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06

영화의 집을 떠나며

 

※ 이 글은 격월간으로 발행되는 사진잡지 《보스토크》 40호(2023년 7월 발행)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이 글은 2023년 6월 23일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있었던 포럼 ‘차이밍량: 영화의 여정, 느리게 걷다’에서 발표한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포럼은 《2023 부산모카 시네미디어: 영화의 기후》 전시의 일환으로 마련되었다. 


최근에 나는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에 출간된 유라이 메덴의 『스크래치와 글리치』를 흥미롭게 읽었다. ‘21세기 초반 영화의 보존 및 전시에 관한 소견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영화의 제작, 유통, 상영, 보존 등이 완전히 디지털로 이행한 지금, 필름 아카이브나 미술관은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논의가 담겨 있는 에세이집이다. 이 책의 앞부분에는 교수와 학생 사이에 실제로 오갔던 우스꽝스러운 대화 하나가 실려 있다. 교수는 커다란 스크린으로 보는 경험은 이제 구식이 되었음을 인정하면서 최근의 모든 기술적 변화를 경시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커다란 스크린으로 보는 경험도 놓치지 말라고 충고한다. 이후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진다.


학생 (어리둥절하며): 교수님, 사실 저는 지금 교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종종 두 번, 때로는 세 번씩 (교실 안에 앉아 있는 다른 학우들에게 손짓으로 동의를 구하며) 저희는 바로 그러려고 모이거든요. (양손을 들어 각각의 손에 들린 태블릿과 스마트폰을 보여 주면서) 이런 것으로 영화를 보는 습관을 깨고 대신에 커다란 스크린으로 무언가를 보려고요.

교수 (미심쩍어하며): 학생이 지금 하는 말은 믿기 힘든데요. 여러분이 커다란 스크린으로 영화를 본다고요? 언제요? 어디서요? 우리는 잘 운영되는 필름 뮤지엄이 있는 도시에서 사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데, 동시에 이곳은 매일 다른 영화를 보여주는 이 지역의 유일한 장소죠. 대부분 35mm 필름으로요! 저는 거의 매일 밤 거기에 가는데 학생을 본 적은 없어요. 사실 여러분 중 누구도 거기서 본 적이 없어요.

학생 (놀라며): 필름 뮤지엄이라고요? 무슨 필름 뮤지엄이요? 저희는 우리 집 거실에서 커다란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는데요. 아니면 제이슨네 거실에서요. 저한테는 4K 55인치짜리 QLED가 있고 제이슨도 막 LG에서 나온 새 8K OLED를 샀거든요.


이 대화를 읽고 있노라면 이런 물음이 떠오른다. 오늘날 영화의 집은 과연 어디인가? 메덴의 책을 읽고 있을 무렵 나는 영화감독 차이밍량이 최근 몇 년 동안 만든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보고 있었는데 이것들을 보면서도 똑같은 물음을 떠올렸다. 여기서 나는 차이밍량이 그간 활동해온 방식을, 그리고 그가 만든 작품들을 돌이켜보며 이 물음에 접근해보고 싶다.

21세기 들어서, 특히 2009년에 발표한 <얼굴> 이후로, 차이밍량은 영화감독보다는 아티스트에 가까운 행보를 밟아왔다. 이렇게 말하면 영화감독과 아티스트는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영화를 만들어서 그 제작비를 회수해야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감각을 갖고 작업하는 사람을 영화감독이라고 보고, 미술관이나 영화제나 비엔날레 같은 제도 및 기관의 커미션을 받아 작업하지만 딱히 작품의 제작비를 회수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필요가 없는 사람을 아티스트라고 본다.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카메라, 마이크, 조명기, 편집 프로그램 등등)나 그들이 만들어내는 무빙 이미지의 성격은 그리 다르지 않다 해도 말이다.

물론 아티스트도 작품을 팔기 위해 노력하기는 하지만 작품 하나하나마다 일정한 관객을 끌어 제작비를 회수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한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개별 작품 각각은 관객을 거의 끌어들이지 못하더라도 아티스트 자신이 일종의 ‘브랜드’로서 인지되거나 평단과 저널리즘의 주목을 받는다면 지원금이나 후원금으로 작업을 지속할 기회를 얻을 확률이 높다. 사실 오늘날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를 만드는 이들은 이런 의미에서라면 이미 영화감독보다는 아티스트에 가깝다. 그리고 차이밍량은 영화감독에서 아티스트로 느리게 이행해온 이들 가운데 가장 흥미롭고 도발적인 방식으로 21세기 영화의 상태를 가늠해보게끔 하는 작가다. 영화인들과 시네필들에게 사고의 전환을 도발적으로 요구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도발에 걸맞은 작품까지 내놓는 데서 여전히 필적할 이가 없기도 하다. 

