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13

첫 비평집 『유령과 파수꾼들』


첫 비평집 『유령과 파수꾼들: 영화의 가장자리에서 본 풍경』(미디어버스, 2018)이 이번 주에 인쇄되어 도착했다. 표지와 목차, 그리고 비평집 말미에 붙인 후기를 올려둔다.




우정을 위한 거리距離

우정의 이미지들
‘영화-편지’의 조건, 또는 ‘영화-편지’는 가능한가
파편들
키노-아이, 사물의 편에서
유령과 파수꾼들

뤼미에르 은하의 가장자리에서

시간의 건축적 경험
고유명으로서의 이미지
떠도는 영화, 혹은 이름 없는 것의 이름 부르기
밀수꾼의 노래: 다시 움직이는 비평을 위한 몽타주
사막은 보이지 않는다: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픽션에 대한 물음들

형상적 픽션을 향하여: 커모드, 아우어바흐, 그리고 영화
천일야화, 혹은 픽션 없는 세계에 저항하기
텍스트 소셜리즘, 모든 이름들을 위한 바다: 박솔뫼의 『머리부터 천천히』
픽션 없는 사진들을 위한 모험, 그리고 흔적에 대한 책임: 장보윤의 ‘다시 이곳에서: 마운트 아날로그’

고다르(의) 읽기

〈영화의 역사(들)〉과 고다르의 서재
〈언어와의 작별〉
고다르의 〈인디아〉(로베르토 로셀리니, 1959) 리뷰에 대한 세 개의 주석: 에세이 영화에 대하여

당신을 바라보기 위하여

내 곁에 있어 줘: 필립 가렐과 고독의 인상학
하나의 시선을 위한 퍼포먼스: 나루세 미키오에 대한 노트

지금 여기의 가장자리

부재의 구조화와 분리의 전략: 〈두 개의 문〉
음각(陰刻)의 기술: 이미지, 재난의 가장자리에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가난한 세대의 놀이: 박병래의 영상작업에 대한 노트
장소 없는 시대의 영화를 위한 에토스: 박홍민의 〈혼자〉와 장우진의 〈춘천, 춘천〉

포르투갈식 작별

시네마-에이돌론: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입문, 혹은 논쟁을 위한 서설
출항을 앞둔 방주의 주인에게 보내는 편지: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의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
신의 숨바꼭질: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의 우화와 노년의 희극
지하로부터의 수기: 페드로 코스타의 〈호스 머니〉
당신의 그림자를 껴안으면서: 페드로 코스타와 후이 샤페즈의 ‘멀리 있는 방’
유령들: 주앙 페드로 호드리게스의 〈성 안토니오 축일 아침〉

