. 한 여자가 창문을 내다보다 그를 보았고 결국 둘은 사귀게 되었죠. 이들이 아도르노의 조부모님인데 그들에겐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주 고음에, 특별하고, 방울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던 이 딸은 콜로라투라 가수가 되었는데, 파리와 리가를 오가며 항상 <지그프리트 Siegfried>의 산새와 <마술 피리 The Magic Flute>의 ‘어둠의 여왕’ 역할을 했어요. 그녀는 싸구려 와인을 만들던 비젠그룬트란 이름의 한 유대인 상인과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은 그럭저럭 행복했고 아들도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아도르노죠. 그는 어머니를 여신처럼 사랑했지만 엄격한 아버지에 대해서는 극도로 반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그를 감싸준 건 어머니였어요. 어머니에게는 그가 전부였고 아버지의 천박함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줬습니다. 아도르노는 음악을 좋아하지만 혼자서는 전차도 타지 못하는 매우 감수성 예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과잉보호를 받은 나머지 현실엔 좀 어두운 면이 있었죠.
SL: 역시 아도르노에게는 그런 면이 있었군요!
AK: 전차를 기다릴 때면, 그는 프란츠 카프카가 되어 절대로 전차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항상 그의 아내가 태워다 줘야 했어요. 그가 결혼을 한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여행을 해야 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처음엔 영국 그리고 나중엔 미국으로 갔죠. 또한 그에겐 샛길로 빠진 중세 수도승 같은 구석이 있어서 절대로 교회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처럼 그노시스적인 위치를 단단히 고수했지만 절대로 비관적이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또 믿을 수 없을 만큼 비판적이기도 했습니다. ‘Aisthanomai luein’라는 그리스어가 있는데 이 두 단어는 그의 접근법을 요약합니다(‘luein’은 ‘해방하다’, 그리고 ‘aisthanomai’는 ‘이해하다’[19]라는 뜻입니다). 그의 접근법에 담긴 정념(pathos)의 총체는 이 두 방법의 조합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오디세우스처럼, 그는 속박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어떤 것에 완전히 몰입해서 그걸 재생할 수 있기를 원했지만 항상 분석적인 태도를 견지했죠. 저는 그의 것만큼이나 명석하고 철저한 이론이나 미학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매우 사려 깊은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의『미학이론』은 결코, 아니 단지 회의적인 저서가 아니라 사려 깊은 저서입니다. 그는 혁신적인 이론가였어요. 그는 미국에서 존경받기는 했지만 결코 받아들여지진 못했습니다.
SL: 아도르노 또한 감독님을 많이 존경했습니다. 미리엄 한센 같은 이는 영화에 관한 아도르노의 대표적 논문은 감독님 작품에 대한 응답이었을 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20] 감독님을 프리츠 랑에게 소개해준 것 이외에, 그가 영화제작과 영화 정치학에 대한 감독님의 관심에도 지지를 보냈나요?
AK: 그는 우리 그룹의 태도가 상황을 잘못 파악한데서 나온 과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만하임에서 우리와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우정 따윈 개의치 않고 도중에 그냥 나가 버렸어요. 그는 자신이 전혀 신뢰하지 않는 것에조차 희한하게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게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라고 믿고 있음에도, 그걸 지지하고, 과장되게 낙관적인 모습을 보이며 마치 정치적 연극의 배우라도 된 양 연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패배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거죠. 하지만 그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실패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SL: 그럼 아도르노는 투사는 아니었나요?
AK: 글쎄요, ‘자신의’ 영역 안에서라면 투사였죠. 병 속에 메시지를 넣어 보내는 것도, 그게 언제 도착할 진 모르지만, 역시 일종의 실천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언어와 음악이 그의 영역이었는데, 그곳은 승리하는 것이 가능한 영역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필사적으로 말하려 했던 것들이 몇 백 년이 지나 진실임이 밝혀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프랑크푸르트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도르노는 어떤 면에선 카산드라 같은 인물이었는데, 투사라기보다는 예언자에 가까웠죠. 그는 저를 비웃을 겁니다. 실제로 항상 어느 정도 비웃었어요. 저를 좋아했기 때문에 참았던 거겠지요. 그는 제가 너무 멀리 밀고 나갔고 현실 상황에 지나치게 골몰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현존 상황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저는 제가 다룰 수 있는 현존 상황의 공동(空洞)을 신뢰합니다.
SL: 현존 상황의 ‘공동’에 대한 확신은 감독님으로 하여금 거듭해서 영화판의 정치적 행동주의자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오늘날의 영화감독들 가운데 ‘투쟁의 동반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AK: 영화판에서라면, 파스빈더는 제외하고, 일단 항상 우리와 함께 일해 온 동료들이 있죠. 영화 보조금이나 매스 미디어 관련법 제정 문제로 내무부 장관과 담판을 지어야 한다면 다른 영화감독들도 언제나 우릴 도울 겁니다. 아주 공고한 연대가 있다고 할 수 있죠.
SL: 젊은 영화감독들도 마찬가진가요?
AK: 전부라곤 할 수 없죠. 뮌헨에 새로운 영화학교가 생겼습니다. 도리스 되리는 거기 출신은 아니고요. 거기엔 정말로 훌륭한 이들이 있지만 전 그들 모두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렇기만 하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요. 그들은 스필버그 같은 감독들을 좋아하고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전문가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언젠간 3명의 어시스턴트를 거느리고 대작영화를 찍을 날이 오겠지, 라는 식의 생각이죠. 매우 이상한 생각이지만 널리 퍼져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진짜 감독이라면 할리우드 같은 데서 걸려온 전화를 받을 거고 정치적인 일은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인 것은 지겹다는 거죠. 그들은 싸워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어요. 바이에른 문화정책의 알랑쇠들이라고나 할까요. 1,200만 마르크를 쏟아 부은 끝에, 바이에른영화진흥원은 마침내 이런 식으로 그들 주위에 자기장을 둘러친 겁니다.
SL: 그건 감독님과 동료들이 예전부터 두려워했던 것인데요. 즉 정부의 영화 보조금은 정부의 통제와 프로젝트에 대한 사전검열을 초래할 것이라는 거였죠.
AK: 하지만 보십시오, 다수파는 우리입니다. 우리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 이 젊은 친구들은 조직화가 되질 않습니다. 그들은 지난 2년 동안 여기 뮌헨영화제에서 저항세력을 조직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이를 부추겼는데, 그는 새로운 반-오버하우젠 경향을 만드는 걸 영화제의 목표로 삼길 원했습니다. 별 관심을 끌지 못해서 처참한 실패로 끝나긴 했죠. 시도는 했지만 그들은 단지 불평분자였을 뿐이고 따라서 성공하지 못한 겁니다.
SL: 정치적 행동주의, 그리고 사회의 ‘공동’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당신의 작품뿐 아니라 오스카 넥트와의 공동 프로젝트 - 이에 관해선 뒤에 다시 이야기해 보죠 - 를 이전 세대 비판이론가들의 수동적이고 염세적인 입장과 차별화하는 것입니다. 감독님께선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AK: 우리는 우리 작업이 비판이론과 관련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진부하다고 봅니다만, 그건 우리와 호르크하이머 그리고 아도르노가 논쟁해야 할 문제죠. 이제 환경이 바뀌었습니다. 상류계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이 지배하는 것도 아닙니다. 독점가도 거의 존재하지 않죠. 아, 물론 있기는 하지만 계급으로서는 아닙니다. 노동계급은 부를 생산하는 사회의 부품이라는 말도 옳지 않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타락해 버렸습니다. 노동귀족들이죠. 특히 사회가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사양산업 쪽이 더 심합니다. 실리콘 밸리에서라면, 누가 프롤레타리아고 누가 부르주아겠습니까? 사실 항상 발전을 선도해 온 것은 중간 부르주아와 프티부르주아 계급입니다. 노동계급은 말할 것도 없고 상층 부르주아지가 주도권을 잡은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주도권은 상인 계급, 상점 주인들, 장인 계급처럼 사이에 있는 계급들에게 있었죠. 문화의 영역에서 그들은 유행을 선도했습니다. 중간계급으로 떠오른 프티부르주아지, 거대한 동기는 바로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이제 이 계급 역시 다른 계급과 섞였습니다. 마르크스에게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인간이란 존재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자본주의적 입장과 프롤레타리아적 입장이 대립하고 있는 곳도 바로 거기입니다.
SL: 노동 계급을 ‘내부로부터’ 이해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말하자면, 호르크하이머가 사회조사연구소의 수장이었던 초기부터 비판이론의 핵심적인 부분이었습니다. 감독님과 넥트의 프로젝트는 이와 어떻게 다른지요?
AK: 사회는 우리가 읽으려 하는 텍스트입니다. 아도르노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겠지만, 우리는 프루스트를 읽을 때보다도 훨씬 주의 깊게 사회를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프루스트의 작품은 성공적인 표현임이 분명하지만 사회의 경우엔 그걸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도르노라면 음악을 예로 들어가며 ‘전체를 대표하는 부분’(pars pro toto)이라는 식으로 자신을 표현했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에게 중요했던 몇몇 문제들, 그러니까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 네 곡이 완벽한 걸작인지 아닌지 같은 문제들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전 비평가도 아니고 그런 문제엔 별 관심도 없어요. 비평이 제게 중요한 건 제가 영화를 위해 그걸 필요로 할 때뿐입니다. 우리는 이전 세대가 방어했던 것 이외에 다른 영역에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긴박한 상황에 처한 이유는 적들이 행동을 취하고 관계를 피폐하게 만들고 언어에 혼란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음악을 설명할 수 있는지, 그걸 학술적 용어로 토론할 수 있는지 같은 문제들로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도르노보다 신중하며 브레히트에 더 가깝습니다. 우리는 브레히트가 묘사했던 바와 같은 상황 - “집에 불이 난다면 난 도망칠 것이다” - 에 처해 있습니다. 하지만 도망치고 싶지 않다면 좀 더 철저하게 무장해야 합니다. 일종의 창문 역할을 하는 매스 미디어들이 집집마다 존재하기만 하면 거리에서 투쟁이 결성될 것이라고 말하는 건, 1930년대라면 모를까, 낡은 사고방식이죠. 텔레비전을 통해 수백만을 설득하는 그런 권력에 대항하고자 할 때, 모든 관습적인 수단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이 말은 저 역시 이러한 창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직 대항적 매스 미디어(counter-mass medium)를 통해서만 매스 미디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대항적 공론장(counter-public sphere)을 통해 온전한 공론장을 만드는 거지요. 대항적 사회(counter-society)를 통해서는 사회에 저항할 수 없습니다. 이건 전쟁입니다. 누군가는 출구를 찾아야 합니다.
