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6

파편들 사이에서 말하기


(※ 아래 글은 2019년 9월 10일부터 10월 27일까지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미디어펑크: 믿음 소망 사랑》 연계 책자로 발간된 『미디어챕터 II』에 수록된 글이다.)


어떤 영상작품이 ‘파편적(fragmentary)’임을 지적하는 진술은 그 자체로는 별다른 비평적 판단과 결부되어 있지 않다. 바꿔 말하자면, 어떤 영상작품이 파편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작품이 지니는 가치에 대한 논거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비판할 만한 구실도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아르코미술관에서 마련한 전시 《미디어펑크: 믿음 소망 사랑》(2019.9.10~10.27)에 참여한 작가・그룹 가운데 하나인 파트타임스위트의 몇몇 영상작품들을 떠올려 보자. 2016년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의 커미션을 받아 제작한 VR 영상작품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나,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그룹전 《색맹의 섬》(2019.5.17~7.7)에서 처음 선보인 후 합정지구에서 열린 개인전 《에어》(2019.8.31~9.29)에서 구성을 약간 달리해 보여준 <이웃들>은 분명 파편적인 성격을 띤 작품들이다. 하지만 작품의 이러한 성격이 창작자에게 있어서나 관람자에게 있어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를 헤아려보기 위해서는 동시대의 영상작품들을 가로지르는 이중의 힘에 대한 고찰이 필수적이다.


<나는 시끄럽게 죽고 싶다(I Hope I’m Loud When I’m Dead)>(2018)

<우리는 여전히 눈을 감아야만 한다(We Still Have to Close Our Eyes)>(2018)


이러한 이중의 힘은 구심력과 원심력이라는 익숙한 용어에 비유적으로 견주어 고찰해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을 듯싶다. 서로 길항하는 이중의 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 것은, 올해 초 비슷한 시기에 베아트리스 깁슨의 <나는 시끄럽게 죽고 싶다(I Hope I’m Loud When I’m Dead)>(2018)와 존 토레스의 <우리는 여전히 눈을 감아야만 한다(We Still Have to Close Our Eyes)>(2018)를 나란히 보게 되면서부터다. 두 작가는 모두 지금 당장 그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 만큼 혼란스러운 당대의 풍경을 파편적으로 스케치하고 있다. 이들은 언젠가 그들의 영화를 처음으로 접하게 될 각자의 아이들을 위한 선물 혹은 타임 캡슐과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 (두 작품 모두 작가 자신의 아이를 보여주며 끝난다.) 이들의 작품이 어떤 맥락 내지는 환경 속에 놓여 있음은 확실하지만, 그것은 작품에 내재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작품에 내재하는 것들을 통해 곧바로 추론/외삽(extrapolation)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의 영향은 작품을 통해 뚜렷이 느껴진다. 어떻게? 작품을 구성하는 시청각적 요소들 상호 간의 인력(引力)을 능가하는 힘으로, 그리하여 이 각각의 요소들이 서로 조금씩 거리를 두고 떨어져 의미가 모호한 상태로 부유하게끔 하는 파괴적이고 불가해한 힘으로서다. 

