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4

『식물성의 유혹 : 사진 들린 영화』(2023)

 

※ 2023년 10월 31일에 보스토크프레스에서 출간된 『식물성의 유혹: 사진 들린 영화』는 『유령과 파수꾼들: 영화의 가장자리에서 본 풍경』(미디어버스, 2018),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보스토크프레스, 2021)에 이은 나의 세 번째 책이다. 아래는 이 책의 서문이다.





사진과 영화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믿던 야만적 즐거움의 시대가 있었다. 영화는 초당 24장의 사진을 스크린에 영사하는 매체로 간주되던 시절의 이야기다. 영화를 구성하는 이런 사진들을 프레임이라고 부르곤 했다. 오늘날 영상 매체를 다루는 이들도 프레임이라든지 FPS(초당 프레임 수) 같은 용어들을 여전히 쓰고는 있지만 약간의 기술적 이해만 있으면 이런 용어들이 더는 예전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다. 이 용어들이 가리키던 대상이나 과정은 사라졌음에도 어쨌거나 용어들이 남아 있어 사라짐이 은폐되는 것이다. 우리는 화폐라는 말을 여전히 쓰고 있지만 오늘날의 화폐는 조개(貨)나 비단(幣)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심지어 이 말이 조개와 비단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도 거의 없다. 물론 이런 완벽한 사라짐이야말로 기원의 자리에 걸맞은 것이다. 

다른 의미에서, 사진과 영화는 이제 화폐와 동일한 기반에 놓이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픽셀 또는 비트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개념)을 과연 ‘기반’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물질적・기술적 기반에 대한 고찰만으로 사진과 영화의 관계를 다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그런 고찰에서 나오는 것은 빈약하기 짝이 없는 시시한 결론들밖에는 없을 터다. 영화가 초당 24장의 사진으로 구성되건, 사진이나 영화가 모두 픽셀과 비트의 조합물이건, 이는 우리가 사진과 영화를 실제로 지각하는 경험적 차원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이는 조개에 관한 과학적 연구가 고대의 화폐 문화를 이해하는 일에, 픽셀과 비트에 관한 수학적・공학적 연구가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일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베르그송의 통찰을 나름대로 빌려 말하자면, 사진과 영화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지극히 물질적이지만, 어디까지나 ‘사물’과 ‘표상’ 사이에 있는 존재로서의 이미지라는 점에서 그렇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는 그것을 종이, 필름, 스크린, 모니터 등의 물질적 ‘기반’으로 환원하려 들면 돌연 정신적 차원을 드러내고, 그것을 정신적 실체로 환원하려 들면 엄연한 물질적 현존으로 저항하곤 한다. 사진과 영화의 관계를 묻는다는 것은 이처럼 이중적인 특성을 띤 두 대상, 게다가 인접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매우 이질적인 두 대상의 관계를 묻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고찰의 까다로움은 배가된다. 그러한 관계 자체가 물질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특성을 띠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을 띤 대상 또는 관계에 대해서 우리는 속성들의 집합을 구성할 수 없다.

가령, 서로 다른 사람(들)과 사람(들)이 관계 맺는 방식들 가운데 하나인 ‘게임’에 대해 생각해보자. 게임이란 무엇인가? 축구・야구・농구・배구 같은 구기와 권투・레슬링・유도・주짓수 같은 격투기, 바둑・장기・체스나 고스톱・포커・마작 그리고 컴퓨터로 온라인상에서 플레이하는 리그오브레전드・오버워치・디아블로 등 일정한 규칙을 정해 두고 승부를 겨루는 행위를 우리는 모두 게임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모든 행위를 가로지르는 공통의 속성은 무엇인가? 속성을 규정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는 게임이라는 대상에 어떻게도 분석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위에 언급한 행위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게임이라는 용어로 포괄해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이해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게임이라 불리는 행위들의 공통적 속성을 먼저 파악한 뒤 각각의 사례를 검토하는 방식이 아니라, 축구를 하거나 바둑을 두거나 리그오브레전드를 관전하는 등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수행을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서다.

이 책이 사진과 영화의 관계를 탐색하는 방식이 바로 이와 같다. 나는 사진과 영화 각각의 존재론으로부터 출발해 그 둘의 연관을 따져보기보다는 마치 귀신 들리듯 사진 들린 영화들을 찾아다니며 산책하고 싶었다. 에세이란 이러한 산책자의 움직임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 책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분석적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대상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에세이다. 에세이는 판단을 위한 보편적 규칙이 일반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이질적 대상들에 대한 관찰・비고・단상・주석의 장르라고 보는 리오타르를 따르면 말이다. 아도르노는 에세이의 진정한 주제는 자연과 문화가 환원 불가능할 정도로 얽힌 ‘이차적 자연’─다시 베르그송을 떠올려 보면, 사물과 표상 사이에 있는 물질로서의 이미지가 여기 해당하겠다─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절차에 있어서는 과학적이고 방법에 있어서는 철학적인 에세이의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이 책의 초안이 된 것은 2017년 5월부터 2021년 3월까지 사진 잡지 《보스토크》에 ‘스톱-모션’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들이다. 하지만 한 권의 단행본으로 구성을 잡으면서 몇 개의 주요 토픽에 따라 글들을 분류하고 전체적으로 다시 쓰다시피 했다. 그 과정에서 원래의 글에서 일부만 활용하거나 다른 지면에 발표했던 글을 활용하기도 했고 어떤 부분은 완전히 새로 쓰기도 했다. 그리고 ‘스톱-모션’ 칼럼에 발표되었던 글이라 해도 이 책에서 염두에 둔 토픽과 어울리지 않거나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글은 아예 활용하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탄생하는 책은 없다. 이 책 역시 보스토크프레스 편집진의 제안과 격려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정기적으로 글을 쓰도록 지면을 마련해준 김현호 발행인, ‘스톱-모션’이라는 칼럼 제목을 제안하고 언제나 정중하고 절제된 압력을 행사해 꼬박꼬박 마감일을 각인해준 박지수 편집장 두 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두 분은 내 글에 따뜻하면서도 날카로운 논평을 해 주는 최선의 독자이기도 하다. 때로 어쩐지 글을 성급하게 마무리 지었다 싶으면 엄하게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며 글 전체를 다시 쓰게도 하는 김미경에게는 항상 고마운 마음이다. 책의 몇몇 부분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글과 말로 나누어 주신 강상우 감독님, 김수환 선생님, 김신욱 작가님, 서동진 선생님, 신은실 평론가님, 이윤영 선생님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은밀히 저자를 사로잡고 있는 강박이 우리 시대에 걸맞은 픽션의 가능성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저 픽션일 뿐임을 당신이 알고 있는 픽션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지고의 믿음이라는,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의 유명한 말을 본문에서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강박을 은밀한 채로 남겨두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서문이 딸린 책은 결국 이런 은밀함을 허용하지 않는 법이다.


2023년 8월 7일

유운성


2023-11-22

도래할 사진을 위한 에스키스 : 김규식의 사진


※ 이 글은 2021년 6월 5일부터 7월 4일까지 아트스페이스 언주라운드에서 열린 김규식 개인전 《사진에 관한 실험》에 맞춰 발간된 동명의 도록(보스토크프레스, 2021)에 실린 것이다. 아래의 글 외에도 김규식의 사진들과 작가와의 인터뷰 등이 수록된 이 도록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 보스토크프레스 홈페이지를 참고. http://vostokpress.net/publication/119 




시각적인 추상이란 없으며 가능하지도 않다. 2016년부터 지속해 온 일련의 사진 실험들을 통해 김규식이 우리에게 거듭 강조하고 있는 바는 이처럼 단순한 상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상식이란 우리가 알고는 있어도 일부러 무시하거나 무심결에 흘리는 지식이다. 정의상 사변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추상을 어떤 식으로든 시각화한 작업임을 뜻하는 시각적인 추상이라는 말 자체가 형용 모순이기는 하지만, 여하간 미술에는 추상 미술이라는 영역이 엄존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사진작가로서의 김규식에게 깊은 의혹의 대상이 되었던 볼프강 틸만스의 추상 사진 같은 작업도 있다. 이른바 추상 작업은 아무리 극단적인 경우라 해도 그것이 시각적인 이상 엄밀히 말하자면 추상적이 아니라 비구상적non-figurative이거나 탈구상적de-figurative일 뿐이다. 추상을 보여주는 시각 예술이란 없으며 가능하지도 않다. 추상 미술이나 추상 사진이라는 용어 자체가 기만적이다. 

이런 진단에 입각해 있는 김규식의 작업은 그야말로 어떤 타협도 없이 철저하게 개념과 작업의 메타프라시스metephrasis를 추구한다. 김규식이 틸만스의 작업을 비판하면서도 굳이 추상 사진이라는 용어를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삼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이런 용어는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보다는 개념으로서의 추상과 작업으로서의 사진 사이에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가 있음을 대단히 실증적인 방식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반증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김규식이 자신의 작업과 관련해 떠올린 생각을 적어둔 쪽지 하나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그럼 이것이 추상 사진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런 것은 없으며 의미 없는 거라고…”

추상이란 무엇인가? 김규식의 작품에 보이(고 있다고 우리가 경솔하게 생각하)는 점・선・면 같은 기하학적 추상에 대한 유클리드적 정의를 떠올려 보자. 점이란 부분이 없이 위치만 있는 것이고, 선이란 폭이 없는 길이이며, 면은 길이와 폭만을 갖는 것이다. 철저히 개념적인 이런 대상은 물리적으로 지각할 수 없고, 따라서 묘사할 수도 없고 재현할 수도 없다. 찍거나 그리거나 칠해서 얻은 점・선・면은 그저 인지적 편의를 위한 대체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김규식의 작업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염두에 두고 있는 대상은 정확히 유클리드적 의미에서의 기하학적 추상이다. 김규식의 작업은 이런 추상을 시각화할 수 있다는 식으로 행세하는 뻔뻔하고 무신경한 오랜 관행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지만, 언제나 그러한 추상을 작업의 중요한 지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작업의 지침으로서의 추상과 작업의 목표로서의 추상은 서로 다른 방법론을 요청하는 것이지만 둘은 종종 외관상으로 유사한 결과를 낳곤 한다. 그동안 김규식의 작업이 종종 오해되거나 그 중요성이 간과되었다면 이유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 같다. 추상을 작업의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김규식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모더니즘적 전통에서 낯설지 않다. 이때 작품은 추상을 의미하는 기호로 기능하게 된다. 기호학자 퍼스의 분류를 빌려 생각해 보자면, 이런 작품이 추상과 관계 맺는 방식은 도상적일 수도 있고(기하학적 추상과 닮은 형태를 구사하는 몬드리안), 지표적일 수도 있고(액션 페인팅), 상징적일 수도 있다(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 그런데 김규식의 작품이 추상과 맺는 관계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거듭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추상은 작품이라는 기호의 도상적・지표적・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작업을 구조화하는 지침, 즉 가이드라인이다. 이는 원의 중심이란 원의 의미가 아니며 그저 원을 그릴 때 기준이 되는 점이라는 뜻에서 그러하다.


<Perspective View I>


추상을 작업의 목표가 아닌 지침으로 삼는 김규식의 방법론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원근법 실험이다. <Perspective View I>와 <Perspective View II>가 특히 그러한데, 전자는 1점 투시법에, 그리고 후자는 2점 투시법에 활용되는 그리드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굳이 ‘일부’라는 표현을 쓴 것은 프레임 내부에 소실점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소실점이란 작품의 원근법적 구성을 관장하는 기하학적 추상일 뿐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김규식은 이러한 소실점을 실제로 프레임 바깥에 두는 식으로 그것의 추상성을 환기시킨다. 

