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8

어떻게 밖으로 나갈 것인가
: 홍상수의 <풀잎들>과 한국영화라는 문제


※ 아래 글은 계간 《현대비평》 제3호(2020년 여름호 / 2020.6.30 발행)에 수록되었던 글이다.


홍상수의 22번째 장편영화 <풀잎들>을 통해 (한국영화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영화라는 문제에 대해 논한다고 하면 의아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그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처럼 한국영화의 감수성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작품도 아니고, 결코 합치될 수 없는 복수의 계열로 구성된 플롯이 전면화된 <옥희의 영화>나 배우이자 연인인 김민희와 처음으로 작업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처럼 그의 경력에서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꼽을 만한 작품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기적이라 할 어떤 특성도 없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풀잎들>은 한국영화를 가능케 하는 익숙한 조건들 자체를 돌연 낯선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홍상수 영화의 역학을 맑고 선명하게 드러내는 영화가 될 수 있었다.

최근에 국내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이창동의 <버닝>이나 봉준호의 <기생충>을 떠올려보자. 하나는 불을 예고하는 건조한 겨울의 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물로 넘쳐나는 습한 여름의 영화이다. 겨울과 여름이라는 계절은 홍상수에게도 낯선 계절이 아니며, 심지어 그의 작품 경력 전체를 이들 계절에 따라 두 개의 계열로 나누어 고려하는 것도 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홍상수에게 낯선 것은 이창동과 봉준호가 무람없이 끌어들이고 있는 방화와 장마라고 하는 불과 물의 과잉이지 겨울과 여름이라는 계절 자체가 아니다. 이유인즉, 이러한 과잉은 필시 과도하게 의미화된 무(無)로서의 상징을 불러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사물들에 반사되어 비치는 먼 곳의 불(햇빛)을, 겨울에는 지상의 사물들을 슬며시 가리거나 허공에 흩날리는 얼어붙은 물(눈)을 카메라에 담는 것으로 충분하다. 거기에 소박하고 희박한 또 다른 불(담배)과 물(술)을 곁들이면 된다.

홍상수의 흑백영화들―<오! 수정>, <북촌방향>, <그 후>, <강변호텔>―이 하나같이 겨울 영화들이었음을 떠올려보면, 2017년 9월에 촬영된 가을 영화인 <풀잎들>의 흑백 화면은 이례적인 감이 없지 않다. 이유영과 김명수가 등장하는 장면이 추가 촬영된 것을 제외하면, 출연진의 수보다 훨씬 적은 다섯 명의 스태프와 함께 단 3일 만에 찍었다고 하는 사실 또한 최근 홍상수의 빠른 작업 속도를 고려한다 해도 놀랍게 다가온다. 물론 영화의 무대가 되는 장소가 몇몇 골목길을 제외하면 단 세 곳의 실내 공간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 작업 기간을 줄이는 데 도움은 되었을 것이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2번 출구 사이의 북쪽 구역에 자리한 카페 이드라, 삼선차, 그리고 안암골이라는 카페와 식당 들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장 주요한 장소는 카페 이드라이다. 극 중에서 김민희의 동생 역을 맡은 신석호가 “어떻게 이렇게 골목 안에 있는 커피집을 알았어?”라고 의아해하며 “아무도 안 올 것 같은데”라고 말하듯, 실제로 이곳은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윤보선길을 따라 북쪽으로 걷다가 오른쪽에 난 작은 길로 일부러 눈길을 돌리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카페다.[1] 카페의 방문객들과 함께 마실 술을 사기 위해 김새벽이 들렀다고 말하는 가게 또한 실제로 카페로 들어오는 골목 바로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가 하면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서 정진영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가 누군가를 만나러 다녀온다고 말하는 “요 근처”는 실제로 카페 이드라 근처에 있는 삼선차라는 곳이다.

이렇게 구구절절 카페 이드라의 위치와 주변에 대해 기술한 것은, <풀잎들>을 비롯한 홍상수의 영화가 구체적인 어느 장소로부터 출발하는 것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홍상수는 종종 자신의 영화가 장소와 배우로부터 출발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것은 그다지 별난 것은 없는 장소이되 여하간 다른 곳(어느 카페)이 아닌 바로 이곳(카페 이드라)이고, 이곳이 아닌 그곳이나 저곳이 선택되는 경우에는 전적으로 다른 영화가 생성될 수도 있는 그런 곳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자체로, 혹은 무언가 다른 것과 관련해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 장소이다. 이렇게 보면 북한으로부터의 대남 방송이 들려오는 파주의 황량한 외곽(<버닝>)이나 성북동과 후암동과 북아현동 등의 풍경을 조합해 ‘한국적’ 공간의 특성을 허구적으로 강화한 기묘한 경로(<기생충>)는 홍상수의 영화가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무겁거나 거대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홍상수의 장소를 그 안이나 위에서 영화적 유희가 펼쳐지는 의미의 진공이나 무의미의 표면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여도 곤란하다. 그의 장소는 선재적이거나 맥락적인 의미가 없을 뿐이지 언제나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 자체가 생성되는 코라(chora)로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홍상수의 영화는 당대 한국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풍경에 대한 직접적이거나 상징적인 발언이 결코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의 장소성 자체에 대한 날카로운 심문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심문’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홍상수가 한국영화라는 문제에,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들 가운데 하나로서의 영화적 장소를 성립시키는 문제에 실제로 관심을 두고 있는 작가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그런 문제는 아예 그의 안중에 없을 것이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장-뤽 고다르에 관한 극히 도발적인 작가론 「파국적 슬로모션」에서 정작 고다르 자신은 고다르적인 문제(혹은 ‘고다르 현상’)를 문제로서 지니고 있지 않으며 그것을 하나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그의 영화를 대하는 우리들이라는 주장을 펼친 적이 있다. 이는 고다르의 영화를 당대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풍경과 관련지어 해석해버리는 상투적 독해들에 대한 우회적 항의가 담긴 의미심장한 주장이지만, 고다르를 이러한 풍경으로부터 그처럼 초월해 있는 인물로(만) 간주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외견상 그와 전연 성격을 달리하는 작가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홍상수야말로 하스미가 그리고 있는 문제적 작가의 유형에 훨씬 가까워 보인다.


그림1

그림2

그림3


홍상수의 영화는, 그리고 무엇보다 <풀잎들>은, 여러 한국영화에서 별다른 반성 없이 수행되는 장소의 미장센과 몽타주―장소 내부에서, 그리고 장소와 장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의 자명성을 미심쩍은 것으로 보이게 한다. 군데군데 전통적인 가옥 형태가 남아 있는 북촌 인근에 자리한, 딱히 지역색을 특정하기 힘든 이드라라는 카페는 미장센을 고려하고 다른 장소와 몽타주 되기에 앞서 우선 그곳 자체의 특성을 가늠해보아야 하는 일종의 모나드처럼 제시된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결코 서로를 이름으로는 부르지 않고 대명사로만 부르는 익명의 남녀들이 제각각 짝을 이루어 카페 안팎에서 대화를 나눈다.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승희라는 죽은 여자의 이름 뿐이다.[2] 기이하게도 남자들의 직업은 모두 배우이다. 각각의 짝들이 각각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김민희는 이들의 대화를 카페 한구석에서 엿듣거나 엿보며 노트북에 무언가를 쓴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는 이들에 대한 상상이 덧붙여진 논평이 이따금 김민희의 보이스오버로 들려온다. 이때 카메라는 카페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남녀들은 벽면을 배경으로(그림 1과 그림 2), 카페 밖 테이블에서 대화를 나누는 남녀는 반사로 인해 내부가 보이지 않는 창을 배경으로(그림 3) 포착하고 있어, 분명 다들 지척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짝은 서로 어떤 상호작용도 없이 나름의 구역만을 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카페의 안과 밖을 조망할 수 있는 구석 자리에 앉아, 이들을 바라보거나 다른 구역의 인물과 잠깐이나마 말을 섞게 되기도 하고, 커트 없는 재프레임화(reframing)을 통해 이들과 가까이에 있음이 시각적으로 분명히 제시되는 이는 김민희 뿐이다(그림 4). 이로 인해 그녀는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어떤 쇼트나 장면의 바깥, 즉 외화면영역의 존재론으로 우리를 이끄는 매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 시퀀스를 이루는 이상의 쇼트들만으로는 좀처럼 카페 이드라라는 공간이 전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인물들의 말과 시선을 통해 지시되기만 할 뿐 한 번도 보이지 않는 카페의 주방 공간과 주인의 모습―반면, 카페 이드라와 대칭을 이루는 안암골 시퀀스에서는 식당의 주방 공간과 주인의 모습이 분명하게 제시된다―은 강력하게 결여 내지는 결핍의 느낌을 전달한다.