차이밍량과 전혀 반대편에서, 즉 아티스트가 아닌 영화감독으로서 21세기 영화의 상태를 가늠해보게끔 하는 작가라면 단연 봉준호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차이밍량과 봉준호는 모두 이와 관련해 동일한 메타포에 매달리는 이들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건 바로 집이다. 가옥으로서의 집(house)과 가정으로서의 집(home)이라는 뜻을 모두 고려해서 말이다. 영화의 가족, 영화의 거처, 영화의 집이라는 것이 대체 오늘날 어떻게 가능한가? 혹은 과연 가능한가? 차이밍량과 봉준호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동일한 문제에 집착하고 있다. 1990년대 내내 꾸준히 이 문제 주변을 맴돌던 차이밍량이 폐관을 앞둔 영화관을 무대로 한 2003년 작품 <안녕, 용문객잔>에서 그것에 의식적으로 접근했다면, 봉준호는 2000년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에서 어쩌면 자기도 모르게 이 문제에 다가갔다. 함께 모여 사는 곳이지만 어디까지나 개별적이고 고립화되어 있는 거주 형식인 아파트에서 하나의 일상적 범죄를 목격하고 작은 영화적 모험에 뛰어드는 (텔레비전에 나오고 싶다는 소망을 지닌) 인물을 통해서 말이다. 



<플란다스의 개>(2001)의 오프닝(위)과 엔딩(아래) 부분에서 발췌.
스크린으로서의 창


<플란다스의 개>의 설정은 영화 보기의 메커니즘을 은유적으로 건드린 히치콕의 <이창>과도 연결될 수 있는 것이지만, 봉준호 영화의 모험에는 히치콕적 로맨스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봉준호의 인물들은 그들을 둘러싼 장소만큼이나 본질적으로 고립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봉준호는 <기생충>에서도 가족, 거처, 집이라는 문제에 접근했고 충분히 동시대 영화의 상태로 비춰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 반지하 방의 위쪽에 난 창문을 흡사 영화 스크린처럼 바라보고 사는 기택네 가족과 어쩐지 아트 갤러리를 닮은 저택에서 사는 박 사장네 가족의 대비를 통해서 말이다. 기택네 가족을 통해 구현된 영화적 형상, 장소 없이 떠도는 비천한 영화가 아트 갤러리에서 기생하는 일은 과연 어떻게, 얼마나 오래 가능할까? 

차이밍량이 1992년에 <청소년 나타>로 정식 데뷔하기 직전에 만든 중편의 제목은 ‘내게 집을 줘(給我一個家)’였다. 건설 노동자인데 정작 자기 집은 갖지 못하는 이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 차이밍량은 지난해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회고전에 맞춰 내놓은 신작 <곳>에서 그의 영화적 이력을 잠정적으로 결산하는 듯한 몸짓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의 원제는 ‘어디에(何處)’이다. 의미심장하게 울리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강요된 방랑의 시기가 지나고 나면 영화는 어디에 있을 수 있는가? 이 작품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21세기에 차이밍량이 밟아온 궤적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순전히 장편 극영화만 놓고 보면 요즘의 차이밍량은 그야말로 과작의 작가처럼 보인다. 10년 동안 발표한 것이라고는 2013년 작 <떠돌이 개>, 그리고 2020년 작 <데이즈(日子)> 두 편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청소년 나타>로 데뷔하고 나서 <얼굴>을 발표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적어도 2~3년에 한 편씩은 꼬박꼬박 장편 극영화를 만들곤 했다. 그런데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 단편영화, 그리고 VR 작업 등을 모두 고려하면 사정이 전혀 달라진다. 단순히 편수로만 따진다면, 그는 최근 10여 년 동안 스무 편이 넘는 작업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것들은 영화관보다는 주로 미술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되었다. 

특히 차이밍량이 2012년에 내놓은 <무색>, <행자>, <금강경>, <몽유> 등 네 편의 단편으로 시작된 ‘행자(行者)’ 연작─원래는 느리게 걷는 여정이라는 뜻에서 ‘만주장정(慢走長征)’ 연작이라고 불렸던─은 어느덧 아홉 번째 편인 <곳>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연작은 붉은색 법복 같은 천을 걸치고 당나라의 고승 현장으로서 등장하는 배우 이강생이 아주 느리게 어떤 장소들(홍콩, 타이페이, 쿠칭, 마르세유, 도쿄, 좡웨이, 파리 등)을 걷는 것을 롱테이크로 포착한 쇼트들로 이루어져 있다. 공연 쪽에 익숙한 이라면 브루스 나우만의 워킹 퍼포먼스를 담은 영상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걷기를 수행 중인 이강생은 오늘날 새로운 거처를 찾아 나선 영화 자체에 상응하는 형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행자 연작은 영화와 미술과 공연의 경계 지대에서 걷는 작품이다. 실제로 차이밍량과 이강생은 이 연작의 공연 버전이라 할 <현장>이라는 작품─2015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공연 시에는 ‘당나라 승려’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소요(漫不經心)>(2021)