그런데 언제나 세부를 통해 말하는 김규식의 사진을 볼 때 우리는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이들 사진을 전체적으로 일별하기를 멈추고 세부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리드를 이루는 검은 선들이 실제로는 매우 울퉁불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진에 보이는 그리드는 종이 위에 그려진 선이 아니라 양 끝을 팽팽하게 묶은 검은 펠트실을 찍은 것이기 때문이다. <Perspective View I>을 만드는 데 사용된 장치의 구성을 보여주는 <The Practice of Vanishing Point I>을 보면, 사진 바깥에 있는 소실점 위치에는 세 가닥의 펠트실이 한데 묶여 있다. 갑작스레 그 추상적인 외관을 벗어던지고 물질적 기원을 고스란히 노출해 버리는 이 사진들은 분명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온갖 물질적 번잡함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소실점과 그리드라는 추상의 추상성을 환기시키려는 노력의 부수적 결과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The Practice of Vanishing Point I>


따라서 여기서부터는 조금 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 발짝만 넘어가면, 그의 작업을 모더니즘적 추상 예술의 계보 속에 두는 오류를 범할 위험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보람도 없이, 김규식이 매체의 물질성을 탐구하는 작가라고 오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추상이란 결코 시각적 형식으로 포착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추상 자체를 작품 구성의 지침으로 삼는 그의 작업은 역설적으로 물질적인 것의 범람을 초래한다. 그러니까 물질성은 그가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결코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김규식 스스로가 각각 추상 사진 그리고 논픽처non-picture라고 부르는 계열의 작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사진들의 제작 과정은 사진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조차 놀라게 할 만큼 번잡하고 물질적이다. 실제로 김규식은 자신의 “작업의 절반은 (…) 도구의 설계와 제작에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소실점과 그리드가 원근법 실험의 지침이 되는 추상이라면, 김규식의 추상 사진에서 지침이 되는 추상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투명과 어둠이다. 그런데 음화를 통해 양화를 만들어내는 사진적 기제를 고려하면 이 둘은 맞닿아 있는 개념이다. 사진에 있어서 완전한 어둠이란 원리상으로는 어떤 빛에도 노출되지 않은 필름에 해당한다. 이처럼 감광되지 않은 필름을 현상하면 필름 표면의 은염이 정착액을 통해 제거되어 투명해 보이는 필름을 얻게 되고, 암실에서 이 투명 필름을 확대기에 걸고 빛을 쪼여 인화지에 비추면 모든 부분이 검은 사진이 나오게 된다. 그렇다면 이 검은 사진은 완전한 어둠에 상응하는 (비)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는 <Black on White> 같은 작품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질문이다. 외견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과 전연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제목은 분명 말레비치의 <White on White>를 염두에 둔 것이겠지만 어디까지나 절대주의적 추상에 의문을 표하는 한에서만 그러하다. 

현상 과정에서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 해도 물리적으로 완벽하게 투명한 필름을 만들 수는 없다. 이는 곧 인화지를 완벽하게 검은 상태로 만들 수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작업의 지침 역할을 하는 투명과 어둠이라는 추상에 집요하게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즉 완벽하게 검은 사각형을 만들기 위해 인화지의 노광 시간을 늘리면 늘릴수록, 우리는 하얀 반점들이 사진에 점점 더 뚜렷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들은 추상 사진 작업에서 김규식이 사용한 ISO 6400의 고감도 필름이 투명해진 표면에 남은 물질적 흔적의 역상들reverse images이다. 다만, <Black on White>의 검은 사각형은 추상을 지침으로 삼는 일이 초래한 물질적인 것의 범람을 증언할 뿐, 필름이나 인화지의 물질성 자체를 드러내기 위한 기호나 오브제로서 제시되고 있지는 않다.

김규식의 추상 사진 계열에 속하는 작품 대부분은 작가가 그 위에 이런저런 형태를 그리고 오려서 파낸 종이판을 인화지 위에 겹쳐 놓은 상태에서 확대기에 투명 필름을 장착하고 노광해 얻어낸 것이다. 전통적인 조합 인화 방식을 응용해,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종이판을 활용하되 하나씩 따로따로 노광하고, 각각의 노광 시간을 조절함으로써 다양한 패턴의 추상 사진을 얻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 추상 사진 위의 추상적 형태들(점・선・면)은 작업에 활용된 투명 필름 자체의 추상적 불완전성으로 인해 언제나 크고 작은 하얀 반점들로 얼룩지게 된다.

논픽처 계열의 작품들은 작업 과정이 추상 사진과 거의 동일하지만 투명 필름만이 아니라 아크릴 스프레이 분사액이 점착된 유리판을 함께 활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유리판을 투명 필름의 경우처럼 확대기에 걸어 사용하면 인화지에 하얀 반점이 지나치게 크게 나타날 수 있어, 종종 김규식은 인화지와 종이판과 유리판을 밀착시켜 삼중으로 함께 겹쳐 노광하는 방식을 취했다. 논픽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작가가 직접 고안한 작업대는 흡사 등사기와 셀 애니메이션 작업대를 합해 놓은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추상 사진과 논픽처 간의 (의도된) 유사성 혹은 판별 불가능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정육면체에서 삼면이 만나는 모서리 부분을 구현하고 있는 사진들이다. [추상 사진 가운데 <Grain and Line to Plane>과 논픽처 시리즈 가운데 22~24번 사진을 보라. 김규식의 작업에서 정육면체는 원근법 실험, 추상 사진과 논픽처, 그리고 소형 프로젝터를 활용한 매핑(mapping) 작업까지를 모두 가로지르는 특권적 형상이다. 이 형상의 의미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지면이 필요하겠다.] 둘 가운데 어느 것이 투명 필름을 활용해 구현한 것이고 어느 것이 유리판을 활용해 구현한 것인지를 순전히 육안으로만 판별해 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Grain and Line to Plane>


어느덧 김규식은 사진과 관련해 진정 래디컬하다고 할 수 있는 지점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사진이란 촬영을 전제로 하지 않아도 성립”하는 것이다. 인화지는 단지 그 표면을 비추는 빛이 전달하는 데이터에 입각해 우직하게 형상을 나타낼 뿐 그 데이터의 기원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인화지는 자신을 비추는 빛이 투명 필름을 투과한 것인지 아크릴 스프레이가 점착된 유리판을 투과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인화지는 자신을 비추는 빛이 실제의 정육면체에 반사되어 나온 것인지 그저 종이판 위에 뚫린 평행사변형을 통과해 온 것인지 묻지 않는다. 따라서, 다시 한번 김규식 자신의 말을 인용하자면, “인화지를 속이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물론 김규식은 필름이나 인화지의 물질성 자체에만 천착하는 매체 탐구자가 아니다. 데이터의 기원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면서 그것이 전달하는 형상을 그저 우직하게 시각화하는 매체이기만 하면 무엇이건 상관없다. 그는 기꺼이 그것을 “속이는 일”에 착수할 것이다. 그가 손수 제작한 소형 프로젝터 장치를 통해 정육면체 형상을 거울에 투사하는 매핑 작업은, 원근법 실험에서 탐구했던 사영 기하학의 원리와 추상 사진 및 논픽처 작업에서 밀고 나간 촬영 없이 이루어지는 조합 인화 과정을 결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론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사실, 김규식의 사진 실험 작업 전체가 이론적인 함의를 띠고 있다. 

이는 2016년에 공식적으로 첫선을 보인 진자운동 실험에서 이미 분명하게 감지된다. 이 실험을 통해 일찌감치 표명된 김규식의 사진론은 크게 세 가지로 각각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첫째는, 사진적 과정의 핵심이 촬영이 아니라 인화(나 매핑 작업의 경우 디스플레이)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진자운동 실험의 결과물을 흔하고 시시한 펜듈럼 사진과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펜듈럼 사진은 광원이 달린 추를 높은 곳에 매달아 이리저리 움직이게 하면서 어두운 방에서 장시간 노출로 찍은 사진을 가리킨다. 반면, 진자운동 실험에서 김규식이 사용한 하모노그래프harmonograph는 복수의 진동자를 조합해 리사주 곡선Lissajous Curve이라 불리는 도형을 그리는 장치다. [리사주 도형의 생성 원리에 대해서는 필자가 만든 다음의 동영상을 참고하기 바란다. vimeo.com/404925874 이 영상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 오프닝 크레딧에 활용된 리사주 도형에 관한 것으로, 영상의 전반부에 이 도형의 원리에 대한 설명이 있다.] 김규식이 제작한 하모노그래프의 진동자 말단에는 그린 레이저가 장착되어 있어 이것이 직접 인화지 위에 도형을 그리게 된다. 따라서 진자운동 실험의 결과물은 추상 사진이나 논픽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복제가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사진이 된다. 김규식의 하모노그래프는 진동자 2개를 조합한 가장 단순한 것인데 인화지를 장착한 판 또한 좌우로 진동하게 함으로써 진동자 3개짜리 하모노그래프를 통해서만 가능한 복잡한 패턴을 얻어내고 있다. 이러한 패턴은 우리가 작도를 통해서는 아예 그릴 수 없는 것이란 점에서 지극히 비인격적이다.


<Test of Harmonograph, #19402-05>


김규식이 수행하는 사진 실험의 두 번째 이론적 함의는 한층 근원적인 것이다. 글머리에서 나는 그가 어떤 타협도 없이 철저하게 개념과 작업의 메타프라시스를 추구하는 작가라고 단언했다. 즉, 김규식의 입장에서, ‘포토그래프’란 문자 그대로 빛photo이 기록graph한 것을 가리킨다. 그의 결벽은 ‘빛’과 ‘기록’ 사이에 어떤 매개물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다. 따라서 포토그래프는 빛이 직접, 말 그대로 무매개적으로im-mediately 기록한 것이어야 한다. 그린 레이저를 통해 인화지 위에 직접 패턴을 그리는 김규식의 하모노그래프는 바로 이런 점에서 포토그래프의 메타프라시스가 된다. 한편, 하모노그래프 장치가 고안되고 인기를 누리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걸친 시기인데, 이 점에서 그것은 19세기에 발명되고 급속히 개량되어 대중 속으로 파고든 포토그래프와 역사적・계보적으로 인접해 있기도 하다. 또한, 하모노그래프는 복수의 진동자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물리적으로 복수의 파동(전자기파)으로 구성된 빛과 은유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1826년에 니엡스가 8시간 동안의 노광을 거쳐 얻어낸 최초의 사진, 태양helios이 기록한 것이라는 뜻에서 헬리오그래프라 불리는 이 사진은 어떤 면에서는 지구의 주기 운동(으로 인한 태양의 일주 운동)의 기록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러 비인격적 기록 장치들 가운데 김규식이 굳이 하모노그래프를 작업 도구로 삼은 것은 이상의 사실들과 무관하지만은 않다.

마지막으로, 김규식의 사진 실험은 도래할 미래의 사진과 그러한 사진을 둘러싸고 펼쳐질 이론적・비평적 담론을 예비하면서 우리에게 일종의 숙제와도 같은 물음을 던지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사진의 장치적 기원이라고 하면 사진기를 가리키는 말의 어원이 된 카메라 옵스큐라를 곧바로 떠올린다. 그런데 김규식의 작업은 포토그래프로서의 사진이 카메라 옵스큐라와 조우하고 그 장치적 구성을 빌린 것은 역사적으로 일시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서 수행되는 것 같다. 사진을 카메라 옵스큐라와 연관 짓게 되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기록 과정을 자동적으로 수행하는 비인격적 장치들의 계보에서 사진을 파악하는 일이 어렵게 된다고 충고하면서 말이다. 이로써 김규식의 하모노그래프는 통념을 깨고 사고하게 만드는 교육적 가치를 함께 지니게 되는데, 이유인즉 포토그래프를 비인격적 기록 장치의 계보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카메라 옵스큐라보다는 포노그래프phonograph(축음기)나 사이즈모그래프seismograph(지진계)에 더 가까운 매체로 파악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근본적인 물음이 우리에게 던져지는 것은 이쯤에서다. 이러한 비인격적 기록 장치들을 통해 얻은 결과물들에 위계를 매기고 평가하고 그 가치를 판단하는 일이 가능할까? 하모노그래프는 그저 무심하게 움직이며 매번 다른 패턴을 인화지 위에 새길 뿐이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인간적 시선에 좀 더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미란 속성으로서 사진에 결부되어 있지 않다. 말하자면, 작품으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사진이라 해도 하나의 절대적인 사진이란 없는 것이다. 사실 이는 니엡스의 사진에 이미 잠복해 있는 문제였고, 회화적 전통을 구성에 끌어들인 19세기의 사진가들이 어떻게든 벗어나려 한 문제였으며, 그 이후로 현재까지는 대수롭지 않은 듯 우리가 애써 무시해 온 문제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는, 김규식의 작업을 전시해야 하는 큐레이터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집요하게 사진의 과거를 거듭 돌아보며 그 개념을 탈구축하는 김규식의 작업은 그런 방식으로 언제나 우리의 시선을 도래할 사진 쪽으로 인도하는 엄정한 지침이자 겸허한 추상이 되고 있다. 

