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28

가을날


1. 보고 싶은 영화들 (8.28)

무엇보다, 테렌스 맬릭의 다섯 번째 장편 <생명의 나무 The Tree of Life>를 영화관에서 보고 싶다. (그의 전작 <신세계 The New World>(2005)는 끝내 국내 개봉되지 않았던 탓에 결국 미국에서 출시된 DVD를 구입해 보아야 했다.)

곧 개막할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된 작품들 가운데 사실 개인적으로 정말 궁금한 작품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Tinker, Tailer, Soldier, Spy>인데, 그건 이 영화의 감독이 <렛미인 Let the Right One In>(2008)을 연출한 토마스 알프레드슨이어서라기보다는 - <렛미인>이 영국평단에서 굉장한 호평을 받았던 건 알고 있지만 더할 나위 없이 '영국적인' 원작의 연출을 스웨덴 감독에게 맡긴 건 아직도 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다 - 내가 정말 좋아하는 현대소설가 가운데 하나인 존 르카레(John Le Carre)의 원작이 영화화된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다. 주인공인 은퇴한 스파이 조지 스마일리(영화판에선 게리 올드먼이 맡아 연기했다)가 파헤치는 주요 사건은 그가 조사하는 서류와 증인들의 회고를 통해 간접적으로 묘사될 뿐인, 사실상 '실내극'에 가까운 이 독특한 스파이물이 영화로 어떻게 옮겨졌을까? 게다가 이 영화판은 르카레조차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1979년 TV시리즈 버전(여기서 스마일리역은 명배우 알렉 기네스가 맡았다)과도 경쟁해야 한다. 이 TV판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많은 이들이 존 르카레 원작을 각색한 영화와 TV물을 통틀어 최고로 꼽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에만 국한해 말하자면, 르카레 원작 가운데 최초로 영화화된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마틴 리트 감독, 1965)가 여전히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제국의 경영"에 봉사하도록 훈련받았던 이들이 정작 그 제국이 사라져갈 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바로 그 "제국의 경영"이라는 현실로부터 탄생한 스파이장르의 구조에 대한 자기반영적 성찰과 겹쳐 놓은 르카레의 원작은,  냉전의 산물이면서 또한 역으로 냉전체제를 지탱하기도 한 시대적 정념이 다름아닌 환멸(disillusion)이었음을 소름끼치게 보여준다. (한편 냉전체제가 낳은 독특한 '직업'을 다룬 최근의 영화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카를로스 Carlos>(2010) -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에 이어 어제 서울아트시네마에서도 상영되었다 - 였다. 뭐랄까... 벤처사업으로서의 테러리즘? 하기야 테러리즘만큼이나 벤처(venture)라는 단어에 꼭 어울리는 것이 또 있을까? 아사야스의 영화 역시 환멸에 대한 앞서의 언급을 공유한다.)

그리고 첫 공개한 트레일러만으로 이미 기대감을 한껏 높여놓은 왕가위의 신작 <일대종사 The Grand Master>를 (가능하면 올해 안에) 보고 싶다.


왕가위의 <일대종사 The Grand Master> 트레일러


2. 주말의 영화 (8.29)

김한민의 <최종병기 활(活)>을 보는 것으로 일요일 저녁은 아깝게 날아갔다. 이 영화에 국내 평단이 비교적 호의적인 평가를 내린 건 상반기 내내 별 가망없는 한국영화들이 그들의 눈높이를 지독하게 낮추어 놓았다는 걸 짐작케 할 뿐이다. 액션장면의 둔탁한 연출은 어떤 평자가 쓴 "리듬감과 막힘 없는 속도감"이란 표현이 도무지 근거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 뿐이며 - 리듬감과 속도감은 이 영화가 지닌 미덕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미덕이다 - 그 이외의 장면들은 후진 TV 사극 수준의 연출력에 기대고 있다. 게다가 후반부 호랑이가 등장해 주인공을 구해 내는 장면에 이르면 시나리오의 논리 따윈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그 실험적인 과감함(?)에 저절로 입이 벌어질 정도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으로 돌아온 이들에 관해 언급하는 결말의 자막은 끝까지 실소를 참았던 이들에게 날리는 그야말로 "최종병기"다. 나 역시 거기서 결국 사(死)했다.)  