SL: 출구를 찾기 위한 방법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요?
AK: 오늘날 1980년대에는 비판이론 앞에 거대한 임무가 놓여 있습니다. 이건 노동운동에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가, 같은 물음이 아닙니다. 사회주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동안 사회주의라는 게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전통적 산업에 대해선 다들 무관심합니다. 철강 산업으로는 손해만 입을 뿐입니다. 그러니 철강소의 문을 닫는 수밖에 없죠. 이제 우리는 다시 집에서 작업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거대 산업은 마르크스라면 원시적이라 말했을 방식으로 지식을 축척하는 데 한층 더 애쓰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거대 산업은 장인적 노동을 착취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지식을 다루고 철저히 이용하려 합니다. 인식의 몇몇 중간 층위들을 착취하고 그것을 산업화하기 위해 기존의 사적 영역들까지도 산업화 - 한편으론 노동 후의 오락을 통해, 다른 한 편으론 산업화되고 전산화된 새로운 재택근무를 고안해냄으로써 - 해 버렸습니다. 이는 상품화와 산업화가 이제 인간이란 존재 내부에서 실현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곳도 바로 이곳이지요. 대중의 머릿속에선 일련의 반전(反轉)이 작동하고 있고, 이는 1930년대 파시스트 사회의 권력만큼이나 강력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앞에 두고서 여전히 사회주의가 가능할 것인지 아닌지 문제 삼는 건 어리석은 일이죠. 전쟁의 위협, 의식의 산업화, 소비와 오락을 통한 억압, 이제 지배는 이런 수단들을 통해 표현됩니다. 이건 비단 유럽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고, 지정학적 중요성이 거의 없는 주변 국가일 뿐인 서독에만 국한된 현상은 더더욱 아니죠. 전 이게 일반적인 과정이며 비판이론은 항상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SL: 물론 미디어 지배와 소비를 통한 억압이라는 문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오랜 관심거리였고, 이는『계몽의 변증법』과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감독님께서 말씀하신 ‘이런 문제들’이란 특히 어떤 종류의 사회적 과정을 지칭하는 것인가요?
AK:『공론장과 경험』을 읽어보셨습니까?『역사와 완고함』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공적 삶과는 다른 대항적 공간을 만들 방법을 모색한 저와 넥트의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업입니다. 20세기 끝자락에 이런 문제가 중요해진 이유는 전통적인 공적 삶, 부르주아지의 공적 삶이 생산자들의 새로운 공론장들에 의해 파괴될 위험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험을 생산하는 요소들에 대해 생각하는 한편 공적 삶이나 표현의 수단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것은 비단 예술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의 수용과도 관련된 문제입니다. 수용 자체가 공적 삶과 경험을 구성하니까요.
SL: 마침 감독님의 많은 작업을 특징짓는 ‘Öffentlichkeit’(외펜틀리히카이트)라는 용어를 사용하셨기에 드리는 말씀인데, 이 용어를 정의해 주시겠습니까? 영어로는 ‘public life’(공적 삶)이라고도 말씀하셨는데요. 미리엄 한센은 이 용어를 영어로 ‘public sphere’(공론장)라 번역했습니다. 과연 이 용어의 뜻은 무엇인가요?
AK: ‘public sphere’의 개념은 ‘글라스노스트’(Glasnost)[21]로 번역할 수 있을 겁니다. ‘Öffentlichkeit’는 경험으로 가득한 공론장, 도덕적이고 의식을 지닌 독립적인 공론장을 지칭합니다. 우리는 이 단어를 그런 뜻으로 사용합니다. 실제로 ‘Öffentlichkeit’는 사적인 것과 대립합니다. 사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öffentlich’ 혹은 ‘public'한 것입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이러한 구분은 로마가 건설되고 로마의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22] 모델을 따라 유럽이 형성된 이래 계속해서 존재해 왔습니다. 공론장은 가치들이 교환되는 일종의 시장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가치들을 구성하는 것은 말할 수 있는 것들과 부끄럽기 때문에 절대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이죠. 따라서 그것은 자기 확신의 기호입니다. 만약 제가 한 집단 속에서 제 자신을 이해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공적인 것입니다. 저의 감정이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내적인(intimate) 것이고요. 스스로를 공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그땐 온통 내적인 것만이 남게 됩니다. 공론장이 얼마나 자유로운가는 내적 영역(intimate sphere)이 얼마나 자유로운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적 삶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족정치(family politics) 같은 사적 영역 안에서 길을 모색해야만 합니다.
SL: ‘Öffentlichkeit’란 개념은 하버마스가 그의 책『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제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독님과 넥트의 ‘Öffentlichkeit’ 개념은 하버마스의 것과 대립되거나, 혹은 적어도 상당히 다릅니다.
AK: 그렇게 대립되는 것은 아닙니다. 토론 과정에서 나온 것이니까요. 계몽 과정의 필요성과 새로운 백과전서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우린 전적으로 하버마스와 의견을 같이합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보다 좀 더 조심스러워서 귀납적 방식으로 작업하지 않습니다. 오직 논증에만 의존하죠. 넥트와 저의 ‘Öffentlichkeit’ 개념은 생산의 영역에서 나온 것입니다. 가령 저라면 법적인 관점에서 그걸 해석할 겁니다. 생산의 원칙이 있다고들 말합니다. 어떤 노동자가 무언가를 만들었다면 그건 그의 것이라는 거죠. 그에게서 그걸 빼앗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이런 종류의 원칙은 동화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건 진정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원칙이죠. 그런가 하면 분배의 원칙에 기반을 둔 로마법 같은 것도 있습니다. 거기선 누가 만들었느냐보다 누구에게 속하는 것이냐가 더 중요하죠. 하버마스의 ‘Öffentlichkeit’은 분배적 ‘Öffentlichkeit’인 반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생산적 ‘Öffentlichkeit’입니다. 우리가 연구해야 하는 것은 사적 삶의 가장 내적인 영역들에서 기능하는 이러한 생산 영역입니다. 1933년에 벌어진 파국[23]의 기원도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출발점은 항상 나치에 의해 정복된 1933년의 공론장입니다. 공론장은 결코 정복되지 않게끔 다양한 방식으로 증식되어야 합니다. 공론장, 즉 정치적인 것을 위한 용기(容器)가 부적절한 것이었고 그 때문에 나치에 의해 정복당한 것이라면, 하버마스처럼 18세기와 19세기의 성과들을 연구하고 낡은 공론장 개념을 방어하고 반복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어떠한 도덕적 저항도 그 안에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저항을 위한 잠재력이 숨어있는 생산의 영역을 잘 살펴야 함을 뜻합니다.
SL: 감독님께선 하버마스의 역사적 관심에 반대하시는 건가요?
AK: 아뇨,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작업하는 영역이 다른 거죠. 군대를 가지고 있다면야, 하버마스처럼 행진하지 말란 법도 없죠. 우리는 게릴라처럼, 전략을 잘 짜서 조심스레 행동해야 한다고 봅니다. 만일 그가 우리 영역 안에서 작업했다면 그 또한 같은 결론을 얻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도르노에게도 똑같은 문제가 있었죠. 그는 생산의 영역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그걸 다루지 않았죠. 그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작업과 음악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도르노는 결코 실제로 공장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회를 공장으로 본 겁니다. 제가 아도르노의 영화 이론을 믿지 않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가 아는 건 할리우드 영화뿐이었습니다. 그는 프리츠 랑, 브레히트, 한스 아이슬러 같은 친구들과 함께 할리우드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시나리오를 썼죠. 그걸로 프리츠 랑은 <사형집행인 또한 죽는다>[24]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영화엔 아도르노가 필요하지 않았죠. 아도르노는 할리우드가 이런 공장의 독점적 사업주가 되리라고 믿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린 할리우드의 전략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속 페달을 밟았다가 브레이크를 밟고, 또 가속했다가 브레이크를 밟는 과정이 반복되는 것이죠. 소극적으로나마 외부로부터의 유입을 받아들이다가 다시 그들만의 힘으로 제작하기 시작하고, 또 이런 과정을 계속 반복하는 겁니다. 당신은 하버마스의 최근 저서들에서 표현(expression) 개념이 현저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셨을 겁니다. 적어도 최근에는 이게 그의 소통이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죠. ‘인식’과 ‘관심’은 여전히 기계적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건 추상적인 이해일 뿐인데, 왜냐하면 인식이나 감정은 관심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항상 관심과 상상력이 있죠. 이들을 분리하려는 계몽주의의 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얻어지는 건 생기 없는 것들뿐입니다. 인식은 언제나 관심과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놀랄 만큼 많이 다른 것들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부모님의 사랑, 나태함, 호기심, 안전하다는 느낌, 자기 확신, 기회, 행운의 순간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인식을 구성합니다.[25]
SL: 하버마스가 묘사한 ‘고전적’ 부르주아 공론장이 여전히 존재할까요? 그것은 실제로 존재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단지 역사적 환상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요?
AK: 그것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대항적 공론장의 형태로만요. 여전히 매우 강력하고 수십억 마르크에 달하는 예산을 가지고 있지만 그저 지엽적일 뿐이죠. 전면적인 게 아닙니다. 그게 고전적인 의미의 공적 삶을 가장할 순 있겠지만 절대로 그렇게 될 순 없죠.