이처럼 파괴적이고 불가해한 힘에 대한 체험은, 나로 하여금 ‘영화적’ 영상작품과 ‘미술적’ 영상작품을 상대적이나마 구분해볼 수 있게 했던 이중의 힘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영화와 미술을 막론하고 영상작업에 관심을 둔 창작자들에게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얼마간 양쪽을 오가며 작업하는 이들이기는 하지만, 베아트리스 깁슨은 미술계에 가까이 있는 ‘작가’라면 존 토레스는 영화계에 가까이 있는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영화는, 그리고 영화적이라 할 수 있는 영상작품은 구심적인 특성을 띤 것이었다. 작품을 둘러싼 정치・사회・경제・문화・역사・제도적 맥락, 작품의 형식이나 양식을 자리매김하는 미학적 규준에 대한 지식, 작가의 의도를 가늠케 하는 담론들 같은 작품 ‘외적’ 요인들을 고려한다 해도, 어디까지나 이것들은 관람자의 눈과 귀를 작품의 시청각적 물성으로 향하게 하는 구심력의 벡터를 통해 작품 내부로 수렴되었던 것이다. (영화관이나 블랙박스의 어둠은 이러한 벡터를 활성화하기 위한 장치라고 해도 좋다.) 극영화이건 다큐멘터리이건, 서사적인 플롯을 지닌 작품이건 추상적인 작품이건 간에, 영화적 작품들에서는 구심적이라 할 수 있는 특성이 뚜렷이 감지되곤 했다. 반면 미술적이라 간주되는 영상작품은 심히 원심적이었다. 이제는 현대미술 실천에서 익숙해진 ‘발견된 오브제(objet trouvé)’의 경우가 그렇듯, 작품의 시청각적 물성을 감촉할 수는 있지만 그러한 감촉 자체가 작품이 겨냥하는 바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상작품은 일종의 뜸씨와도 같아서 어떠한 정치・사회・경제・문화・역사・제도적 좌표계에서 고찰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둘러싼 환경이 담론적으로 재구성되게끔 할 수 있다. 구심적 영상작품이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흡수해 물드는 것이라면, 원심적 영상작품은 흘러나가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물들인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적으로 구심적으로만 작동하거나 그 반대로 원심적으로만 작동하는 영상작품은 없다. (영상작품 앞에서 우리는 ‘여하간’ 무언가를 보고 듣거나 ‘여하간’ 무언가를 떠올린다.) 그러나 백남준의 <영화를 위한 선(仙)>(1964)이나 이와 같은 해에 나온 앤디 워홀의 <엠파이어>(1964) 같은 작품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통상적인 영화보다 분명하게 원심적인 특성을 띠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데 어떤 영상작품이 영화적인지 미술적인지는 그 작품이 영사되거나 디스플레이되는 공간의 성격과는 무관하다고 말해도 좋다. 영화관과 전시실이라는 공간은 하나의 영상작품을 더 영화적으로, 혹은 더 미술적으로 보이게끔 만드는 요인이 아니다. 이를테면 빛의 조형성을 극대화한 제임스 터렐이나 올라퍼 엘리아슨의 설치작품들은, 그 공간의 미술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관람객의 주의를 구심적으로 작품을 향해 이끈다는 점에서, 외견상 영화적인 백남준이나 워홀의 작품보다 훨씬 영화적으로 느껴진다. 프랑스 영화감독 클레어 드니가 단편 <컨택트>(2014)에서 엘리아슨의 동명 설치작품을 카메라에 담아내고 이 영화의 클립 일부를 그녀의 첫 SF 장편영화 <하이 라이프>(2018)에서 재활용할 때, 여기엔 영화관과 전시실이라는 공간의 차이와 무관하게 서로 교통 가능한 작품의 동종성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이다.


<컨택트(Contact)>(2014)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쯤에서 밝혀 두자면, 나는 어떤 영상작품이 영화적인지 미술적인지를 판별해낼 기준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구심력/원심력이라는 대립항을 끌어들인 것이 아니다. 서로 길항하며 모든 영상작품을 가로지르는 이 이중적 힘의 성격이 최근에 의미심장하게 변화했고 또 여전히 변화하고 있는 중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오늘날에는 구심력의 벡터와 원심력의 벡터가 분리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팽팽하게 얽혀 있는 작품들이 적지 않아서, 이 경우 구심력/원심력이라는 대립항을 끌어들이는 것은 서로 다른 힘의 (종종 0이 될 뿐인) 벡터합을 확인하는 작업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중적 힘의 변화, 정확히는 원심력의 변화가 초래한 구심력의 변화에 주목하게 된 것은 앞서 언급한 베아트리스 깁슨과 존 토레스의 작품들 때문이다. 원심력이라는 것이 작품으로부터 그 바깥으로 향하는 것이긴 해도, 이 또한 구심력과 마찬가지로 작품을 하나의 ‘오브제’이게끔 하는 조형력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구심적이건 원심적이건 간에 영상작품에서 작가는 여전히 힘의 조정자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시끄럽게 죽고 싶다>와 <우리는 여전히 눈을 감아야만 한다>와 같은 작품들은, 작품을 오브제가 아닌 일종의 ‘잔해(debris)’로 만드는, 작가의 통제를 벗어난 파괴적인 힘으로서의 원심력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다.