2023-10-06

영화의 집을 떠나며

 

※ 이 글은 격월간으로 발행되는 사진잡지 《보스토크》 40호(2023년 7월 발행)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이 글은 2023년 6월 23일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있었던 포럼 ‘차이밍량: 영화의 여정, 느리게 걷다’에서 발표한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포럼은 《2023 부산모카 시네미디어: 영화의 기후》 전시의 일환으로 마련되었다. 


최근에 나는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에 출간된 유라이 메덴의 『스크래치와 글리치』를 흥미롭게 읽었다. ‘21세기 초반 영화의 보존 및 전시에 관한 소견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영화의 제작, 유통, 상영, 보존 등이 완전히 디지털로 이행한 지금, 필름 아카이브나 미술관은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논의가 담겨 있는 에세이집이다. 이 책의 앞부분에는 교수와 학생 사이에 실제로 오갔던 우스꽝스러운 대화 하나가 실려 있다. 교수는 커다란 스크린으로 보는 경험은 이제 구식이 되었음을 인정하면서 최근의 모든 기술적 변화를 경시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커다란 스크린으로 보는 경험도 놓치지 말라고 충고한다. 이후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진다.


학생 (어리둥절하며): 교수님, 사실 저는 지금 교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종종 두 번, 때로는 세 번씩 (교실 안에 앉아 있는 다른 학우들에게 손짓으로 동의를 구하며) 저희는 바로 그러려고 모이거든요. (양손을 들어 각각의 손에 들린 태블릿과 스마트폰을 보여 주면서) 이런 것으로 영화를 보는 습관을 깨고 대신에 커다란 스크린으로 무언가를 보려고요.

교수 (미심쩍어하며): 학생이 지금 하는 말은 믿기 힘든데요. 여러분이 커다란 스크린으로 영화를 본다고요? 언제요? 어디서요? 우리는 잘 운영되는 필름 뮤지엄이 있는 도시에서 사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데, 동시에 이곳은 매일 다른 영화를 보여주는 이 지역의 유일한 장소죠. 대부분 35mm 필름으로요! 저는 거의 매일 밤 거기에 가는데 학생을 본 적은 없어요. 사실 여러분 중 누구도 거기서 본 적이 없어요.

학생 (놀라며): 필름 뮤지엄이라고요? 무슨 필름 뮤지엄이요? 저희는 우리 집 거실에서 커다란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는데요. 아니면 제이슨네 거실에서요. 저한테는 4K 55인치짜리 QLED가 있고 제이슨도 막 LG에서 나온 새 8K OLED를 샀거든요.


이 대화를 읽고 있노라면 이런 물음이 떠오른다. 오늘날 영화의 집은 과연 어디인가? 메덴의 책을 읽고 있을 무렵 나는 영화감독 차이밍량이 최근 몇 년 동안 만든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보고 있었는데 이것들을 보면서도 똑같은 물음을 떠올렸다. 여기서 나는 차이밍량이 그간 활동해온 방식을, 그리고 그가 만든 작품들을 돌이켜보며 이 물음에 접근해보고 싶다.

21세기 들어서, 특히 2009년에 발표한 <얼굴> 이후로, 차이밍량은 영화감독보다는 아티스트에 가까운 행보를 밟아왔다. 이렇게 말하면 영화감독과 아티스트는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영화를 만들어서 그 제작비를 회수해야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감각을 갖고 작업하는 사람을 영화감독이라고 보고, 미술관이나 영화제나 비엔날레 같은 제도 및 기관의 커미션을 받아 작업하지만 딱히 작품의 제작비를 회수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필요가 없는 사람을 아티스트라고 본다.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카메라, 마이크, 조명기, 편집 프로그램 등등)나 그들이 만들어내는 무빙 이미지의 성격은 그리 다르지 않다 해도 말이다.

물론 아티스트도 작품을 팔기 위해 노력하기는 하지만 작품 하나하나마다 일정한 관객을 끌어 제작비를 회수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한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개별 작품 각각은 관객을 거의 끌어들이지 못하더라도 아티스트 자신이 일종의 ‘브랜드’로서 인지되거나 평단과 저널리즘의 주목을 받는다면 지원금이나 후원금으로 작업을 지속할 기회를 얻을 확률이 높다. 사실 오늘날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를 만드는 이들은 이런 의미에서라면 이미 영화감독보다는 아티스트에 가깝다. 그리고 차이밍량은 영화감독에서 아티스트로 느리게 이행해온 이들 가운데 가장 흥미롭고 도발적인 방식으로 21세기 영화의 상태를 가늠해보게끔 하는 작가다. 영화인들과 시네필들에게 사고의 전환을 도발적으로 요구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도발에 걸맞은 작품까지 내놓는 데서 여전히 필적할 이가 없기도 하다. 

차이밍량과 전혀 반대편에서, 즉 아티스트가 아닌 영화감독으로서 21세기 영화의 상태를 가늠해보게끔 하는 작가라면 단연 봉준호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차이밍량과 봉준호는 모두 이와 관련해 동일한 메타포에 매달리는 이들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건 바로 집이다. 가옥으로서의 집(house)과 가정으로서의 집(home)이라는 뜻을 모두 고려해서 말이다. 영화의 가족, 영화의 거처, 영화의 집이라는 것이 대체 오늘날 어떻게 가능한가? 혹은 과연 가능한가? 차이밍량과 봉준호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동일한 문제에 집착하고 있다. 1990년대 내내 꾸준히 이 문제 주변을 맴돌던 차이밍량이 폐관을 앞둔 영화관을 무대로 한 2003년 작품 <안녕, 용문객잔>에서 그것에 의식적으로 접근했다면, 봉준호는 2000년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에서 어쩌면 자기도 모르게 이 문제에 다가갔다. 함께 모여 사는 곳이지만 어디까지나 개별적이고 고립화되어 있는 거주 형식인 아파트에서 하나의 일상적 범죄를 목격하고 작은 영화적 모험에 뛰어드는 (텔레비전에 나오고 싶다는 소망을 지닌) 인물을 통해서 말이다. 



<플란다스의 개>(2001)의 오프닝(위)과 엔딩(아래) 부분에서 발췌.
스크린으로서의 창


<플란다스의 개>의 설정은 영화 보기의 메커니즘을 은유적으로 건드린 히치콕의 <이창>과도 연결될 수 있는 것이지만, 봉준호 영화의 모험에는 히치콕적 로맨스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봉준호의 인물들은 그들을 둘러싼 장소만큼이나 본질적으로 고립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봉준호는 <기생충>에서도 가족, 거처, 집이라는 문제에 접근했고 충분히 동시대 영화의 상태로 비춰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 반지하 방의 위쪽에 난 창문을 흡사 영화 스크린처럼 바라보고 사는 기택네 가족과 어쩐지 아트 갤러리를 닮은 저택에서 사는 박 사장네 가족의 대비를 통해서 말이다. 기택네 가족을 통해 구현된 영화적 형상, 장소 없이 떠도는 비천한 영화가 아트 갤러리에서 기생하는 일은 과연 어떻게, 얼마나 오래 가능할까? 

차이밍량이 1992년에 <청소년 나타>로 정식 데뷔하기 직전에 만든 중편의 제목은 ‘내게 집을 줘(給我一個家)’였다. 건설 노동자인데 정작 자기 집은 갖지 못하는 이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 차이밍량은 지난해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회고전에 맞춰 내놓은 신작 <곳>에서 그의 영화적 이력을 잠정적으로 결산하는 듯한 몸짓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의 원제는 ‘어디에(何處)’이다. 의미심장하게 울리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강요된 방랑의 시기가 지나고 나면 영화는 어디에 있을 수 있는가? 이 작품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21세기에 차이밍량이 밟아온 궤적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순전히 장편 극영화만 놓고 보면 요즘의 차이밍량은 그야말로 과작의 작가처럼 보인다. 10년 동안 발표한 것이라고는 2013년 작 <떠돌이 개>, 그리고 2020년 작 <데이즈(日子)> 두 편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청소년 나타>로 데뷔하고 나서 <얼굴>을 발표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적어도 2~3년에 한 편씩은 꼬박꼬박 장편 극영화를 만들곤 했다. 그런데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 단편영화, 그리고 VR 작업 등을 모두 고려하면 사정이 전혀 달라진다. 단순히 편수로만 따진다면, 그는 최근 10여 년 동안 스무 편이 넘는 작업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것들은 영화관보다는 주로 미술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되었다. 

특히 차이밍량이 2012년에 내놓은 <무색>, <행자>, <금강경>, <몽유> 등 네 편의 단편으로 시작된 ‘행자(行者)’ 연작─원래는 느리게 걷는 여정이라는 뜻에서 ‘만주장정(慢走長征)’ 연작이라고 불렸던─은 어느덧 아홉 번째 편인 <곳>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연작은 붉은색 법복 같은 천을 걸치고 당나라의 고승 현장으로서 등장하는 배우 이강생이 아주 느리게 어떤 장소들(홍콩, 타이페이, 쿠칭, 마르세유, 도쿄, 좡웨이, 파리 등)을 걷는 것을 롱테이크로 포착한 쇼트들로 이루어져 있다. 공연 쪽에 익숙한 이라면 브루스 나우만의 워킹 퍼포먼스를 담은 영상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걷기를 수행 중인 이강생은 오늘날 새로운 거처를 찾아 나선 영화 자체에 상응하는 형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행자 연작은 영화와 미술과 공연의 경계 지대에서 걷는 작품이다. 실제로 차이밍량과 이강생은 이 연작의 공연 버전이라 할 <현장>이라는 작품─2015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공연 시에는 ‘당나라 승려’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소요(漫不經心)>(2021)


2021년에 발표한 <소요(漫不經心)>는 행자 연작의 번외편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 연작들이 전시되고 있는 미술관을 소요하는 관람객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차이밍량이 스크린 앞에 서서 자기 작품을 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생각하기에 따라 <안녕, 용문객잔>과 밀접히 관련된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다만 <안녕, 용문객잔>의 무대가 폐관을 앞둔 영화관이었다면 <소요>의 무대는 2018년에 새로 개장한 대만 좡웨이 사구 공원의 전시관이다. 영화의 새로운 집, 그렇다고는 해도 아마 잠정적인 집, 여하간 잠시 발길을 멈추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집, 이런 집으로서의 갤러리 혹은 미술관. 행자 연작 가운데 2018년 작품인 <모래>에서 우리는 막 건설 중인 좡웨이 사구 공원의 풍경을 배회하는 이강생을 보게 된다. 전시관 건물 내부로 향하던 그의 발걸음은 이내 거기서 멈춘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우리는 언제부턴가 차이밍량이 더는 영화관을 영화의 집으로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에게 집이란 무엇인가? 밖에서 배회하다 돌아가 앉아서 기다리다 보면 가족들이 하나둘씩 귀가할 거라는 믿음을 보장해주는 장소가 바로 집이다. 영화의 집으로 간주되었던 영화관도 한때는 그런 장소였다. 일단 표를 끊고 입장하면 영화는 이미 시작한 다음일 수 있지만 기다리다 보면 다시 처음부터 볼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주는 곳 말이다. 적어도 차이밍량이 친숙하게 느끼는 영화관이란 그런 곳이다. (나는 20세기의 여러 영화관, 특히 재개봉관이라 불리던 곳들을 떠올려본다.) 행자 연작 가운데 하나로 2013년에 발표된 <행재수상(行在水上)>에서 이강생은 말레이시아 쿠칭에 있는 한 7층 건물 주변을 맴도는데, 이곳은 어린 시절 차이밍량을 돌보았던, 그리고 그에게 원초적 영화 경험을 제공한 외조부모가 살았던 곳이다. 

