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0

희망


"희망 없이 말하는 것보다는 침묵하는 편이 낫다. 희망 없이 수다를 떠는 데서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냉소주의자의 태도다. 다만 희망을 낙관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낙관이란 지금 처해있는 상황을 둘러싼 요인들로 미루어 볼 때 얼마간 바람직한 미래가 가능하다고 진단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주식시장이 낙관적이라거나 부동산시장이 안정화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경제전문가의 발언 같은 것을 떠올려 보라. 희망은 여건에 비추어 미래를 낙관하는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가능성의 조건 자체를 응시하는 일이다. 희망은 낙관이라고 하는 타협을 용인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긍정하는 것이다. 주식시장이나 부동산시장에 대한 전망을 내놓기보다는 그것들을 없애버리자고 요구하는 것이 희망이다."

이것은 올해 단행본으로 출간할 요량으로 지난 여름부터 쓰고 있던, 이번 겨울에는 꼭 마무리하려 하는 글의 첫 문단이다. 집필이 지연되는 바람에 결국 출간은 늦어지게 되었다. 사전 광고라도 하듯 온전히 마무리하지 못한 원고의 일부를 온라인에 토막토막 공개하는 일은 삼가야 하겠지만, 2019년이 가기 전에 (지난 10년 간의 영화 베스트 목록 같은 것을 꼽기보다는) 일단 이 부분만은 어떤 식으로건 미리 꺼내놓고 싶었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요즘 들어 영화나 영상작품에 대한 비평을 읽다가 피로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가 처음으로 공식적인 지면에 영화평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1년(21세기의 첫 해)인데,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작품에 대한 경험과 풍부한 문헌 지식으로 무장한 글들이 도처에서 쏟아져나오고 있다. 이는 그 자체로 환영할 만한 일이며, 개인적으로는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가능한 이런저런 글들을 찾아 읽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데 정작 글들을 읽다 보면 전망과 조망과 관망 사이 어디선가 진동할 뿐 어떤 희망의 이념도 감지할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희망의 이념 바깥에서 움직이는 비평이란 있을 수 없고, 어떤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긍정은 물론이고 비판조차도 희망이라는 준거를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는 법인데도 말이다.




지난 달, 부산 영화의 전당이 기획한 시네마테크 총서의 일환으로 더들리 앤드류의 『앙드레 바쟁』(임재철 옮김, 이모션북스)이 발간되었다. 1978년에 출간(2013년에 개정판이 출간)되어 이제는 고전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에 대해 무성의하게 짧은 찬사를 늘어놓는 것은 무례한 일이겠다. 이 전기의 주인공인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여기서 더들리 앤드류가 인용하고 있는 세르주 다네의 말은 여러모로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다네는 주장하기를, "나쁜 영화작가는 아무런 아이디어가 없으며, 좋은 영화작가는 너무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위대한 영화작가는 단 하나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 단 하나의 아이디어를 갖는다는 것, "이것은 그로 하여금 항상 변화무쌍하고 흥미로운 풍경을 지날 때 제대로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준다." 다네는 이러한 진술이 비평가에게도 마찬가지로 타당하며, 앙드레 바쟁은 (1943년에서 1958년 사이에) 예외적으로 그러한 인물이었다고 지적한다. 나는 여기서 다네가 말하고 있는, 영화작가나 비평가의 길을 인도하는 '단 하나의 아이디어'을 '희망'으로 바꿔 이해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앙드레 바쟁은 희망의 대가라 할 만한 인물이다. 『앙드레 바쟁』을 읽는 누구라도 이 책의 도처에서 이 사실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작년 이맘때(정확히는 2018년 12월 22일), 나는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앙드레 바쟁 탄생 100주년 기념 포럼에 참석해 일본 학자 호리 준지 씨의 발표 이후 이어진 대담에 함께 한 적이 있다. 이튿날에는 영화의 전당 시네마테크관에서 '앙드레 바쟁이 사랑한 영화들' 프로그램 가운데 한 편인 앙드레 말로의 <희망 L'espoir>(1945)을 (영화관에서는 처음으로) 보았다. 이것은 (현재 집필 중인 단행본의 작은 토픽들 가운데 하나인) '무(無)에 대한 헌신'을 영화라는 불투명한 매체의 이념(희망)으로 삼고 있는 바쟁의 태도에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그제(12월 18일) 종로3가의 인디스페이스에서 경순 감독의 신작 다큐멘터리 <애국자 게임 2: 지록위마>를 보았다.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그리고 상영 후 이어진 대담 자리에서 "점점 희망이라는 말을 덜 쓰게 된다"는 경순 감독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저 미완의 원고의 첫 문단을 서둘러 꺼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작품이 이석기 내란 선동 사건 및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의 진실을 다룬, 혹은 은폐된 진실을 파고드는 다큐멘터리로 알려진 것은 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한국사회 전반에, 심지어 이른바 '진보진영' 내부에까지 파고들어버린 하나의 태도, 즉 이념(희망)을 상상하는 데도 한계와 룰과 테두리가 있어야 함을 당연시하는 이상한 태도 - 이를테면 <지록위마>에서도 비판적으로 언급되고 있듯, "국민은 헌법 밖의 진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심상정의 말 같은 것 - 에 대해 (비록 도중에 종종 멈칫하기는 해도 여하간) 문제제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주위에 희망의 결계(結界)가 둘러쳐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석기 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은 그 결계의 존재를 드러내보인 것일 뿐 결계의 원인은 아닐 것이다. 

