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16

언어와의 작별 3D (장-뤽 고다르, 2014)

(※ 아래 글은 한국영상자료원 KMDB(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서 진행한 "2014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 특집을 위해 쓴 것이다. KMDB에서 요청한 것은 개봉작과 미개봉작을 모두 고려해 2013년 10월 31일부터 2014년 10월 31일까지 제작, 공개된 영화의 베스트 10 리스트를 꼽고 그 가운데 한 편에 대한 리뷰를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보낸 리스트와 그에 대한 코멘트는 이곳(KMDB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언어와의 작별 3D



고다르의 첫 번째 장편 3D 영화 <언어와의 작별>에 대해 무언가 그럴듯한 ‘해석’을 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이 영화를 지난 10월에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단 한 번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한 번의 감상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화’라는 식의 편리한 변명은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일단 보고 나면 그것에 관해 자꾸 무엇인가 말하고, 쓰고 싶게 만든다. 우리를 언어를 향해 돌려세운다. 그렇게 다시 돌아서서 언어와 마주하고 나면 고다르적 연상의 벡터를 따라 온갖 상념이 흐르고, 갈라지고, 또 퍼져나간다. 이건 작별(‘언어여 안녕’)의 말 한가운데 자리한 모음이 돌아서면 환대(‘언어야 안녕’)의 말이 떠오르는 것과 같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고 나니, 한국어로는 ‘언어와의 작별’보다는 ‘안녕, 언어’라는 제목이 영화의 무드에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원제 ‘adieu au langage’는 고다르의 언어유희를 따라 ‘Ah dieux, Oh langage’(오 신들이여, 오 언어여)로 읽히는 데 그치지 않고 - 그런데 왜 신은 단수가 아닌 복수로 호명되는 것일까? 왜 언어는 여전히 하나로 남아 있는 것일까? - ‘à dieu, au langage’(신에게로, 언어에로)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작별, 호명 그리고 지향.


    
D: 차원(Dimension)

고다르가 즐겨 인용하는 앙드레 바쟁의 금언 가운데 하나는 “원근법은 서구 회화의 원죄”라는 것이다. <언어와의 작별>이 3차원의 환영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입체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겠지만, 이토록 단순한 방식으로 3D의 개념을 전복하는, 혹은 혁신하는 영화가 될 거라곤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다르는 때로 (‘3D 안경’을 쓰고 볼 때) 좌우 양쪽 눈에 아예 서로 다른 이미지가 입사되도록 함으로써 중첩(superimposition)의 효과를 내기도 하는데, 이는 입체적이라기보다는 ‘입체파적’(cubist)으로 여겨진다. 두 대의 분리된 카메라로 촬영한 이미지를 두 개의 눈에 각각 입사시켜 3차원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스테레오스코프의 원리는 고스란히 차용하되, 좌우 양안에 비치는 두 이미지가 반드시 시각적으로 유사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하는 순진한, 하지만 매우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고다르가 3D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방식은 이미지의 특성에 대한 그의 오랜 사색의 노정에 단단히 결부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 이미지란 사각의 프레임 안에 담긴 시각적 정보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미지란 사실 반드시 시각적인 것만도 아니다. 그에게 있어 이미지란 무엇보다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상이한 리얼리티의 ‘관계’이자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그것을 통한 ‘생성’이다. 이미지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그가 <열정>(1982), <리어 왕>(1987), <JLG/JLG: 12월의 자화상>(1995) 그리고 <영화의 역사(들)>(1988~1998) 등에서 즐겨 인용해 온 피에르 르베르디의 『이미지』(1918)에 잘 나타나 있다. “이미지는 정신의 순수한 창조물이다. 그것은 얼마간 서로 떨어져 있는 두 리얼리티에 의해 생성되는데 그들 간의 비교가 아니라 조화를 통해서다. 이러한 두 개의 리얼리티의 관계가 멀고 진실한 것일수록 이미지는 더욱 강력해지고 보다 감정적인 힘을 지니게 될 것이다. [...] 유추(analogy)는 창조의 매개체이다.” 두 대의 카메라,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두 개의 눈이 지향해야 할 것은 시각적인 깊이의 환영이 아니라 유추를 가능케 하는 거리를 둔 둘(deux)의 관계로부터(만) 생성되는 정신적 이미지, 사유의 이미지다. 말라르메가 자신의 시에서 선언했듯, “모든 사유는 주사위 던지기를 불러낸다.”(Toute pensée émet un coup de dés) 하지만,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우연을 폐지하지 못할 것이다.”(Un coup de dés jamais n'abolira le hasard) 그리고 “아무 것도 [...]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 그 장소 밖에서는 [...] 아마도 [...] 하나의 별자리 [...] 를 제외하고는.”(rien [...] n'aura eu lieu [...] que le lieu [...] excepté [...] peut-être [...] une constellation) 여기서 이어지는 생각, 주사위 던지기와 별자리.


D: 주사위(Dice)

<언어와의 작별>에 대한 예고편과도 같았던 3D 단편영화 <세 가지 재앙>(2013)에서 고다르는 ‘3D’의 ‘D’를 ‘재앙들’(désastres)로, 거기서 더 나아가 ‘주사위들(dés)―별들(astres)’로 바꿔 읽었다. 말라르메적 상상? 물론이다. <세 가지 재앙>에서 고다르는 말라르메의 시와 수리철학자 고트롭 프레게의 언급을 다음과 같이 (멋대로?) 포갠다. “프레게는 사유가 수(數)를 생성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사유는 주사위 던지기를 구성한다고 했다.” 그런데 고다르는 왜 말라르메의 주사위―별자리에서 프레게를 떠올린 것일까? (혹은 프레게에서 말라르메로 간 것일까?) 혹시 프레게의 다음과 같은 언급 때문이었을까? “주사위의 네 눈(目)에 대한 표상에서 우리는 ‘넷’이라는 낱말에 대응하는 그 무엇이 나타난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다. [...] 수는 자립적 대상으로도 외부 사물의 성질로도 표상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는 감각적인 것도 외부 사물의 성질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수 0의 경우 가장 분명하다. 눈에 보이는 0개의 별을 표상하려고 해보아도 소용없을 것이다. 우리는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상상할 수는 있으나, 이 경우 ‘별’이란 낱말이나 0에 대응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우리는 지금 아무 별도 볼 수 없다는 판단을 불러일으킬 만한 상황을 표상할 뿐이다.”(『산수의 기초』 제59절) 


<세 가지 재앙>은 세 개의 주사위를 통한 세 번의 주사위 던지기로 진행된다. (위 사진 참조) 의미심장하게도, 세 번째에 가서는 텍스트가 주사위들의 이미지와 함께 나타나지 않고 그저 검은 화면 위에 떠오른다. (3D는 아직 그에 걸맞은 가능한 이미지 생성의 방식을 배우지 못했다는 고다르식의 일갈일까?) 이 주사위 놀이 클립 영상은 1977년에 고다르가 안느-마리 미에빌과 함께 만든 12부작 시리즈 <프랑스/여행/우회로/둘/아이들>(‘두 명의 아이들을 통한 프랑스 여행’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에서 차용한 것이다. 심지어 영상 위에 입혀진 내레이션까지 고스란히 가져왔다. “괴물의 진화는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미시적 사건들과 돌연변이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이러한 개념은 시간적으로나 수학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프랑스/여행/우회로/둘/아이들>에서는 이 뒤로 “계속되는 주사위 던지기, 하나의 하부단위에 이은 또 다른 하부단위의 생성, 이러한 우연의 게임으로부터 괴물의 신체를 형성할 수십만 번의 연쇄작용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태양계의 수명보다도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 괴물들과 관련된 두 개의 가장 중요한 발명은 섹스와 죽음이다.”라는 내레이션이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프랑스/여행/우회로/둘/아이들>의 주사위 놀이가 세 개의 주사위로 이루어진다는 점은, 3D 테크놀로지에 대한 숙고의 과정에서 고다르가 사후적으로 발견한 것이다. 그에 따라 ‘괴물’의 의미도 달라진다. 자본주의적 소비사회의 대중에서 디지털 독재로. 이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언어와의 작별>에서 고다르는 (다시 세 개의) 주사위로 놀이를 하고 있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래 사진) 다시 한 번, 근본문제(Grundproblem)에 대한 접근은 순진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D: 디지털(Digital), 0과 1이라는 거짓된 둘

<세 가지 재앙>에서 고다르는 “디지털은 독재자가 될 것이다”라고 단언한 바 있다. 디지털 영화, 폭넓게는 디지털 문화에 대한 고다르의 사유는 텔레비전에 대한 그의 오랜 관심과 맞닿아 있다. <언어와의 작별>에서 그는 블라디미르 츠보리킨이 텔레비전을 발명한 1933년에 히틀러가 독일 수상으로 선출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츠보리킨이 텔레비전 시스템을 고안한 것은 사실 1933년이 아닌 1923년이다. 이러한 연대 착오는 두 개의 일견 무관해 보이는 역사적 사실을 몽타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역사(들)>에서 텔레비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은 오늘날 디지털 문화에 대한 고다르의 진단으로 고스란히 연결된다. “전 세계의 스펙터클을 허름한 침실들로 가져간다는 레옹 고몽의 꿈이 텔레비전을 통해 실현된 것이라면, 그것은 목동의 머리 위의 광활한 하늘을 엄지동자 톰(Tom Thumb)의 높이로 축소시킴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다.” (문장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언어와의 작별>에서 한 등장인물은 스마트폰 화면의 아이콘을 엄지동자 톰이 길을 찾기 위해 사용한 조약돌과 비교한다.) ‘텔레-비주얼’(tele-visual)이 도처에 존재하는 것(독재)이 된 것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서이다. 고다르는 1970년대부터 그의 작업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던 ‘노이즈’에 대한 관심을 전면화하는 것으로 그에 맞선다. 디지털적 이미지가 우리의 보는 방식을 표준화한다면, 고다르는 디지털적 이미지 생산의 기제들을 총동원해 그것들을 충돌시키고 각각의 차이와 부조화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즉 디지털적 이미지 내부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그는 <언어와의 작별>을 제작하기 위해 일곱 가지 다른 종류의 카메라 - 캐논의 DSLR, 파나소닉의 Lumix 그리고 ‘웨어러블’(wearable) 카메라인 GoPro에 이르기까지 - 를 활용했는데, 촬영된 영상들은 균질하게 마름질되지 않은 채 뒤섞여 가히 ‘시각적 노이즈’의 카니발이라 할 만한 광경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도래하는 건, 적어도 예견되는 건, 오직 이 소란 속에서다. 적잖은 평자들이 <언어와의 작별>을 보며 스탠 브래키지의 <독 스타 맨>(1964)을 떠올렸던 것도 그 때문이리라. “자연으로 향하는 통로로서 은유를 활용”(블레이크 윌리엄즈)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두 영화는 닮아 있다.


또 하나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D: 만남으로 개시되는 둘(Deux)

은유(metaphor)란 무엇인가? 그것은 응축된 픽션이다. 그것은 픽션의 한계이자 오늘날의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픽션이다. <언어와의 작별>이 하나의 시청각적 ‘실험’에 그치지 않는 것은 여기서 고다르가 어떻게든 이야기(하기)의 가능성을 붙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영화가 두 커플에 대한 두 번의 같지만 다른 이야기라고 한 고다르의 말을 믿어야 한다. <필름 소셜리즘>(2010)에 출연한 바 있는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고다르와 작업한 경험을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고다르의 차기 작품에서 저는 어쩌면 호화 유람선 횡단에 참여한 철학자-강연자 역할을 맡아 한 장면에 출연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고다르에게는 사랑이 거의 모든 문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러나 제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사랑과 저항 사이의 접속에서 고다르와 저의 차이는 바로 멜랑콜리인데, 이것은 고다르에게 모든 것의 색깔을 의미하는 핵심이기도 합니다.”(『사랑 예찬』) <언어와의 작별>과 관련해서, 여기에 바디우의 다른 텍스트를 겹쳐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만남을 통해 개시된 둘, 사랑이 그 진리를 실행하는 둘은 그 자신에게 닫힌 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둘은 통로이고 중심점이며, 최초의 수적 성격이다.”(『베케트에 대하여』) <언어와의 작별>을 구성하는 한편 작품 곳곳에 산포된 여러 ‘둘’들, 영과 무한, 자연과 은유 그리고 고다르적 픽션에 관한 이야기는 이 영화를 다시 본 다음에나 가능하겠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이 남아 있다. 고다르적 멜랑콜리? <언어와의 작별>이 고다르의 고별사일까? 이 글에서는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했지만 사실 이 영화는 고다르의 그 어떤 영화보다도 원기 왕성하며 활력으로 넘쳐난다. 이 영화를 보며 나는 <네 멋대로 해라>(1960)를 당대에 보았던 이들은 꼭 이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하고 멋대로 상상해 보곤 했다. 영화의 폐허 속에서 ‘영화 같은 무엇’의 섬광이 춤추는 광경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2014-10-24

시네마-에이돌론: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입문, 혹은 논쟁을 위한 서설

(※ 아래 글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회고전"(2014.10.29~11.23)과 관련해 쓴 글로 서울아트시네마 소식지(2014년 11월호)에 실릴 예정이다. 올리베이라의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 쓴 글이라 혹시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이곳에 올려 둔다.) 


