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9-11

보이지 않는, 투명하지 않은 ― 이행준의 필름 퍼포먼스




(※ 아래 글은 2013.8.6~8.29에 열린 이행준 개인전 "400 Years in 4 Minutes"의 아티스트 북에 실렸던 것을 옮긴 것이다. 조만간 나는 이행준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비평을 추가해 이 글을 확장시킬 생각이다. 글에서 언급된 <강연>은 오는 10월 3일(목)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다시 한 번 공연될 예정이다. 이행준의 작품에 대한 정보와 영상클립은 hangjunlee.com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여기,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 이행준의 필름 퍼포먼스를 보다 보면 누구라도 이런 의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여기'는 그의 필름 퍼포먼스가 행해지고 있는 바로 그 순간, 그 자리 이외에 아무 것도 뜻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적어도 하나의 투명성이 여기 존재한다. 그런데 그 투명한 시간과 공간 어디에도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1. <필름 워크 Film Walk>(2011)

2011년 문래예술공장에서 초연되었던 그의 <필름 워크>는 16mm 영사기에 걸린 생필름(film stock)의 한쪽 끝을 작가가 손으로 잡고 길게 이어 뽑으면서 공연 장소에서 이리저리 거니는 간단한 퍼포먼스다. (나는 이 퍼포먼스를 2013년 1월 25일 공연장 로라이즈Lowrise에서 보았다.) 이 퍼포먼스의 기술적 원리는 간단하다. 16mm 영사기의 옵티컬 사운드헤드에 생필름의 사운드트랙이 아니라 퍼포레이션(perforation: 필름 가장자리에 규칙적인 간격으로 뚫린 구멍)이 물리게끔 하는 것이다. 퍼포레이션 자체가 일종의 광학 사운드트랙으로 기능하게 되는 셈인데, 이때 (1) <필름 워크> 퍼포먼스의 사운드스케이프는 동일한 음(音)의 발생과 중단이라는 이원적 체계에 구속되며 (2) 이 음의 특질은 16mm 필름 가장자리에 뚫린 작은 정사각형 구멍의 크기에 의존 - 즉, 음의 특질은 산업적으로 결정된다. - 하고 (3) 음과 음 사이의 간격은 공연자가 생필름을 잡아끌며 이동하는 속도에 의해 즉흥적으로 결정되고 또 변화된다. 여기서 영사기와 필름이라는 영화장치는 일종의 악기처럼 다루어지는데, 즉흥적 연주(3)는 어디까지나 구속조건(1과 2)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전적으로 자유분방한 것은 아니다. 


<필름 워크>

이행준의 <필름 워크> 퍼포먼스가 그와 오랜 기간 공동작업해 온 홍철기, 류한길, 최준용, 진상태 등 한국 즉흥음악 혹은 실험음악 연주자들의 작업에서 영감을 얻어 구상된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퍼포먼스의 영화적 기원을 추적해 보는 일 또한 가능하다. 통상 이러한 필름 퍼포먼스는 확장영화(expanded cinema)의 여러 실천들과 결부되곤 하는데, 이행준이 필름 퍼포먼스에 대한 관심 이전에 필름이라는 매체 자체의 물질성에 깊이 관심을 지닌 작가였음을 고려해 보면, 또한 앞서 살펴보았듯 <필름 워크>가 시네마를 떠받치는 물적 조건과 구조적 체계를 (즉흥)음악적으로 활용한 작업임을 고려해 보면, (전통적인) 영화관 상영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몇몇 실험영화들의 계보 속에 이를 자리매김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다만, 한국영화의 계보 속에 <필름 워크>를 자리매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영화적 이미지를 흑색의 프레임과 백색의 프레임만으로 제한하고 - 이원적 체계(흑과 백)와 이미지 특질(프레임의 종횡비)의 산업적 결정 - 그 둘의 교차를 통한 '깜빡임(flicker)' 효과만으로 영화 전체를 구성한 피터 쿠벨카의 <아르눌프 라이너 Arnulf Rainer>(1960)와 이를 응용해 뤼미에르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을 해체 및 재구성한 피터 체르카스키의 <모션 픽처 Motion Picture>(1984)는 비-영화관에서 수행되는 이행준의 (스크리닝 없는) 필름 퍼포먼스에 대한 영화적 거울상 혹은 거푸집처럼 보일 정도다. <필름 워크>는 ‘(빛이 아닌) 소리의 깜빡임’을 생성해내는 작업이다. 