그림 4


영화적 장소는 외화면영역에 대한 믿음 없이는 결코 구축될 수 없다. 단순한 예를 들자면, 어떤 인물의 얼굴이 담긴 쇼트 다음에 이어지는 풍경 쇼트가 그 ‘인물이 바라보는 풍경’으로 의미화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쇼트가 시간적으로 동시적이며 공간적으로 연장적이라는 허구적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물론 역사적으로 이러한 의미화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기법 내지는 문법의 문제로 치환되어 버린 것이 사실이다. 새삼스럽게도 <풀잎들>은 이처럼 문법으로 치환된 믿음이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다. 이러한 근본문제가 풀리지 않는 이상 영화적 장소라는 것은 실제로는 펜로즈의 계단(Penrose Stairs)일 뿐이지만 짐짓 상승과 하강의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순환적인 정신적 구조물이 될 수밖에 없다. 정진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카페 이드라를 잠시 벗어나 근처(삼선차)에 누군가를 만나러 갔던 김새벽이, 약속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 지인을 기다리다 찻집의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을 거듭해서 오르내리는 모습(그림 5)을 보자. 이는 계단이 하나의 영화적 무대가 될 수 있을지를 가늠해보기 위해 일단 거기에 덧씌워진 온갖 상징을 남김없이 소거해 버리고자 하는 강박적 몸짓처럼 비치기도 한다. 홍상수는 담배와 술, 그리고 이것들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소소한 대화를 통해 불과 물과 공기(분위기)를 영화적 원소로 변용하는 데 있어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어려움을 겪는 것은 우리이며 이는 특히 장소와 관련해서 그러하다. 그가 언제나 구체적 장소들로부터 출발하는 영화들을 찍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장소들을 이루는 원소가 여느 한국영화의 장소들을 지탱하는 대지를 이룰 수 있느냐 하는 물음 앞에서 우리는 망설이게 된다. 게다가 <밤과 낮>, <밤의 해변에서 혼자>, 그리고 <클레어의 카메라> 같은 영화에서 그의 (캐릭터라기보다는) 배우들이 이국의 장소들을 배회하는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물감 없이 비칠 때 이 망설임은 의혹으로까지 향하게 된다.


그림5

홍상수의 영화를 통해 미심쩍은 무엇으로 비치게 되는 건 한국영화의 장소들만이 아니다. 영화적 이미지에 상상적으로 기입된 주어/주체의 자리 또한 그러하다. 주인공을 모든 영화적 이미지의 주체로 호명하는 한편 영화적 ‘자기(ego)’라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는 오늘날의 무수한 한국영화들을 떠올려 보라. 주어라는 문법적 요소를 지닌 언어와는 달리 본질적으로 비인칭적/무인칭적이라 할 수 있는 영화적 기호는 특정한 앵글, 지속시간, 카메라의 움직임 및 쇼트의 병치를 통해 화면상의 인물을 주체로 (여겨지게끔) 자리매김하곤 한다. 이 인물은 무엇보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프레임의 바깥을 보고 또 바깥으로 이동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이러한 보기와 움직임을 실제로 수행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수행할 가능성과 능력이 있는 존재여야 한다. 이상의 내용을 고려해보면, 영화와는 달리 사진은 그 기호에 주어/주체의 인상을 부여할 수 없는 매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점에서만큼은 사진이 영화보다 덜 기만적이라 해도 좋겠다. 홍상수의 영화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문제는, 달리 말하자면, 오늘날의 한국영화에서 과도하게 주체화된 영화적 이미지가 사진적 이미지의 엄정한 비인칭성/무인칭성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적지 않은 그의 영화에서 사진이나 사진 찍기의 몸짓이 예기치 못한 순간에 돌출하곤 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풀잎들>은 글쓰기의 내면성을 통해 강화되는 언어적 주체와 같은 존재가 영화적 기호에 스며드는 것에 집요하게 저항한다. 보이스오버로 들려오는 김민희의 글은 그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의 외면적인 말과 행위 위에서 미끄러진다. 홍상수의 영화를 두고 비난하는 이들이 상투적으로 내뱉곤 하는 “매번 자기 얘기만 한다”는 말은 피상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의 영화에서 자전적인 요소들은 특정한 장소에 있는 특정한 배우들을 허구와 사실이 교차하는 가운데 진동시켜 몸짓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일 뿐 어떠한 영화적 주어/주체의 생성에도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홍상수의 영화는 우디 앨런의 영화와는 다르며 심지어 이들 간에는 일말의 닮은 구석도 없다.


그림6

<풀잎들>의 결말부에서, 우리는 식당 안암골 시퀀스에 등장했던 이유영과 김명수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을 한꺼번에 보게 된다. (이유영과 김명수의 대화 장면은 추가로 촬영된 것임을 고려하면, <풀잎들>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든 등장인물을 한 장소에 모으는 것이 원래의 의도였으리라 추정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어느덧 밤이 되었다. 그동안 몇몇은 머리를 식히거나 누군가를 만나거나 식사를 하러 잠시 다른 곳에, 그러니까 바깥에 다녀오기도 했다. 물론 <풀잎들>에서 카페 이드라의 바깥 가운데 가장 기묘하게 느껴지는 공간은 카페 입구 왼쪽으로 이어져 있는 골목일 것이다. 실제로는 막다른 골목인 이곳으로, 낮에는 안재홍이, 밤에는 김새벽과 정진영이 향한다(그림 6). 낮에는 서로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각자 다른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서영화와 기주봉, 김새벽과 정진영은 밤이 되자 합석해 카페 앞 가게에서 사 온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낮에는 카페의 다른 구역에 전혀 시선을 돌리지 않던 공민정과 안재홍이 이 광경을 보고 있다(그림 7). 김민희는 소주를 마시는 무리로부터 합석을 권유받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가 안재홍과 잠깐 대화를 나누게 되기도 한다.


그림7
 

이렇게 해서 구역들의 경계는 무너지고, 바깥과 관련해 조금씩 다른 기억과 경험을 지닌 이들이 미미하게 상호작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끝내 카페 이드라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여전히 거기 모여서 말이다. 미장센과 몽타주를 통한 장소의 구축 가능성은 다시 유예된다. 그렇다면 주체는 어떠한가? 잠시 담배를 피우러 나온 김민희, 안재홍, 그리고 정진영은 시차를 두고 차례로 같은 자리에 서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프레임의 오른쪽 바깥을 바라본다. 거기서는 낮에 어느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던 자리에서 안선영과 신석호가 한복을 입고 자리를 바꿔 가며 서로의 사진을 찍어 주고 있다. 연인들을 바라보는 자리의 주체는 계속해서 바뀌고, 그들이 보고 있는 연인들 또한 번갈아 자리를 바꾸어 카메라를 든다. <풀잎들>은 실제로 존재하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처럼 비치기까지 하는 카페 이드라라는 장소의 내부와 그 왼쪽의 골목을 포착한 세 장의 사진(그림 8)과 함께 끝난다. 이미지에 결코 주어/주체의 자리를 용납하지 않는 사진에 고스란히 자신의 장소를 의탁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은 이곳으로 들어오는 골목과 다른 곳으로 향하는 골목이다.


그림8

[1] 카페 이드라 인근의 풍경과 내부의 모습은 유튜브 영상(www.youtube.com/watch?v=qdiizBkgyZo)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이 영상은 2014년에 촬영된 것인데 유심히 보면 <풀잎들>에서 김민희가 앉아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던 자리에 영화평론가 허문영 선생이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이 카페를 찾은 것은 2018년 가을에 <풀잎들>이 개봉한 이후였는데 당시에도 허문영 선생이 같은 자리에 앉아 글을 쓰고 계셨다. 그 이후로 나는 이 영화의 보이지 않는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분이라는 생각을 떨쳐내기 힘들다.

[2] 카페 이드라는 죽은 자만이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장소처럼 보인다. <풀잎들>에서 이곳과 완벽히 대칭을 이루는 장소는 김민희가 동생과 동생의 애인과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식당인 안암골이다. 여기서 그녀는 그들을 ‘진호’와 ‘연주’라고 하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들이 식사하는 동안 옆에서는 이유영과 김명수가 낮술을 기울이고 있는데, 그들 또한 서로를 ‘순영’과 ‘재명’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들은 자살한 지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이 죽은 자는 ‘김교수’라고 불릴 뿐이어서 이름은 알 수 없다. 한편, 각각 호명의 금지와 허용으로 구분되는 장소의 모나드들인 카페 이드라와 안암골을 오가며 매개하는 인물인 김민희의 이름은 여기서도 불리지 않는다. 


2020-09-10

이름 없는 곳


편지란 무엇입니까? 

한때 편지는 띄워 보내는 것이었고 때로 던지는 것이기도(投書) 했지만, 이제는 대부분 누르는―'SEND'라고 쓰여진 버튼이라 불리는 아이콘을―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누르는 편지에는 당장 답신하지 않으면 휴대폰 화면 위에 금새 "메일 보냈는데 읽으셨어요? 살펴보시고 가능한 빠른 회신 부탁드립니다"라는 SMS가 뜨는 것이다. 이런 메시지를 받고 나면 SMS란 'Save My Soul'의 약자라는 고다르의 농담이 생각난다. 하지만 결국, 이내 나도 누른다.

지난여름, 문득 편지 같은 것을 띄워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보내고 나면 한참의 시간이 걸린 후에야 수신인에게 도착하는 그런 편지를. 작년 말 런던에 방문했을 때 공항을 오고가다 알게 된  OOO―이 분이 누구인지는 글에 쓰여 있다―에게. 《보스토크》에 정기적으로 쓰는 칼럼 지면을 이 편지를 띄우는 용도로 잠시 빌려 써서. 

코로나19로 사람과 사물이 국경을 넘어 오가는 것이 예전 같지 않으므로 이 편지가 언젠가 OOO에게 우연히 닿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보스토크》가 발간되고 일주일이 채 안되어 OOO에게서 연락이 왔다. (몇 년째 글을 쓰면서도 나는 《보스토크》라는 잡지가 이 정도로 읽히는 줄 몰랐던―김현호 발행인과 박지수 편집장님 및 편집동인 분들께 참으로 민망합니다―것이다.) 알고 보니 OOO는 코로나19 확산으로 고민하다 오랜 영국생활과 그곳에서의 사업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와 있었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식사를 하고, 각자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이제는 친구가 되었다.