하지만 이런 원초적 경험과 맞닿은 영화관 풍경은 오늘날의 관객에겐 무척이나 낯선 것이다. 영화가 이미 시작했는데 입장할 수는 있지만 일단 끝나고 나면 다시 시작하길 기다릴 수는 없고 퇴장하는 출구로 나가야 한다. 처음부터 보고 싶다면 표를 다시 구입해 들어와야 한다. 그런가 하면, 예술영화전용관이나 독립영화전용관에선 한 편의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 영화가 처음부터 다시 상영되는 게 아니라 아예 다른 영화가 상영된다. 영화제에서는 심지어 영화가 일단 시작하고 나면 입장 자체가 불허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영화관들은 분명 영화관의 외양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더 이상 영화의 집은 아니다. 따라서 영화관에 붙이는 ‘아트하우스’나 ‘전당’ 같은 이름은 그저 영화산업의 허영심이나 지방자치단체의 욕망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반어적 개그에 불과한 것이 된다. 

대략 2007년 무렵부터 차이밍량은 아예 영화의 집을 미술관으로 이식하는 자못 대담한 기획에 착수한다. 특히 중요한 것이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그리고 대만의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비슷한 시기에 열린 전시다. 그는 폐관된 영화관에서 뜯어낸 극장용 의자들을 전시실에 설치하고 스크린도 갖춰 영화관처럼 만든 뒤 거기서 자신이 만든 23분짜리 단편영화 <이것은 꿈이다>를 상영했다. 2013년 작품인 <떠돌이 개>는 애초부터 영화관이 아닌 장소에서의 스크리닝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장편 극영화인데, 미술관에서 보여줄 때는 특별히 요청해 자정까지 문을 열도록 하거나 주말엔 밤샘 이벤트를 하기도 해서 관람객들이 덮을 것과 먹을 것을 들고 와 볼 수 있게끔 했다. 이렇게 볼 때 이 영화는 “영화관에서 볼 때보다 더 큰 감동”을 준다고 차이밍량은 단언한다. 물론 여기서 가리키는 것은 더는 영화의 집이 아닌 오늘날의 영화관이겠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차이밍량은 영화를 그저 미술관에 가져와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영화관을 미술관에 설치하는 것만도 아니고, 일체의 영화관 경험 자체를 미술관으로 이송하려 하고 있다고 말이다.

<소요>에 나오는 좡웨이 사구 공원의 전시관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차이밍량의 행자 연작들이 말 그대로 ‘동시 상영’되는 영화의 집으로서 등장하고 있다. 관람객은 언제라도 들어와 작품들 사이를 오가며 감상할 수 있고, 보다가 조금 지치면 쉬기도 하고, 나와서 공원을 거닐다가 원한다면 전시관에 다시 들어갈 수도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차이밍량은 영화관에서 미술관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라 영화관과 미술관을 접합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차이밍량이 생각하는 영화의 여정의 끝인 것일까?


<곳(何處)>(2022)


만일 차이밍량이 여기에서 멈췄다면 다소 아쉬웠을 터다. 행자 연작의 아홉 번째 작품인 <곳>에서 차이밍량은 서로 다른 장소에 있는 두 명의 배우를 번갈아 보여준다. 하나는 연작의 주인공인 이강생이고 다른 하나는 차이밍량의 작업에 최근 합류한 아농이다. 이 둘은 차이밍량의 장편 극영화 복귀작 <데이즈>에서 이미 나란히 등장한 바 있다. 이로써 <곳>은 행자 연작의 한 부분을 이루면서 한편으론 <데이즈>와 짝을 이룬다. <곳>에서 이강생과 아농이 처음 교차하는 장소는 바로 미술관이다. 영락없이 <현장> 공연을 떠올리게 하는 방식으로, 미술관 바닥을 덮은 커다란 백색 종이 위를 기어 다니며 아농이 목탄으로 여러 개의 선들을 그리는 가운데 붉은색 법복을 입은 이강생이 그 사이로 지나간다. 이들의 움직임이 이렇게 계속 이어지는가 싶을 때, 돌연 차이밍량은 집에서 잠들어 있는 아농의 얼굴을 보여준다. 흡사 이들의 만남이 꿈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들은 거리에서 다시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아농은 거리를 메운 인파들 사이로 느리게 걸음을 옮기는 이강생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영화의 집을 떠난 영화는 잠시 머물던 예술의 거처마저 벗어나 비로소 세계와 만난다.

2023-10-02

어둠을 기다리며
: 조너선 크레리의 『지각의 정지: 주의・스펙터클・근대문화』

 

※ 아래 글은 2023년 10월 2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조너선 크레리의 『지각의 정지: 주의・스펙터클・근대문화』의 옮긴이 후기다. 이 책을 크레리의 다른 저술들과의 연관 속에서 개괄적으로 소개하고자 쓴 것이다.




밤이 다가오자 그녀는 우리가 지배하는 시간이 끝나고 그녀의 시간이 시작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드니 디드로, 「맹인에 관한 서한에 붙임」


코로나 대유행이 한창이던 2021년 초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에세이 영화 <모든 곳에, 가득한 빛All Light, Everywhere>의 연출자인 테오 앤서니는 조너선 크레리의 『관찰자의 기술: 19세기의 시각과 근대성』이 이 작품의 근간이 된 텍스트 가운데 하나라고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초반부에는 『지각의 정지: 주의・스펙터클・근대문화』에서 크레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중요한 이론적 기획에 상응하는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여기서 제작진은 액손Axon 본사 건물을 방문해 회사 대변인과 함께 그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액손의 전신은 1991년에 설립된 테이저 인터내셔널Taser International로 비치사성 무기인 테이저건이 바로 이 회사의 제품이다. 여기서 2008년에 출시한 바디캠은 이후 미국 경찰들에게 널리 보급되었고 오늘날 이 카메라로 촬영된 범죄 진압 현장 기록 영상은 액손의 서버에 실시간으로 저장되어 (주로 경찰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법정 증거 자료로 활용되곤 한다.

어쩐지 쇼핑호스트 같은 인상을 주는 액손의 대변인은 <스타워즈>나 <스타트렉>처럼 하이테크 느낌을 냈다는 2층 통로에서 건물 내부를 둘러보며 “여기엔 비밀이 없습니다”라고 과시하듯 말한다. 그의 말마따나 이 회사의 직원들과 간부들의 업무 공간은 구획별로 나뉘어 있기는 해도 중앙 통로에서 어디나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끔 되어 있다. 그런데 이처럼 ‘투명성’을 자랑하는 이곳 3층에는 선팅 처리된 전면 유리로 둘러싸인,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블랙박스’라 불리는 구역이 있다. 이곳은 회사의 신제품을 연구개발하는 부서가 있는 공간으로 이런 건축적 구조 덕분에 모종의 비밀스러운 느낌을 띠게 된다. 게다가 이곳은 건물 내부의 여타 업무 공간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중앙부 위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쯤에서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분석한 벤담적 파놉티콘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내 우리는 파놉티콘 모델만으로 이 기묘한 건축적 배치를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액손의 블랙박스는 구조적으로는 파놉티콘 중앙의 원형감시탑에 상응하지만 기능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내부에서 근무하는 이들은 정작 감시통제의 책임자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감시통제를 위한 시설이라기보다는 무언가 비밀스러운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자아내고 과장하는 스펙터클적 장치에 가깝다. 여기서 어둠은 사실 환하게 빛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작 사원들의 업무를 관리감독하는 책임을 질 ‘C-스위트’라 불리는 최고 경영진의 자리는 블랙박스에서 내려다보이는 1층에 있다. 즉 감시자인 그들 또한 짐짓 투명한 스펙터클이 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환하게 빛나는 것은 사실 어둠이다. 여하간, 도처마다 온통 빛이다. 이를 두고 엑손의 대변인은 투명성이라고 부른다.


푸코는 스펙터클이란 다수의 인간이 소수의 대상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고대 사회에나 걸맞은 것이라고 보았다. 이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원형 경기장이다. 그는 기 드보르의 이름이나 『스펙터클의 사회』는 전혀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사회는 “스펙터클의 사회가 아니라 감시의 사회”라고 단언하며 그와 다른 입장에 선다.[1] 하지만 크레리는 일찍부터 푸코의 견해에 의문을 표하며 스펙터클과 감시를 동시에 고려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가 1989년에 발표한 「스펙터클, 주의, 대항-기억」은 주의의 기술과 스펙터클의 연관을 스케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얼마간 『지각의 정지』의 밑그림이 된 논문이다. 여기서 이미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푸코는 텔레비전을 보거나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데 그리 시간을 쏟았을 법하지 않은데, 만일 그랬더라면 텔레비전이 파놉티콘 기술을 더 완벽하게 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터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 감시스펙터클은 그가 주장하듯 서로 대립적인 용어가 아니며 한층 효과적인 규율 장치 속에서 서로 교착되는 용어다. 최근의 기술적 발전은 이러한 중첩 모델을 그야말로 확고히 했다. 감상자의 행동, 주의력, 그리고 안구 운동을 모니터하고 수량화하기 위한 첨단의 이미지 인식 기술이 내장된 텔레비전 세트가 그 예다.”[2] 

이 글을 쓸 무렵 크레리가 텔레비전에서 감지했던 감시와 스펙터클의 중첩 모델은 글로벌 인터넷 네트워크와 스마트폰 사용이 일상화된 오늘날의 우리에겐 그리 낯설지 않다. 특히 2020년부터 대략 3년 동안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 대유행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장려되고 강화되면서 보편화된 각종 ‘온택트’ 장치들을 떠올려 보면 더욱 그렇다. 이제는 학교와 기관 들에서 폭넓게 쓰이고 있는 화상 회의 플랫폼 줌의 인터페이스는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비밀스럽게 작용하며 꺼림칙한 느낌을 주었던 스펙터클적 감시의 기술을 환하게 ‘사용자 친화적’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라 하겠다. 이 플랫폼의 사용자들은 다른 이들의 얼굴을 여러 개의 분할 화면로 한꺼번에 보는 감시의 주체인 동시에 스스로의 얼굴을 다수에게 내보이는 스펙터클적 대상이 된다. 

물론 온라인 모임 중에 비디오나 오디오를 끄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감추면서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는 사용자도 적지 않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 플랫폼에선 자신의 존재를 한껏 드러내는 사용자일 수 있다. 얼굴 없는 ‘눈팅족’이 어딘가에선 어떤 집단의 얼굴을 대변하는 표상일 수 있고, 스펙터클적 선망의 얼굴이 어딘가에선 얼굴 없는 ‘어그로꾼’일 수 있으며, 익명으로 당신에게 줄기차게 모욕을 가하는 이가 온라인 모임 중엔 온화한 얼굴로 당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조용한 참여자일 수 있다. 중첩의 양상은 서로 판이할지라도 도처에서 감시와 스펙터클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중첩의 양상들을 새로 고안해내고 퍼뜨리고 확장하는 과정과 단단히 맞물려 있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내면화된 스펙터클적 감시의 형식이 바로 집중과 분산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주의(력)의 관리다. 