그러나 개념적 구상과 그 수행이 어떤 식으로건 '작품'으로 향하는 쿠벨카나 체르카스키의 영화와 때와 장소에 따라 변주되는 수행들로만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이행준의 '작업' 사이의 비교는 딱 여기까지다. <필름 워크>의 명백한 반-영화적 장치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1) 내가 아는 한 이 작업은 통상적인 영화관 환경에서 수행된 적이 없고 언제나 소규모의 공연장이나 갤러리에서 수행되었다. (2) 이 퍼포먼스를 위해서는 필름이 반드시 요구되지만 그 필름은 영사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영사기를 통과할 뿐이다. 따라서 빛도, 스크린도 없다. 영사기는 시네마를 가능케 하는 여러 물리적 장치 가운데 하나(퍼포레이션)를 광학적으로 읽어내 소리로 변환시킬 뿐이다. (3) 스크린 상의 배우의 현존은 퍼포먼스가 수행되는 공간 내의 공연자의 현존으로 대체된다. 이 공연자는 배우이자, 감독이며, (영사하지 않는) 영사기사이고, 포스트-프로덕션 작업실의 기술자의 형상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4) 영사기에 걸린 필름은 한 릴에서 풀려나와 다른 릴에 되감기는 것이 아니라 퍼포먼스가 진행됨에 따라 공간 이곳저곳에 흩어지고 내걸린다. (5) 이 퍼포먼스는 이미 기록된 어떤 것도 보여주지 않을 뿐 아니라 퍼포먼스 자체를 기록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 영화관 환경 안에서 상영되는 '이미지 없는 영화'들, 마르셀 뒤샹의 <샘 Fontaine>(1917)이나 존 케이지의 <4분 33초>(1952)가 그것을 감싸고 있는 특정한 제도적 공간 내에 배치됨으로써 효과를 발휘하는 반-제도적 퍼포먼스인 반면, 이행준의 <필름 워크>는 퍼포먼스가 수행되는 공간과 퍼포먼스 자체가 모두 시네마로부터 탈각되어 있다. 오히려 <필름 워크>라는 필름 퍼포먼스는 시네마의 철저한 부재를 통해 시네마를 지시한다. 여기는 모든 시네마의 기체(基體)가 되는 어둠 속에 영사기와 공연자가 덩그마니 남아, 시네마의 흔적을 찾아 배회하는 피란델로적 세계다. 이 배회의 과정에서, 그 누구보다 피란델로적 세계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건 정작 관객들이다. 또한 여기서 관객들은 기원의 영화들의 숙명이었으나 이제는 전적으로 부정되고 있는 - 필름은 제쳐두고라도, 자기테이프, 하드드라이브, DVD, 블루레이 및 메모리디스크 등의 저장매체가 넘쳐남에 따라 - 영화의 일시성을 재발견한다. (이행준의 많은 작업은 최종적인 형태로 '완성'되지 않은 채, 임시적인 실험, 작업 중(work-in-progress), 언제라도 변형이 가능한 아이디어의 모음으로서 존재한다.) 이것이야말로 이행준의 필름 퍼포먼스가 가감 없이 교육적(didactic)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다. 


2. <강연 A Lecture>(1968/2013)

2013년, 이행준은 홀리스 프램튼이 1968년 10월 30일 뉴욕 헌터칼리지에서 첫 선을 보인 <강연> 퍼포먼스 - 상영용 필름을 준비할 필요 없이 16mm 영사기 한 대, 스크린, 테이프 레코더/플레이어, 붉은색 필터, 파이프 클리너 만으로 수행할 수 있는 매우 간단한 퍼포먼스다. - 를 직접 해 보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내게 이 퍼포먼스의 '강연자'(라기보다는 '낭독자') 역할을 맡아 달라고 했다. 1968년 공연 당시, 프램튼은 마이클 스노로 하여금 강연 텍스트를 미리 읽게 하고 이를 녹음해 활용했다. 반면 이행준은 내가 현장에서 직접 강연 텍스트를 읽어 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기왕이면 그간의 이행준의 작업과 어느 정도 관련된 방식으로 원래의 1968년 <강연> 텍스트를 재구성해 활용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고민 끝에 <애프터 사이코 샤워 After Psycho Shower>(2009~2013), <바람이 부는 까닭 Why Does the Wind Blow>(2012), <배우에 관한 역설 Paradoxe sur le comédien>(2013~ 현재 작업 중) 등 그의 최근 작업에서 두드러진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에 대한 관심을 언어적, 텍스트적인 수준으로 연장해 보기로 했다. 다시 말하자면, 프램튼의 <강연> 스크립트를 기초로 삼되, 여러 책이나 논문에서 따 온 문장들로 원 텍스트의 문장들 일부를 대체하고 부분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미세한 의미변화가 생겨나게끔 하려 했다. 나는 오브제를 다루듯 문장들을 다루게 될 것이었다. 