SL: 방금 사용하신 개념, 즉 대항적 공론장 혹은 ‘Gegen-Öffentlichkeit’(게겐-외펜틀리히카이트)에 대해 좀 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AK: ‘Gegen-Öffentlichkeit’는 20세기적 현상입니다. 이제는 정말이지 대항적 공론장들을 발전시키는 것만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 시대의 플로렌스에서는 ‘Gegen-Öffentlichkeit’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에는 공론장으로 충분했으니까요. 진정한 의미에서 대항적 공론장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보나롤라 같은 수도사들의 대항적 공론장은 오도된 공론장이었지 결코 메디치의 공론장에 대한 대안이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 당시에는 프롤레타리아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공론(空論)일 뿐이죠. 19세기를 거치면서 서로 경합하는 다수의 대항적 공론장들이 나타났습니다. 노동계급의 대항적 공론장도 그 가운데 하나였죠. 그때까지 노동계급이 그들만의 공론장을 가지지 못했던 이유는 그들의 표현적 잠재력이 즉각 당이나 노조의 통제 하에 들어갔거나 부르주아 공론장에 지배당했기 때문입니다. 노동계급의 공론장은 매우 활동적이긴 해도 발달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생활하고 투쟁하는 직접적인 영역까지 확장되지는 못했어요. 이렇게 보면 공론장이란 노동계급으로부터 박탈한 생산수단의 하나라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한편 산업은 고전적인 의미의 프롤레타리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까지 변화하고 정체되었습니다. 아마 프롤레타리아적 공론장을 발전시킬 가능성은 더 이상 없는지도 모릅니다.
SL: 하지만 산업이나 많은 생산 영역에서의 변화가 대항적 공론장(들)을 위한 새로운 토대를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변화의 산물 가운데 하나인 여성운동이 새로운 대항적 공론장의 토대가 되지 않을까요?
AK: 그렇죠. 모든 대항적 공론장들은 자연스럽게 공론장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 시기 자코뱅당의 공론장, 지롱드당의 공론장, 혹은 생 앙트완 구의 공론장 각각은 유일한 공론장이 되고자 했고 결국엔 다른 공론장들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죠. 우리가 사는 이 분열된 사회 속에서, 공론장과 내적 영역은 동시에 위축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내적 영역이란 가족을 말하는 것인데 그 안에서 친밀감은 점점 더 약화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공론장까지도 황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결국 공론장은 넘쳐 나는데 실제론 공론장이랄 만한 게 전혀 없습니다. 서로를 이해해주지 않는다며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경쟁하는 공론장들은 있죠. 과학, 산업, 정치, 문화 등마다 나름 하나씩은 가지고 있죠. 이건 바빌론입니다. 말하자면 보편적 지역주의(universal provincialism)인[제각각 자기 이익을 내세우는 게 보편화된] 셈이죠. 한편으로 이러한 현상은 공론장을 새로이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그 누구도 이기적인 부르주아나 귀족계급에 의해 방해받지 않습니다. 대신 전통적인 정치적 제휴와는 사뭇 다른 제휴로 맺어진 부분적인 힘들과 맞서게 되었습니다. 기민당과 녹색당이 연합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은 다른 영역들에도 존재합니다. 문화와 산업이, 영화제작자와 출판인들이, 그리고 서로 어울리지 않는 모든 것들이 연합할 수 있습니다. ‘바빌론적인’(Babylonian) 국면을 맞아 투쟁이 특히 첨예해진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SL: 최근에 쓰신 많은 논문들 가운데, 특히「의식산업의 힘과 우리 공론장의 운명 The Power of the Consciousness Industry and the Fate Our Public Sphere」[26]에서 감독님은 ‘사적 생산 영역들’이 다양한 대항적 공론장들의 재편을 가로막게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이 용어가 지칭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AK: 지멘스는 그 자신만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공적 생산 영역입니다.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업무들 전체는 그 자체로 하나의 리얼리티입니다. 가령 정부는 절대로 지멘스의 문을 닫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부나 사회는 바꿀 수 있을지 몰라도 지멘스는 절대 바꿀 수 없죠. 스프링거, 베르텔스만, 폭스바겐 등도 마찬가집니다. 나치는 이런 종류의 생산 영역에 의존했고 바로 그것을 통해 정부를 장악했습니다. 나치즘은 그저 대중적인 운동이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강제적 교환에 기초한 사회’(Zwangstauschgesellschaft)를 초래한 산업적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이 역시 비판이론의 발견 가운데 하나입니다.
SL: ‘강제적 교환에 기초한 사회’란 표현을 정의해 주시겠습니까?
AK: 그건 나치의 이념인 국가사회주의를 기술하기 위해 호르크하이머가 사용한 표현입니다. 시장경제체제에 대해선 ‘교환에 기초한 사회’(Tauschgesellschaft)라는 표현을 사용했죠. 여기서 모든 것은 다른 것과 교환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칙이 강제적이 된다면, ‘어쩔 수 없이’ 구입해야 하고 노동해야 한다면, 유대인에게 팔아선 ‘안 되고’ 오직 아리아인에게만 팔아야 한다면, 그게 바로 ‘강제적 교환에 기초한 사회’인 거죠. 20세기 끝 무렵이 되면 이와 같은 파시스트적 형식들은 1930년대의 것들과 매우 달라질 겁니다. 탄압이 유대인들에게 향하진 않겠지요. 하지만 고문하거나 죽이고 배제할 소수자들을 항상 찾아 나설 겁니다.
SL: 감독님과 넥트는 오늘날의 사회가 그와 같은 사회적 형식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AK: 호르크하이머처럼 한 사회 전체를 ‘강제적 교환에 기초한 사회’로 개념화하거나, 혹은 강제적 교환이 지배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으로 작게 분할해 고찰할 수도 있겠지요.
SL: 그러면 그게 피할 수 없는 경향이라는 건가요?
AK: 아뇨, 절대로 그렇게 주장하진 않겠습니다. ‘강제적 교환에 기초한 사회’로 향하는 어쩔 수 없는 움직임이 있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자본주의의 초기 형식들이 사회의 저변에서 재정립되고 있는 중입니다. 넥트와 제가 모색 중인 이론은 1933년의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1933년 이후, 우리는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입니다. 언제나 같은 주제 - 내적 삶과 공적 삶의 분리 - 에 매달리며 항상 동일한 문제를 제기했죠.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면서 강렬한 감정들을 전달할 방법은 있는가? 국가사회주의에선 이런 물음이 필요 없죠. 이제 우리는 훨씬 더 빨리 [‘강제적 교환에 기초한 사회’로 향하는] 그런 움직임을 간파할 수 있고, 그것을 견제할 방법도 알고 있습니다. 비판이론이 다루었던 것은 결국 국가사회주의라는 문제 - 우리 젊은이들의 문제기도 하죠 - 였습니다.
SL: 제가 보기에 감독님과 넥트는 당신들의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수행했던 계몽적 사유에 대한 비판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들이라면 아무리 극단적이고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해도 절대 감행하진 않았을 것 같은 방식으로요. 감독님께서 감정과 무의식적 행위를 강조하시는 것도 일종의 저항의 양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AK: 확신할 수는 없군요. 그들이라면 좀 더 신중했을 겁니다. 헤겔이 말한 것처럼 감정과 느낌에도 예술적 형식이 있었다면, 아도르노는 모든 감정들과 모든 정열적 느낌들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저는 감정이란 것이 아도르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것일지 모른단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감정이란 원래 이성을 따르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극히 정교한 차이화(differentiation) 능력입니다. 정맥과 동맥이 아니라 모세혈관들이, 차이들을 만드는 능력으로서의 모세혈관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관점은 고전 독일철학에, 마르크스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개별 감각들은 이론가와 같다고 말합니다. 마음이 이론가라는 뜻이 아니라, 개개의 감각들은 그 오랜 역사와 다른 모든 감각들과의 차이 때문에 이론의 출발점이 된다는 뜻이죠. 만약 차이들을 대량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면, 자율성을 위한 기회도 생기게 됩니다. 만약 개개인 스스로가 자신이 어떤 동물이며 어떤 인간인지를 판별해 낸다면, 모든 감각들의 오케스트라가 재편성된다면, 모든 감각은 자율적 실체로 인정받게 될 겁니다. 이건 결코 새로운 생각이 아닙니다. 전 소크라테스라면 제 말을 이해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차이들의 바다 속에서 헤엄쳐야지 노아의 이성의 방주 안으로 피신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두 개의 입장이 존재합니다. 그 첫째가 계몽주의인데, 지식과 도덕적 행위의 발달을 믿고 위험하게도 감각들을 지배하려 합니다. 저는 이 입장을 존중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그들은 홍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방주가 과연 뜨기나 할 것인지도 모르면서 모든 동물들을 방주에 밀어 넣으려는 사람 같습니다. 이와 다른 입장은 기초적인 방식으로 차이를 생산하는 거대한 능력을 계발하려는 것입니다. 귀는 독립적인 신체(person)입니다. 눈은 보다 발달된 신체로 귀보다 훨씬 종합적입니다. 코는 억압되고 발달되지 않은 신체입니다. 혀는 조심스러운 남자(man)입니다. 입술은 안팎으로 통하는 통로를 지배합니다. 이는 단지 차이화 능력의 구체적인 사례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군가 무엇이 전부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것이다, 라고 말해야 그를 신뢰하게 되죠. 우리는 차이화를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입장이 주류가 된 적은 없었죠. 하지만 갑자기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도 또 없죠.
SL: 하지만 어떻게 개별 감각을 판별하는 일이 저항의 표현이 될 수 있을까요?
AK: 실제로 모든 인간 존재는 상이한 능력들과 요소들의 콘체르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단순히 소비자로서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 앉아 있는 한 남자 혹은 여자는, 매우 상이하면서도 미묘한 배음(倍音)들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완성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여러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고 또 그 조각들은 잔해의 일부분들이죠. 이것 역시 새로운 생각이 아닙니다. 모든 시인들이 이에 동의할 겁니다. 동화를 찾아내는 그림 형제처럼, 인간의 전형적인 행동들을 분석할 때 우리는 그 뒤에 감춰진 이런 능력들을 찾아 나섭니다. 패배의 경험이나 저항의 경험이 여러 인간적 특질(personality)들을 통합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이론으로 그걸 통합하려 시도한다 해도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겁니다. 누군가가 패배 때문에 무력해졌다 해서 그가 새로운 인간적 특질을 획득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습니다. 인간에겐 그러한 요구가 존재합니다. 인간적 특질을 획득하려면 정신과 의사에게 가보라고들 말합니다. 사람대접을 받고 싶다면 주류에 머물러라, 사람이 되려면 군대에 가라는 등의 말도 있지요. 그런데 그러한 인간적 특질들은 저라면 결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지니는 특질들이죠.
