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19

영화제의 검열-효과에 관한 노트



(아래는 계간 <인문예술잡지 F> 제4호(2012.1.15)에 실었던 글을 옮긴 것이다. 현재 <인문예술잡지 F>는 제7호(2012.10.30)까지 발간되었으며 1호부터 4호까지는 절판되었다.)


영화제의 검열-효과에 관한 노트


1. 영화감독 너새니얼 도어스키는 “단테가 오늘날 <신곡: 지옥>을 썼다면, 지옥을 이루는 첫 번째 원환은 거대한 원형 뉴스 데스크가 되었을 것”이라 쓴 적이 있는데, 우리는 그 원환으로 향하는 길 가운데 하나엔 틀림없이 카메라맨과 기자들로 가득한 레드카펫이 깔려 있을 것이라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레드카펫 저 너머로는 영화들을 사고파는 장사치들로 가득한 필름마켓이 보일 것이다. 칸, 베를린, 베니스에서 개최되는 국제영화제만큼이나 전 세계 영화인들의 특별한 관심을 받아 온 행사도 없다. (다만 칸이나 베를린과 달리 대규모의 필름마켓이 없는 베니스영화제는 영화수입업자들의 관심에선 좀 밀려난 것 같은 느낌이며, 최근엔 베니스 직후에 열리는 토론토영화제가 베니스영화제 상영작의 주요 거래창구가 되고 있다.) 어떤 작품이 이들 영화제의 초청을 받았다는 사실이 - 공식경쟁부문에서 수상했을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고 - 여전히 꽤 영예로운 일로 간주되는 건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해 이러한 영화제에서의 상영 및 수상이 의미하는 바는 예술적 가치의 보증이 아니라 예술적 (더불어 때로는 상업적) 기능의 할당이라는 점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을 잠정적으로 ‘작품-기능’이라 부르기로 하자.) 즉 부가적인 속성을 부여받거나 혹은 이미 담지하고 있다고 가정되는 속성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기능을 위한 자리를 할당받는 것이다. 이건 오늘날 영화제 현상에 조금만 비평적인 접근을 시도해 본 이라면 누구나 깨달았을 상식에 속하는 것이니, 어떤 식으로건 대형영화제에서 기왕에 인정받은 작품들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의 등급표시 시스템과 별다를 바 없는 절차에 따라 유사-가치를 부여받은 것들임을 드러내기 위해 지면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다. 따라서 이 글은 “대체 이처럼 형편없는 영화가 칸영화제에 초청된 이유는 무엇인가?”같은 질문에 답할 의도로 구상된 것이 아니며 - 예전의 국가별 영화 할당 슬롯(slot)을 삽시간에 대체해 버린 거대국제배급사의 영향력과 공식 영화상영을 압도하는 필름마켓의 위상 강화 등을 생각해 보면 그런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지 않다 - 오히려 거대 국제영화제의 작품-기능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특히 아시아영화에 대한) 간접적 검열의 효과에 대해 문제제기하기 위해 씌어졌다. 