부록

영화비평의 ‘장소’에 관하여
암살과 자살
영화제의 검열-효과에 관한 노트


후기後記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부록에 있는 두 개의 글과 홍상수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관한 짧은 에세이, 그리고 「파편들」이라는 글에 담긴 몇몇 단상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2011년부터 2017년 사이에 쓴 것이다.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지만 21세기 첫 십 년 동안 쓴 글 대부분을 배제하고 비교적 최근에 쓴 글들만을 책에 수록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제야 분명히 깨닫게 된 것이지만 주간지나 일간지에 주로 글을 기고하던 시절 나의 영화적 상상은 1990년대 한국 영화문화를 지배하던 정전ㆍ문헌ㆍ태도에 여전히 얽매여 있었다. 『씨네21』이나 『키노』 같은 영화잡지가 창간되고 국제영화제가 본격적으로 출범하던 무렵에 입대해 군복무를 한 덕분에 1990년대 영화문화 특유의 교양주의(“너 이 영화 봤어?”)와 스노비즘(“이런 영화를 보고도 가치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장님이다.”)의 세례를 부분적으로나마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시기의 흔적이 평론가로서 활동한 첫 십 년 동안 내가 쓴 글들에 어떤 식으로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때의 나는 시네필리아란 영화나 영화작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내는 자기장 안에서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는 것이라는 단순한 명제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둘째, 내가 (21세기 영화가 아니라) 영화의 21세기라는 문제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한 것은 2011년 무렵부터다.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동시대 영화의 흐름을 부지런히 따라잡으려 노력하기는 했지만 어떤 감독을 주목해야 한다든지 어떤 나라에서 새로운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든지 하는 피상적이고 저널리즘적인 진단을 넘어 오늘날의 영상문화가 영화라는 것의 개념을 어떻게 바꿔놓고 있는지에 대해 꼼꼼히 따져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2011년 여름 당시 문지문화원사이 기획실장으로 계시던 주일우 선생에게서 새로 창간 준비 중인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합류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때까지 주로 글을 발표해왔던 주간지나 일간지의 지면 제약에서 벗어나 몇 가지 토픽에 대해 나 자신을 설득할 수 있을 때까지 – 물론 이러한 노력이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 긴 호흡의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2012년 여름에는 때마침(?) 당시 일하고 있던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해임되고 한동안 별다른 일이 없이 집에 있게 되면서 그동안 모은 자료를 다시 살피고 메모들을 정리하고 글을 쓰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셋째,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문지문화원사이에서 일하게 된 것을 계기로 내게는 낯설다고 해야 할 여러 예술 분야의 작가, 기획자 및 평론가 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런 분들과의 대화는 정기적으로 열린 편집회의에서 『인문예술잡지 F』의 동료 편집위원 분들과 나눈 대화와 더불어 내게 많은 자극을 주었는데, 영화와 그것에 대한 담론의 자리를 동시대의 예술과 사유라는 보다 폭넓은 맥락 속에서 지속적으로 가늠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나는 비평의 진정한 대상은 작품의 형식, 작품들 간의 관계, 작품을 둘러싼 세상이라는 맥락이라기보다는 이러저러한 작품과 이러저러한 세상을 동시에 가능케 하는 장(場) 자체이며 형식, 관계, 맥락에 대한 논의는 이러한 장에 대한 숙고 없이는 미학주의적 도락이나 아카데믹한 한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동시대에도 여전히 고전적인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이유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칭송하는 일은 쉬운 일이다. 정말 어려운 것은 같은 해(1930년)에 태어난 이스트우드와 고다르는 왜 그토록 이질적인 영화작가가 되었는지, 이러한 외견상의 이질성은 어떤 심오한 보편성의 두 가지 다른 모습일 뿐인 것인지, 그렇다면 그러한 보편성이란 무엇인지, 이들의 영화를 여전히 ‘동시대적’ 영화로 받아들이는 일이 내게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의 질문에 답변하는 일이다.

그간 쓴 글들을 묶어 책으로 내 보자는 미디어버스 임경용 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이 책에 서문 같은 것은 쓰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여기 실린 글 대부분은 언젠가 책으로 묶을 수 있으리라는 고려 없이 씌어진 것들이다. 예외가 있다면 형상적 영화라는 주제를 다룬 「형상적 픽션을 향하여: 커모드, 아우어바흐, 그리고 영화」 정도일 터인데 이 글은 ‘네르발적 산책: 형상적 영화와 방법으로서의 에세이’이라는 제목으로 쓰고 있던 (그리고 여전히 쓰고 있는) 작은 책의 한 장(章)을 계간 『문학과사회』의 요청으로 정리해 미리 공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하간 이 책에 실린 글 대부분은 별다른 안내나 정보 없이 그 자체로 읽힐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었고 따라서 서문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성격이 다소 급해서인지 어떤 책이건 서문을 읽는 것을 질색하는 편이고 때로는 건너뛰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 해도 서문 비슷한 것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이유로 쓴 글들이기는 하지만 한데 모아 놓고 다시 읽어 보니 각각의 글들을 가로지르고 서로 교차하기도 하는 흐름 같은 것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어서, 이런 흐름의 원천에 해당한다 싶은 것은 밝혀두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책에 실을 요량으로 모은 글들 가운데 함께 두면 서문 역할을 할 수 있을 법한 것들만을 따로 빼서 ‘우정을 위한 거리’라는 제목의 파트에 묶어 책머리에 두기로 했다. 