시네마-에이돌론
: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입문, 혹은 논쟁을 위한 서설


한국의 올리베이라 수용 약사(略史)

오랜 준비 끝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마련한 이번 회고전은 올리베이라의 작품 대부분이 한꺼번에 상영된다는 점에서 아주 귀한 기회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보고 그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할 기회가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때 지난 15년 동안 한국에서 올리베이라의 영화가 어떻게 소개되었는지 그 역사를 간략히 정리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본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1993년 작품인 <아브라함 계곡>이다. 용케도 NHK 위성방송 BS2 채널까지 서비스하는 지역유선방송에 가입해 두었던 덕분인데, 2000년 초에 방영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작품 외에도 <상자>(1994)와 <수도원>(1995)이 함께 방영되었는데,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나는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의 스토리에 의존해서 일본어 자막 중 한자(漢字) 부분만을 띄엄띄엄 읽어 가며 그나마 따라갈 수 있었던 <아브라함 계곡>만을 끝까지 보았다. 

사실 올리베이라의 나이가 90세가 되었던 1998년까지만 해도 - 이때까지 그는 자신의 사후에 공개하도록 한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1982)을 포함해 총 19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 한국에서 그의 이름은 시네필들의 영화적 지도 어디에도 기입되어 있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그의 영화가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 그보다 한참 전인 1970년대였고, 1990년대는 한국에서 이른바 시네필 문화가 싹튼 시기 - 실은 영화 자체에 대한 열광보다는 어렵사리 구해 본 영화에 대한 자부심이나 쉽게 볼 수 없는 영화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가득한 시기였다 - 로 간주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꽤 기이한 일이다. 해외 영화제를 방문할 수 있었던 극소수의 프로그래머나 기자 혹은 평론가들이 그의 영화를 알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어떤 영문인지 그들은 올리베이라를 국내의 관객들에게 직접 보여주는 일에는 그닥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에 대한 언급이 일부 있었다 해도, 그것은 영화와 직접 대면하는 것을 유예시키면서 ‘저 바깥에는 이러이러한 근사한 것들이 있다’고 자랑하는 ‘교도관의 비평’ 수준을 넘지 못했다. 

그의 영화가 극장에서 처음 상영된 것은 제4회 부산국제영화제(1999년)에서였는데, 초청된 작품은 라파예트 부인의 『클레브 공작부인』(1678)의 무대를 현재로 옮겨 각색한 <편지>였다. 아마 이 영화가 같은 해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올리베이라의 영화가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폐간된) 영화잡지 『필름 컬처』의 주간이자 (지금은 사라진) 서울시네마테크 대표였고 (이제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광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였던 임재철 평론가 덕택이었다. (광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시절(2001~2004), 그는 페드로 코스타, 루크레시아 마르텔, 알랭 기로디 등 이제는 국제적인 감독이 된 이들의 초기작을 국내에 처음 소개했고,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 그리고 존 포드의 회고전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는 2005년에 <불안>(1998)을 자신이 설립한 영화사인 이모션픽처스를 통해 수입, 개봉한 바 있다. 이 영화는 현재까지 한국에서 정식으로 극장 개봉된 유일한 올리베이라 영화다.) 2001년 7월 5일부터 10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는 (그전에 오즈 야스지로, 오손 웰즈, 알랭 레네 회고전을 선보였던) 서울시네마테크 주최로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걸작선 및 포르투갈 영화특집」이라는 행사가 열렸는데, 여기에서 올리베이라의 영화 다섯 편 - <프란시스카>(1981), <아니오, 혹은 지배의 공허한 영광>(1990), <아브라함 계곡>, <세계의 시초로의 여행>(1997), <불안> - 이 한꺼번에 상영되었다. 같은 해 광주국제영화제에서는 <나는 집으로 간다>(2001)가, 이듬해에는 <포르토에서의 어린 시절>(2001)이 상영되었다. 또한 2002년 포르투갈대사관과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주최로 열린 제2회 포르투갈 현대영화제 - 2001년의 제1회 영화제는 당시 서초동에 자리하고 있던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렸는데 한심한 영화들뿐이었다 - 에서는 <언어와 유토피아>(2000)가 상영되었다.

스크린에서 비로소 올리베이라의 영화를 접할 수 있게 되었을 즈음, 뜻밖에도 두 편의 올리베이라 영화가 국내 텔레비전을 통해서도 방영되었는데, 하나는 2001년 10월 KBS 위성 2TV를 통해 방영된 <수도원>이고, 다른 하나는 2002년부터 방송을 시작한 스카이라이프 MGM 채널을 통해 방영된 <새틴 슬리퍼>(1985)이다. 당시로선 해외의 올리베이라 마니아들 가운데서도 실제로 본 사람이 거의 없었던 <새틴 슬리퍼>가 ‘나의 사랑, 나의 기사’라는 제목으로 방송될 예정이라는 걸 MGM 편성표에서 확인하고 영화가 시작되기 1시간 전부터 텔레비전 앞에 붙어 앉아 있던 기억이 나는데, 실망스럽게도 방송판은 400분에 달하는 오리지널이 아니라 해외용으로 제작된 130분짜리 축약판이었으며 게다가 조악하게 영어로 더빙된 것이었다. (나는 2012년에야 <새틴 슬리퍼> 오리지널 버전을 볼 수 있었다. 이전에 찾은 기록에 따르면, 이 영화는 역시 ‘나의 사랑, 나의 기사’라는 제목으로 1990년에 KBS를 통해 방영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미심쩍은 것이라 확인이 필요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좀 어렵다.) 

이후 사정은 바뀌어 지난 10여 년 동안 올리베이라의 신작은 국내 영화제를 통해 꾸준히 소개되어 왔다. 2011년에는 그의 ‘좌절된 사랑의 4부작’ - <과거와 현재>(1971), <베닐드 혹은 성모>(1975), <불운의 사랑>(1978), <프란시스카> - 이 부산과 전주영화제에서 (구성을 달리하며) 각각 마련한 포르투갈 영화특집 프로그램을 통해 모두 상영되었는가 하면, 같은 해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열린 포르투갈영화주간에서는 올리베이라의 장편 데뷔작인 <아니키 보보>(1942)와 그가 배우로 출연한 작품이자 포르투갈 최초의 유성영화인 <리스본의 노래>(코티넬리 텔무 감독, 1933)가 상영되었다. 올리베이라 탄생 100주년을 맞아 <나의 경우>(1986)부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2007)까지 21편의 장편을 모은 DVD 박스세트가 포르투갈에서 출시된 이후로는 온갖 ‘어둠의 경로’로 그의 영화가 ‘유통’되고 있으며, 심지어 <포르토에서의 어린 시절>은 ‘나의 어린 시절 뽀르또’라는 제목으로, <나의 경우>는 감독의 이름이 ‘올리비에라’로 바뀐 채 의심스러운 리핑판 DVD로 국내 출시되어 있기까지 하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바뀐 것일까? 냉정히 말하자면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가까스로, 즉 특별전이나 영화제 같은 임시변통의 창구를 통해, 혹은 접근성이 떨어지는 케이블 혹은 위성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혹은 각종 어둠의 경로를 통해 산발적으로 접할 수 있었을 뿐이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 않은가? 2014년 현재까지 올리베이라는 총 32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고 그 가운데 25편이 지난 15년 동안 국내에서 상영, 방영 혹은 DVD로 출시되었지만, 흡사 고다르처럼,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보이기는 하되 알려지지 않은 감독이다. 빠른 기간 내에 시네필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었지만 논쟁의 대상은 아니다. 최악의 경우, 어떤 이들은 그가 100세가 넘어서도 왕성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숭배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겐 올리베이라에 대한 담론이라는 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두 개의 물음

“영화는 비(非)물질적이야. 그것은 유령이지.”
- 파울루 로샤의 <건축가 올리베이라>(1993) 중에서 올리베이라의 말  


논쟁을 자극하기 위해, 다소 도발적인 두 개의 ‘불경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해 보자. 올리베이라는 포르투갈적인 감독인가? 그의 영화는 진정 ‘시네마틱’(cinematic)한가? 물론 이 물음에 모두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변할 수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견해가 궁금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모두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축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미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1998년에 발표한 짧은 글에서 <신곡>(1991)과 <수도원>에 대해 논하면서 “위대한 올리베이라 안에는 독일적인 구석이 있다”고 쓴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올리베이라는 독일이 지난 2백여 년 동안 하나의 국가로서의 그 자신에게 품은 불확실성을 (오히려) 매혹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활용한 신화와 우화들을 통해 포르투갈적 카톨리시즘을 구조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바디우는, 테오도르 폰타네처럼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이후 모든 독일 예술은 어느 정도 이념(Idea)의 교훈주의 및 교육적 목적 - 이는 서사적 혹은 심리적 요소들과 이러한 요소들의 상징적 역할에 대한 강조 사이의 간극에 자리하고 있다 - 에 의해 오염되어 왔는데, 올리베이라 영화의 알레고리적 구조에서는 그러한 독일적 특성이 느껴진다고 본다. 올리베이라에 대한 장문의 통찰력 있는 비평을 남긴 포르투갈 평론가 고(故) 주앙 베나르드 다 코스타는 의미심장하게도 그의 영화에서의 ‘영원한 여성성’(eternal feminine)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물론 이는 괴테의 『파우스트』의 유명한 마지막 문장(“영원한 여성성이 우리를 고양시킨다.”)과의 관련을 떠나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올리베이라 영화에서 이 모티프는 때로 아주 직접적으로 시각화된다. 예컨대, <아니키 보보>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소년과 소녀가 작은 인형의 양쪽 팔을 하나씩 잡은 채 - 그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 이후 올리베이라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될 (로베르 브레송적인) ‘접촉에 대한 망설임 혹은 두려움’이라는 주제를 감지하게 된다 - 건물 사이로 난 오르막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진 1) 잠시 후, 이들의 모습 위로 상승(고양)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구름의 이미지가 오버랩된다. (사진 2) 올리베이라가 자신의 실제 경험에서 영감을 얻어 1952년에 구상했지만 반세기가 넘어서야 실제로 스크린에 옮긴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례>(2010)에서 샤갈의 회화를 연상케 하는 ‘승천’(사진 3) 장면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진 1]

[사진 2]

[사진 3]

하지만 바디우의 지적은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올리베이라 안에는 분명 독일적인 구석이 있지만, 그만큼이나 프랑스적인 구석 및 이탈리아적인 구석도 있으며, 유대적인 구석 - 포르투갈에서 올리베이라(올리브나무)나 페레이라(배나무)처럼 나무와 연관된 성은 유대계로 추정되곤 한다 - 도 있고, 심지어 북구적인 구석도 있다. 분명 올리베이라는 주제 레지우, 카밀루 카스텔루 브랑쿠, 아구스티나 베사-루이스 등의 포르투갈 문학에서도 그의 영화를 떠받치는 언어적 자양을 취해 왔다. 한편으로 포르투갈 바깥의 관객들이 그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앞서 언급한 포르투갈 작가들의 작품이 거의 번역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영화가 비단 독일만이 아니라 다양한 범유럽적 작품들(문학, 미술, 연극, 음악 그리고 영화)의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올리베이라의 ‘멀티미디어’ 걸작 <나의 경우>인데, 여기서는 피란델로의 『작가를 찾는 여섯 명의 등장인물』을 연상시키는 주제 레지우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공연과 사무엘 베케트의 텍스트가 겹쳐지고, 돌연 무대 위에 뉴스릴 영화가 영사되고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내걸리는가 하면(사진 4와 5),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이상적인 도시>를 모델로 한 세트에 욥기의 인물들이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함께 등장하고(사진 6), 이 모든 과정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한 촬영팀의 모습 또한 보여진다. 한 인터뷰에서 올리베이라는 <신곡>과 관련해 어떻게 다양한 문화에서 나온 텍스트들을 한데 묶는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냐는 질문에 대해, 그것들은 다양한 문화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모두 “우리의 서구적 시각 혹은 교육에 따른 원죄의 문제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원천을 가진다고 답하기도 한다. 