2. (사례 1: 일본) 전통적인 영화 ‘강국’으로 인정받아온 일본의 경우, 최근 저널리스트들과 평자들은 오늘날의 일본영화가 예전의 그것만 못하다고 입을 모아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이 상투적이기 짝이 없는 불평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면,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영화의 질적 저하가 아니라 동시대 세계 영화제(계)가 아시아영화에 할당한 기능과 일본영화에 할당한 기능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 -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영화는 아시아영화의 외부에 자리함으로써만 아시아영화의 중심이 되는 역설적인 기능을 맡아 왔다 -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지아장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차이밍량, 라브 디아즈, 홍상수 등 최근 아시아영화의 최전선을 이루는 이들의 작품을 살펴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통적으로 존중되어 온 서사나 미장센의 효과를 부분적으로 활용하되 모종의 독특한 개념적(conceptual) 도식 내에 그들을 배치하는 현대적 미학을 구사한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이들 감독들이 담당하는, 그리고 앞서 언급한 국제영화제들에 의해 장려된 동시대 아시아영화의 작품-기능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들 감독들이 각자의 개념적 도식을 보다 전면에 내세운 작품보다는 그 개념적 도식이 서사나 미장센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들이 종종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일본영화의 경우, 이처럼 개념적 도식을 활용하는 영화가 매우 드문 데다 있다고 해도 - 최근 작품으론 고바야시 마사히로의 <위기의 여자들 Women on the Edge>(2011)이나 야마모토 마사시의 <쓰리 포인츠 Three Points>(2011)[1] 같은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일본 바깥엔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 일본영화의 작품-기능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영향력 있는 국제영화제 초청에선 배제되어 버린다. 국제영화제 서킷이 부과하는 일본영화의 작품-기능은 미장센 위주의 표현적인 작품이나 ‘아시안 익스트림(Asian Extreme)’이란 용어로 대표되는 과잉의 장르에 국한되는 경향이 있는데, 가령 3대 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가운데 일본영화(와 중국영화)에 가장 정통한 이로 평가받고 마르코 뮐러는 작년(2011년) 베니스영화제에 소노 시온의 <두더지 Himizu>, 츠카모토 신야의 <고토코 Kotoko>, 시미즈 다카시의 <토멘티드 Tormented>를 초청했고 티에리 프레모가 이끄는 칸영화제는 가와세 나오미의 <하네즈 Hanezu>, 미이케 다카시의 <할복 Hara-Kiri: Death of a Samurai>, 소노 시온의 <길티 오브 로맨스 Guilty of Romance>를 초청했다. 국제영화제 서킷에서의 작품-기능이라는 측면에서 일본영화는 일종의 이중구속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개념적 도식을 활용하는 현대적 미학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전적으로 동시대적인 드라마나 장르영화를 생산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일본영화는 여타 아시아 예술영화가 현대적이 되면서 비워낸 자리를 책임질 것을 - 다시 한 번 아시아영화의 외부가 됨으로써 중심을 만들어낼 것을, 즉 중심으로서의 외부가 될 것을 - 강요당하고 있는 셈이다.[2] (그런데 이 기능마저도 봉준호나 박찬욱 같은 한국감독들의 작업에 의해 위협당하고 있는 처지다.) 그러한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는 강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이들로 구로사와 기요시, 아오야마 신지, 만다 구니토시 등을 꼽을 수 있겠지만 이들의 영화는 그간의 노력에 합당한 작품-기능을 아직 할당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일본 바깥의 평단과 영화계는 이들의 영화를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아직도 갈피를 못 잡고 있는 형국이다.) 작년 일본영화계가 배출한 최고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 도미타 가츠야의 <사우다지 Saudade>가 동시대 아시아영화의 작품-기능과 일본영화의 작품-기능 사이를 지그재그로 오가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브라질 출신의 이주노동자들과 태국과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에서 온 매춘부들이 일본인들과 얽히며 빚어지는 문화적 갈등이라는 소재도 그 형식적 패턴에 썩 잘 어울린다. 