SL: 파편화되어 있으며 그 때문에 여러 사회적 요구들에 저항하는 소비자와 관객이라는 감독님의 표현은,『계몽의 변증법』에 기술된 문화산업의 관객들과는 성격이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역사적 경험, 소련과 독일 모두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적 힘에 대해 일찌감치 믿음을 상실한 것, 그리고 또한 독일인들에 대해 믿음을 잃은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감독님이 제시한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AK: 정확한 지적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실천(praxis)에 대해 입장을 달리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뉴 저먼 시네마 세대의 대부분 - 벤더스, 슐뢴도르프 그리고 저 - 은 의사 집안 출신입니다. 의사들은 좀 다른 방식으로 실천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저는 그저 영화를 만드는 실천적인 인물, 혹은 정치적 행동주의자로만 알려져 있는데, 그런 식의 묘사는 실제론 허술하기 -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 짝이 없죠.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제가 거대 라디오 방송국의 국장과 앉아 있다고 합시다. 사무실이 하도 높은 곳에 있어서 쾰른 시가지가 내려다보이죠. 제가 영화 속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구름이 떠다니는 장관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이제 제가 그에게 우린 30년 내에 죽을 거라고 말을 꺼냅니다. 그는 저보다 연장자에요. 그에게 저와 함께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협동 영화에서 했던 것처럼 양질의 저널리즘과 이미지들이 결합된 그런 프로그램들이죠. 갑자기 국장이 강한 열정에 사로잡힙니다. 그도 역시 다른 삶을 살고 싶었던 거죠. 그의 내면의 젊은 측면은 내일이면 모든 것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합니다. 한편 나이 들고, 보다 현명한 - 일을 그만두는 게 가장 현명한 일이겠지만 - 측면은 제가 하려는 게 멍청한 짓이라고 말하겠죠. 한편 그는 이곳저곳을 떠도는 여행자와 같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감독자’ 역할을 하느라 삶은 엉망이 되었죠. 여기엔 스튜디오를 만들고, 저기선 누군가를 축하하고, 앉아서 기다리고, 누군가의 말을 경청하기도 하고 흘려듣기도 하고요. 독일 총리마냥 매일 스케줄이 있죠. 동시에, 잠깐 동안이지만, [그의 내면엔] 다른 음조들도 존재합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 내면에 존재하는 이러한 구조들의 다면성입니다. 저는 차이화 능력을 대대적으로 계발하고, 지배적 국면과 피하적(皮下的) 국면들을 구별하길 원합니다. 이는 아도르노 역시 동의했던 것이죠.
SL: 이제 일반적인 사회 이론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미뤄 두고, 화제를 바꿔 감독님께서 지난 수년 동안 몰두해 오셨던 영화에 관한 이론적 성찰들에 대해 살펴보면 어떨까 합니다. 감독님의 견해는 현재 미국에서 유행하는 고도로 기술적이고 기호학에 기반을 둔 이론들과는 매우 달라 보입니다. 그런데 감독님께서 영화에 관해 쓰신 글들을 보면, 보다 내적이고 “피하적”인 구조를 [지배적인 것으로부터] 분리시킬 필요가 있다는 조금 전의 말씀과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도 있는데요. 감독님께선 글을 쓰실 때 결코 영화들에 대한 - 심지어 감독님 자신의 영화들에 대해서조차도 - 상세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AK: 보세요. 제가 비판이론에 익숙하기 때문일 텐데, 저는 영화를 만드는 작업과 이론적 작업은 서로 간에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봅니다. 저는 이론적 훈련을 받아왔고 그러다 보니 어디서 일을 하든지 간에 이론적인 용어를 발전시키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둘은 별개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제 영화 대부분을 편집한 동료인 베아테 마인카-옐링하우스는 영화의 미세구조와 숏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영화 앞부분의 어떤 장면을 이런 방식으로 편집하면 후반부 어떤 위치에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를 미리 압니다. 작곡가가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타이밍에 대한 절대적 감각을 가지고 있어요. 만약 당신이 작곡가에게 왜 A장조에서 B단조로 옮기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내 귀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소. 내 귀는 절대 틀림없소. 하지만 과학적으로 설명하거나 입증하지는 못하겠소.’ 만약 당신이 베아테 마인카에게 그녀 작업의 이론적 기반에 대해 질문한다면 그녀는 절대 대답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그녀의 결정은 옳아요. 전 그녀에게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아도르노의 분석만큼이나 정확해요. 아도르노 역시 작곡가였지만 음악의 특징들을 기술할 때 결코 자신의 작품을 예로 들진 않았습니다. 왜 제가 영화의 미세구조 아래 숨어서 그 주변을 샅샅이 뒤져야 합니까? 그럴 필요는 없죠. 게다가 영화를 압박하고 있는 사회관계의 거대조직들이 행사하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힘에 대항해서 어떻게 개인이 작품의 미세구조를 지켜낼 수 있겠습니까? 그랬다가는 고립될 게 불 보듯 환한데요. 이런 문제들은 이론적인 답변을 요합니다. 비판이론은 영화와는 별 상관이 없고 오히려 가능한 표현수단과 현실적 상황들에 관심을 가집니다.
SL: 영화의 ‘미세구조’에 대한, 뭐랄까요, 그러한 무관심 때문에 감독님은 ‘고전적’ 영화이론의 대가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예컨대 에이젠슈테인과 푸도프킨, 베르토프는 자신들의 영화를 분석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고, 자신들 영화의 무엇이 관객들을 움직였는가에 관해 확신에 차서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전과는 다른 용어들을 사용하긴 하지만, 크리스티앙 메츠나 레이몽 벨루 같은 많은 동시대 이론가들도 영화의 ‘미세구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AK: 저는 매우 오래된 전통에 속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고 말했죠. 이것이야말로 철저한 비판적(critical) 방법의 핵심입니다. ‘비평’(criticism)이라는 용어도 여기서 유래합니다. 예술에 대해 말하고자 할 때, 거기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고도로 정교한 표현적 특성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겁니다. 그걸 말로 표현하려 하면 곤혹스러울 뿐이죠. 횔덜린의 시를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걸 이해하려 시도하는 건 바보짓이죠. 예술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자신의 소재들을 통제하기 때문에, 그걸 언어적으로 반복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에 따르면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에는 항상 두 명의 지리학자들이 따라 나섰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지나왔는지를 측정하기 위해 항상 줄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아테네로부터 출발해서 인더스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전 세계를 경험했습니다. 2피트 내지는 4피트짜리 줄을 가지고 모든 곳을 걸어 다녔던 거죠. 그럼으로써 모든 걸 밝혀냈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제로 그들이 본 건 걸어 온 길의 좌우 양쪽 50미터 정도의 권역에 지나지 않았죠. 수수께끼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미적 생산물에 접근할 때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SL: 그 은유적 설명은 잘 이해되지 않는데요. 어떤 길이 아무리 많이 측정되고 분석되더라고 항상 그 이상의 미스터리가 남아 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 것 같습니다. 분명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경험되고 측정된 도로 자체는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제겐 감독님의 은유가 면밀하고도 논증적인 태도로 텍스트에 접근하는 태도를 반박하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그런데 며칠 전 감독님께선 ‘Rätselkino’(렛첼키노), 즉 수수께끼로 가득 찬 불가사의한 영화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왜죠?
AK: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지키는 관습이 하나 있습니다. 홍해에 빠져 죽은 모든 이집트인들을 위해 한 잔의 포도주를 바치는 것이죠. 이건 슬픔의 표시일까요 아니면 승리감을 맛보기 위한 것일까요? 그저 의식(儀式)에 불과한 것일까요 아니면 심각하게 여기는 것일까요? 정확히는 알 수 없죠. 풍부한 의미를 띠고 있기에 수수께끼인 겁니다. 그것은 말에 의해 지배되거나 정복되지 않습니다. 같은 이치로, 신이 전능한 것은 그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오페라 <모세와 아론>에는 오페라 하우스가 어두워져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코러스가 홍해 너머로 들려오는 거죠. 그런데 우리의 오페라 하우스들은 이 부분을 조명이 켜진 상태에서 공연합니다. 그건 잘못된 겁니다. 완벽하게 어두워져야 하고 위층 발코니로부터 코러스가 들려와야 하거든요. 쇤베르크의 악보에 그렇게 나와 있어요.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영화[27]에서도 모든 것이 보여집니다. 그건 실수였죠. 말하자면 시선들이 군주가 되는 겁니다. 시선들이란 정신적인 제국주의자들이죠. 제가 예술의 수수께끼라고 부른 것은 사실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그것은 감춰진 리얼리티입니다. 무릇 예술작품에는 단일한 결정적 국면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감춰진 무언가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합니다. 만약 무언가를 보고 그걸 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인상을 불신하고 그 너머를 보아야 합니다. 미처 보지 못한 무언가를 봐야 합니다. 5년 후에 그것을 다시 보면 그것은 분명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겁니다. 전에 보았을 때 수수께끼라 여겼던 게 드러나는 거죠. 실제보다 좀 복잡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브첸코의 <병기고 Arsenal>를 예로 들어 볼까요. 제가 보기에 이 영화의 도입부는 영화 철학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길고 느린 숏들로 이루어져 있죠. 극단적인 몽타주를 활용했지만, 매우 고요하고, 느립니다. 한 농부가 보이고, 나뭇가지가 보이고, 들판이 보이고, 새가 보입니다. 관찰이 서사적 원칙이 되고 있죠. 그것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결코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언어로 대체하는 게 불가능하죠. 이것이 <병기고>의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수수께끼를 간직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가능하죠. 영화는 사실 어느 정도 선전영화처럼 끝납니다. 모든 게 완전히 이해되고 결국엔 어떠한 미스터리도 남지 않습니다. 저는 선전영화의 목적은 이해하지만 그걸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계몽주의 프로젝트에는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좀 더 다양한 방법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비언어적인 방법으로 무언가를 해석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인간의 삶을 다루려 할 때 계몽주의에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죠. 이러한 이차적 약호(second code)를 우리는 존중해야 합니다. 계몽이 영화 안에 들어설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언제나 사람들 마음속에서 활동하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에이젠슈테인을 비판하는 것도 그 ‘의도주의적 파토스’(intentionalist pathos) 때문입니다. 그는 <알렉산더 네프스키>에서 기사들이 호수에 빠져 익사할 때 죽음의 광경에 탐닉하는데, 이는 오락적 효과를 노린 것인데다 도가 지나친 것이었죠. 이런 것은 수수께끼를 결여한, 권위가 떨어지는 예술입니다.