[사진 4]

[사진 5]

[사진 6]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포르투갈 영화에 있어 지배적인 장르는 바로 포르투갈 영화 자체”(주앙 베나르드 다 코스타)라고까지 말해지는 포르투갈 영화의 기벽(奇癖)의 전형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포르투갈을 잠깐이라도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그곳의 공간과 사람들에게서 느낀 인상에 가장 가까운 올리베이라 영화는 <아니키 보보>나 <상자>처럼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매우 이례적인 경우에만 국한됨을 깨달을 만큼, 그의 영화는 ‘포르투갈 영화적’이되 ‘포르투갈적’이지는 않다. 올리베이라의 ‘포르투갈 영화’는 종종 포르투갈이라는 한 국가의 영역을 넘어 유럽, 보다 크게는 레이몽 벨루가 지적한 바대로 문명(civilization) 혹은 세계의 운명에 대한 몰두로 나아가곤 한다. 포르투갈이 위기에 닥친 시기에 부활해 제국을 지배하리라 믿어졌던 16세기의 전설적인 왕에 관한 주제 레지우의 희곡 『세바스티앙 왕』을 영화화한 <제5제국>(2004)처럼 일견 지극히 지역적인 소재를 다룬 것처럼 보이는 작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앙골라에서 식민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병사의 구술을 통해 포르투갈 국가의 흥망성쇠를 삽화적 형식의 영화적 프레스코화로 담아낸 가공할 걸작 <아니오, 혹은 지배의 공허한 영광>은 또 어떤가. (벨루는 올리베이라야말로 한 편의 영화 안에 조국의 역사를 담아내면서 그 설립에서부터 제국의 몰락에 이르는 역사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 아는 유일한 영화감독이라고 썼다.) 올리베이라의 고향 포르토를 가로지르는 도우루 강이 대서양과 만나는 곳에 있는 작은 등대마저도, 이 작은 도시의 하루를 열고 닫는 제의적 사물(<도우루강의 노동>(1931))로 출발해 문명의 메타포(<포르토에서의 어린 시절>)로까지 전화된다.  

‘포르투갈 영화적’이되 ‘포르투갈적’이지는 않은 영화, 어쩌면 이는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 주앙 보텔료, 페드로 코스타, 주앙 페드로 로드리게스, 미겔 고메스 등 여타 포르투갈 감독들의 영화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일 수 있다. 올리베이라가 특별한 것은, 영화를 사유함에 있어서 ‘시네마틱’이라고 하는 정의가 불가능한 모호한 개념에 집착하기보다는, 영화를 하나의 예술이나 미디어가 아닌 일종의 기능(function)으로서, 다른 예술 혹은 미디어들이 서로 만나고 교차하며 작동하기 위한 장(場)을 조절하는 기능으로서 받아들이길 주저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건 아주 새롭다기보다는 초기영화 혹은 원시영화 시기의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한데, 올리베이라가 그 시기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의 영화관(觀)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나의 가정으로 남겨두기로 하자.) 여기서 그의 ‘유령’(fantasma)으로서의 영화론(“영화란 항상 현실의 유령이다”)이 나온다. 영화는 실체 없는 비물질적인 것이지만, 다른 실체적인 것들 사이의 간극에 유령처럼 거하며 기능한다. 스페인 영화감독 빅토르 에리세는 올리베이라의 이러한 영화관에서 ‘영화의 불확정적 본성’을 본다. 이는 공인된 문학작품을 각색한 영화들로 인해 순수영화의 힘이 약화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영화에게 남겨진 일은 자신의 강둑에 물을 대는 것, 그토록 빠른 시간에 그것이 협곡들을 내며 가로질렀던 예술들 사이로 파고드는 것, 교묘하게 예술들을 포위하는 것, 보이지 않는 지하수로를 내기 위해 심층의 토양으로 스며드는 것”이라 지적하며 영토(실체)없는 영화, 곧 ‘불순한 영화’(cinéma impur)를 옹호했던 앙드레 바쟁의 견해와도 일맥상통한다. 또한 올리베이라는 (복수로서의) 세계는 물론이고 문학, 미술, 연극, 음악 그리고 영화 모두를 동등한 층위의 현실로 간주한다는 점 - 영화 자체 또한 영화가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현실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은 포르투갈 북부 트라스-우스-몽트스 지방의 전통적 그리스도 수난극 재현 행사를 담은 올리베이라의 두 번째 장편 <봄의 제전>(1963)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났다 - 에서도 지독히 바쟁적이다. 영화장치는 그 모두를 무차별적으로 시청각적 기록 혹은 보존의 대상으로 삼으며, 그럼으로써 그것들이 같은 층위에서 조우하게끔, 즉 비교되고, 교차하고, 충돌하게끔 만든다. 영화를 매체적으로, 혹은 그것에 고유한 특성(‘시네마틱’)이 있다는 가정 하에 사유하기보다는 일종의 기능으로 사유하는 올리베이라의 이러한 영화관을 여러 비디오 작업들과 <필름 소셜리즘>(2010)이나 <언어와의 작별>(2014) 같은 디지털 작업에서 전면화된 고다르의 영화관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한때 올리베이라는 “영화는 연극을 넘어설 수 없고 다만 그로부터 떠날 수 있을 뿐”이라거나 “영화는 연극을 시청각적인 방식으로 고정시키는 과정”이라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는데, 영화란 ‘촬영된 연극’과는 다른 무엇이어야 한다고 믿는 순수주의자들에게 이런 주장은 경악스러운 것으로 비칠 것이다. 또한 그는 “나는 음성적 이미지, 문학적 이미지를 영화적으로 번역하려는 시도는 전적으로 쓸모없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 것은 시도할 필요조차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문학적인 구절을 스크린에 등재(register)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유성영화의 커다란 장점이다.”라고도 단언한다. 올리베이라를 따라, 이미지라는 단어를 비단 가시적인 것에만 결부시키지 않고 시각적 이미지, 문자적 이미지, 음성적 이미지, 음향적 이미지 모두를 포괄하는 것으로 고려한다면, 유성영화의 영화-기능은 이러한 이미지의 힘을 빌려 앞서 언급한 상이한 현실들을 일시적으로 공통의 공간에 자리하게 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 올리베이라와 고다르는 다르지 않다.) 이때 이미지들 간에는 차이는 있지만 위계는 없다. 그리고 위계가 없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그것들은 다시 공통의 공간에서 상호 비교, 교차, 충돌될 수 있다. 비교, 교차, 충돌의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지의 간극들 뿐 아니라 그 간극에서 방사되는 여러 유령들과 마주치게 된다. 올리베이라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각인시킨 ‘좌절된 사랑의 4부작’은 비센트 산체스와 주제 레지우의 희곡, 혹은 카밀루 카스텔루 브랑쿠와 아구스티나 베사-루이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아 연극적 공간과 제스처, 그리고 문학적 언어의 힘을 영화로 다시 끌어안으면서 이 간극들과 유령들을 한껏 풀어놓고 있다. (평자에 따라 의견을 달리하겠지만 4부작 가운데 가장 강렬한 체험을 선사하는 걸작이자 올리베이라 최고의 작품이라 할 <불운의 사랑>은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1968)에서 부분적으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작품이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스트라우브-위예의 영화 가운데 원작이 없이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유일한 작품이다.) 

‘시네마틱’이란 결코 하나의 기원을 갖지 않는 데다 언제나 일시적일 뿐인 간극들과 유령들이 흡사 모종의 실체에 수렴될 수 있는 것인 양 우리를 미혹시키는 허위 개념에 불과하다. 세상에는 각각이 조작(operation)하는 영화-기능과 그 조작의 수준이 다른 무수한 영화감독들이 존재하고 분명 우리는 그들을 어떤 위계에 따라 배치할 수 있지만, 자신이 시네마틱하다고 ‘믿는’ 사례들을 쌓아올리거나 ‘~은 시네마틱하지 않다’는 식의 부정신학적 논법에 의존하지 않는 이상 누군가가 다른 누구보다 더 ‘시네마틱’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영화란 실체가 아닌 기능이기 때문에 그와 결부된 형용사를 가질 수 없다. 반면, 문학적인 것, 음악적인 것, 회화적인 것, 연극적인 것은 존재한다. 영화의 이와 같은 특성에 대한 가장 빼어난 메타포는 히치콕의 <현기증>(1958)의 마들렌이다. 그녀는 - 그런데 과연 ‘그녀’라고 지시해도 되는 것일까? - 주인공 친구의 아내와 그녀인 양 행세하는 여자, 그리고 그림 속의 여자 가운데 어디에도 정확하게 귀속되지 않지만 이 세 개의 실체 혹은 이미지를 관장하는 기능이고 또한 그것들 사이에서만 활동하는 유령적 형상이다. 올리베이라 인물들의 ‘좌절된 사랑’은 종종 그들이 이러한 유령적 형상(만)을 실체라 믿고 정작 실체를 거부하는 데서 기인한다. 스카티가 끝내 주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올리베이라는 그의 세 번째 장편 <과거와 현재>에서 이러한 <현기증>적인 주제를 완벽하게 자기 식으로 번안해 냈다. 네크로필리아에 사로잡힌 주인공, 죽은 자의 ‘부활’, 끝내 주인공의 열정의 대상이 되지 못한 자의 자살 등이 묘사된 것은 히치콕의 영화와 유사하지만, 사실 이 영화는 <현기증>의 남성적 환상을 여성적으로 뒤집은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완다라는 여성의 열정은 죽은 첫째 남편(의 초상), 그의 쌍둥이 동생, 그리고 그녀의 두 번째 남편 어디에도 정확하게 귀속되지 않는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모든 것들은 실체적인 것, 그만의 형용사를 지닐 수 있는 것들의 에이돌론(eidolon)이다. 그리스어로 에이돌론은 분신, 유령 그리고 이미지의 뜻을 모두 지닌다. 놀랍게도 영화는 이러한 분신들의, 유령들의, 이미지들의 간극에서 더할 나위 없이 실재적인 감각을 산출해낸다. 하지만 이 감각을 설명하기 위해 ‘시네마틱’의 신학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무염시태(無染始胎)했다고 믿는 <베닐드 혹은 성모>의 베닐드나 죽은 여인이 사진 속에서 미소 짓는 모습을 보았다고 믿는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례>의 이삭처럼, 시네필리아는 감각의 절대성을 믿는 것(영화는 곧 세계다)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올리베이라의 에피쿠로스적인 - 이미지들에서 기인하는 감각의 진실성을 믿었던 그는 역사상 최초의 시네필, 하지만 아직 영화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의 시네필이었다 - 면모가 있다고 본다. 




2014-10-21

2014년 10월 셋째 주: "Deep Red?"


한 주 동안, 공산주의 국가 혹은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영화들 몇 편을 나란히 보게 되었다.