2020년을 맞이하기 전에,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단순하게 희망을 말하는 법부터 익힐 것을 다짐하고 또 요청해본다.





2019-12-12

예술을 둘러싼 불안


(※ 2019년 12월 20일부터 31일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제20회 졸업전시가 열린다. 지난 가을에 졸업전시회 준비팀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졸업생들이 장차 활동하게 될 '필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또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솔직한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전문사 과정에서 공부하기는 했지만 졸업논문 과정을 마치지 못해 퇴학당한 처지이고, 미술계의 일에 (특히 영상과 관련해서는) 관심을 갖고 있지만 사정에 아주 밝지는 못한 터라 잠깐 망설이기는 했지만, 여하간 솔직한 글은 쓸 수 있겠다 싶어 수락했다. 마침 졸업전시 관련해 학생들이 정성껏 제작한 도록이 집에 도착했다. 아래는 도록에 실린 내 글의 전문이다.)




“선수(選手)끼리니까 굳이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죠?”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지 일 년 남짓 되었을 무렵에 들은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던 가운데 누구에게 들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일인 것 같다. 나는 사실 그 모든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만 애써 떠올리려 하지 않으면서 이 말이 나의 마음에 남긴 얼룩만을 간직하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여하간 이 말을 듣는 순간 한없이 부끄러워졌던 것만은 사실이다. 게다가 이 부끄러움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만 순간 대책 없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어느덧 내가 당당히 그들의 일원이 되었음을 무심한 척 승인하고 있는 이 말에는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축축한 구석이 있었다. 거기에 자리한 것은 대략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특정한 영역의 제도나 관습을 숙지하고 있는 이가 휘장처럼 두르고 있는 실은 별것도 아닌 우월감이나, 그러한 제도나 관습의 빈틈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법을 알고 있는 자들끼리의 공모의식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선수끼리니까 굳이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죠?”라는 말을 듣는 순간, 대단치는 않지만 그렇다고 사소하지도 않은 무언가를 믿고 맡기는 가운데 슬며시 이루어지는 시험 내지는 입교(入敎)의식에 강제로 불려 나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호출에 분명하게 거부 의사를 표하지 않은 것에 대해 두고두고 후회하곤 했다.