우선 나는 프램튼의 <강연> 스크립트 전체를 직역에 가깝게 한글로 옮기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이어서 번역한 텍스트를 읽어 보며 원래의 의미를 배반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일부 표현들을 다듬거나 의역했다. 이 작업이 끝난 후, 나는 낭독에 적합하지 않거나, 우리의 퍼포먼스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거나, 설명이 불충분하거나 모호하다고 생각되는 문장들을 솎아 내고, 이 문장들을 다른 여러 책이나 논문에서 발췌한 문장들로 대체했다. 다만 원래의 문장 대신 삽입된 문장은 (자연스럽게는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건 앞뒤의 문장들과 연결되어야 했다. 내가 직접 쓴 문장은 전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강연> 퍼포먼스(2013년 3월 2일 쿤스트독 갤러리)를 위한 스크립트가 완성되었다. 이때는 이행준 또한 프램튼의 지시문을 최대한 충실히 따르는 방식으로 - 후반부에는 그만의 즉흥적 퍼포먼스가 약간 가미되긴 했지만 -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이런 식의 작업이 지니는 의미를 (나를 대신해) 설명해 준다고 생각되는 글 하나를, 공연을 마치고 얼마 후에 발견하게 되었다. 2013년 3월에 간행된 조효원의 『부서진 이름(들): 발터 벤야민의 글상자』를 읽으면서였는데, 거기엔 『인식으로서의 초현실주의Surrealismus als Erkenntnis』에서 요제프 퓌른케스가 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인용되어 있었다. "인용 속에서는 주관적 사념/의견의 표현이 벙어리가 되고, 언어 자체의 진정성에 대한 청취에 자리를 양보한다. 한편으로 언어는 도구적 연관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며, 그로써 (도구적 언어의) 영향력과 의도는 중단되어 정지상태에 이른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용하는 자의 의도 역시 중단되면서 인용의 권위 뒤로 물러나게 된다. 인용은 언어(자체)가 스스로 말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말한다." 인용이 인용하는 자의 견해를 떠받치기 위한 보충적 삽입이기를 그치고 아예 전면에 나설 때 언어는 (커뮤니케이션의) 도구이기를 그치고 스스로 말하게 되리라는 이 진술은, 시각적 이미지를 원래의 도구적 연관에서 떼어내어 - 파운드 푸티지 실험영화 작가로서, 프로파간다 필름에 대한 이행준의 특별한 관심은 우연이 아니다. - 이미지가 바로 그 이미지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님(고유명으로서의 이미지)을 드러내는 이행준의 작업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것이기도 하다. 

2013년 6월 14일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있었던 두 번째 <강연> 퍼포먼스(이에 대한 정보는 이곳을 참조)를 준비하면서, 나는 첫 공연에서 활용한 스크립트에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또 다른 책들에서 발췌한 문장 몇 개를 추가로 삽입했고, 직접 두세 문장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퍼포먼스 말미에 관객들에게 들려줄 요량으로 『카이에 뒤 시네마』 197호(1967년 12월/1968년 1월)의 부록으로 제공되었던, 제리 루이스의 목소리가 담긴 작은 레코드판을 준비했다. 이행준 또한 8mm 필름을 준비해 왔는데, 퍼포먼스 도중 16mm 영사기에 삽입해 (<필름 워크> 퍼포먼스에서처럼) 손으로 잡아끌기 위한 것이었다. 이 경우, 8mm 필름의 프레임과 퍼포레이션이 (프레임에 담긴 이미지와 더불어) 고스란히 스크린에 투영되게 될 것이었다. 두 번째 <강연> 퍼포먼스에서 우리는 프램튼의 작업으로부터 약간의 '일탈'을 시도했지만, '인용의 권위'를 전면화한다는 원칙만은 계속 견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세 번째 <강연> 퍼포먼스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의 창조적 의지를 잠시 뒤로 물리고, 한 마법사가 남긴 지시사항을 따라 주술을 반복하면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무효화되거나 누락되었을 지시사항을 복원하고 실험하면서, 시네마의 재래(再來)를 꿈꾸면서.