1999년에 출간된 야심작 『지각의 정지』에서 크레리는 19세기 후반부에 당대의 새로운 시청각적 기술들, 사회적・철학적・과학적 담론들, 그리고 예술적・문화적 실천들이 뒤얽히는 가운데 주의라는 논쟁적 개념이 어떻게 떠오르고 변형되고 재구성되었는지를 추적하는 ‘주의의 계보학’을 치밀하게 그려 보인다. 이 책의 치밀함과 집요함은 이따금 독서 중에 길을 잃게 할 정도지만, 그의 논의가 그저 역사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준에서 멈추는 법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오늘날 ‘주목 경제’ 혹은 ‘관심 경제’라고도 불리는 주의 경제attention economy의 운용을 위한 시청각적 인프라가 근대 문화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무언가에서 다른 것으로 빠르게 주의를 전환하는 일을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문화 논리의 일환”이라고 보는 크레리는 19세기 후반의 유럽이라는 시공간을 집요하게 파헤쳐 가속화된 교환과 유통으로서의 자본이 어떻게 주의집중과 주의분산이 서로 교차하는 체제가 되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이 강박적 주기 운동의 체제는 2013년에 출간된 『24/7 잠의 종말』에서 그가 “그림자 없이 불 밝혀진 24/7의 세계”라고 묘사한 초스펙터클적 세계이며, 자본주의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극단적 비활동인 잠마저도 일종의 활동 대기 상태처럼 취급하는 초감시적 세계이기도 하다.[3] 

『지각의 정지』의 한 부분에서 크레리는 푸코적 감시 사회 모델과 드보르적 스펙터클 사회 모델을 몽타주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면서, 사회를 공동체 없이 재구조화하는 자본주의적 분리의 기술로서의 스펙터클이 정치적 힘으로서의 신체를 축소하는 분산적 감시통제 권력의 기제에 상응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스펙터클은 권력의 광학이 아니라 권력의 건축이다. 이제는 하나의 단일한 기계적 기능으로 수렴되고 있는 텔레비전과 개인용 컴퓨터는 우리를 고정시키고 금 긋는striate 반反유목적 수단들이다. 선택 및 ‘상호작용성’의 환영으로 가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신체를 통제 가능한 동시에 유용한 것으로 만들면서 획정과 정주를 활용하는 주의 관리의 방법들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코로나 대유행 중인 2022년에 긴급히 출간된 정치적 팸플릿 『초토화된 지구: 디지털 시대를 넘어 탈자본주의적 세계로』에서 “소셜 미디어에 혁명적 주체는 없다”는 진단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4]


푸코와 드보르는 크레리에게 비판철학의 방법론적 모델을 제공해준 이들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24/7 잠의 종말』이나 『초토화된 지구』처럼 21세기 들어 그가 주로 내놓은 시사성을 띤 저술들만 놓고 보면 그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협을 경고하는 문명 비판적 철학자처럼 비치기도 한다. 이런 책들에서 크레리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마크 피셔나 『좌파의 길: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의 낸시 프레이저 같은 풍모를 띠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관찰자의 기술』과 『지각의 정지』처럼 20세기 말에 내놓은 저술들에서, 크레리는 푸코의 고고학적・계보학적 분석과 드보르의 고도로 비평적인 에세이 스타일이 결합된 방법으로 주로 19세기의 시각과 근대성에 천착하는 박학다식한 비정통적 역사가의 면모를 보인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전자의 책들이 그가 언제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우리 시대에 대한 시사적 개입이라면, 후자의 책들은 우리 시대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학술적 모험이다. 둘의 관계에 대한 크레리의 인식은 『관찰자의 기술』을 여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인용한 “역사적 유물론자에게 있어서 그가 몰두하는 시대는 실제로 그의 관심을 끄는 시대의 전사前史일 뿐”이라는 말을 통해 분명히 표명된 바 있다.

『관찰자의 기술』과 『지각의 정지』에서 크레리가 몰두하는 시대는 물론 19세기이지만, 전자가 19세기 초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후자는 19세기 후반에 보다 초점을 맞추어 시각과 근대성의 관계를 파헤치고 있다. 그는 시각과 관련해 19세기 초반에, 구체적으로는 1820~30년대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며, 1838년 이후 사진의 발전이나 1870년대와 1880년대의 모더니즘 회화는 이러한 변화의 귀결 내지는 반향이라고 본다. 분명 이때 크레리는 『말과 사물』에서 푸코가 상정하고 있는 ‘근대성의 문턱’에 해당하는 시기를 염두에 두고 중대한 변화들을 고찰하고 있다. 17~18세기의 고전주의 시대를 특징짓는 재현/표상의 에피스테메와 단절하며 역사성에 입각한 근대적 에피스테메가 출현하는 시기 말이다. 푸코에 따르면, 분석의 장소가 세계에 대한 재현/표상에서 유한한 인간으로 이행한 이때부터 지식은 전적으로 선험적이기보다는 “해부학적-생리학적 조건을 띠고, 점차 신체적 구조 내에서 형성”된다.[5] 

크레리는 푸코적 시대 구분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각 시대의 시각성을 나타내는 그만의 은유적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데 카메라 옵스쿠라와 입체경이 그것이다.[6] 둘의 차이를 따져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카메라 옵스쿠라는 장치 외부의 세계를 반드시 전제하지만, 입체경은 장치 내부에 장착된 미세하게 다른 두 장의 사진을 필요로 할 뿐이다. 카메라 옵스쿠라로 이곳저곳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관찰할 대상이 (또는 적어도 그 대상으로부터 나오는 빛이) 현존하는 장소로 거듭 이동하는 일이 필수적이지만, 입체경을 사용하는 관찰자는 굳이 어딘가로 이동할 필요 없이 소프트웨어에 해당하는 사진들만 바꾸면 된다. 카메라 옵스쿠라 장치 내부에 맺힌 상은 관찰자의 신체와 무관한 객관적 재현이지만, 입체경을 통해 지각되는 상은 관찰자의 좌우 두 눈에 개별적으로 입력된 시각 데이터에서 떠오르는 주관적 구성이다. 즉 후자의 ‘주관적 시각’은 철저하게 ‘육화된 시각’이며, 이것이 푸코가 “해부학적-생리학적 조건을 띠고, 점차 신체적 구조 내에서 형성”된다고 지적한 근대적 지식의 특성에 상응하는 시각임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을 터다. 카메라 옵스쿠라 모델에 어울리는 기하학적 광학에서 입체경 모델에 어울리는 생리학적 광학으로 이행하는 데 있어 선구적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색채론』의 괴테이다. 

크레리의 논의에서 주관적 시각은 이중적 의미를 띤다. 그것은 객관적 대상의 반영이나 재현이라는 구속에서 풀려난 자율적 시각으로서, 이를테면 1840년대에 윌리엄 터너가 그린 <빛과 색 (괴테의 이론)─대홍수 뒤의 아침> 같은 회화에서 극단적으로 표명되듯 “잔상을 통해서 태양은 몸에 속하게 되고 몸은 사실상 태양의 효과를 내는 원천의 자리를 맡는” 수준에까지 이른다.[7] 하지만 이 정도로 풀려난 시각을 어떻게 다시 통합할 것인지의 문제가 새로이 제기된다. 이리하여 칸트적 통각 개념은 19세기 들어 지각의 통합이라는 문제와 관련해 주의 개념을 이론적으로 재구성하고 그것의 기능을 조사하는 일련의 시도들로 전환된다. 이는 양안적 시각의 생리학적 작동 방식을 계량화・형식화하고 이러한 시각과 결부된 관찰자를 규범화함으로써 오늘날의 우리가 놓여 있는 스펙터클적 감시 사회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는 것이 크레리의 주장이다. 『지각의 정지』에서 그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19세기 후반의 화가들, 즉 마네, 쇠라, 그리고 세잔이 그린 그림들 역시 주관적 시각의 양가성 속에서 진동하고 있는 작업들로 파악된다. 이로써 크레리의 논의는 우리로 하여금 모더니즘적 ‘순수 시각’을 강조하는 전통적 해석에서 벗어나 분산적 힘과 집중적 힘이 교차하는 역동적인 주의의 장으로서 회화적 표면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이 책의 번역 작업은 주로 코로나 대유행 기간에 이루어졌다. 번역을 결심했던 2019년 당시엔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던 몇몇 사안들이 대유행 기간에 사회적으로 표면화되면서 다분히 ‘역사적’이라고 생각했던 이 책이 예전보다 훨씬 더 시의성을 띠게 된 듯한 느낌도 든다. 크레리는 『초토화된 지구』에서 소셜 미디어가 정치적 역량을 얼마나 위축시키는지를 주의력과 관련지어 진단하면서, “반전 운동이나 반제국주의 운동에 요구되는 지속적 특성을 띤 투쟁과 연대는 소셜 미디어의 확산에 수반되는 일시적이고 공허한 형식의 주의력과는 양립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8] 그렇다고 해서 크레리가 지속적 특성을 띤 집중적 주의력의 회복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그는 스펙터클이 공통의 생활세계를 정지시키지 못하도록 저항하려면 사람들끼리의 만남이 필수적이라고 역설하며 스펙터클은 “‘만남rencontre의 능력을 약화’하는 일을 체계적으로 조직화하고 그러한 능력을 사회적 환각으로, 즉 만남에 대한 거짓된 의식 내지는 ‘만남의 환상’으로 대체”한다고 한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를 거듭 떠올려 본다.[9]

나는 2000년대 초반 영화잡지 《씨네21》 공모를 통해 영화평론가로 등단해 활동하다 대학원에 입학해 영화사와 영화이론을 공부하던 중 이 책을 처음 접했다. 세미나 시간에 함께 읽은 책은 『관찰자의 기술』이었지만 오히려 나는 개인적으로 읽은 『지각의 정지』에 좀 더 끌렸다. 작품에 대한 심미적 감응 능력을 강조하며 얼마간 형식주의적 분석을 차용해 이루어지곤 했던 다분히 도락적이고 미장센 중심적인 시네필적 영화비평에 의문을 품고 있던 시기였고, 정작 작품의 세부를 들여다보는 일은 소홀히 하면서 ‘문화적 산물들’을 관통하는 이데올로기와 그것의 이론적 함의에 주목하는 강단 문화연구의 공허함에도 싫증을 내던 시기다. 어쩌면 완벽한 모델은 아닐지 몰라도 이 책은 순전히 형식주의적이지도, 역사주의적이지도, 실증주의적이지도 않으면서 비평을 빙자한 도락과 문화연구의 공허함 모두를 넘어서는 비판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크레리의 이 책은 어떤 면에서도 영화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영화와 관련해서 무척이나 흥미롭게 다가온다. 시각성 모델과 관련된 그의 논의가 정통적인 매체사 서술에 도전을 가하는 지점이 무엇보다 영화를 통해 더할 나위 없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통상 영화는 사진과 더불어 카메라 옵스쿠라의 장치적 구성을 계승한 매체로 간주된다. 그런데 외부적 세계의 현존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고, 관찰 대상을 보기 위해 이동할 필요도 없으며, 여러 개의 정지 이미지를 결합해 운동을 구성해내는 주관적 절차에 있어 분명 영화는 크레리가 제시한 입체경 모델에 더 가까운 매체처럼 보인다. 더불어, 1870년대 후반에 바그너가 바이로이트에 선보인 무대 건축의 양식, 즉 무대에서 빛나는 환영들에 관객의 주의를 붙들어두기 위해 ‘인공 어둠’[10]을 활용하는 양식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이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관람 환경의 기본값으로 삼은 것이 바로 영화다. 크레리의 이 책은 영화 장치를 구성하는 여러 자연스러워 보이는 요소들이 실은 주의의 체제 속에서 짜깁기로 구성된 것이며 역사적 특징을 띠기에 얼마든지 의문의 대상일 수 있음을 여실히 깨닫게 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지각의 정지』의 은밀한 중핵 내지는 동력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영화다. 크레리는 근대적 시각성의 20세기적 총화라 해도 좋을 영화 장치의 역사적 구성을 미심쩍은 눈으로 보면서도,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등 이후에 출현한 매체들과는 달리 영화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어떤 대안적 가능성 또한 여전히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이 책을 1907년 9월 22일 로마 콜론나 광장에서 영화를 본 경험을 기술한 프로이트의 편지에 대한 언급으로 끝내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늦여름의 저녁 공기가 상쾌한 이 광장에 모여 전혀 바그너적이지 않은 관람 환경 속에서 이따금 상영되는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단체로 휩쓸리는 군중도 아니고 고독하게 분리된 개인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불확정적인 채로 두 극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 과연 이들이 대안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느냐 여부는 단지 스크린에 비치는 영화의 성격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과 제도를 어떻게 바꿀 것이냐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다만, 어느 순간 관람을 중단하고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숙소로 돌아간 프로이트처럼, 일단 우리는 스펙터클의 빛을 보기 위한 인공 어둠이 아닌 어둠 자체가 기다리는 시공으로 일단 자리를 옮겨야 한다. 눈보다 귀를 열어두고 밤을 기다리다가, 이내 잠을 받아들이면서, 만남을 고대하면서.