요즘에도 ‘선수’라는 표현을 계속 쓰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표현이 사라진다 해서 그것이 가리키던 역장(力場)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동안 교류해왔거나 잠시나마 발을 담글 일이 있었던 각종 예술계(영화계・미술계・문학계・공연계 등등)의 ‘거주민’들 사이에서 이 표현이 다양하게 변형되고 변주되어 반복되는 것을 보아 왔다. 부정적인 것의 부정성을 확인하기 위해 굳이 부정적인 것을 한자리에 불러모을 필요는 없으므로 구태여 여기서 그 변형과 변주의 사례들을 나열하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은 누구나 쉬이 짐작 가능한 것들이리라. 

하지만 오해는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다. 나는 예술계를 좀먹는 노회(老獪)함이나 공모의식에 토대를 둔 공동체(패거리)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선수끼리니까 굳이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죠?”라는 꺼림칙한 얼룩의 말을 이 자리에서 굳이 떠올려본 것은 이 말에 모종의 방법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법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예술과 관련된 모든 일(창작・비평・기획・운영・아카이빙)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시대 예술이란 것을 정의하는 방식은 여럿일 수 있겠지만 내가 동시대 예술이란 것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방법의 무근거성(groundlessness)에 대한 자각과 이러한 자각이 초래하는 불안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동시대 예술 및 그와 결부된 활동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따금 미술이나 문학과 관련해서 쓰기도 하지만, 주로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평론가로서의 나의 경험을 두고 말하자면, 나는 ‘빼어난 촬영’이란 어떤 것인지, ‘탁월한 연기 연출’이란 어떤 것인지, ‘리드미컬한 편집’이란 어떤 것인지를 여전히 정확히 (실은 전혀) 알지 못한다. 물론 기술적으로 어떻게 처리했을 경우에 ‘선수들 사이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지는 얼마간 알고 있다. 

사실 동시대 비평의 문제는 가치판단과 관련된 어떤 유의미한 범주도 더 이상 지니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게다가 미학은 당대적 비평의 근거를 탐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문헌학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비평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식은 방법에 대한 판단의 문제를 기술에 대한 평가로 대체하거나, 경향에 대한 진단으로 대체하거나, 이런저런 동시대 이론과 작품 사이의 상동성에 대한 확인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방법은 거짓 근거들 위에 다시 자리 잡게 되며 예술적 활동을 둘러싼 동시대적 불안은 슬며시 감추어진다. 이와 더불어, 불안한 가운데 내기를 거는 심정으로 작품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유랑하는 평론가 대신 작품들을 관망하는 연구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부상하게 된다.

내가 보기에 오늘날의 미술계는 이러한 상태에 있는 비평과 가장 문제적인 방식으로 관계 맺고 있는 영역이다. 이를테면 창작자와 (유사)연구자의 ‘협업’은 흔한 일이고 더러 바람직한 사례도 있다고 보지만 ‘멘토링’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이상한 관행에 대해서는 나는 여전히 의구심을 품고 있다. ‘전시연계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꾸려지는 각종 (유사)학술행사가 이따금 전시 자체를 압도하곤 하는 현상도 신기하게 보인다. 동시대 예술인들의 임무가 서둘러 방법을 다시 세우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거짓 근거에 기대어 방법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들에 맞서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미술은 그 어떤 영역보다도 빨리 현대예술에 있어서 방법의 무근거성을 자각하고 이로 인한 불안에 정직하게 맞서 왔다. 이는 현대 및 동시대의 미술이 극도로 비평적이고 담론적인 형식을 띠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그 때문에 미술은 여타의 영역들이 동시대적 무근거성을 끊임없이 자각하게끔 하는 강력한 지표도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미술계는 연구라는 이름으로 편리하게 이루어지는 비평의 외주화(outsourcing)를 통해 자신이 짊어져 온 짐을 덜어내는 일에만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우리 눈에 비치는 것은 어느새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닮아버린 창작과 비평이, 어디선가 빌려 온 침대 위에서 서로를 ‘연구’하는 근친상간의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