2021년에 발표한 <소요(漫不經心)>는 행자 연작의 번외편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 연작들이 전시되고 있는 미술관을 소요하는 관람객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차이밍량이 스크린 앞에 서서 자기 작품을 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생각하기에 따라 <안녕, 용문객잔>과 밀접히 관련된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다만 <안녕, 용문객잔>의 무대가 폐관을 앞둔 영화관이었다면 <소요>의 무대는 2018년에 새로 개장한 대만 좡웨이 사구 공원의 전시관이다. 영화의 새로운 집, 그렇다고는 해도 아마 잠정적인 집, 여하간 잠시 발길을 멈추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집, 이런 집으로서의 갤러리 혹은 미술관. 행자 연작 가운데 2018년 작품인 <모래>에서 우리는 막 건설 중인 좡웨이 사구 공원의 풍경을 배회하는 이강생을 보게 된다. 전시관 건물 내부로 향하던 그의 발걸음은 이내 거기서 멈춘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우리는 언제부턴가 차이밍량이 더는 영화관을 영화의 집으로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에게 집이란 무엇인가? 밖에서 배회하다 돌아가 앉아서 기다리다 보면 가족들이 하나둘씩 귀가할 거라는 믿음을 보장해주는 장소가 바로 집이다. 영화의 집으로 간주되었던 영화관도 한때는 그런 장소였다. 일단 표를 끊고 입장하면 영화는 이미 시작한 다음일 수 있지만 기다리다 보면 다시 처음부터 볼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주는 곳 말이다. 적어도 차이밍량이 친숙하게 느끼는 영화관이란 그런 곳이다. (나는 20세기의 여러 영화관, 특히 재개봉관이라 불리던 곳들을 떠올려본다.) 행자 연작 가운데 하나로 2013년에 발표된 <행재수상(行在水上)>에서 이강생은 말레이시아 쿠칭에 있는 한 7층 건물 주변을 맴도는데, 이곳은 어린 시절 차이밍량을 돌보았던, 그리고 그에게 원초적 영화 경험을 제공한 외조부모가 살았던 곳이다. 

하지만 이런 원초적 경험과 맞닿은 영화관 풍경은 오늘날의 관객에겐 무척이나 낯선 것이다. 영화가 이미 시작했는데 입장할 수는 있지만 일단 끝나고 나면 다시 시작하길 기다릴 수는 없고 퇴장하는 출구로 나가야 한다. 처음부터 보고 싶다면 표를 다시 구입해 들어와야 한다. 그런가 하면, 예술영화전용관이나 독립영화전용관에선 한 편의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 영화가 처음부터 다시 상영되는 게 아니라 아예 다른 영화가 상영된다. 영화제에서는 심지어 영화가 일단 시작하고 나면 입장 자체가 불허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영화관들은 분명 영화관의 외양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더 이상 영화의 집은 아니다. 따라서 영화관에 붙이는 ‘아트하우스’나 ‘전당’ 같은 이름은 그저 영화산업의 허영심이나 지방자치단체의 욕망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반어적 개그에 불과한 것이 된다. 

대략 2007년 무렵부터 차이밍량은 아예 영화의 집을 미술관으로 이식하는 자못 대담한 기획에 착수한다. 특히 중요한 것이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그리고 대만의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비슷한 시기에 열린 전시다. 그는 폐관된 영화관에서 뜯어낸 극장용 의자들을 전시실에 설치하고 스크린도 갖춰 영화관처럼 만든 뒤 거기서 자신이 만든 23분짜리 단편영화 <이것은 꿈이다>를 상영했다. 2013년 작품인 <떠돌이 개>는 애초부터 영화관이 아닌 장소에서의 스크리닝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장편 극영화인데, 미술관에서 보여줄 때는 특별히 요청해 자정까지 문을 열도록 하거나 주말엔 밤샘 이벤트를 하기도 해서 관람객들이 덮을 것과 먹을 것을 들고 와 볼 수 있게끔 했다. 이렇게 볼 때 이 영화는 “영화관에서 볼 때보다 더 큰 감동”을 준다고 차이밍량은 단언한다. 물론 여기서 가리키는 것은 더는 영화의 집이 아닌 오늘날의 영화관이겠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차이밍량은 영화를 그저 미술관에 가져와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영화관을 미술관에 설치하는 것만도 아니고, 일체의 영화관 경험 자체를 미술관으로 이송하려 하고 있다고 말이다.

<소요>에 나오는 좡웨이 사구 공원의 전시관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차이밍량의 행자 연작들이 말 그대로 ‘동시 상영’되는 영화의 집으로서 등장하고 있다. 관람객은 언제라도 들어와 작품들 사이를 오가며 감상할 수 있고, 보다가 조금 지치면 쉬기도 하고, 나와서 공원을 거닐다가 원한다면 전시관에 다시 들어갈 수도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차이밍량은 영화관에서 미술관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라 영화관과 미술관을 접합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차이밍량이 생각하는 영화의 여정의 끝인 것일까?


