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격월간 사진잡지 《보스토크》에 27호(2021년 5월 발행)부터 '영화의 장소들'이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연재를 시작했다. 이 연재글들은 이전에 썼던 영화평들과 조금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이유를 밝히는 서문 격의 글인 「플랫폼에서」는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아래는 《보스토크》 31호(2022년 1월 발행)에 실린 「커다란 하늘, 또는 모노크롬의 유혹」이다.
행위의 유용성으로만 따지자면 가만히 앉아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이 무용한 일도 없다. 어둡기 짝이 없는 공간에 두세 시간을 눌러앉아 텅 빈 스크린에 비치는 아무런 신비도 없는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환영에 시선을 고정해 두는 일이니 말이다. 이례적이기는 하지만, 이따금 네댓 시간이나 일고여덟 시간에 달하는, 심지어 열 시간이 넘는 가공할 상영 시간을 지닌 극장용 영화도 있다. 영화를 보는 일을 순전히 그 몸짓성이라는 측면에서만 고려하면, 그 무엇보다 무용한 응시를 특권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불멍’이니 ‘물멍’이니 하는 지극히 동시대적인 행위(라기보다 무위)의 양식들과 상당한 친연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휴식이 아니며 동시대적 ‘힐링’의 양식들과도 무관하다. 또한 그러한 몸짓성을 곧바로 영화의 본질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그처럼 본질에 집착하는 식으로 영화의 무용함에 다가가는 사고는 흔히 모종의 금욕적 형식에 대한 선호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무용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 따위는 잠시도 견디지 못하는 의미지향적 정신이 그것을 어떻게든 견딜 만한 무엇으로 바꾸려 들 때 홀연히 고개를 쳐드는 정념이 바로 형식적 금욕주의다. 무는 그저 무가 아니라 그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법이야, 라는 식의 기만적인 유사-선(禪)철학적 믿음으로 스스로를 위무하는 태도 말이다. 무용하기 짝이 없는 영화적 몸짓은 일단 스크린을 바라보고 앉아 있기만 하면 불가피하게 출현하는 것이지만, 그 무용함은 항상 쾌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금욕주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가차없이 집요하게 쾌락만을 추구하는 불량함으로 무장한 채, 의미지향적 정신의 고귀한 시도를 줄기차게 방해하면서, 보는 이들의 몸짓이 어떻게든 무용함 가운데 머물도록 하는 영화들, 이런 영화들을 특징짓는 것이 있다면 바로 모노크롬의 유혹이다.
오랜 세월 동안, 영화는 그것을 보는 행위가 실은 무위일 뿐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감추는 다양한 방법을 구사해 왔다. 사진은 말할 것도 없고 문학과 회화와 연극 등에서 주제적으로나 심미적으로 일찌감치 그 효능을 인정받은 익숙한 장치들을 마음대로 가져다 쓰면서 말이다. 그뿐이 아니다. 촬영, 대본, 구성, 플롯, 프레임, 그리고 미장센 등등의 용어들을 빌어다 본디 자신의 소유이기라도 한 것처럼 거리낌 없이 마구 쓰기까지 한다. 이런 남용은 영화의 천연덕스러운 뻔뻔함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영화가 어딘가에서 자꾸 이것저것 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갚겠다는 기약조차 없이 제멋대로 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사실상 절도라 해도 할 말은 없겠지만, 여하간 그것은 아무리 막으려 애를 써도 스크린에 자꾸 나타나는 저 무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다. 여기를 보는 당신의 행위는 실은 무위야, 라고 속삭이며 자꾸만 우리를 각성시키는 그 얼굴을. 어떤 점에서 이 얼굴은 영화를 지탱하는 바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을 요령껏 잘 감추지 않으면 영화적 허구는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리고 말 터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크린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이 나타난다. 무의 얼굴이란 스크린에 나타나는 무엇이 아니라 무방비로 드러나 버린 스크린 자체다. 언제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가? 여러 경우를 떠올려 볼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례를 고찰해 보려 한다. 이를테면, 카메라 렌즈를 드넓은 하늘로 향하게끔 해서 얻은 이미지를 스크린에 곧바로 투사하면 어김없이 그런 일이 벌어진다. 이에 대한 깨달음은 두말할 나위 없이 영화가 사진으로부터 직접 훔쳐온 것이다. 특히 사진적 이미지에 색채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 구름이라든지 해와 달과 별 등의 천체가 없는 하늘은 그저 백색이나 흑색의 모노크롬, 또는 회백색의 그레이스케일에 지나지 않았다.
스크린에 투사된 모노크롬의 표면은 하나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스크린이라는 무의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또 다른 무로서의 조명에 가깝다. 필름 영사를 통한 전통적인 스크리닝 방식을 디지털 스크리닝이 대체한 이후 이런 조명적 특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필름 스크리닝에서의 흑색이란 빛의 투과가 가로막혀 스크린에 드리워진 어둠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디지털 스크리닝에서의 흑색은 흑색에 해당하는 빛이 스크린에 투사된 것, 그야말로 일종의 조명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스크리닝은 오늘날의 스크린에서 온전히 어둠을 몰아내고 있다.