번역 원고를 꼼꼼히 검토해주신 문학과지성사 편집부 및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한다. 김미경, 김선태, 김현주 등 번역 작업이 고독과 분리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도록 도와준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23년 6월 7일

유운성


[1]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 나남, 2020(번역개정 2판), pp. 394~95.

[2] Jonathan Crary, “Spectacle, Attention, Counter-Memory,” October 50 (Fall 1989), p. 105.

[3] 조너선 크레리, 『24/7 잠의 종말』, 김성호 옮김, 문학동네, 2014, p. 25.

[4] Jonathan Crary, Scorched Earth: Beyond the Digital Age to a Post-Capitalist World, Verso, 2022, p. 14.

[5] 미셸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전면 개역판), p. 437. 번역은 수정. 

[6] 크레리가 이처럼 1820~30년대에 시각성의 측면에서 중요한 단절이 있었음을 상정하고 카메라 옵스쿠라와 입체경을 각각 그 이전과 이후 시대의 시각성을 대표하는 모델로서 제시한 것은 1988년 4월 30일에 디아예술재단Dia Art Foundation의 후원으로 마련된 심포지엄에서다. 크레리 외에도 마틴 제이, 로절린드 크라우스, 노먼 브라이슨, 재클린 로즈 등이 참여한 이 심포지엄의 결과물은 핼 포스터가 책임 편집을 맡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Hal Foster ed., Vision and Visuality, Bay Press, 1988. 한국어판은 핼 포스터 엮음, 『시각과 시각성』, 최연희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2004. 

[7] 조나단 크래리, 『관찰자의 기술: 19세기의 시각과 근대성』, 임동근・오성훈 외 옮김, 문화과학사, 2001, pp. 208~10. 번역은 수정.

[8] Jonathan Crary, Scorched Earth, p. 16.

[9]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이경숙 옮김, 현실문화, 1996, p. 173. 번역은 수정.

[10] 바이로이트축제극장과 인공 어둠에 대한 논의는 다음의 책을 참고. Noam M. Elcott, Artificial Darkness: An Obscure History of Modern Art and Media,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6, pp. 49~59. 이 책에서 엘콧은 조반니 파피니Giovanni Papini가 1907년 5월 18일에 『라 스탐파La Stampa』 지에 게재한 「영화의 철학La filosofia del cinematografo」이라는 흥미로운 기사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엔 “주의가 산만해지는 것을 막는 영화관의 바그너적 어둠에 의해 인공적으로 주의분산이 차단된 […] 오직 하나의 감각, 즉 시각”이라는 구절이 있다. 



2023-01-16

프린시프 레알 공원

 

※ 이 글은 격월간으로 발행되는 사진잡지 《보스토크》 35호(2022년 9월 발행)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리스본을 방문했을 때 굳이 이곳을 찾았던 것은 순전히 주앙 때문이었다. 오해가 없도록 정확히 말하자면, 두 명의 주앙 때문이었다. 하나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매일같이 이곳으로 산책을 나오곤 했던 주앙이고, 다른 하나는 리스본 여행 내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 주었던 주앙이다. 간단히 늙은 주앙과 젊은 주앙이라고 해 두자. 깡마른 주앙과 똥똥한 주앙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어쩐지 나이로 구분하는 편이 더 담백한 느낌을 준다. 늙은 주앙은 영화에서 보았을 뿐이지만 젊은 주앙은 오랜 친구다. 늙은 주앙은 영화감독이고 젊은 주앙은 비디오 아티스트다. 젊은 주앙의 성에는 딱히 뜻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늙은 주앙의 성에는 ‘사냥꾼’ 또는 ‘산림관’이라는 뜻이 있다. 둘의 공통점이라면 역대와 현역을 막론하고 포르투갈 대통령들을 싫어하고 자신들이 만든 영화나 비디오 작품에 종종 직접 출연한다는 것이다. 리스본에는 영화를 만드는 주앙이라는 이름의 친구들이 두 명 더 있지만, 한집에서 사는 그들은 좀처럼 자신들의 영화에 얼굴을 비추는 일이 없다.

늙은 주앙의 영화를 보면 프린시프 레알 공원 근처에는 분명 버스 정류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떤 영문인지 젊은 주앙은 이렇게 말했다. 카몽이스 광장 근처에서 내려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 한참 올라가다 보면 네가 주앙의 영화에서 보았던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공원이 나올 거야. 나중에 거기 도착해서 확인해 보니 실제로 프린시프 레알 공원 바로 앞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대체 왜 저 아래서부터 걸어 올라오라고 한 거지? 구글맵 같은 것으로 경로를 미리 확인한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고 고리타분하게 지도 하나만 들고 돌아다니던 때라, 당시엔 여하간 젊은 주앙의 조언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종종 지도가 무용지물이 되는 알파마 지구의 한 카페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버스를 타러 가기 직전, 젊은 주앙에게 물었다. 혹시 그 나무 이름이 뭔지 알아? 리스본에 관한 것이라면 온갖 잡스러운 것들까지 꿰고 있는 그는 주저 없이 답한다. 멕시칸 사이프러스야. 하지만 학명을 알면 그 나무가 왜 거기 있는지 더 수긍이 되지. 학명이 뭔데? 쿠프레수스 루시타니카야. 너도 알다시피 루시타니아는 포르투갈을 가리키는 말이잖아? 그래서 포르투갈 사이프러스라고도 불러. 그러면서 늙은 주앙이 앉아 있던 나무 아래의 벤치에서 찍은 자기 사진을 보여준다(사진 1). 사진을 잠깐 들여다보고 인사를 한 뒤 버스를 탔다. 그리고 주앙의 조언대로 카몽이스 광장에서 내려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진 1


언덕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며 천천히 둘러보던 그때의 프린시프 레알 지구는 아직 관광객으로 붐비기 전이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이 영화화되어 전 세계적으로 개봉된 지 일 년쯤 지난 무렵이라, 분명 리스본을 찾는 관광객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던 때이기는 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 제로니무스 수도원 인근의 파스텔드나타 가게가 소개되면서 그 앞에 한국 관광객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기 시작한 것도 대략 이 무렵이다. 프린시프 레알 지구 초입에 자리한, 도시를 내려다보며 확 트여 있는 상 페드루 드 알칸타라 전망대에 드문드문 관광객들이 눈에 띄기는 했다. 하지만 프린시프 레알 공원을 찾는 관광객은 거의 없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5월의 태양을 피하기 안성맞춤인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로,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노인들이나 낮잠을 즐기는 청년들이 간간이 눈에 띄는 정도였다. 

한동안 다시 찾지 못했지만 여기저기서 들은 대로라면 지금의 프린시프 레알 공원은 그때와는 꽤 달라진 모양이다. 영화에서의 식물이라는 주제로 온라인에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는 파트릭 홀차펠이 2021년 4월에 쓴 글을 보면 이곳의 현재 모습은 예전과 적잖이 다르다. 그는 요즘 포르투갈의 수도를 방문하는 그 누구도 늙은 주앙이 140살 넘게 먹은 이 나무 아래 앉아 그토록 생생하고 부드럽게 포착해냈던 것과 같은 느낌을 찾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거지들, 연인들, 마약상들, 사기꾼들, 그리고 시네필들에게 인기 있는 만남의 장소였던 이 공원을 관광객들이 점령했다.” 이 문장이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은, 생전의 늙은 주앙은 자신의 영화 속에서 거지, 연인, 마약상, 사기꾼 같은 존재였으며 그의 영화는 이러한 불량한 존재를 생생하고 부드럽게 감싸는 진정한 시네필의 영화였기 때문이다. 홀차펠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쓴다. “하지만 당신이 일찌감치 그곳에 가서 잠시 앉아 눈을 감고 있으면, 진한 사이프러스 향기가, 우산 모양으로 드리워져 눈길을 끄는 수관(樹冠)에 스미는 시원한 산들바람이, 빛과 그림자의 유희가, 그 나뭇잎들의 속삭임이, 내세의 것인 만큼이나 현세의 것이기도 한 비밀들을 여전히 드러내보일 것이다.” 


사진 2


홀차펠의 글과 함께 수록된 이바나 밀로스의 그림(사진 2)은 흥미롭다. 밀로스의 그림 제목은 ‘부부 루시타니카’다. ‘부부’는 생전의 주앙이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성이다. 언제부턴가 그는 알파마 지구 테주강 인근의 허름한 하숙집에 기거하던 시절부터 사용하던 불경하기 짝이 없는 (포르투갈어로 신을 뜻하는) ‘데우스’라는 성은 더이상 쓰지 않았다. 이런저런 범죄와 결부된 과거를 감추고 살아가기엔 그렇게 하는 편이 나았을 터다. 또한, 자신이 노스페라투를 닮았다는 점에 착안해 그 흡혈귀를 연기했던 배우의 이름을 따서 자신을 막스라고 부르는 것도 언제부턴가 그만두었다. 여하간 밀로스를 통해 주앙은 그 스스로가 부부 루시타니카라는 하나의 나무가 되었다. 

사실 시네필에게 있어서라면 프린시프 레알 공원은 곧 늙은 주앙의 공원이다. 그의 유작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가 하나의 공원을 이토록 완벽하게 하나의 천국처럼 그려낸 적이 또 있었던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일찍이 페르난두 페소아도 이곳을 리스본 최고의 공원 가운데 하나로 꼽은 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페소아는 이곳을 프린시프 레알 공원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리우데자네이루 광장에 있는 또 다른 공원”이라고 썼을 뿐이다. (그런데 2017년에 출간된 한국어 번역판 『페소아의 리스본』에서는 ‘또 다른 공원’을 프린시프 레알 공원으로 아예 풀어서 옮겨 놓았다.) 이 공원의 공식적 이름은 유명한 언론인 프란사 보르제스를 기려 붙여진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리우데자네이루 광장은 오늘날 프린시프 레알 광장이라 불리고, 프란사 보르제스 공원은 프린시프 레알 공원이라고 불린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에겐 주앙의 공원과 페소아의 공원을 별개의 것으로 간주할 명분이 있는 셈이다. 이름의 마력 덕분이다.


사진 3


젊은 주앙이 일러준 대로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서 본 프린시프 레알 공원은 늙은 주앙의 영화에서 보고 상상했던 것만큼 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놀라거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의 영화가 공간감을 교란하는 일은 아주 흔하기 때문이다. 다만 영화를 볼 때 이 공원을 실제보다 크게 느낀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주앙의 유작에는 산책을 나간 그가 나무를 등지고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이 거듭 나온다(사진 3). 이 영화에 보이는 프린시프 레알 공원의 모습은 이처럼 나무줄기를 화면의 중심에 두고 각도와 크기를 달리해 가며 찍은 쇼트들을 통해 제시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따금 우리는 그가 아이들의 놀이 상대가 되어 주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같은 자리를 맴도는 소녀를 쫓아 달려가기도 하는 모습을 본다. 하지만 언제나 나무 아래서다. 우리는 프레임 바깥의 풍경은 어떠한지, 즉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서 주앙이 보고 있는 풍경은 어떠한지 전혀 알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나무 쪽을 보게 될 뿐 나무 쪽에서는 볼 수 없다. 우리는 주앙이 등지고 있는 나무 저편으로 멀리 보이는 배경을 통해 매우 제한적으로만 공원의 경계와 모양새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 모호함이 오히려 공원의 규모를 상상적으로 증폭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그리고 보이는 것을 대신해 생생하게 바깥의 감각을 전달하는 소리의 농밀함에 힘입어 공원은 어엿한 하나의 세계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까지 확장된다.