사막의 태양 White Sun of the Desert (1969)
(dir. 블라디미르 모틸 / 소련(USSR) / 1969년 / 84분)
* 2014년 10월 25일(토) 13:00 상영예정 (서울아트시네마)



2011년 로테르담영화제에서 마련한 여러 특별전 가운데 하나는 "레드 웨스턴: 아메리칸 웨스턴에 대한 공산주의의 응답"(Red Westerns: The Communist Answer to the American Western)이었다. 레프 쿨레쇼프의 <볼셰비키의 땅에서 웨스트 씨의 기묘한 모험 The Extraordinary Adventures of Mr. West in the Land of the Bolsheviks>(1924)에서부터 미르치아 베로이우의 <여배우, 달러 그리고 트랜실바니아인 The Actress, the Dollars and the Transylvanians>(1979)에 이르기까지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동독, 불가리아, 루마니아에서 만들어진 '레드 웨스턴' 16편이 상영되었다. 당시 나는 영화제 일로 출장 중이었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 전체를 볼 수는 없었고 간간히 짬을 내어 3편만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마침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고 있는 "모스필름 90주년 특별전"(2014.10.10~26) 프로그램에, 로테르담에서 놓쳤던 작품 가운데 한 편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블라디미르 모틸의 <사막의 태양>이다. (이 작품은 모스필름의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전편을 감상[이곳을 클릭]할 수 있으며 영어자막도 제공된다. 하지만 이 시기 소련영화 특유의 색감을 만끽하려면 역시 영화관에서 복원판으로 보거나 러시아에서 출시된 블루레이로 봐야 한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10월 25일 토요일 오후 1시에 다시 상영될 예정이다.) 나는 이 영화를 지난 10월 17일에 관람했는데, 10월 12일 상영 시에는 '레드 웨스턴' 프로그램의 기획자였던 세르게이 라브렌티에프의 강연이 있었으나 (다음달 소식지에 실을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원고를 마무리하느라) 놓치고 말았다. 아쉬운 대로 2011년 로테르담 특별전 당시 발간된 소책자에 실린 글들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있는 중이다. 

라브렌티에프에 따르면, 흐루시초프가 미국을 방문했던 1962년, 소련에서는 존 스터지스의 <황야의 7인 The Magnificent Seven>(1960)이 개봉되어 입장권을 구하기가 힘들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1960년대에 자라난 소련의 아이들은 '선량한 공산주의의 개척자들'에 대해선 깡그리 잊어버리고 스터지스 영화의 주인공인 율 브리너의 제스처, 걸음걸이, 카우보이 복장 등을 따라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 차원에서 자국의 신문과 잡지 등을 동원하여 이 영화에 대한 비판운동을 전개했는데 박스오피스 결과를 실제보다 적게 조작하는 일도 포함되었다. 결국 정부는 <황야의 7인>의 상영을 중단시켰고 이 영화에 대한 '공산주의적' 응답이 될 영화들을 직접 제작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나온 '레드 웨스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리투아니아 출신) 비타우타스 잘라키아비추스의 <죽기를 바란 자는 없다 No One Wanted to Die>(1966), 에드몬 케오사얀의 <도피한 복수자 The Elusive Avengers>(1967) 그리고 블라디미르 모틸의 <사막의 태양>이다. 모틸의 이 작품은 소련 내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흥미로운 것은, 아직 소련 내 연방국가들 간의 형제애가 여전히 강조되고 있던 시절에 제작된 이 영화가 "소련과 중앙아시아 문화의 양립불가능성은 물론이고 동방에서의 연방정책의 실패를 강조하고 있음이 분명"(에밀리 힐하우스)해 보인다는 점이다. (이 영화가 제작되기 일 년 전, 소련은 체코의 프라하를 침공해 강압적인 방식으로 공산주의 개혁의 움직임을 잠재웠다.)

1960년대 소련영화들 가운데 연방정책 - 특히 중앙아시아의 통합 - 과 관련된 함의가 담긴 것으로 (이 시기의 소련영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내게 얼른 떠오르는 것은 보리스 바르넷의 활기와 냉소, 멜랑콜리가 뒤섞인 스피디한 걸작 <알룐카 Alyonka>(1961)와 (이번 "모스필름 90주년 특별전"에도 포함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진중한 예술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1966)다. 전자는 일견 낙관적인 전망을 내비치는 듯하면서 실은 통합의 불가능성을 암시하는 반면, 후자는 예술가 영화의 외견을 빌려 문제에 우회적으로 접근하면서 - 시간적 배경 또한 몽골-타타르족의 침입이 있던 15세기다 - '러시아적인 것'을 보편과 통합의 가능성으로 재발견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사진 1] <사막의 태양>. 내전 참전 후 귀향 중인 군인의 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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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타르코프스키의 <거울 The Mirror>(1975). 전쟁에 나간 남편의 귀향을 기다리는 여인

<사막의 태양>에서, 게릴라 압둘라의 아홉 명의 아내들을 호송하는 임무를 졸지에 떠맡게 된 주인공 슈호프는 여정 도중 고향에 두고 온 자신의 아내와 이 아홉 여인들에 행복하게 둘러싸이는 몽상에 잠긴다. (각각이 '러시아적인 것'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상징하는 것임은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사진 1] 혹은 모스필름 유튜브 채널 <사막의 태양> 영상의 45:24~46:32를 볼 것.) 통합 혹은 연방(제국)이란 사실 형제애나 우애가 아니라 일부다처의 하렘 - 공산당의 '본처'인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라는 '첩들'을 관리하는 - 이 아니고서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인데, 이 짖궃은 농담의 강도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슈호프의 아내의 자리에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러시아적 모성의 이미지([사진 2])를 슬쩍 겹쳐놓고 생각해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실, <사막의 태양>의 그 꿈 장면이 아주 효과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영화 초반부터 슈호프의 아내 카테리나를 과도하게 성적으로 이미지화한 탓이 크다. 영상의 00:22~01:30을 볼 것.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장면은 거의 부뉴엘적인 뉘앙스를 띠게 되었을 것이다.) 


[사진 3]

+ Parallel

[사진 4]

아홉 명의 중앙 아시아 여인들에 둘러싸인 슈호프의 모습([사진 3])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우애를 강조하는 선전용 포스터의 스탈린([사진 4])과 비교해 보라. 슈호프는 자신의 몽상이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것임을 안다. 그런데 이 몽상은 기묘하게도 스탈린의 몽상을 닮아 있지 않은가? 그것은 도착적인 것의 이상화이며 금지된 것의 프로파간다이다.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정신분열증. 이러한 정신분열증이 낳은 긴장의 텍스트인 <사막의 태양>은 당대 소비에트의 이상과 그와 관련된 도상들을 일그러뜨리고 얼룩지게 한다. 



액트 오브 킬링 The Act of Killing (2012)
(dir. 조슈아 오펜하이머 / 덴마크, 노르웨이, 영국 / 2012년 / 159분 *director's cut)
* 2014년 11월 국내 개봉 예정

이 역겹기 짝이 없는 다큐멘터리는 "미디어시티서울 2014"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상영되었다.  『뉴 스테이츠맨 New Statesman』 에 기고한 글(2013.7.12)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각 개인들의 가차없는 이기주의를 공적 부의 원천으로 삼는 자본주의 - "개인들이 협소한 사적 이익을 희생하고 직접적으로 공공의 선을 위해 일하려 할 때 [오히려] 공공의 선이 위축되는 패러독스" - 에 대한 언급을 거쳐, 이러한 자본주의가 초래한 공적 공간의 사유화(privatising the public space)가 <액트 오브 킬링>의 인도네시아 학살자들의 행위 - 자신들이 50여 년 전에 저지른 학살의 광경을 거리낌 없이 '영화화'하려 드는 - 와 상응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액트 오브 킬링>의 감독이 이들을 데리고 영화를 위해 벌인 일들을 여기 시시콜콜 옮기고 싶지 않다. 궁금한 이들은 인터넷에 넘쳐나는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참조하면 될 것이다.) 

지젝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한데, (1) 지젝의 '자본주의적 개인' 개념은 기껏해야 신고전주의 경제학파의 개인 개념을 현실적인 것으로 단정지은 것에 불과하고 (2) 오늘날 점점 범람하는 '퍼블릭 섹스 비디오' - 공공장소에서의 섹스 포르노 비디오, 개인들이 웹상에 올리는 누드나 포르노 이미지 - 들과 같은 방식으로 공적 공간을 (뻔뻔스럽게!) 사유화하고 있는 것은 지젝이 지목한 인도네시아 학살자들이 아니라 <액트 오브 킬링>의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이기 때문이다. (글의 말미에 지젝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노출증자들은 공적 공간에 침입하는 반면, 웹상에 자신들의 누드 이미지를 게시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사적 공간에 머물면서 다른 공간들을 포괄하기 위해 그것을 확장시키고 있다  <액트 오브 킬링>의 안와르와 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공적 공간을 사유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 학살자들은 '공적 공간을 사유화'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지젝이 그에 대비시켜 말한 '공적 공간에 침입하는 노출증자들'에 가깝다. <액트 오브 킬링>의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작업은 야외섹스를 즐기는 한 커플의 비디오를 '합의 하에' 촬영해 주기로 한 뒤, 이런 행태에 대한 고발이랍시고 촬영 영상을 정리해 웹상에 게시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 정리하자면, 여기서 지젝의 논의는 이론적 구성물('자본주의적 개인')의 자명성과 영화적 구성물(다큐멘터리의 '캐릭터')의 투명성을 가정함으로써만 성립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가장 간명하고 솔직하며 적확한 언급은 조너선 로젠봄의 그것이다. "기본적으로 <액트 오브 킬링>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 하는 것이 인도네시아 암살단의 잔학행위라고 하는 단순한 사실이라면, 나는 이러한 정보를 얻기 위한 보다 효과적이고 유용한 다른 방식이 있을 거라고 본다.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가 제공하는 것이 그러한 정보에 대한 시적, 심리적 혹은 정치적 통찰 같은 거라면, 그러한 통찰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를 내게 제공할 평론가들이 있는지 보고 싶다. 이 영화에 그런 게 있지만 내가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지금으로서는) 여기에 덧붙일 말이 별로 없다. 다만 약간의 치유제가 필요할 뿐이다. 일요일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본 리티 판의 <잃어버린 사진 The Missing Picture>(2013)처럼. 이 작품 역시 '미디어시티서울 2014'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다. 혹시 올해 '미디어시티서울'의 주제는 '파르마콘'(pharmakon)이었던가? 


 [사진 5] <액트 오브 킬링>. 50여 년 전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영화화하는 가해자 [Shooting]
(카메라 뒤의 인물은 '빨갱이 학살'의 주범이었던 안와르 콩고)

[사진 6] <잃어버린 사진>. 40여 년 전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피해자의 기억 [Projection]
(수용소에서 크메르 루즈의 선전영화를 보았던 기억을 클레이 인형과 모형을 통해 재현한 장면) 


(2014.10.22 추가) 위의 글을 포스팅한 후, 페이스북 코멘트를 통해 정승훈 교수가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적어 보내주었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 격식 없이 편하게 쓰신 거라는 걸 감안하고 읽어주길 바란다.) 

"난 지젝 의견에 좀 공감했는데, 이때 사유화되는 공적 공간은 사회적으로 준수되는 어떤 윤리적 문턱 위에 자리잡는 정치적 공공역과 같다고 봤습니다. 킬러들은 그 문턱을 넘어 자신들의 목소리를 노출하려는 듯하지만 실은 그런 문턱은 아랑곳 않고, 그걸 파괴하듯, 문턱 밑으로 관람자들을 끌어내려 자신들의 안방으로 초대해놓고 왕년의 업적을 떠벌립니다. 회사에서 하지 못하는 성희롱을 술자리에선 재미로 하듯 학살을 정당화하는 거죠. 정치적 커밍아웃 같은 진지함이 아니라 과시적 퍼포먼스 같은 뻐김이 그래서 가능한 거고, 그게 더 섬뜩한 거고. TV 토크쇼 장면은 이 사적 비공식적 뒷담화가 공적 영역을 잠식하는 과정을 시사하는데, 그 범위가 점점 넓어질 때 공공의 윤리적 문턱은 어디 있는가 하는 게 이 영화의 질문이라고 봅니다. (가령 5.18 조롱 같은 걸 온라인이 지들 안방인 양 배설하고 공유하는 일베 무리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고, 그래서 공공역의 사유화는 정치든 섹스든 가장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이 별 저항 없이 우발적으로 도처에서 유통 소비 심지어 향유되는 글로벌한 경향과 닿아있는 듯합니다.) 오펜하이머는 이 점을 문제적으로 드러내려 했지, 자신의 비윤리적 욕망으로 공공역을 사유화하는 걸로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후속작인 <침묵의 시선>은 희생자 편에서 계속 질문을 이어가고 있고.."

정승훈 교수의 반론에 대한 내 생각은 다음과 같다. 

(1) "킬러들은 ~ 관람자들을 끌어내려 자신들의 안방으로 초대해놓고 왕년의 업적을 떠벌립니다. 회사에서 하지 못하는 성희롱을 술자리에선 재미로 하듯 학살을 정당화하는 거죠."

