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3

구르는 공의 감촉: 박솔뫼의 『우리의 사람들』(창비, 2021)


※ 아래는 계간 《문학과사회》 2021년 여름호(134호)에 실렸던 것이다.




박솔뫼의 인물들도 무언가를 하기는 한다. 주로 먹고 마시고 자고 걷고 보고, 종종 생각한다. 다만 그가 “뭔가를 했던 사람들”(p. 219)이라고 부르는 ‘어른들’에게 이러한 ‘함’은 행위보다는 무위에 가까운 것으로 비치겠지만 말이다. 어정버정하는 자식을 향해 “넌 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러고 사니!”라고 말하는 부모의 시선이 꼭 그런 것이겠다. 그럼 박솔뫼의 인물이라면 슬쩍 몸을 뒤틀고 꼼지락대며 잠시 “무얼 하나 무얼 하나 벽에 대고 혼잣말을 하”(p. 17)다가는 “실제 해도 좋지만 상상으로 더 좋은 [……] 여행과 자전거와 수영”(p. 158) 같은 것을 떠올리다가 이내 잠들어 버릴 것 같다. 그러다 잠에서 깨면 “학교들을 다니고 회사를 다니고 돈을 벌고 세금을 내고 할 것들을 다한 내가 어딘가 어느 순간을 눌러놓고 빼먹은 것처럼 아직 덜 자란 사람처럼 느껴”(p. 186)지는 이유를 생각하다가 또 잠들어 버릴 것만 같다.

무위로서의 행위 또는 행위로서의 무위가 반복되는 박솔뫼의 소설적 세계를 긍정하는 세 가지 익숙한 방식이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실체화된 무(無)를 문학적 행위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이들의 견해에 기대는 방식이다. ‘아무것도 안 함(do-nothing)’을 ‘무를 함’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무의 궤적을 그리며 움직이는 언어를 충실히 좇는 일에 문학의 본질이 있다고 본다. 이런 이들이라면 표제작 「우리의 사람들」에서 ‘네시’라는 단어가 “새벽 네시”(p. 27)처럼 시간을 가리키다가 (몇 페이지 건너) “새벽에 네시를 본 이야기”(p. 32)처럼 전설의 괴수를 가리키는 식으로 슬며시 전이되는 것을 예사롭게 보아 넘기지 않을 터이다. 더불어 “나의 직장 동료 하나”(p. 27)라는 표현에서 ‘하나’가 사람의 이름인지 그저 하나의 기수인지가 불분명해지는 순간도 놓치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박솔뫼는 말라르메가 아니며 『우리의 사람들』은 『이지튀르』가 아니다. 무엇보다 무라고 하는 전혀 촉각적이지 않은 관념은 박솔뫼의 흔들흔들 찰랑이는 언어들 틈에서 기껏해야 그저 어색한 자리밖에는 얻지 못한다. 언제나 “말을 손으로 만져보는 느낌”(p. 78)을 궁금해하며 미래처럼 막연한 시간조차도 “손으로 만지고 반복한 미래는 어떤 것이었을지 다시 생각”(p. 179)하는 작가의 언어들 틈에서 말이다. 대신 우리는 “공을 던지세요”(p. 72)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이 공은 무와 관련된 관념으로서의 공(空)이기 이전에 일단 손에 잡아 쥐고 던질 수 있는 공이어야 한다.

어쩐지 조금 한가한 놀이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 공은, 확실히 박솔뫼의 소설적 세계에 잘 어울리는 사물이다. 이는 제목부터 직접 공놀이를 언급하고 있는 「농구하는 사람」 같은 단편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무를 함’이라는 추상적 행위/무위를 감각적으로 대체하는 ‘공놀이하기’는 사실 박솔뫼의 소설을 움직이고 또 그 속에서 움직이는 어떤 보편적인 은유적 형상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원환(圓環)의 유희다. 농구나 야구나 테니스 같은 놀이에 쓰이는 공, 인물이 타기도 하고 그 곁을 스쳐지나기도 하는 자전거의 바퀴, 결국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야 하는 산책이나 출장이나 휴가의 경로 등이 얼른 떠오르지만, 『우리의 사람들』에서 원환의 유희는 그저 소재적인 수준에 그치지 않으며 구조적인 반복을 촉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늦여름의 부산은 아주 많은 여러번의 수만큼 계속되었으면 좋겠다”(p. 63)는 바람에 걸맞게 부산 연작이라 해도 좋을 단편들로 꾸려진 이 소설집에서는, “숲을 헤매는 사람들은 [……] 여러개의 같은 장면들을 반복하면서”(p. 34) 걷고 또 걸으며, 이미 죽은 열두명의 여자들이 강간 살해범을 거듭 죽이는 등의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여기는 “영원하지 않지만 때때로 놀랄 정도로 반복되는 일”(p. 223)들의 세계다.