3. Shooting Kim Ki-Duk : Arirang (8.30)

사실 나는 <활>(2006) 이후의 김기덕 영화들에 대해선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실제로 <활> 이후의 김기덕 영화들에 대해선 공식적으로 어떤 글도 써 본 일이 없다.) 김기덕이 예술적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는 동안 한국평단은 오도된 작가주의 비평의 나쁜 실례들을 양산하기 바빴으며 정작 그의 영화엔 존재하지도 않는 철학을 설파하기에 급급했다. <활>은 김기덕 영화로서는 처음으로 칸영화제에 초청되었다는 점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정작 이 기막히게 한심한 영화를 보고 나니 "올해 칸영화제의 조롱거리 [...] 칸은 마침 김기덕이 바닥을 쳤을 때 비로소 그의 영화를 선택했다"며 신랄하게 비웃은 <필름 코멘트 Film Comment> 편집장 개빈 스미스의 말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 나는 김기덕의 신작 <아리랑>(2011)을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활>보다도 더한 실망을 안겨준 <비몽>(2008)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러다 세 달 전 캐나다 영화잡지 <시네마 스코프 Cinema Scope>에 실린 편집장 마크 페란슨의 글을 읽게 되었다. 올해 칸영화제 리포트 형식의 3페이지짜리 글인데 전체의 1/4 가량이 <아리랑>에 대한 언급에 할애되어 있었다. (페란슨이 매우 전투적인 시네필일 뿐 아니라 때론 과도하다 싶을 만큼 독선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는 평론가라는 점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리랑> 평가에는 거의 폭력적으로 느껴질 만큼 표독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가령 그는 <아리랑>에 관한 절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건 영화가 아니다. [이걸 보는 건] 시간낭비일 뿐이며, 이런 영화를 상영하는 곳은 영화제라 불릴 자격도 없다." 문득 <아리랑>이 궁금해졌다.

<아리랑>을 보고 난 지금,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건 증오와 회한을 가장으로 둘러쓰긴 했지만 실은 '인정을 향한 욕망'으로 가득한 시각적 잡동사니일 뿐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영화 속에서 김기덕 자신이 제작, 사용하는 에스프레소 머신이나 사제 권총처럼 - 심지어 이들 잡동사니를 '손수' 제작할 수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 <아리랑>은 그 홀로 Canon Mark II 디지털카메라 한 대만을 가지고도 영화를 만들 수 있음을 과시하는 완력의 영화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고지전>의 장훈 감독에 대한 비난을 비롯해 이런저런 한국영화의 현실에 대한 비난과 삶에 대한 철학(?)이 섞여들지만 사실 그것들은 여러 언론에서 과장한 바와는 달리 부차적인 것들(인 데다 "한국사회 50대 남성의 사회인식조사"같은 연구의 샘플자료로나 활용될 수 있을 뿐인 장황한 헛소리들)일 뿐이고, <아리랑>의 핵심에 놓인 것은 애타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 스스로 고백하듯 일본이나 중국감독들은 받았는데 아직 한국감독들은 받지 못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것 따위를 포함해서 - 그리고 해병대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하는 한 기이한 예술가의 절규다. 특히 해외의 국제영화제들과 그를 사랑해 주었던 외국의 국가들을 향해 열렬한 애정을 표하는 부분은 참기 힘들 만큼 불편하다. 물론 우리는 그처럼 궁지에 몰린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애정을 갖고 다가갈 수는 있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 그리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 얼마 전 경향신문에 기고한 정성일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일부러 구분하지 않으려 한다. <아리랑>이 "진정성의 반격"이라고? 정성일 자신조차 믿지 않는 것을 마치 그런 것처럼 말하려다 보니 - 말하자면 김기덕에 대한 지지를 자신의 영화적 안목에 대한 믿음과 본의 아니게 연계시켜버린 그간의 행보에서 기인한 자가당착 - 그의 글엔 구멍들이 넘쳐난다. "진정성에 대한 냉소주의는 지식인들 카페에서 종종 마주치는 잘난 체하는 에스프레소만큼이나 만연되어 있다"고 한 그의 말은, 움막집 텐트 안에서의 '고행'(?) 중에도 기어이 사제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를 내려 마시는 김기덕에게 고스란히 되돌려 줘야 하는 것 아닐까?  교양을 과시하듯 파울로 코엘료의 <브리다>를 꺼내 읽는 장면만큼이나 뜬금없는 잘난 체가 또 있을까? 김기덕이 "수도를 하듯" 겨울을 견뎌냈다고 전하다가 불현듯 그가 "이따금 먹을 것을 사기 위해 동네에 내려갔으며 재빨리 차를 끌고 다시 자기 집으로 되돌아왔다"고 적는 데선 - 여기서 '재빨리'란 단어는 '차를 끌고'  다닐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겨우내 수도를 행한 김기덕의 '진정성'을 강조하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삽입한 표현임이 분명하다 - 할 말을 잃게 된다. 이쯤 되면 다소 긴 기간 동안 이루어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김기덕의 '수도'는 <1박2일> 연기자들의 '야생체험'보다도 럭셔리한 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공권력에 의해 영화제작을 금지당한 자파르 파나히와는 달리, 김기덕의 영화작업 중단은 꽤나 럭셔리한 것이라고, 마크 페란슨은 말한다.)