***

두 번째 <강연> 퍼포먼스(2013.6.14)를 위한 스크립트

(※ 아래는 2013년 6월 14일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있었던 <강연> 퍼포먼스 당시 낭독한 스크립트 전문이다. 여기 옮기면서 부분적으로 수정했음을 밝혀 둔다.)  

불을 꺼 주시기 바랍니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어두운 곳에서 하는 편이 낫죠. 우리 모두는 예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오백 번 정도 이곳에 온다고 해요.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 방에 왔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어둠 속에 있었다는 말이죠. 이 어둠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 어둠은 몽상의 실체 자체일 뿐 아니라 확산된 에로티시즘의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이 어둠 속에는 영화의 매혹 자체가 감춰져 있습니다. 이 어둠 속에서 우린 편안하게 앉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느슨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신발을 벗어놓아도 무방합니다. 외투나 발을 앞자리에 올려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안 된다면, 약간의 말을 주고받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죠. 그러니까 우리는 제로의 공간, 영의 공간 안에 움직이지 않고 떠 있는 겁니다. 어둠침침하고, 익명적이며, 무심한 이 공간 속에서, 우리가 영화라고 부르는 감정들의 축제가 열립니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지켜보기 위해 왔습니다.

(영사기를 켠다.)

높이와 너비가 3대 4로 된, 주의 깊게 표준화된 직사각형, 아무런 형상도 없는 백색의 스크린이 있습니다. 이 직사각형 전체에 엄청난 와트의 에너지가 흐릅니다. 공연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합니다. 이 공연의 공연자는 정확하기 이를 데 없는 기계죠. 이 기계는 통상 보이지 않는 곳에, 우리 뒤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기계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은 제한적일지 몰라도, 그 영역 내에서, 그것은 흡사 동물처럼, 결코 틀리는 법이 없습니다. 이 기계는 공연을 아주 정확하게 끝없이 반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하얀 직사각형은 영원합니다. 오고 가는 것은 우리 뿐 입니다. 이 직사각형은 우리가 오기 이전부터 여기 있었고 우리가 떠나간 뒤에도 여기 남아 있을 겁니다. 이것은 단지 하얀 빛의 직사각형일 뿐이지만, 이것이 영화의 전부입니다. 우리는 이 직사각형 안에서 결코 무언가를 더 볼 수는 없고, 단지 덜 볼 수 있을 뿐이죠. 

(렌즈 앞에 붉은 필터를 끼운다.)

만일 우리가 빨간 색의 영화를 본다면, 그것이 빨간 색으로만 된 영화라면, 그 이상 우리가 볼 것은 없는 것일까요? 그렇죠. 빨간 색으로 된 영화는 우리의 하얀 빛의 직사각형에서 녹색과 파란 색을 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특이한 영화가 맘에 들지 않는다 해서 “이건 불충분해. 난 더 보고 싶다고.”라고 말해선 안 되는 겁니다. 그보다는 “이건 너무 많은데. 난 좀 덜 보았으면 해.”라고 말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색깔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 형태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형태에는 신경 쓰지 말고 색깔을 바라보세요.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가 “나는 빨간 빛을 보고 있다”고 말할 때, 저는 그 사람이 이전에 하얀 빛을 본 적이 있음을 단언할 수 있습니다.    

(붉은 필터를 제거한다.)

우리의 직사각형은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닙니다. 사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지닌 전부입니다. 그것은 영화라는 예술의 한계 가운데 하나죠. 따라서 우리가 ‘더’라고 부르는 것, 사실상 ‘덜’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의 하얀 직사각형에서 얼마 간 이것저것을 빼내고 제거하는 방법을 고안해야 합니다. 이 직사각형은 우리의 공연자, 즉 영사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고안하건 그것과 맞아야 합니다. 영화를 만드는 기술이란 우리의 영사기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고안하는 일입니다. 떠올릴 수 있는 방법 가운데 가장 쉬운 것까진 아니겠지만 가장 단순한 방법은 영사기에 아무 것도 집어넣지 않는 것인데, 이건 그 기계에 편리하게 맞아 떨어지죠. 이게 바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영화입니다. 이런 식으로 영화를 한다면 영화감독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 이점을 누릴 수 있죠. 하지만 그걸 떠나 미학적 관점에서, 이 영화는 지금껏 만들어졌던 대부분의 영화들을 떠올려 볼 때, 비견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보다는 좀 덜 보길 원한다고 했죠. 좋습니다. 