: 비유가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액트 오브 킬링>의 킬러들이 과시적인 건 사실이지만, 이 영화는 그들이 마련한 자리에 우리나 감독이 초대받아 간 것으로 생각될 수 없어요. 킬러들에게 안방을 내어주고 술판을 벌이게끔 한 것은 다름아닌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죠.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관객)는 그 안방의 술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펜하이머가 촬영하고 편집하여 영화제에 출품한 영화를 통해 그 안방의 술판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화의 대부분은 킬러들의 퍼포밍(performing)에 대한 관찰이 아니라 - 물론 인도네시아 판차실라 청년단(Pancasila Youth)의 집회 장면처럼 시네마베리테적 관찰이라 할 수 있는 부분도 있기는 합니다 - 킬러들의 퍼포밍을 퍼포밍한 기록입니다. 정승훈 교수는 지젝과 마찬가지로 킬러들의 과시성에 놀란 나머지 불현듯 영화라는 매체를 뒤로 물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위에서 "<액트 오브 킬링>의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작업은 야외섹스를 즐기는 한 커플의 비디오를 '합의 하에' 촬영해 주기로 한 뒤, 이런 행태에 대한 고발이랍시고 촬영 영상을 정리해 웹상에 게시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지요. 포르노그래피를 보는 관람자들은 가능한 매체의 존재를 지워버리려 노력하기 마련인데, 그러고 보면 지젝과 정승훈 교수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액트 오브 킬링>이 실은 포르노그래피에 가깝다는 걸 인정하고 있는 셈인데요. 영화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안와르 콩고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카메라 앞에 (때로는 뒤에) 선' 안와르 콩고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2) "TV 토크쇼 장면은 ~ 공공의 윤리적 문턱은 어디 있는가 하는 게 이 영화의 질문이라고 봅니다."

: 저는 <액트 오브 킬링>이라는 다큐멘터리 자체가 이미, 정승훈 교수가 언급한 TV 토크쇼와 마찬가지로 "사적 비공식적 뒷담화가 공적 영역을 잠식하는 과정" 속에 있다고 봅니다. 사실 그 TV 토크쇼와 <액트 오브 킬링>은 다른 영역에 있지 않고 - 제게 이 영화는 그 토크쇼보다도 훨씬 역겨웠습니다 - 나아가 킬러들의 '사적 비공식적[이기 마련인데 과시적으로 떠벌려지는] 뒷담화'가 인도네시아 방송의 국지성을 넘어 보다 광범하게 공적영역을 잠식할 수 있었던 것은 2013년 영화제 서킷(과 웹상의 각종 토렌트사이트들)을 휩쓴 이 영화 덕택이었죠. 그 잠식의 "범위가 점점 넓어질 때 공공의 윤리적 문턱은 어디 있는가 하는" 질문은 이 영화가 (안에서) 제기하고 있는 질문이 아니라 이 영화로 인해 (바깥에서) 우리가 제기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만일 실제로 이 영화가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면 저는 그에 대한 증거를 보고 싶습니다. 

(3) "오펜하이머는 이 점을 문제적으로 드러내려 했지, 자신의 비윤리적 욕망으로 공공역을 사유화하는 걸로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 그 느낌의 이유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액트 오브 킬링>의 후속작인 <침묵의 시선>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다루었다는 이 후속작의 존재가 <액트 오브 킬링>을 위한 '증거'는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액트 오브 킬링>과 유사한 혹은 비교될 수 있는 소재를 다루되, 보다 사려깊은 접근으로 성공을 거둔 것처럼 여겨지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9.11 테러범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진 함부르크 이슬람사원의 이맘(Imam) 모하메드 파자지의 강연 오디오 기록물을 텍스트로 옮긴 후, 이를 단순한 배경 앞에 앉은 배우로 하여금 낭독케 하면서 원래의 강연을 분석적으로 해체해 버린 로무알트 카마카의 <함부르크 강연 Hamburger Lektionen>(2006),  수백 명의 사람들을 납치, 고문, 살해한 멕시코 청부살인업자가 자신의 이력을 구술하는 광경을 담아내되, 어떤 자료 화면이나 재연도 없이, 비좁은 호텔 방에서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을 냉담하게 포착하는 것으로 비판적 거리를 취하고 있는 지안프랑코 로시의 <엘 시카리오: 164호실 El Sicario: Room 164>(2010) 등이 그것입니다. 위의 글에서 언급한 <잃어버린 사진>의 리티 판이 2003년에 발표한 <S21: 크메르 루즈 킬링 머신 S21: The Khmer Rouge Killing Machine>(2003)도 떠오릅니다.



2014-08-26

2014년 8월 넷째 주




안나 Anna (1975)
(dir. 알베르토 그리피 & 마시모 사르키엘리 / 이탈리아 / 1975년 / 225분 / 1.33:1)


1972년 2월의 어느 날, 배우 마시모 사르키엘리(Massimo Sarchielli)는 로마 나보나 광장의 한 카페에서 안나라는 이름의 소녀를 만난다.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그녀는 임신 8개월 째였고 보호시설에서 도망쳐 나와 머무를 곳도 없이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그녀를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와 보살피던 사르키엘리는 친구 알베르토 그리피(Alberto Grifi)에게 연락해 그녀에 관한 영화를 함께 만들어 보자고 제안한다. 파운드푸티지 영화 <불확실한 검증 La verifica incerta>(1964, 영화보기)으로 이탈리아 실험영화계에서 주목받고 있던 그리피는 당시 여러 예술가들이 그 미학적 가능성을 실험 중이었던 비디오를 활용해 그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오픈릴 방식의 비디오레코더로 촬영된 최초의 이탈리아 영화 - 이는 다시 그리피가 직접 개발한 ‘비디그라포’(vidigrafo)라는 장비를 통해 16mm로 전환되었다 - 이자 다이렉트 시네마와 시네마베리테의 유산을 계승하며 그것을 한계에까지 밀어붙인 걸작 <안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들은 우선 사르키엘리가 나보나 광장의 카페에서 안나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재연하는 것으로 시작했고 이는 <안나>의 도입부를 이룬다. 이후 영화는 안나가 머물게 된 사르키엘리의 집과 나보나 광장을 오가며 전개되는데, 사르키엘리의 아파트에서는 비디오라는 기록매체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앤디 워홀의 영화를 방불케 할 만큼의 냉담한 집요함으로 안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 - 특히 이가 들끓는 안나가 사르키엘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샤워하는 모습을 거의 외설적으로 느껴질 만큼 적나라하게 기록한 악명 높은 장면은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보는 이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 하고 있는 반면, 나보나 광장에서는 그곳을 배회하는 사람들과의 인터뷰, 이들이 정치사회적 현안 혹은 안나와 관련된 문제를 두고 벌이는 논쟁, 가정주부의 인권을 부르짖는 여성주의 단체의 집회 등 당대 이탈리아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여러 광경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이탈리아 1977년 운동을 가능케 한 분위기를 포착한(혹은 예견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프랑스 68혁명에 앞서 만들어진 장 루슈와 에드가 모랭의 <여름의 연대기>(1961)나 크리스 마르케의 <아름다운 오월>(1963) 같은 영화들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안나>의 ‘정치적 미학’은 워홀의 <블루 무비>(1969) - 비바와 루이스 월든이 무좀과 임질에서부터 베트남전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섹스하고 샤워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 -, 하라 가즈오의 <극사적 에로스>(1974) 그리고 1960년대와 70년대 미국 좌파의 인류학적 보고서라 할 로버트 크레이머와 존 더글러스의 <마일스톤즈>(1975) 사이에서 진동하고 또 표류한다고 보아야 할 옳을 것이다. <안나>는 정치의 가능성을 다시 발견하기 위해 ‘극사적’(極私的) 영역을 포괄하는 ‘일상생활의 실천’에 대한 다큐멘터리적 세사(細査)로 향하지만, 이는 돌발적인 사건(안나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며 불현듯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빈첸조라는 이름의 스태프)에 의해 굴절되는가 하면 주인공의 반발(출산장면의 촬영을 거부하는 안나)에 의해 가로막힌다. <안나>는 제도에 반발하거나 거기서 일탈한 이들(안나와 나보나 광장의 청년들) 주변을 집요하게 맴도는 영화이고 영화의 제작 방식 또한 사뭇 반제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피와 사르키엘리가 안나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끌어들인 조건들(사르키엘리의 아파트, 장시간촬영이 가능한 비디오, 사실의 기록과 분리불가능한 구성적 요소로서 재연의 활용)은 이미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제도로 기능한다. 감독들이 염두에 두거나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빈첸조와 안나에 의한 영화의 굴절과 중단은 (아무리 대안적인 방식이라 할지라도) 영화 제작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제도적 특성들에 대한 인간적 저항으로서, 1970년대 이탈리아의 정치적 지형에 상응하는 진정한 영화적 특이점들이 된다. 보다 간명하게 말하자면, <안나>는 그 실패를 통해 저항을 증거하는 영화다. 소설가 레이첼 커쉬너가 『아트포럼 Artforum』에 기고한 글("Woman in Revolt". 원문보기)에서 적절히 지적했듯, 그리피와 사르키엘리의 영화에서 안나라는 인물은 1970년대 “노동계급의 물질적 조건에서 히피, 학생, 비정규직 노동자, 마약중독자 그리고 여타 소외된 자들의 세계로의, 이탈리아 좌파의 구성상의 변화를 나타내는 징후”로서 읽힐 수 있다. 


<안나>는 1975년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이듬해에는 칸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후로 무려 40여 년 동안 이 영화는 이탈리아 영화계의 몇몇 이들에게는 전설처럼 떠도는 영화가 되었고 이탈리아 바깥에서는 거의 완전히 망각 속에 파묻혔다. (<안나>가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디지털 복원판이 2011년 베니스영화제 및 2012년 로테르담영화제에서 상영되면서부터다.) 이 영화에 얽힌 불운은 이것만이 아니다. 영화를 공동연출한 그리피와 사르키엘리는 크레딧 문제 - 사람들은 이 영화를 전적으로 그리피의 것으로 간주하곤 했다 - 로 갈라섰고, 안나는 빈첸조에게 아이를 떠넘기고 사라진 뒤 결국 로마의 정신병동에 입원했으며 그 이후 소식은 (지금까지도)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빈첸조는 한 싸움에 말려들었다 살해되었다. 두 명의 감독은 이 영화가 다시 빛을 보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피는 2007년에, 사르키엘리는 2010년에 사망했다.) 마치 흡혈귀처럼, <안나>는 그와 연루된 이들의 생을 박탈함으로써 육신을 얻었고, 오랜 기간 어둠 속에 잠들어 있다가, 홀연히 깨어나 우리 앞에 나타났다.

(* <안나> 복원판은 오스트리아 비엔나국제영화제(Viennale: Vienna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 의해 2013년에 DVD로 출시되었다. 비엔나영화제는 2012년에 알베르토 그리피 특별전을 마련한 바 있는데, 이 DVD는 그 특별전과 연계되어 기획, 출시된 것이다. 비엔나영화제 홈페이지(www.viennale.at)의 온라인 숍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었는데, 8월 25일 현재 확인해 보니 올해 영화제 준비로 잠시 온라인 숍을 폐쇄중이다. 이 영화는 다가오는 9월 DMZ 다큐영화제에서 상영될 예정이라 한다.)


키들랏 타히믹 Kidlat Tahimik

지난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필리핀 독립영화의 '아버지'(tatay) 키들랏 타히믹 특별전이 열렸다. 2011년 한국에서의 타히믹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감독에게서 받은 DVD로 이미 본 영화들이긴 했지만, 이처럼 한 자리에서 원래의 16mm 필름으로 볼 수 있어 행복했다. 당대의 다른 아시아영화들과 타히믹의 영화들을 나란히 놓고 생각해 보면, <향기어린 악몽 Perfumed Nightmare>(1977)은 오가와 신스케의 <산리츠카: 헤타 부락 Sanrizuka: Heta Village>(1973), 리트윅 가탁(Ritwik Ghatak)의 <티타쉬라 불리는 강 A River Called Titash>(1973), 소흐랍 샤히드 살레스(Sohrab Shahid Saless)의 <단순한 사건 A Simple Event>(1974)과 더불어 1970년대 아시아영화에 '지정학적 미학'(geopolitical aesthetics)의 새로운 대지로 향하는 창을 열어 보인 작품이고(하지만 창은 서둘러 닫혔다), <무지개 가운데는 왜 노란색일까? Why is Yellow the Middle of Rainbow?>(1994)는 비슷한 시기에 나온 다카미네 고의 <운타마기루 Untamagiru>(1989),  허우샤오시엔의 <희몽인생 The Puppetmaster>(1993) 그리고 배용균의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1995)과 함께 대안적/대항적 역사 기술 - 공적 역사의 창백함에 맞서, 이야기들(신화, 일기, 개인적 기억은 물론이고 허구에 이르기까지)의 재구성을 통해 역사적 '인상과 경험'을 복원시키는 것 - 의 방법론을 한층 정교화한 영화라 할 수 있다(이들의 시도는 계승되지 못했다). 