(※ 아래 글은 사진잡지 《보스토크》 제22호(2020년 7/8월호)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이곳─그렇다, 이 잡지는 하나의 장소이다─에 글을 쓰면서 잡지가 나올 무렵 갓 개봉해 시중의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를 다룬 적은 없다. 그렇게 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구태여 하나하나 밝힐 필요까지야 없겠다. 아무래도 영화 전문지가 아닌 사진 전문지에 2개월에 한 번씩 실리는 글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시의성을 살려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에 집착하기보다는 이 칼럼을 읽고 나서 DVD나 블루레이,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나 IPTV 등을 이용해 찾아볼 수 있는 과거와 현재의 영화들 가운데 글감을 고르곤 했다. 말하자면 이 장소는 영화계에서 진행 중인 최신의 흐름과 경향을 부지런히 따라잡아야 한다는 의무로부터 나를 간단히 면제시켜 주는 곳─문자 그대로 ‘duty-free’─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오래 이어질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고 한동안 극장에서도 이렇다 할 신작 영화가 개봉되지 않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글감을 찾아 쓰는 일을 망설이게 되었다. 요즈음 영화 관람은 어차피 대부분 집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이를 위한 추천작 가이드도 여기저기 넘쳐나는 마당에 굳이 거기에 하나 더 보탤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런 시기에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열없는 주제는 단연 ‘팬데믹 시대의 이미지’ 같은 것이겠지만, 한편으론 이런 주제를 굳이 피해서 말한다는 것도 어색하게 느껴진다.

사실 우리가 무언가의 특성을 가장 잘 깨닫게 되는 것은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다. 어떤 장치나 제도의 오작동이나 기능 부전은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구성 요소들 가운데 어떤 것이 필수적이고 어떤 것이 부수적인지를 살피게 만든다. 예컨대,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올해 취소된 칸영화제는 초청작 목록만을 정리해 공식 발표했는데, 이로써 필수적 요소만 두고 보면 칸영화제의 기능과 역할이 소고기 등급 시스템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진실을 지나치게 솔직하게 밝혀 버렸다. 여하간 창작자에게나 관람자에게나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영화에 접근하는 일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은 지금과 같은 시기야말로, 우리가 영화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어떤 장치나 제도인지를 재고해 보기에 적기일 수도 있다. 

보통 우리가 영화라고 하면 떠올리는 것은, 카메라로 사람이나 사물이나 풍경을 촬영하고, 마이크로 소리를 녹음하고, 이렇게 해서 얻은 것들을 재료로 해서 일정 시간 동안 영사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그것을 여럿이 한자리에 모여 관람하거나 홀로 감상하는 일이다. 그런데 정말 영화라는 것은 카메라, 마이크, 영사 및 재생 장치, 스크린이나 모니터, 영화관 같은 요소들의 총합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일까? 파블레 레비 같은 이는 2012년에 내놓은 ‘Cinema by Other Means’라는 제목의 책에서 다양한 역사적 사례들을 검토하며 다른 방식의 영화 혹은 다른 수단을 통한 영화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도 했다. 

여느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지난 몇 달 동안 주로 집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문득 그동안 영화의 주변에서 배회하다 마주치곤 했던 다른 방식의 영화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보게 되었다. 어쩌면 선뜻 영화라 부르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화들과 다를 바 없이 영화의 가능성에 맞닿아 있는 그런 것들, 하지만 이름 붙이기 힘든 무엇들. 그러고 보니 영화 보기란 조용히 앉아서 기억 흔적을 다시 더듬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나의 기억은 아니라 해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모종의 기대와 흥분을 품고 환대할 수 있을지도.

십여 년 전, 필리핀에서 열리는 시네마닐라영화제의 심사위원을 맡게 되어 마닐라를 방문했을 때다. 나와는 다른 부문의 심사를 맡은 젊은 태국 영화평론가와 점심을 함께 먹고 거리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는 거리를 걷다가도 그림엽서를 파는 작은 상점들이 나타나면 그때마다 엽서를 한두 장씩 사서 가방에 넣고는 했다. 정말 의아하게 보인 것은 그가 엽서를 고르는 태도였다. 그의 몸짓은 무언가 맘에 드는 엽서를 찾고 있다기보다는 매대를 단숨에 쓱 훑어보고는 곧바로 눈에 들어오는 엽서를 잽싸게 집어 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수집가보다는 오히려 배달원의 몸짓처럼 보였다. 분명 그는 엽서를 사 모으는 중이었는데도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서 그런 인상을 받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한참 거리를 걷다가 우체국이 나타나자 그는 잠깐 들러 가자며 양해를 구했다. 우체국에 들어가서 그는 조금 전까지 사 모은 그림엽서들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 작은 수첩을 꺼내어 거기 적혀 있는 주소들을 엽서에 빠르게 옮겨 적기 시작했다. 물론 간단한 안부 인사를 적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떤 이들에게 보내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방콕에 있는 친한 친구들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이틀 후면 자기는 방콕으로 돌아갈 터이고 이내 친구들을 만나게 되겠지만 엽서는 제법 시간이 지난 후에 친구들에게 도착할 것이라면서, 자신을 들뜨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시차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곤 갖고 있던 엽서 가운데 두 장을 내게 주면서 귀국하면 곧 만나게 될 한국의 친구들에게 보내보라고 권유했다.

그와는 달리 당시 내게는 지인들의 주소를 적은 수첩 같은 것이 없었다. 마땅히 엽서를 보낼 곳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가 준 엽서들을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았고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하나에는 120여 년 전 필리핀 어부의 모습이 담긴 흑백 사진이, 다른 하나에는 필리핀의 대중교통 수단 중 하나인 지프니 위에 올라탄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컬러 사진이 있다. 엽서 하단에 조그맣게 적힌 정보를 보고 이제야 알게 된 것인데 원래 컬러 사진이 아니라 흑백 사진에 수작업으로 색을 입힌 것이다. ‘King of the Road’라는 제목의 전시에서 필립 지라르도가 선보인 사진이라 한다.

십여 년 전이라고는 하지만, 여행 중에 그림엽서를 사서 지인들에게 보내는 취미는 이미 그때도 꽤 예스럽게 비치는 것이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도 조만간 그렇게 비치게 될까?) 그런데 시차를 그 존재 조건으로 하는 인상주의적 편지라고 해도 좋을 엽서를 고르고 보내는 과정에서, 그 젊은 평론가는 영화 비슷한 무언가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가 엽서를 고르고 보내는 과정을 다시 떠올려 본다. 주의 깊게 고르기보다는 순간적인 감흥에 따라 자못 무심하게, 다만 신속하게 엽서를 집어 드는 그의 몸짓은 스냅 사진을 찍는 이의 그것과 닮아 보인다. 영화는 분명 사진과 함께 이러한 인상주의적 역량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사진과 마찬가지로 현상이라고 하는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했던 까닭에, 이미지의 포착과 이미지의 감상 사이에 시차가 생기는 일을 피할 수 없었다. 뷰파인더와 디스플레이가 일체화되어 시차를 소거해 버리는 기기를 흔히 찾아볼 수 있게 된 지금에도, ‘라이브 시네마’ 같은 용어가 내겐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작년 11월에 영국에서 겪은 일이다. 나는 런던한국영화제의 초청을 받아 영국 관객들을 대상으로 1980년대의 한국독립영화에 관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아내와 함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해서 휴대 전화를 확인해 보니 김신욱 작가라는 분─이 잡지의 성실한 독자라면 내가 작가의 이름 뒤에 ‘라는’을 덧붙인 것을 보고 분명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이 픽업 나오실 거라는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마침 공항 주변의 교통이 원활하지 않아 조금 늦게 도착하기는 했지만, 우리는 결국 약속한 곳에서 그를 만나 픽업 차량을 타고 숙소로 향했다.

공항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로 접어들 무렵, 운전 중인 그에게 “작가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어떤 작업을 하시는지요?”라고 물었다. (성실한 독자라면 이쯤에서 폭소를 터뜨릴 것이다.) 의례적인 물음이라 생각했던지 그는 사진 작업을 하고 있다고 짧게 대답했다. 이런 유의 대화는 대개 이쯤에서 “아, 그렇군요”라는 말과 함께 점점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의 질문은 계속되었고 다행히도 그의 답변 또한 점점 상세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에서 예술대학을 졸업한 후에 사진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영국에 왔다. 어쩌다 보니 여행객들을 픽업해 차량으로 공항과 시내를 오가는 일을 주업에 가까운 부업으로 삼게 되어버렸는데 이게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간다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런던과 히드로 공항을 오간 것만 3,000번이 넘는다고도 했다. 

조금씩 대화에 흥이 오르면서 그는 자신의 사진 작업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들려주기 시작했다. 빈번히 공항을 오가다 보니 공항 주변의 장소들과 그곳의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두게 되었고 이는 결국 사진 작업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특히, 공항 주변에서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광경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취미를 지닌 덕후들을 지칭하는 플레인 스포터들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그는 공항 작업의 결과물로 최근에 한국에서 두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면서 전시를 준비하며 만든 소책자 하나와 전시 리플릿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Unnamed Land: Air Port City’라는 제목으로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공개한 몇몇 사진들이 《보스토크》라는 사진 잡지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면서 말이다.

“《보스토크》요?”

“네, 사진 잡지인데, 혹시 아세요?”

그러니까, 잡지라는 장소는 이런 것이다. 김신욱 작가의 공항 연작 사진들은 이 잡지 9호를 통해 소개되었다. 나는 그때 이 칼럼에서 구로사와 기요시가 2016년에 발표한, 그다지 관심을 끌지는 못한 공포영화 한 편을 두고 ‘식물성의 유혹’에 대해 썼다. 하지만 우리는 공항을 통과해가는 여행객들처럼 서로에 대해 몰랐고, 서로의 작품과 글에 대해 알지 못했다. 심지어 우리 둘은 14호에서 다시 한번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잡지를 만드는 편집진의 입장에서는 뭐 이런 불량한 작자들이 다 있는가 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 법도 하다.