<곳(何處)>(2022)


만일 차이밍량이 여기에서 멈췄다면 다소 아쉬웠을 터다. 행자 연작의 아홉 번째 작품인 <곳>에서 차이밍량은 서로 다른 장소에 있는 두 명의 배우를 번갈아 보여준다. 하나는 연작의 주인공인 이강생이고 다른 하나는 차이밍량의 작업에 최근 합류한 아농이다. 이 둘은 차이밍량의 장편 극영화 복귀작 <데이즈>에서 이미 나란히 등장한 바 있다. 이로써 <곳>은 행자 연작의 한 부분을 이루면서 한편으론 <데이즈>와 짝을 이룬다. <곳>에서 이강생과 아농이 처음 교차하는 장소는 바로 미술관이다. 영락없이 <현장> 공연을 떠올리게 하는 방식으로, 미술관 바닥을 덮은 커다란 백색 종이 위를 기어 다니며 아농이 목탄으로 여러 개의 선들을 그리는 가운데 붉은색 법복을 입은 이강생이 그 사이로 지나간다. 이들의 움직임이 이렇게 계속 이어지는가 싶을 때, 돌연 차이밍량은 집에서 잠들어 있는 아농의 얼굴을 보여준다. 흡사 이들의 만남이 꿈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들은 거리에서 다시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아농은 거리를 메운 인파들 사이로 느리게 걸음을 옮기는 이강생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영화의 집을 떠난 영화는 잠시 머물던 예술의 거처마저 벗어나 비로소 세계와 만난다.

2023-10-02

어둠을 기다리며
: 조너선 크레리의 『지각의 정지: 주의・스펙터클・근대문화』

 

※ 아래 글은 2023년 10월 2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조너선 크레리의 『지각의 정지: 주의・스펙터클・근대문화』의 옮긴이 후기다. 이 책을 크레리의 다른 저술들과의 연관 속에서 개괄적으로 소개하고자 쓴 것이다.




밤이 다가오자 그녀는 우리가 지배하는 시간이 끝나고 그녀의 시간이 시작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드니 디드로, 「맹인에 관한 서한에 붙임」


코로나 대유행이 한창이던 2021년 초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에세이 영화 <모든 곳에, 가득한 빛All Light, Everywhere>의 연출자인 테오 앤서니는 조너선 크레리의 『관찰자의 기술: 19세기의 시각과 근대성』이 이 작품의 근간이 된 텍스트 가운데 하나라고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초반부에는 『지각의 정지: 주의・스펙터클・근대문화』에서 크레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중요한 이론적 기획에 상응하는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여기서 제작진은 액손Axon 본사 건물을 방문해 회사 대변인과 함께 그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액손의 전신은 1991년에 설립된 테이저 인터내셔널Taser International로 비치사성 무기인 테이저건이 바로 이 회사의 제품이다. 여기서 2008년에 출시한 바디캠은 이후 미국 경찰들에게 널리 보급되었고 오늘날 이 카메라로 촬영된 범죄 진압 현장 기록 영상은 액손의 서버에 실시간으로 저장되어 (주로 경찰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법정 증거 자료로 활용되곤 한다.

어쩐지 쇼핑호스트 같은 인상을 주는 액손의 대변인은 <스타워즈>나 <스타트렉>처럼 하이테크 느낌을 냈다는 2층 통로에서 건물 내부를 둘러보며 “여기엔 비밀이 없습니다”라고 과시하듯 말한다. 그의 말마따나 이 회사의 직원들과 간부들의 업무 공간은 구획별로 나뉘어 있기는 해도 중앙 통로에서 어디나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끔 되어 있다. 그런데 이처럼 ‘투명성’을 자랑하는 이곳 3층에는 선팅 처리된 전면 유리로 둘러싸인,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블랙박스’라 불리는 구역이 있다. 이곳은 회사의 신제품을 연구개발하는 부서가 있는 공간으로 이런 건축적 구조 덕분에 모종의 비밀스러운 느낌을 띠게 된다. 게다가 이곳은 건물 내부의 여타 업무 공간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중앙부 위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쯤에서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분석한 벤담적 파놉티콘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내 우리는 파놉티콘 모델만으로 이 기묘한 건축적 배치를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액손의 블랙박스는 구조적으로는 파놉티콘 중앙의 원형감시탑에 상응하지만 기능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내부에서 근무하는 이들은 정작 감시통제의 책임자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감시통제를 위한 시설이라기보다는 무언가 비밀스러운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자아내고 과장하는 스펙터클적 장치에 가깝다. 여기서 어둠은 사실 환하게 빛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작 사원들의 업무를 관리감독하는 책임을 질 ‘C-스위트’라 불리는 최고 경영진의 자리는 블랙박스에서 내려다보이는 1층에 있다. 즉 감시자인 그들 또한 짐짓 투명한 스펙터클이 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환하게 빛나는 것은 사실 어둠이다. 여하간, 도처마다 온통 빛이다. 이를 두고 엑손의 대변인은 투명성이라고 부른다.