SL: 감독님께선 방금 에이젠슈테인의 ‘의도주의적 파토스’에 반대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무슨 뜻인가요?
AK: 뭐, 간단합니다. 아도르노를 읽으셨다면요. 그는 시인 혹은 예술가의 의도가 결과물 안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시인이나 소설가의 의도라는 게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텍스트 안에서 식별 가능한 것은 객관적인 어떤 것입니다. 설령 그것이 ‘원래’ 주관적인 것이었다 해도 말입니다. 어떤 예술가들은 텍스트의 의미에 부가적인 압력을 가합니다. 그게 바로 제가 ‘의도주의적 파토스’라 부르는 것입니다. 짚고 넘어갈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저자들은 물론 나름의 의도를 지니고 있겠지만 작업하는 동안에는 그것을 유예시켜야 합니다. 예컨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중력의 법칙에 관한 실험을 한다면, 그는 절대 자신의 손가락으로 실험체를 밀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 중력이 아니라 손가락의 힘을 측정하게 될 테니까요. 테스트 상황에선 조작을 삼가야 합니다. 의도적 방법을 선호하는 이들은 연금술사나 마찬가집니다. 금을 만들어 내고 싶겠죠. 이런 식의 의도는 헛된 것이지만, 가끔 연금술사들은 무언가 다른 걸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가능한 일이죠. 하지만 그가 자신의 의도 이외엔 다른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도 모르게 뭔가를 만들어 내고서도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주체는 의도보다 큽니다. 저자로서의 완벽한 인간 존재는 그러한 의도들보다 훨씬 풍요로운 것입니다.
SL: 감독님의 영화가 본인의 이론적 주장들을 입증하게 되길 바라는 건 아니라는 거군요.
AK: 네.
SL: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지난 15년 동안 영화에 대한 이론적 글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감독님께선 오늘날의 영화이론에 동의하십니까? 가령 크리스티앙 메츠나 레이몽 벨루 같은 이론가들의 논의에 말입니다. 그들의 작업이 감독님이나 이곳 독일의 동료들의 흥미를 끌고 있나요?
AK: 아뇨, 우린 그런 이론들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이제부터 알아 나가야겠죠.
SL: 영화작업을 시작하셨을 때, 감독님께선 ‘고전적’ 영화이론에 얼마나 친숙했나요? 에이젠슈테인이나 푸도프킨 같은 사람들의 이론에요.
SL: 영화를 처음 시작했을 때, 전 영화이론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영화 회고전들에는 관심이 있었죠. 1958년인가 1959년에 베를린의 동부 지역에서 무성영화 회고전이 열렸었습니다. 저는 CCC 스튜디오의 조감독으로 일하며 프리츠 랑의 영화들을 검토하고 있었어요. 저녁이 되면 영화박물관에서 열리는 회고전을 보기 위해 동부 지역으로 갔습니다. 소비에트 무성영화 대부분과 독일 무성영화 몇 편, 그리고 미국 무성영화들도 한두 편 봤죠. 제가 영화사적으로 중요한 비상업적 영화들을 접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저를 열광시킨 첫 영화는 <잔다르크의 열정>[28]이었어요. 나중에 우리가 추구하게 될 운동의 ‘조짐’이 여기에 담겨 있었죠. <병기고>도 그때 보았습니다. 두 번째 중요한 시기는 1960년대 초반 칸영화제에서 고다르의 초기작들을 봤을 때였죠. 그는 열정을 가지고 영화사(史)에 접근했습니다.
SL: 하지만 그때 당시 독일에도 많은 ‘고전적’ 영화이론 텍스트가 - 벨라 발라즈, 푸도프킨, 루돌프 아른하임 등의 - 소개되어 있었던 걸로 아는데요.
AK: 저는 1959년에 한스 리히터의『영화를 위한 투쟁 The Struggle for Film』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저를 열광시켰지만 책 내용과는 별 상관이 없었죠. 우린 이 책을 사랑했습니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사랑했어요. 그리고 빌헬름 로트와 울리히 그레고르 같은 평론가들도 있었죠. 영화사에 대한 그들의 이론적 성찰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레고르는 엔노 파탈라스와 함께 영화사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단지 위대한 영화사가들의 테이블 밑에 웅크리고 있는 개들에 불과했죠. 우리는 여기저기서 조금씩 배웠습니다.
SL: 그럼 감독님께선 그런 자료의 대부분을 간접적으로만 알고 계셨나요?
AK: 네. 여기서 인용 하나, 저기서 흥미로운 문장 하나, 또 저기서 고다르의 개념 하나, 뭐 이런 식이었죠. 브레히트는 두 편의 영화 대본을 썼는데 우린 그걸 세심히 읽었고 또 매우 좋아했습니다. 1960년대 초반에는 브레히트에 대한 관심들이 매우 강렬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마치 그가 철지난 고전시인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합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러나 그의 합리주의 - 그의 마음 한 부분을 차지하던 - 는 그때만 해도 매우 인기 있었죠. 더 이상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SL: 어떤 계기로 영화이론을 깊이 연구하게 되셨나요?
AK: 제가 영화이론에 개입했던 유일한 순간은 <어느 여자 노예의 부업>을 발표했을 때였죠. 세 편의 논문이 이 영화를 공격했는데, 특히 우리가 여성 노동자를 보여준 방식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저는 영화 속에서 영웅적이고 예외적인 인물을 보여주는 게 꼭 필요하다곤 보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그런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면 물론 기쁘겠죠. 그래서 저는 헬케 잔더 - 당시『여성과 영화 Frauen und Film』지(誌)의 편집장이었죠 - 와 게지네 스트렘펠을 찾아갔습니다. 우린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전 현실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책을 쓰려 준비했습니다. 구할 수 있는 한 영화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읽었죠. 전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관련된 모든 문헌을 독파합니다.
SL: 그 책에서 감독님은 영화의 이론적 전통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 책은 다른 이들의 작업에 대한 주석이 아니라 그야말로 ‘감독님의’ 책입니다.
AK: 저는 에이젠슈테인과 소비에트 영화의 문제점에 대해선 논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68운동의 문제점에 대해 논해야 했는데, 영화를 통해선 그걸 충분히 깊게 파고들지 못했었거든요. 하지만 일단 러시아 이론가들의 작업에 기반을 둔 설명들을 찾아보고 연구하려 했습니다. 에이젠슈테인의 영향에 대해 말하고 싶으시다면, 무엇보다 당신은 그가 <파업>과 <10월>에서 해낸 것들을 살펴봐야 합니다. 에이젠슈테인 영화와 이처럼 실질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그의 작품에 입문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입니다. 제가 <서커스단의 예술가들>에서 <10월>을 인용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나폴레옹 상(像)이 나오는 장면을 사용했는데, 이를 통해 제가 영화를 비롯한 모든 예술에서 보나파르트주의를 싫어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예술계에는 두 가지 유형의 인물이 있습니다. 첫째 동물들을 길들이는 조련사와 비슷한 인물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밭이나 화분 같은 인물입니다. 두 번째 유형이야말로 제 이상이죠. 비전문적인 카메라 감독이나 편집기사와 작업할 수는 없겠지만, 감독이라면 그렇지 않습니다. 감독이란 절대로 전문직이 아니에요. 감독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는 코디네이터에요. 하지만 스스로 악기를 연주하면서 오케스트라를 이끌 수 있었던 바흐처럼 되어야 합니다. 전문주의(professionalism)와 비전문주의(antiprofessionalism)는 이런 식으로 결합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접근은 알렉산더 보그다노프의 프롤레트쿨트(Proletkult) 운동[29]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운동은 베르토프, 에이젠슈테인 및 그 밖의 여러 사람들의 작업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SL: 사물이 ‘발아’하고 ‘생장’하도록 돕는 ‘경작’의 과정은 감독님의 작업 방식과 영화에서 핵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AK: 빌헬름 폰 클라이스트의 책에 “대화를 통한 사고의 점진적 구축”이란 구절이 나오는데, 저는 이 구절을 아주 좋아합니다.
SL: 그렇다면 대화는 감독님께서 다른 이들과 긴밀하게 작업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겠군요. 앞서 감독님께선 마인카-옐링하우스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녀로 하여금 숏의 배치나 타이밍을 결정토록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녀가 영화 초기 기획단계에도 참여하나요?
AK: 그렇진 않습니다. 가끔 그녀에게 시나리오에 대해 얘기하긴 합니다. 그런데 듣질 않아요. 그녀는 글로 쓰여진 건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말로 하는 지시만 받아들입니다. 영화란 언제나 시나리오에서 벗어나기 마련이라, 그런 건 그녀에게 아무런 중요성도 없는 거죠. 그녀의 일은 작업거리가 편집 테이블에 놓여 있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녀는 저에게 재촬영을 해 오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받아들이고, 싫어하는 것은 거부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애국자>에서, [말하는] 무릎에 대한 아이디어를 낸 건 그녀에요. 그녀는 제게 신체 및 스탈린그라드와 관련된 어떤 메타포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인간 신체의 한 부분이어야 한다, 독일제국은 파괴되었고 더 이상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면 당신이 묘사하는 개체(내레이터)는 완벽한 몸을 지닌 인간이어서는 안 된다, 는 등의 말도 했습니다. 그리고 전 “무릎 하나가 고독하게 세상을 떠돈다 Ein Knie geht einsam um die Welt”[30]는 크리스티안 모르겐슈테른의 시구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몽타주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오후를 함께 보냈습니다. 그녀는 제게 앉아서 글을 써보라고 했어요. 그리고 그녀는 제가 쓴 글에 맞는 그림들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수많은 그림들을 줬는데 어떤 것은 적합했고 어떤 건 그렇지 않았어요. 이게 그녀가 일하는 방식입니다.
SL: 물론 감독님도 그림들을 선택하는데 관여하셨겠죠?