이제 원심력을 조정하는 이는 작가가 아니다. 문제는 이처럼 파괴적인 힘으로서의 원심력이 백남준이나 워홀의 작품에서처럼 창작자에게서 기인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한편으론 정치・사회・경제・문화・역사・제도적 맥락에서 그 동인(動因)을 파악해내기도 힘들 만큼 비인격적(impersonal)으로 다가온다는 데 있다. 깁슨과 토레스의 작품에서, 취임연설 중인 도널드 트럼프의 목소리가 삽입되거나(<나는 시끄럽게 죽고 싶다>)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모습이 담긴 영상클립이 삽입되는(<우리는 여전히 눈을 감아야만 한다>) 경우에도, 이러한 청각적・시각적 요소는 작품에 산재한 파편적 단편들에 맥락을 부여하는 정치적 지표나 단서라기보다는 여느 단편들과 마찬가지로 무질서한 공통의 표면에 무심코 던져진 범용한 단편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비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학적으로 급진적인 오늘날의 영상작가들은, 사태의 맥락을 가늠하기 힘들 만큼 부조리하게 펼쳐지는 동시대의 풍경이 가하는 압력에 눌린 나머지, 자신들의 작품이 부서져 ‘잔해’가 되도록 방기하는 데서 창작의 윤리를 재발견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까? 학술행사를 방불케 하는 각종 초청 강연・세미나・대담이 종종 전시 작품들을 압도하곤 하는, (비평적) ‘담론의 외주화(outsourcing)’라 해도 좋을 동시대 미술계의 관행을 떠올려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파편들 앞에서 망연자실해 있는 작가를 대신해 선생님들이 고견을 들려준다. (때로 이들은 작가의 다음 작업을 위한 ‘멘토링’을 제공하기도 하는데 이 표현이 조금 꺼림칙하다면 ‘콜라보레이션’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하는 것도 가능하다.) 문제는 이런 담론들이 종종 파편화된 잔해의 폐허 주위를 거닐면서 메타적 위치에서 상황을 진단하는 데 머문다는 데 있다. 이때 전시와 작품은 그 자체로 ‘다크 투어리즘’의 대상이 된다.

기묘하게도 깁슨과 토레스의 작품은 무언가를 방기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보다는 파편들 가운데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치열한 싸움 끝에 남은 잔해를 모아 봉인한 타임 캡슐 같은 이들의 작품 곳곳에서, 목소리가, 분명히 어떤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싸움이라면 어떤 싸움을 말하는 것인가? 물론 비인격적인 파괴력으로 화한 원심력에 대항하는 싸움이다. 그러나 이 싸움은 작품을 구성하는 시청각적 요소들 상호 간의 인력을 회복하는 구심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 북(Le livre d’image)>(2018)