푸코는 스펙터클이란 다수의 인간이 소수의 대상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고대 사회에나 걸맞은 것이라고 보았다. 이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원형 경기장이다. 그는 기 드보르의 이름이나 『스펙터클의 사회』는 전혀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사회는 “스펙터클의 사회가 아니라 감시의 사회”라고 단언하며 그와 다른 입장에 선다.[1] 하지만 크레리는 일찍부터 푸코의 견해에 의문을 표하며 스펙터클과 감시를 동시에 고려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가 1989년에 발표한 「스펙터클, 주의, 대항-기억」은 주의의 기술과 스펙터클의 연관을 스케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얼마간 『지각의 정지』의 밑그림이 된 논문이다. 여기서 이미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푸코는 텔레비전을 보거나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데 그리 시간을 쏟았을 법하지 않은데, 만일 그랬더라면 텔레비전이 파놉티콘 기술을 더 완벽하게 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터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 감시스펙터클은 그가 주장하듯 서로 대립적인 용어가 아니며 한층 효과적인 규율 장치 속에서 서로 교착되는 용어다. 최근의 기술적 발전은 이러한 중첩 모델을 그야말로 확고히 했다. 감상자의 행동, 주의력, 그리고 안구 운동을 모니터하고 수량화하기 위한 첨단의 이미지 인식 기술이 내장된 텔레비전 세트가 그 예다.”[2] 

이 글을 쓸 무렵 크레리가 텔레비전에서 감지했던 감시와 스펙터클의 중첩 모델은 글로벌 인터넷 네트워크와 스마트폰 사용이 일상화된 오늘날의 우리에겐 그리 낯설지 않다. 특히 2020년부터 대략 3년 동안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 대유행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장려되고 강화되면서 보편화된 각종 ‘온택트’ 장치들을 떠올려 보면 더욱 그렇다. 이제는 학교와 기관 들에서 폭넓게 쓰이고 있는 화상 회의 플랫폼 줌의 인터페이스는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비밀스럽게 작용하며 꺼림칙한 느낌을 주었던 스펙터클적 감시의 기술을 환하게 ‘사용자 친화적’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라 하겠다. 이 플랫폼의 사용자들은 다른 이들의 얼굴을 여러 개의 분할 화면로 한꺼번에 보는 감시의 주체인 동시에 스스로의 얼굴을 다수에게 내보이는 스펙터클적 대상이 된다. 

물론 온라인 모임 중에 비디오나 오디오를 끄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감추면서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는 사용자도 적지 않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 플랫폼에선 자신의 존재를 한껏 드러내는 사용자일 수 있다. 얼굴 없는 ‘눈팅족’이 어딘가에선 어떤 집단의 얼굴을 대변하는 표상일 수 있고, 스펙터클적 선망의 얼굴이 어딘가에선 얼굴 없는 ‘어그로꾼’일 수 있으며, 익명으로 당신에게 줄기차게 모욕을 가하는 이가 온라인 모임 중엔 온화한 얼굴로 당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조용한 참여자일 수 있다. 중첩의 양상은 서로 판이할지라도 도처에서 감시와 스펙터클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중첩의 양상들을 새로 고안해내고 퍼뜨리고 확장하는 과정과 단단히 맞물려 있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내면화된 스펙터클적 감시의 형식이 바로 집중과 분산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주의(력)의 관리다. 

1999년에 출간된 야심작 『지각의 정지』에서 크레리는 19세기 후반부에 당대의 새로운 시청각적 기술들, 사회적・철학적・과학적 담론들, 그리고 예술적・문화적 실천들이 뒤얽히는 가운데 주의라는 논쟁적 개념이 어떻게 떠오르고 변형되고 재구성되었는지를 추적하는 ‘주의의 계보학’을 치밀하게 그려 보인다. 이 책의 치밀함과 집요함은 이따금 독서 중에 길을 잃게 할 정도지만, 그의 논의가 그저 역사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준에서 멈추는 법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오늘날 ‘주목 경제’ 혹은 ‘관심 경제’라고도 불리는 주의 경제attention economy의 운용을 위한 시청각적 인프라가 근대 문화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무언가에서 다른 것으로 빠르게 주의를 전환하는 일을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문화 논리의 일환”이라고 보는 크레리는 19세기 후반의 유럽이라는 시공간을 집요하게 파헤쳐 가속화된 교환과 유통으로서의 자본이 어떻게 주의집중과 주의분산이 서로 교차하는 체제가 되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이 강박적 주기 운동의 체제는 2013년에 출간된 『24/7 잠의 종말』에서 그가 “그림자 없이 불 밝혀진 24/7의 세계”라고 묘사한 초스펙터클적 세계이며, 자본주의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극단적 비활동인 잠마저도 일종의 활동 대기 상태처럼 취급하는 초감시적 세계이기도 하다.[3] 