김신욱 작가에게서 받은 전시 소책자에는 이영준 선생이 공항비평가라는 직함으로 쓴 글─제목은 이영준 선생다운 심술과 솔직함이 드러나는 ‘기껏 영국까지 가서 공항 주변만 맴돌다 왔다’이다─이 실려 있다. 나는 이 글을 읽다가 과거의 김포공항에는 송영대라는 게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는 계류장과 활주로를 향해 열려 있는 공항 2층의 야외 발코니로, 배웅하는 이들이 비행기가 떠나는 광경을 볼 수 있게끔 배려한 유료 시설이었다. 아하! 그동안 한국에서 종종 환송대라고 번역해 온, 크리스 마커가 만든 단편영화에 나오는 공항의 ‘la jetée’도 바로 이런 것이었겠구나. 생김새만 놓고 보면, 말 그대로 발코니인 김포공항의 송영대와 방파제 형태를 띤 오를리공항의 그것은 전혀 다르지만 말이다. 여하간 그저 배웅하고 보내는 곳이라는 뜻만 지닌 환송대보다는 그런 뜻과 더불어 맞이하는 곳이라는 뜻도 함께 지닌 송영대 쪽이 훨씬 멋스럽게 들린다.

오늘날엔 전 세계 어느 곳의 공항에도 송영대 같은 시설은 없다. 가족이나 지인 들이 해외로 떠나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어서일까? 배웅이나 마중을 나간다손 쳐도 기껏해야 공항 내 출국장이나 입국장을 들르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주말이면 공항 인근의 언덕이나 풀밭에 가서 자리를 잡고,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들이 타고 있을 오고 가는 비행기들을 하염 없이 바라보고 기록하고 사진을 찍는 스포터들이 있다. 이들을 송영꾼이라 불러도 좋겠다. 김신욱 작가의 몇몇 공항 사진들에는 이런 송영꾼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들은 일정한 주기를 두고 모종의 움직임이 반복적으로 펼쳐지는 허공에, 그 이름 없는 장소에 매혹된 이들이다. 스크린 또한 이러한 장소이다. 이름 없는 공항이나 영화관은 있을 수 없겠지만, 허공이나 스크린에 이름을 붙인다면 우스꽝스러운 일이리라. 이러한 장소에 오롯이 매혹되기 위해서는 거기서 오고 가는 무언가를 본다는 행위 자체의 완벽한 무용성을, 그 쓸모없음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기 위해 히드로 공항으로 향할 때도 김신욱 작가가 아내와 나를 데려다주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들은 바에 따르면, 최근에 그는 괴물이 나타난다는 소문으로 유명한 네스 호 인근에서 사진 작업을 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전시를 열 예정이라고 했다. 서울에서도 전시를 열 계획이라 준비를 위해 2020년 초에 한국에 들어올 예정이라 했다. 우리는 서울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했고 그는 그러마고 약속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일정이 조정되었는지 여태까지 전시가 열렸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고, 그 이후로 연락을 주고받은 일도 없다. 

연락하라는 것은 빈말이 아니었어요, 라는 말은 어떻게 해야 빈말이 아닐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본 끝에, 오래 전 젊은 태국 평론가에게 받은 두 장의 엽서를 꺼내고, 이것들을 김신욱 작가에게 받은 전시 소책자 표지 위에 얹어 스캔하고, 엽서에 적기에는 조금 길다 싶은 편지 비슷한 글을 써서, 이렇게 태연자약하게 《보스토크》에 실어 보내는 것이다.




2020-06-23

이식과 기생
: 봉준호의 <기생충>을 계기로 다시 읽는 임화의 영화론


(※ 아래 글은 반연간 문학전문지 《쓺》 제10호(2020.03.30)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만들고 있는 영화는 영화가 아니요, 영화 비슷한 장난감이다. 우리는 이 장난감을 영화라는 수준으로 끌어가야 된다.” 지금으로부터 90년 전, 영화감독 나운규는 열악한 조선영화의 처지를 상술하며 이렇게 썼다. 1930년 5월 13일부터 19일까지 총 6회에 걸쳐 《중외일보》에 연재된 「현실을 망각한 영화 평자들에게 답함」이라는 글에서였다. 외국으로 보내기엔 “형식으로 불구의 것”에 지나지 않는 당대 조선영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몸뚱이를 열로 쪼개도 모자랄 만큼 다사多事하다”고 토로한 나운규가 굳이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1930년 초에 나운규가 주연을 맡은 <아리랑 후편>(연출은 이구영) 및 연출과 주연을 겸한 <철인도>가 개봉된 이후,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계열의 평론가들인 서광제와 윤기정 등은 이 영화들이 지극히 비현실적・반계급적・반동적이라며 맹공을 퍼부었는데, 이에 분노한 나머지 “작자 자신이 해석하여 대중이 공정한 판단을 내리도록 하려고” 나운규 자신이 직접 붓을 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역시 《중외일보》를 통해 발표되었던 서광제와 윤기정의 글―각각 「원방각圓方角 작품 <철인도> 비판」과 「조선영화의 제작 경향: 일반 제작자에게 고함」이다―과 나운규의 글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사실 나운규는 그에게 가해진 비판의 논점을 슬며시 바꿔버리는 방식으로 반론을 전개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서광제와 윤기정은 나운규의 작품에서 무엇보다 내용적 측면, 즉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나운규는 그러한 내용의 표현을 가로막는 조선영화의 현실을 토로하면서, 이런 현실에서 나온 영화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영화 자체로만 논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식으로 답하고 있다. 나운규의 항변을 조금 고쳐서 말하자면, 영화의 내용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러한 내용을 표현하는 형식이 갖춰져 있음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여러 사정상 이와는 거리가 먼 조선영화는 곧바로는 그러한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논쟁이라는 게임이 준수해야 할 규칙이라는 면에서만 보면 이처럼 논점을 바꿔 대응하는 항변은 순전히 반칙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세세히 나열하고 있는 조선영화의 현실, 즉 산업적 시스템의 부재(“조선에는 대大회사는 고사하고 (…) 영화로 다소간이라도 이익을 얻었다는 사람은 초기의 몇 사람밖에 없다.”), 기술적 설비의 미비(“사건은 꼭 밤에 있어야 될 사건인데 살인한 장소가 종로나 본정통本町通이라면, 종로나 본정통의 밤은 조선영화계에서는 비슷하게도 내기 어렵다.”), 검열의 문제(“처지가 다른 이 땅에서 검열의 수준을 일본과 동일시하는 것은 너무도 현실을 모르는 공상이다.”) 등을 도외시하면서 글의 문제점만을 짚기도 어려운 일이다.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은 2019년, 봉준호의 7번째 장편영화 <기생충>은 한국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임권택의 <춘향뎐>(2000)이 한국영화로서는 처음으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지 19년 만의 일이다. 연말에는 숱한 국내외 잡지들의 설문 조사에서 2019년의 베스트 영화 1위 혹은 상위권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세계 각국에서 여전히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이 영화는 한국에서만도 이미 10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고, CJ E&M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마케팅 비용을 제외한) 제작비인 135억원에 버금가는 비용을 캠페인 비용으로 투입하면서 작년 말부터 오스카(미국아카데미영화상) ‘레이스’에 합류했다. 그리고 올해 2월 9일(한국은 2월 10일)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외국영화로는 최초로 작품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감독상, 각본상 및 국제장편영화상 등 총 4개 부문을 석권하며 그야말로 역사를 다시 썼다. 시상식 결과가 나온 직후,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이 <기생충>의 수상을 축하하며 박수를 치는 것으로 회의를 시작하자고 제안한 것이 뉴스에 오르기도 했다.

식민지 시기의 영화인인 나운규가 토로했던 조선영화를 둘러싼 사정들은 <기생충>과 오늘날의 한국영화와는 무관한 외계의 일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이제 나운규가 제기한 조선영화의 문제들은 어느샌가 하나둘씩 모두 해결되어 버렸다고 보아도 될까? 대형 배급사와 멀티플렉스 체인에 기반을 둔 와이드 릴리스 방식이 일반화된 이후 21세기의 한국영화 산업이 어떻게 부정적으로 재편되어 왔는지, 이명박과 박근혜 집권기를 거치는 동안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어떤 식으로 영화인들을 옭아매었는지, 투자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부 배우들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영화 현장에서 기존의 작업 방식에 비추어보면 얼마나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영화가 제작되고 있는지 등에 관한 분석이나 증언은 적지 않다. <기생충>이 오늘날 한국영화의 잠재력을 보여준 영화라기보다는 봉준호라는 개인에게만 가능했던 여건의 소산이며, 그의 출세작이 된 두 번째 장편영화 <살인의 추억>(2003) 같은 작품의 기획안을 지금의 신진 감독이나 제작자가 투자자에게 제시하는 일은 언감생심이리라는 지적도 타당한 구석이 없지 않다. (게다가 <살인의 추억> 제작에 착수하기 전까지 봉준호는 서울 관객 5만명 수준에 그친 상업적 실패작 <플란다스의 개>(2000)를 연출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동시대 한국영화계에 대한 진단을 내리기보다는 영화 <기생충>이 나운규가 제기한 조선영화의 형식이라는 문제와 어떤 식으로 대면하고 있는지만을 간략히 살필 것이다. 이 대면의 결과가 낳은 것은 해결일까, 극복일까, 그도 아니면 우회일까?