이와 관련해서는 장-뤽 고다르의 근작 <이미지 북(Le livre d’image)>(2018)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영화를 보기 전에 제목만 들었을 때는, 이미지(image)라는 단어를 굳이 단수로 써서 ‘그림책(livre d’images)‘과 차별화하고 있는 것도 그렇거니와, 말라르메적 의미의 ‘대문자 책(Livre)’과 관련된 아카이브적 프로젝트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고다르의 기획은 다른 방향을 겨누고 있다. 그가 겨누는 대상은 저 파괴적인 힘의 원천이 되는 시청각적 ‘데이터들의 기지(data-base)’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모든 사물과 사람과 사건을 ― 고다르와 그의 작품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 무작위적으로 포괄하면서 말라르메적 책의 이상을 허위적으로 구현하는 거짓 아카이브의 형식을 띤다. 데이터-베이스는 모든 것을 수집하고, 망라하고, 저장하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혹여 무언가가 말해질 경우, 그것은 삽시간에 다시 데이터-베이스의 항목들 가운데 하나로 배치되어 그 특이성을 잃고 만다. <이미지 북>에서 고다르의 구심력은 데이터-베이스의 질서를 교란하고 흐트러뜨리는 힘인 동시에, 그 싸움의 과정에서 나온 파편들을 다시 작품이라는 공간으로 모아 특이성을 부여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 파편들끼리의 연관은 여전히 분명치 않지만, 파편들의 특성에 따라 다섯 개의 장(章)으로 ‘잠정적으로’ 분류되어 있다. 

고다르는 <이미지 북>의 종반부에서 작가 페터 바이스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것도 우리가 희망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우리의 희망을 바꿔놓지는 못하리라.” 김응수의 열다섯 번째 장편영화 <스크린 너머로>(2019)는 정확히 고다르와 같은 믿음을 공유하는 작품이다. 여기서 그는 신원 미상의 한 화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도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믿는다.” 한 남자와 두 여자,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자의 독백을 담은 화면상 텍스트(on-screen text)들이 서로 교차되는 가운데, 우리는 (남자의 말대로라면) “영화라고 말할 수 없는 영상의 어수선한 배열”을 보게 된다. 혹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한 남자와 두 여자가 한 편의 영화를 본다. ‘나의 즐거운 일기’라는 제목이 붙은 이 영화는 어느 산 풀숲에 버려진 누군가의 스마트폰에 담긴, 수년에 걸쳐 모은 영상과 메모 및 음악을 편집한 것이다. 세 남녀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 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때로 영화 속의 공간을 거닌다. 우리는 <스크린 너머로>에서 감독 자신이 아이폰 내장 카메라로 수년에 걸쳐,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밤낮으로 촬영한 것이 분명한 풍경들의 ‘배열’을 보게 되는데, 이 가운데 가장 여러 차례 보게 되는 것은 멀리 월악산이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서 찍은 충주호의 풍경이다. 각각의 쇼트는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모호하고, 서로 유사하기는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몽타주의 논리 안에 포섭되지도 못한다.


<스크린 너머로>(2019)


고다르의 <이미지 북>이 여러 개의 그림-파편들을 모은 그림책이 아니라 파편들 사이에서 도래할 ‘하나의’ 이미지를 위한 책인 것처럼, 김응수의 <스크린 너머로>는 충주호의 풍경이 담긴 ‘영상의 어수선한 배열’ 가운데서 다시 가능한 영화를 모색하는 비영화(non-cinema)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고다르의 <이미지 북>은, 그리고 어느 미지의 인물이 풀숲에 남겨두고 떠난 스마트폰에 담긴 시청각적 기록들을 재배열한 (것으로 가정된) 김응수의 <스크린 너머로>는, 작가가 자신의 아이에게 물려주는 타임 캡슐과도 같은 깁슨이나 토레스의 작품과 분명히 동시대적 강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다르는 “현실에서는 오직 파편만이 진정성의 흔적을 띤다고 브레히트는 말했다”고 지적한다. 파편을 부서진 무언가의 잔해가 아니라 그 자체로 진정한 무엇으로 보기 위해서는 아이의 눈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미지 북>은 여전히 하나의 그림책이며, 김응수와 깁슨과 토레스의 작품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러한 작품들은 일종의 ‘생전의 유품(Nachlaß zu Lebzeiten)’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