『지각의 정지』의 한 부분에서 크레리는 푸코적 감시 사회 모델과 드보르적 스펙터클 사회 모델을 몽타주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면서, 사회를 공동체 없이 재구조화하는 자본주의적 분리의 기술로서의 스펙터클이 정치적 힘으로서의 신체를 축소하는 분산적 감시통제 권력의 기제에 상응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스펙터클은 권력의 광학이 아니라 권력의 건축이다. 이제는 하나의 단일한 기계적 기능으로 수렴되고 있는 텔레비전과 개인용 컴퓨터는 우리를 고정시키고 금 긋는striate 반反유목적 수단들이다. 선택 및 ‘상호작용성’의 환영으로 가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신체를 통제 가능한 동시에 유용한 것으로 만들면서 획정과 정주를 활용하는 주의 관리의 방법들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코로나 대유행 중인 2022년에 긴급히 출간된 정치적 팸플릿 『초토화된 지구: 디지털 시대를 넘어 탈자본주의적 세계로』에서 “소셜 미디어에 혁명적 주체는 없다”는 진단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4]


푸코와 드보르는 크레리에게 비판철학의 방법론적 모델을 제공해준 이들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24/7 잠의 종말』이나 『초토화된 지구』처럼 21세기 들어 그가 주로 내놓은 시사성을 띤 저술들만 놓고 보면 그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협을 경고하는 문명 비판적 철학자처럼 비치기도 한다. 이런 책들에서 크레리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마크 피셔나 『좌파의 길: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의 낸시 프레이저 같은 풍모를 띠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관찰자의 기술』과 『지각의 정지』처럼 20세기 말에 내놓은 저술들에서, 크레리는 푸코의 고고학적・계보학적 분석과 드보르의 고도로 비평적인 에세이 스타일이 결합된 방법으로 주로 19세기의 시각과 근대성에 천착하는 박학다식한 비정통적 역사가의 면모를 보인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전자의 책들이 그가 언제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우리 시대에 대한 시사적 개입이라면, 후자의 책들은 우리 시대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학술적 모험이다. 둘의 관계에 대한 크레리의 인식은 『관찰자의 기술』을 여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인용한 “역사적 유물론자에게 있어서 그가 몰두하는 시대는 실제로 그의 관심을 끄는 시대의 전사前史일 뿐”이라는 말을 통해 분명히 표명된 바 있다.

『관찰자의 기술』과 『지각의 정지』에서 크레리가 몰두하는 시대는 물론 19세기이지만, 전자가 19세기 초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후자는 19세기 후반에 보다 초점을 맞추어 시각과 근대성의 관계를 파헤치고 있다. 그는 시각과 관련해 19세기 초반에, 구체적으로는 1820~30년대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며, 1838년 이후 사진의 발전이나 1870년대와 1880년대의 모더니즘 회화는 이러한 변화의 귀결 내지는 반향이라고 본다. 분명 이때 크레리는 『말과 사물』에서 푸코가 상정하고 있는 ‘근대성의 문턱’에 해당하는 시기를 염두에 두고 중대한 변화들을 고찰하고 있다. 17~18세기의 고전주의 시대를 특징짓는 재현/표상의 에피스테메와 단절하며 역사성에 입각한 근대적 에피스테메가 출현하는 시기 말이다. 푸코에 따르면, 분석의 장소가 세계에 대한 재현/표상에서 유한한 인간으로 이행한 이때부터 지식은 전적으로 선험적이기보다는 “해부학적-생리학적 조건을 띠고, 점차 신체적 구조 내에서 형성”된다.[5] 

크레리는 푸코적 시대 구분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각 시대의 시각성을 나타내는 그만의 은유적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데 카메라 옵스쿠라와 입체경이 그것이다.[6] 둘의 차이를 따져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카메라 옵스쿠라는 장치 외부의 세계를 반드시 전제하지만, 입체경은 장치 내부에 장착된 미세하게 다른 두 장의 사진을 필요로 할 뿐이다. 카메라 옵스쿠라로 이곳저곳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관찰할 대상이 (또는 적어도 그 대상으로부터 나오는 빛이) 현존하는 장소로 거듭 이동하는 일이 필수적이지만, 입체경을 사용하는 관찰자는 굳이 어딘가로 이동할 필요 없이 소프트웨어에 해당하는 사진들만 바꾸면 된다. 카메라 옵스쿠라 장치 내부에 맺힌 상은 관찰자의 신체와 무관한 객관적 재현이지만, 입체경을 통해 지각되는 상은 관찰자의 좌우 두 눈에 개별적으로 입력된 시각 데이터에서 떠오르는 주관적 구성이다. 즉 후자의 ‘주관적 시각’은 철저하게 ‘육화된 시각’이며, 이것이 푸코가 “해부학적-생리학적 조건을 띠고, 점차 신체적 구조 내에서 형성”된다고 지적한 근대적 지식의 특성에 상응하는 시각임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을 터다. 카메라 옵스쿠라 모델에 어울리는 기하학적 광학에서 입체경 모델에 어울리는 생리학적 광학으로 이행하는 데 있어 선구적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색채론』의 괴테이다. 