이 반복의 원환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박솔뫼의 소설적 세계를 긍정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진다. 그의 소설에서는 종종 실재적인 것과 허구적인 것이 같은 층위에 자리하고, 현실 세계와 가능 세계가 동일한 평면에서 교호하며, “어떤 시간들은 뭉쳐지고 합해지고 늘어나고 누워 있고 미래는 꼭 다음에 일어날 것이 아니고 과거는 꼭 지난 시간은 아니”(pp. 176~177)다. 이러한 문학적 시공을 유토피아적 영원으로 간주하면서 거기서 이루어지는 어쩐지 좀 나른하기도 하고 책임이나 의무로부터 방면된 듯한 영구 운동을 긍정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여기에 세대론적 또는 시대론적 해석을 거칠게 덧붙이면 박솔뫼 소설의 감수성은 돌연 ‘힐링문화’의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까지 비치게 된다. 말하자면 이는 그의 소설을 홍상수적 구조와 감각으로 재구성한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상상만으로도 어질어질해지는 꺼림직한 조합이지만─를 보듯 읽는 셈인데, 과연 이런 무시간적 혹은 탈시간적 유토피아가 박솔뫼의 문학적 시공에 부합하는가, 라는 물음은 이미 그가 자신에게 물은 물음이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천국의 시간을 반복해보고” 이내 “그 시간은 미래임에도 미래처럼 여겨지지 않았고 마치 슬픈 과거 같았다”(p. 183)고 토로한다.

반복의 원환이 가로지르는 박솔뫼의 문학적 시공을 굳이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간주하려면, 니콜라 푸생의 그림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의 낙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나’란 바로 죽음이다. 박솔뫼의 유토피아는 나른한 영원의 시간을 얼룩지게 하는 크고 작은 죽음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이 죽음들 가운데는 만만찮은 역사적 무게를 지닌 것들도 있다. 일본 좌익 진영에서 벌어진 우치게바, 제주 4・3항쟁, 재일조선인 권희로의 야쿠자 살인과 인질극, 나가야마 노리오의 연쇄 살인 행각, 광주민주화운동 및 그와 관련된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등등. 하지만 이러한 죽음들의 무게로 인해 박솔뫼 소설의 시공이 움푹 파이는 법은 결코 없다. 박솔뫼는 이러한 역사적 죽음을 「이미 죽은 열두명의 여자들과」의 권태로운 죽음이나 「영화를 보다가 극장을 사버림」의 여릿한 죽음 같은 허구적 죽음들과 무람없이 같은 평면에 두는 소설가다. 이 죽음들은 「펄럭이는 종이 스기마쓰 성서」의 화자가 떠올리는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세운 집들이 있는 부산 아미동의 비석들처럼 너나없이 비인칭적인 죽음들이 되며 그럼으로써 문학적 ‘산책’의 무대가 된다. 박솔뫼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매일 산책 연습’이라는 문학적 운동을 반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무대가 된다.

이 산책을 다시 역사적으로 의미화함으로써 박솔뫼의 소설적 세계를 긍정하는 방식도 있다. 즉 이러한 산책은 무언가를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기에 현재에 (증언)할 수도 없고 미래에 (약속)할 수도 없는 세대의 ‘그나마’ 윤리적인 행위/무위라고 보는 것이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는 “뭔가를 했던”, 아니 그보다는 무언가를 했다고 자부하는 어른들이 선호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덜 자란 사람”들이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과거에 관심을 두고 부지런히 익혀 불완전하나마 증언의 말들을 미래에 전해주기를 바란다. 어른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박솔뫼는 정지돈이 아니며 『우리의 사람들』은 『모든 것은 영원했다』가 아니다. 정지돈이 무엇보다 읽고 듣는 일에 몰두하는 작가라면, 박솔뫼는 무엇보다 보고 만지는 일에 끌리는 작가다. (물론, 둘은 모두 작가답게 부지런히 쓴다.) 정지돈의 소설이 작가가 읽고 들은 전설들을 엮어 세운 일종의 문학적 비석이라면, 박솔뫼의 소설은 주인 모를 비석들이 누운 자리를 배회하며 그것들을 보고 만지는 행위/무위를 반복하는 문학적 발라드(balade)─산책이자 유람이라는 뜻에서, 혹은 들뢰즈적 용법으로─이다. 하지만 박솔뫼는 자신의 산책이 불완전하고 파편적인 방식으로 역사적인 것과 만나는 움직임이라는 해석에는 분명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광주에 가면 “1980년 5월의 기억을 길을 걷는 중간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흔적이라는 말과 증거, 자취라는 말을 생각해보았지만 모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p. 205)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박솔뫼다운 공놀이란 어떤 것일까? 이러한 공놀이가 곧 역사이자 이야기가 되고 “농구하는 사람과도 최인훈의 이야기는 할 수 있”(p. 77)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광장으로 표상된 역사라는 “공을 더듬기만 하면 되는 건가. 더듬으며 이런 감촉이라고 이런 크기라고 생각해보면 될까”(p. 72)? 