책을 내면서 ‘여러모로 모자란 글’이라든지 ‘부족한 글’이라는 등의 헛된 겸손의 표현으로 자신을 낮추는 일은 불필요하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글을 빼거나 아예 책을 출간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이 책에는 우선 나 자신이 수긍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글은 싣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었군!’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글들만을 골라 실은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그 글을 쓸 당시 내가 갖고 있던 믿음과 태도를 고려할 때 수긍할 수 있다는 것일 뿐 여전히 내가 그러한 믿음과 태도의 총체 속에 머물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몇몇 글들의 경우 지금의 나는 그 글을 쓸 당시의 나와 생각을 달리하며 그 때문에 새로운 글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이를테면 2011년 필름포럼에서 행한 강연 원고를 토대로 쓴 「고다르의 <인디아> 리뷰에 대한 세 개의 주석: 에세이 영화에 대하여」에서 나는 에세이 영화를 하나의 영화적 형식이라는 입장에서 고찰하고 있는데, 지금의 나는 영화적 에세이란 형식은 물론이고 양식ㆍ스타일ㆍ장르도 아니며 무엇보다 하나의 방법 혹은 방법론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 에세이란 형식이 아니라 방법이라는 것은 에세이는 그만의 고유한 대상들을 가진다는 뜻이다.

각각의 글에서 눈에 띄는 오류들은 최대한 바로잡으려 했고 수정하거나 보완한 부분도 적지 않다. 하지만 첫 발표 당시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게끔 수정하는 일은 삼가려 했다. 이 책이 그동안 쓴 글들을 모은 비평집 형태를 취하고 있는 만큼 각각의 글에 어떤 식으로건 기입되어 있는 시간의 흔적을 보존하는 일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평이란 것이 시간의 흔적은 보존하되 나의 흔적은 거의 없는 글이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은 아무려나 호오와 취향에 내맡겨진 아름다운 수필보다는 고대의 언어로 씌어진 수학책이 되기를 꿈꾼다. 

2018년 6월
유운성


2018-01-11

사프디 형제
Safdie Brothers


※ 아래 글은 2017년 3월 1일 발간된 영상비평 전문지 『오큘로』 제4호에 '아메리칸 언더커런츠' 특집 글 가운데 하나로 실렸던 것이다.




촬영 현장의 조쉬 사프디(좌)와 베니 사프디(우)



누구라도 일단 사프디 형제의 영화를 보고나면, 선동적으로 들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우리 시대의 존 카사베츠!’라고 경박하게 외치고 싶은 충동이 들 것이다. 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망원렌즈에 포착된 연약하고 불안정한 몸짓들, 금방이라도 기화되어 사라져버릴 듯한 형상들, 이들 속에서 카사베츠의 ‘그림자들’이나 ‘얼굴들’의 잔영을 느끼지 못한다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다. 하지만 이런 첫인상은 피상적일 뿐이라는 것을 이내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를테면 사프디 형제를 동시대 미국 독립영화의 가장 중요한 이름으로 기억하게 만든 <아무도 모른다>의 스크린 위를 배회하는 것은 니콜라스 레이의 청춘들(<이유 없는 반항>)과 제리 샤츠버그의 헤로인 중독자들(<백색공포>) 사이 어디쯤에 있는 불안한 영혼들이다. (<아무도 모른다> 촬영 전 형제와 만난 샤츠버그는 “영화에 진짜 마약쟁이를 출연시켜선 안 된다.”고 충고해 주었다고 한다.) 한편 사프디 형제는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뉴욕 인디영화의 이름은 아벨 페라라라고 말한다. (페라라는 <키다리 아빠>에서 노상강도 역으로 카메오 출연하기도 했다.)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무척이나 섬세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실제의 현실과 관계 맺는 픽션의 양식을 가공하는 데 있어서는, 미국영화라는 영토를 벗어나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부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나 페드로 코스타 등의 미학과 공명한다고 여겨지는 부분도 적지 않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이곳과 저곳의 영화적 유산들을 하나의 평면에서(만) 사유할 수 있는 유리한 (동시에 불리한) 위치에 있음을 명확히 자각하며 작업하는 세대(미겔 고메스, 라야 마틴, 도미타 가츠야, 마티아스 피녜이로 등)에 속하는 이들 형제는, 노골적으로 미학적 전위에 서려 하기보다는 영화적 유산에 기대어 (뉴욕을 무대로 한) 거리영화라 부를 수 있을 법한 소(小)장르에 새로이 활력을 불어넣는 데 집중하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이 작은 야심의 결과는 무척이나 크다. 영화적으로는 진부해질 대로 진부해져버린 뉴욕이라는 도시가 이들의 영화에서는 진정 영화적인 도시, 아니 영화로서의 도시로 갱생하는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때 이들의 영화는 영향과 흔적이 아니라 전적인 공명을 통해 영화적 유산과 관계하며, 그럼으로써 그것을 팽창시킨다.  