크레리의 논의에서 주관적 시각은 이중적 의미를 띤다. 그것은 객관적 대상의 반영이나 재현이라는 구속에서 풀려난 자율적 시각으로서, 이를테면 1840년대에 윌리엄 터너가 그린 <빛과 색 (괴테의 이론)─대홍수 뒤의 아침> 같은 회화에서 극단적으로 표명되듯 “잔상을 통해서 태양은 몸에 속하게 되고 몸은 사실상 태양의 효과를 내는 원천의 자리를 맡는” 수준에까지 이른다.[7] 하지만 이 정도로 풀려난 시각을 어떻게 다시 통합할 것인지의 문제가 새로이 제기된다. 이리하여 칸트적 통각 개념은 19세기 들어 지각의 통합이라는 문제와 관련해 주의 개념을 이론적으로 재구성하고 그것의 기능을 조사하는 일련의 시도들로 전환된다. 이는 양안적 시각의 생리학적 작동 방식을 계량화・형식화하고 이러한 시각과 결부된 관찰자를 규범화함으로써 오늘날의 우리가 놓여 있는 스펙터클적 감시 사회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는 것이 크레리의 주장이다. 『지각의 정지』에서 그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19세기 후반의 화가들, 즉 마네, 쇠라, 그리고 세잔이 그린 그림들 역시 주관적 시각의 양가성 속에서 진동하고 있는 작업들로 파악된다. 이로써 크레리의 논의는 우리로 하여금 모더니즘적 ‘순수 시각’을 강조하는 전통적 해석에서 벗어나 분산적 힘과 집중적 힘이 교차하는 역동적인 주의의 장으로서 회화적 표면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이 책의 번역 작업은 주로 코로나 대유행 기간에 이루어졌다. 번역을 결심했던 2019년 당시엔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던 몇몇 사안들이 대유행 기간에 사회적으로 표면화되면서 다분히 ‘역사적’이라고 생각했던 이 책이 예전보다 훨씬 더 시의성을 띠게 된 듯한 느낌도 든다. 크레리는 『초토화된 지구』에서 소셜 미디어가 정치적 역량을 얼마나 위축시키는지를 주의력과 관련지어 진단하면서, “반전 운동이나 반제국주의 운동에 요구되는 지속적 특성을 띤 투쟁과 연대는 소셜 미디어의 확산에 수반되는 일시적이고 공허한 형식의 주의력과는 양립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8] 그렇다고 해서 크레리가 지속적 특성을 띤 집중적 주의력의 회복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그는 스펙터클이 공통의 생활세계를 정지시키지 못하도록 저항하려면 사람들끼리의 만남이 필수적이라고 역설하며 스펙터클은 “‘만남rencontre의 능력을 약화’하는 일을 체계적으로 조직화하고 그러한 능력을 사회적 환각으로, 즉 만남에 대한 거짓된 의식 내지는 ‘만남의 환상’으로 대체”한다고 한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를 거듭 떠올려 본다.[9]