3. 이처럼 국제영화제 서킷이 가동시키는 작품-기능 시스템의 검열-효과는 폭력이나 섹스의 과도한 묘사를 - 때로는 명시적으로 정치적인 코멘트들을 - 제어할 목적으로 가동되는 기존의 검열 시스템보다 훨씬 더 전면적으로 오늘날의 영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폭력과 섹스의 과도한 묘사는 이미 예술적 기능을 할당받은 작가의 영화나 국가영화와 결합될 경우 오히려 A급 국제영화제의 환대를 받는다. 이안의 <색, 계 Lust, Caution>(2007), 라스 폰 트리에의 <안티크라이스트 Antichrist>(2009), 기타노 다케시의 <아웃레이지 Outrage>(2010) 등을 떠올려 보라.) 이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물론 미학적 작품-기능의 범주들을 분할하고 할당하는 국제영화제의 정치학이다. 그런데 이러한 작품-기능의 분할과 할당이 영화제 프로그래머나 큐레이터들에 의해서 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오늘날 어떤 영화가 ‘국제적’으로 수용될 가능성이 있는지를 판단하고 (때로는 프로덕션 단계에서부터 관여하면서) 그 영화가 어떤 영화제에서 상영되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세일즈 에이전트들이며 따라서 이들의 기능을 고려하지 않은 채 국제영화제의 정치학을 논하는 건 쓸모없는 일이다. 물론 칸, 베를린, 베니스, 토론토 그리고 한국의 부산영화제처럼 규모가 큰 영화제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프로그래머의 취향이나 그가 개별 감독들 및 특정국가와 맺고 있는 개인적 네트워크가 훨씬 더 크게 작용하는 영화제들(로테르담, 뱅쿠버, 비엔나 등)도 존재하고, 한편으론 대규모 영화제 내부에도 공식부문과 차별화되는 (혹은 공식부문에서 밀려난) 영화들을 상영하는 섹션들 - 대표적으로 칸영화제의 감독주간(Director's Fortnight)과 베를린영화제의 포럼(Forum) - 이나 실험적인 영화들을 상영하는 섹션들 - 베니스영화제의 오리종티(Orizzonti)나 토론토영화제의 파장(Wavelength) - 이 존재하지만, 이들은 작품-기능의 분할/할당 작업의 결과의 몫과 잔여물을 떠맡아 재분할/재할당하는 작품-기능 시스템의 일부라 할 수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스타벅스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하나 이상의 영화제가 존재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개별 영화에 예술적/상업적 기능을 할당하는 국제영화제 서킷의 작품-기능 시스템의 전면적 지배 바깥에 있는 영화는 1) 당장의 국제적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각국의 내수용 영화이거나 2) 일종의 유사-대항적 작품-기능 시스템을 가동시킨다고도 할 수 있는 전문 웹사이트 및 특화된 영화제나 이벤트 등을 통해 마니아 커뮤니티 내에서 유통되는 영화들 - 발리우드영화[3], 최근 일본 닛카츠사(社)가 해외의 ‘아시안 익스트림’마니아들을 염두에 두고 2010년에 런칭한 ‘스시 타이푼’(sushi typhoon)[4], 그리고 물론 포르노그래피 영화들 등등 - 이거나 3) 자국영화에 할당된 작품-기능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영화들이다. 이 가운데 영화제 서킷의 검열-효과와 관련된 것은 물론 세 번째 범주의 것이다. 