<키다리 아빠 Daddy Longlegs>(2009)


사프디 형제의 부모는 베니가 불과 생후 6개월이 되었을 때 이혼했는데, 이혼한 부모 밑에서 겪은 어린 시절의 경험은 이후 자전적 드라마인 <키다리 아빠>(2009)의 토대가 된다. 영화를 좋아하고 사진기와 비디오카메라로 일상을 기록하는 데 열광적이었던 아버지 ― 그는 300시간 분량의 영상기록을 남겼고 일부는 <키다리 아빠> 개봉 당시 공개되기도 했다. ― 덕택에 형제는 일찌감치 영화에 빠져들었고 고등학교 때 친구 알렉스 캘먼과 함께 ‘레드버킷(Red Bucket)’이라는 이름의 영화제작집단을 결성했다. 보스턴대학 시절 만난 샘 리센코, 브렛 주트키위츠, 재커리 트레이츠 등이 레드버킷에 합류했고, 2012년까지 영화뿐만 아니라 웹 프로젝트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영상물을 제작했다. (제작집단 레드버킷의 영상물은 비메오 사이트(vimeo.com/user7918188)에서 볼 수 있다.)



<도둑맞는 일의 즐거움 The Pleasure of Being Robbed>(2008)


이들의 장편 데뷔는 좀 기묘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2007년 여름, 케이트스페이드 핸드백의 홍보용 단편영화 제작을 의뢰받은 조쉬는 우여곡절 끝에 (케이트스페이드의 공동창업자인) 앤디 스페이드의 아이디어(도벽이 있는 여주인공에 관한 이야기)를 장편으로 확장시키는 기획에 착수한다. <도둑맞는 일의 즐거움>은 스페이드의 지원 하에 조쉬의 연출로 완성되었고, 베니의 단편 <외로운 존의 친구들>과 함께 2008년 칸영화제 감독주간 폐막작으로 상영되었다. 감정과 충동의 형상으로서의 인물들, 그러한 인물들이 생성하는 불규칙적 운동에 조응하는 삽화적 구성, 인물들을 둘러싼 공간에 비추어 그들을 포착하는 카메라, 배우들이 상대적으로 카메라를 덜 의식하며 연기하게끔 하기 위한 망원렌즈의 사용 등 사프디 형제의 영화적 특성은 이미 여기서부터 뚜렷했지만, 이를 보다 밀고 나간 것은 이듬해에 발표한 <키다리 아빠>라고 해야 할 것이다. (2009년 칸영화제 상영 당시 제목은 ‘Go Get Some Rosemary’였지만 나중에 ‘Daddy Longlegs’라는 지금의 제목으로 바뀌었다. 프랑스에서는 ‘Lenny and the Kids’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프라운랜드>(2007)의 감독인 로널드 브론스타인이 2주간 아이들을 맡아 돌보면서 생활이 점점 엉망이 되어가는 이혼남 레니 역을 맡고 각본 및 편집에도 참여한 이 영화에서, 사프디 형제의 유년의 경험과 브론스타인의 실제 삶은 영화적 소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영화라는 상상적 몸의 연장처럼 되어버린다. 



<아무도 모른다 Heaven Knows What>(2014)


뉴욕 거리를 배회하는 마약중독자들의 삶 속으로 파고든 <아무도 모른다>는 사프디 형제가 지하철 승강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리엘 홈즈라는 여성의 실제 경험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그 자신 마약중독자였던 홈즈가 형제의 권유로 쓴 자전적 기록물인 『뉴욕의 미친 사랑』을 토대로 (제리 샤츠버그의 충고를 무시하고) 홈즈 자신과 실제 마약중독자들을 출연시켜 만들었다. “이야기라기보다는 난투극이며, 소리치거나, 무언가를 궁리하거나, 사랑이나 약이나 무망한 이해를 애타게 찾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장면들의 모음”(숀 로저스)으로 여겨질 만큼, 여기서 마약중독자들은 사회적, 윤리적 문제로서가 아니라 감정과 충동의 형식으로서의 영화에 더할 나위 없이 조응하는 형상으로 비치고 있다. 이 영화는 2014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첫 공개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아리엘 홈즈는 이후 안드레아 아놀드의 <아메리칸 허니>(2016)에 출연하는 등 배우로서의 경력을 이어가고 있다.         