나는 2000년대 초반 영화잡지 《씨네21》 공모를 통해 영화평론가로 등단해 활동하다 대학원에 입학해 영화사와 영화이론을 공부하던 중 이 책을 처음 접했다. 세미나 시간에 함께 읽은 책은 『관찰자의 기술』이었지만 오히려 나는 개인적으로 읽은 『지각의 정지』에 좀 더 끌렸다. 작품에 대한 심미적 감응 능력을 강조하며 얼마간 형식주의적 분석을 차용해 이루어지곤 했던 다분히 도락적이고 미장센 중심적인 시네필적 영화비평에 의문을 품고 있던 시기였고, 정작 작품의 세부를 들여다보는 일은 소홀히 하면서 ‘문화적 산물들’을 관통하는 이데올로기와 그것의 이론적 함의에 주목하는 강단 문화연구의 공허함에도 싫증을 내던 시기다. 어쩌면 완벽한 모델은 아닐지 몰라도 이 책은 순전히 형식주의적이지도, 역사주의적이지도, 실증주의적이지도 않으면서 비평을 빙자한 도락과 문화연구의 공허함 모두를 넘어서는 비판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크레리의 이 책은 어떤 면에서도 영화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영화와 관련해서 무척이나 흥미롭게 다가온다. 시각성 모델과 관련된 그의 논의가 정통적인 매체사 서술에 도전을 가하는 지점이 무엇보다 영화를 통해 더할 나위 없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통상 영화는 사진과 더불어 카메라 옵스쿠라의 장치적 구성을 계승한 매체로 간주된다. 그런데 외부적 세계의 현존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고, 관찰 대상을 보기 위해 이동할 필요도 없으며, 여러 개의 정지 이미지를 결합해 운동을 구성해내는 주관적 절차에 있어 분명 영화는 크레리가 제시한 입체경 모델에 더 가까운 매체처럼 보인다. 더불어, 1870년대 후반에 바그너가 바이로이트에 선보인 무대 건축의 양식, 즉 무대에서 빛나는 환영들에 관객의 주의를 붙들어두기 위해 ‘인공 어둠’[10]을 활용하는 양식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이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관람 환경의 기본값으로 삼은 것이 바로 영화다. 크레리의 이 책은 영화 장치를 구성하는 여러 자연스러워 보이는 요소들이 실은 주의의 체제 속에서 짜깁기로 구성된 것이며 역사적 특징을 띠기에 얼마든지 의문의 대상일 수 있음을 여실히 깨닫게 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지각의 정지』의 은밀한 중핵 내지는 동력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영화다. 크레리는 근대적 시각성의 20세기적 총화라 해도 좋을 영화 장치의 역사적 구성을 미심쩍은 눈으로 보면서도,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등 이후에 출현한 매체들과는 달리 영화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어떤 대안적 가능성 또한 여전히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이 책을 1907년 9월 22일 로마 콜론나 광장에서 영화를 본 경험을 기술한 프로이트의 편지에 대한 언급으로 끝내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늦여름의 저녁 공기가 상쾌한 이 광장에 모여 전혀 바그너적이지 않은 관람 환경 속에서 이따금 상영되는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단체로 휩쓸리는 군중도 아니고 고독하게 분리된 개인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불확정적인 채로 두 극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 과연 이들이 대안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느냐 여부는 단지 스크린에 비치는 영화의 성격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과 제도를 어떻게 바꿀 것이냐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다만, 어느 순간 관람을 중단하고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숙소로 돌아간 프로이트처럼, 일단 우리는 스펙터클의 빛을 보기 위한 인공 어둠이 아닌 어둠 자체가 기다리는 시공으로 일단 자리를 옮겨야 한다. 눈보다 귀를 열어두고 밤을 기다리다가, 이내 잠을 받아들이면서, 만남을 고대하면서.


번역 원고를 꼼꼼히 검토해주신 문학과지성사 편집부 및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한다. 김미경, 김선태, 김현주 등 번역 작업이 고독과 분리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도록 도와준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23년 6월 7일

유운성


[1]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 나남, 2020(번역개정 2판), pp. 394~95.

[2] Jonathan Crary, “Spectacle, Attention, Counter-Memory,” October 50 (Fall 1989), p. 105.

[3] 조너선 크레리, 『24/7 잠의 종말』, 김성호 옮김, 문학동네, 2014, p. 25.

[4] Jonathan Crary, Scorched Earth: Beyond the Digital Age to a Post-Capitalist World, Verso, 2022, p. 14.

[5] 미셸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전면 개역판), p. 437. 번역은 수정. 

[6] 크레리가 이처럼 1820~30년대에 시각성의 측면에서 중요한 단절이 있었음을 상정하고 카메라 옵스쿠라와 입체경을 각각 그 이전과 이후 시대의 시각성을 대표하는 모델로서 제시한 것은 1988년 4월 30일에 디아예술재단Dia Art Foundation의 후원으로 마련된 심포지엄에서다. 크레리 외에도 마틴 제이, 로절린드 크라우스, 노먼 브라이슨, 재클린 로즈 등이 참여한 이 심포지엄의 결과물은 핼 포스터가 책임 편집을 맡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Hal Foster ed., Vision and Visuality, Bay Press, 1988. 한국어판은 핼 포스터 엮음, 『시각과 시각성』, 최연희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2004. 

[7] 조나단 크래리, 『관찰자의 기술: 19세기의 시각과 근대성』, 임동근・오성훈 외 옮김, 문화과학사, 2001, pp. 208~10. 번역은 수정.

[8] Jonathan Crary, Scorched Earth, p. 16.

[9]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이경숙 옮김, 현실문화, 1996, p. 173. 번역은 수정.

[10] 바이로이트축제극장과 인공 어둠에 대한 논의는 다음의 책을 참고. Noam M. Elcott, Artificial Darkness: An Obscure History of Modern Art and Media,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6, pp. 49~59. 이 책에서 엘콧은 조반니 파피니Giovanni Papini가 1907년 5월 18일에 『라 스탐파La Stampa』 지에 게재한 「영화의 철학La filosofia del cinematografo」이라는 흥미로운 기사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엔 “주의가 산만해지는 것을 막는 영화관의 바그너적 어둠에 의해 인공적으로 주의분산이 차단된 […] 오직 하나의 감각, 즉 시각”이라는 구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