이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기 전에 식민지 시기에 발표된 글 하나를 더 살펴보기로 하자. 시인이자 평론가이며 배우로도 활동했던 임화가 《춘추》 제10호(1941년 11월호)에 발표한 「조선영화론」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임화는 “조선영화는 조선의 다른 모든 근대문화와 같이 수입된 외래문화의 일종”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외래의 것을 수입하면서 동시에 제작하기 시작한 문학・음악・연극・미술과는 달리 영화의 경우 제작은 하지 않고 외래의 것을 감상만 하는 시기가 꽤 오래 지속되었음을 지적한다. 다만 외래문화의 이식移植이라는 점에서는 근대 조선의 영화와 다른 예술들은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임화는 문학・음악・연극・미술은 “제작하면서 그것을 모방함으로써 이식할 수 있었던 대신 영화는 단지 감상하는 것만으로 활동사진을 이식한 것”이라는 문제적인 주장을 제출하기도 한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임화가 결핍이나 부재를 극복해야 할 장애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조선영화를 성립시키는 구성요소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가 “영화의 제1기를 밑받치는 토대”라고 본 연극적 전통이 조선에서 그 역사가 가장 빈약했다는 점이나, “자본의 유력한 원호를 받지 못했다는 것” 또한 조선영화를 성립시키는 구성요소가 된다. 이처럼 연극적 전통이, 제작이, 자본이 결핍되고 부재함으로 인해 조선영화는 “자기의 자립을 위하여 가장 많이 문학에 원조를 구하였으며”, “조선의 문학이나 그 타他의 예술에 의지한 것 이상으로 외국영화에 의존하고”, “자본의 은혜를 몽하지 못한 대신에 그 폐해를 받지 아니했다.” 

언뜻 보면 임화의 진단은 모든 것이 부족한 조선영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미 지적했듯이 분명히 그는 당대 조선영화의 근본 성격을 규정하는 결핍과 부재를 도래할 조선영화를 위한 구성요소로 삼고 있다. 「조선영화론」에서 임화가 던진 가장 논쟁적인 화두라 해도 좋을 다음의 주장을 보자.

내지內地의 어떤 작가는 조선소설을 내지의 그것에 비하면 서구적인 데 가깝다고 한 일이 있거니와 영화의 영역에서도 이 점은 통용될 듯하다. 이것은 물론 그 소박한데 있어 진실하고 치졸함에 있어 독자적이나 이것은 시정해야 할 결함이면서 성육되어야 할 장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이러한 제점諸點은 여러 가지의 조선영화의 근본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 이것은 발전여하로서 장래 조선영화의 가장 독자적인 성격 내지는 가치있는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여기서 임화가 ‘제점’이라 한 것은 연극적 전통과 제작과 자본이 결핍되고 부재함으로 인해 조선영화가 띠게 된 특징들을 말한다. 그런데 ‘시정해야 할 결함’이 어떻게 해서 ‘성육되어야 할 장점’이 되는가? 명백하게, 이는 모순적인 주장이다. 모두에서 인용했던 나운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영화가 아닌 ‘영화 비슷한 장난감’ 같은 조선영화의 특징이야말로 결함이자 장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 아닌가? 조금 더 밀고 나가자면, 임화는 나운규가 형식조차 갖추지 못한 장난감이라고 부른 것이야말로 조선영화의 독자적 형식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 아닌가? 임화는 「조선영화론」에서 이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 글이 발표되고 나서 4년 뒤 식민지 조선은 해방을 맞게 되었고 조선영화의 형식이라는 문제는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채로 해방공간의 ‘대한민국’ 영화인들에게 던져졌다.

다시 지금으로 돌아오자. 나의 가설을 미리 밝혀두자면 다음과 같다. 봉준호의 <기생충>은, 나운규와 임화와 같은 식민지 시기의 조선영화인들을 옭아매었고 해방공간과 오랜 군부독재의 시기를 거치는 동안 확대재생산되었던 한국영화의 형식이라는 문제에 대해, 그와 관련된 모순을 해결하거나 극복하거나 우회하는 대신 아예 모순 자체를 형식화해 버리는 방법으로 답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도래할 한국영화의 독자성과 가치에 대한 임화의 ‘예언’은 <기생충>을 통해 실현된 셈이다. 한국영화의 형식이라는 문제를 둘러싼 모순 자체를 형식화한 이 영화를 보고 어느 외국의 평자가 “봉준호는 독자적으로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Bong Joon Ho has become a genre unto himself”고 한 말이 널리 회자되기도 했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이 말을 형식화된 모순으로서의 한국영화가 <기생충>이라는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마침내 독자적이고 가치 있는 장르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최초의 한국영화로 꼽히는 연쇄극 <의리적 구토>(1919)가 나오고 나서 7년 뒤인 1926년에 임화가 《매일신보》에 발표한 글에서 “날로 왕성하여가는 일본이나 구미영화와 경쟁커녕은 한자리에 서도 못할 형편”(「위기에 임한 조선영화계」)이라 진단하며 탄식했던 한국영화가 바야흐로 유럽과 미국의 주요 영화상을 휩쓸고 일본에서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진풍경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기생충>은 나운규나 임화가 지적한 결핍과 부재의 조건들 속에서 제작된 영화가 결코 아니다. 다소 과장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검열이 없었다면 (…) 봉준호 감독이 50년 전에 나왔을 것”이라고 한 김수용 감독의 발언에는 분명 저 결핍과 부재의 조건들을 오롯이 체험한 세대의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억한이 담겨 있다. 따라서 21세기의 영화인인 봉준호가 만든 <기생충>이 그러한 조건들과 직접 대면하여 한국영화를 둘러싼 모순을 형식화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봉준호는 오랫동안 불가피하게 결핍과 부재의 조건들과 대면한 상태에서밖에는 영화를 내놓을 수 없었던 한국영화사史의 기형적 산물들을 참조한다. 철저한 결핍과 부재의 상황에서 한국영화의 형식을 어떻게 정립시킬 것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싼 모순에 거듭 대면하다 못해 결국 그 모순을 형식(혹은 장르)으로 삼기에 이른 감독들의 영화들―봉준호 스스로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영화들로 꼽기도 한 김기영, 이만희, 그리고 이장호가 연출한 영화들―을 말이다. (이처럼 모순적 형식 내지는 장르로서의 한국영화의 기묘한 이력을 참조한다는 것이야말로 1980년대 이전의 한국영화사와 거의 혹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해도 무방한 형식을 시도하는 홍상수, 박찬욱, 이창동 등과 봉준호의 커다란 차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봉준호가 꼽은 한국영화들 가운데 하나이자 1980년대 한국영화계가 낳은 가장 걸출한 괴작怪作이라 해도 좋을 <바보선언>(1983)의 제작과 관련해 연출자인 이장호와 후배 감독인 김홍준이 나눈 대화의 일부를 살펴보자. 우리는 이 영화의 아방가르드적 형식이 주류 영화의 형식에 대한 비판으로서 나온 대안적 형식이 아니라 형식화의 불가능성(의 조건) 자체를 형식으로 수용한 결과라는 생생한 증언을 듣게 된다.

김홍준 (…) 1983년이면 사실 아직 본격적인 독립영화나 이런 것도 없었지만 뭐 작은 영화, 열린 영화, 저도 잠시 몸담았던 서울대학교의 ‘얄라셩’이랄지 또 각 대학의 영화서클들이 생기면서… 70년대에 있었던 예술 지향적이고 실험영화 중심의 대학 영화가 아닌, 영화운동을 지향하는 그런 영화들이 조금씩 지하영화 비슷하게 나오던 때인데, 혹시 이 영화를 만드실 때 그런 영화들의 존재를 아셨거나 영향을 받으신 건지 아니면 <바보선언>이 오히려 그런 영화들에 영향을 미쳤는지요.

이장호 아니죠. 이건 내가 직업 영화인으로서 만든 게 아니라 일부러 망치려고 했던, 거의 대학생 수준의 그런 영화였기 때문에 아마 모방을 하지 않아도 그냥 8미리 들고 나가면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실제로 영화가 1억 5천이 들던 시절에 이건 5천만 원밖에 안 들었으니까 1/3 아닙니까? 1/3의 제작비를 들여서 만들었고, 이 영화가 처음 시사회를 하던 날이 생각이 나는데 사람들이 모두 당황한 것은 영화 시작한 지 20~30분 지났는데도 대사가 없었다는 것. (…) 나는 시나리오를 쓸 때면 항상 대사 쓰기가 제일 힘들어서, 저절로 이 영화의 대사를 기피하게 됐어요. (…) 나는 가슴에 있는 말을 숨기지를 못하는데 그때 내가 잊히지 않는 게, 그거 사실 내가 만든 영화가 아니다. 나는 영화를 포기하고 자살하는 심정으로 만들었는데 이 영화를 만든 에너지는 전두환 정권하고 영화 정책에서 나왔다. 그것이 영화를 만드는 힘이 되었다고 솔직하게 얘기를 했습니다. (…) 재밌는 점은, 데모나 농성이 있을 수 없는 시대에 데모가 국회의사당 돔 앞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대학생들은 그걸 다 발견하는데 신통하게도 영화검열하는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이 대담에서 김홍준이 언급하고 있는 1980년대 한국의 영화운동은 부분적으로는 식민지 시기에 카프 계열의 영화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정치적인 조선영화 제작의 시도―임화는 이 가운데 <유랑>(1928), <혼가>(1929), 그리고 카프 1차 검거의 빌미가 된 <지하촌>(1931) 등의 주연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서울영화집단, 노동자뉴스제작단, 민족영화연구소, 장산곶매 등의 집단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1980년대의 영화운동은 식민지 시기나 (이장호가 증언하고 있는) 당대의 주류 영화계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실은 그보다 더 열악한 결핍과 부재 속에서 전개되었다. 이 영화운동 세대의 구성원 대부분이 청년기를 보낸 1970년대와 1980년대는, <바보선언>과 같은 드문 예외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는 한국영화가 질적으로 가장 후퇴했던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과거 한국영화의 전통으로부터는 전적으로 단절된 상태에서, 당대의 한국영화는 전적으로 부정해야 하는 대상이 된 상태에서, 실제로는 거의 보지 못한 외국의 대안적 영화들에 대한 글들에 의존해서, 산업적 자본으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 채로 한국영화의 형식이란 문제와 대면해야 했다.