2014년 사프디 형제는 세바스천 베어-맥클라드, 오스카 보이슨과 함께 독립영화스튜디오인 엘라라픽처스(Elara Pictures)를 설립했고, 2017년 현재 로버트 패틴슨 주연의 신작 <굿 타임>을 제작 중이다. (엘라라픽처스 홈페이지(www.elarapictures.com)에서는 선댄스영화제 단편부문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사프디 형제의 <검은 풍선>(2012) 등의 단편을 볼 수 있다.)    




2018-01-02


밝은 미래, 그래서, 키스합니다
アカルイミライ, だから, キスします


※ 아래 글은 2017년 8월 18일부터 9월 18일까지 일본 쿄토의 ARTZONE에서 열린 파트타임스위트의 전시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 私を待って、墜落する飛行船の中で。」 관련 도록에 수록 예정(일본어/영어)인 글이다. 이 글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VR 영상작품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는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 2016'의 커미션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해당 전시에서 첫 공개되었다.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2016)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 2016 설치 전경


파트타임스위트의 VR 영상작품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2016)의 한 이름 모를 화자는 그녀가 ‘너’라고 부르는 누군가에게 흡사 주문을 걸듯 계속해서 속삭인다. 그런데 대체 이 ‘너’란 과연 누구인가? HMD 장비를 착용하고 이 영상작품을 보고 있을 불특정의 관람객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 관람객을 위해 마련된 360도 가상공간 좌표계의 중심에 자리한 점, 물리적이라기보다는 수학적이고 추상적인 점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이 ‘너’가 하나의 추상적인 점이라는 것은 “너는 손톱깎이만큼 작아져서 오직 시선만 남았어”라는 화자의 말에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 파트타임스위트가 ‘시선만 남은’ 존재를 묘사하기 위해 굳이 손톱깎이라고 하는 (수학적이고 추상적인 점에 비하면 턱없이 크다고 할 수 있는) 사물을 비유로 끌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왜 깨알이나 모래가 아닌 손톱깎이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잠시 미뤄 두기로 하자. 손톱깎이를 비유로 끌어온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360도 가상공간을 이미지의 새로운 영토로 자리매김하려 하고 있는 동시대 시각기술의 욕망에 대한 파트타임스위트의 방법적 회의가 시작되는 곳은, 점과 손톱깎이 간의 스케일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코 좁혀질 리 없는 이 간극이라는 사실에 일단 주목해 보기로 하자.

그것이 적용되는 대상이 게임이건, 뮤직비디오이건, 포르노그래피이건, 영화이건 간에 대체로 오늘날 VR 기술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어떤 가상세계를 이음매 없는 형태로 체험하게 하는 일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파트타임스위트는 이런 식의 이음매 없는 가상세계의 체험 따위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우리에게 친숙한 직교 좌표계를 VR 기술이 상정하고 있는 (중심에 하나의 수학적이고 추상적인 점을 둔) 구형(球形) 좌표계로 변환하는 일이 궁극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나아가 “완벽하게 동그란 전방위 비전” 자체로서의 비행선(가상)이 ‘추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탐색한다. 물론 이 탐색은 수학적이 아닌 기술적인 방식으로, 추상적이 아닌 세속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화자는 “네가 제명될 때 이 세계는 꿰매져” 궁극적으로 “완벽하게 동그란 전방위 비전”에 도달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는 추상적인 점으로 향하는 ‘너’가 여전히 카메라 받침대나 드론 같은 것에 물리적으로 붙들려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러저런 시각적 흔적들을 보게 된다. 게다가 이 작품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구형의 세계는 이리저리 기워 붙인 자국, 표면 곳곳에 구멍을 내며 발화하는 불꽃, 일그러진 화상 등으로 인해 빈번히 손상되곤 한다. 하지만 만일 여기서 그쳤더라면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는 가상세계의 기술적 조건을 전면에 드러내며 이에 비판적으로 문제제기하는 VR 영상미학 모색기의 흥미로운 모더니즘적 실험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이 작품에 내재한 진정한 통찰은 사실 다른 곳에 있다.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2016)