<향기어린 악몽>

나는 키들랏을 2009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보았다. 막 부산에 도착한 나는 해운대의 게스트센터에서 ID카드를 찾고 있었는데 바로 옆에서 한 백발의 노인이 ID카드와 이런저런 게스트패키지를 주섬주섬 챙기고 있는 중이었다. 대학시절(1990년대) 해적판 VHS 테입을 구해서 본 <향기어린 악몽>의 주인공과 너무나도 흡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보고 '키들랏 타히믹인가?'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칠 무렵, 30년이라는 시간이 인간의 얼굴에 응당 가하게 마련인 변화의 폭을 가늠하며 망설이고 있을 무렵, 어느새 그 백발의 노인은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그는 정말 빨리 걷는다.) 내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한 건 같은 날 오후, <향기어린 악몽>을 보러 간 영화관에서였다. 당시 이 영화는 닉 데오캄포의 16mm 중편 <올리버 Oliver>(1983)와 함께 상영되었는데, 16mm로 촬영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주제적으로나 형식적으로 전혀 연관이 없는 두 영화를 묶어 상영한 건 지나치게 운영상의 편의만을 고려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관객과의 대화 진행을 맡은 프로그래머는 두 편의 영화를 아예 보지 않았거나 그저 건성으로 보고 온 게 분명했다.) 

같은 해 12월, 나는 필리핀의 시네마닐라 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아 마닐라에 가게 되었다. 키들랏과 처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도 그 때다. 영화제 폐막식 자리에서, <점성사와 빨치산 The Woven Stories of the Other>(2006)과 <하수구 Imburnal>(2008)의 감독 셰라드 안토니 산체스(Sherad Anthony Sanchez)와 대화를 나누던 중, 나는 한국에서 키들랏의 전작을 모아 상영하는 회고전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셰라드는 그가 마침 이곳에 와 있다고 하며 - "아, 타타이(아버지)! 저기 와 계신데?"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폐막식장 한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름 그대로 '조용한 번개' - 타갈로그어 '키들랏 타히믹'을 직역하면 이런 뜻이 된다 - 처럼, 그렇게 그가 거기 있었다. 일군의 젊은 필리핀 감독들과 환담을 나누면서. 그 이후, 2010년 12월 마닐라에서 그를 다시 만났고, 2011년에는 그의 장단편 전작이 마침내 한국에서 상영되었다. (한편, 2013년에는 크리스토퍼 파브섹(Christopher Pavsek)이 저술한 『영화의 유토피아: 고다르, 클루게, 타히믹에 있어서 영화와 그 미래 The Utopia of Film: Cinema and its Future in Godard, Kluge and Tahimik』가 출간되기도 했다. 나는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 못했다.)  


영화를 만든다는 건 일시적이나마 어떤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이다. 종종 이 공동체는 영화가 완성되고 나면 사라진다. 이와 관련해,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의 감독이 있다. 첫째,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이들을 매번 찾아나서는 이들이 있다. 둘째, 자신과 뜻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함께 있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있다. (본디 예외적이었지만 점점 늘어가는 유형으로, 전적으로 홀로 영화를 만드는 이들도 있기는 하다. 이렇게 해서 영화는 '오디오비주얼 아트'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슬기롭게도, 영화의 신은 둘 가운데 어느 쪽을 특별히 편애하지는 않는다. 이 두 가지 유형 사이에는 차이만 있을 뿐 위계는 없다. (위계를 가정하는 건 인간적인 바람일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알베르토 그리피와 마시모 사르키엘리의 <안나>만 해도, 이 영화의 연출자들이 '영화로 만들기에 좋은 소재'로서 안나라는 소녀를 '발견'했음은 분명하며 이들이 그녀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만든 일시적 공동체는 촬영이 끝난 후 완전히 파탄나 버렸다. 하지만 이 영화는 걸작으로 남았다. 여기에 영화 고유의 잔혹성이 있다.) 물론 타히믹은 이 가운데 후자에 속하며 그것도 아주 극단적인 축에 속한다. 그의 영화적 공동체는 바로 그의 (실제) 가족이다. 우리는 <향기어린 악몽>의 주인공 타히믹이 극중 독일에서 만난 임신부가 그의 실제 아내 카트린(Katrin)이며 그녀 뱃속의 아이는 그의 첫째 아들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그 아이와 어머니를 <누가 요요를 만들었나? 누가 월면차를 만들었나? Who Invented Yo-Yo? Who Invented the Moon Buggy?>(1979)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무지개 가운데는 왜 노란색일까?>는 자신의 아이와 함께 기록해나간 그림책이자, 일기이며, 또한 1980~90년대 필리핀의 현실에 대한 풍자적 코멘트이기도 하다. 

나는 지난 8월 15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키들랏이 마침내 '완성'(!)한 <과잉개발의 기억 Memories of Over-development>(1980~2014)을 보다 그만 말문이 막혔다. 키들랏이 20년 넘게 진행해 온 마젤란의 필리핀인 노예에 관한 이 이야기는 - 그사이 촬영은 여러차례 중단되었고 키들랏은 더 이상 마젤란의 노예 역할을 할 수 없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 작년에 촬영이 재개되어, 예전의 16mm 촬영분과 비디오 촬영분이 뒤섞인 형태로 완성되었다. 키들랏의 아내 카트린은 물론이고, 그의 세 명의 아들 그리고 손자들이 모두 등장하는데 - 거칠게 정리하자면 둘째 아들이 연기한 주인공이 한 노인(키들랏)을 찾아 다니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짜여져 있다  - 극중에서 묘사된 이들의 직업 또한 (키들랏의 경우를 제외하면) 실제 그대로이다. 사실, '완성'된 <과잉개발의 기억>은 원래의 역사적 에세이 프로젝트가 이리저리 굴절된 끝에 온전히 키들랏 가족의 '홈비디오'로 소박하게 정리된 것이라고 보아야 옳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미학적으로 실패한 영화이다. 하지만 그 실패를 통해, 가족이라는 형태로 지속되어 온 하나의 영화적 공동체의 성공을 증거하는 영화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2년 전 한국에서의 전작 회고전 당시 함께 마련되었던 키들랏 전시의 제목은 "패밀리-트리, 필름-매트릭스"(Family-Tree, Film-Matrix)였다. 

(*<과잉개발의 기억>은 9월에 개막하는 「미디어시티 서울 2014」 (2014.9.2~11.23) 기간 중에 다시 상영될 예정이라 한다.) 


  

2014-08-05

장-뤽 고다르의 <칸 칸느 Khan Khanne>(2014)


" I Don't Have My Heart in My Mouth"
: 장-뤽 고다르의 비디오 편지


올해 첫 공개되었지만 아직 보지 못한 영화들 가운데 조만간 꼭 보고 싶은 영화를 꼽으라면 단연 장-뤽 고다르의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이다. 지난 5월 초, 신작 촬영 중이던 페드로 코스타를 리스본에서 만났을 때 그는 고다르의 신작을 운좋게 미리 보았다고 했다. "정말 아름다운 영화"였다고 하기에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거기서 고다르가 영화란 정말 단순한(simple) 방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거라는 걸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처럼, 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최근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한 감독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는 복잡한(complicated) 영화를 만들지만 그것은 너무 쉬운(easy) 방식의 영화만들기라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돌연 식당 테이블에 놓여 있던 받침용 세팅지를 뒤집어 포르투갈과 스페인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여백을 가리키며) 장-뤽 고다르는 롤에...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는 포르토에... 빅토르 에리세는 산세바스티안에...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포르투갈 북부의] 기마랑이스에... 그리고 나는 리스본에 있다. 모두 고독하고, 단순하게 영화를 찍는 이들이다." (짐작했겠지만, 이 다섯 명의 감독들은 옴니버스 영화 <센트로 히스토리코 Centro Histórico>(2012)에 참여했거나 참여가 약속되어 있었던 - 고다르의 경우 - 이들이다.) 

한국에서도 언론을 통해 짧게 보도된 바 있지만, 올해 고다르는 칸영화제에 불참하는 대신 집행위원장 질 자콥과 예술감독 티에리 프레모 앞으로 한 통의 비디오 편지("Letter in Motion to Gilles Jacob and Thierry Fremaux")를 보냈다. 이 영상은 온라인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래 참조). 


9분 정도 되는 이 짧은 영상은 사실 한 편의 빼어난 단편 에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국내 언론에서는 올해 칸영화제의 작은 스캔들 정도로 다루었을 뿐 제대로 소개된 바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워낙 짧은 영상이라 혹시라도 누군가 나서 번역을 해 올리는 이가 없을까 기대해 보았지만 감감 무소식이어서, 결국 (형편 없는) 프랑스어 독해력과 (영어권 필자들이 올려둔) 부분적인 영문 번역 - 내가 보기에도 원래의 프랑스어를 너무 단순화하거나 의역한 경우가 많았다 - 을 토대로 내가 직접 번역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한글로 번역한 자막파일(smi 파일)을 여기 올려 두었다. (프랑스어에 익숙한 분들이 조금 더 근사하게 수정하거나 수정할 부분을 댓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다.) 

이 비디오 편지에는 프랑스의 과학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장 카바이에스(Jean Cavaillès, 1903~1944)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아주 짧은 언급인데 함축이 짙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Hannah Arendt"라는 이름이 떠오를 때, 고다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나는 종종 전체주의의 기원이 된 집에서 위안을 찾는다네. 장 카바이예스가 게슈타포에게 저항했던 곳이지." 한나 아렌트 - (그녀의 저서 제목인) 전체주의의 기원 - 나치즘 - 게슈타포 - 레지스탕스 - (그 일원이었던)  장 카바이에스,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연상적 사유, 반-실증주의적(anti-positivist) 역사 기술, 혹은 역사적 몽타주는 고다르의 숱한 작품에서 익히 봐 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전체주의의 기원이 된 집"이란 대체 무엇일까? 거기서 위안을 찾는다는 건? 그리고 왜 카바이에스인가? 이에 대한 단서는 조금 뒤에 나온다.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어둠에 묻힌 텅 빈 극장의 무대 위에 선 고다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체주의의 지도자들이 활용한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내용이 아니라 법의 근거가 되며 법에 한결같은 확실성을 제공하는 논리와 같은 종류의 논리다."(This is not the content of ideologies, but the same logic which totalitarian leaders use which produces this familiar ground and the certainty of the Law without exception.)

먼저, 이 장면은 (고다르의 동반자인) 안느-마리 미에빌이 1997년에 만든 <우린 모두 아직 여기에 있다 Nous sommes tous encore ici>에서 따 온 것이다. (비디오 편지에 발췌, 삽입된 미에빌 영화의 해당 부분은 이곳에서 조금 더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고다르는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1951)이 아니라 그보다 뒤에 집필된) 논문 「전체주의의 본성에 대하여 On the Nature of Totalitarianism」(1954)를 낭독하고 있는 중이다. 전체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논리에 의해, "관심과 무관한 순수한 추론"에 의해 지탱되었다는 아렌트의 주장 - 이는 전체주의가 감정을 자극하는 선동과 결부되어 있다는 통념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 을 되새기면서, 고다르는 불현듯 (그다운 비약을 통해) 그러한 '논리'를 다루는 일에 종사했던, 그리고 레지스탕스였던 한 수학자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고다르가 보기에, 장 카바이에스의 저항(resistance)은 두 가지 층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는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서 나치즘(전체주의)에 정치적으로 저항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체주의의 기원이 된 집"으로서의 논리의 기초를 다시 묻는 형식적이고 이론적인 것이었다.  