흥미롭게도, 1980년대 후반 무렵부터 ‘정치의 계절’이 지나간 후인 1990년대에 영화운동 세대의 구성원들 상당수는 충무로 영화계의 감독이나 제작자로, 영화잡지의 편집진이나 기자나 영화비평가로, 대학교 영화과의 교수나 강사로, 갓 생겨나기 시작한 영화제의 프로그래머 등으로 진출하면서 한국영화계의 산업적・문화적 재편을 이끄는 주역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김홍준이 언급한 얄라셩(1979년 창립)을 시초로 1983년 이후 여러 대학에서 영화서클이 생겨났고 1984년에 설립된 한국영화아카데미와 같은 국립영화교육기관 또한 1990년대에는 완전히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1969년생으로 1988년에 대학에 입학해 영화서클을 만들어 활동하다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교육받은 뒤 2000년에 장편영화로 데뷔한 봉준호는 이처럼 영화운동 세대가 (1980년대에 만든 영화들 자체가 아니라) 1990년대에 재편한 제도적 영향 속에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이른바 ‘시네필 문화’가 형성된 시기에 말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인터뷰나 글 들을 통해 그에게 가장 영감을 준 한국감독이라고 꼽곤 하는 김기영은 이러한 시네필 문화의 한가운데에서 1990년대의 영화광들을 통해 (주로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재발견된 인물이었다. 봉준호가 <기생충>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2019년은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이었을 뿐 아니라 김기영 탄생 100주년이기도 했다.

나는 김기영의 스타일이라고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여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조건들에 의해 뒤틀린 한국영화, 한동안 ‘충무로 영화’라 불려 왔던 한국영화의 부정교합 자체가 도착적인 미학으로 승화된 것이라고 생각해 왔으며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형식화에 실패한 결과이자 순전히 모순에 지나지 않는 이러한 부정교합을 그와 동시대의 몇몇 한국감독들은 외래의 미학이나 장르와 한국영화를 이종교배(1950년대와 60년대의 한형모・신상옥・유현목, 1970년대의 하길종)함으로써 해결하거나 극복하거나 우회하고자 했던 반면, 김기영은 부정교합 자체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 미학화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장르를 만들었다. 이로써 김기영의 영화는 충무로 영화라는 모순적 비형식 자체의 형식화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한편, 임화가 진단했던 조선영화의 결핍과 부재는 <기생충>의 봉준호에게는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것이 되었는데, 그는 투자와 배급에서 CJ E&M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지녔음은 물론이고 외국영화나 여타의 예술만이 아니라 김기영 같은 감독을 통해 그 모순 자체가 육화embodiment된 한국영화를 참조점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기묘하게 비대칭적인 데칼코마니 구조를 현대적 공포영화의 플롯으로 성공적으로 형식화한 알프레드 히치콕의 <사이코>(1960)를 비롯한 여러 외국영화에서 빌려온 연장들로 비형식의 균열들을 꼼꼼히 보수(혹은 은폐?)하면서 말이다. <기생충>은 <하녀>(1960)의 계단을 뜯어낸 자리를 <사이코>를 비롯한 여러 참조물의 계단‘들’로 대체한 자리에서 펼쳐지는 부조리한 희비극이다. 

나이 든 부모를 산에 버리는 고대적 풍습을 소재로 한 김기영의 <고려장>(1963)을 이보다 조금 앞서 유사한 소재를 가지고 일본의 기노시타 게이스케가 영화화한 <나라야마 부시코>(1958)와 비교해 보자. (김기영이 기노시타의 영화를 직접은 아니더라도 각본 정도는 참조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다 해도 번안의 여부를 논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후카자와 시치로가 쓴 동명의 원작을 토대로 일본 고유의 극적 전통을 한껏 활용해 전체를 세트에서 촬영한 기노시타의 영화는, 영화적 기예의 총화로서의 형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진정 ‘완력腕力’의 영화라 할 만하다. 반면, <나라야마 부시코>에 비하면 규모는 다소 작지만 영화의 대부분을 세트에서 촬영한 <고려장>은, 고려장이라는 풍습을 지닌 마을 공동체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인습과 탐욕에 얽매인 빈자貧者들의 투쟁에 대한 동물학적 묘사, 전근대적 무속인의 모습으로 그려진 상징적 권력에 대한 저항의 신화, 성적인 도착성으로 넘쳐나는 인정과 욕망의 멜로드라마, 그리고 심지어 액션영화에 이르기까지를 형식의 균열을 감수하고라도 기어이 묶어 놓고야 마는 ‘괴력怪力’의 영화이다. (전체가 10권의 필름으로 이루어진 영화이나 오늘날에는 두 권이 분실된 채 남아 있는 상태라서 이 균열의 느낌은 더욱 강화된다.) 후대의 사람들을 들뜨게 하는 것은 언제나 괴력의 영화 쪽인데, 이는 물론 그것의 (불가해함보다는) 부조리함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임권택 같은 전혀 다른 사례를 떠올려 볼 수도 있다. 임화는 1941년에 《삼천리》에 기고한 「조선영화발달소사」에서 “『춘향전』이라는 소설이 무성, 유성을 물론하고, 매양 조선영화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라고 쓴 적이 있다. 여기서 임화가 언급하고 있는 <춘향전>은 1923년에 일본인 하야카와 고슈가 연출한 무성영화 <춘향전>과 1935년에 제작된 한국 최초의 유성영화인 이명우의 <춘향전>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임권택의 <춘향뎐>은 한국영화로서는 최초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작품이다. 여기서 임권택은 『춘향전』이라는 고소설을 토대로 한 판소리를 임화의 말대로라면 연극적 전통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출발했던 한국영화에 끌어들이고, 어떤 외국영화나 여타 예술에도 거의 의존하지 않으면서 한국영화의 형식이란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실험한다. 이는 그 자체로 한국영화사에서 희유한 사건이었지만 임권택의 실험은 이후의 한국영화계에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한 편의 걸출한 한국영화가 동시대나 후대와 아무런 연결고리도 지니지 못한 채로 이처럼 단독적으로 고립되어 버린 사례는 이 영화를 제외하면 배용균의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1995) 정도가 유일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배용균과 임권택의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바야흐로 한국영화의 산업적 재편이 본격화되고 있던 시기다. 바로 <쉬리>(1999)로 대표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통해 외국영화의 형식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할리우드라는 제도 자체를 충무로에 이식하고자 하는 열망이 극에 달했던 무렵이다. 서울관객 100만명을 동원한 임권택의 <서편제>(1993)가 충무로라는 구체제에서 가능했던 예술과 사업business 간 조우의 최대치를 상징한다면,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맥락 안에 있는 봉준호의 <괴물>(2006)은 ‘K-시네마’라는 신체제가 떠오를 무렵에 나온 예술과 산업industry 간 조우의 최대치를 상징한다. 봉준호가 처음으로 칸에 초청된 것은 ‘숙주The Host’라는 영어 제목을 지닌 이 작품을 통해서였다. 

칸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이후 지금까지 <기생충>에 대한 수많은 기사와 리뷰와 인터뷰와 비평 등이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외국의 평자들에 의해 쓰인 글을 읽고 있노라면 이 영화가 다양한 장르를 거침없이 오간다는 점에 감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에서 제작되는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드라마나 TV 프로그램 및 유튜브 등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이런 반응이 다소 의아하게 비칠 수밖에 없는데, 장르적 혼종성은 한국 대중문화 양식의 기본값default으로 설정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경멸적인 의미에서 충무로 영화라고 불린 한국영화에서 장르를 무작위로 넘나드는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작품에서 발견될 만큼 아주 뿌리 깊은 것이며, 심지어 오늘날 이는 한국영화가 관객에게 소구하는 데 있어 이점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한다. (2019년 벽두에 개봉해 16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극한직업>을 떠올려 보라.) 물론 많은 경우 그것은 당대의 관객들에게 소구하면서도 정합적인 서사를 구축하는 데 실패한 결과다. 

