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13

첫 비평집 『유령과 파수꾼들』


첫 비평집 『유령과 파수꾼들: 영화의 가장자리에서 본 풍경』(미디어버스, 2018)이 이번 주에 인쇄되어 도착했다. 표지와 목차, 그리고 비평집 말미에 붙인 후기를 올려둔다.




우정을 위한 거리距離

우정의 이미지들
‘영화-편지’의 조건, 또는 ‘영화-편지’는 가능한가
파편들
키노-아이, 사물의 편에서
유령과 파수꾼들

뤼미에르 은하의 가장자리에서

시간의 건축적 경험
고유명으로서의 이미지
떠도는 영화, 혹은 이름 없는 것의 이름 부르기
밀수꾼의 노래: 다시 움직이는 비평을 위한 몽타주
사막은 보이지 않는다: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픽션에 대한 물음들

형상적 픽션을 향하여: 커모드, 아우어바흐, 그리고 영화
천일야화, 혹은 픽션 없는 세계에 저항하기
텍스트 소셜리즘, 모든 이름들을 위한 바다: 박솔뫼의 『머리부터 천천히』
픽션 없는 사진들을 위한 모험, 그리고 흔적에 대한 책임: 장보윤의 ‘다시 이곳에서: 마운트 아날로그’

고다르(의) 읽기

〈영화의 역사(들)〉과 고다르의 서재
〈언어와의 작별〉
고다르의 〈인디아〉(로베르토 로셀리니, 1959) 리뷰에 대한 세 개의 주석: 에세이 영화에 대하여

당신을 바라보기 위하여

내 곁에 있어 줘: 필립 가렐과 고독의 인상학
하나의 시선을 위한 퍼포먼스: 나루세 미키오에 대한 노트

지금 여기의 가장자리

부재의 구조화와 분리의 전략: 〈두 개의 문〉
음각(陰刻)의 기술: 이미지, 재난의 가장자리에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가난한 세대의 놀이: 박병래의 영상작업에 대한 노트
장소 없는 시대의 영화를 위한 에토스: 박홍민의 〈혼자〉와 장우진의 〈춘천, 춘천〉

포르투갈식 작별

시네마-에이돌론: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입문, 혹은 논쟁을 위한 서설
출항을 앞둔 방주의 주인에게 보내는 편지: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의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
신의 숨바꼭질: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의 우화와 노년의 희극
지하로부터의 수기: 페드로 코스타의 〈호스 머니〉
당신의 그림자를 껴안으면서: 페드로 코스타와 후이 샤페즈의 ‘멀리 있는 방’
유령들: 주앙 페드로 호드리게스의 〈성 안토니오 축일 아침〉

부록

영화비평의 ‘장소’에 관하여
암살과 자살
영화제의 검열-효과에 관한 노트


후기後記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부록에 있는 두 개의 글과 홍상수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관한 짧은 에세이, 그리고 「파편들」이라는 글에 담긴 몇몇 단상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2011년부터 2017년 사이에 쓴 것이다.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지만 21세기 첫 십 년 동안 쓴 글 대부분을 배제하고 비교적 최근에 쓴 글들만을 책에 수록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제야 분명히 깨닫게 된 것이지만 주간지나 일간지에 주로 글을 기고하던 시절 나의 영화적 상상은 1990년대 한국 영화문화를 지배하던 정전ㆍ문헌ㆍ태도에 여전히 얽매여 있었다. 『씨네21』이나 『키노』 같은 영화잡지가 창간되고 국제영화제가 본격적으로 출범하던 무렵에 입대해 군복무를 한 덕분에 1990년대 영화문화 특유의 교양주의(“너 이 영화 봤어?”)와 스노비즘(“이런 영화를 보고도 가치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장님이다.”)의 세례를 부분적으로나마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시기의 흔적이 평론가로서 활동한 첫 십 년 동안 내가 쓴 글들에 어떤 식으로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때의 나는 시네필리아란 영화나 영화작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내는 자기장 안에서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는 것이라는 단순한 명제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둘째, 내가 (21세기 영화가 아니라) 영화의 21세기라는 문제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한 것은 2011년 무렵부터다.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동시대 영화의 흐름을 부지런히 따라잡으려 노력하기는 했지만 어떤 감독을 주목해야 한다든지 어떤 나라에서 새로운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든지 하는 피상적이고 저널리즘적인 진단을 넘어 오늘날의 영상문화가 영화라는 것의 개념을 어떻게 바꿔놓고 있는지에 대해 꼼꼼히 따져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2011년 여름 당시 문지문화원사이 기획실장으로 계시던 주일우 선생에게서 새로 창간 준비 중인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합류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때까지 주로 글을 발표해왔던 주간지나 일간지의 지면 제약에서 벗어나 몇 가지 토픽에 대해 나 자신을 설득할 수 있을 때까지 – 물론 이러한 노력이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 긴 호흡의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2012년 여름에는 때마침(?) 당시 일하고 있던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해임되고 한동안 별다른 일이 없이 집에 있게 되면서 그동안 모은 자료를 다시 살피고 메모들을 정리하고 글을 쓰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셋째,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문지문화원사이에서 일하게 된 것을 계기로 내게는 낯설다고 해야 할 여러 예술 분야의 작가, 기획자 및 평론가 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런 분들과의 대화는 정기적으로 열린 편집회의에서 『인문예술잡지 F』의 동료 편집위원 분들과 나눈 대화와 더불어 내게 많은 자극을 주었는데, 영화와 그것에 대한 담론의 자리를 동시대의 예술과 사유라는 보다 폭넓은 맥락 속에서 지속적으로 가늠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나는 비평의 진정한 대상은 작품의 형식, 작품들 간의 관계, 작품을 둘러싼 세상이라는 맥락이라기보다는 이러저러한 작품과 이러저러한 세상을 동시에 가능케 하는 장(場) 자체이며 형식, 관계, 맥락에 대한 논의는 이러한 장에 대한 숙고 없이는 미학주의적 도락이나 아카데믹한 한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동시대에도 여전히 고전적인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이유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칭송하는 일은 쉬운 일이다. 정말 어려운 것은 같은 해(1930년)에 태어난 이스트우드와 고다르는 왜 그토록 이질적인 영화작가가 되었는지, 이러한 외견상의 이질성은 어떤 심오한 보편성의 두 가지 다른 모습일 뿐인 것인지, 그렇다면 그러한 보편성이란 무엇인지, 이들의 영화를 여전히 ‘동시대적’ 영화로 받아들이는 일이 내게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의 질문에 답변하는 일이다.