여기엔 증오나 분노가 아니라 무리를 잃은 골목대장의 투정이 있다. 그는 성내는 이들의 표정을 배워 그것으로 투정을 위장한다. 김기덕 자신의 말을 따르자면, 진정 '악한' 자만이 그 위장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아리랑>을 보고 난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덕을 지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리랑>은 결코 김기덕의 진정어린 고백이거나 자기반영적 작업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2011-08-03

크리스천 마클레이의 <시계>(2010)

(이번 달에 창간호가 나올 예정인 잡지 <에프 F>에 실을 생각으로 크리스천 마클레이의 비디오 설치작품 <시계>(2010)에 관해 글을 쓰고 있었는데 원고지 수십매 정도로는 도저히 다룰 수 없는 주제라는 걸 깨닫고는 내친 김에 한 번 긴 글을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이달 창간호에 실릴 글은 (지금 계획한 바대로라면 "뤼미에르 은하의 가장자리에서"라는 제목이 붙여질) 전체 글의 약 1/10 정도, 전체 5부 가운데 1부의 첫 번째 파트에 해당하는 내용만을 담게 되었는데, 9월이 지나고 나면 내년 영화제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하는 처지라 언제쯤 마무리하게 될 지는 알 수 없다.  이 첫 번째 파트는 오늘날의 비디오 설치작품들 가운데 특별히 영화와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가공할 상영시간을 지니고 있는 작품들을 '시간의 건축술'이란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데, 이 아이디어는 발터 베냐민의 유명한 논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정확히는 3판의 15절)에서 얻은 것이다. 여기서 베냐민은 건축을 정신분산(distraction) 속에서 집단적 방식으로 수용이 이루어지는 예술의 원형으로 간주하면서 '정신분산 속의 수용'이라고 하는 예술경험의 새로운 양상은 영화 속에서 바야흐로 그 고유의 연습수단을 발견한다고 보고 있다. 물론 영화는 (혹은 적어도 영화비평의 주류적 흐름은) 베냐민이 희망한 대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이에 나는 오늘날 영화와 미술이 상호작용하는 특별한 방식들을 주의깊게 살펴보는 작업을 통해 베냐민의 논의를 감히 '부활'시켜보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한편으로 내 글은 시네필리아(cinephilia)라는 특정한 현상을 바로 그 시네필적인 입장에서 비판해보고자 하는 시도일 수도 있다.

여하간 <에프 F>에 실을 글을 마무리하고 나서, <씨네 21>에 2주에 한 번씩 기고하고 있는 "시네마나우" 칼럼을 위해, <에프 F> 원고의 서문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을 -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 짧은 글을 하나 썼다. 아래의 글은 <씨네 21> 813호(2011.7.19~26)에 게재되었던 것을 옮긴 것이다. '위기의 아름다움'이란 제목은 편집자가 붙인 것이다.)