나는 아직 카바이에스의 저술을 직접 읽어보지 못했다. 다만 그가 저술한 책들의 제목을 살펴보고 이런 추정을 하게 된 것 뿐이다. 제목만으로 거칠게 추정해보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수학계를 휩쓸었던 집합론, 형식주의, 수학기초론 등과 관련된 저술들로 여겨진다. 몇 가지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공리적 방법과 형식주의』, 『추상적 집합론의 형성에 대한 논변』. 그리고 칸토어와 데데킨트 간에 주고받은 서신들을 편집해 간행하기도 했다. 고다르가 카바이에스의 저술을 직접 읽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내 생각에 그는 조르주 캉길렘(George Canguilhem)의 『장 카바이에스의 삶과 죽음 Vie et mort de Jean Cavailles』을 통해 카바이에스에 접근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카바이에스는 프랑스 우표에 얼굴이 실린 인물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아래 사진.) 고다르는 캉길렘, 특히 그가 J. 브랭과 공동으로 저술한 『생명과학의 역사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와 합리성 Ideologie Et Rationalite: Dans L'histoire Des Sciences De La Vie(국내에도 번역되었으나 현재는 절판)이나 『정상과 병리 Le normal et le pathologique』(역시 번역되었으나 절판) 같은 책의 애독자였다. 



확실히, 여기서 고다르는 장 카바이에스의 '저항'과 자신의 '저항'을 오버랩시키고 있다. 그가 "전체주의의 기원이 된 집에서 위안을 찾는다"고 말할 때, 이는 그가 어떤 식으로건 이성, 추론, 논리, 언어의 세계에서 싸우고자 노력해 왔음을 뜻할 - 나는 고다르를 간단하게 '직관적'이고 '감성적'이고 '시적'인 시네아스트라고 말하는 평론가들을 믿지 않는다. 그는 확실히 그만의 방식으로 이론적이다. - 것이다. 그리고 장 카바이에스가 게슈타포(전체주의의 환유)에게 저항한 레지스탕스였던 만큼이나 철학자이자 수학자이기도 했던 것처럼 자신 또한 그와 유사한 자리에서 저항해 왔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다르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 예전에 네이버 블로그에 짧게 정리해 둔 적이 있는데, 이 글 말미에 옮겨 두었다.) 전체주의란 법, 과학 혹은 수학, 그리고 예술과 (간단히 대립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의 장 위에서 펼쳐지며, 따라서 이 장은 무엇보다 격렬한 투쟁의 무대가 된다.  

하지만,

"[...] 그보다 종종 나는 코델리어와 점심을 함께 하며 그녀와 침묵을 나눈다네." 고다르 자신의 영화 <리어 왕 King Lear>(1987)의 발췌장면과 더불어 그가 읊조리는 말. 이 비디오 편지에서 고다르가 비로소 무언가를 토로하는 순간. (말 그대로 '언어와 작별'하기로 결심한 이유를 밝히는 순간?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언어와의 작별>을 아직 보지 못한 상태에서 판단할 수 없다.) 코델리어는 말한다. "제 마음은 제 입에 담겨 있지 않아요." 고다르는 카메라를 보며 - 실은 우리는 그의 눈 아래 부분만 볼 수 있다. - 코델리어의 말을 똑같이 읊조린다. 왕국을 가진 자는 누구인가? 말로써 진심을 표현하기만 하면 왕국을 분할해 나누어 주겠다고 하는 자는 누구인가? (자, 이 비디오 편지가 이른바 세계 최대, 최고의 영화제라 일컬어지는 칸영화제의 수장들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걸 기억하자.) 말의 거부, 왕국과 그것의 지배에 대한 거부. "그래서 나는 떠나네. 나를 실어나르는 바람과 함께, 여기저기로, 고엽처럼 말이네." 그가 "하나의 단순한 왈츠"라 부른 <언어와의 작별>을 남기고. 

* 고다르가 올해 내놓은 작품은  총 3편이다. 칸영화제 측에 보낸 비디오 편지, <언어와의 작별> 그리고 옴니버스 <사라예보 다리 The Bridges of Sarajevo>에 포함된 "탄식의 다리 The Bridge of Sighs"가 그것이다. 

* [2014.8.12 추가] <언어와의 작별> 완성 직후 가진 한 인터뷰에서 고다르는 올해 칸영화제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기억하기론, 과거에 나는 칸영화제에 가는 게 행복했는데 어떤 가족... 영화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현실에서는] 가족적 삶이라는 게 없었던 우리가 거기서 다른 종류의 가족을 [...] 찾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 점점 이 가족이 다른 가족보다 더 나쁘다는 걸 알게 되자 더 이상은 거기 가고 싶지 않았다." 이 발언이 담긴 인터뷰 전체 영상은 이곳(1부2부)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오늘날의 SMS(Short Message Service)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건 사실 고독한 자들이 내뱉는 "내 영혼을 구해줘"(Save My Soul)라는 신호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3D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전혀 흥미롭지 않다는 점이라고 일갈한다. 또한 그가 현재 살고 있는 스위스의 보(Vaud) 주에서는 "adieu"라는 프랑스어가 문맥에 따라 "farewell"과 "hello"의 상반되는 뜻을 지닌다고 한다. (즉, 한국어에서 "안녕"이라는 말의 용법과 유사하다.) 기억할 만한 말 하나. "많은 언어가 있지만 더 이상 제대로 된 낱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낱말들은 숲 속에서, 혹은 아프리카에서 [...] 길을 잃었다." 

* [2014.8.12 추가] 칸영화제에서 배포된 <언어와의 작별> 프레스북에 실린, 고다르가 직접 작성한 영화 개요와 번역문.




<언어와의 작별>
개요

이야기는 간단하다
유부녀와 독신남이 만난다
그들은 사랑하고, 다투고, 주먹이 오간다
한 마리 개가 읍내와 마을을 배회한다
계절이 지나고
남자와 여자는 재회한다
그들 사이에 개가 있다
하나는 다른 하나 속에
다른 하나는 하나 속에
그리고 그들은 셋이다
전남편이 모든 걸 부숴버린다
두 번째 영화가 시작된다
첫 번째와 같지만
그래도 다른 영화
우리는 인류로부터 메타포로 향한다
이것은 개 짖는 소리와
아이의 울음 소리로 끝난다

장-뤽 고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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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현재는 운영을 중단한 네이버 블로그에 썼던 메모 中 발췌한 것임] 

고다르가 영화사라기보다는 과학사의 영역 내에 자신을 위치지으려 하는 시도는 꽤 집요한 데가 있다. 예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고다르 특별전 소개차 <씨네 21>에 기고한 짧은 글에서 나는 이미 이런 점을 지적한 적이 있다.   

"이미지의 정치학이라고 할 만한 고다르의 이 같은 사유와 더불어 우리 또한 답변이 없는 물음들만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깊은 숙고로 즐겁게 빠져들곤 하는데, 그 과정에서 종종 간과되곤 하는 것이 과학에 관한 고다르의 견해이다. 비평가이자 영화감독으로서의 고다르가 ‘발견’과 ‘발명’의 수사학을 종종 끌어대는 것도 영화(와 스스로)를 예술사뿐 아니라 과학사의 한 부분에 위치시키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는 뤼미에르 스스로가 “미래가 없는 발명품”이라 진술했던 영화의 과학적 기원을 잊지 않는다. 또한 영화와 정치의 몽타주를 근심하는 동시에 영화와 과학, 과학과 정치의 몽타주에 대한 사유를 병행한다. 물론 여기서 고다르가 자신을 위치시키는 곳은 언제나 영화이며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정치와 과학은 ‘여기’(here)의 영화가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다른 곳’(elsewhere)으로서 기능한다. 즉 그는 “여기에 있는 것을 본다. 다른 곳에 있는 것을 찾기 위해.”(<탐정>) 물론 고다르는 정치학자가 아닌 만큼이나 과학자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정치학과 과학의 방법론을 영화적으로 ‘번역’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왔고 또 그러한 번역의 가능성에 대단히 민감한 시네아스트이다. 예컨대 <즐거운 지식>은 화학에서의 물질의 정성적(定性的) 분석방법을 이미지의 분석에 도입하려는 시도이다. 여기서 파트리샤란 인물은 이미지와 사운드를 “요소로 분해하고”, “환원시켜”, “치환기”를 만들고, “재배열한” 뒤에 사운드와 이미지의 올바른 모델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그런가 하면 <잘 돼 갑니까?>는 ‘비트’(bit) 개념과 정보이론의 창시자인 클로드 섀넌의 노이즈(noise) 이론의 영화적, 실천적 적용이다. 고다르는 한 인터뷰에서 “노이즈는 단순히 기술상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라고 말하면서, 동시대 유럽인의 삶을 바꿔놓은 ‘사회적’ 노이즈의 실례로서 베트남전을 들었다. 또한 그는 <열정>의 인물들이 “자기장 속을 가로지르는 철심들”로 고려될 수 있으며 이 영화는 그것들의 교차에 관한 이야기이자 비전이라는 식의 괴이한(?)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과학적 방법론의 예술적 전유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괴테의 소설 『친화력』을 떠올리게도 하는 고다르의 모험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그를 둘러싼 숱한 비평적 상투구들로부터 벗어나는 한 방법일 수도 있겠다."

고다르와 과학 사이의 관계에 대해 흥미를 갖고 찾아보았던 글들 가운데 지금 기억나는 것은 시네마 저널 Cinema Journal(vol.41, no.2, Winter 2002)에 실렸던 케빈 J. 헤이즈(Kevin J. Hayes)의 고다르의 <잘 돼 갑니까>(1976) : 정보이론에서 유전학까지 Godard's Comment Ca Va (1976) : From Information Theory to Genetics라는 논문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인터뷰집 고다르 X 고다르에서 고다르의 과학에 대한 언급들 가운데 흥미롭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여기 옮겨 보았다. (페이지 표기는 한글번역판의 것임.)

"<결혼한 여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 영화를 만들고 있었을 때, 꼭 곤충학자가 벌이나 새를 연구하는 것처럼 이 젊은 여인을 연구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만을 보고 어떤 과학법칙을 찾아내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p.49)

""과학자"라고 말하는 것은 주제넘게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과학학도가 연구실에서 작업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2~3개월 동안 무엇인가를 탐구한 것에 대한 결과일 뿐이다."(p.72~3)

"나에게 과학자와 에세이스트는 동일한 존재이다."(p.74)

"정보에 대한 일반적 관념을 정립한 클로드 섀넌이라는 미국 과학자가 있었다. 그는 송신기와 통신로가 있은 다음에 송신기가 하나 더 있고 그 다음에 수신기가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통신로에서 케이블은 소음이 생기는 곳이다. 우리는 이 소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우리처럼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소음은 단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 20년 동안 북베트남에서 나오는 소음은 여기서 자기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p.110~111)

"예술가와 과학자는 유사합니다. 나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바라건대 과학자처럼 섞습니다. 과학적인 것의 비밀은 예술적인 것의 비밀과 같습니다. 비참(悲慘)도 서로 같습니다."(p.121)

"진정한 영화잡지가 있다면 그것은 과학자들이 하는 방식으로 상호소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그 때문에 과학이 미국 국방부에 있든, 다른 어디에 있든 그렇게 강력한 것이다. 도쿄의 과학자들은 샌프란시스코의 과학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그들은 편지를 주고받는다."(p.168)

"이미지는 법정의 증거 같은 것이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증거를 제시하는 것과 같다. 그릇된 증거를 제시한다면 그것은 검토될 수 있겠지만 말은 새로운 증거를 수립하기 위해서 이용되어야 한다.이것이 과학자가 일하는 방식이다. 나는 과학자들과 매우 가깝다고 느끼는데 그것은 우리 모두 사물에 대한 접근방식을 구축하기 때문이다."(p.193~194) 

"영화는 사물을 보고, 식별하고, 연구하기 위하여 발명되었다. 영화는 주로 과학의 도구였다... 생명체를 상이한 방식으로 보기 위한 것이었다. 볼거리는 영화의 5에서 10퍼센트이어야 한다. 나머지 전부는 탐구와 에세이를 의미하는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연구를 위한 다큐멘터리이어야 한다. 나는 반은 소설가이고 반은 에세이스트이다."(p.283)



2014-07-16

음각(陰刻)의 기술: 이미지, 재난의 가장자리에서


음각(陰刻)의 기술 
: 이미지, 재난의 가장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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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한국어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6월호에 게재되었던 것을 옮긴 것으로, 게재 당시 제목은 「포스트 시네마 시대의 재난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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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움직이는 사진이라 불리기도 했던 것, 그러다 20세기를 자신의 시대로 삼았던 것, 이제는 움직이는 이미지들(moving images)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 여전히 영화라 불리기는 하지만 가까스로 그러한 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영화적 이미지 고유의 힘이 사라진, 혹은 더 이상 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닌, 이른바 포스트-시네마 시대에 그러한 힘의 빈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 2014년 4월 16일, 하나의 재난이 위세를 떨치며 온갖 무(기)력한 이미지들을 서서히 잠식해가는 광경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질문 가운데 하나다. 그러한 질문에 사로잡힌 채, 꼭 영화라고만은 할 수 없는 몇 편의 영상작업들을 보았다. (사고가 나기 전부터 일정이 잡혀 있었던 강의나 대담과 관련해서였다.)