AK: 물론입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요. 그런 게 제게 힘이 됩니다. 오스카 넥트와 작업할 때도 대화와 협력의 원칙이 적용되죠. 다만 오스카 넥트와의 작업이 언어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녀와는 함께 행동하고 실험합니다.
SL: 그녀와 오랫동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신 건 분명합니다. 감독님 영화 대부분을 그녀가 편집했는데요.
AK: 영화가 관련된 곳에서라면, 저와 그녀는 부부나 마찬가지죠.
SL: <블라인드 디렉터>에선 같이 작업하지 않으셨죠?
AK: 하지만 제 마지막 영화인 <여러 가지 뉴스>를 편집했죠. <블라인드 디렉터>는 야네 사이츠가 편집했고요. 그녀는 <장미의 이름>과 <네버 엔딩 스토리> 그리고 <특전 U보트>의 편집기사이기도 합니다. 매우 상업적인 편집기사죠.
SL: 그녀와 작업할 때는 어땠나요? 그 전과는 완전히 달랐나요?
AK: 꽤 달랐죠. 전 사이츠를 매우 좋아합니다. 마인카-옐링하우스처럼 친밀하진 않지만요. 저는 음악을 잘 쓰지 않습니다. 매우 조심스러운 편이죠. 하지만 전 그녀의 의견에 대부분 동의합니다. 참으로 전문적인 편집기사죠.
SL: 전 감독님의 협력자들 가운데 편집기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감독님의 많은 영화들이, 특히 최고의 영화들은 편집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이미지의 세심한 선택, 그들의 형식 및 연합적 상관관계들은 종종 내러티브만큼 중요합니다. 이미지와 이야기 사이의 복합적이면서도 가변적인 균형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AK: 매스 미디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입장들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무언가가 제대로 작동하면 그걸 옳은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입니다. 이런 입장의 정점에 히치콕이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세상에 특별한 것이란 없습니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우리의 적입니다. 다른 한편엔 타당성(authenticity)의 원칙이 있습니다. 계몽의 내레이션은 타당성을 받아들입니다. 저는 개별적인 것을 지배하는 일반적 개념들을 만들려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어떤 것이 그것만의 진정성(genuineness)을 획득하도록 놔둡니다. 칸트는 개개의 상황, 개개의 인간 존재가 가치를 지닌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대상으로부터 생기를 박탈하는 건 비인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타당성의 원칙은 제 작품의 배경이 되는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여기서부터 수많은 유기적 원칙들이 도출됩니다.
SL: 특정 작품을 구조화하는 과정 속에서요?
AK: 특정 작품을 구조화하는 과정, 즉 미학적 방법을 통해서죠. 언제 자를 것인가? 잘라선 안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그런 결정에 따라 일련의 결과들이 나오게 됩니다. 만약 두 개의 이미지, 두 개의 숏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을 푸도프킨이 말한 것처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연인 가운데 한 명은 워싱턴에 있고 다른 한명은 모스크바에 있는 상황 - 당신은 이 예를 알고 있을 겁니다 -, 이는 기본적으로 관객들이 불가피하게 저지르곤 하는 실수에 대한 은유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쉽게 저지르는 실수는 테크닉으로 통합되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내러티브 원칙이 되었습니다. 이와 상반되는 입장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이미지가 서로 간에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이미지는 자신만의 가치와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정보는 편집(cut) 속에 존재합니다. 전 이미지들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미지들을, 전사(前史)를, 친애하는 신을, 연기자들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세계이며, 그들 각각은 자신들의 외양(face)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그것들을 편집(cut)했다는 것을 거리낌 없이 인정합니다. 편집(cut)된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도 있겠지만, 여하간 저의 날인은 거기에 존재합니다. 그것은 저의 표현수단입니다.
SL: 감독님께서 방금 강조하신 이미지의 독립성, 즉 작품이란 몇몇 주요 내러티브에 의해 통합되지 않으며 오히려 부분들과 분절들의 합이라는 개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독님의 글 및 감독님 영화에 대해 논한 다른 이들의 글 속에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소설들, 특히 단편소설들에 더욱 현저하게 나타나고요.
AK: 좀 더 보충해 말씀드리자면, 관념들과 단편소설들[관념적 용어로 논하는 것과 단편소설을 쓰는 일] 사이엔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그 둘은 모두 알기 쉽고 유용한 추상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 둘은 무언가를 구체화하기도 하죠.
SL: 각각의 숏은 일종의 다면체로, 다른 숏과 결합되어 일종의 거미줄 같은 것을 만드는….
AK: 네, 정확한 표현입니다. 각각의 숏이 생명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원칙입니다. 모든 숏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영화입니다. 영화는 원래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뤼미에르의 첫 영화인 <아기의 식사 Repas de bébé>는 뤼미에르 가족의 아침식사 장면입니다. 그들 뒤로 나뭇가지들이 흔들리고 있죠. 나뭇가지들과 전경의 소소한 이야기 사이에 균형이 존재합니다. 이런 균형은 좋은 것이죠. 매우 흥미롭습니다. 영화산업은 항상 이러한 균형을 파괴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우 짧은 영화들, 1분짜리 영화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영화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개별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있죠. 확장된 선형적 내러티브를 구축하려는 관습은 거기서 생기를 빼앗아 버립니다. 관습적 영화들에서 플롯을 제거해 버리고 나면 개별적 이미지들은 무의미해집니다. 하지만 저나 도브첸코 같은 감독들의 영화에선 내러티브를 제거해 버린다 해도 언제나 아름다운 이미지의 정원이 남을 겁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정원에 있는 이미지들은 굳이 개념을 형성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이해하려 들 필요가 없고 그저 산책을 즐기면 됩니다. 정원이란 무언가를 달성하려 들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차이들을 서술하는 것, 그게 바로 우리의 작업입니다.
SL: 감독님의 실천을 깔끔하게 정리해주셨는데, 이미지들 서로 간에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AK: 제 영화 속의 단서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하게 보이진 않습니다. 이 영화들은 특정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들입니다. 그러한 상황에 처해 본 사람들은 맥락을 잘 이해하겠죠. 예컨대 <독일의 가을>에서 롬멜이 매장될 때 보였던 그의 아들은 이제 슈투트가르트 시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장관과 경찰이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슈탐하임 교도소의 죄수들[31]이 도른할덴 묘지에 매장되는 걸 허가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 상황은 영화 말미에 인용된 <안티고네>로부터 따온 장면들을 통해 풍자적으로 보여집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환경에서 살아 보지 않은 관객들은 매우 약하고 희미한 단서들밖에 찾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맥락들은 언제나 다소간 예측가능하며 이는 뜻밖의 상황이 일어나기에 좋은 조건들을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슐라이어를 위한 장송곡이 연주되는 교회 밖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총을 휴대했다 경찰에 붙잡힌 터키인 한 명을 발견하게 되었죠. 그건 테러리즘에 대한 풍자로서 아주 효과적이었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이 실제로 행동을 취하진 않았지만 흡사 그런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우리가 그걸 촬영한 건 완전히 우연이었습니다. 꼭 레이더가 우릴 그곳으로 가게끔 인도한 것 같았죠. 이 레이더는 또한 우리를 주방으로 인도했습니다.
SL: 감독님께서 말씀하신 주제적 모티브들은 확실히 <독일의 가을> 여기저기서 반향하고 있습니다. 거기엔 또한 시각적 모티브와 음악적 모티브들도 있죠.
AK: 우리가 모든 소재들을 이론적으로 동등하게 다루기 때문에 관객들이 곤혹스러워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린 소재들을 지배하는 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직선적 내러티브가 그러하듯 소재들을 영화에 꿰어 넣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SL: 이 영화는 일종의 역장(力場) 같은 것인가요?
AK: 그렇습니다. 그것은 색다른 방식으로 영화에 참여할 것을 요구합니다. 흡사 길을 걷다가 창문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죠.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생각하고 탐색할 필요가 있죠.
SL: 감독님께선 관객들에게 ‘관객 머릿속의 영화’(film in the spectator's head)를 창조해내는 데 필요한 사유를 요구하시는 거죠?
AK: 다른 이들이 자발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방법입니다. 저도 그런 방법을 좋아하죠.
SL: 그러한 자발성, 폭넓고 다양한 이미지와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결합하려는 욕구야말로 매체를 막론하고 감독님의 모든 작품을 특징짓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 대해 짧게 살펴보고 싶은데요. 그런 성향은 1977년부터 1982년 사이에 다른 감독들과 함께 만든 3편의 협동 영화에서 특히 두드러집니다. 감독님의 작품을 잘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독일의 가을>뿐 아니라 <후보자>(1980)와 <전쟁과 평화>(1982) 같은 작품들도 감독님의 주도 하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임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어느 정도나 맞는 것인가요?
AK: 매우 복잡한 문제군요. 꼭 저하고만 관련된 것이라고는 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저 혼자서는] 이 영화들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디어를 내고 슬로건을 내건 건 힌츠 씨[32]였습니다. 물론 그가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는 배급업자니까요. 하지만 그에겐 아이디어가 있었고, 보통의 배급업자보다 훨씬 많은 시간동안 감독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둘째, 어느 정도까진 제가 개념들을 만들 수 있지만 이것은 실제 제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따라서 힌츠 씨처럼 자비로운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덕분에 파스빈더로 하여금 그의 작품을 슐뢴도르프 것과 결합하는 것이 옳다고 믿게 만드는 게 수월해졌죠. 아시다시피 그 둘은 서로 사이가 안 좋았어요. 따라서 저 뿐만 아니라 힌츠 씨도 고려해야 합니다. 꼭 아이젠하워와 브래들리의 관계 같았죠. 저는 일종의 산파로서 촉매제 역할을 했고 그런 다음엔 빠졌죠.
SL: 하지만 <독일의 가을>의 최종 편집을 담당한 건 감독님과 마인카-옐링하우스였습니다. 누가 이런 결정을 내렸나요?
AK: 간단합니다. 오후 6시 이후가 되면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거든요. 마인카가 이 작품을 어떻게 편집해야 할 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냥 촬영분을 그녀에게 넘겨줬어요.
SL: 최종 편집본을 두고 논쟁은 없었습니까?
AK: 아, 물론 있었지만, 결국은 잘 해결되었습니다.