위기의 아름다움


영상설치미술 혹은 비디오아트가 오늘날 미술계의 주요 흐름으로 자리잡은 이후, 이들과 영화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음을 논하는 것은 벌써 진부한 일로 여겨질 정도다. 두 영역을 오가며 작업하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음은 분명 주목할 만한 현상이며, 이를 반영하듯 로테르담, 베를린 그리고 토론토영화제 등은 몇년 전부터 상당한 규모의 전시프로그램을 영화제 기간 동안 마련해왔다. 미술계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만든 사뭇 영화적인 ‘작품’이 영화제에 공식 초청되어 영화관에서 상영된다거나 영화감독들이 만든 영상설치물이 (때론 그들의 영화 자체가) 비엔날레에 초청되고 미술관에서 전시되는 것도 이젠 흔한 일이 되었다. 가령 <24시간 사이코 24 Hour Psycho>(1993)의 더글러스 고든이 만든 <지단: 21세기의 초상 Zidane : A 21st Century Portrait>(2006)이나 <크리매스터 Cremaster>(1995~2002) 연작의 매튜 바니가 만든 <구속의 드로잉 9 Drawing Restraint 9>(2005) 등이 칸과 베니스에서 상영되며 관심을 모았는가 하면 역으로 장 뤽 고다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페드로 코스타, 샹탈 애커만 같은 영화감독들은 전시프로그램을 위한 작업에 임하기도 했다(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런 식의 ‘횡단’이 꼭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어서, 미술계에선 상당한 주목을 받았던 스위스 작가 피필로티 리스트의 장편영화 데뷔작 <페퍼민타 Peperminta>(2009)처럼 재앙에 가까운 결과물이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멀티 플랫폼 프로젝트 <프리미티브 Primitive>(2009)의 대미를 이루는 장편영화 <엉클 분미 Uncle Boonmee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2010)에 칸영화제가 황금종려상을 수여한 것은 이와 같은 동시대적 경향을 영화계가 온전히 끌어안았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사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올해 베니스비엔날레는 3천여편의 영화에서 시계가 보이거나 시간이 암시된 장면들을 발췌해 편집한 크리스천 마클레이의 24시간짜리 싱글채널 비디오작품 <시계>(2010)에 황금사자상을 안겨주었다.

 크리스천 마클레이(Christian Marclay)의 <시계 The Clock>(2010)

이러한 현상을 두고 안일하게 경계의 소멸 운운하거나 이른바 ‘무빙-이미지’의 가능한 양상들에 대해 논하다보면 기원의 탐색(“이것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이나 무용한 예언(“이것은 미래의 ~다”)으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영화와 미술 두 영역이 만나 새로운 미학이 창조되고 있다고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개의 위기가 만나 격렬한 소용돌이를 이루는 광경으로서 이 모든 것을 바라봐야 한다. 뒤샹 이후의 현대미술이 끊임없는 위기의 생성과 극복의 과정으로서 진행되어왔고, 20세기의 예술인 영화는 “그 탄생의 순간부터 붕괴 전야(前夜)에 있었고 끊임없이 붕괴 전야가 생의 기저에 있다는 자각의 탐구를 스스로의 역사의 핵으로 삼아 왔다”(하스미 시게히코, <영화붕괴전야>)면 오늘날 영화와 미술간의 만남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다른 위기의 힘을 빌리는 기묘한 모양새를 띠고 있다 하겠다(영화광들과 예술영화관 경영주들은 “영화는 극장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 하는 것”이라는 당위로 맞서려 들지 모르지만 이는 관람이 이루어지는 어떤 공간과 시간을 특권적으로 낭만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공허하고, 그런 까닭에 위기를 사유하기엔 무력하다). 마클레이의 <시계>는 위기의 소용돌이로 이루어진 기념비적 작품이다. 개념적이고 담론적인 현대미술과 순수영화적 형식(서스펜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위기의 징후들이지만 <시계>에서 각각의 위기가 다른 위기를 지탱하며 곡예를 부리는 광경은 정말이지 경이롭기 짝이 없다. 제목 그대로 하나의 시계처럼 기능하는 이 작품은 누군가의 말처럼 24시간 동안의 카운트다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카운트다운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상승일까 아니면 그저 제로(0)일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