스크린이 온통 모노크롬의 표면으로 채워져 무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허구의 표면으로서의 스크린이 물리적 표면으로서의 스크린임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 바꿔 말하면 ‘영상(零像, null-image)’으로서의 하늘로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것, 이것은 항상 영화를 끌어당기는 대단한 유혹이지만 영화는 자신이 노상 이런 유혹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만은 한사코 숨기려 든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탄생의 순간부터 그러했다.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노동자들이 쏟아져 나오는 공장 앞을 포착한 풍경에서 하늘은 중앙 상단의 벽과 건물 틈새에 간신히 끼어 있는 회백색의 직각 삼각형으로 옹색하게 눈에 들어올 뿐이다. 여기서 하늘은 40초 남짓한 시간 동안 아주 잠시 드러날 뿐인데도, 그마저도 지나치다는 듯 이 짧은 영화는 서둘러 공장의 문을 닫고 하늘을 가리면서 끝난다. 이 정도면 됐어, 라고 영화는 중얼거리는 것 같다. 이보다 지나치면 사람들이 자기가 보는 것 뒤에 정녕 무엇이 있는지 알아차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또 하나의 유명한 사례를 떠올려보자. 화면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시원스레 길게 뻗은 선로가 보인다. 오른편의 플랫폼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공장 앞의 풍경을 보여줄 때와는 사뭇 다르게, 여기서 하늘은 화면 상단에 수평으로 지나치게 크게 펼쳐져 있는 것 같다. 아니나다를까 이내 검은 기차가 선로 위를 질주해 들어오면서 하늘을 가리기 시작하고, 우리의 시선은 멈추어 선 기차에서 하차하거나 그리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좇아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러니까, 이미지 뒤에, 말과 소리의 저편에, 몸짓과 행동의 여백에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는 무의 나타남과 사라짐을 계기적으로 반복하는 것, 모노크롬의 표면으로서의 하늘은 이러한 진동을 연출하기 위한 최적의 매개라는 것을 영화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노크롬의 표면 자체만이 화면을 가득 메우게 되는 사태만은 피해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자기가 줄곧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가장 가깝게 닮은 장소 자체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영화는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 모노크롬의 유혹은 그토록 강렬하다.
우리는 잘 속는다. 모노크롬의 조명을 한껏 받아 무의 얼굴로서의 스크린이 번연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도 종종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니 말이다. 영화가 우리는 속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앞서 이미 언급했듯이, 구름이라든지 해와 달과 별 같은 천체를 하늘에 곁들이는 정도가 고작이다. 심지어 실제로 촬영한 것이 아니라 조악하게 그린 그림이나 합성한 것이라도 상관없다. 그럼 우리는 눈 앞에 펼쳐진 커다란 하늘을 그저 허구의 ‘배경’으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조금 더 효과적인 다른 방법도 있다. 하늘만큼이나 모노크롬적인 지상의 풍경을 수평으로 나란히 잇대어 두는 것이다. 눈 덮인 대지, 모래로 가득한 사막, 그리고 광활한 바다 등은 하늘 못지않게 무에 맞닿아 있는 영화적 장소들이며 당연히 영화가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즐겨 찾는 장소들이기도 하다(그림 1). 흥미롭게도, 하늘이 이러한 장소들과 병치될 때면 우리는 무의 과잉과 범람을 인지하기보다는 지평선이나 수평선만 보고도 간단히 안심해 버리고 만다. 실재하지 않는 선이 실재하는 무를 감춘다. 여기에 약간의 인물들과 그들을 둘러싼 이야기만 더해지면, 영화가 거리낌 없이 무의 한복판을 내내 가로지른다 해도, 우리 가운데 누구도 거기 신경 쓰지 않을 터이다. 스크린 가득 현존하는 하늘이, 신기하게도 돌연 우리 눈에서 비가시적이게 된다(그림 2).
하나의 장르로서 일컬어지는 서부극은 영화가 이러한 속임수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환경을 찾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서부극에서 이야기란 스크린 가득 모노크롬의 표면을 불러들이기 위해 동원되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달리 말해서, 우리의 시선이 지나치게 하늘에 쏠리지 않게끔 주의를 전환하는 데 효능을 발휘하기만 하면, 서부극의 이야기란 어떤 이야기라도 상관없다는 뜻도 된다. 사람들이 이 장르와 관련해 흔히 품고 있는 고정 관념과 달리, 여러 서부극을 공통으로 가로지르는 서사적 요소들의 목록을 작성하기가 녹록지 않은 (사실상 불가능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거의 모든 장르에 손을 댔으며, 심지어 종종 놀라운 결과물을 내놓았던 연출자가 1950년대 초반에 만든 서부극 하나를 떠올려본다. 아직 철도가 도래하기 전인 19세기 초반, 인디언 부족과 거래를 트기 위해 배를 타고 미주리강을 3,200km나 거슬러 올라가는 (한 명의 인디언 여자를 동반한) 서른 명 남짓한 남자 무리의 이야기. 그 이야기의 세세한 부분들은 어느덧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간다. 개봉 당시부터 20분 가까이 잘려나가 불완전한 상태로 상영되곤 했던 이 작품에서, 여전히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틈만 나면 약간의 구름으로 대강 위장한 채 당당히 얼굴을 내밀곤 했던 모노크롬의 표면이다. 우리가 이 영화를 특별히 여기는 것은 저 ‘개척자’들 주변을 상시 감돌고 있는 서사적 위협을 시각적 유혹과 하나로 묶는 그 방식 때문이다. 여기서 인디언들은 이 위협과 유혹을 동시에 품은 존재들이며, 그럼으로써 비할 데 없이 탁월한 영화적 형상이 된다. 어느 순간 문득 우리는, 뱃전에 앉아 강가의 인디언들을 바라보고 있는 선원들의 모습이 언제라도 무의 얼굴로 화할 태세를 갖춘 스크린을 대면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참으로 흡사하다는 것(그림 3)을 깨닫고, 흠칫 놀라며 몸서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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