(손으로 스크린의 모든 빛을 가린다.)

렌즈 앞에 손을 놓아 봅니다. 우리가 얼마나 덜 보길 원하는지에 대해 숙고하는 동안 손이 따뜻해집니다. 우리의 직사각형을 꽤 빼앗기게 된다는 걸 알게 되죠. 

(손을 빼낸다.)

영사기가 우리의 스크린에 퍼부어대는 정보들을 조절하고 싶다면, 이렇게 하면 될 겁니다.

(파이프 클리너를 영사기 게이트에 삽입한다.)

좀 낫네요. 이렇게 한다고 해도 그다지 오래 우리의 주의를 잡아끌진 못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이 직사각형이 있죠.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들어온 이곳에서 언제라도 떠날 수 있습니다. 

(파이프 클리너를 치운다.)

우린 벌써 영사기 안에 무언가를 집어넣는 네 가지 방법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네 편의 영화를 만든 것이죠. 영사기 안에 삽입되어 방사되는 광선의 양을 조절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영화라 할 수 있을 것 같죠. 조절하는 방법을 다양화하기 위해, 이 직사각형에서 무엇을 제거할 것이며 얼마나 제거할 것인지를 보다 정확하게 제어하기 위해, 우리는 종종 필름이라고 불리는 특별히 고안된 물질을 사용합니다. 이 필름은 빛에 대단히 민감합니다. 빛이 닿았던 곳과 그렇지 않았던 곳을 충실하게 기록해 보존함으로써, 필름은 우리의 광선을 조절하고, 거기서 무언가를 빼내고, 공백을 만드는데, 그게 우리에겐 라나 터너 같은 여배우로 보이게 되는 거죠. 게다가 그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해요. 

(8mm 필름을 16mm 영사기에 걸고 서서히 당긴다.)

하지만 필름을 손에 들고 자세히 관찰해 보면, 우린 그것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일련의 작은 사진들의 띠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영사기가 이 작은 정지된 사진들을 가속시켜 움직이게 만드는 거죠. 각각의 사진들 혹은 프레임들은 통상 우리의 불완전한 시각으로는 알아볼 수 없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모든 프레임들이 비슷한 경우에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만약 단지 하나의 프레임에만 구멍을 뚫어 놓아도, 분명 우리는 그걸 알아차리게 될 겁니다. 그리고 여러 개의 전혀 닮지 않은 프레임들을 한데 이어 놓으면, 우린 분명 그것들을 따로따로 알아보게 될 거에요.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알아보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필름이란 연속적인 프레임들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또한 그것들을 알아보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분명 영화란 필름 안에서 가장 자주 나타나는 것에 대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가령 라나 터너가 다른 어떤 것보다 자주 나타난다면, 그 영화는 그녀에 관한 것이라는데 동의할 수 있겠죠. 물론 이 라나 터너의 이미지가 실제의 라나 터너와 닮았는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사진이란 묘한 것이어서 먼저 어떤 사람을 알고 나서 사진에서 그 사람의 모습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지만, 그 반대로 사진으로 본 사람을 직접 알아보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건 죽음에서 삶을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삶에서 죽음으로 옮겨가는 것은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죠. 여하간 이제, 라나 터너가 스크린에 항상 나타나는 건 아니라고 가정해 봅시다. 나아가, 어떤 도구를 가지고 필름 띠 전체에 스크래치를 낸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스크래치는 라나 터너보다 더 자주 보일 것이고, 그럼 영화는 스크래치에 대한 것이 되겠죠. 어떤 경우이건 한 가지만은 언제나 영사기 안에 있습니다. 바로 필름이죠. 필름이야말로 우리가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영화는 필름에 관한 것인 거죠. 