사진 4~사진 6


당연한 말이지만, 늙은 주앙의 프린시프 레알 공원은 어디까지나 영화에만 존재하는 그런 곳이다. 하지만 그가 보고 있던 풍경이 여전히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가 앉았던 벤치에 앉아 그가 보았을 법한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사진 4~사진 6). 이렇게 해서, 자신의 영화에서라면 그가 절대 구사하지 않았을 시점 쇼트들을 만들어 본다. 그리고 잠시 생각해 본다. 이런 쇼트들이 영화에 함께 제시되어 버리면 늙은 주앙이 즐겨 찾았던 프린시프 레알 공원이라는 영화적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 진정 우리를 전율케 하는 것은 그의 유작이 바로 이러한 세계가 소멸하는 순간을 연출하면서 종결된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앙은 시선을 나무 쪽으로 두고 벤치에 앉아 있다(사진 7). 그의 등 뒤로 쿠프레수스 루시타니카가 보이지 않는 이유다. 그는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다프네라는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이 나무 쪽에서 공원을 보게 된다. 밀로스가 그린 부부 루시타니카의 모습은 이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밀로스의 그림에는 공원이 보이지 않는다. 주앙의 죽음과 더불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신의 숨바꼭질: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의 우화와 노년의 희극

 

※ 이 글은 2013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와 그의 친구들"(2013.5.8~5.30)에 맞춰 발간된 동명의 책자에 처음 수록되었으며, 나의 비평집 『유령과 파수꾼들: 영화의 가장자리에서 본 풍경』(2018)에도 수록된 바 있다.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1939~2003)


“난 찬란한 행복을 그려보는 덧없는 시간들을 믿지 않는다.” 

-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 야콥 폰 군텐 이야기』 


영화작가가 자신의 노년의 몸, 몸짓, 얼굴을 희극의 소재로 삼는 것은 그다지 드문 일도 아니다.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이 공연한 <라임라이트>(1952)는 그러한 노년의 희극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예에 속한다.) 하지만 노년의 몸을 우수로 감싸인 용기가 아닌 저항의 현신으로 삼는 예는 드물고, 또 드문 만큼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우수에 저항하며 계속해서 움직이(려)는 부지런함과 그 움직임에 저항하는 둔함을 모두 자신의 속성으로 기꺼이 껴안은 노년의 몸, 즉 저항의 이중성을 그 근거로 삼는 몸의 희극은 “난 아직 늙지 않았어!”라고 외치며 돌진하는 자들의 무모함에는 거리를 둔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노년의 희극은 어떤 이유로건 노년을 거부하는 노인(네)들의 통속 희극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노년의 희극이란 노년의 속성 자체를 저항의 표식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희극적 웃음은 서로 길항하는 저항을, 부지런함과 둔함의 뒤얽힘을 바라보는 데서 발생한다.  

우리 시대의 영화작가들 가운데 이중화된 저항을 초점으로 삼은 타원형의 발걸음으로 노년의 희극을 그려내는 데 탁월한 이들로는, 조지아(그루지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해 온 오타르 요셀리아니(1934년 생), 프랑스의 뤽 물레(1937년 생) 그리고 포르투갈의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1939년 생)를 꼽을 수 있다. (미지의 걸작 <작은 푸가>(1979)의 스위스 감독 이브 예르생(1942년 생)이 작품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응당 그의 이름도 여기 나란히 놓였을 것이다. [덧붙임] 예르생은 2018년 11월 15일에 세상을 떠났다.) 굳이 이들의 출생연도를 여기 밝힌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이들은 모두 자국요셀리아니의 경우는 구(舊)소비에트 연방내에서 새로운 영화의 물결이 도래하고 난 ‘직후’에 감독으로서 데뷔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로 인해 (영화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물결 초기에 일찌감치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은 선배들의 그늘에 꽤 오랫동안 가려 있게 되는 불운에 시달려야 했다.[1] 1969년에 첫 단편을 만든 이후 (명프로듀서 파울루 브랑쿠가 제작한) <실베스트르>(1981)로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몬테이로의 경우, <녹색의 해>(1963)의 파울루 로샤나 <벨라르미누>(1964)의 페르난두 로프스 같은 포르투갈 시네마 노부(새로운 영화) 1세대보다 뒤에 데뷔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가 등장한 1970년대는 <과거와 현재>(1971)[2]로 영화계로 복귀한 60대의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가 <베닐드 혹은 성모>(1975)와 <저주받은 사랑>(1978) 같은 걸작들을 연이어 발표하며 국내외에서 관심을 받기 시작하고 있던 때였다.[3]

 

<노란 집의 추억>


영화가 바야흐로 급변하며 어떤 현대예술보다도 더 현대적이 되어가던 시기에 새로운 세대에 속한 감독으로 출발했으나 꽤 오랫동안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던 이들이, 정작 자신들과 더불어 나이든 영화의 나이(듦) 자체를 고유하게 양식화한 제스처의 희극으로 조금씩 알려지게 된 건 그 자체로 희극적인 일이다. 한동안 조명 바깥에서 서성거릴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타원 주위를 거듭 맴도는 발걸음으로 특징지어지는 순환과 반복과 변주의 희극의 대가가 되었는데, 이를 우리는 (요셀리아니의 표현대로) 영화적 론도 혹은 (예르생의 영화 제목을 따서) 영화적 푸가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몬테이로는 1960~70년대 유럽 예술영화의 급진성을 계승하면서 여기에 무성영화의 농밀한 공기와 미국영화의 견고함을 더한달리 말하자면 무르나우, 드레이어, 브레송, 스트라우브와 위예, 존 포드, 하워드 혹스가 섞이지 않은 채 ‘공존’하는독특한 영화들로 주목을 끌었다. 몬테이로 자신이 연기한 주인공의 이름의 따서 ‘데우스(Deus: 포르투갈어로 ‘신’을 뜻한다) 3부작’으로도 알려진 <노란 집의 추억>(1989), <신의 코미디>(1995), <신의 결혼식>(1999)이 바로 그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명명한 ‘말년의 양식’이란 (생물학적으로) 노년 혹은 말년의 시기에 이른 개인의 ‘원숙함’을 보여주는 양식이 아니라, 예술적 모더니즘 혹은 아방가르드의 어떤 이상을 대변하는 탈(脫)개인적이고 초(超)시대적인 무차별적 (부)조화의 양식이라고 이해한다면, 몬테이로의 영화만큼이나 영화의 ‘말년의 양식’을 육화시킨 사례도 없을 것이다. 이로써 그는 페드로 코스타, 주앙 페드로 로드리게스, 미구엘 고메스, 주앙 니콜라우 등, 포스트-시네마의 시대에 영화의 ‘불순성’이라는 문제를 놓고 씨름하는 포르투갈 감독들을 위한 하나의 영화적 모델이 될 수 있었다. 물론 그에겐 영화와 다른 미디어의 관계를 고민하기에 앞서 일단 영화 내에서의 백가쟁명의 상황을 돌파하는 것이것은 그처럼 ‘조금 늦게’ 도착한 세대에 속한 이들에게 남겨진 숙제였다이 급선무였겠지만 말이다. 


<신의 코미디>


그가 감독으로서 첫 발을 내딛었던 1970년대로 돌아가 보자. 파울루 필리프 몬테이로는, 우수의 전통에서 발을 빼내려 노력하는 포르투갈 영화작가는 (그때나 지금이나) 전무하다시피 한 가운데 “소피아 드 멜루 브라이너 같은 시인들이 시의 세계에서 창조하고 싶어 했던 혹은 창조해 낼 수 있었던 [...] 빛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이가 있다면 그것은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다”[4]라고 주장한다. (1969년에 발표된 몬테이로의 첫 단편은 바로 소피아 드 멜루 브라이너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빛으로 향하는 것은 다만 “굴욕을 감내하는 연옥이라는 수단을 통해서”[5], 즉 길고 긴 어둠의 통로를 가로지르는 과정을 감내하는 인내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몬테이로의 영화들을 가로지르는 주요 모티프 가운데 하나는 바로 ‘여정’이다몬테이로는 잘 알고 있었다. “생을 즐기는 사람(bon vivant)의 반대로 죽음을 즐기는 사람(bon mourant)을 생각해 본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몬테이로야말로 그에 속하는 이일 것이다. [...] 그는 천박한 일상을 행복하게 누리는 데서 얻는 거짓된 기쁨을 [...] 거부하고, 어둠을 응시하고, 고양이처럼 그 안에서 보는 법을 배우고, 대담한 사랑을 추구하는 새로운 인물형을 사진의 음화처럼 어둠 속에서 발견해내려 했다.”[6] 필리프 몬테이로는 이러한 관점에서 세자르 몬테이로의 <여정>(1977), <실베스트르> 그리고 <바다의 꽃>(1986)을 다시 읽어내고 있다.

몬테이로의 출세작인 <여정>은 그의 경력의 한 축을 이루는 우화(fable)적 영화의 형식을 처음으로 온전히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이것은 포르투갈 북동부의 트라스-우스-몽트스[7]에서 대서양 연안으로 향하는 두 남녀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여정의 영화’이지만, 다큐멘터리적으로 지역의 풍습을 기록한 영상들 그리고 포르투갈 전통설화와 아이스킬로스의 희곡 『에우메니데스』에서 발췌한 삽화 등으로 서사 자체가 자꾸만 단속되는 탓에 통상적인 로드무비의 구조는 거의 무너지고 만다. 포르투갈이라는 유럽의 변방 내의 변방인 트라스-우스-몽트스의 민속지적 이미지는, 한 번은 포르투갈 전통설화라는 지역적인 (동시에 매우 보편적인 모티프들로 채워진) 텍스트와, 다른 한 번은 유럽 정신의 근원이라 할 그리스 비극의 텍스트와 결합된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로지르는 서사적 여정 속에 몬테이로 자신과 마리아 벨류 다 코스타가 쓴 대사들이 촘촘히 채워진다. 지금에 와서 보면 <여정>은 포르투갈적인 것과 유럽적인 것 사이에서 진동하면서 1974년 혁명 이후 포르투갈(영화)의 가능성을 묻는 대담한 실험이 영화를 정치적이라 부를 수 있다면 바로 이 때문이다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론 몬테이로 자신의 영화의 가능성을 묻기 위한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영화의 가능성은 무엇보다 자신에게 걸맞은 우화를 발견하는 데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특히 동화 혹은 설화에 대한 관심은 매우 커서 1978년에는 <여정>의 브랑카 플로르에 관한 이야기에 소재를 제공했던 『포르투갈 전통설화』(카를로스 드 올리베이라와 주제 고메스 페헤이라 편집, 1958)에서 선택한 이야기들로 3편의 16mm 연작 단편(<두 병사>, <세 개의 석류의 사랑>, <어머니>)을 만들기도 했다. <실베스트르> 역시 15세기 포르투갈 설화와 푸른 수염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며, 몬테이로의 가장 과격한 영화로 알려진 <백설공주>(2000)이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아주 약간의 사진과 영상을 제외하면) 검은 화면뿐이다는 그림형제의 동화를 재구성한 로베르트 발저의 텍스트를 활용한 작품이다. 