4. (사례 2: 필리핀) 필리핀영화에 할당된 작품-기능은 우선 1970년대 리노 브로카의 영화들이 서구에 각인시킨 사회적 리얼리즘의 계보에서 파악될 수 있다. 브로카 이래 필리핀 감독으로서는 처음으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고 또 수상한 이가 <서비스>(2008)와 <도살 Kinatay>(2009)의 브리얀테 멘도자 - 또한 그의 <할머니 Lola>(2009)는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신작 <포로 Captive>(2012)는 올해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 - 라는 사실도 그러하거니와, 그가 <꼬마 선생님 Manoro>(2006)에서 처음 시도하고 <입양아 Foster Child>(2007)에서 확립한 이른바 ‘리얼-타임 시네마’(real-time cinema)의 미학이 당대의 필리핀영화계에서 (국제영화제를 겨냥한) 숱한 아류작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와 같은 영화들을 일차적으로 분할해내고 거기에 작품-기능을 할당한 뒤에, 라브 디아즈, 라야 마틴, 존 토레스처럼 보다 개념적인 현대적 미학을 구사하는 이들에게 작품-기능을 할당하는 것은 베니스영화제 오리종티 부문, 칸영화제 감독주간 혹은 뱅쿠버나 로테르담영화제 같은 재분할/재할당 시스템의 몫으로 남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시스템에서도 작품-기능을 할당받지 못한 영화들은 더 마이너한 국제영화제의 몫으로 넘겨지거나 그도 아니면 필리핀 국내에서의 제한적 쇼케이스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필리핀영화의 경우, 멘도자처럼 A급 영화제를 통해 이미 공인된 감독이 아닌 이상 국제적 세일즈 에이전트의 힘을 빌릴 수 있을 가능성이 전무하고, 한편으론 다른 아시아영화들, 특히 일본, 한국, 태국, 인도영화들과는 달리 유사-대항적 작품-기능 시스템의 지원을 받을 가능성도 거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영화가 내수용 영화에 머물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은 공식적인 작품-기능 시스템의 위계에 더욱 절박하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물론 이는 대다수의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동 영화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사실이다. 심지어 이들 지역의 국가영화들은 국제영화제 서킷에서 통용 가능한 작품-기능을 전혀 할당받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라, 이를테면 중앙아시아영화는 중국이나 러시아영화의 작품-기능에, 동남아시아영화는 대만이나 태국영화의 작품-기능에, 중동영화는 이란영화의 작품-기능에 견주어서 판단되는 기묘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이 절박함은 필름메이커들로 하여금 영화제 서킷에 의해 규정된 자국영화의 작품-기능을 유일하게 가능한 미학으로서 수용토록 강요하는 한편 그에 어긋나는 것을 스스로 배제하게끔 하는 검열-효과를 낳는다. (필리핀영화의 특정한 작품-기능 속으로 범주화되기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쉐라드 안토니 산체스의 극단적으로 실험적인 영화 <하수구 Imburnal>(2009) 같은 영화가 3대 영화제는 말할 것도 없고 로테르담을 비롯한 다수의 ‘모험적인’영화제들에서조차 거절당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5. 아도르노는 그의 『미학이론』에서 아무런 기반이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현대예술의 기반이며 아직도 예술작품이 존속할 기회가 있다면 자신을 위험 속에 드러내놓는 철두철미하게 극단적인 작품들만이 존속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영화는 결코 현대적인 예술이 될 수 없는 것이거나 극단적이 될 것을 감수할 경우 드러나지 않은 채 그저 ‘존속만’하게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건 역사적으로 이미 하나 이상의 작품-기능을 할당받은 국가영화의 경우, 국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화제 서킷이 할당한 작품-기능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 내부에서 미답의 영역을 발견해내는 것 - 이를 발견해내지 못하면 진부한 아류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다 - 정도가 필름메이커에게 허용된 곡예의 전부인데, 그 미답의 영역이 줄어듦에 따라 (작품-기능을 처음으로 할당받는 데 성공했던 ‘개척자’의 영화를 제외하고는) 해당 국가영화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1960년대 이후 서구의 영화저널리즘이 뉴웨이브(New Wave)란 명명 하에 각국의 영화들에 (대략 10년 주기로) 차례로 작품-기능을 할당해가며 새로움과 발견을 호도해 왔던 논리가 오늘날 전면화된 영화제 서킷에 의해 작동되는 작품-기능의 분할/할당 시스템을 통해 더욱 빠른 속도로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이유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와 같은 뉴웨이브 붐이 가라앉은 이후의 상황이다. 영화제 서킷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미학으로 보였던 것이 이제는 우선적으로 피해야 할 것이 된다. 한때 자국영화에 할당되었던 작품-기능 자체가 이제 검열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일본영화, 홍콩영화, 인도영화 및 최근의 한국영화처럼 모호하게나마 일종의 장르로서 인지되는 작품-기능을 할당받는 데 성공한 경우라면 사정은 좀 달라질 수도 있다.) 어쩌면, 아도르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진정 현대적인 영화란 과거의 스타일(작품-기능)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제도(분할/할당의 시스템) 자체를 부정하는 영화, 쉬이 승인되지 못할 위험을 감수하면서, 죽음의 곡예를 벌이는 영화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리트윅 가탁[5]의 유작이 된, 아니 차라리 그가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영화라고 해도 좋을 <추론, 토론 그리고 이야기 Reason, Debate and a Story>(1974)처럼.  