SL: 감독님의 공동제작 방식은 1960년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성행했던 방식 - 하나의 테마에 대해 여러 감독이 연출한 각각의 단편영화들을 단순히 결합하는 식이었죠 - 과는 사뭇 다릅니다. 감독님과 함께 작업했던 모든 이들은 처음부터 작품을 종합적(synthetic)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나요?
AK: 글쎄요, 일단 각자 자신이 원하는 걸 했습니다. 파스빈더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할 수는 없죠. 하지만 그가 만든 결과물은 볼 수 있었고, 그리고 나서 그것을 바더-마인호프에 관한, 슐라이어의 죽음에 관한 슐뢴도르프의 아이디어와 결합할 수 있었죠. 현실은 그랬습니다. 그들이 이 영화에 참여한 건 힌츠 씨 덕택이기도 했고 어느 정도는 자발적이기도 했죠. 마인카와 저는 그런 상황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게 그렇게 별난 상황은 아닙니다. 모든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많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며 따라서 항상 종합적입니다.
SL: ‘종합적’이라는 표현은 영화, 문학 혹은 이론을 막론하고 감독님의 작업을 설명하기에 아주 적절합니다. 작업을 하실 때 통상 감독님께선 놀랄 만큼 다양한 허구적/다큐멘터리적 소재들 - 사진, 지도, 복제본 회화, 낡은 영화 클립, 대중가요의 단편들 및 직접 촬영한 필름 - 을 종합합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K: 문학이 인간적 경험들을 표현하기 위한 모든 가능성을 발전시키고 시험한 이후 [새로운 문학을 정립하기란 불가능하며], 바흐와 쉬츠로부터 후기 낭만주의, 쇤베르크 및 비엔나 학파에 의해 음악이 거대하고 풍요롭게 발전한 이후로는 새로운 음악을 정립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아방가르드가 모든 것을 다 했다면 더 이상의 아방가르드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의 문화가 고도로 발달하면 아방가르드는 자신의 소재들을 대화 속으로, 새로운 맥락 속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이것은 로마가 이미 세워졌고 콜로세움과 여러 건물들이 있지만, 로마의 지배권(Imperium)은 더 이상 정점에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그 폐허 속에 새로운 건물과 새로운 집을 지어야 하며 낡은 재료들을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SL: 그 말씀은 감독님께서 [앙드레 바쟁이 말한] ‘불순한 영화’(cinéma impur)를 옹호하시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불순한 영화’란 예술적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 영화적 수단들을 정화(淨化)하려 애쓰는 대신 오히려 비균질성을 한껏 만끽하는 영화를 말하는 것이죠. 감독님의 말씀은 지난 10년간 미국에서 벌어졌던 논쟁, 즉 모더니즘적 아방가르드의 종말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에 관한 논쟁을 떠올리게 합니다. 감독님의 실천은 고도로 정제된 순수주의보다는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부르는 것에 더 가까워 보이는데요, 그러한 순수주의는 우리가 - 이런 명칭은 유감스럽고 분명히 부정확한 것이긴 하지만 - 모더니즘이라 부르는 것이죠.
AK: 저의 개념이나 실천이 모더니즘과 모순된다는 지적이 결코 옳지 않다는 사실을 지금 당장 말씀드려야겠습니다.[33] 프랑크푸르트에서 아도르노의 가장 큰 적은 순수주의적 오르간 연주자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였는데, 그는 순수한 바흐를 연주하고 싶어 했습니다. 아도르노는 장 마리 스트라우브가 레온하르트를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에 출연시켰다는 사실에 대해 극도로 화를 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아도르노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청교도적 태도 때문에 이 영화를 싫어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도르노는 책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단 한 줄의 문장에서도 순수함이란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을 겁니다.
SL: 감독님은 포스트모더니스트란 딱지를 거부하시나요?
AK: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아닙니다. 저는 아방가르드를 믿습니다. 하지만 그런 구분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두 가지 다른 접근 방법이 있습니다. 소재를 지배하는 것과 존중하는 것이죠. 전자는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소재를 취합니다. 반대의 태도는 이처럼 생생한 소재들의 자율성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영화에 의해서건, 음악에 의해서건, 아니면 회화에 의해서건 마찬가지입니다.
SL: 감독님께서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른 것은 어느 쪽인가요?
AK: 소재를 지배하는 쪽이죠. 그건 무언가를 만들고 그 앞에 기둥들을 세우죠. 단단하고 기능주의적인 건축물이긴 마찬가지지만, 약간의 특별한 장식을 더하는 식이죠. 저는 장식이란 걸 믿지 않습니다. 장식이란 언제나 권력의 기호이며 지배의 상징입니다.
SL: 그런 시각은 아돌프 로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정통적인 모더니즘의 시각과 비슷하군요.
AK: 바로 그렇습니다. 사실 비엔나 학파에 기반을 둔 거죠. 그들이 음악에 대해 말한 것은 이론과 시, 그리고 소설과 영화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SL: 감독님께선 모더니즘을 지속적인 프로젝트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안에 있는 진보적 역사관은 거부하시죠?
AK: 맞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끌어야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아방가르드(avant-garde: 전위)와 아리에가르드(arrière-garde: 후위) 양자로써 이끌어야 합니다. 아방가르드는 초기 부르주아 시대에는 타당한 개념이었지만 부르주아 종말의 시대에는 걸맞지 않은 개념입니다. 이런 시기엔, 뒤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앞으로 밀어내는 게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SL: 감독님께선 모더니스트 예술의 역사를 일종의 전선(front)의 이동으로 - 이러한 전선은 특정한 순간에 많은 비동시적인 요소들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 보고 계신데요, 이는 앞서 말한 바, 감독님께서 많은 다양한 종류의 텍스트들을 활용하시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제가 논하고 싶은 감독님 작업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 하나가 거기에 있습니다. 감독님께선 몇몇 상이한 영역에서 작업하셨습니다. 영화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소설뿐만 아니라 이론과 정치적 실천에도 종사하셨죠. 감독님께서 텍스트들을 재활용하는 것이 제겐 흥미롭게 여겨집니다. 감독님께선 같은 이야기를 여러 매체를 통해 거듭 말하고, 때로는 그걸 적잖이 손보고, 때로는 이야기나 사진, 영화나 텔레비전의 한 장면을 새로운 맥락 안에 배치하실 뿐이죠. 지금 막 떠오르는 예는 소설집 『사례사 Lebensläufe』에 실린 「아니타 G.」[34]와 <어제와의 이별>, 단편 「자본의 볼셰비키 Ein Bolschewist des Kapitals」[35]와 <강자 페르디난트>, 혹은 <여러 가지 뉴스>의 한 에피소드와 『전투의 기술(記述) Schlachtbeschreibung』[36]의 새 판에 실린 원작단편 등입니다. 그리고 저는 감독님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도 꽤 봤는데, 연출하신 영화의 일부분을 빈번하게 재활용하시더군요. 이런 전략을 취하시는 목적은 무엇인가요?
AK: 그건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대중적 장(場)에는 네트워크들이 존재합니다. 당신이 영화를 만든다고 칩시다. 그럼 그건 다른 이들의 손에 내맡겨집니다. 텔레비전에서 그 영화가 방영됩니다. 영화가 나오고 나서 책이 발간되는 경우도 종종 있죠. 현대의 생산물들은 오직 이러한 네트워크 안에서만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고립된 생산물을 파는 건 불가능합니다. 시골에서 양배추 한 개나 감자 한 개를 가져와서 프랑크푸르트 기차역에서 팔려고 한다면 그게 될 리가 없죠. 사람들은 그게 썩은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걸 팔기 위해서는 가게나 조합, 즉 생산물의 컨텍스트를 만들어야 합니다.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그렇습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단지 하나의 조명만을 사용해선 안 됩니다. 그러면 단순해 보이죠. 주광(key light)과 보조광(fill light), 그리고 역광(back light)이 필요합니다. 이걸 좀 더 일반화해 볼 수도 있습니다. 동일한 주제, 동일한 인간의 경험에 대해, 소설을 씀으로써 문학적으로 ‘조명’하고, 영화를 만듦으로써 영화적으로 ‘조명’하고, 논문을 씀으로써 담론적으로 ‘조명’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각각의 접근들은 동일한 주제에 대한 서로 다른 인상과 관점을 가능케 합니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빈약하기 짝이 없죠. 이는 이탈리아인들이 ‘인테르텍스투알리타’(intertextualita)라고 부르는, 즉 상호텍스트성이라는 복합적 관점을 창조합니다.
SL: 말씀하신 ‘상호텍스트적’ 실천이 어떤 진실을 담지하나요, 아니면…?
AK: 그보다 저는 상이한 형식으로 말해지는 차이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진실을 향해 나아가도록 자극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계몽주의의 중요한 과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백과전서를 믿습니다만, 그것은 탈중심화된 것이어야 하며, 총서(叢書)여서도 안 되고, 단지 쓰여진 것일 뿐 아니라 글과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저는 그것을 이성의 건축과 관련된 칸트 선험철학의 제2부의 서문[37]을 인용하는 것으로 요약하고 싶습니다. 어느 날 저녁 아도르노가, 제게 그것을, 이 한 페이지를 읽어줬습니다. 거기 나타난 프로그램은 모던한 것도 포스트모던한 것도 아닙니다. 고전적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미 말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실현되지 않았던 것이죠.
주
[1] 알렉산더 클루게와 에드가 라이츠를 비롯한 26명의 독일 영화감독들이 서명했던 오버하우젠 선언은 1962년 2월 28일 오버하우젠 단편영화제 기간 동안 발표되었다. 그들의 동기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연구는 라이너 레반도프스키(Rainer Lewandowski)의 Die Oberhausener. Rekonstruktion einer Gruppe 1962-1982 (Diekholzen, Verlag fiir Biihne und Film, 1982)에 잘 드러나 있다.
[2] [역자 주] 독일어 ‘Politik der Autoren’은 프랑스어 ‘la politique des auteurs’를 직역한 것이다. 프랑스어 ‘politique’와 독일어 ‘Politik’은 모두 ‘정책’, 그리고 ‘정치(학)’이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 비평계에서 ‘정책’(policy)으로서의 의미가 보다 강조되었던 반면, 이 용어가 독일로 넘어오면서 ‘정치(학)’(politics)으로서의 의미가 보다 강조되게 된다. 이제는 국내에서도 정착된 용어인 ‘작가정책’ 및 ‘작가영화’와 차이를 두기 위해, 원문의 ‘Politik der Autoren’은 ‘작가의 정치학’으로, ‘Autorenfilm’은 ‘작가의 영화’로 일관되게 번역했다. 원래 ‘Autorenfilm’은 1910년대 독일에서 영화로 각색된 문학작품이나 시나리오를 쓴 문인, 즉 작가(author)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영화를 일컫는 용어였다.