<여정>


이때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왜 우화인가? 영화적 우화(la fable cinématographique)에 관한 자크 랑시에르의 견해[8]를 참조하며 몬테이로의 영화를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언급한 몬테이로의 영화들은 하나같이 세속적 우화를 기묘하게 비틀고 있다. 교훈은 삭제되어 있고, 이미지는 이야기를 불충분하게만 전달할 뿐이며(<백설공주>의 경우, 이야기를 전달하는 이미지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때론 별안간 이야기가 중단되거나 다른 이야기로 전환되기도 한다. 또한 말(言)은 이야기를 전진시킨다기보다 종종 그것을 지연시킨다. 엄정해 보이는 화면으로 광폭한 사건이 막 일어난 현장을 무심히 담아냄으로써이런 순간에 몬테이로는 지극히 브레송적[9]이다보는 이를 당혹케 하는 경우도 있다. 세속적 우화가 어떤 여정을 이끄는 힘(작용)이라면 몬테이로 영화의 시청각적 요소들은 그에 저항하는 힘(반작용)이다. (“[영화적] 우화는 일반적으로 정지의 순간들/현실의 순간들과 행동의 시퀀스들을 번갈아 보여준다.”[10]) 그리고 이 둘의 길항으로부터 시네마틱한 순간을 발생시키는 것이 몬테이로의 영화적 우화인 것이다. 이 우화가 그의 후기의 노년의 희극과 구조적으로 상동관계에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나아가 그의 우화적 형식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노년의 몸과 그것의 이중화된 저항이 발생시키는 몸짓우수에 저항하며 계속해서 움직이(려)는 부지런함과 그 움직임에 저항하는 둔함이 꼭 필요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의 유작 <오고 가며>(2003)의 경우, 반복되는 움직임(100번 버스를 타고 시내를 도는 것, 새로운 가정부를 맞아들여 그들을 유혹하고 또 그들에게 유혹당하는 것) 속에 빛나는 정지의 순간/현실의 순간들(버스 승객들의 합창 장면, 주앙이 노래「벨라 차우」에 맞춰 바닥에 걸레질하는 장면, 경찰 바바라에게 들려주는 주앙의 리라 연주 장면)이 하도 촘촘히 박혀 있어, 결국 그 둘의 경계가 무화되다시피 한다. 부지런함과 둔함을 동시에 표현해내는 절묘한 몸짓들로 점철된 <오고 가며>는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원형(圓形)에 가까운 노년의 희극이자, 몬테이로의 우화적 형식의 원형(原型)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몬테이로의 후기작들에 익숙한 이들에게, 그의 초기작들은 꽤 낯설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경력 초기의 우화적 영화가 그의 노년의 희극의 구조와 맞닿아 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대로다. <노란 집의 추억>은 그가 만 50세가 되었을 때 발표된 영화로, 여기서부터 몬테이로는 (내가 글머리에서 언급한) 이중화된 저항을 초점으로 삼은 타원형의 발걸음으로 아예 자기만의 ‘신화’(myth)를 쓰기 시작한다. 데우스 3부작과 <존 웨인의 히프>(1997), <오고 가며>(2003)는 승화된 우화이자 추락한 신화이다. 아니면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그는 인간들이 신화 쓰기를 중단한 시대에 스스로 자신의 신화를 쓰기로 마음먹고 지상으로 내려왔다가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신(Deus)의 역할을 떠맡기로 했다고. 이 신은 음탕하기 그지없으며 여인의 음모(陰毛)에 한없이 미혹된 존재이다. (<신의 코미디>에 나오는 그의 『사색의 서(書)』는 다름 아닌 여인들의 음모를 모은 수집책이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그의 영화에서 음모 페티시즘은 우리를 세계의 관능성(sensuality)으로 인도하는 실마리이지 일개 수집가의 도착적이고 변태적인 성벽(性癖)이 아니다. 이것은 브레송의 장세니즘과 스트라우브와 위예의 좌파 정치학이 결국 우리를 세계의 관능성으로 인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르주 다네는 “스트라우브와 위예의 영화에서, 우리는 관능주의는 간직하고 공산주의는 버려야 한다”[11]고 단언한 바 있다.)[12]

명백히 브레송의 <소매치기>(1959)의 결말을 패러디한 <신의 결혼식>의 결말부의 감옥 면회 장면에서, 주앙은 면회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주아나에게 음모를 하나 뽑아 달라고 말한다. 거기서 그는 음모를 ‘아리아드네의 실’이라고 부른다. 아리아드네의 실, 미궁을 빠져 나오기 위해 테세우스가 간직했던 가냘프지만 강력한 수단. 여인의 음모는 그런 것이다. 하지만 너무 짧다(!). 그래서 그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직접 잣기로 마음먹는다. 수집가로서의 데우스, <신의 코미디>의 주인공은 이렇게 탄생한다. 하지만 모든 여인이 아리아드네가 될 수는 없다. 사실 단 한 명의 아리아드네가 있을 뿐이다.  


<오고 가며>


몬테이로의 영화에서 순환, 반복, 변주되는 모티프들이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순환, 반복, 변주는 노년의 희극을 결정짓는 특징이다.) 원형의 공간(<노란 집의 추억>과 <신의 결혼식>에서 주앙이 수용되는 정신병원의 원형 정원, <오고 가며>의 공원), 같은 자리를 맴돌거나 반복되는 움직임 그리고 특정한 악절이 반복되는 음악 등을 떠올려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여러 ‘가능세계’들 사이를 넘나들며 순환, 반복, 음운변화되는 고유명들이 있다는 점이다. 데우스 3부작과 <존 웨인의 히프>와 <오고 가며>를 일종의 연작처럼 간주하려다 보면, 문득 우리는 이 영화들이 일견 연속적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실은 서사적으로 딱 아귀가 맞게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그 세계들은 같은 타임라인 내에 자리할 수는 없지만, 동일한 배우, 동일한 고유명 그리고 유사한 모티프들로 구성 가능한 세계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고유명들은 배우들과 더불어 서로가 서로를 속이며 숨바꼭질하기 일쑤다. 먼 길을 돌아 ‘주앙’은 ‘주아나’를 다시 찾지만(<신의 결혼식>) 아마 주아나는 다시 그를 떠난 것 같다. <오고 가며>의 주앙여기서 그의 성은 드 데우스가 아니라 ‘부부’(Vuvu)이다의 집에 걸린 <소매치기> 포스터가 이를 암시한다. <존 웨인의 히프>에서는 ‘주앙 드 데우스’와 ‘장 드 디외’(Jean de Dieu)두 이름 모두 ‘신의 요한’을 뜻한다가 숨바꼭질을 벌인다. <노란 집의 추억>과 <신의 결혼식>에서 현자 혹은 신의 사자임을 자처하는 정신병자 리비우는 사실 몬테이로가 1970년에 발표한 단편 <망자의 구두를 기다리다 맨발로 죽다>[13]의 주인공으로 모두 포르투갈 명배우 루이스 미구엘 신트라가 연기했다. <오고 가며>는 <망자의 구두를 기다리다 맨발로 죽다>에서 리비우가 친구와 앉아 있던 리스본의 한 공원 벤치에 주앙이 홀로 앉아 있다 사라지는 광경으로 끝난다. 

고유명과 관련해 가장 고약한 예는 아마 <오고 가며>의 주앙의 집에 맨 처음 찾아온 가정부 아드리아나일 것이다. ‘아드리아나’(Adriana)는 결국 ‘아리아드네’(Ariadne)로는 조합되지 않는 기만적 애너그램(anagram)이다. 게다가 후반부에 가면 아드리아나는 거의 수염처럼 길고 수북한 음모를 지닌 우라카라는 이름의 가정부로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그녀와의 재회는 주앙을 결국 죽음으로 이끌 뿐이다. 아니, 이것은 확신할 수 없다.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는 이제 세상을 떠났지만, 다른 ‘주앙(들)’은, 신-테세우스-노스페라투의 형상을 모두 지닌 이 그로테스크한 존재는 자신의 아리아드네를 찾아 영원히 이승을 배회할 것이다. 또한 그는 이름과 존재가 끝없이 만나고 또 어긋나는 과정을 어떻게든 따라잡으려는 노년의 발걸음, (타)원형의 발걸음으로 배회할 것이다. 그리고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라는 이름과 그 이름이 지칭하는 모든 것들은 세상의 숱한 기만적 영화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창문 밖으로 셔츠를 내던지며 주앙 부부가 던진 말처럼, “바람과 함께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바람을 탄 안티고네”(Anti-Gone with the Wind).


[1] 뤽 물레의 <죽음의 힘 Le prestige de la mort>(2006)은 이와 관련해 꽤 흥미롭게 읽히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차기작 장소 물색을 위해 여행 중이던 극중 영화감독 뤽 물레(그 자신이 연기했다)는 어느 날 자신과 꼭 닮은 시체 한 구를 발견하고는 옷을 바꿔 입은 뒤 시체를 사람들 눈에 쉬이 뜨일 만한 곳에 옮겨 둔다. 자신이 죽었다고 알려지면 애도와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명성이 솟구칠 것을 기대하면서, 물레는 어딘가에서 사후 추모 프로그램 연락이 오면 어떤 영화들 위주로 상영토록 유도할 것인지 - 단편보다는 장편 위주로 할 것 - 따위의 계획까지 세워 둔다. 그런데 별안간 장-뤽 고다르가 사망했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고다르 사망 소식에 자신의 사망 소식이 묻힐 것을 염려한 그는 서둘러 시체를 다시 감추려 하지만 이미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다. 이후 영화는 물레가 겪게 되는 곤경과 환상적인 일들을 그려낸다.

[2] 몬테이로는 1972년에 쓴 「<과거와 현재>: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의 포르투갈식 네크로필름(necrofilm)」이란 글에서 올리베이라의 영화를 상찬하며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영화사(史)에서 올리베이라의 이 영화만큼이나 극도로 에로틱한 영화가 있었다면, 그건 이보다 더 평가절하되고 몰이해되었던 드레이어의 <게르트루드>일 것이다.” “O Passado e o Presente: um necrofilme português de Manoel de Oliveira” in Diário de Lisboa (Supplemento letterario), 10 Marzo 1972. 몬테이로는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그리고 데뷔한 이후에도 한동안 영화평론가로 활동했는데 (<과거와 현재>에 관한 위의 비평문을 포함해) 『이미지 Imagem』, 『시대와 양식 O Tempo e o Modo』, 『리스본 다이어리 Diário de Lisboa』, 『시네필 Cinéfilo』 등에 기고한 그의 글은 www.joaocesarmonteiro.net에서 찾아볼 수 있다. [덧붙임] 이 웹사이트는 현재는 운영되지 않고 있다.

[3] 1970년대 포르투갈영화의 부흥과 관련해서, 오랜 독재체재를 종식시킨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의 영향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굴벤키안(Gulbenkian) 재단과 포르투갈영화센터(CPC)의 협력을 통한 영화제작 지원 사업을 간과할 수 없다. 올리베이라의 <과거와 현재>는 바로 이 사업의 첫 지원 작품 가운데 하나였다. 1980년대 초에 이르면 포르투갈영화는 칸, 베니스, 베를린영화제 등을 통해 국제적인 주목을 끌게 되고 한편으론 자국 내에서 상업적으로도 적잖이 성공을 거뒀다. 일례로, 올리베이라의 <프란시스카>(1981)처럼 상업적으로 “어렵다”고 여겨지는 작품도 8만 명에 달하는 관객을 동원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포르투갈영화는 적어도 산업적으로는 쇠퇴의 길을 밟게 된다. João Mário Grilo, “A Imagem Subalterna (The Subaltern Image)”, in Nuno Figueiredo & Dinis Guarda (ed.) Portugal: Um Retrato Cinematográfico (Portugal: A Cinematographic Portrait) (Número, 2004) p.149-155.

[4] Paulo Filipe Monteiro, “O Fardo de Uma Nação (The Burden of a Nation)”, 앞의 책, p.51.

[5] 앞의 글, p.51. 

[6] 앞의 글, p.53.

[7] 포르투갈 북동부의 산간지대로 안토니우 레이스와 마르가리다 코르데이루의 걸작 <트라스-우스-몽트스>(1976)의 무대가 된 곳이다. 문화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데다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탓에 몬테이로가 <여정>을 촬영할 당시만 해도 1974년 혁명에 대한 반감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8] 자크 랑시에르, 『영화우화』, 유재홍 옮김, 인간사랑, 2012. 

[9] 앞의 책, p.32-34를 참조할 것.

[10] 앞의 책, p.38.

[11] 세르주 다네,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 정락길 옮김, 이모션북스, 2012, p.184. 이 책에서는 ‘감각주의’라 번역한 ‘sensualisme’을 여기선 ‘관능주의’로 바꿨다.  

[12] 몬테이로와 스트라우브-위예에게 있어서 유물론이란 세계의 관능성을 지각하기 위한 영화적 태도다. 연극성(theatricality)을 배척하기보다는 그것을 시네마의 토대로 삼으려 한다는 점도 이들의 공통점이다. 물론 몬테이로의 영화와 스트라우브-위예의 영화 간의 차이를 식별해 내기란 어렵지 않다. 음란한 언어와 저항의 언어, 나지막한 목소리와 확신에 찬 목소리, 아래로 향하는 노쇠한 몸과 꼿꼿이 위로 향하는 강건한 몸, 정면성(frontality)의 화면과 사각의(oblique) 화면 등등. 

[13] 원제 ‘Quem Espera por Sapatos de Defunto Morre Descalço’는 포르투갈 속담에서 따 온 것으로 ‘망자의 구두를 기다리는 이는 맨발로 죽으리라’고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