이쯤에서 우리는 박솔뫼의 네번째 소설집 『우리의 사람들』이 그의 두번째 소설집 『겨울의 눈빛』 말미에 수록된 「9월 도쿄에서」라는 작가 노트를 은밀히 서문으로 삼고 있는 책이라는 점을 떠올려야 한다. 박솔뫼가 이 작가 노트를 쓴 것은 2015년 후반이고 『겨울의 눈빛』이 출간된 것은 2017년 9월이다. 이상하게도 그 2년 사이에 발표한 단편들은 『겨울의 눈빛』에 하나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한편으로, 『우리의 사람들』에 수록된 단편들은 모두 「9월 도쿄에서」를 쓰고 나서 2016년 이후에 발표한 것들이다. 「9월 도쿄에서」는 1970년대에 우치게바로 동료들을 잃은 뒤 텐트 연극 운동을 지속해온 연극인 사쿠라이 다이조와의 만남, 그리고 영화인이자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합류한 ‘테러리스트’였던 아다치 마사오와의 조우를 서술하고 있는 에세이다. 『우리의 사람들』에 실린 단편들 가운데 「우리의 사람들」과 「농구하는 사람」은 이 에세이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이 가운데 「우리의 사람들」은 2016년에 발표한 것인데도 『겨울의 눈빛』에는 수록되지 않았으며 대신 이번 소설집의 표제작이 되고 있다.

소설집에 한데 모을 단편들을 고를 때 박솔뫼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을지를 추정하는 일은 삼가기로 하자. 아마 그건 박솔뫼 자신도 모르는 것이거나 우리에게 말해준다 해도 이미 그건 사실이 아닐 것이다. 2015년 도쿄에서의 만남과 조우가 작가로서의 그에게 어떤 계기 혹은 위기가 되었으리라는 추정은 더더욱 삼가기로 하자. 그건 심리적 전기의 영역에 속하는 것일 뿐 박솔뫼 소설의 비평적 이해와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9월 도쿄에서」가 중요한 텍스트인 이유는 공의 감촉이 곧 역사이자 이야기가 될 수도 있으리라는 대담하고 상쾌한 문학적 믿음이 거기서 처음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는 세간의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한 일을 한 어른임에도 “‘나는 이런 것을 했다’라는 식의 느낌이 거의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아다치 마사오 같은 이를 보며 떠올린 믿음일 수도 있다. 여기서 박솔뫼는 아직 공을 떠올리고 있지는 않다. 게다가 여전히 어른들의 표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그것을 “죽은 자들만이 본 것”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정신적인 것 막연한 것이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은 [……] 눈에 보이고 우리가 잡고 던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할 때 이미 그는 공을 떠올리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우리의 사람들』은 단지 공을 보고 잡고 만지고 던지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공의 감촉은 그것을 굴리고 주고받기도 하는 가운데 느껴야 함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그런데 구르는 공의 감촉을 느끼려면 공을 따라 부지런히 함께 움직이거나 공을 부지런히 주고받는 수밖에 없다. 즉 “일백년 전 국경에 있던 사람들은 왜 그곳에 있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거기에 아무런 어색함이 없도록 흐르듯이 흘러가는 골짜기에 화장실용 휴지를 굴리는 것처럼 그게 통통통 소리를 내며 흰 길을 만드는 것처럼 하는 것”(p. 25)이고 “야구공을 주고받으며 야구공의 감촉을 처음으로 배우며 이런 것이었다고 익히며 농구공 이야기를 하”(p. 77)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박솔뫼의 역사-이야기가 문학적 발라드의 형태를 띠게 되는 이유다. 물론 박솔뫼의 소설 쓰기는 결코 일방향적이지 않아서 산책의 소설과 더불어 진행 중인 잠의 소설─세번째 소설집 『사랑하는 개』에 실린 「여름의 끝으로」처럼─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절대적 무위라고밖에 여겨지지 않는 잠이 행위가 될 수 있을까? 지금은 이에 대한 생각은 잠시 미뤄두고 『우리의 사람들』과 2개월 간격을 두고 출간된 박솔뫼의 일곱번째 장편소설을 들고 입으로 “미래 산책 연습”이라는 제목을 웅얼대며 구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