[3] 클루게는 나폴레옹 시대 전쟁 가운데 가장 유명한 전쟁 하나를 언급하고 있다. 1806년 호헨로헤 대공의 프로이센 군대는 예나에서 나폴레옹 군대에게 완벽히 패하였는데, 이때 독일 예비군은 아우어슈테트에 남아 있었다.
[4] [역자 주] 런던 도심지역인 시티(City), 시티를 에워싸고 있는 12개의 자치구로 구성된 이너 런던(Inner London), 이너 런던 외곽의 아우터 런던(Outer London)으로 구성된 지역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1986년 각 지역의 자치행정지구가 폐지되었으므로 현재의 런던과 같은 뜻이라고 보면 된다.
[5] 클루게는 다니엘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주인공을 언급하고 있다.
[6] 프리드리히 짐머만은 [이 인터뷰가 행해질 당시] 기독민주당(CDU) 정권의 내무부 장관이[었]다. “Die Wende”(전환점)는 헬무트 슈미트 하의 사회민주당(SPD) 행정부가 헬무트 콜의 기독민주당에 정권을 넘기게 된 것을 지칭하는 독일식 표현이다.
[7] [역자 주] 무장투쟁에 의한 도시게릴라 운동을 선언하며 1970년 결성된 서독 적군파 단체.
[8] [역자 주] 세계경제공황이 일어난 해이다.
[9] 알프레드 후겐베르크(1865-1951). 1927년에 후겐베르크는 당대 독일 최대 영화사였던 UFA의 대표로 취임했다. 히틀러의 초기 협력자였던 그는 잠시 경제부 장관으로도 재임했다.
[10] [역자 주] 당시 후겐베르크의 관리 하에 있던 UFA영화사에서 제작된 영화들을 말한다.
[11] 1988년 1월까지, 프로그램 제작편수는 이것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12] 여기서 클루게는 자신이 오스카 넥트와 함께 저술한 책,『공론장과 경험』을 언급하고 있다.
[13]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의 텔레비전 기업가이다. [다음은 역주] 이탈리아 최대 미디어 그룹 소유주이자 축구팀 AC밀란의 구단주. 1994년 ‘전진이탈리아당’을 창당, 연정을 통해 정권을 장악, 이탈리아에서는 전후 최초로 우파정권을 수립했다. 연정 붕괴로 1995년 1월 총리직에서 물러났으나 2001년에 재도전, 제 78대 총리가 되었다.
[14] SAT1은 독일 최초의 민영 위성방송채널이다. 1985년 1월 1일 방송을 시작했다.
[15] 베르텔스만(Bertelsmann)은 독일 최대 규모의 미디어 그룹 가운데 하나다. 레오 키르히(Leo Kirch)는 새로운 민영방송 채널에 대대적으로 투자한 독일의 메이저 영화 배급사다.
[16] [역자 주] 클루게가 ‘덴츠’(Dentsu)를 ‘덴초’(Dentso)로 잘못 알고 말한 것이거나 오기(誤記)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는 원문의 오류를 바로잡아 모두 ‘덴츠’로 표기했다.
[17] [역자 주] ‘Dentsu Young & Rubicam’의 약어.
[18] [역자 주]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졌던 보불전쟁을 말함.
[19] 애덤스 시트니(P. Adams Sitney)는 나에게 ‘aisthanomai’를 ‘지각하다’(to perceive)로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20] 미리엄 한센(Miriam Hansen)의 “Introduction to Adorno’s ‘Transparencies on Film’”, New German Critique, nos. 24-25 (Fall/Winter 1981-1982), pp. 186-198 참고.
[21] [역자 주] 러시아어로 ‘공개’ 내지는 ‘개방’을 의미하는 단어. 영어로는 ‘openness’에 해당한다.
[22] [역자 주] 넓게는 ‘국가제도’ 일반을 뜻하나 보통 ‘공화국’의 뜻으로 쓰인다. 공화국을 지칭하는 영어단어인 ‘Republic’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23] [역자 주] 이 해에 히틀러는 독일 수상이 되었다.
[24] [역자 주] 프리츠 랑이 1943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원안을 쓰고 한스 아이슬러가 음악을 담당했다.
[25] [역자 주] 여기서 클루게는 하버마스가 1968년에 발표한 저서『인식과 관심』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다.
[26] “Die Macht der Bewusstseinsindustrie und das Schicksal unserer Öffentlichkeit,” in Klaus von Bismarck et al., Industrialisierung des Bewusstseins, Munich, Piper, 1985, pp. 51-129.
[27] [역자 주]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1975년 작품 <모세와 아론>을 말함.
[28] 클루게는 1926년에서 1928년 사이에 프랑스에서 제작되어 1928년 4월에 개봉된 칼 테오도어 드레이어의 영화를 언급하고 있다.
[29] [역주] ‘Proletarskaya kul'tura’의 약어로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의미. 20세기 초 소련의 문화운동조직으로 대중적 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30] [역자 주] 여기서 클루게가 언급하고 있는 시는 모르겐슈테른의「무릎 Das Knie」이라는 유명한 시다. 다만 여기 언급된 부분에 보이는 전치사 ‘um’은 클루게가 잘못 기억한 것으로, 시 원문대로라면 ‘durch’가 옳다. 하지만 전체 문장의 뜻에는 변화가 없다.
[31] [역자 주] 1977년 독일 적군파는 한스-마르틴 슐라이어 서독경영인협회장을 납치, 암살했는데 얼마 후 붙잡힌 적군파 멤버 3명(요하네스 바아더, 구드룬 엔슬린, 얀-칼 라스페)이 슈탐하임 교도소에서 의문사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여기서 ‘슈탐하임 교도소의 죄수들’이란 바로 이 적군파 멤버들을 지칭한다. 본문에서 이어지는 내용은, 이들의 매장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을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의 주인공 안티고네가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둘러싸고 테베의 왕이자 그녀의 숙부인 크레온과 벌인 논쟁과 비교했다는 뜻.
[32] 테오 힌츠는 그 당시 중요한 영화 배급사였던 작가영화배급소(Filmverlag der Autoren)의 대표였다.
[33] [역자 주] 가령 클루게에 관한 영어연구서를 펴낸 피터 C. 루츠는 클루게가 실천적으로 제기한 많은 이슈들이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의 핵심에 놓이는 것들임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작품들이 모더니스트적 감수성을 드러내며 모더니스트들의 형식적 기법들을 전유한 것임을 지적한다. 클루게는 당대의 사회적 조건들에 특별한 종류의 비판적, 정치적 모더니즘으로 접근해 왔으며, 포스트모던적이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할 만큼 사회적 조건들이 바뀐 지금에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Peter C. Lutze, Alexander Kluge : The Last Modernist, Wayne State University Press, 1998.
[34] 레일라 베네위츠(Leila Vennewitz)에 의해 영어로도 번역되었다. “Anita G.” in Alexander Kluge, Attendance List for a Funeral, New York, McGraw-Hill, 1966, pp. 15-34.
[35] 스킵 아쿠프(Skip Acuff)에 의해 영어로도 번역되었다. “Big Business Bolshevik,” in Quarterly Review of Film Studies, vol. 5, no. 2 (Spring 1980), pp. 193-204.
[36] 레일라 베네위츠에 의해 영어로도 번역되었다. The Battle, New York, McGraw-Hill, 1967.
[37] [역자 주] 칸트의『순수이성비판』의 제2부 서문을 가리킨다. “내가 순수한 사변이성의 모든 인식의 총체를 - 최소한 그것을 위한 이념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 한 건물로 본다면, 우리는 초월적[선험적](transcendental) 요소론에서 건축도구들을 헤아려 보았고, 그것들이 얼마만한 높이의 어느 정도로 견고한 건물을 세우는 데 충분한지를 정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비록 우리가 하늘까지 이를 탑을 구상했지만, 비축된 자재들은 겨우 주택 한 채 짓는 데 족했고, 그 집의 넓이는 경험의 평지를 조망하기에 충분한 정도였고, 반면에 저 대담한 계획은 재료 부족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 계획안에서의 언어상의 혼란은 말할 필요조차도 없는데, 그것은 그 설계와 관련하여 노동자들을 불가불 서로 분열시켜, 그들이 온 세상에 흩어져 각기 나름대로의 기획에 따라 따로따로 집을 짓고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제 우리의 관심사는 자재가 아니라 오히려 설계이며, 아마도 우리의 전 능력을 넘어서는, 자의적이고 맹목적인 기획에 따라 감행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확실한 거처를 건설하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으므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고 동시에 우리의 필요성에 적합한 비축물의 형편을 고려하여 건물의 설계도를 그리는 일이다.” (임마누엘 칸트,『순수이성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6, p.859)
안녕하세요. 공짜로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질문을 써보려고 합니다. AK는 '영화를 만든다는 건 실질적인 문제'이며 '도제 시스템을 믿는 게 낫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영화 제작의 '실질적 문제'는 '대학에서 배우는 이론'과 구별되는데요. '실질적 문제'는 영화의 '나이브 한' 제작, 경험과 허구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 보았습니다. 한편 AK는 검열에 맞서는 '미학적' 태도에 대해서 단호한 걸로 보이는데요. AK 영화의 미학적 가치는 '대학에서 배우는 이론'에 빚지지 않도록 만들어졌습니까? 혹시 미쟝센이나 몽타주 같은 구조적 장치에 기대지 않고 만들어졌다면 이런 종류의 영화를 대다수의 관객들은 좋아했습니까? 유운성 님께서는 좋아하시나요? 오버하우젠 영화를 한편도 보지 않고, 관련 책도 읽지 않고서 게으르게 질문드립니다. 혹시 질문으로부터 인터뷰에 대한 몰이해를 집어내실 수 있다면 적당한 책을 추천해 주시는 걸로 대체해 주셔도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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