VR 기술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최근의 영상작가들은 이 기술이 가능케 한다고 가정된 몰입의 체험을 극대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이 보다 사회참여적인 관심과 맞닿을 때, 그 결과로서의 작품은 관람객을 시공간적으로 직접 다가가기 힘들지만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건의 현장(을 가상적으로 구성한 곳)으로 인도하곤 한다. VR 기술의 힘을 빌려 다큐멘터리적 액추얼리티를 강화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파트타임스위트는 가상세계의 시선의 중심(수학적이고 추상적인 점)이란 원리상 세계-내-존재의 자리를 폐지하지 않고는 구현될 수 없는 것이란 사실에 주목한다. 달리 말하자면, VR 기술이란 주체의 자리를 비우고 얻어낸 순수한 시선(점)의 좌표에 주체를 초대한다는 모순적인 이념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체의 자리는 어떻게 비워지는가? 화자의 말마따나 “세계가 구조적 결함을 영리하게 이용하면 너는 지워진다.” 이때 주체의 자리를 비워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음매들을 지우고 순수한 시선(점)에 달라붙어 있는 물리적 흔적들을 지우는 일이다. VR 카메라로 포착된 현실의 ‘장소’는 어떤 식으로건 이 지움의 과정을 통과하고 난 이후에라야 다큐멘터리적 액추얼리티를 지닌 가상의 ‘공간’이 될 수 있다. 이 공간이 사실적으로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그것은 비사실적인 것이다. VR 기술이 제공하는 가상세계가 종종 사실감(reality)보다는 육감(corporeality)에 호소해 액추얼리티에 다가가려 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그 세계의 바탕에 이와 같은 역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VR 기술의 이념과 장소에 대한 다큐멘터리적 접근은 상충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가상의 공간은 현실의 장소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일까?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에는 파트타임스위트 스스로 “미래라 불리는 것의 제물로 바쳐진” 것이라 부르는 주변화된 장소들, 즉 공사장이나 고시원 등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장소들은 관람객의 강렬한 체험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단지 지워지기 위해서 등장한다. 말하자면 현실세계에서 이미 제물로 바쳐졌던 이 장소들은 가상세계에서 다시 한 번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소환된 것이다. 이 작품이 일종의 제의를 꼼꼼히 수행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는 곳곳에 산포되어 있다. 가령 앞서 내가 주문처럼 들린다고 기술했던 화자의 말은 사실 시선만 남은 존재로서의 점을 불러내기 위한 제의의 축문(祝文)이기도 하다. 전신을 덮는 파란 옷을 입은 두 명의 여자(파트타임스위트의 박재영과 이미연)는 역시 파란 옷을 입은 허수아비처럼 보이는 우상을 돌본다. 이 우상은 “미래라 불리는 것의 제물로 바쳐진” 주변적인 장소들 곳곳에 출몰한다. 파란 커튼이 둘러쳐진 방 안에 놓인 하얀 장미꽃 다발이 파란색으로 물드는 광경, 그리고 지하 벙커를 포착한 화면 곳곳에 불이 붙으면서 그 뒤로 파란색 벽이 비치는 광경이 작품 도입부에 배치되어 있었음을 떠올려 보면, 이내 우리는 그것 또한 저 유령적인 점을 부르는 분향 의식의 일부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파란색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상제작 과정에서 화면 위에 거짓 장소를 덧입히는 크로마키 기법에서 가장 널리 활용되는 색 가운데 하나가 바로 파란색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제의를 거쳐 나름의 육체를 얻고 한바탕 춤을 춘 파란 우상은 마침내 온전히 점으로 화하기 위해 드론에 실려 하늘로 솟아오른다. 아직은 점이 아니라 손톱깎이의 처지에 있을 뿐인 이 시선이 공중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 이름 없는 화자가 축문을 부지런히 낭독하는 가운데, 돌연 화면 아래쪽에서 수많은 파란 꽃잎들이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이것은 도입부에 보았던 파랗게 물든 장미꽃 다발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일까? 혹은 가까스로 손톱깎이만 해진 시선이 자신에게 걸맞은 유일한 장소를 만들기 위해 마지막 남은 제 몸을 잘라내어 퍼뜨린 조각들일까? 물론 그에게 걸맞은 유일한 장소란 어떤 장소이건 잘라 붙일 수 있을 만큼 “말랑말랑”하고 “미끌미끌”한 균질적 공간, 즉 360도 크로마키의 공간(이 작품의 끝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이다.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는 VR 기술에 걸맞은 장소의 재현 방식을 모색하기보다는 그 기술이 가정하는 주체의 상과 부합하는 장소란 ‘순수한 공간’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따져 묻는 작품이다. 따라서 파트타임스위트가 수행하는 제의를 풍자나 냉소의 제스처라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여기엔 어떤 음란함의 기미마저 엿보인다고 하는 편이 옳다. 기술이 은폐하는 주체를 가시화하기 위해 기꺼이 기술의 아바타가 되기를 떠맡은 그들은 집요하고 성실하게 기술의 역량을 빌려 기술을 발가벗긴다.      