4월 17일 밤, 나는 거의 혼자만의 힘으로 <수련>(2013)이라는 첫 장편영화를 만든 김이창 감독과 대담을 나누기 위해 마포아트센터에 있었다. 바로 그 시각까지만 해도, 나는 전날의 여객선 사고로 인해 실종된 이들 상당수가 곧 구조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나서 스무 명 남짓한 관객들 앞에서 대담에 임했는데, 전날 있었던 사고에 대한 언급은 따로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련>은 홀로 고시원 생활을 하며 직업을 구하고 있는 한 무술 사범의 삶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김이창 감독 자신이 연기한 주인공이 버려진 건물의 체육관에서 역기를 들고 수련하는 모습을 앙각(low angle)으로 담은 13분짜리 장시간 촬영(long take) 쇼트로 시작된다. 작년 서울독립영화제 이후 이 영화를 본 몇몇 이들은 하나같이 이 첫 쇼트의 힘에 대해 언급했다. ‘그저 지켜보며 기다림’이라고 하는 태도와 결부되어 있는 장시간 촬영 고정 쇼트에 어떻게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감각을 부여할 것인가라는 문제 - 들고 찍기(hand-held)나 이동 촬영의 경우에는 문제가 좀 달라지겠지만 - 는 오늘날 적지 않은 영화감독들을 사로잡고 있다. 촬영이라고 하는 행위 자체가 곧바로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감각과 결부되어 있던 시기, 즉 제법 육중한 35mm 필름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던 십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이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영화라고 하는 예술의 과정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그런데 카메라라는 영화장치와 그것을 둘러싼 조건들이 영화에 부여했던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감각이 소멸되자, 아예 카메라 앞에 (배우, 모델 혹은 피사체로서) 선 이들이 그러한 감각을 내세우기도 한다. 말하자면 영화의 어떤 힘이 사라지자 인간적 힘으로 그 자리를 대체하려 하는 것이다. 오늘날 슬로우 시네마(slow cinema)라고도 불리는 예술영화의 한 경향을 따르는 작업들이 종종 인간의 수행 혹은 수련 자체를 기록하곤 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수련> (김이창, 2013)

물론 이러한 수행의 영화, 수련의 영화가 전적으로 영화의 디지털화로 인해 생겨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온당치 않다. 예컨대, <노스탤지어>(1983)의 마지막 부분에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마른 온천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촛불을 옮기려 애쓰는 인물을 집요하게 보여줄 때, 우리는 거기서 수행 혹은 수련의 감각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영화감독, 촬영감독, 배우 그리고 아마도 이동 촬영용 돌리(dolly)를 밀고 있었을 스태프들은 <수련>의 김이창과 다를 바 없는 물리적/신체적 운동에 빠져 있는 중이다.

오늘날 디지털 영화제작에서 장시간 촬영과 결부된 수행 혹은 수련의 감각을 가장 극단적으로 몰고 나가고 있는 예는 아마 차이 밍량과 그의 ‘행자’(行者) 연작 - <행자>(2012), <무색>(2012), <금강경>(2012), <몽유>(2012), <행자수상>(2013) - 일 것이다. 이것은 차이 밍량의 페르소나로 잘 알려진 배우 이강생이 법복을 입고 아주 느리게 여러 공간들을 걷는 모습을 담은 매우 단순한 구성의 단편영화로 거의 미술관용 인스톨레이션에 가까운 개념적인 작업이다. 올해 베를린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53분짜리 중편 <서유>는 이 연작의 여섯 번째 작품인데, 여기서 차이 밍량은 이강생이 한 지하도 계단을 아주 느린 걸음으로 내려가는 광경을 거의 20여 분에 이르는 장시간 촬영 고정 쇼트에 담아 보여준다. 한편, <수련>에서 김이창이 자신이 수련할 체육관 바닥을 세심하게 물걸레질하는 장면에서는, 실시간 촬영으로 추수의 광경을 담아낸 <노>(2003)나 조개잡이 광경을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포착한 <더블 타이드>(2009)의 샤론 록하르트 - 그녀는 디지털이 아닌 16mm 필름으로 작업했다. - 를 떠올리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내게 <수련>의 첫 쇼트는 신선하다기보다는 꽤 익숙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나는 <수련>의 첫 쇼트와 그 이후 이어지는 유사한 쇼트들에서 어떤 영화적 힘도 감지할 수 없었다. 이 영화에서는 한때 영화가 담당했던 특정한 힘의 역할을 그야말로 인간의 완력이 온전히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완력을 다시 철저하게 비인칭적(impersonal) 시선의 카메라로 포착함으로써 얻어낸 - <수련>의 첫 쇼트는 녹화버튼이 눌러진 상태로 체육관 바닥에 놓인 카메라로 촬영되었다. 주인공이 역기를 바닥에 떨어뜨릴 때마다 카메라도 격하게 흔들리곤 한다. - 이러한 이미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만일 <수련>을 일종의 ‘순수영화’(pure cinema)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영화가 빠져나간 자리를 채우는 인간의 완력, CCTV 스타일의 비인칭적이고 비인간적인 시선, 홍보영상과도 같은 자연풍경,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 착한 내레이션 등에 의해 지시되는 영화적 텅 빔의 상태, 요약하자면 영화의 부재를 통해 오히려 영화를 강력하게 지시하고 또 호명하는 영화적 순진성(idiocy) 때문일 것이다. <수련>의 마지막 쇼트, 한가운데 부분이 완전히 허물어진 가운데 건물 두 동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광경은 이 영화의 형식에 대한 완벽한 은유가 되고 있다. 없음을 통해 지시되는 한때 있었던 것의 기억 말이다. 그런데 그 부재의 자리에 현실적으로 솟아난 것은 무엇인가? 폐허, 곧 재난이다. 재난의 언저리로 밀려난 이미지다. 

김이창 감독과의 대담을 마치고 난 하루 뒤인 4월 18일, 나는 옥인콜렉티브의 비디오 작품 상영회 및 대담을 참관하기 위해 한국영상자료원으로 향했다. 여객선 침몰사고와 그 이후 이어진 안타까운 소식들 때문인지 관객은 많지 않았다. 우연히도, 정황은 옥인콜렉티브의 단편 <작전명―까맣고 뜨거운 것을 위하여>(2012)를 매우 특별한 자리에 있게 했다. 암전된 화면, 위험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이 작품은 국가의 각종 재난대피 매뉴얼을 패러디한 것으로, 원자력 사고 발생 시 개개인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고안된 가상의 기체조 매뉴얼 비디오다. 

<작전명―까맣고 뜨거운 것을 위하여> (옥인콜렉티브, 2012)

이 비디오는 (요가나 다이어트 비디오, 혹은 각종 안전수칙 비디오에서 차용했을 법한) 익숙한 영상 상투구들로만 가득하며, 그런 까닭에 영화적으로는 텅 빈 상태이자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완벽하게 ‘탈-영화적’이다. 다만 <수련>의 텅 빔이 순진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작전명>의 텅 빔은 그야말로 예술적 전술이라 할 만한 것이다. 이러한 전술적 텅 빔 속에서, 또 다른 수련(기체조)이 펼쳐진다. (“작전을 실행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수련이므로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참여해 주시길 바랍니다.”) ‘숙련된 마스터’의 기체조 동작은 때로는 따라 하기 쉽지 않은데 - 때로 이 사실은 ‘숙련된 마스터’ 오른편 뒤 여성 보조요원의 서툰 동작으로 인해 강조된다. - 그의 완벽한 동작은 <수련> 식의 완력이 아니라 우스꽝스러움을 유발한다. 웃음이 공포의 외투가 된 곳에서 효력의 과시는 도리어 무(기)력함을 상기시킬 뿐이다. 이처럼 영화적으로는 텅 비어 있되 상투적으로는 빈 곳 없이 꽉 찬 <작전명>의 거짓 충만함은 편재하는 재난 이외에 아무 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여기서도 이미지는 그 힘이 아니라 부재를 통해 강력하게 재난을 지시한다. 

지난 3월 22일과 23일, 인디아트홀 공 옥상의 폐공장 옆에서 진행되었던 <서울 데카당스―Live>(2014) 또한 연극의 부재를 통해 연극을, 그리고 무엇보다 재난을 지시하는 공연이었다. 이 공연은 옥인콜렉티브의 비디오 작업 <서울 데카당스>(2013)와 개념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전자에는 연극 <구일만 햄릿>(2013)에서 연기했던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이, 후자에는 트위터에 친북 메시지를 게시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박정근이 등장하고 있다. 공연과 비디오 작업 모두에서, 하나의 단순한 상황이 인물들에게 던져진다. 즉, 그들이 섰던 혹은 서게 될 무대 -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경우 <구일만 햄릿>의 무대, 박정근의 경우 ‘법정이라는 무대’ - 를 위한 연기의 기술(技術)을 어떤 가상의 무대에서 ‘수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극연출자들과 전문배우가 그들을 지도하는 이들로서 등장한다. 


옥인콜렉티브의 <서울 데카당스―Live>(2014) 공연이 끝난 후의 '무대'

중요한 것은 (1) 인물들에게 주어진 무대가 ‘가상적’ - 폐공장 옆의 옥상, 비디오 촬영을 위해 마련된 (취조실을 연상케 하는)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세트 - 이라는 것이고 (2) 그들이 수행하는 리허설은 이미 과거에 끝난 공연(<구일만 햄릿>) 혹은 사실상 공연이 아닌 것(법정에서의 재판)을 위한 준비이기에 부조리하다는 점이다. 여기서 연극, 비디오, 텍스트(셰익스피어의 <햄릿>, 진술서) 등의 매체는 각각에 고유한 미학적 힘을 비워낸 텅 빈 형식, 즉 폐허로서 호출되며 오직 그럼으로써만 인물들을 둘러싼 재난의 형상에 상응하는 ‘상황’(situation)을 (탈)구성하게 된다. 이처럼 예술적 폐허만이 실재를 불러들일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옥인콜렉티브의 에토스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작업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상황 속에 던져진 개인들이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 드러내는 표정과 몸짓을 관찰하게끔 하는 것 외에 아무런 목적도 지니고 있지 않다. 이때 표정과 몸짓은 그 자체로 재난의 풍경이 된다. 이처럼 꽤 역설적인 방식으로 연극이라는 매체의 힘 - 브레히트적 의미에서 게스투스(gestus)를 촉발시키는 것 - 과 정치성을 회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울 데카당스> 연작은 <작전명>은 물론이고 옥인콜렉티브의 또 다른 작업 <거리의 돈키호테>(2013)와도 동일한 예술적 전략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거리의 돈키호테>에서 그들은 경제위기로 시달리고 있는 스페인에서 길 가는 시민들로 하여금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몇몇 구절들을 낭독케 하고 이를 기록했다. 
        
오늘날 포스트-시네마 시대의 영화, 포스트-드라마 시대의 연극, 보다 일반적으로는 포스트-미디어 시대의 예술을 사유하려 하는 이들이 종종 빠져들곤 하는 오류는 담론(적 형식) 자체를 예술화하려는 데서 비롯된다. 하지만 재난이 끊임없이 우리를 위협하는 시대에, 그러한 시도는 오늘날 흔히 접하게 되는 비판적 전통에 선 어수선한 ‘혼합 매체’ 작업들이 결국 재난의 희화화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무(기)력하다. 특정한 장르 혹은 매체 내에 머물더라도 그것의 미학을 온전히 비워내면서 음각(陰刻)으로 재난을 그려내는 것이 미래의 우리를 위한 동시대성이 아닐까? 이때 영화적 이미지는 그의 폐허의 가장자리에서 소멸을 기다리는 것으로 자신의 윤리를 회복하고, 어쩌면 부활을 꿈꿀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