(8mm 필름 끌기를 중단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우리가 한때 수학에 관해 지녔던 믿음을 떠올려 보면 됩니다. 한때 우리는 수학이란 조지나 해리가 가지고 있는 사과나 복숭아의 수에 관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필름메이커란 필름을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필름이란 롤에 감겨 있는 물질의 띠라는 걸, 움직이지 않는 작은 사진들의 띠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필름메이커는 크고 작은 필름 조각들을 한데 결합해 그 띠를 만드는 사람이죠. 이건 냉혹하고 어리석은 작업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는 익명의 작은 조각들을 이어붙이는 작업을 즐깁니다. 영화 예술가는 그의 사진 띠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제국주의적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세계가 아니라 푸티지로 만들어집니다. 영화는 커뮤니케이션의 강력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들 하죠. 우리는 인간의 정신과 마음에 영향을 주기 위해 그걸 활용한다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영화 예술가는 그저 자신의 사진 띠를 만드는 작업을 계속할 뿐입니다. 그건 적어도 그가 약간이나마 이해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영화란 푸티지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카메라를 사용해야 합니다. 카메라는 푸티지를 만드는 기계입니다. 그건 우리에게 제3의 눈을, 예리하게 관통하는 확장된 시각을 제공합니다. 이 눈은 시간의 현미경이자 망원경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하고, 불분명한 것을 분명하게 하고, 감춰진 것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기계적인 눈은 오직 그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눈은 아담보다 완벽한 인간을 창조해 냅니다. 하지만 카메라를 조작하는 것은 우리의 손, 우리의 몸이죠. 우리는 그것을 바삐 돌려 고양된 무언가에서 하나의 능력을 절단해 냅니다. 여하간 제겐 사실 제 자신의 푸티지를 스스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주된 이점 가운데 하나는 제 자신의 영화를 직접 만드는 일에서 한 발 물러나 있게 된다는 것이죠. 어떤 이들은 이건 자기표현을 추구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 할 겁니다. 누군가가 제게 그렇게 물어온다면, 저는 자기를 표현하는 일이란 거의 저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고 답변할 겁니다. 제겐 저 자신을 인정받고 싶다는 어떤 욕망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건 결코 미덕이 아니며 저 스스로에게 내기를 걸고 저 자신을 믿는 능력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죠. 저는 영화라는 예술의 기본적 조건들과 한계를 되찾는 일에 보다 관심이 있습니다. 결국 자기를 표현한다는 것은, 예술에서건 다른 어떤 것에서건, 역사적으로 매우 짧은 시기 동안 존속했던 관념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기는 이제 끝나가고 있죠. 그리고 이 강연도 거의 끝나갑니다. 실험영화를 보러 온 관객이라면, 영화를 이해하는 부분과 동시에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최상의 이해방법이라는 것을, 너무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행위가 오히려 이해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영화, 혹은 적어도 어떤 종류의 영화는 이미지와 뜻 사이의 기나긴 망설임이라고요. (잠시 침묵.) 우리의 직사각형을 바라볼 시간이 아직 조금 남아 있습니다. 이 순수한 존재는 그 직사각형 안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어떤 것들보다도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린 그것을 변화시킬 우리만의 방법을 고안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영사기라고 하는 정확하기 이를 데 없는 기계 혹은 공연자에 어울리는 또 하나의 기계 혹은 공연자를 초대하고 싶습니다. 영화는 이 결국 이 두 공연자의 만남과 헤어짐의 예술입니다. 

(『카이에 뒤 시네마』 제197호 부록 디스크(제리 루이스의 목소리)를 재생한다.)

이상 낭독한 것은 홀리스 프램튼이 1968년 10월 30일 뉴욕 헌터 칼리지에서 첫 선을 보인 <강연>이라는 제목의 공연을 위한 원래의 스크립트를 기초로 삼아, 롤랑 바르트의 「영화관을 나오면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경험과 감각 자료에 관한 강의를 위한 노트」,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 지가 베르토프의 「키노크스: 혁명」과 「키노-아이의 탄생」, 세르주 다네의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 크리스티앙 메츠의 『상상적 기표』 그리고 기 드보르의 영화에 관한 조르조 아감벤의 논문 「반복과 중단」에서 발췌한 텍스트를 가지고 재구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카이에 뒤 시네마』 제 197호의 부록으로 제공되었던 디스크에 실린 제리 루이스의 목소리를 들려 드렸습니다.

이제 불을 켜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