[1] 이 영화는 크게 세 파트로 나뉜다. 즉흥연출 방식으로 촬영된 교토 파트, 비디오 다이어리 형식을 차용한 오키나와 파트, 그리고 전통적인 극영화 방식으로 연출된 도쿄 파트가 그것인데, 각각의 파트 사이에 형식적, 주제적 관련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교토 파트와 오키나와 파트가 교차로 진행되다가 도쿄 파트로 마무리된다.

[2] 이 도식을 미국영화에 적용하자면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영화는 언제나 당대의 세계영화가 현대적이 되면서 비워낸 자리를 책임질 것을, 세계영화의 중심으로서의 외부가 될 것을 강요당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영화는 일본영화와 달리 그 스스로를 몇 개의 구별되는 실체들로 분할함으로써 이중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가령 오늘날의 미국영화만을 놓고 보면, 할리우드영화는 현대적 미학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꼭 ‘동시대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동시대의’ 영화로서 받아들여지고(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개념적 도식을 활용하는 현대적 영화미학은 아메리칸 인디펜던트(예컨대 토드 헤인즈의 <아임 낫 데어 I'm Not There>(2007))와 아방가르드 진영의 몫으로 할당되는 식으로 말이다. 일본영화라고 해서 이러한 분할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 분할의 양상은 미학적 측면에서 그리 뚜렷하지 않을뿐더러 아메리칸 인디펜던트와 아방가르드의 그것만큼 국제영화제 서킷에서 인지되고 수용되지 못했다.

[3] 해외의 마니아 커뮤니티로 진입하지 못한 경우 내수용 상업영화에 머물 것이다.

[4] 2009년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에서 소개되어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한 <사랑의 노출 Love Exposure>로 국제적인 성공을 거둔 소노 시온은, ‘스시 타이푼’ 시리즈의 하나로 제작한 <차가운 열대어 Cold Fish>가 2010년 베니스영화제 오리종티 부문에, 2011년엔 그의 차기작 두 편, 즉 <길티 오브 로맨스>가 칸영화제에, <두더지>가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면서, 비로소 국제영화제 서킷에서의 작품-기능을 할당받게 되었다. (그가 감독으로 데뷔한 건 1985년이다.) 하지만 일본영화의 경우, 마니아적인 장르들 자체가 본문 2절에서 언급한 일본영화의 작품-기능에 얼마간 부합하는 점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를 모든 국가영화에 해당되는 사실로 볼 수는 없는데, 가령 필리핀의 게이 로맨스(혹은 게이 포르노)물이 과연 그만의 작품-기능을 할당받는 국제적 장르로 승인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필리핀 영화 르네상스의 주역 가운데 하나인 브리얀테 멘도자가 <마사지사 Masahista>(2005)나 <서비스 Serbis>(2008) 같은 영화에서 게이 포르노의 요소를 끌어오고는 있지만 - 아예 <판타지아 Pantasya>(2007)라는 제목의 노골적인 게이 판타지물을 연출한 바도 있다 - 멘도자가 국제영화제 서킷에서 각광받고 있는 것은 1970년대 리노 브로카의 사회적 리얼리즘 영화들이 안착시킨 필리핀영화의 작품-기능에 부합되는 영화들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지 그런 마니아적 요소 때문이 아니란 점에서 소노 시온의 사례와 성격을 달리한다.

[5] 그는 인도영화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 사트야지트 레이의 영화를 “완벽하게 멸균처리된 궁핍의 리얼리즘”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