이를테면 현재까지 두 편이 만들어져 둘 모두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신과 함께> 연작은 <기생충>이나 <고려장>만큼이나 다기한 장르들을 오간다. 다만 여기에는 봉준호가 빌린 연장들이 없을뿐더러 김기영의 괴력 같은 것은 더더욱 없어 그저 ‘버라이어티’하고 무규정적인 무엇으로 남을 뿐이다. <신과 함께>가 충무로 영화라고 불리는 한국영화의 모순적 비형식 자체가 현재에도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김기영의 영화는 그것을 과잉으로 밀고나가 ‘로컬’하게 형식화해 버린 것이고, 봉준호의 <기생충>은 그처럼 형식화된 비형식을 동시대에 ‘국제적’으로 수용 가능한 ‘장르’로 만든 것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외국의 평자들에게는 온갖 부정교합들을 처리하기 위해 <기생충>이 수행하고 있는 연장질이 아니라 그 연장질의 대상이 되는 온갖 장르들과 그 작업을 통해 나온 형식으로서의 장르(봉준호라는 장르)가 더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한국의 우리에게 그 점이 잘 체감되지 않는 것은 한국영화라는 숙주와의 주기적인 접촉을 통해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비형식들에 ‘면역’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부자와 빈자 가족의 공생이란 것이 불가능하듯, <기생충>에서 도무지 연결될 법하지 않은 것들을 한데 엮는 두 가지 중요한 매개들 또한 마찬가지다. 두 가지 매개란 다름 아닌 물과 돌이다. 이 영화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부분을 떠올려보자. 불과 이틀 사이에 믿기 힘들 만큼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는데, 봉준호의 영화에서 낯설지 않은 폭우라고 하는 설정이 이것들을 모두 인과적으로 통합해낸다. 반면, 기택(송강호)의 아들 기우(최우식)가 영화 초반 친구에게서 선물로 받은 수석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영화 후반부에 물난리가 난 기택의 집에서 기이하게 물 위로 떠오른 이 수석이 별다른 이유나 동기도 없이 하나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해가는 과정은 가히 노골적이라 할 만큼 의도적으로 부조리하게 ‘방치’되어 있다. 영화 초반에 기우는 선물로 받은 수석을 바라보며 “야, 이거 진짜 상징적인 거네”라고 말한다. 이는 <기생충>이라는 영화에 봉준호가 태연자약하게 기입해 넣은 부조리를 반어적으로 가리키는 유머의 말일 것이다. 사실 수석에는 아무런 상징도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무지 연결될 법하지 않은 사건 혹은 장소들을 한데 엮거나 잇는 두 가지 매개의 성격은 확연히 다르다. 이들은 함께 어울리지 못하지만 <기생충>이라는 영화 속에서 여하간 공존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여기서 물이 한국영화가 오랜 이식의 노력을 거쳐 ‘봉준호라는 장르’를 통해 얻은 형식이라면, 돌은 봉준호가 그 형식 안에 어떻게든 기어이 기생하게끔 풀어둔 모순적 비형식의 징표라고 말이다. <기생충>을 21세기 한국영화의 ‘상징적’ 작품이라 부를 수 있다면 바로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괴물>이 공개되었을 당시 프랑스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인터뷰 기사 제목으로 삼은 이후 봉준호 스스로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 ‘삑사리의 예술L’art du Piksari’이라는 표현은 이처럼 확장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기생충>에서 박 사장을 맡아 연기한 배우 이선균은 지난 1월에 열린 미국배우조합상 시상식에서 “우리가 할리우드의 기생충인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문득 1929년에 임화가 《조선지광》에 발표했던 「최근 세계영화의 동향」의 몇몇 구절들이 떠오른다. 그는 영화란 “모든 예술의 영역에서 그 기능을 탈취하고 있다고 해도 좋은 문화사의 사생아”라고 부르면서 특히 미국영화가 지닌 근거 “즉 내재적인 발전의 원소原素는 지구의 다른 지방에서 성생成生하였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식을 통해 결핍과 부재를 보완하려 하는 한편 그러한 보완의 노력을 종종 좌절시키는 모순들의 숙주가 되었던 한국영화가 마침내 할리우드를 경유하여 세계영화가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기택네 가족이 박 사장 가족에 대해 그러한 것처럼 상호적인 기식자parasite로서일까, 아니면 지하 방공호와 같은 부속된 장소para-site로서일까? 이러한 물음과 더불어 새로운 100년의 한국영화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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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인용한 식민지 시기 영화인들의 글은 다음의 책들을 참고하였다. 인용할 때는 현대어에 맞게 수정된 판본을 따랐다. 나운규 지음 『<아리랑>을 만들 때』(문화부 1991); 나운규 지음 『조선 영화의 길―나의 삶 나의 영화』(가갸날 2018); 정재형 엮음 『한국 초창기의 영화이론』(집문당 1997); 백문임・이화진・김상민・유승진 엮음 『조선영화란 하何오』(창비 2016); 백문임 지음 『임화의 영화』(소명출판 2015). 이장호 감독과 김홍준 감독의 대담은 다음의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장호・김홍준 지음 『이장호 감독의 마스터클래스』(도서출판 작가 2013). 

2020-02-06

파편들 사이에서 말하기


(※ 아래 글은 2019년 9월 10일부터 10월 27일까지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미디어펑크: 믿음 소망 사랑》 연계 책자로 발간된 『미디어챕터 II』에 수록된 글이다.)


어떤 영상작품이 ‘파편적(fragmentary)’임을 지적하는 진술은 그 자체로는 별다른 비평적 판단과 결부되어 있지 않다. 바꿔 말하자면, 어떤 영상작품이 파편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작품이 지니는 가치에 대한 논거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비판할 만한 구실도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아르코미술관에서 마련한 전시 《미디어펑크: 믿음 소망 사랑》(2019.9.10~10.27)에 참여한 작가・그룹 가운데 하나인 파트타임스위트의 몇몇 영상작품들을 떠올려 보자. 2016년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의 커미션을 받아 제작한 VR 영상작품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나,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그룹전 《색맹의 섬》(2019.5.17~7.7)에서 처음 선보인 후 합정지구에서 열린 개인전 《에어》(2019.8.31~9.29)에서 구성을 약간 달리해 보여준 <이웃들>은 분명 파편적인 성격을 띤 작품들이다. 하지만 작품의 이러한 성격이 창작자에게 있어서나 관람자에게 있어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를 헤아려보기 위해서는 동시대의 영상작품들을 가로지르는 이중의 힘에 대한 고찰이 필수적이다.


<나는 시끄럽게 죽고 싶다(I Hope I’m Loud When I’m Dead)>(2018)

<우리는 여전히 눈을 감아야만 한다(We Still Have to Close Our Eyes)>(2018)


이러한 이중의 힘은 구심력과 원심력이라는 익숙한 용어에 비유적으로 견주어 고찰해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을 듯싶다. 서로 길항하는 이중의 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 것은, 올해 초 비슷한 시기에 베아트리스 깁슨의 <나는 시끄럽게 죽고 싶다(I Hope I’m Loud When I’m Dead)>(2018)와 존 토레스의 <우리는 여전히 눈을 감아야만 한다(We Still Have to Close Our Eyes)>(2018)를 나란히 보게 되면서부터다. 두 작가는 모두 지금 당장 그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 만큼 혼란스러운 당대의 풍경을 파편적으로 스케치하고 있다. 이들은 언젠가 그들의 영화를 처음으로 접하게 될 각자의 아이들을 위한 선물 혹은 타임 캡슐과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 (두 작품 모두 작가 자신의 아이를 보여주며 끝난다.) 이들의 작품이 어떤 맥락 내지는 환경 속에 놓여 있음은 확실하지만, 그것은 작품에 내재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작품에 내재하는 것들을 통해 곧바로 추론/외삽(extrapolation)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의 영향은 작품을 통해 뚜렷이 느껴진다. 어떻게? 작품을 구성하는 시청각적 요소들 상호 간의 인력(引力)을 능가하는 힘으로, 그리하여 이 각각의 요소들이 서로 조금씩 거리를 두고 떨어져 의미가 모호한 상태로 부유하게끔 하는 파괴적이고 불가해한 힘으로서다. 

이처럼 파괴적이고 불가해한 힘에 대한 체험은, 나로 하여금 ‘영화적’ 영상작품과 ‘미술적’ 영상작품을 상대적이나마 구분해볼 수 있게 했던 이중의 힘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영화와 미술을 막론하고 영상작업에 관심을 둔 창작자들에게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얼마간 양쪽을 오가며 작업하는 이들이기는 하지만, 베아트리스 깁슨은 미술계에 가까이 있는 ‘작가’라면 존 토레스는 영화계에 가까이 있는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영화는, 그리고 영화적이라 할 수 있는 영상작품은 구심적인 특성을 띤 것이었다. 작품을 둘러싼 정치・사회・경제・문화・역사・제도적 맥락, 작품의 형식이나 양식을 자리매김하는 미학적 규준에 대한 지식, 작가의 의도를 가늠케 하는 담론들 같은 작품 ‘외적’ 요인들을 고려한다 해도, 어디까지나 이것들은 관람자의 눈과 귀를 작품의 시청각적 물성으로 향하게 하는 구심력의 벡터를 통해 작품 내부로 수렴되었던 것이다. (영화관이나 블랙박스의 어둠은 이러한 벡터를 활성화하기 위한 장치라고 해도 좋다.) 극영화이건 다큐멘터리이건, 서사적인 플롯을 지닌 작품이건 추상적인 작품이건 간에, 영화적 작품들에서는 구심적이라 할 수 있는 특성이 뚜렷이 감지되곤 했다. 반면 미술적이라 간주되는 영상작품은 심히 원심적이었다. 이제는 현대미술 실천에서 익숙해진 ‘발견된 오브제(objet trouvé)’의 경우가 그렇듯, 작품의 시청각적 물성을 감촉할 수는 있지만 그러한 감촉 자체가 작품이 겨냥하는 바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상작품은 일종의 뜸씨와도 같아서 어떠한 정치・사회・경제・문화・역사・제도적 좌표계에서 고찰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둘러싼 환경이 담론적으로 재구성되게끔 할 수 있다. 구심적 영상작품이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흡수해 물드는 것이라면, 원심적 영상작품은 흘러나가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물들인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적으로 구심적으로만 작동하거나 그 반대로 원심적으로만 작동하는 영상작품은 없다. (영상작품 앞에서 우리는 ‘여하간’ 무언가를 보고 듣거나 ‘여하간’ 무언가를 떠올린다.) 그러나 백남준의 <영화를 위한 선(仙)>(1964)이나 이와 같은 해에 나온 앤디 워홀의 <엠파이어>(1964) 같은 작품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통상적인 영화보다 분명하게 원심적인 특성을 띠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데 어떤 영상작품이 영화적인지 미술적인지는 그 작품이 영사되거나 디스플레이되는 공간의 성격과는 무관하다고 말해도 좋다. 영화관과 전시실이라는 공간은 하나의 영상작품을 더 영화적으로, 혹은 더 미술적으로 보이게끔 만드는 요인이 아니다. 이를테면 빛의 조형성을 극대화한 제임스 터렐이나 올라퍼 엘리아슨의 설치작품들은, 그 공간의 미술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관람객의 주의를 구심적으로 작품을 향해 이끈다는 점에서, 외견상 영화적인 백남준이나 워홀의 작품보다 훨씬 영화적으로 느껴진다. 프랑스 영화감독 클레어 드니가 단편 <컨택트>(2014)에서 엘리아슨의 동명 설치작품을 카메라에 담아내고 이 영화의 클립 일부를 그녀의 첫 SF 장편영화 <하이 라이프>(2018)에서 재활용할 때, 여기엔 영화관과 전시실이라는 공간의 차이와 무관하게 서로 교통 가능한 작품의 동종성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이다.