‘세계-내-존재’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주체 없는 장소나 장소 없는 주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주체는 장소의 몸이고 장소는 주체의 시선이다. 그런데 가상세계는 주체 없는 시선과 장소 없는 몸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을 파트타임스위트는 수행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VR 기술에 걸맞은 장소의 재현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물음은 잘못 제기된 물음이다. 가상세계에 걸맞은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알고리즘적 주체’라 할 만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주체는 장소에 가닿을 수 없다.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의 후반부에서, 화자가 읊조리고 있는 말을 유심히 들어보면 이 주체의 특성을 분명히 알게 된다. “너는 2천만 마리의 양들이 한 마리씩 울타리를 뛰어넘는 장면을 상상한다. 너는 셰익스피어 전집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한다. 너는……”

알고리즘은 파트타임스위트가 <소프트 다이나믹스>(2017)에서 일본의 자동인형 카라쿠리(からくり)와 오늘날의 로봇공학을 상사(analogy)가 아닌 상동(homology) 관계로 놓을 때 보다 핵심적인 개념으로 떠오른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우리는 하나의 모자를 차례로 건네받아 머리에 쓰고 벗고 다시 건네주기를 반복하는 일군의 소녀들의 모습과 함께 “어떤 알고리즘, 어떤 패턴, 어떤 매개변수, 어떤 인터페이스의 상정은 어떤 사회를 의미한다”는 텍스트를 보게 된다. 이런 사회를 이루는 주체들은 키넥트(kinect) 센서의 작동에 최적화된 상태로 적응된 몸과 행동양식을 지닌 주체로서 파악된다. 카라쿠리나 로봇과 같은 장치에 몸과 행동양식의 모델을 제공했던 인간은 이제 거꾸로 장치들을 모델로 해서 스스로의 몸과 행동양식을 조절하기에 이른 것이다. 르네 지라르는 현대적 인간의 모습을 욕망의 삼각형 속에서 파악할 수 있었지만, 이처럼 장치와 주체 간에 이루어지는 끝없는 피드백의 직선만이 남게 된다면 어쩌겠는가? 파트타임스위트는 묻는다. 이런 상황에서 “명령 ID는 누구의 것인가?”라고.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가 상정하고 있는 점, <소프트 다이나믹스>가 상정하고 있는 알고리즘, 추상화되고 형식화된 사회 관계망의 ‘밝은 미래’는 주체 스스로가 그러한 점과 알고리즘이 되기를 기꺼이 수용할 때, 오직 그때에만 도래하는 것이다. 



<소프트 다이나믹스>(2017)


‘그래서’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나 ‘하지만’ 같은 거부와 부인으로 오늘날의 기술로부터 탈주하려 시도하는 일은 무의미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어떤 식으로도 우리를 행동의 지침으로 이끌지 못한다. 그러한 분석과 비판이 ‘그래서’라는 접속어와 더불어 우리를 이끄는 곳은 행동중지의 황무지이다. 이제 관건이 되는 일은 ‘그래서’의 앞이 아니라 뒤에 오는 결단의 행동을 통해 상황 전체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암시를 제공해 주는 것이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와 <소프트 다이나믹스> 사이에 제작된 <TOLOVERUIN>(2017)이다. 이 작품의 끝에서, 우리는 “그래서 키스합니다”라고 말하는 한 여성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키스라는 사랑의 몸짓은 ‘그래서’라는 말 앞에 놓인 상황 자체를 무안하게 만드는 역량을 지니고 있다. 이 몸짓은 어떤 이유가 있어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수행되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창출하면서 수행된다. 즉, 여기서는 행위와 결단이 한 몸이 되어 있다. 파트타임스위트는 말한다. “말과 말이 부딪히는 자리, 혀와 혀가 섞이는 자리, 의심과 의문, 불안이 있는 그 자리에서 모든 관계는 다시 시작될 수 있다”고. 그러니, 예술이 키스와 같은 것이 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