그간 쓴 글들을 묶어 책으로 내 보자는 미디어버스 임경용 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이 책에 서문 같은 것은 쓰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여기 실린 글 대부분은 언젠가 책으로 묶을 수 있으리라는 고려 없이 씌어진 것들이다. 예외가 있다면 형상적 영화라는 주제를 다룬 「형상적 픽션을 향하여: 커모드, 아우어바흐, 그리고 영화」 정도일 터인데 이 글은 ‘네르발적 산책: 형상적 영화와 방법으로서의 에세이’이라는 제목으로 쓰고 있던 (그리고 여전히 쓰고 있는) 작은 책의 한 장(章)을 계간 『문학과사회』의 요청으로 정리해 미리 공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하간 이 책에 실린 글 대부분은 별다른 안내나 정보 없이 그 자체로 읽힐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었고 따라서 서문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성격이 다소 급해서인지 어떤 책이건 서문을 읽는 것을 질색하는 편이고 때로는 건너뛰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 해도 서문 비슷한 것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이유로 쓴 글들이기는 하지만 한데 모아 놓고 다시 읽어 보니 각각의 글들을 가로지르고 서로 교차하기도 하는 흐름 같은 것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어서, 이런 흐름의 원천에 해당한다 싶은 것은 밝혀두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책에 실을 요량으로 모은 글들 가운데 함께 두면 서문 역할을 할 수 있을 법한 것들만을 따로 빼서 ‘우정을 위한 거리’라는 제목의 파트에 묶어 책머리에 두기로 했다. 

책을 내면서 ‘여러모로 모자란 글’이라든지 ‘부족한 글’이라는 등의 헛된 겸손의 표현으로 자신을 낮추는 일은 불필요하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글을 빼거나 아예 책을 출간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이 책에는 우선 나 자신이 수긍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글은 싣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었군!’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글들만을 골라 실은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그 글을 쓸 당시 내가 갖고 있던 믿음과 태도를 고려할 때 수긍할 수 있다는 것일 뿐 여전히 내가 그러한 믿음과 태도의 총체 속에 머물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몇몇 글들의 경우 지금의 나는 그 글을 쓸 당시의 나와 생각을 달리하며 그 때문에 새로운 글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이를테면 2011년 필름포럼에서 행한 강연 원고를 토대로 쓴 「고다르의 <인디아> 리뷰에 대한 세 개의 주석: 에세이 영화에 대하여」에서 나는 에세이 영화를 하나의 영화적 형식이라는 입장에서 고찰하고 있는데, 지금의 나는 영화적 에세이란 형식은 물론이고 양식ㆍ스타일ㆍ장르도 아니며 무엇보다 하나의 방법 혹은 방법론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 에세이란 형식이 아니라 방법이라는 것은 에세이는 그만의 고유한 대상들을 가진다는 뜻이다.

각각의 글에서 눈에 띄는 오류들은 최대한 바로잡으려 했고 수정하거나 보완한 부분도 적지 않다. 하지만 첫 발표 당시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게끔 수정하는 일은 삼가려 했다. 이 책이 그동안 쓴 글들을 모은 비평집 형태를 취하고 있는 만큼 각각의 글에 어떤 식으로건 기입되어 있는 시간의 흔적을 보존하는 일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평이란 것이 시간의 흔적은 보존하되 나의 흔적은 거의 없는 글이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은 아무려나 호오와 취향에 내맡겨진 아름다운 수필보다는 고대의 언어로 씌어진 수학책이 되기를 꿈꾼다. 

2018년 6월
유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