<컨택트(Contact)>(2014)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쯤에서 밝혀 두자면, 나는 어떤 영상작품이 영화적인지 미술적인지를 판별해낼 기준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구심력/원심력이라는 대립항을 끌어들인 것이 아니다. 서로 길항하며 모든 영상작품을 가로지르는 이 이중적 힘의 성격이 최근에 의미심장하게 변화했고 또 여전히 변화하고 있는 중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오늘날에는 구심력의 벡터와 원심력의 벡터가 분리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팽팽하게 얽혀 있는 작품들이 적지 않아서, 이 경우 구심력/원심력이라는 대립항을 끌어들이는 것은 서로 다른 힘의 (종종 0이 될 뿐인) 벡터합을 확인하는 작업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중적 힘의 변화, 정확히는 원심력의 변화가 초래한 구심력의 변화에 주목하게 된 것은 앞서 언급한 베아트리스 깁슨과 존 토레스의 작품들 때문이다. 원심력이라는 것이 작품으로부터 그 바깥으로 향하는 것이긴 해도, 이 또한 구심력과 마찬가지로 작품을 하나의 ‘오브제’이게끔 하는 조형력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구심적이건 원심적이건 간에 영상작품에서 작가는 여전히 힘의 조정자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시끄럽게 죽고 싶다>와 <우리는 여전히 눈을 감아야만 한다>와 같은 작품들은, 작품을 오브제가 아닌 일종의 ‘잔해(debris)’로 만드는, 작가의 통제를 벗어난 파괴적인 힘으로서의 원심력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다.

이제 원심력을 조정하는 이는 작가가 아니다. 문제는 이처럼 파괴적인 힘으로서의 원심력이 백남준이나 워홀의 작품에서처럼 창작자에게서 기인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한편으론 정치・사회・경제・문화・역사・제도적 맥락에서 그 동인(動因)을 파악해내기도 힘들 만큼 비인격적(impersonal)으로 다가온다는 데 있다. 깁슨과 토레스의 작품에서, 취임연설 중인 도널드 트럼프의 목소리가 삽입되거나(<나는 시끄럽게 죽고 싶다>)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모습이 담긴 영상클립이 삽입되는(<우리는 여전히 눈을 감아야만 한다>) 경우에도, 이러한 청각적・시각적 요소는 작품에 산재한 파편적 단편들에 맥락을 부여하는 정치적 지표나 단서라기보다는 여느 단편들과 마찬가지로 무질서한 공통의 표면에 무심코 던져진 범용한 단편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비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학적으로 급진적인 오늘날의 영상작가들은, 사태의 맥락을 가늠하기 힘들 만큼 부조리하게 펼쳐지는 동시대의 풍경이 가하는 압력에 눌린 나머지, 자신들의 작품이 부서져 ‘잔해’가 되도록 방기하는 데서 창작의 윤리를 재발견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까? 학술행사를 방불케 하는 각종 초청 강연・세미나・대담이 종종 전시 작품들을 압도하곤 하는, (비평적) ‘담론의 외주화(outsourcing)’라 해도 좋을 동시대 미술계의 관행을 떠올려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파편들 앞에서 망연자실해 있는 작가를 대신해 선생님들이 고견을 들려준다. (때로 이들은 작가의 다음 작업을 위한 ‘멘토링’을 제공하기도 하는데 이 표현이 조금 꺼림칙하다면 ‘콜라보레이션’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하는 것도 가능하다.) 문제는 이런 담론들이 종종 파편화된 잔해의 폐허 주위를 거닐면서 메타적 위치에서 상황을 진단하는 데 머문다는 데 있다. 이때 전시와 작품은 그 자체로 ‘다크 투어리즘’의 대상이 된다.

기묘하게도 깁슨과 토레스의 작품은 무언가를 방기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보다는 파편들 가운데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치열한 싸움 끝에 남은 잔해를 모아 봉인한 타임 캡슐 같은 이들의 작품 곳곳에서, 목소리가, 분명히 어떤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싸움이라면 어떤 싸움을 말하는 것인가? 물론 비인격적인 파괴력으로 화한 원심력에 대항하는 싸움이다. 그러나 이 싸움은 작품을 구성하는 시청각적 요소들 상호 간의 인력을 회복하는 구심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 북(Le livre d’image)>(2018)


이와 관련해서는 장-뤽 고다르의 근작 <이미지 북(Le livre d’image)>(2018)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영화를 보기 전에 제목만 들었을 때는, 이미지(image)라는 단어를 굳이 단수로 써서 ‘그림책(livre d’images)‘과 차별화하고 있는 것도 그렇거니와, 말라르메적 의미의 ‘대문자 책(Livre)’과 관련된 아카이브적 프로젝트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고다르의 기획은 다른 방향을 겨누고 있다. 그가 겨누는 대상은 저 파괴적인 힘의 원천이 되는 시청각적 ‘데이터들의 기지(data-base)’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모든 사물과 사람과 사건을 ― 고다르와 그의 작품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 무작위적으로 포괄하면서 말라르메적 책의 이상을 허위적으로 구현하는 거짓 아카이브의 형식을 띤다. 데이터-베이스는 모든 것을 수집하고, 망라하고, 저장하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혹여 무언가가 말해질 경우, 그것은 삽시간에 다시 데이터-베이스의 항목들 가운데 하나로 배치되어 그 특이성을 잃고 만다. <이미지 북>에서 고다르의 구심력은 데이터-베이스의 질서를 교란하고 흐트러뜨리는 힘인 동시에, 그 싸움의 과정에서 나온 파편들을 다시 작품이라는 공간으로 모아 특이성을 부여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 파편들끼리의 연관은 여전히 분명치 않지만, 파편들의 특성에 따라 다섯 개의 장(章)으로 ‘잠정적으로’ 분류되어 있다. 

고다르는 <이미지 북>의 종반부에서 작가 페터 바이스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것도 우리가 희망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우리의 희망을 바꿔놓지는 못하리라.” 김응수의 열다섯 번째 장편영화 <스크린 너머로>(2019)는 정확히 고다르와 같은 믿음을 공유하는 작품이다. 여기서 그는 신원 미상의 한 화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도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믿는다.” 한 남자와 두 여자,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자의 독백을 담은 화면상 텍스트(on-screen text)들이 서로 교차되는 가운데, 우리는 (남자의 말대로라면) “영화라고 말할 수 없는 영상의 어수선한 배열”을 보게 된다. 혹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한 남자와 두 여자가 한 편의 영화를 본다. ‘나의 즐거운 일기’라는 제목이 붙은 이 영화는 어느 산 풀숲에 버려진 누군가의 스마트폰에 담긴, 수년에 걸쳐 모은 영상과 메모 및 음악을 편집한 것이다. 세 남녀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 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때로 영화 속의 공간을 거닌다. 우리는 <스크린 너머로>에서 감독 자신이 아이폰 내장 카메라로 수년에 걸쳐,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밤낮으로 촬영한 것이 분명한 풍경들의 ‘배열’을 보게 되는데, 이 가운데 가장 여러 차례 보게 되는 것은 멀리 월악산이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서 찍은 충주호의 풍경이다. 각각의 쇼트는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모호하고, 서로 유사하기는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몽타주의 논리 안에 포섭되지도 못한다.


<스크린 너머로>(2019)


고다르의 <이미지 북>이 여러 개의 그림-파편들을 모은 그림책이 아니라 파편들 사이에서 도래할 ‘하나의’ 이미지를 위한 책인 것처럼, 김응수의 <스크린 너머로>는 충주호의 풍경이 담긴 ‘영상의 어수선한 배열’ 가운데서 다시 가능한 영화를 모색하는 비영화(non-cinema)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고다르의 <이미지 북>은, 그리고 어느 미지의 인물이 풀숲에 남겨두고 떠난 스마트폰에 담긴 시청각적 기록들을 재배열한 (것으로 가정된) 김응수의 <스크린 너머로>는, 작가가 자신의 아이에게 물려주는 타임 캡슐과도 같은 깁슨이나 토레스의 작품과 분명히 동시대적 강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다르는 “현실에서는 오직 파편만이 진정성의 흔적을 띤다고 브레히트는 말했다”고 지적한다. 파편을 부서진 무언가의 잔해가 아니라 그 자체로 진정한 무엇으로 보기 위해서는 아이의 눈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미지 북>은 여전히 하나의 그림책이며, 김응수와 깁슨과 토레스의 작품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러한 작품들은 일종의 ‘생전의 유품(Nachlaß zu Lebzeiten)’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